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 선생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말대로 그가 철학을 시작한 지점이 이 개념이고, 모든 철학은 '주체' 개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사유를 시작한 로두스는 아마 영원히 미탐사인채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지점은 언제나 그가 돌아와야 할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우 선생은 두 권의 저서를 더 예고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맥락에서] 그리고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전자를 '사건론'이라 부르고 이 책을 '주체론'이라 하면서 이 두 책이 [진보의 ... ]를 보완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로 '개념론'을 쓰면서 철학사적인 작업을 해온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한국지성 중 한 사람인 이정우 선생이 이제는 실제로 '자신의 철학', 말 그대로 '주체의 철학'을 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러니 시작에 불과한 이 작은 책자를 읽고 허기진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책들이 많이 기대된다.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 이정우 지음, 그린비, 2009.
1. 술어적 주체를 넘어
주체와 술어 / 집합적 주체들 /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2. 차생(差生)과 정체성
자기차이성 / 고유명사로서의 주체 / 객체성과 주체성의 갈등과 화해
3. 인식론적 역운(逆運)
진리가 오류로 둔갑할 때 / 역운의 극한
4. 타자-되기
주체화를 둘러싼 투쟁 / 거대 주체를 무너뜨리기 / 타자 없는 주체 / 타자-되기
5. 무위인(無位人)
‘우리’들의 계열학 / 상생적인 되기의 함정: 남북한의 예 / 진정한 우리-되기의 가능근거: 무위인
맺음말
후주 및 관련 저작들
[12]주체 물음의 반복 아래에는 ‘나’라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의식을 갖춘 개체가 좋든 싫든 품을 수밖에 없는 힘이다. 이 힘이 주체 물음을 반복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런 반복에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물음의 반복에는 해(解)의 불완전성이 함축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하는 내적 힘은 그 물음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흐트러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주체는 스스로에의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주체가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는 선험적 지평transcendental horizon[13]은 시간이다. 끈덕지게 되돌아오는 물음-힘은 시간을 그 가능조건으로 해서 반복된다. 시간은 ‘나’의 물음이 새롭게 되돌아 올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이 강요는 시간이 생성시키는 이런 타자성과 관련된다. 시간의 지평 위에서 주체는 타자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생성해 가며, 그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런 요구는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케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만 주체는 해체되는 자신을 재구성해 나갈 수 있다.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그런 해체 과정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며, 그래서 늘 차이생성differentiation과 동일성의 교차로/전장(戰場)에서 성립하는 존재이다.
[15]주체로서 존재하는 것들은 우선 개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개[16]체성이 없는 곳에 주체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7]이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의 개체성을 담고 있다.
하나의 개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기의식을 가지게 될 때 주체성이 성립한다. ‘자기’의식이란 어떤 가름의 의식을 뜻한다. 즉 나와 나 아닌 것은 다르다는 것,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는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의식이 발생한다. ... 원칙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개체들, 즉 생명체들은 모두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식물들은 0으로 수렴하는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찍이 헤겔이 심오하게 분석해 주었듯이, 타자성otherness 없이는 주체성도 없다. 나를 나‘이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아닌 타자를 내가 ‘아닌’ 존재로서 나로부터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아님’을 매개해서 나-‘임’으로 되돌아올 때에만 인간 고유의 자기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가름과 되돌아옴으로부터 자기의식이 탄생한다. 이 자기의식은 그 자기의식의 주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불행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기의식을 가짐으로써 고도의 역능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 행복하며, 타자와의 불연속이라는 근원적인 소외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는 그 자기의식에 집착하면서도 동시에 그로 인한 불연속을 메우려고 한다는 점에서 모순된 존재 또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이다.
[22]경쟁의식은 질시를 낳게 되고, 질시는 우월감/열등의식은 증오심을 낳게 되고, 증오심은 고통을 낳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술어들 - 각종 형태의 “출신”, 전공, 직업/분야, 재산, 신체적 특징들, … 등 - 에 집착하는 자아의식(흔히 말하듯이, “자아의식이 강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술어적 주체로 구성되는 사회/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누구도 이런 고통을 피해갈 수 없다.
