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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의 촛불], 조정환, 갈무리, 2009

  • 등록일
    2009/09/10 00:57
  • 수정일
    2009/09/10 00:57

책을 읽은지는 꽤 되었다. 늘 하던 버릇대로 발췌 했는데, 이래저래 다른 일들이 겹치는 바람에 이번에는 꽤나 시간이 걸린 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책도 서평을 쓰기에는 너무 아득해져 버렸다.  

 

조정환 선생의 노고에 진심어린 존경을 보낼 뿐이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선생 같은 분이 이 땅에 있다는 것은 후학들에게 보기 드문 축복임에 틀림없다. 이 분 자체가 '다른 삶'이며, 그래서 이분의 책 자체가 '다른  세계'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조정환 지음, 『미네르바의 촛불』, 갈무리, 2009

 

책머리에

 

1부 촛불의 논리, 윤리, 그리고 생리

촛불: 유령인가 중간계급인가 다중인가?

보수에서의 촛불유령론 19

진보에서의 촛불유령론 20

촛불 중간계급실체론 28

촛불 과잉아나키즘론 31

다중으로부터의 도피 35

제헌권력: 대중들, 민중, 천민, 그리고 다중 39

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운동과 정치 54

승리라는 문제 혹은 감각의 혁신을 위하여 65

 

파시즘에 대항하는 촛불

근대적 전체주의와 수용소 파시즘 71

탈근대적 전체주의와 삶권력의 파시즘 76

삶권력의 정치적 계급적 토대와 그 전략 78

탈근대 파시즘 속에서 삶정치의 가능성 80

한국에서의 파시즘의 운명: 이명박 대 촛불 81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머리글 87

촛불봉기의 발생조건 89

촛불봉기의 전개과정 93

권력의 대응 변화 106

촛불봉기의 특징과 새로움 107

집단지성과 봉기의 새로운 기술 123

촛불권력의 현재적 장애와 한계 128

촛불봉기의 쟁점과 새로운 과학 131

촛불봉기는 무엇을 바꾸고 있는가? 138

맺음말: 미래 운동의 새로운 로두스 141

 

금융위기와 촛불의 시간

미국발 금융위기와 국유화 145

자본주의 위기의 역사 속에서 서브프라임 위기 147

서브프라이머의 입장에서 본 금융위기 151

신자유주의의 위기와 촛불 155

 

2부 촛불 현장에서: 기록과 성찰

뉴라이트 한국과 촛불

현대의 자본순환과 뉴라이트 161

뉴라이트 우파 정부의 성격: 순수자본독재 167

이명박 정부의 반혁명 170

뉴라이트 한국 20년 결산 173

무력 174

법 176

공안탄압 179

언론과 문화 182

화폐정치 185

테러 188

지배의 피라미드와 촛불 192

 

사회운동의 새로운 순환과 촛불

촛불의 발생계기: 삶정치적 복합문제로서의 광우병 197

노동의 재구성과 촛불 200

촛불과 욕구노동 204

촛불과 코뮤니즘 208

민민연과 애국촛불 212

 

촛불봉기의 주체성

다중의 형상들 221

문명, 시민, 시장과 촛불 244

 

촛불봉기의 특이성

중앙지성, 집단지성, 다중지성 247

다중지성의 미네르바 257

질서화와 (자기)조직화 262

삶정치와 그 무기들 279

계획으로서의 촛불과 욕망으로서의 촛불 292

 

촛불의 헤게모니와 민주주의의 전망

국가권력 293

촛불운동 297

민주주의 311

 

촛불의 쟁점들

촛불은 오합지졸인가? 329

폭력인가 비폭력인가? 331

다시 무기의 문제 345

민족주의라는 쟁점 347

금융자유화도 금융국유화도 아닌 다중의 공통되기와 자치 352

촛불은 일시적인 것인가 영원한 것인가? 356

 

3부 촛불테제

촛불테제 1: 금융위기와 촛불테제

촛불테제 2: 이명박과 강인한 테제

 

촛불봉기 일지

참고문헌

 

[5]촛불은 두 가지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사회정치적 차원이다. 2008년에 우리는 촛불이 낡은 사회의 닫힌 문을 밀면서 새로운 사회를 열어가는 모습을 뚜렷이 목도했다. 생명을 위협하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결정에, 일제고사에, 대운하에, 비정규직에, 뉴라이트에,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항의하며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들려졌던 촛불들, 이것이 사회정치적 차원의 촛불이다. 또 하나는 존재론적 차원이다. 사람들이 손에 촛불을 켜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그렇지 않을 때조차 존재론적 촛불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영혼 속에 켜져 있다. 언제나 삶을 인도하는 것은 촛불이다. 촛불을 들고 거리에 나서는 것은 이 존재론적 촛불, 영혼의 촛불을 가시화하고 사회화하는 행동이다.

 

[6]그러나 우리는 안다. 광기란 말은 다중의 활력에 공포를 느끼는 낡은 질서가 그것을 가두기 위해 사용하는 형틀(푸꼬의 『광기의 역사』)이라는 것을. 유령이란 말은 낡은 질서를 위[7]협하는 혁명의 능력 앞에서 공포에 질린 질서가 내 쉬는 탄식이라는 것(맑스와 엥겔스의 『공산주의자 선언』)을. / 이 신성동맹의 총력전이 확인해 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촛불이 한국의 모든 정치세력으로부터 분명히 실재하는 하나의 정치적 힘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 그렇다면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은 망각되거나 부인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촛불은 광기다’라는 말 속에는 현존하는 권력질서가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괴물적 힘에 대한 강렬한 인정이 들어 있다. ‘촛불은 유령이다’라는 말 속에는 지각할 수도 접근할 수도 측정할 수도 없는 힘에 대한 인정이 들어 있다. 사건을 볼 없고 오직 사물만을 볼 수 있을 뿐인 경직된 눈으로 볼 때, 촛불의 힘은 ‘광기적’이며 촛불의 운동은 ‘유령적’이다. 반촛불 신성동맹은 ‘광기’, ‘유령’과 같은 공포의 언어형식 속에서 촛불의 존재론적 차원에 대한 더 없이 분명한 인정을 표현하고 있다. / 그러므로 지금 촛불은 이 공포의 언어형식을 긍정의 언어형식으로 뒤집고 지금까지의 직접행동들이 드러낸 새로운 경향에 좀 더 분명한 이름을 주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특이한 다양성들이 좀 더 강도 높은 공통 언어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들어 나가야 한다. 이것을 통해 지금의 부정적 인정을 긍정적 인정으로 전환시키고 촛불이 발명한 새로운 경향이야말로 되돌릴 수 없는 역사의 이정표임을 몸과 두뇌, 활동과 언어 모두의 힘으로 입증해 나가야 한다. 이 책의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는바, 권력에서 활력으로, 민중에서 다중으로, 당에서 네트워크로, 국가에서 코뮌으[8]로, 민족주의에서 코뮤니즘으로의 언어학적 전환과 혁신에 대한 강조는 지금까지 촛불이 연 새로운 정치평면을 분명히 밝히고 한 걸음 더 전진하기 위한 담론적 진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다.

