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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진리'에 대하여 4

  • 등록일
    2011/01/09 17:35
  • 수정일
    2011/01/09 17:35

26. 지젝이 레닌을 평하면서 말한 ‘실재에 대한 열정’(『레닌 재장전』Renin Reloaded)은 이른바, 피타고라스-제논이 갑론을박하는 존재론의 평면이 정치의 평면으로 대체된 결과라고 보인다. 레닌에게 실재에 대한 열정은 1917년 혁명이 강제하는 정세 속에서 헤겔의 『대논리학』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이러한 검토 가운데 레닌은 당시의 러시아 지식인들의 플레하노프류의 속류 유물론을 비판하게 되는데, 사실 이러한 작업은 이론적 투쟁의 장에 영향을 미쳤다기 보다, 이후 전개되는 러시아의 ‘실재’ 즉, ‘혁명’에 영향을 주게 된다. 하지만 레닌 자신이 외쳤다시피(“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른다.” “오늘, 아니 지금 당장 혁명을 준비해야 한다.”) 헤겔로부터 착안한 유물론의 새로운 관점이 어떤 식으로 정세를 추동할 것인지 그 자신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그가 ‘무지’의 상태로 남겨 둔 그곳, peras가 아니라 apeiron이 창궐하는 그 시점에 그는 그 온전한 의미에서, ‘야만적 별종’(Savage Anomaly, 네그리)으로 변한다. 멘세비키들을 종용하면서, 때로 그들을 탄핵하면서 레닌은 스위스로부터의 개입을 시도하는 바, 이때 그가 외쳤던 것은 ‘모든 권력을 볼세비키에게!’다. 이 순전한 권력의지는 실재의 apeiron을 주체성의 내재평면으로 불러 오는 주술과 같다. 이 경우 레닌은 1848년 마르크스가 호명한 그 ‘프롤레타리아트’를 답습한다. 그리고 이 개입이야말로 레닌이 파악한 헤겔의 정세에 대한 개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헤겔을 유물론적으로 독해하면서 레닌은 부정성이 결코 ‘정신’ 안으로 수렴하는 것을 방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정성은 바로 실재의 혼돈 자체, 정세 자체로 ‘개입’하도록 강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27. 이러한 것이 바로 실재에 대한 열정을 노정하는 주체, 혁명적 주체라고 불릴 수 있다. 주의해야 할 것은 이러한 레닌주의적인 ‘개입’을 통해 사유의 의지가 도달하는 것이 결코 실재 자체는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 조건은 다만 어떤 정치적 주체성의 생산을 당면한 임무로 제출하는 것일 뿐이고, 그 조건을 독해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임무를 자각한 계급과 그 계급의 ‘전위’가 탄생하는 것이다.

 

28. 그러나 ‘개입’은 분명 하나의 금(crack)이다. 일상성을 횡단하는 주체가 만들어내는 이 금은 따라서 일상적 주체 자신을 완전히 일신한다. 혁명적 주체가 탄생하는 과정은 ‘개입’의 진리치가 얼마나 강렬한가에 달려 있다. 보통 이 개입의 진리치는 그때그때마다의 ‘슬로건’으로 정식화된다. 레닌의 ‘슬로건’에 대한 논의(On Slogans, 1917)는 여러 사람들에 의해 분석되고, 변주되었지만 여기서는 들뢰즈-가타리의 그것을 옮겨 보도록 하자.

 

화행론은 언어의 정치학이다. ... 레닌의 텍스트 「슬로건에 관하여」(1917)에서 출발해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일어난 레닌 고유의 언표 유형의 형성을 좋은 예로 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 텍스트는 이미 하나의 비물체적 변형이었다. 즉 이 텍스트는 프롤레타리아의 조건이 몸체로서 주어지기도 전에이미 대중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도출해 내었던 것이다. 제1차 인터네셔널은 천재적인 솜씨로 새로운 유형의 계급을 “발명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하지만 레닌은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단절하기 위해서 다시금 또 하나의 비물체적 변형을 발명 또는 선포했다. 이 변형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서 언표행위라는 배치물로서의 전위를 뽑아내고 다시 이것을 “당”에, 변별적 몸체로서의 새로운 유형의 당에 귀속시켜 버렸다. 비록 이 변형은 관료주의 특유의 잉여 체계로 전락해버렸지만 말이다. 이는 레닌의 대담한 도박인가? 레닌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슬로건은 <혁명>의 평화적 전개를 위해 2월 27일에서 7월 4일까지만 유효하며, 전쟁 상태에서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고 선언한다. 평화에서 전쟁으로의 이행은 대중으로부터 지도적 프롤레타리아로 가는 데 만족하지 못하고 프롤레타리아로부터 지휘하는 전위로 가려고 하는 이러한 변형을 내포했던 것이다. 정확히 7월 4일에소비에트 권력은 끝난다. 이것을 외부적인 상황 탓이라고 얘기할 수도 있다. 전쟁, 레닌을 핀란드로 도망가도록 몰아넣었던 봉기 등. 그렇다고 해도 비물체적인 변형이 귀속되는 몸체, 즉 <당> 그 자체가 조직화되기 이전인 7월 4일에 비물체적 변형이 언표되었다는 점은 사실이다. “모든 개개의 슬로건은 특정한 정치적 상황이 갖는 특수성들의 총체로부터 연역되어야 한다.” 이러한 특수성은 언어학이 아니라 정치로 귀착될 뿐이라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정치가 얼마나 철저하게 안으로부터 언어에 작용하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 명령어(=슬로건)가 바뀌자마자 어휘뿐 아니라 구조며 모든 요소들을 변주시킨다. 한 유형의 언표는 그것이 화행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만 평가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 유형의 언표는 그 언표의 암묵적 전제, 그 언표가 표현하는 내재적 행위들이나 비물체적 변형과 관련해서만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직관은 문법성을 판단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 자체와 관련해서 언표행위의 내적 변수들을 평가하는 데 있다.(질 들뢰즈, 펠릭스 가타리, 『천 개의 고원』, 김재인 역, 새물결 2001, pp. 161-163)

 

29. 여기서 들뢰즈-가타리는 슬로건의 특성을 ‘명령’으로 파악한다. 그것은 정세를 정확하게 파악한 후 제출되는 것이면서도, 그 정세의 확고한 어떤 주체를 ‘선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나의 효과가 달성되는데 그것은 그 주체(프롤레타리아트)의 탄생이다. 이는 우리 식으로 말해서 ‘금’으로서의 개입을 통해 혁명적 주체가 탄생하는 데 있어서 언어적 전략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말해 주는 일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언표주체가 언표행위주체를 생성시키는 이 과정은 일종의 실재의 탄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30. 하지만 이것은 ‘진리’와 얼마나 먼 것인가? 사실상 1917년의 러시아는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진리’를 얼마나 구현하는 것인가? 과연 1917년의 프롤레타리아와 2011년의 프롤레타리아, 러시아와 남한의 그것은 또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 여기서 진리는 다시 적대의 전선을 완전히 옮겨 놓는다. 언제나 허방인 이 진리, 우리가 실재를 발견했다고 소리치는 순간 탈주하는 이 진리의 자리는 하나의 수렴점으로 다가가는 어떤 입자라기 보다, 호이겐스의 파동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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