이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름-자리들의 체계가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실선으로 그려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의적인 - 소쉬르적 뉘앙스에서 - 분절선들 이상의 아무-것도-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가능하다. 장자는 이 아무-것도-아님을 ‘만물제동’(萬物濟同)이라 가르쳤다. 이 ‘제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반성-특수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격자가 깨끗하게 지[24]워지고 보편성, 즉 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서의 무(無)이지만 또한 어떤 분절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질서를 담고 있는 허(虛)가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보편성=‘허’ 위에서 독특한 특이성들을 그려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위(位)를 가지지 않는 무위인이 된다.
[26]물질적인 맥락에서만 추상화해 본다면, 개체들 역시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다. 하나의 신체는 숱한 세포들의 집합체이기에 말이다. ‘나’는 이런 숱한 ‘우리’들 - 나 자신인 ‘우리’까지 포함해서 - 이 중층적으로 포개져 이루어지는 드라마(사건)이다.
‘나’는 하나이지만 확장된 나로서의 ‘우리’는 무수히 많다. 나는 한 가족, 한 학교, 한 정치단체, 한 직장 … 에 동시에 속해 무수한 ‘우리’들의 교집합에서 성립한다. 숱한 ‘우리’들로 구성되지만, 또한 역으로 숱한 ‘우리’드로 해체된다. ‘나’와 숱한 ‘우리’들 - 사회 - 사이에는 이율배반적 관계가 성립한다. 개인과 사회의 드라마는 이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연원한다.
[31]시간이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이는 것이 단지 주체가 시간 속에서 변해 간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아가 주체가 시간의 지평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은 주체를 역설적으로 조건 짓는다. 수동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지평 위에서 주체는 변화를 겪는다. ... 그래서 시간이라는 조건은 나의 수동성의 조건인 동시에 능동성의 조건이다.
[33]삶의 범주들은 대부분 한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역사적으로 축적된 거대한 체계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그런 체계 안에 내던져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 개인은 각 범주에서 하나씩의 술어들을 뽑아 내어 그것들을 통접시킴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로 되어 있는 거대 그물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며, 자기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그물이 고착되어 있을수록 ‘자기’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주체는 그물 속에 갇힌 새처럼 펄럭이면서 그저 좀 나은 이름-자리를 잡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이 새장에서 탈주하고자 한다면 술어들의 그물과의 끝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물코를 찢어 그물의 모양 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각종 실험들을 통해서만 삶의 술어적 그물은 변해 갈 수 있다. 주체는 일정하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끝없이 수선되는 직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 시점에서 한 주체를 규정하고 있는 이름들(일반명사들), 즉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그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탈주하면서 스스로를 끝없이 수선하려 한다. 이 점에서 주체는 공간적 구성체일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를 겪는 활동체이기도 하다. 주체는 “나는 ~이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가 되고 있다”를 통해[34]서 성립한다. 이 ‘~’이 그물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그물코가 아니라 그 자체 생성해 가는 어떤 것일 때, 주체란 ‘~되기’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주체는 명사-형용사의 주체이기보다는 동사의 주체, 동사로서의 주체이다.
[37]산다는 것은 곧 겪는다는 것이고 겪는다는 것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지각, 계속 생성해 가는 타인들과의 만남, 부딪쳐 오는 숱한 사건들 … , 이렇게 주체는 살아가는 한 크고작은 차이들을 만나며 그때마다 변해 간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주체는 끊임[38]없이 신체적으로 변양되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감응한다. 만일 이런 차이생성이 모두 각각의 파편으로 고립된다면,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계속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시간의 종합’을 통해서만 주체로서 성립한다.