 

[9]우리의 촛불은 저녁에 타올라 시간을 수놓았다. 그래서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녘이 아니라 새벽녘에야 울 수 있었다. ... 존재론적 차원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것, 즉 촛불이 삶과 세계를 변형시키는 힘이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사회정치적 차원의 승리와 동의어인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촛불이 꺼졌다고, 촛불이 패배했다고 말할 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이 차원이리라. 역사는 우리에게 혁명들이 패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시간에도 실제로는 그것이 거대한 도약을 하고 있음을 여러 차례 입증해 주었다. 그래서 혁명은 영원하다고, 촛불은 영원하다고, 촛불이 승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존재론적 차원의 승리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까지 폭발시키고 확산시키는 임무가 면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역사적 혁명은 실제로는 존재론적 능력을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실현하려는 부단한 과정 그 자체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아테나 여신 미네르바는 지혜의 신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신이다. 지성의 신이면서 동시에 행동의 신이다. 직접행동이 지성을 우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22]대중은 이미 알지만 넘어서기를 꺼려하는 한계를 갖는다. 대중은 스스로의 힘으로 횡적인 연대와 보편성의 정치로의 주체적 전화를 달성할 수 없다. ... 이렇게 이론의 특별한 지위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자기생산 능력의 필연적 한계가 가정되고 전제되어야 한다. ... 그런데 다중들이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을 거리낌 없이 넘어서고 다중지성이라는 새로운 지성형태를 창출한 것은 바로 자신들에게 강제 부과되어온 그 ‘필연적’ 한계들이라는 임의의 가정들과 전제들이 부당하고 허구적인 것들이라 것을 깨닫는 순간이 아니었던가? ... [23]이론의 특별한 지위란 지식이 권력과의 공모 속으로, 즉 지식-권력 체제의 동력으로 편입되어 들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거짓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다중의 특이성들의 공통화를 가능케 할 이론은 다중의 삶과 투쟁의 경험들 외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내부에서 다중과 어떤 경계도 없이 뒤섞인 가운데에서만 고유하게 생산될 수 있는 사건으로서의 이론이다. 이것은 어떤 특별한 지위도 요구하지 않으며 그래서 권력으로서의 이론이기를 거부하는 이론이며 특정하게 경계지워진 이론가 집단이 아니라 삶과 투쟁의 경험 속에 있는 다중들의 지성적 소통과 연결 속에서 생성되는 내재적 이론이다. 아고라와 그것에 합류되었던 다양한 커뮤니티들, 웹사이트들, 블로그들에서 이루어진, 그리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는 지성적 활동들은 결코 ‘대중의 조력자, 지원자’라는 비루한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보고, 분석, 비판, 상상이라는 사유의 행동들은 집회와 시위의 몸 행동들과 결코 분리되지 않았으며 그 연결을 통해 다중은 자신의 경험들이 매순간 직면하는 경계들을 한걸음씩 혹은 도약적으로 넘어서곤 했다.

 

[24]그렇지만 촛불은 그 어떤 성과도 낳지 못한 채 마치 한 여름 밤의 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닌가? 촛불은 꺼졌고 이후에 오히려 상황은 악화되고 있지 않은가? ... [25]촛불환상론은 지속, 반복, 실체, 성과에 대한 애착에 굳게 터를 잡고 있다. 이 이론이 말하는 진보는 반복을 통한 실체적이고 가시적인 성과의 지속적 축적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진보를 가져올 수 없는 것은 환상이며 유령이다. ... 여기서 우리는 촛불환상론의 진보 [26]관념이 촛불로 인한 사회적 (사실은, 권력과 자본의) 손실액을 들이밀며 피해보상청구를 탄압의 무기로 사용했던 보수들과 맺고 있는 철학적 동맹을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냉정한 실리주의와 근대적 계산주의이다. 그것은 지속의 무덤 아래에 단절을 묻고, 반복의 그물로 차이를 포획하며, 잠재적 활력을 실체의 관에 봉하고 성과의 주판놀이로 과정의 기쁨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사건의 시간을 지속의 시간으로 바꾸는 것, 살아 있는 시간을 죽은 시간으로 바꾸는 것, 아니 차라리 시간을 공간 속에 닫아보리는 것. 이 관념적 변환을 통해서 주체는 대상으로 내몰리고 표현은 재현의 거울상으로 전도되며 활력은 권력 앞에 피고로 무릎 굻려진다.

 

[27]운동은 결코 실리적 성과들과 그것의 축적을 보장하지 않는다. 진보를 성과의 축적과 지속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삶과 운동이 적대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전한 몰각에 기초한다. 지속되는 것은 권력이지 삶과 운동이 아니다. 운동은 권력에 대한 단절로서, 권력을 위기에 빠뜨리는 잠재력으로서, 전체를 열어 새로운 지평으로 이동시키는 차이로서 존재하는 힘이다. 중요한 것은 권력과 자본의 지속이 단절과 위기와 열림인 이 삶의 활력에 대한 의존의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이 노동의 물신화를 통해서만 살아가듯 권력은 활력의 실체화를 통해서만 살아가기 때문이다. ... [28]이런 의미에서 이명박 권력은 촛불에 대한 의존성에서, 촛불과 함께 살아나가지 않으면 안 될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 진보를 지속과 반복의 철학 위에 정립할 때, 그 진보는 다른 방식으로 수행되는 권력 정치 이상일 수 없다.

