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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리란 무엇인가? 가장 적확한 대답은 ‘모른다’일 것이다. ‘사유와 존재의 일치’ 따위의 고전적 질문은 접어두자. 여기에는 ‘사건’이라는 대당이 존재한다. 존재가 사건과 구별되는 순간 ‘일치’는 그 보편적 성격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사건은 하나의, 또는 둘의, 또는 셋의, 또는 마오(Mao)의 말을 빌리자면 “하나에서 둘이 나오는” 불일치의 순간이다.
그렇다면 개별성이 진리인가? 나와 너와 그것들, 또는 불특정한 이것(thisness). 그렇다면 이 진리는 다시 ‘현실성’(actuality)라는 대당을 만난다. ‘이것’은 현실성 앞에서 그저 죽어 있는 ‘일반성’일 뿐이다.
일반성(generality)과 보편성(universality)는 다르다. 진리는 일반적이면서 보편적이어야 한다.
여기서 멈추자. 과연 일반성과 보편성은 함께 획득될 수 있는가?
2. 보편성은 잠재성(potentiality)를 함축한다. 하지만 일반성은 잠재성이 아니라 ‘가능성’(possibility)로부터 나오는 ‘평균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관점에서 ‘사유하는 나’(res cogitans)는 ‘존재하는 나’와는 매우 다르다. 평균성 아래에 있는 그 가능성들은 현실화되지 않는 이상 두 항 모두 ‘참’이 아니라 ‘거짓’이다. 둘 중 하나가 ‘참’이라 하더라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3. 왜냐하면 여기서 나오는 ‘평균성’은 실재(reality)를 재현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보자. 내 앞에 있는 이 촛불은 하나의 ‘실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하나의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어떤 ‘영상’(idea)로 받아 들인다(감각의 잡다, sensibility). 이 타고 있는 불꽃은 내 망막을 통해 내게로 오며 과학적으로 상상하자면 내 대뇌 어딘가에서(지각, perception) ‘개념화’되어 ‘촛불’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인식’(cognition)이다. 여기까지 칸트는 올바르다.
4. 반론한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실재’를 내게 알려 주는가? 그것은 다만 ‘현실’일 뿐이지 않은가? reality, 즉 하나의 ‘재산’으로서의 그 고정된 ‘의미’는 여기서 다만 act(행위), 즉 actuality(행동성)일 뿐이지 않은가? ‘real’ 은 내가 소유할 수 있는 진리다. 그러나 act는 내가 행위할 때 바로 그때 그 지점에서(hic et nunc) 수용되는 진리다.
5. 여기, 진리는 필연적으로 분기한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인식’할 수 없다. 촛불은 타오르지만 나는 그 촛불을 ‘감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마음의 작용이 더 확실한가? 이 시점에서 그것은 감각이다.
6. 왜냐하면 감각은 act를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인식은 act의 뒤에 온다. 감각-지각-인식의 그 과정에서 reality는 필연적으로 왜곡될 수밖에 없다. 감각은 이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일 수도 있다. 하지만 베르그송적 의미에서의 직관이 가지는 ‘종합’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온다.
7. 그렇다면 감각은 이제 act의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파생물일 뿐인가? 그것은 직관조차 허용하지 않는 “물자체=X”인가? 이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완전한 유명론이 올 것인가? 아니면 불완전한 유물론일 것인가? 진리는 이 샛길 어딘가에 있을 것인가?
8. 니체적 의미. 곱씹어 봐야 한다. ‘진리에의 의지’가 ‘당대의’ 진리라 했다. 다만 진리에 의지함으로써만 진리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며 진리에의 의지를 가지지 않는 자들은 “진리 따위는 상관없다”고 말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른 ‘진리’를 구할지도 모른다.
9. 이 명제를 살펴보자.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 이 명제는 다시 말해, 진리는 ‘의지’에 근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참’과 ‘거짓’의 문제가 아니라, ‘원함’과 ‘원하지 않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틀을 옮겨 놓는 것이다. 로고스에서 티모스(thymos)로 말이다. 상대주의의 딜레마가 나타날 수 있다. 이 명제는 간단하게 반박된다. “‘진리에의 의지가 진리다’는 진리다”는 진리가 아닌 것이다.
10. 그러나, 여기 명제와 실재(reality)의 간극이 드러난다. 이 명제는 결국 그 진리치를 증명하기 위한 무한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명제에 둘러쳐진 따옴표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11. 결국 상대주의는 진리에 대한 담론 자체를 반성하도록 한다. 그리고 그것을 ‘의지’의 문제, ‘관점’의 문제로 만든다. 하지만 여기 중대한 발견이 있다. 언제, 철학이 ‘의지’와 ‘관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던가?
12. ‘의지’와 ‘관점’은 니체의 술어다. 여기서부터 ‘진리’는 변곡점에 들어선다. 현실성(actuality)은 실재성(reality)과 갈라지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잠재성(potentiality)는 가능성(possibility)과 분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분이 아리스토텔레스적이라고 볼 수는 없다. 촛불은 그대로 남지만 그것을 보는 우리, 즉 우리의 reality는 너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매체’(media)며, 또 ‘환경’(environment)이며, 마찬가지로 ‘인간-주체’(subject)다.
13.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의지와 이성을 고전적으로 구분한다거나, 그렇게 함으로써 둘 중 하나의 우위를 선언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의지는 이성과 더불어 의미가 ‘되고’, 이성은 의지와 더불어 이성이 ‘된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성이 실체화된 진리에 즉자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영원한 과정 안에서 다만 진리에 ‘다가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까지가 다는 아니다. 이러한 진리론은 매우 고답적이다. 칸트조차 철학은 철학함(philosopher)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문제는 이성이 이러한 다가감, 철학함을 위해 의지를 절실하게 요청한다는 것이다.
14. 이 계기에서 살펴봐야 하는 것은 바로 일상적인 사태들, 또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현존재의 그 ‘빠져 있음’(Verfallen)의 상태라 할 것이다. 이 일상성 안에서 철학은 진리에 다가가기 위해 모든 것을 횡단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다가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게다가 현시대의 일상은 자본주의 이래 더 이상 숙고할만한 시간적, 공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 당대적 인간의 사태 자체, 그것이 요청하는 바가 바로 ‘의지’라 하겠다.(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이성적 의지’라고 했다) ‘사유의 의지’라고 부를 수 있을 법한 이 의지의 내밀한 양태는 바로 ‘의지의 사유’라고 할 만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여기서 ‘의지’를 ‘욕망’으로 번역한다면 우회로를 거쳐야 하겠지만, 여하튼 이러한 이성과 의지의 양태는 거의 하나가 되어 진리의 ‘과정’ 안에서 길항하기도 하고 조화되기도 한다. 결국 사유의 의지는 일상의 폭력을 극복해야 한다는 매우 금욕적인 요청에 마주하게 된다.
15. 하지만 이것은 단순한 ‘폭력’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사유와 마주침으로서 사유를 촉발하고 변양(modification)하는 폭력이다. 들뢰즈-프루스트적인 의미에서 이러한 폭력은 사유로 하여금 진지한 열정(passion)으로 그러한 폭력은 ‘겪게’만드는 계기를 형성한다. 이 지점에서 사유의 의지는 더욱 내밀한 바탕으로부터 나오는 동기구조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제 일상이란 단순히 대응폭력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조우와 교전(encounter)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사유의 태도야말로 바로 ‘긍정’의 태도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유의 의지는 즉자-대자의 상승 곡선을 그리면서 자신을 하나의 완전태(enthelekeia)로 가정하는 변증법이 아니라 차이와 반복, 그리고 영원회귀로 규정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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