주체에서의 시간의 종합은 우선 크게는 두 가지 수동적 종합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명체로서의 주체는 생존이라는 조건/틀 속에서 수동적 종합을 행한다. 생명체의 동일성은 시간과 차생을 겪으면서 와해되지만, 생명체는 이것들을 흡수하는 메타 동일성을 수립함으로써 자신의 역동적 동일성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 차이생성의 거대한 와류 - 이른바 “진화” - 에 휩쓸려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의 종합이 필수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기억이야말로 생명의 기초적 본성이라 하겠다. 기억은 차이들의 계열화 속에서 보존되는 자기(=자기 차이성)를 가능하게 한다. 차이생성과 싸워야 하는 생명체의 생존조건이 시간의 수동적 종합을 가져 온다.
... [39]따라서 여기에서의 ‘수동성’이란 소극성이나 무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합의 주체가 진정 주체일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연과 사회라는 이중의 객체성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체에게는 이런 수동적 종합 위에서만 능동적 종합도 가능하다.
시간을 종합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는 자신 안에 자신으로부터의 차이생성을 머금게 된다. 이 차이생성은 자기에게 그 자기와 차이 나는 자기들을 가져오며, 주체는 이 차이들을 시간의 종합을 통해 소화해 냄으로써 주체로서 성숙해 간다. 주체의 이런 성격을 ‘자기차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40]기억은 차생의 종합을 통해 보존되는 자기 - 자기 차이성 -를 가능케 한다. 시간적 지평에서의 차이들은 구체적인 존재함의 기본 조건이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차이들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억하는 주체는 내적 복수성internal multiplicity을 통해서 성립한다. 내적 복수성은 외적 복수성과 다르다. 공간 속에 외연도적으로 펼쳐져 있는 수적 복수성으로서의 외적 복수성과 대비적으로, 내적 복수성은 시간을 종합하면서 강도적으로 접혀 있는 질적 복수성이다. 기억이란 다름 아닌 내적 복수성이다.
술어들의 집합, 이름-자리가 공간적 주체를 구성한다면, 자[41]기차이성, 내적 복수성, 기억이 시간적 주체를 구성한다. 시간적 주체는 공간적 주체를 해체/재구성하면서 열린 주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시간적 주체가 시간을 배반할 때 이런 열림은 닫혀버린다. 자기차이성은 기억을 통해 가능하지만 또한 기억을 통해 닫혀 보리기도 한다. 주체가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차이성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만, 기억에 갇힌 자기차이성에서 물러나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주체에게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자기차이성의 긴장이 존재한다.
[43]주체는 사건들의 총체 - 열린 총체 -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누군가가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주체는 어떤 집합체의 요소이기를 그친다. 가로지르는 주체는 어떤 면에 속하는 점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맺는 관계들의 양상도 자신이 속한 면에 입각해 이뤄지는 집합론적 관계 맺음이 아니라 선적인 운동을 통해서 생성해 가는 관계 맺음이다. 한 사람의 주체성은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 결과적으로 만들어 가는 고유한 어떤 길일 것이다.
[44]주체는 빈위들/사건들의 총체가 형성하는 객체성을 가로지르면서 성립하기에, 단적으로 주어지는 주체성 같은 것은 없다. ... 개체 나아가 주체는 (실제 이름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고유명사로서 존재하지만, 그 고유명사는 거대한 객체성의 한 얼굴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한 개체/주체의 고유함은 객관적 세계의 한 갈래로서만 성립한다. ... [45]이런 이유에서 개인의 ‘단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단독성도 결국 세계의 한 얼굴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규정성들, 우주의 법칙성들, 사회-역사적 구조들을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단독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개체를 실체화하는 것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개체성을 실체화하기보다는 ‘이-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47]삶에서의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자유는 주관적 환상이 되어 버린다. 역으로 자유의 가능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필연성은 인간적 삶을 뒷받침하는 철학이 될 수 없다. ... 근대 이후 꾸준히 이어져 온 한 경향은 인간이 이룩한 인식의 성과에로 인간 자신을 흡수시켜 보려 한 경향이다. ... 그러나 이런 식의 시도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어리석음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와 인식의 순환성의 문제이다. 인간은 인식주체로[48]서 어떤 대상을 규정하지만, 그런 규정 자체가 바로 인식주체의 어떤 조건들의 결과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면 바다가 그 그물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물을 더 잘 만들면 더 많은 고기가 잡힐 수 있다. 