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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12/31
    살인자들, 용서는 없다
    redbrigade
  2. 2009/08/29
    좌파의 스타일, 좌파의 간지(9)
    redbrigade
  3. 2009/08/08
    선거주의 환상 유감
    redbrigade
  4. 2009/07/23
    정치의 죽음, 죽음의 정치
    redbrigade
  5. 2009/05/10
    가족주의와 폭력
    redbrigade

살인자들, 용서는 없다

  • 등록일
    2009/12/31 18:57
  • 수정일
    2009/12/31 18:57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용산 참사 타협 소식이 나오는 티비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아, 이렇게 끝나는 구나” 했다. 아니 몇몇이 기뻐했을 것이다. 정운찬 총리, 오세훈 시장, 이명박 대통령, 아마도 김석기 전 경찰청장. 그들은 용산 참사 ‘타협’을 ‘해결’이라고 했다. 많은 노력을 했으며, 서로가 공을 세웠노라고 추어주기 바빴다. 하긴 총리는 그러라고 기용했고, 시장은 대권을 잡고 싶은 것이며, 대통령은 삽질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러나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살인을 했는데? 유감이라고? 사람을 생짜로 태워 죽여 놓고? 이제 장례를 치러도 좋다고? 죽인 것도 모자라 그나마 산목숨을 드잡이하고, 겁박하고, 기어이 감옥엘 보내 놓고? 한 마디만 하자. 지랄이다. 아주 생지랄이다.

 

그러니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부님이 유족들을 껴안고 그저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회견 내내 영정을 바라보고 끌어안고, 또 쓸어 보며, 이젠 말라 비틀어져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동안 남일당 건물은 해방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나갔다. 이렇게 용산은 시퍼런 새벽, 한 국가의 수도 한 가운데에서 권력이 저지른 살인행각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장소가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빈소이면서 또 해방구라니.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 이 땅에서는 죽음으로써만 비로소 해방된다는 그 섬뜩한 현실 말이다. 또한 그것은 상처와 같았다. 자본이 생살을 뜯어 먹고 간 자리. 그리고 그 자리는 고스란히 그곳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외면하든 또는 슬퍼하든, 그 장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야 해방이 허용되는, 그래서 늘 슬픔 속에서 쓰린 가슴을 한 뭉치씩 부여안고서야 비로소 저들 권력의 부라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시민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용산을 잊은 시민들은 그들처럼 자신들이 죽어갈 수 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신부님들과 유족들 그리고 용산의 동지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용산은 고립되었고, 엄동설한이 온 것이다.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부분의 책임은 방관자들에게 있다.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우리들, 운동 주체들, 지식인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왜 그들이 울어야 하나? 우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야 하지 않나? 그들의 울음을 보면서 ‘그나마 이것이 절반의 승리다’라고 입바른 소리나 해야 하는가? 그래서? 수고했다고? 살인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장례라도 치룰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지금 똑같이 지랄하잔 건가?

 

이제 남일당이 헐리고 그 선명하던 모순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망각이 찾아올 것이고, 희번덕거리는 건물이 들어서고, 돈 없는 민중들은 쫓기듯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철거가 시작되고, 거래를 하고,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살인자들. 우리는 알고 있다. 용서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희가 똑같이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도 남일당을 방치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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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스타일, 좌파의 간지

  • 등록일
    2009/08/29 01:43
  • 수정일
    2009/08/29 01:43

코코 샤넬이 했던 유명한 말이 있다. "유행은 사라져도 스타일은 남는다." 프랑스 비씨 정부를 후원했고, 거짓말장이에다가 요부였던 이 여인을 별로 좋아 하지는 않지만, 이 말만큼은 훌륭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기사를 보니 조국 교수도 이 비슷한 말을 했더라. 진보는 섹시해야 한다고 ... .  지난 맑스 꼬뮤날레에서 어떤 활동가 후배 한 분이 좌파 선배들이 '간지' 없다고 타박 아닌 타박을 해서 내내 '간지' 토론을 했던 기억도 난다. 