 

[35]촛불에 대한 냉소가 생산하는 것은 촛불이 직면한 한계를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는 것이다. / 촛불의 정치를 권력의 정치로 대체하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들, 기법들은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은 이러한 대체가 다중으로부터의 도피를 전제로 한다는 것이다. 촛불을 유령화하려는 보수와 진보의 노력은 다중을 ‘정보전염병’에 걸린 환자로 분류하거나(이명박) 이념방송이나 인터넷이나 유사과학에 의해, 요컨대 괴담에 의해 조종되는 꼭두각시 인[36]형들로 격하시키거나(『조선일보』와 백승욱) 스펙타클에 매혹당한 구경꾼 혹은 산책자로 조롱하거나(이택광), 약자들을 배제하는 통일된 계층 즉 중간계급으로 환원시키는(은수미, 김보경, 정용택(123)) 것들이었다. 이 사변적 요술들은, ... 촛불이 곧 민주주의라는 “암묵적인 주장”과는 거리를 두는 것 ... 촛불은 민주주의적인 정치적 주체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기획 하에서 ... 촛불에게 유령, 구경꾼, 스파이(이택광), 약자에게 무관심한 배제자들, 중간계급, 절망에 빠진 대중(백승욱 50) 등의 잔혹한 낙인을 찍는다.

 

[37]“[1]촛불집회가 대중 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였던 것은 사실이다. [2]그러나 그것이 ‘대중지성’, ‘다중의 자율성’에 대한 찬미의 주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3]네그리의 다중론과 1968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이런 논리의 비약을 뒷받침한 주된 근거이기는 했다”(백승욱 44, 강조는 인용자). 서동진이 ‘운동의 정치로서 촛불 시위에 관하여 준열한 반성을 시도’한 글이라고 소개한 이 글에서 백승욱은 세 개의 문장을 전개하면서 두 번의 무조건적 단언을 행하고 있다. 다중이 [38]무엇인지, 자율성이 무엇인지, 대중지성이 지시하는 바가 무엇인지, 네그리의 다중론과 그것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어떻게 다른지, 1968년 혁명에 대한 단순한 해석은 단순하지 않은 해석과 어떻게 다른지를 이해할 수 없다면 어떻게 그 논리가 비약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단 말인가? 또 촛불집횡에서 드라난 바의 저 ‘대중역량의 자율성을 보여주는 계기’를 누군가가 다중의 자율성이라고 명명한다면 왜 그것이 ‘논리의 비약’인가? 그것을 ‘찬미의 주장’으로 취급하고자 하는 의도의 과잉으로부터 백승욱 자신이 다중 개념에 대한 실제적으로 ‘단순한 해석’을, 아니 차라리 비난을 쏟아내는 ‘논리적 비약’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만약 내가 옳게 읽고 있는 것이라면 논술의 기초조차 파괴할 정도로 파탄난 이 사고전개 위에 기초한 ‘무조건적 단언들’의 나열을 ‘준열한 반성’이라고 읽어 주면서 권위를 부여해 주는 이 지식 공동체의 ‘사유의 정세’가 실로 심각한 위기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 것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촛불이 민주주의적 주체가 아니라는 주장이 촛불의 내적 구성, 그 동태를 분석하고 차이를 식별하는 일보다 분석에 앞서 세워진 가정들과 척도들로 촛불을 재단하기를 좋아한다는 것 ...

 

[42]만약 하나의 이념에 의해 단단히 결속된 사람들이 형성된다면 그것은 이미 대중masses이라는 “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 흐름”(140)일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단일한 이념을 갖는 주권을 정립하는 주체형상으로서의 역사적 국민nation이나 인민people에 상응할 것이다. 그러한 집단은 능동성과 수동성을 함께 갖지만 능동적으로 보이는 그들의 행위마저도 주권의 명령에 따르는 행위, 즉 수동성의 표현형태라는 점에서 수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다중도 수동성과 능동성을 함께 갖지만 수동성마저도 능동성의 표현양식이라는 점에서 능동성에 의해 지배된다. “배우면서 가르친다”, “복종하면서 명령한다”, “물으면서 걷는다”는 사빠디스따의 경구들이 다중의 존재론적 특질을 표현한다. 다중은 그 환원할 수 없는 특이성 속에서는 다중multitudes이며 그것의 공통되기 속에서는 다중multitude이다. ... [43]투쟁의 새로운 순환 속에서 탄생하는 다중들은 자신들의 특이성을 잃기를 원치 않는다. 그들은 능동적이기 위해서만 수동적일 뿐이며 환원불가능한 복수성과 이질성 속에서만 공통될 뿐이다. 특이성의 공통화는 이념적 공통화와는 다른 공통화의 능력, 방법을 요구한다. 즉 코뮤니즘의 다른 길을 요구한다. 복수적인 다중들이 그 환원할 수 없는 복수성 속에서 하나의 다중으로 행위할 수 있게 만드는 방법은 이제 이념적 당이 아니라 횡단적 네트워크의 형태에서 찾아지기 시작했다. 이것이 아무리 불만족스럽게 느껴진다 해도 그것은 되돌릴 수 없는 시작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비추어 볼 대, 단일한 이념의 부재를 한계로 보는 시각은 낡았다. 그것은 새로운 투쟁순환에 대한 불철저한 인식, 그리고 이 새로운 공통화의 노선과 경향을 발견할 수 없는 무감각, 전진하기를 주저하면서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모델을 빌려오고자 하는 퇴행성에서 발생하는 감수력과 시력의 한계를 오히려 운동의 한계로 역투사함으로서 발생한다.