특정한 그물을 실체화하거나 고착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존재와 인식은 끝없이 순환적이며, 인식론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순환의 고리들을 더 정교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50]진정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이다. 이는 곧 인식론적-존재론적 우와 윤리학적 우로부터의 탈주이다.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지나 무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이란 어떤 사실을 ‘모르는’ 것(무지)이나 말과 행위에서의 난폭함(무식)이 아니라 철학적 요점을 빗맞히는 데에서 유래한다. 무지하지 않기도 또 무식하지 않기도 어렵지만, 어리석지 않기는 특히 어렵다. 철학적 요점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빼어난 아니 위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학자들에게서도 철학적 어리석음은 자주 발견된다. 진정한 주체성/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나 윤리학적으로나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성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 종종 선험적 착각에 빠지곤 한다. 왜일까? 자신이 주체성(대상의 정복) [51]한가운데에 있노라고, 드디어 ‘진리’에 도달했노라고 확신할 때, 그는 객체성과 부딪히는 과정, 그 역동적인 과정을 사상해 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3]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만듦은 대개 허구적인 만듦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자기-만들기가 아니라 허구적 주체성에 침잠하는 상상적 만듦일 뿐이다. 실재적인 자기-만들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실재적인 자기-만들기는 늘 쉽지 않다. 타인이란 늘 힘겨운 존재이다. 눈길은 이 힘겨움을 드러내는 곳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자기는 시선들의 교차로에 존재한다. ...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는 그런 눈길들의 총체가 결집되는 그 무엇이다.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나는 그런 눈길들로, 술어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공간을 마련하는 나(소요하는 나), 또는 그런 눈길들과 실제 투쟁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려 행위하는 나(투쟁하는 나)이다. 전자는 그물코들에 속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는 나이고, 후자는 그물코들의 구조를 바꾸어 가는 나이다. 그러나 소요에만 빠져 있는 나는 선상에서 성숙해 가는 나가 아니기에 결국 허구적인/상상적인 나에 그치며,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객체회되는 나는 그물코를 바꾼다면서 스스로를 그물코 구조에 흡수해 들어가는 얄궂은 나에 불과하다.
[58]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와 오류의 실체론적 구분이 아니라, 진리가 오류로 화하고 오류가 진리로 화하는 생성과정(과 그것이 함축하는 주체의 생성과정)이다. 논의했듯이 변이해 가는 이율배반적 구조의 선상에서 생성하는 주체는 곧 인식상의 변이를 겪는 주체이기도 하고 또 진리와 오류가 갈라지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하는 (그 자체 생성하는) 선상에서 살아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진리가 오류로 화하는 과정 즉 ‘역운(逆運)’의 과정이다.
[59]인식이란 본래 순수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며 생존경쟁의 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인식하는 자는 주체가 되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는 객체가 되며, 때문에 인식이란 “먹느냐 먹히느냐”라는 생물학적 현[60]실의 인식론적 버전, 즉 “인식하느냐 인식당하느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결국 주체화와 객체화의 투쟁인 것이다.
[63]정보를 통한 세계의 객체화와 그렇게 형성된 객체성에 의한 주체의 객체화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물론 아직은 상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생각/마음을 객체화함으로써 다시 정보망의 객체로 전락하는 경우일 것이다.
[65]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통해서 스스로를 주체화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결국 그 의미에 의해 객체화화되곤 한다. 의미는 주체가 대상에게 던지는 빛이지만, 공시에 다시 주체에게 되돌아와 형성되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체-화와 객체-화의 이율배반적 놀이는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적 구조를 가진다. 1)세계는 X이다. 2)인간은 세계의 한 부분이다. 3)고로 인간 역시 X이다.
[66]자본주의적-기술적 주체들은 다른 주체들을 객체화해 그들의 프로젝트에 복속시키려 한다. 이런 기도는 특히 TV, 신문, 영상, 인터넷을 비롯한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를 동원해 이루어진다. 다른 주체들은 이런 객체화에 복속되거나 일정 정도 저항한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대중문화’를 어떤 분야/장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소비되는 특정한 양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한다. 실험영화들은 대중문화가 아니지만 『일주일 만에 읽는 칸트』나 「날아라 아인슈타인」등은 대중문화이다.]