 

간지라...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런 생각을 한다. 그래 간지 나야지. 그러니까 나름 스타일이 있어야해. 하지만 그게 좌파의 간지, 스타일이라는 게 뭐냐는 거지. 20세기 좌파의 유행이 지났으니, 21세기 유행이 올 것이고, 또 그게 하나의 스타일이란 말이냐? .

 

그런데, 간지나는, 또는 엣지(edge)있는 좌파들이 생겨난다고 해서 혁명이 앞당겨 질 것인가? 세상이  후울쩍 변할 것인가? 하긴 두 대통령의 서거에 울고불고 하다가도 선거 때만 되면 명박스런 패거리들에게 표를 몰아 주는 소위 그 '서민'들의 소구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그 '간지'가, 또는 '섹시함'이 필요할 것도 같다. 그치만 그렇게 살면, ... ㄷㄷ 되는 것일까? 폼 나게? 간지 나게? 스타일 챙기면서? 그래, 그건 아닌 거다. 그렇다면 이 따위 천박스런 '간지' 말고 좌파의 스타일이란 건 뭔가, 말이다.

 

머리 아프다. 이건 뭐, 별 해괴한 땅에 그것도 어수선한 명박철에 좌파로 살자니 고민도 이런 걸 하고 자빠져 있어야 하나, 싶다. (하지만 중요할지도 ... 모른다. 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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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주의 환상 유감

  • 등록일
    2009/08/08 16:24
  • 수정일
    2009/08/08 16:24

미디어법이 표류중이고, 쌍차투쟁이 패배하고, 촛불도 다시 일어설 조짐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공분이 없을 리는 없다. 활동가들은 특히나 이 공분이 내면으로 타오른다는 것을 잘 아는 것 같다. 그리고 다중이 이제 '선거'로 심판할 것이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 것인가? 공분이 내면으로 타오른다는 것까지만 맞다. 그러나 선거가 과연 저들을 '심판' 씩이나 할 수 있는 기제가 되는가? 지금까지 어땠는지 잘 톺아보기 바란다. 언제 우리가 선거 따위로 독재를 심판하거나 혁명에 나선 적이 있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 선거라는 것을 우리만 하는 것인가? 선거권이 프롤레타리아, 다중들에게만 주어진 것인가? 아니다. 저들도 선거를 한다. 오히려 선거에 더 적극적이지 않은가? 철저한 계급투표를 통해 지금껏 승리를 구가해 온 쪽은 우리가 아니라 저들이지 않은가? 열 번 선거했다면 아홉 번은 저들이 열매를 따 갔다는 것을 벌써 잊은 것인가?

 

정세를 보자. 난 최시중 일당과 한나라당이 '선거'를 몰라서, 그게 다가 오고 있다는 것을 몰라서 저러는 건 아니라고 본다. 저들도 충분히 그 시기가 온다는 것을 안다. 다만 저들은 그 선거가 닥쳐 오면 이런저런 패를 꺼내 들고 사람들을 다시 현혹시킬 것이다. 그건 분명하다.

 

난 저들이 꺼내들 패가 예전보다 훨씬 많아졌다고 보는 편이다. 왜냐하면 선거가 오기 전까지 온갖 악행들을 폭력을 동원해서 대중들에게 행사해 왔기 때문에 조삼모사에 취약한 대중들에게 사탕 하나면 충분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간접세 인하라든지, 통신료 인하 따위 말이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면 그러한 '특혜'가 결코 애초부터 특혜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간접세는 이미 올린 것을 깍아 주는 것이고, 통신료는 이미 세계 최고 수준이지 않은가? 조삼모사, 눈 감고 아웅이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 주위에는 이를 모르는 '어르신'들이 너무 많다.

 

그리고 또 하나. 지방선거에서 패하더라도 총선과 대통령 선거가 남았다. 저들은 잘 안다. 이 선거에서만큼은 박근혜와 딴날당이 승산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멍청한' 대중들은 소고기부터 용산, 그리고 평택에 이르는 처참한 만행들을 박근혜가 나서준다면 용서해, 아니 잊어줄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사실 난 이런 꼼수가 MB나 이상득이 최시중이의 머리 속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것까지 돌아 보기에는 그들의 머리가 너무 썩었다. 이들은 그냥 밀어 붙이는거다. 그게 다다. 이 꼼수의 로드맵은 주로 딴나라당과 청와대 참모진들의 짱돌 속에서 열나게 돌아 가고 있을 것이다. 권력의 허수아비 밑에서 달콤한 열매를 캐 먹고 있는게 바로 저들이고, 그 태평성대가 세세년년 이어지기를 바라는 것도 저들이니 말이다.