 

[44]“대한민국 국민이 대한민국 내부에만 존재하는 것과 달리, 대한국민은 대한민국과 이중적 관계를 맺게 된다. 대한국민은 대한민국 헌법 내부에도 있고, 동시에 (그 법을 만들 자들로서) 외부(다른 차원)에도 있을 수 있다. (......) 촛불시위대가 헌법이라는 상징적 질서 안의 주어일 뿐인 ‘국민’-언표의 주체-이 바로 자신들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함으로써 ‘국민’을 언표행위의 주체로 집단적으로 현전시켰을 때, 거기에는 분명 중대한 변화가 존재한다. 나는, ‘우리, 국민은 … ’이라고 주권선언을 하면서 발언하는 이들이 분명 제헌적 권력(‘대한국민’)이 있던 것과 동일한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비유컨대 명목상 주어로 헌법 안에 갇혀 있던 ‘국민’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상징질서) 안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국가 바깥에서 그것을 대상으로, 대자적으로 바라보는 자들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당연히 헌정질서를 그 기원의 순간으로 데려간다. (......) 촛불 대중(대한국민)들의 ‘헌법-안으로의-월경’과 법전에만 존재하던 ‘국민’(주권자)의 ‘법전-밖으로의-월경’을 목도한 특권층들, 사실상 ‘법에 우선해’ 국가를 제 것인 양 다룰 수 있었던 자들이 느꼈을 경악과 공포가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간다. ‘저것들이 우리 손에서 국가를 빼앗으려는 구나!’”(한보희, 262-3)

 

[45]권력이 느끼는 그 무서움과 두려움이란 제정된 틀 안에 있는 듯 하면서도 그 틀을 벗어나면서 그 틀으 비틀고 변형시키기를 주저하지 않는 저 ‘괴물’ 앞에서의 막막함일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청와대, 의회, 법원에 그들이 출석해 있지 않을 때에조차도 정책, 입법, 판결의 행위들 속에서 늘 (내키든 내키지 않든)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실재적 유령에 대한 감정일 것이다. 어쩌면 그 감정은 분명한 대상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두려움이라기보다 일종의 불안, 정치적 불안에 가까운 것일지 모른다.

 

[48]훈육권력의 생명권력으로의 전화는 권력의 자기진화가 아니라 그 밑 삶의 생산과 재생산의 지형에서 전개되고 있는 다중의 생성에 권력이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반작용의 형식일 뿐이다. 생명권력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배코드를 장악하고 있었던 훈육권력과는 달리 매순간마다, 매계기마다 지배의 형식[49]을 발명해야 하는 위기로 내몰린다.

 

[54]촛불에 대한 무수한 오해들은 이 거대하고 또 장구적일 수밖에 없는 흐름에 단일한 정체성을 부여하여 정의하려는 환원의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 촛불은 실재하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기존 질서의 어떤 자리에 할당하기에는 특이하고 괴물스럽다는 점에서 유령이기도 하다. 촛불은 결코 중간계급의 행동으로 환원될 수 없지만, 촛불비판가들이 ‘중간계급’, ‘중산층’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행위자들이 촛불봉기에 참가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 [55]이들 지대임금노동자각 촛불의 전부였던 것은 결코 아니고 이들이 촛불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촛불에서 주도권을 쥐려고 했던 모든 시도들은 좌초되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56]‘촛불은 비정규직을 배제했다’는 촛불비판가들이 널리 공유하는 생각은 편협한 환각이다. 초기의 촛불이 광우병 위험소 수입에 대한 항의에서 촉발되었고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들과 일정한 거리를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촛불에는 비정규직의 노동자들이 처음부터 다수 참가했다. 비정규직인 사라이 비정규직 노동자라는 단일한 정체성만을 갖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비정규직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자/녀를 둔 어머니/아버지이고, 국민이고 민중이며, 쇠고기 소비자이고, 신문구독자이고, 방송청취자이며, 선거권자이고 ...이기 때문이다. 촛불이 이미 전개되고 있던 비정규직 투쟁현장들(KTX, 이랜드, 기륭, 코스콤 들)과 즉각적으로 결합되지 않았던 것을 촛불의 중간계급적 성격 때문으로 투사하는 것은, 비정규직 투쟁이 어떻게 하면 더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호소력 있는 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을까를 투쟁방향, 투쟁과제, 투쟁방식, 동원과 조직화 방법 등의 모든 측면에 걸쳐 검토하고 혁신해야할 내적 문제를 회피하도록 만든다. ... 촛불 비판가들의 중간계급론[57]은 촛불이 광우병 의제를 넘어 발전하면서 점점 더 깊이 (거리투쟁과 현장투쟁 모두에서) 비정규직과 결합되어 갔고 용산 철거민 투쟁들과도 즉각적으로 결합되었던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잘못된 사실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57]촛불에는 비폭력을 옹호하는 주장만큼 폭력을 옹호하는 주장이 공존했다. 제도화를 경계하는 생각만큼 제도화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국가를 부정하는 생각만큼 국가를 옹호하는 생각이 공존했다. 이 중 어느 것이 더 강하게 분출하고 어느 것이 약화되는가는 시간과 상황에 따라 달랐다. 그렇기 때문에 문제는 이 합류된 다양한 경향들 속에서 어느 하나를 옳은 것으로 선택하고 나머지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 조건들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지각하는 방법, 느끼는 방법, 생각하는 방법, 연결하는 방법, 결정을 내리는 방법, 행동하는 방법 등 다양한 차원에 걸쳐 이 시공간에 합류한 모두가 달라질 필요가 있다. 요컨대 촛불이라는 사건 자체가 지금까지의 민주주의의 관념, 제도, 기술, 구성 등의 근본적 혁신을 [58]요구하는 상황 속으로 우리 모두를 끌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여기서 우리가 촛불이라는 사건을, (자본의 새로운 순환에 대응할 뿐만 아니라 깊은 심층에서는 실제로 그것을 이끄는) 투쟁이 새로운 순환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징후로 읽어야 한다면 바로 이 때문이다. 투쟁의 새로운 순환은 삶과 운동과 정치의 모든 것을 변형시키는 사건이다. 그렇다면 투쟁의 순환이 어떻게 갱신되고 있단 말인가? 20세기 중후반 전세계적 대중노동자들의 투쟁은 산업자본주의에서 인지자본주의로의 사회구성의 변화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의 주권의 변화를, 훈육권력에서 통제권력(삶권력)으로의 권력성격의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대중노동자에서 사회적 노동자로의, 민중에서 다중으로의 주체성의 변화를 가져왔다. 촛불은 지구상황 속에 편입된 한국에서 산업노동과 대중노동자가 주도했던 투쟁의 한 순환이 종결되고 비물질노동의 헤게모니 하에서 기존의 산업적 공간적 지역적 세대적 경계를 넘어 구성되는 다중이 새로운 정치적 주체성의 형상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62]다중은 민중, 인민, 국민이라는 주체성들이 구성했던 안전보장 장치인 국가와는 다른 형태의 공동체를 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과제 앞에서 애국과 민족을 중간 계급의 이데올로기로 할당하는 편리하나 무익한 태도를 반복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애국은 이 국가 아닌 공동체에 대한 사랑으로, 애족은 근대적 의미의 민족과는 다른 공통적 주체성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되고 변형될 때에만 투쟁의 새로운 순환의 동력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촛불 속에서 제기되는 애국, 애족의 요구 속에는 2002년 월드컵 응원이나 사빠띠스따의 대문자 민족 속에서 나타났던 바[63]의 국가 없는 나라사랑에로의 열림의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63]이를 위해서는 비제도적 영역에서의 저항력과 구성력의 자율적이고 자립적인 축적이 기반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운동 정치를 기반으로 선거 정치에 다양한 방식으로 개입하는 것이 필요하고 또 가능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삶권력의 상황은 소수의 전위적 힘으로 세계를 변화를 달성할 수 있다는 고전적 표상을 끝낸다. 수만,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의 단결된 힘으로 나머지 더 큰 대중의 세계를 변[64]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시대는 끝났다. 삶정치적 활력은 삶권력을 균열시키면서 그것이 항상 위기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힘이다. 이것은 운동과 정치 사이에 경계를 긋고 그 중 어느 것의 힘만으로 변형을 실현할 수 있다는 믿음보다 훨씬 더 유연하고 전염적이다. 삶정치적 활력은 생산, 사회, 운동, 정치, 문화 등의 모든 차원에서 다중의 가능한 능력 전체가 표현되도록 함으로써 주어진 세계를 새롭게 열어나가는 영구적 과정이기를 요구한다. ... 사람들의 이 자율적 행진을, 지금 우리가,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의 경계를 넘는 절대민주주의의 개시라고 부른다면 그것이 왜 문제이겠는가? 절대적 민주주의의 행진 속에서의 촛불들은, 승리에 대한 맹목적 확신이나 유토피아의 손쉬운 도래에 대한 믿음을 갖는다는 의미에서가 결코 아니고, “죽음의 공포에 이끌리지 않고 직접적으로 선을 욕구한다”는 의미에서, “모든 일 중에서 죽음에 대해서 가장 적게 생각하고 그의 지혜가 죽음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삶에 대한 성찰에 있다”는 의미에서 절대적 낙관을 갖는 자유인들이다. 그리고 거꾸로 이 자유인들이 죽음의 과잉과 죽음에 대한 과잉 성찰에 오염된 세계를 밝히는 촛불들이다.