[76]자신의 힘으로 포섭하지 못했던 객관적 소여가 주체 속에 녹아들어 감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충한다. 이런 존재는 우선 스스로의 개별성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주체성은 개별성을 전제한다. 주체란 개체적이든 집단적이든 일정한 개별성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개별성은 생명체 특히 동물에게서 두드러지게 성립하며, 따라서 주체화란 생명의 어떤 성격 특히 동물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주체-화가 그 안에 이미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성격을 품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화의 문제는 그 근저에서부터 이미 윤리학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77]‘sub-jectum’(subject)에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아래에 던져진 것’이자 ‘주체’)가 깃들어 있다. 이중체로서의 ‘sub-jectum’이 가지는 이런 동적 구조가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역동화된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의 구조를 형성한다. 인간세는 이런 이중체들의 드라마(사건, 상황)이다.
이런 이중체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타자를 내리누르고 솟아오르려는 욕망과 권력의 드라마이다. 이런 근본적인 구조 때문[78]에 모두가 하나 되는 이상향, 영원한 평화, 완전한 사랑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78]이것은 곧 개체/집단에서의 주체화와 객체화의 균형의 문제이다. 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만큼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자를 객체화하는 만큼 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객체화되는 것. 이러한 주체화와 객체화 사이에 균형이 무너질 때 타자[79]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게 된다.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균형 속에서만 주체화와 객체화를 둘러싼 갈등도 균형을 잡는다.
[82]결국 주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주체들의 균형은 근거 없이 주어진 거대 주체성을 와해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상 이 세상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 어떤 주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 못지 않게 스스로가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요청된다.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투쟁의 삶이고, 그늘을 만들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소요의 삶이다.
[86]거대주체의 형성은 바로 그만큼의 그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주체화∞객체화에서의 폐색(閉塞)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폐색으로부터의 탈주는 항상 ‘되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A가 B가 된다는 것은 A-임에서 B-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상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며, 또한 A와 B의 동일성을 그대로 남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A와 B의 차이를 건너뛴다는 것은 곧 A와 B의 동일성 자체는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차이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에 다름 아[87]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심은 이 ‘차이의 체계=동일성의 체계’라는 거대한 동일성 그 자체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차이들’differences이 아니라 ‘차이화/차이생성’differentiation의 지속적인 운동, 즉 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곧 모든 개체들, 주체들은 사실상 dA, dB .......일 뿐 A, B가 아니라는 생성존재론적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이때 모든 관계는 A와 B가 아니라 dA와 dB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되기란 늘 변별적 동일성들에서의 건너뜀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생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생성, 즉 공히 생성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되기가 곧 타자-되기라 할 수 있다. 이 타자-되기가 모든 윤리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아닐까.
[*차이와 차이화/차이생성을 구분하지 않으면 큰 오해에 빠진다. A, B, C의 차이들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이다. 차이들의 체계가 그 자체 A, B, C의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의 체계=동일성의 체계 자체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차이의 정치학’과 ‘되기의 정치학’을 동일시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되기의 정치학이 무너뜨리려는 것이 바로 차이의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91]수많은 주체들 - 개인적 주체들과 집단적 주체들을 포괄하는 극히 다양한 주체들 - 은 각각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계열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의 이어짐, 끊어짐, 갈라짐, 합쳐짐, 엇갈림 ... 이 성립한다. ... 수많은 ‘우리’들이 갈라진다. 매일 수많은 부부들이 갈라서고, 회사들이 분열되고, 정당들이 따로 살림을 차린다. 하나의 주체가 둘 이상의 주체로 갈라선다. 갈라짐은 하위 주체성들의 [92]형성으로 귀착한다. 이럴 경우 ‘우리’의 술어들은 두 ‘우리’의 술어들로 변환되며, 그로써 술어들의 다른 계열들이 형성된다. 어떤 술어들은 보존되고 어떤 술어들은 파기되며, 어떤 술어들은 변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들이 형성된다.
