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다시 '진리'에 대하여 3

  • 등록일
    2010/12/29 17:02
  • 수정일
    2010/12/29 17:02

18.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말했던 바와 같은 진리의 ‘현전’(Anwesen)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화’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계기를 통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공간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이고, 그때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 안에서 단순히 나타나는(present)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일종의 ‘의사-현실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타나는 대상, 또는 사건으로서의 빈자리는 결국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전과 이 본질의 드러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19. 하이데거라면 본질의 탈은폐와 그것의 물러남을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사건’(Ereignis)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본질은 하나의 역사성으로서 그것이 분기하는 그 지점에서 현존재를 통해 드러난다는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진정한 현실성이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운데 아무리 자신의 사유의 의지를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우연적으로 닥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유의 의지가 횡단하는 일상 가운데 하나의 ‘허방’이다. 사유는 허방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유는 ‘죽음’이라는 단일한 시점을 향해 가는 것(Sein zum Tode)이 아니라 곳곳에 널린, 움직이는 그 ‘사건’의 허방을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산포된 필연성이며, 확률적이지만 동시에 삶의 내재성 안에 편재한 충만함이다.

 

20.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일상의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거기서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고 풍경들을 접하며 상이한 속도와 강도를 통해 그것들과 조우한다. 하지만 본질은 이러한 조우들 틈에 입을 벌린 금(crack)과 같다. 우리가 본질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 금을 찾아다니는 동시에 이 금과 만나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금과 조우한다면 금은 우리를 단숨에 빨아들일 것이고, 그 자리에 커다란 허방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들어온 자리를 잃어버린 채 강물 밑, 얼음 밑을 숨이 막힌 채 뒤집어진 채로 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진리는 본질의 드러남이라는 이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내 보이지만, 그것은 더욱이 우리가 사유의 죽음을 무릅쓰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1. ‘실재’는 이 숨 막힌 순간에 찾아온다. 현실성의 강도가 0으로 육박해 가는 시점은 바로 현실성이 실재성과 옷을 바꿔 입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진리는 현실성의 안감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간다. act의 속도과 밀도가 형해화되는 이 순간.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0도에 가깝게 만드는 그래서 그 죽음의 실재를 통해 실재를 직관하면서, 진리를 상실하는 찰나의 과정이다.

 

22. 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어쨌든 이 유비로부터 나는 실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길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은 현실성에 다가가기 위한 우회로(해석학적 우회?)이며, 본질의 드러남은 실재성에 다가가기 위한 또 다른 우회로(신학적 우회?)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실재성은 진리가 아닌 어떤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진리가 실재성을 미끄러져 나가는 무엇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3. 오래된 비유를 하나 더 들자.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산술적으로 표현했다. 이를테면 선분 AB는 하나의 일정한 단위, 즉 1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산술적인 덧셈을 통해 단위-길이를 구성한다. 따라서 1+1+1=3이라는 셈은 하나의 단일한 선분 AB 내부에 a-b-c-d라는 연속된 구성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된’이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피타고라스가 산술을 기하에 적용할 때 적시한 것은 바로 도형의 ‘연속성’(continuity)이 정확하게 산술적 ‘단위’(unit)에 대응(correspondence)한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는데, 그것은 오직 그러할 때만(if and only if), 즉 ‘1이 a-b에 대응할 때, 오직 그러할 때만’이라는 것이다.

 

24. 하지만 여기에 일정한 비정합성이 존재한다. 제논은 정확하게 피타고라스의 이 지점을 공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기하학적 선분 AB는 불연속적인 산술적 단위인 1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AB는 그 안에 무한분할 가능한 잔여(remainder)를 남기며 그것은 결코 1과 일치할 수 없다. 사실상 피타고라스조차 이러한 비정합성을 자신의 수론에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그 유명한 정리에서 루트2를 정의할 때 간취한 것이다. 제논은 피타고라스가 간취한 이 논의를 존재론으로 끌어와서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으로 활용한 것이다.

 

25. 그런데 이 대립적인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에 있다기 보다, 그 둘이 실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경우 루트2의 존재는 그 ‘일치’를 보증하는 연산자였던 반면, 제논에게 그것은 ‘일치’를 보증하지 못하는 결정적 증거였던 셈이다. 즉 전자는 ‘유한’의 관점, 즉 peras(한도, 한계)의 관점에서 ‘무한’을 바라 본 것이며, 후자는 무한 그 자체를 긍정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는 피타고라스에게도 제논에게도 있지 않다. 오히려 실재는 하나의 선분 AB이며, 또는 그것을 분할하거나 1에 대응시켜 가는 사고과정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운동’이며, 또한 그 운동의 속도를 0에 접근시키느냐, 아니면 식별불가능한 방식으로 활성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0에 접근시켰을 때 실재는 진리의 형식을 띄고 나타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는 ‘접근’의 속도를 무한히 증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공백으로 남겨 두게 된다. 반면, 식별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그것을 운동시킨다면 진리는 어느 순간 실재 ‘자체’가 되겠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문제들은 이 실재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목숨을 건 도약’이거나 ‘전쟁터’로 비춰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