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10/12

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12/29
    다시 '진리'에 대하여 3
    redbrigade
  2. 2010/12/23
    다시 '진리'에 대하여 2
    redbrigade
  3. 2010/12/12
    다시 진리에 대하여 1
    redbrigade
  4. 2010/12/11
    이것이 부정의다
    redbrigade
  5. 2010/12/11
    2010/12/11
    redbrigade
  6. 2010/12/08
    2010/12/08
    redbrigade

다시 '진리'에 대하여 3

  • 등록일
    2010/12/29 17:02
  • 수정일
    2010/12/29 17:02

18. 하지만 이것은 애초에 말했던 바와 같은 진리의 ‘현전’(Anwesen)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화’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의 정치적 계기를 통해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적 공간 안에서도 발생하는 것이고, 그때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 안에서 단순히 나타나는(present) 것이다. 동시에 이것은 일종의 ‘의사-현실화’라고 부를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나타나는 대상, 또는 사건으로서의 빈자리는 결국 사라짐으로써 자신의 본질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전과 이 본질의 드러남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19. 하이데거라면 본질의 탈은폐와 그것의 물러남을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사건’(Ereignis)이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하이데거의 본질은 하나의 역사성으로서 그것이 분기하는 그 지점에서 현존재를 통해 드러난다는 한계를 가진다. 하지만 진정한 현실성이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운데 아무리 자신의 사유의 의지를 발휘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우연적으로 닥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유의 의지가 횡단하는 일상 가운데 하나의 ‘허방’이다. 사유는 허방을 향해 돌진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사유는 ‘죽음’이라는 단일한 시점을 향해 가는 것(Sein zum Tode)이 아니라 곳곳에 널린, 움직이는 그 ‘사건’의 허방을 겪는 것이다. 이것은 산포된 필연성이며, 확률적이지만 동시에 삶의 내재성 안에 편재한 충만함이다.

 

20. 우리는 마치 살얼음 위를 걷듯이 일상의 한가운데를 걸어간다. 거기서 무수한 타자들을 만나고 풍경들을 접하며 상이한 속도와 강도를 통해 그것들과 조우한다. 하지만 본질은 이러한 조우들 틈에 입을 벌린 금(crack)과 같다. 우리가 본질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이 금을 찾아다니는 동시에 이 금과 만나야 한다. 만약 우리가 이 금과 조우한다면 금은 우리를 단숨에 빨아들일 것이고, 그 자리에 커다란 허방을 마련할 것이다. 우리는 들어온 자리를 잃어버린 채 강물 밑, 얼음 밑을 숨이 막힌 채 뒤집어진 채로 떠 다녀야 할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진리는 본질의 드러남이라는 이 폭력적인 과정을 통해 자신을 내 보이지만, 그것은 더욱이 우리가 사유의 죽음을 무릅쓰고 견뎌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21. ‘실재’는 이 숨 막힌 순간에 찾아온다. 현실성의 강도가 0으로 육박해 가는 시점은 바로 현실성이 실재성과 옷을 바꿔 입는 순간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진리는 현실성의 안감에서 떨어져 어디론가 흘러간다. act의 속도과 밀도가 형해화되는 이 순간. 이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0도에 가깝게 만드는 그래서 그 죽음의 실재를 통해 실재를 직관하면서, 진리를 상실하는 찰나의 과정이다.

 

22. 하지만 이것은 어떤 특별한 체험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 어쨌든 이 유비로부터 나는 실재성과 현실성이 서로 길항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정치적 사건은 현실성에 다가가기 위한 우회로(해석학적 우회?)이며, 본질의 드러남은 실재성에 다가가기 위한 또 다른 우회로(신학적 우회?)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실재성은 진리가 아닌 어떤 것을 통해 드러나는 것인가? 이 질문은 또한 진리가 실재성을 미끄러져 나가는 무엇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3. 오래된 비유를 하나 더 들자. 피타고라스는 기하학적인 도형들을 산술적으로 표현했다. 이를테면 선분 AB는 하나의 일정한 단위, 즉 1로 표현될 수 있는데, 이는 산술적인 덧셈을 통해 단위-길이를 구성한다. 따라서 1+1+1=3이라는 셈은 하나의 단일한 선분 AB 내부에 a-b-c-d라는 연속된 구성체를 형성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연속된’이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 피타고라스가 산술을 기하에 적용할 때 적시한 것은 바로 도형의 ‘연속성’(continuity)이 정확하게 산술적 ‘단위’(unit)에 대응(correspondence)한다는 가정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하나의 단서가 붙는데, 그것은 오직 그러할 때만(if and only if), 즉 ‘1이 a-b에 대응할 때, 오직 그러할 때만’이라는 것이다.