 

그러므로 선거에 대한 환상을 버리기 바란다. 백날 해봐야 도로아미타불일 것이니 말이다. 혹여 브라질이나 베네수엘라 같은 좌파정권이 요상간에  들어설 수 있다고 야무진 꿈을 꾼다면 얼른 일어나서 세수하고 출근이나 하기 바랄 뿐이다. 그리고 둘러보기 바란다.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인 이 땅에서 지금 필요한게 선거인가? 난 아니라고 본다.  최소한 활동가들, 스스로 좌파라고 생각하는 물질들은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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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죽음, 죽음의 정치

  • 등록일
    2009/07/23 09:15
  • 수정일
    2009/07/23 09:15

* [미디어스]에 실린 글이다.

 

정치의 죽음, 죽음의 정치

 

용산 참사 6개월. 또 한 사람이 갔다. 이번에는 평생의 반려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의 아내. 남편의 넥타이에 목을 맸다. 죽은 아내를 두고 그가 오열했다.

 

용산의 철거민들도 그랬다. 가족을 위해 망루에 올랐으며 그 망루에서 천 도의 열기에 질식하고, 새카맣게 타 죽었다. 가족들이 오열했다. 그 뒤로 지금까지 죽음의 행렬이 이어졌다.

 

너무나 분명한 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였다. 가해자는 MB 정권의 공권력이고 피해자는 철거민들이었다. 온 국민이 그것을 생생한 화면으로 목격했다. 반드시 죗값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21세기 한국 사회에서는 이 분명한 관계가 역전된다. 알리바이는 권력이 독점했으며, 인민은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갔다. 심지어 고인의 아들이 범죄자로 낙인 찍혔다. 왜 그런가? 바로 삶의 정치가 죽고, 그 시신 위로 죽음의 정치가 독버섯처럼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다. 인민의 피를 먹고 살이 찐 권력은 필연적으로 삶의 정치가 아니라 죽음의 정치에 기생한다.

 

인민을 살리는 삶의 정치는 죽은 화폐나 토지, 건물보다 사람과 노동에 초점을 맞춘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복지요 환경이고 삶의 질이다. 우리는 이 정치를 민주주의로도 코뮤니즘으로도 부른다. 하나의 이념으로서 민주주의의 심화가 코뮤니즘이 되고, 물질적 기반을 갖춘 코뮤니즘이 다중의 일상 안으로 정치화되어 대의체제의 결점을 보완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이 둘은 삶의 정치를 위해 서로를 추동하고 자극해야 한다. 그래야 건강한 정치활동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건강한 정치 활동이 하루아침에 죽어갈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 용산의 고인들은 이 삶의 정치를 권력에게 요구하다가 죽어갔다. 따라서 용산은 그러한 삶의 정치가 살해되는 현장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권력은 사람보다, 복지보다, 그리고 삶의 질보다 토지와 건물과 화폐에 더욱더 집착하기 시작했다. 죽음의 정치가 시작된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산노동의 활력이 아니라 죽어 결정화된(crystalized) 노동에 기반을 둔다. 나아가 그것은 산노동을 죽은 노동을 위해 끊임없이 희생시켜야 살아 갈 수 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그랬다. “권력은 자본의 편으로 넘어” 갔다고. 그런데 자본은 피가 돌지 않는다. 피가 돌아야 할 곳에 화폐가 순환하고, 기쁨을 생산해야할 공동체 대신에 먹고 먹히는 살벌한 규율이 들어선다. 죽은 대통령이 말한 그 자본은 신자유주의의 자본이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의 가장 어두운 본성이 백주대낮에 곤봉으로 인간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사회구성체를 지칭한다. 또한 신자유주의는 자신의 기획에 어긋나는 일체의 사회기반을 철거하고 게토화하면서, 합의나 절차보다 일방성과 공권력에 더 의존한다. 신자유주의의 반인간적이고 친화폐적인 요구 자체가 합의나 절차를 불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자본의 자유는 국가 공권력의 일상화와 확대가 없으면 안 된다. 그래서 용산은 신자유주의 막차에 올라탄 MB 정권이 삶의 터전이 있던 곳에 화폐의 마천루를 짓기 위해 벌인 홀로코스트였던 것이다.

