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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07
    괴기한 청년들, 김수영의 죽음을 '기념'하다.
    redbrigade
  2. 2008/09/07
    "썩어빠진 대한민국 ... 차라리 황송하다"(1)
    redbrigade

괴기한 청년들, 김수영의 죽음을 '기념'하다.

  • 등록일
    2008/09/07 15:10
  • 수정일
    2008/09/07 15:10

이 시집을 보면 먼저 의아한 게 눈에 띈다. 그건 부제로 '김수영 40주기 기념 시집'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있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해서, 죽은 날을 기리는 건 기념이 아니라 '추모'가 맞다. 하긴 '괴기한 청년'들이 그의 죽음을 '추모'까지나 해 줄 수 없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보면 일견 이해가 가기도 한다. 사실 김수영은 현대 한국 젊은 시인들, 이른바 68세대(프랑스 68이 아니라 김수영의 몰년인 68)에게 요상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이번에 이 사실을 처음 알았다. 여기 실려 있는 어느 시인 말마따나 이 시인들이 "자기가 잘못 놓은 주사에 ... 엄살을 피우"는 게 아니라면 이들 시인들이 김수영에게 진 빚은 일종의 시적 동력으로서의 '고통' 정도가 되겠다. 아니면 시기, 질투? ('질투는 시인의 힘'이지 않은가?)

 

여는 글에서 편집자인 서동욱이 말하고 있다시피 이 시집은 흔한 김수영에 대한 회고조의 객설은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들의 사금파리같은 시편들이 바로 이어진다. 난 최근에 본 시선집이나 동인지 형식의 시집 중에서 이만한 내용을 가진 시집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가지, 읽으면서 문득문득 빛나는 시편들이 가슴을 치고 지나감에도 불구하고 끝내 '혐의'의 끈을 놓지 못한 것은 내가 의심이 너무 많은 탓일까? 그러니까 과연 여기 모여 있는 이 시인들(난 김수영 시인의 사진 아래로 나란히 놓인 서동욱, 김행숙이라는 두 편집자의 '심각한' 아우라를 단박 알아 챘다)이 김수영을 정치적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있지는 않나 하는 것 말이다. 과연 이들이 이 시집을 통해 모인 후, 다시 '자신의 김수영'과 칩거의 동굴에 들어 가서 하늘에 떠 가는 헬기를 보며 서글퍼 할 것인가 말이다. 난 이 혐의를 끝내 거두지 못했다. 이들은 지금 어디에서 무얼 하며(혹시 문단정치?) 수작하고 있는가?

부디 술 먹은 뒤 적당한 음담패설을 하면서 헤어졌기를 바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시인들 각자의 시가 수준 높은 것임에 반해, 여러 군데에서 김수영을 향한 낯 간지러운 찬사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나 자신도 김수영을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여기 쓰여진 몇몇 찬사는 시인이 가져야 할 선배에 대한 자세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지울 수 없다. 이를 테면 무릇 젊은 시인이라는 건 선배 시인들 글에 엿먹일 준비가 충분히 되어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것이다. 김수영이 그랬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찬사 몇마디를 쏘고 스스로 멜랑콜리, 자기비하에 빠진 것처럼 보였던 그 시인들보다 황병승의 포복절도할 패러디가 더 값져 보인다. 그는 김수영의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다"를 "택시 타고 집/택시 타고 집"이라는 두 행의 뒤샹풍 글귀로 마무리 한다. 크크크 재치덩어리가 아닐 수 없다.

 

하여간 이 시집은 수작들의 모음임에는 틀림 없다. 마지막으로 읽으면서 시가 아니라(시에서 빛나는 구절들은 따로 정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시인들이 덧붙인 산문이 감동적인 것이 있었는데, 오은 시인의 '시인론'(제목을 이렇게 붙이지는 않았다, 물론)이 가장 뇌리에 남는다.

 

"다소 서툴더라도 문장 하나를 읽었을 때 누가 썼는지 확연히 알 수 있는 시가 있는 반면, 진한 울림을 주더라도 글쓴이의 흔적을 파헤치기 어려운 시도 있다. 전자가 자기 확신과 긍정에서 얻어지는 것이라면, 후자는 오랜 기간의 습작 훈련으로 얻어질 수 있는 일종의 스킬이다. 상당수의 시인들은 후자에 천착하면 전자가 저절로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매 시대마다 잘 쓴 시는 넘쳐 나지만, 글쓴이의 땀내가 느껴지는 시를 찾기는 쉽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세련을 제련할 수 있을까. 근사한 어휘를 늘어놓고 펀치라인을 곳곳에 배치한다고 해서 언어를 대하는 물리적 태도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
요컨대 떨림은 순간이고 섬광은 찰나다. 이런 점에서 결국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그것은 그림자처럼 신체에서 결코 분리될 수 없고 지문처럼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 마침내 남는 것은 '스타일'이다. 거기에는 땀이 절절히 베여 있고 말이다. 그게 아니면 글도 뭣도 아닐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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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어빠진 대한민국 ... 차라리 황송하다"

  • 등록일
    2008/09/07 00:50
  • 수정일
    2008/09/07 00:50

김수영이 죽은지 40년이 지났다. 1968년 6월 16일인가가 그의 기일이니까, 얼추 반세기가 지난 셈이다. 대표작인 [거대한 뿌리]에는 빛나는 구절들이 많은데, 그 중 이런 구절이 있는 거다. "이 우울한 시대를 파라다이스처럼 생각한다/썩어빠진 대한민국이 괴롭지 않다 차라리 황송하다."  419가 미완으로 끝나고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했는데, 그게 유명한 "혁명은 안되고 방만 바꾸었다"라는 구절이다.

 

오늘, 김수영을 거의 10여년 만에 우연찮게 다시 대하고서, 난 그가 비평계에 던졌던 또 하나의 화두를 생각해 본다. "풍자냐, 자살이냐"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 같은 먹튀가 이 좆같은 시절의 대한민국에서 자살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풍자'라는 게 필요한 거다. 최소한 청와대 아저씨 "좆대강이나 빠"(김수영)는 누구누구같은 주구가 되지 않으려면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 너무나 '황송'했다. 서울역 앞, 고공 농성 중인 KTX 승무원들을 지키고 서 있던 바퀴벌레떼들을 보고도 너무나 황송했고, 국정원법, 통비법 개악하고, 테러라고는 없는 나라에 테러방지법을 만든다고 너무나 숭고한 개지랄을 떠는 모습을 보고도 너무나 황송했으며, 9일날 지멋대로 '대화'하겠다고 발광하는 모습을 보고서도 너무나, 눈부시게 황송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앞으로 한 몇 년은 더 황송할 일이 날마다, 일신우일신, 켜켜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서도 참으로 황송했다. 나는 인왕산 쪽을 향해 오체투지하며 외친다. "황공무지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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