 

24. 하지만 여기에 일정한 비정합성이 존재한다. 제논은 정확하게 피타고라스의 이 지점을 공격한 것이다. 다시 말해, 연속적인 기하학적 선분 AB는 불연속적인 산술적 단위인 1에 대응할 수 없다는 것이다. AB는 그 안에 무한분할 가능한 잔여(remainder)를 남기며 그것은 결코 1과 일치할 수 없다. 사실상 피타고라스조차 이러한 비정합성을 자신의 수론에서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존재론적으로 긍정할 수는 없었다. 이는 피타고라스가 그 유명한 정리에서 루트2를 정의할 때 간취한 것이다. 제논은 피타고라스가 간취한 이 논의를 존재론으로 끌어와서 불연속성에 대한 비판으로 활용한 것이다.

 

25. 그런데 이 대립적인 이 논의에서 중요한 것은 그들이 존재론적으로 상이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에 있다기 보다, 그 둘이 실재를 보는 관점에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피타고라스의 경우 루트2의 존재는 그 ‘일치’를 보증하는 연산자였던 반면, 제논에게 그것은 ‘일치’를 보증하지 못하는 결정적 증거였던 셈이다. 즉 전자는 ‘유한’의 관점, 즉 peras(한도, 한계)의 관점에서 ‘무한’을 바라 본 것이며, 후자는 무한 그 자체를 긍정하려고 한 것이다. 여기서 실재는 피타고라스에게도 제논에게도 있지 않다. 오히려 실재는 하나의 선분 AB이며, 또는 그것을 분할하거나 1에 대응시켜 가는 사고과정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운동’이며, 또한 그 운동의 속도를 0에 접근시키느냐, 아니면 식별불가능한 방식으로 활성화시키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0에 접근시켰을 때 실재는 진리의 형식을 띄고 나타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진리는 ‘접근’의 속도를 무한히 증가시킴으로써 자신의 자리를 공백으로 남겨 두게 된다. 반면, 식별불가능성의 영역으로 그것을 운동시킨다면 진리는 어느 순간 실재 ‘자체’가 되겠지만 그와 동시에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모든 문제들은 이 실재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목숨을 건 도약’이거나 ‘전쟁터’로 비춰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다시 '진리'에 대하여 2

  • 등록일
    2010/12/23 16:50
  • 수정일
    2010/12/23 16:51

 16. 정치에 있어서 진리는 하나의 획득 가능한 권력이지만 스피노자가 예견한 바와 같이 그것은 한 편에서는 potentia이고 다른 한 편에서는 potestas다. 물론 여기서 보다 근원적인 것은 전자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전자의 잠재성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한도 내에서의(때로 그것은 무한한 폭력으로 발현되기도 하지만-혁명적 폭력의 문제) potestas가 필요하다. 라클라우(Laclau)가 말하는 “빈자리의 생산”으로서의 권력은 이런 현실화 과정 내에서 2차적인 actuality를 가능하게 한다. 만약 정치적 진리가 이러한 빈자리의 생산을 통해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라면, 역으로 그것은 또한 스스로가 빈자리를 남겨두고 물러남으로써 권력을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이 지점에서 바로 ‘진리의 적대적 성격’이 탄생한다. 즉 정치적 진리는 결코 단선적인 ‘하나’의 과정 내에서 완결적으로 흐르지 않으며, 언제나 적대의 한편과 다른 한편에 빈자리를 실어 나름으로써 획득된다(또는 놓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존재론적인 유예가 아니라 적대의 양 진영이 진리가 가진 폭력적 특성을 일종의 정치적인 ‘공세’로서 활용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깊은 의미에서 이러한 빈자리의 ‘물림’(withdraw)은 정치적 진리가 어떤 획득 불가능한 ‘상황’과 ‘주체’를 가정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발생한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그 상황은 바로 1871년 파리와 1980년 광주에서 ‘일시적으로’ 획득된 것이기도 하고, 이런 저런 시위들 안에서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 상황과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이고, 또 ‘빈자리’이지만 더불어 ‘덧없음’(헬라스적 의미에서)은 아니다. 따라서 정치적 진리란 다름 아니라 적대의 한 주체, 특히 기존의 권력으로서의 potestas가 아니라 하나의 잠재적 계급의 혁명적인 형성과 그 폭력적 과정으로서의 potentia가 권력을 장악하고, 또 potestas 자체를 억압할 때 실현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가 그의 11번째 테제를 통해 말한 ‘해석’(=potestas)과 ‘변혁’(=potentia)의 상관관계라고 할 것이다.