 

신자유주의, 그 중에서도 가장 반동적인 토건세력이 후미에 있었고 포위대형의 선두에 경찰이 배치되었으며, 참모막사에 검찰이 앉아 있었다. 살해가 끝나고 검찰은 계획대로 경찰에 면죄부를 주었고, 오열하는 가족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지금도 하루에 몇 번씩 용병(역)들을 현장에 보내고 있다.

 

그리고 수사기록 3000쪽. 마땅히 공개해야할 정보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하긴 근본은 거기 있지 않다. 수사기록은 법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수단일 뿐. 윤리적으로 우리는 용산 학살의 범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김석기 그리고 MB, 또한 이 명령체계의 골간을 이루는 자들. 그들은 아직 사과 한 마디 없다.

 

저들은 이 모든 것이 ‘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한다. 맞는 말이다. 법은 권력의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저들은 제대로 규정한 것이다. 그래서 법치는 알아서 기라는 권력의 신호요,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짓밟힐 것이라는 협박이고, 감히 도전했다가는 바위에서 밀어 버리거나, 태워 죽이겠다는 구체적이고 명증한 명령이다. 카프카가 파시즘을 예견하면서 말했듯이 법이란 권력과 관료체계에 의해 인민의 몸에 인두질되는 폭력의 흔적에 다름 아니다. 그 본질을 저들은 알고 있다. 그래서 법치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도 우리가 이해 못할 짓들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다.

 

또 하나 더 있다. 6개월 동안 저들은 ‘버텼다’. 신영철이 대법관 자리에서 버티고 있듯이 말이다. 이 질긴 버티기에는 분명 철석같은 신념이 도사리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들은 분명 ‘대중은 무지하며 망각에 능하다’는 히틀러의 말을 믿고 있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 미디어법 공방으로 이어지는 정세 속에 묻어가다 보면, 대중이 용산을 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영철은 벌써 성공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MB는 신영철 케이스를 스스로에게 적용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목숨들을 태워 죽인 희대의 권력을 매일매일 뉴스로 대하면서 사람들이 과연 그것을 잊을 것인가? 사실 권력은 이것이 두렵다. 마주 대하기 싫은 진실 말이다. 그러니 청와대 뒷산에 올라 ‘아침이슬’ 노래소리를 들으며 반성했다는 말이 통하지 않자, 이제는 아예 이쪽은 쳐다보지도 않을 밖에.

 

그래서 그랬나보다. 이문동 가게에서 상인의 호소를 귓등으로 들으며 ‘뻥튀기나 사먹으라’고 부하들에게 고함친 것이 말이다. 듣기 좋은 소리만 듣고자 하고, 듣기 싫은 소리는 피해가려는 이 ‘증상’은 참으로 구제불능이다. 그러니 구천을 떠돌아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5명의 원혼의 한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들에게 동정이나 애도를 바랄 것인가? 어림없다. 이 권력은 이제 어떤 죽음도 애도하지 않을 것이다. 노무현 서거를 대하는 태도를 보라. 그리고 몇 일 전, 이 공권력은 반성은 커녕 용산 망루와 똑같이 생긴 망루를 다시 세우고 진압훈련을 했다.

 

죽음의 정치를 구사하는 권력은 흉기를 휘두르는 살인자와 마찬가지다. 폭력과 거짓으로 쌓아올린 권력은 수명이 길지 않다. 지하벙커 안에서 스스로 독약을 마시거나, 측근에게 암살 당하거나, 혁명이 그를 단두대로 이끌었다.