 

[66]촛불이 ‘승리한다’는 것은 촛불이 죽음의 세계를 비추어 밝히면서 삶을 개방하고 또 변형하고 있다는 현재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지 성과물을 획득하여 분배할 시간잉 올 것이라는 미래 사태를 단언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촛불이 승리한다’는 사람들=삶들이 낡은/죽은 세계의 변형을 위해 힘을 모으는 (즉 협력하는) 운동 속에 있음을 표현하는 말이다. 자유인이 죽음을 모르듯이 촛불은 패배를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승리하다는 촛불의 속성이지만 패배는 촛불의 속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67]패배란 (업적의 시각에서 보면 성과물을 놓치게 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업의 시각에서 보면 협력의 붕괴敗로 인하여 힘들이 서로 등져 있는 상태北를 지칭하는데 촛불은 정확히 이 등짐의 부정, 즉 껴안음(연결, 연대, 공명, 공통화, 네트워킹)의 활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촛불비판가들이 말하는 ‘촛불이 패배했다’란 말은 마치 ‘원이 네모나다’란 말처럼 형용모순에 지나지 않는다. ... 그러므로 승리의 문제와 관련하여 촛불에 대해서는 ‘촛불은 승리한다’ 이외의 어떤 다른 시간 표현도 적절치 않으며 그 표현이야말로 촛불의 힘과 성격을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77]탈근대적 전체주의 기계는 삶의 수준에서 진행되는 대중의 활발한 분자화와 혼종화 즉 다중화를, 그 역시 분자화된 자본의 네트워크화와 그에 입각한 전지구적 통제를 통해 통합하려 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세계부르주아지는 대중의 분자화 운동의 대두에 직면하여 나타난 사회주의/사회민주주의 위기 상황에서 그 어떤 통치형태보다 더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했던 파시즘에 다시 호소하는 길을 선택한다. 탈근대의 자본지배[78]는 대중의 분자화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에 일면적 억압으로 대응하거나 혹은 대의적 사회계약으로 대응하지 않고 오히려 자본 자신의 분자화와 미시화를 통해 이에 대응하려 한다. 자본은 삶으로부터 노동을 분리시키고 그것을 집중시켜 착취하는 방법으로부터 삶의 수준으로 내려가 그것의 분자적 미시적 운동 자체를 활성화하면서 그것을 수탈하는 방법으로 전술을 전환한다. 이것이 탈근대 파시즘으로서의 삶권력의 대두이다.

 

[78]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의 단순한 복구가 아니다. 근대 파시즘은 분자화하는 흐름들을 장려하면서도 그것들이 서로 수평적으로 연결접속되도록 하기보다 노동, 인종, 국가, 전쟁의 끈으로 묶었고 주권 아래에 종속시켰다. 근대 파시즘은 이 때문에 한편에서는 격렬한 분자화,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잔혹한 전체주의화의 이중과정으로 나타났다. 파시즘 권력은 ... 외부적인 것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탈근대적 파시즘의 삶권력은 더욱 격렬하게 분자화하는 삶과 삶시간에 직접 대면하여 그 내부에서 기능한다. ... 삶시간은 ... 권력pouvoir의 척도 너머로 움직이는 창조적 능력puissance으로서의 활력의 시간이다. ...[79]근대의 자본과 권력은 이처럼 삶에서 노동을 분절하는 것에 의존했다. / 파시즘의 탈근대적 부흥과 삶권력화는 이제 삶시간 전체의 자본에로의 포섭을 시도한다. 그것은 한편에서는 자본의 권력의 증대이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자본이 자신의 척도권력(가치법칙)을 잃고 늪으로 빠져듦을 의미한다. 그래서 탈근대적 삶권력은 직접적으로 삶활력을 자신의 축적기반으로 확보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사활을 걸게 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금융화, 사유화, 정보화, 요컨대 자본 자체의 분자화와 미시화는 삶을 직접적인 축적기반으로 확보하기 위한 자본의 유연화 전술들이다.