 

17. 만약 ‘사건’의 진리가 올바르게 관철되기 위해, 정치권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것은 이 사건 자체의 ‘매듭’을 확실히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요청한다. 이를테면 1936년 당시 프랑스 인민전선(사회당, 공산당, 급진당의 연합전선)은 5월 선거에서 승리하였지만 중요한 매듭을 놓쳐 버림으로써 적대의 기회를 공중분해 시켰다. 그 결절점은 선거가 끝나고 내각이 구성되는 시점이었다. 그때 공산당은 레옹 블룸(사회당)이 새 총리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전략도 전술도 취하지 않았다. 레닌이었다면 이때 이 사건의 지도리를 일정한 방향으로 틀어 놓기 위해 공산당의 슬로건을 ‘모든 권력을 인민에게’로 라고 바꾸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은 선거에 승리하고서도 아무런 정치권력도 획득하지 못한 것이다. 이 역사적 사례의 교훈은 ‘사건’의 정치적 진리가 그 적대적 전선의 선명화를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고, 여기에 대한 적극적 개입(때로 폭력적인)만이 potentia를 현실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다시 진리에 대하여 1

  • 등록일
    2010/12/12 22:49
  • 수정일
    2010/12/23 16:50

 1. 진리란 무엇인가? 가장 적확한 대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 따위의 고전적 질문은 접어두자. 여기에는 ‘사건’이라는 대당이 존재한다. 존재가 사건과 구별되는 순간 ‘일치’는 그 보편적 성격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은 하나의, 또는 둘의, 또는 셋의, 또는 마오(Mao)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 불일치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개별성이 진리인가? 나와 너와 그것들, 또는 불특정한 이것(thisness). 그렇다면 이 진리는 다시 ‘현실성’(actuality)라는 대당을 만난다. ‘이것’은 현실성 앞에서 그저 죽어 있는 ‘일반성’일 뿐이다.

일반성(generality)과 보편성(universality)는 다르다. 진리는 일반적이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멈추자. 과연 일반성과 보편성은 함께 획득될 수 있는가?

 

2. 보편성은 잠재성(potentiality)를 함축한다. 하지만 일반성은 잠재성이 아니라 ‘가능성’(possibility)로부터 나오는 ‘평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사유하는 나’(res cogitans)는 ‘존재하는 나’와는 매우 다르다. 평균성 아래에 있는 그 가능성들은 현실화되지 않는 이상 두 항 모두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둘 중 하나가 ‘참’이라 하더라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3. 왜냐하면 여기서 나오는 ‘평균성’은 실재(reality)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앞에 있는 이 촛불은 하나의 ‘실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영상’(idea)로 받아 들인다(감각의 잡다, sensibility). 이 타고 있는 불꽃은 내 망막을 통해 내게로 오며 과학적으로 상상하자면 내 대뇌 어딘가에서(지각, perception) ‘개념화’되어 ‘촛불’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인식’(cognition)이다. 여기까지 칸트는 올바르다.

 

4. 반론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실재’를 내게 알려 주는가? 그것은 다만 ‘현실’일 뿐이지 않은가? reality, 즉 하나의 ‘재산’으로서의 그 고정된 ‘의미’는 여기서 다만 act(행위), 즉 actuality(행동성)일 뿐이지 않은가? ‘real’ 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진리다. 그러나 act는 내가 행위할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hic et nunc) 수용되는 진리다.