 

오늘도 용산 현장에서 미사가 진행되었다. 경찰은 유족들에게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했다. 5 살배기 아이가 들고 가는 촛불도 불법이라고 했던 저들이다. 이해한다. 측은하다. 겁에 질린 공권력. 스스로도 정당화하지 못하는 그 법이란 얼마나 얄팍한가. 모든 압제자들, 그 죽음의 정치가들은 법을 말했고, 그 법으로 권력을 집행했다. 그러니 그 법이 ‘평등’을 구현한다고 해서는 안 된다. 법은 평등하지 않다. 눈을 가린 정의의 여신을 희롱하며, 죽음의 정치는 천칭의 오른쪽에 인민의 시체를 얻어 놓고 자신의 위력을 가늠한다.

 

자신의 허약함을 감추기 위해 폭력을 행사하고, 인민의 피를 전시하는 저들의 위악은 마침내 스스로의 무덤을 팔 것이다. 죽음의 정치는 그렇다. 죽음 앞에 권력 자신이 예외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산이야말로 저들의 무덤자리이며 가까운 어느 날 거기서 똑같이 죽어갈 것이다. 그게 우리의 법이다. 불법집회를 그만두라고? 살인과 복수를 당장 그만두라!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힐 것이요 칼로 죽이는 자는 자기도 마땅히 칼에 죽으리니”(요한계시록 13:10).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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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주의와 폭력

  • 등록일
    2009/05/10 08:57
  • 수정일
    2009/05/10 08:57

자유는 개인의 존엄이 전제되지 않으면 자주 폭력으로 변한다. 가학적이든 피학적이든 존엄이 실종된 상태에서는 혁명조차 줄곧 파괴하고자 한 그것을 닮아 버리곤 했다는 게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그럼 좋다. 존엄이 지켜지기 위해선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 거두절미, 그건 '거리의 파토스'(Pathos der Distanz)다.

 

이 관점에서 '가족'이라는 집단을 돞아 보자. 이 집단은 무엇보다 '정서적'(pathetic)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가족적 정서라고 불리워지는 걸 열거하자면, '화목', '사랑' , '이해' 등이 있을 것 같다. 실제로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집단을 떠올릴 때 소위 '가슴 훈훈한', '한 둥우리 같은' 감정을 체감한다는 건 정말이다. 이상하게도 '정서'라고 하는 건 개별적이고, 개개의 인격마다 그 체감의 강도가 상당히 다르거나 아예 극단적으로 대립할 수도 있을텐데 '가족적 정서'라는 건 이 정도로 동질적이다. 희한한 일이다.

 

더우기 봉건주의에 대한 자생적 면역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 필수적 코스라 할 수 있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단계를 훌쩍 뛰어 넘어 버린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식의 정서가 상당부분 강화되어 있다. 심지어 유력 정치인들이나 그를 지지하는 다수의 국민들이 '가족'과 '국가'를, 나아가 대통령과 가부장을 구분하지 못하는 지경에 처해 있기도 하다. 심각한 것은 이런 유아적 발상이 이데올로기로까지 치장되어 '우익'이라는 집단을 형성할 때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이 사회의 오른쪽 집단은 '민족주의'라든지 '합리적 보수'라고 불리워질 수 없게 된다. 이들은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지 못한 그저그런 수구세력이거나 뭐라 개념지을 수도 없는 '꼰대집단' 정도가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가만히 보면 이들이 가지고 있는 사고의 프레임과 뒷골목 건달들이 '형님'에 대해 가지고 있는 프레임이 별 차이가 없다(건달들은 목숨을 걸고 의리를 지키기라도 한다).

 