[93]전체-주체성 안에 그 주체성의 빛을 받지 못하는 그늘이 있을 때, 그렇게 객체화된 그늘은 주체성을 획득하려 하고 그때 전체-주체성에 금이 간다. 그래서 그 금은 정확히 주체화∞객체화의 선상에서 발생한다.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는 경우는 전체-주체성이 그 부분들을 억압할 때이다. ...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는 정당한 전체를 부분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입각해 와해시키려는 경우다.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획득한 권력을 쿠데타로 전복시키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갈라짐은 독특한 ‘이-것’들의 창조가 이[94]루어질 때 진정 의미를 가지게 된다.
[96]한 주체가 타자를 정복하고자 할 때 그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청된다. 그러나 두 주체가 대치할 때 각자는 서로에 대한 허상을 요청한다. 그 허상이 각 주체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각 주체는 타자에 대한 허상을 통해서 내부 결속력(그러나 사실은 지배층의 동일성)을 다져 왔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허상들의 창출에 암묵적으로 공조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박정희와 김일성은 거울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가 붕괴될 때 허상들 역시 무너질 것이고, 그러한 와해는 그 주체의 중심(지배층의 동일성) 역시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의 와해는 각 주체 내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그 핵심 주체에게 압력을 가해 온 역사의 힘(타자들의 힘) 자체였다고 해야 한다.
[97]냉소주의는 모든 섬세한 차이들을 비웃음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98]통일을 통해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통일은 과거의 핵심주체들을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줄 것이다. 즉 민족은 통일될지 몰라도 지배 구조는 와해되기는커녕 강화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그늘이 메워질 때 또 하나의 그늘이 생겨나는 것은 그러한 과정이 진정한 되기가 아니라 거대 주체에 의해 이[99]루어질 때이다. 이 경우 진정한 이-것이 생성하기보다는 구조적인 재조정만이 이루어질 뿐이기에 말이다.
...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저항주체들의 개입이 요청된다. 더 정확히 말해 저항주체들의 상승변증법=상생이 요청된다. 저항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끝없이 차생하는 힘이지만 또한 그 안에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연속적이면서도 (절대 불연속은 죽음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개별화를 가능케 하는 힘 또한 내장되어 있다. 삶의 모든 드라마는 생명의 이런 힘에서 출발한다. ‘우리-되기’ 역시 이런 생명의 힘의 한 발현이다.
[100]사회의 집합론적 구조, 존재론적으론 생명의 배반인 죽음을 또 가치론적으론 불평등을 함축하는 이런 구조를 ‘위’(位)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위인이란 이런 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학적 행위이기도 하다. 무위인으로 산다는 건 단지 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를 겁부하고 허공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무(無)는 위의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위의 잠재성이며, 숱한 위의 형태들이 점선들로 존재하는 허(虛)이다. 무위인이란 이 허의 차원으로 내려가 삶의 또 다른 방식들을 사유하고 현실로 다시 올라와 새로운 이-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그때에만 무위인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되기’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101]인간은 단순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생명체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주체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개체이자 생명체이자 주체이지만, 전자의 두 층위가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지막 층위만이 고유하고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다보면서 사유할 때 주체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으며, 어떤 논의를 하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다.
개체 특히 생명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도 없다. 뇌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해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천박한 경향, 즉 다양한 학문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진정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과과학의 성과를 조악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야말로 인간-주체의 이해에서 무엇보다 우선 극복해야 할 태도이다. 주체의 이해는 무엇보다 그를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주[102]는 어떤 기호, 의미, 상징계, 사회, 문화 - 무엇이라 하든 - 문턱을 넘어서 논의되어야 하며, 이 문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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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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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영부영 이 책을 읽고 있었는데 조금은 정신차리고 읽어야 할듯 싶네요...ㅎㅎ여튼 잼나게 읽고 갑니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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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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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개념들을 쉽게 풀어 쓴 편이라 어렵지 않게 읽히리라 생각합니다. ^^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