 

5. 여기, 진리는 필연적으로 분기한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인식’할 수 없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감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의 작용이 더 확실한가? 이 시점에서 그것은 감각이다.

 

6. 왜냐하면 감각은 act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식은 act의 뒤에 온다. 감각-지각-인식의 그 과정에서 reality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감각은 이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이 가지는 ‘종합’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7. 그렇다면 감각은 이제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파생물일 뿐인가? 그것은 직관조차 허용하지 않는 “물자체=X”인가? 이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완전한 유명론이 올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유물론일 것인가? 진리는 이 샛길 어딘가에 있을 것인가?

 

8. 니체적 의미. 곱씹어 봐야 한다. ‘진리에의 의지’가 ‘당대의’ 진리라 했다. 다만 진리에 의지함으로써만 진리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며 진리에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 자들은 “진리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진리’를 구할지도 모른다.

 

9. 이 명제를 살펴보자.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 이 명제는 다시 말해, 진리는 ‘의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원함’과 ‘원하지 않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틀을 옮겨 놓는 것이다. 로고스에서 티모스(thymos)로 말이다. 상대주의의 딜레마가 나타날 수 있다. 이 명제는 간단하게 반박된다.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는 진리다”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10. 그러나, 여기 명제와 실재(reality)의 간극이 드러난다. 이 명제는 결국 그 진리치를 증명하기 위한 무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명제에 둘러쳐진 따옴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1. 결국 상대주의는 진리에 대한 담론 자체를 반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의 문제, ‘관점’의 문제로 만든다. 하지만 여기 중대한 발견이 있다. 언제, 철학이 ‘의지’와 ‘관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12. ‘의지’와 ‘관점’은 니체의 술어다. 여기서부터 ‘진리’는 변곡점에 들어선다. 현실성(actuality)은 실재성(reality)과 갈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잠재성(potentiality)는 가능성(possibility)과 분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촛불은 그대로 남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 즉 우리의 reality는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체’(media)며, 또 ‘환경’(environment)이며, 마찬가지로 ‘인간-주체’(subject)다.

 

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지와 이성을 고전적으로 구분한다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둘 중 하나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지는 이성과 더불어 의미가 ‘되고’, 이성은 의지와 더불어 이성이 ‘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성이 실체화된 진리에 즉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한 과정 안에서 다만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다는 아니다. 이러한 진리론은 매우 고답적이다. 칸트조차 철학은 철학함(philosopher)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성이 이러한 다가감, 철학함을 위해 의지를 절실하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14. 이 계기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사태들, 또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현존재의 그 ‘빠져 있음’(Verfallen)의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일상성 안에서 철학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것을 횡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현시대의 일상은 자본주의 이래 더 이상 숙고할만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 당대적 인간의 사태 자체, 그것이 요청하는 바가 바로 ‘의지’라 하겠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성적 의지’라고 했다) ‘사유의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의지의 내밀한 양태는 바로 ‘의지의 사유’라고 할 만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의지’를 ‘욕망’으로 번역한다면 우회로를 거쳐야 하겠지만, 여하튼 이러한 이성과 의지의 양태는 거의 하나가 되어 진리의 ‘과정’ 안에서 길항하기도 하고 조화되기도 한다. 결국 사유의 의지는 일상의 폭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매우 금욕적인 요청에 마주하게 된다.

 

15.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폭력’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유와 마주침으로서 사유를 촉발하고 변양(modification)하는 폭력이다. 들뢰즈-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폭력은 사유로 하여금 진지한 열정(passion)으로 그러한 폭력은 ‘겪게’만드는 계기를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사유의 의지는 더욱 내밀한 바탕으로부터 나오는 동기구조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일상이란 단순히 대응폭력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조우와 교전(encounter)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의 태도야말로 바로 ‘긍정’의 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의 의지는 즉자-대자의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자신을 하나의 완전태(enthelekeia)로 가정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 그리고 영원회귀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이것이 부정의다

  • 등록일
    2010/12/11 22:42
  • 수정일
    2010/12/11 22:46


 

사용자 삽입 이미지

 

김무성이 말했다. “이것이 정의”라고. 결식아동 예산을 전액 삭감하고, 영유아 필수 예방접종 예산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형님에게 1400억 원을 안겨 주었다. 그래 “이것이 정의”다. 박희태는 800여억 원을 가져갔고, 4대강 예산으로 9조 3천여억 원이 배정되었으며, MB는 이를 두고 “다행이다”고 했다. 그래 “이것이 정의”다.

