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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 등록일
    2009/12/17 20:10
  • 수정일
    2009/12/17 20:10

오랜만에 집에서 늦잠을 자고,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집에서 이것 저것 공상도 하고,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늘 따라다니는 그늘이 난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제는 한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난 사람들이 "때로는 슬프고, 기쁘고 한 게 인생이다" 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때로는'이라는 식으로 기쁘고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에서 언제나 슬프다. 그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스피노자도 고귀한 삶이 힘들고 드물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삶은 늘 슬픔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웃는 낯에 숨어 있기 때문에 슬프고, 하나의 기쁨이 잠시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그 기쁨이 물러났을 때의 지독한 낯설음 때문에 또 슬프고, 그 슬픔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

 

이 슬픔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 수도원이나 산사로 가는 길 밖에 없다. 난 감히 이 꿈을 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잘하게나마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이고, 작은 성취나마 고마워하는 것이고, 단 한 뼘의 진보나마 들뜨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많이 슬프다. 좀 더 늘어지게 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어서 심통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나 '불안'을 짊어지고 사는 이 허튼 육체가 측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슬프고, 그것을 듣는 나도 슬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해결하듯이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나 스스로에게 살의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살의는 이상하게도 건조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이 나이쯤 스스로 죽어간 사람들이 유언장을 쓰지 않고도 족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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