 

[79]척도너머의 삶능력을 지배하기 위해 권력이 선택하는 길은 두 가지 벡터로 구성된 하나의 길이다.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대중의 일부에게 잉여가치의 일부를 분배하여 이들이 자본주의의 생존에 이해가 걸린 그것의 적극적 구성부분으로 기능하도록 만드는 것이다(임금의 지대화). 또 하나의 벡터는 노동하는 일부에게 임금 이하의 몫을 지불하고 이들을 부단히 외부화하고 배제하여 인위적인 제4세계를 창출하는 것이다(지비정규직화 및 불안정화). 이것은 삶권력이 시도하는 대중의 분할이라는 단일화 과정의 양면이다.

 

[80]삶능력은 무엇보다 창조력이며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구성력이다. 이 힘은 권력과 삶이 아니라 특이한 다중들이 서로 반려종(해러웨이)으로서 협력할 수 있을 것을 요구한다. 상보적 면역체계의 패러다임(에스또지또)도 삶과 권력의 타협의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보다는 특이한 다중들의 협력적 상호관계를 파악하기 위해 사용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면역 패러다임은 민주주의적 구성의 과학(매디슨)을 혁신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81]충분하지 않다. 삶능력의 이 민주주의적 구성과정은 살게 하기 위해서 죽이기를 반복하는 삶권력의 폭력기관들을 무력화하거나 해체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레닌). 그러나 이것을 위해 삶능력이 민중의 권력을 위해 행사되었던 대항폭력과 같은 것으로 될 필요는 없다. 대항폭력은 주권이 행사하는 폭력과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예속시킬 다른 주권을 생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중의 삶능력이 행사하는 폭력은 삶권력의 폭력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고 다중의 탈주를 용이하게 하며 특이한 존재들 사이의 소통을 확장함으로써 궁극적으로 ‘협력을 생산하는 힘’이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권력을 파괴하면서 새로운 협력을 생산하는 삶능력의 이 두 측면을 함축하는 것이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이다.

 

[82]그런데 이명박 정권은 과연 대중의 분자화를 자극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은 강한 분자운동을 보여준 대중에게 족쇄를 씌우고 컨테이너 장벽, 전경 장벽, 장보 장막, 거짓말 장막을 설치한다. ... 그 결과 대중은 그램분자화되어 다시 무거운 유형의 계급집단으로 집계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대중의 분자화는 이명박 정부의 등장 이전에, 특히 노무현 정부에서 더 강하게 자극되었다고 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이명박 정권에 의해 강하게 추진되는 것은 분자화가 아니라 전체주의화다. ... [83]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의 이행은 파시즘 발전의 이 두 역사적 단계를 압축적 방식으로 재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분자화 중심에서 전체주의화 중심으로 초점의 이동! 파시즘의 활성국면에서 쇠퇴국면으로의 이동!

 

[85]이명박 정부는 탈근대 파시즘이 급속히 쇠퇴의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예견되고 또 경험되는 시대의 말기 파시즘적 징후들을 보인다. 그것은 점점 더 사법, 감옥, 폭력, 전쟁, 인종주의, 여론조작, 거짓말 등에 더 많이 의존하면서 자신의 기반을 침식하고 붕괴를 향해 질주한다. 정규직 노동자에게 주어졌던 혜택들의 침식, 요컨대 주식시장의 붕괴로 인한 배당금의 실종, 부동산 가격의 폭락으로 인한 지대 수입의 소멸, 연금들의 부후(腐朽)로 인한 임금지대의 위기 등은 결국에는 파시즘 그 자체의 기반을 송두리째 허무는 것으로 작용할 것이다. ... 2008년에 불붙은 촛불은 쇠퇴하는 탈근대 파시즘 체제로부터 대중의 이탈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것은 전체주의화를 거부하는 분자화에 대한 열망의 분출이다. ... [86]탈근대 파시즘은 근대 파시즘과는 달리 단일하게 결속시키기 어려운 복잡하고 혼종적인 다중을 창출했다. ... 우리는 촛불 속에 ‘분자화를 활성화하는 전체주의화’라는 파시즘적인 모순적 욕망이 잠재해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 문제는 탈근대 파시즘의 이 전체주의적 쇠퇴 국면에서 인종주의적 전체주의, 노동주의적 전체주의, 자유주의적 전체주의로 귀결되지 않으면서도 그렇다고 절대적 분자화로 귀결되지도 않을 정치적 가능성을 발견하고 구축하는 일이다. 그것은 분자적 특이화들의 연결접속, 즉 공통화의 가능성에 다름 아니다.

 

[102]이 경향적 저하는 촛불로는 안 된다는 절망감, 촛불을 들기 두렵다는 공포심 등이 결합된 결과이다. 결코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만족감이나 현재의 권력에 대한 지지로의 전향의 결과가 아니다. ... [103]하지만 이것은 촛불이 꺼지는 과정이 아니라 촛불이 내면 깊숙이 잠재화되는 것일 뿐이다. 절망감과 공포심은 해방의 감정이 아니라 억압된 감정이며 그것은 언젠가는 다시 표면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는 정서이기 때문이다.

 

[104]거리에서는 군사적 해법이 가장 큰 관심을 끈다. 그러나 군사적 승리는 촛불의 실패를 의미할 것이다. 군사적 수준에서의 최대의 것은 방어를 넘는 것일 수 없다. 정치적 해법은 제도화를 추구한다. 하지만 이러한 의미에서의 정치적 승리 역시 촛불의 붕괴를 의미할 것이다. 부르주아적 제도화 자체가 촛불의 매장자이기 때문이다. ... 대안적 삶의 가능성과 그것의 입증이야말로 촛불의 승리를 향한 가장 확실한 일보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 생활밀착형 촛불로의 전환과 혼동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생활에서 정치로의 상향과 그것의 군사적 보완의 [105]방향은 군사나 정치에서 분리된 생활이라는 방향과는 구분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15]촛불은 단일쟁점 운동인 듯 보이면서도 실제로는 우리 시대의 어둠을 고발하고 규탄하고 해결하려는 존엄의 운동이다. 이 운동은 누구나가 동의할 수 있고 사전에 규정되어 있는 어떤 정치적 목적에 의해 규정되기보다 개개의 사안 속에서 목적과 방향을 생산하고 발명해 나가는 역동적 성격을 갖는다.