 

너희들의 정의다. MB 토건 권력과 한나라당, 너희의 정의다. 너희들의 천국이다. 정의는 자고로 ‘공정성’(fairness)을 그 기조로 삼으니, 국회 예산 심의 과정 도중 정말 ‘공정하게’ 날치기한 너희, 그래서 “이것이 정의”다. 3년 째 날치기를 하면서, 이번에는 그 “정의”를 위해 주먹을 휘두르고, 합의를 깰 생각을 미리 하면서도 머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던 너희, 그래서 이 정의는 오로지 너희들만의 정의다.

 

정의의 원칙을 너희는 잘 알고 있다. 롤스(Rawls)가 말한 가장 중요한 그 원칙 ‘최소수혜자 최대이익의 원칙’을 참으로 잘 알고 있다. 가난한 아이들의 급식을 끊고, 그 돈으로 MB부인의 ‘한식 캠페인’을 지원한 너희들, 그 최소수혜자가 MB 부인이었다고 우길 것 같은 너희는 참으로, 정의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공천을 따내기 위해, 자신의 정치생명을 조금이라도 연장하기 위해 ‘정의의 칼’을 휘두른 자들, 권력을 쥐고 한 줌의 토건 부르주아들 배를 불리면서도 그것이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 청년들의 목숨을 담보로 원전 장사를 하려는 자, 너, 그리고 너희들, 모두는 “이것이 정의”다 라고 말한다. 맞다. 그것이 정의다. 그 정의를 위해 사람을 미행하고, 대포폰을 만들고, 뒷조사하고, 대명천지에, 어린애도 못 믿을 말로 거짓말을 해대는 너희, 그리고 MB, 맞다, 옳다고 하자. 그것이 정의라고 인정한다.

 

그렇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다음의 모든 것이 ‘정의’다. 사기, 협잡, 협박, 폭력, 위선, 이기심, 사리사욕, 화폐 페티시즘, 부도덕, 파시즘, 독재, 다중에 대한 경멸, 비굴함, 야비함 , 병역회피, 꿀꿀이 잡탕과 쥐떼들. 따라서 이제부터 다음과 같은 것들은 부정의다. 양심, 도덕, 좋은 삶(eu zen), 배려, 합의, 청렴함, 존중, 진실, 이타주의, 공정성, 법률, 생명, 선한 민중들과 성실하고 순한 우리의 가족들과 이웃들. 이 모든 것은 사악하며 부정의하다.

 

이제 이러한 가치의 전도, 자기기만, 책임전가, 뻔뻔함이 너희의 정의를 위해 봉사할 것이니, 너희는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대신 많은 다중들이 그 정의 아래에서 신음할 것이고, 괴로울 것이고, 짜증이 밀려 올 것이다. 너희는 이 다중들이 치를 떨다가 나가 떨어져서 ‘부정의’에 관심을 끄고 투표장을 멀리하길 바란다. 그리고 일찌감치 장악한 방송 매체에다 대고 연일 선전 선동에 몰두할 것이다. 전쟁의 위협으로 공포를 주입하고, 일치단결을 명령하고, 돈 다발을 흔들면서 말이다.

 

그러나 과대망상에 빠진 정의, 독단과 독선으로 일군 권력은 이제 천정을 쳤다. 정의와 부정의가 자리를 바꾸는 이 순간, 끝없는 나락이 너희 ‘정의’의 발치, 그 한 뼘 뒤로 입을 벌리고 있음을 알아라. 그러므로 2년 뒤 또는 1년 뒤 선거 혹은 민중이 봉기하는 그 일순간 너희의 ‘정의’가 지옥 한 가운데에서만 통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온 몸이 불에 타면서, 목이 잘리면서 말이다.  “통일이 가까워오고 있다”고? 천만에! 잘 들어라! 너희의 몰락이 가까워오고 있을 뿐이다.  - redbrigade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2/11