이렇게 '가족'과 '국가' 또는 '봉건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착시현상이 대개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곳에서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는 게 본질적인 문제다. 하긴 논리나 펙트에 대한 존중보다는 '니편 내편'이 더 중요하고, 솔직한 의사개진보다는 '윗선'이나 아버지, 어머니, 언니, 누나, 형 등등 온갖 것들을 살펴 보는 비굴한 더듬이만 발달한 인격들끼리 모여서 무슨 긍정적이고 합리적인 이야기가 진행될 수 있겠는가?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 그려지는 '가족잔혹사'들을 살펴 보면 몇몇 유형이 있다. 우선 가족들 간의 구질구질한 원한 관계가 있고, 거기에 희생당하는 주인공들의 비극적인 플롯이 전개되는 보다 고전적인 형태가 그 중 하나고,  또 다르게는 가족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가족들이 모두 몰락하거나 만고의 웃음거리나 패악질의 원형이 되거나 하는 것이다. 두 경우 모두 가족주의가 가지고 있는 '파괴적 본질'을 드러낸다. 사실 가족이라는 집단 자체가 정서적이고 보수적인데 이것이 더 '애틋해'지고 '흘러 넘치게' 된다면 문제가 이만저만 심각해 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이런 예들이 참으로 알기 쉽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처음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이 자유롭게 살려면 필요한 것이 '거리의 파토스'라고 했다. 그런데 과연 이 '정감어린 가족주의' 안에 이것이 있는가? 피상적으로는 있다.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 누구든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so cool'해 질 수 있다고 자신한다. 재우쳐 묻는다. 정말? 스스로도 물어 보라. 내가 가족문제에 관해 그토록 '거리'라는 걸 취할 수 있는지 말이다. 당연하게도 이런 '거리'가 내면화되어 있어야 합당하다.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도대체 어떤 '후레자식놈'이 '우리' 어머니를 모욕했는데 흥분하지 않겠는가? 설혹 어머니'께서' 먼저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런데 모든 사단이 여기서부터다. '우리' 가족을 중심에 놓고 '다른' 가족이나 인격을 보다 보니 '거리의 파토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원한'에 기반한 배제와 우월의 욕구가 앞선다. 그리고 가족내에서의 자기입지가 어떤가에 따라 '권력'이 형성되는데, 이게 또, 다른 가족 구성원 중 서열이 밀리는 인격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근거로 작용하는 게다. 게다가 이 서열이라는 것이 천박한 자본주의 정신과 결합할 때는 (당사자들이 아무리 거부하더라도 제삼자가 볼때는 분명한데) 구역질나는 금전관계나, 경제적 독립의 정도에 따라 매겨지는 사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하긴 아무리 '가족'이라도 금전적으로 얽매여 있으면 제대로 발언하기가 힘든 게 현실이다. 사실 이렇게 놓고 보면 '비둘기 처럼 다정한 가족'이라는 것도 말짱 허구라는 걸 알아야 하겠다. 그리고 가공할만 한 것은 이 모든 게 '사랑'이라는 명분 하에 저질러진다는 것이다. 가히 '잔혹사'라 할만 하다. 하긴 이런 일로 서로를 죽이고 괴롭다 못해 스스로를 죽이거나 다 같이 연탄가스 마시고 죽자는 경우도 생기는 게 요즘 세상이다.

 

가족주의라는 건, 따라서 아주 지독한 허구다.  그리고 많은 경우 다양한 방식으로 '약자'를 괴롭히는 이데올로기로 작동한다. 다른 가족을 억압하기 위해("저 쌍놈의 집안", "돈 없는 것들" 등등 다양한 버전), 그리고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의 존엄을 짓밟기 위해("동생이 어디서!", "아버지 말이 말 같지 않니?",  "이 결혼은 반대다." - 도대체 누구 마음대로 '반대' 따위를 한다는 건지 알 수 없다 - 등등 또 다양한 버전) 말이다. 하나의 허구가 물리적 힘을 발휘하기 시작하면 참으로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그게 어떤 실체를 가지고 우리 앞에 서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이 힘이라는 건 대개가 우리조차 감염된 경우가 많다. '권력의 발에 짓밟혔던 자는 그 권력의 세균에 감염된다'고 했던가. 그래서 '난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이 참으로 덧없어진다는 거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거나 "우리가 남이냐?"는 생각을 무시로 한다면 스스로를 의심해볼 일이다. 쓰레기더미 속에 있다 보니 자기 몸에 그 냄새가 베어 있다는 것조차 모르게 되면 매우 심각하다. 그 냄새가 바로 스스로의 존엄을 더럽히고, 다른 집단이나 조직에 해악이 되며, 나아가  부지불식 간에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존엄에 먹칠을 하고 그(녀)의 일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는 걸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녀/들)에게 거리를 부여하자. 서로 평등하게, 그렇게 바라 보는 것, 그게 자유의 시작이고, 공동체 내에서 자신과 타인 모두를 고귀하게 만드는 길이다. 가족? 가족주의? 그런 건 개나 주기 바란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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