 

[119]절대적 폭력의 비폭력 형태나 저항적 비폭력 형태 혹은 방어폭력의 형태는 권력이 항시적으로 사용하는 선제폭력(현존하는 부르주아적 권력체제 그 자체가 구조적으로 실존하는 선제폭력의 형태이다)과 결코 대칭적인 것이 아니다. 대칭적이고 대항적인 폭력의 구사가 현존하는 폭력에 대한 부분적 부정일 뿐이라면 비폭력이나 저항적 비[120]폭력, 그리고 그것의 높은 수준인 방어폭력은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면서 다중의 공통된 힘이 상황에 따라 표출되는 현상형태이다. ... 절대적 폭력은 모든 시민상태들을 근본에서 규정하는 자연상태이다. 그것은 행동하고 저항하고 투쟁하기를 멈추지 않으면서도 자신을 선제폭력으로 표현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것은 상황에 따라 비폭력, 저항적 비폭력, 방어폭력 등으로 현현하면서 자신을 생명의 존엄과 삶의 (비록 잠재적일지라도) 절대적 공동체로, 생명들 사이의 혁명적 협력을 가능케 하는 절대적 폭력으로서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촛불은 총과 다르다. 그것은 국가정치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삶정치의 무기이자 절대적 폭력에 기초하여 발생한 모든 사람의 보편적 협력, 공통되기이며 인류 공동체의 실재성을 알리는 상징이 아닌가?

 

[121]대의민주주의를 직접민주주의로 대체하는 것이 촛불운동의 목표가 아니라 절대적 제헌권력의 실재성을 입증하고 그것을 확장적으로 구축하며 그에 걸맞는 정치적 제헌양식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대의민주주의로의 수렴론은 반혁명적이다. 반면 대의민주[122]주의가 아닌 직접민주주의로의 복귀 주장은 낮동안의 노동에 이은 밤시간의 야간집회를 항구화해야 하는 EJ안기 어려운 부담을 준다. 직접인가 대의인가가 쟁점이 아니라 다중의 절대적 구성역능과 제헌권력의 압도적 우위를 승인하는 것이 문제이고 이것에 걸맞는 제헌의 기술을 창출하는 것이 목표이다. 모든 사람이 스스로 자기 삶의 운영자로 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가능한가는 지금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는 직접민주주의의 현장에서 발명되어 나와야 할 절대민주주의적 과제이다.

 

[122]‘승리’는 군사적 실력적 승리를 의미할 수 없다. 오히려 그것은 자신의 주인됨, 궁극적 주체성에 대한 직관적 통찰이자 그것의 언표이다. ... 그것은 측정이나 계산을 통해서 도달한 과학적 진리의 선언이 아니라 삶과 시간에 대한 총체적 직관을 통해 도달한 신화적 진[123]실의 표명이다. 승리는 그러므로 권력의 순간성과 촛불의 영원성에 대한 단언이다.

 

[123]아고라는 그러나 선전과 선동의 매체가 아니라 정보의 취합과 토론, 그리고 결정의 생산공간으로 기능한다. ... 아고라는 우리 시대의 다중지성, 집단지성의 코뮌으로 기능한다. 물론 아고라에서의 결정은 결코 최종적이지 않으며 권위를 갖지도 않는다.

 

[128]자발성은 자율성의 의지를 갖추고 그것을 물질적 제도로서 구축할 때에, 그리하여 그것으로 낡은 것을 해체하고 또 대체할 때에 확실한 전진을 이룰 수 있다. 촛불권력은 어떠한가? 분명히 촛불은 상당히 확실한 권력적 실재성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실재적 권력으로 느끼고 그것을 행사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가지는 않았다. 대리주의/대의주의적 정서와 의식이 촛불봉기 속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다. ... [129]촛불은 투쟁의 기관, 봉기의 기관일 수는 있어도 권력의 기관일 수 없다는 오랜 대의주의의 유산이 촛불을 짓누르고 있다. ... 그러나 대리주의/대의주의는 강렬한 자발성과 자율성을 갖는 촛불의 생리와 융합될 수 없다. 대의주의 경향은 촛불의 침식과 소거를 가져올 위험성으로 봉기 내부에 상존하고 있다. ... [130]촛불이 제기했던 국민소환제 요구는 대표자에 대한 소환과 해임을 통해 권력이 대표자에게 귀속되지 않고 선출자에게 귀속되는 권력에 대한 상상을 표현한 것이었다. 이것은 촛불 정부가 갖추어야 할 제도들에 대한 예상들의 일부이다.

 