  • 등록일
    2010/12/11 21:07
  • 수정일
    2010/12/11 21:07

2010/12/11

 

[미디어오늘]

한나라당 ‘승자의 저주’ 당혹감

 

"몸부림을 폭행으로···KBS, 정권과 함께 망할 것"

 

 

[프레시안]

인권상 수상자, 현병철 코앞에서 "사퇴하라" 기습 시위-[현장] "우리가 원한 건 '상'이 아니라 '인권'"

 

정의구현사제단, '4대강 옹호' 정진석 추기경에 "궤변이오""남모를 고충 있나…사도좌의 가르침마저 거스르고 있다"

 

'부자 감세 연장' 오바마, 진보진영과 '절연' 분위기민주당 하원 초유의 집단 반발…진보 논객들 "오바마는 사기꾼"

 

푸틴·룰라 "어샌지 체포는 잘못"유엔 인권최고대표도 우려 표시…'위키리크스 대전' 확전되나

 

"원희룡, 날치기 안 한다더니"…종교계 '배신감' 표출4대강 국민논의위 "오만한 정부·여당 실상 알려나가겠다"

 

[오마이뉴스]

대통령 부인에겐 242억, 결식아동은 0원, 날치기 법안 뜯어보니, 다 나눠먹었구만

- [주장] 국가예산 사유화한 정치모리배들... 더러운 국회에서 나오라

 

이상득 형님, 배부르게 드셔서 행복하십니까-결식아동 급식지원 예산 0원으로 전액삭감...이것이 '공정사회'인가

 

민주노총도 '진보진영 연석회의' 합류

연석회의 중심축 놓고 진보신당과 이견 노출... 양당 전·현직 대표 회동도 제안

 

[한겨레]

북풍에 포격당한 대통령 지지율 [2010.12.10 제839호]

[정치] 연평도 포격·천안함 침몰 등 안보 이슈 때마다 지지율 되레 하락…

진보·보수 모두에게 신뢰받지 못하는 대북정책 탓 분석

 

“청, 확전방지 지침 내렸다”

군 핵심참모, 연평도 포격 대응지침 확인…청와대 ‘거짓 해명’ 논란 확산

 

[경향신문]

[단독]형님 예산·강만수 예산… 막판 4600억 밀어넣었다

 

[민중의소리]

여권, 개헌할 생각도 없으면서 '개헌론' 띄우는 이유

날치기 비난 여론 희석 위한 제스츄어..."국가 미래에 관심있나"

 

MB 잇단 ‘북한붕괴론’, 근거 있나?

뚜렷한 근거 없는 강경론 되풀이...부시 행정부 전철 밟을 수도

 

25일간의 현대차투쟁,‘비정규직 해결’ 화두던졌다

정규직∙비정규직 연대 민주노조의 숙제로..현대차 교섭 태도 관심

 

‘뇌사’ 인권위 사퇴 도미노..전문위원 등 7명 추가 사퇴

사실상 기능 마비..정치적으로도 사망 선고

 

[레디앙]

민주노총, 민노-진보 양당 중심 강조

김영훈, 전현직 당대표 6인 회동 제안

진보신당-민주노총 간담회…"현장에서 통합 기대감 높아져"

 

 

"믿을 놈도, 믿을 곳도 없다"

[여론조사] 주요기관 신뢰도 1위가 '보통'…나머지 모두 '불신'

 

[참세상속보게시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12/08

  • 등록일
    2010/12/08 15:50
  • 수정일
    2010/12/08 15:50

신혼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 3박 4일 제주도, 한라산. 일생일대의 순간들이 지나갔다. 한 순간이 마치 한 평생인 것처럼 아름답다. 고단한 일정을 내 옆에서 견뎌 준 그 사람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축하해준 모든 분들, 친구들, 동학들, 오지 못하고 멀리서나마 축하해 준 모든 사람들.  신뢰라는 것은 그런 것일 것이다. 믿는다는 것, 그리고 불확실한 삶 안에서 내가 생각해야할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돌아오는 기내에서 리영희 선생의 부고를 들었다. 편히 영면하시길. 진실은 영원히 승리할 것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