[132]네티즌이 전 지구적 온라인 연결망인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는 한에서 네티즌은 국민의 경계를 넘어선다. 설령 한국어 사이트만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 이름은 국민이라는 용어로 환원될 수 없는 잉여를 갖는다. ... 촛불 봉기의 주체들은 누구인가? ... 주권들의 회복을 주장하는 점에서 대한민국의 진성국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이들은 국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국민으로서 국가로부터 보장받아야 할 여러 권리들(생명권, 건강권 등)을 정면으로 거부당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이상 국민이 아니다. 이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망명자들이며 스스로 제헌의 주체로 나서지 않고는 생명조차 보장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국가 없는 국민이다. 국가 없는 국민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새로운 유형의 권력을 창출함으로써만 해방될 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인 다중이다. ... 거리와 광장에서 서성거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에[133]서 이들은 분명 대중이다. ... 하지만 이들은 전위를 거부하며, 지도를 거부하며, 배후를 거부하고 자신이 곧 배후이고 각자가 스스로의 지도자이고 모두가 서로의 지도자라는 점에서 대중이 아니다. ... 이들은 피켓에 고유한 자신의 목소리를 담고자하며 자신의 행동 하나하나에 자신의 개성과 특이성을 담고자 하고 또 봉기에의 참가, 참가후의 활동, 귀가의 시점, 여론에 대한 분석과 해석등을 스스로 하고 또 이후의 활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점 등등에서 특이한 사람들의 공동체인 다중이다. ... 이들은 결코 경제적으로 규정된 객관적 통일성을 갖는 계급은 아니다. 무수히 많은 계급들이 하나의 공통의 의제 앞에서 정치적으로 결집된 무리라는 점에서 이들은 다중이다. 국가에 저항하는 국민, 이것은 더 이상 국민이 아니며 자연상태로의 복귀(존재론적 다중) 위에서 새로운 공통되기를 모색하고 있는 다중(정치적 다중)이다. 요컨대 지금의 봉기에서 다중이라는 새로운 정치적 주체가 명확하게 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37][지도부를 만들려는 시도는] 촛불봉기의 내재적이고 자율적인 지도력을 구축하려는 봉기 대오와 접속하지 못한 채 그 자체로는 중요한 의미를 담는 목소리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공허한 외침으로 되고 말았다. 이것은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촛불의 힘이 무수하게 특이적인 힘들의 접속과 소통, 신뢰와 사랑의 축적을 통해 형성되어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지도력 역시 그 내부로부터, 때로는 누적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돌발적인 방식으로 형성되어 나오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봉기의 과정 속에서 참가한 다중들과 단단하게 마디로 결합되지 않는 한에서는 아무리 좋은 생각들도 실효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141]이러한 공동체적 주체성이 지금 갑자기 출현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주체성은 탈근대적 생산활동 속에서 이러한 출현을 가능케 할 오랜 예행연습을 거쳤음도 분명하다. 이들의 소통능력은 투쟁의 현장에서 처음 실험해 보는 낯설고 초보적인 것이 아니다. 이들은 공장, 학교, [142]사무실, 가정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의 생산적 삶 속에서 반복적으로 정보적 소통을 연습해 왔고 오늘 그것을 투쟁의 능력으로 전환시키고 있을 뿐이다. 탈근대적 생산은, 근대의 생산에서와는 달리, 구상과 실행의 분리 위에서 위계적 방식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들의 능력을 최대한으로 발휘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사람들은 스스로가 상황파악, 분석, 계획, 그리고 결정의 주체가 되도록 요구받는다. 요컨대 탈근대적 생산의 과정은 개인들에게 수동적 대중이 아니라 수동적이면서 동시에 능동적인 전인이 되도록 요구한다. ... 이런 의미에서 촛불봉기는 탈근대적 생산의 탈근대적 항쟁으로의 역전이다. 이 탈근대적 항쟁이 폭력과 파괴를 최소화하려는 윤리정치적 감각에 의해 이끌리고 있는 것은 우리들이 오늘날 생산 속에서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만들고 있고 혁명은 폭력적 권력과 강탈적 자본에의 예속상태에 놓여 있는 이 생명과 소통의 공동체를 자립적으로 분리시켜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자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닐까? ... 촛불봉기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질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근대적인 것들로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직 많은 약점들을 갖고 있지만 새로운 삶, 새로운 운동, 새로운 혁명이 자라나와야 할 필연적이고 비가[143]역적인 터전이다. 정동과 지성의 결합체인 다중지성과 그것의 운동은 운동의 하나의 방법이 아니라 탈근대적 운동의 토대이고 조건이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모든 진지한 운동들이 발딛고 있는 로두스다. 여기에서 뛰는 길 이외에 어떤 길도 지금은 주어져 있지 않다.

 

[152]우선 신자유주의가 중산층을 공격하여 저소득층화하면서 맞벌이 부부가 증가하고 실업자가 증가했다. 여기에서 인종차별이 더해졌다. 위계적 인종구조를 창출하는 삶권력 하에서 하층으로 가면 갈수록 신용을 잃어버린 서브프라이머들이 늘어난다. 안정적인 주거를 갖지 못하고 불안과 위험 속에 방치되어 있는 이들의 삶의 안전에 대한 욕망이 모기지에 대한 잠재적 에너지로 축적되어 있었다. 두 번째로 신용의 정보화와 위험평가기술의 발전이 증권화(가공자본화)를 촉진한다. 컴퓨터 공학의 발전과 정보화는 신용평가의 기술을 증대시킨다. 정보독점은 점차 (무디스, 스탠다드 앤 푸어스, 피치 등의) 신용평가기관을 권력화한다. ... 이들은 위험에 대한 계측을 가능케 하여 저소득층을 대부 시장으로 흡수하는 역할을 떠맡는다. ... 증권화와 복잡화, 그리고 보험화가 결합하면서 위험은 인지하기 어려운 저층으로 깊이 은폐되었고 신용평가기관의 권력화를 매개로 이것은 세계시장 전체에 유통되었다. ... [153]이는 자신의 주택지분을 은퇴하기 이전에 현재의 소비를 위해서 사용한다는 의미이다. ... 정보산업의 버블 붕괴라는 조건 하에서 주택과 토지가 투기의 대상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 증권화를 재촉한다. 이것이 미국내 주택수요를 증대시키고 프라임 외에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상품화를 가져온다. / 이렇게 해서 가능해진 증권화가 위험을 세계화한다. 돌아보면 위험의 세계화는 태환능력을 상실한 달러가 국제화폐로 등장한 것에서 본격화되었다. 이때부터 미국의 발권특권은 세계경제의 핵심문제로 등장했다. ... 미국의 소비가 각 지역들(특히 중국)의 생산을 지탱하고 다시 그 지역들에서 창출된 잉여가 미국의 채권과 증권을 구입함으로써 달러를 미국으로 실어보내는 순환고리 ... 이제 미국의 주택금융시장이 세계자본시장과 연결됨으로써 위험세계화의 새로운 형태가 나타난다. ... 세계시장에서 유통되는 주식, 채권 등 거의 대부분의 복잡한 금융증서들은 가공자본의 특징을 지닌다. 그것은 실현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미래 수익에 돈이 지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용자본, 가공자본이 금융자본에 의해 매개되는 한, 부실과 파산의 위험은 피할 수 없다. ... [154]이 부채관계망에서 서브프라이머의 대극에 있는 금융자본은 국가권력을 이용하여 이 위기의 부담을 국민들(서브프라이머들, 프라이머들 등)에게 전가할 것이다.

 

[이어서, 154]신용은 한 사람을 공동체의 성원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며 공동의 사회적 노동관계의 마디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신용은 창조될 수 있고 또 창조된다. 이것은 인간들의 공동체, 사회적 노동이 부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의 증폭을 반영한다. 그런데 자본주의 하에서 신용은 사회에 의해 매개되는 것이 아니라 사적(국영이라 할지라도 국가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돌보는 사적 기관인 한에서는 사적이다) 금용기관들에 의해 매개된다. 이 때문에 신용은 사회 공동체를 순환시키는 피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신용의 순환이 부단히 사회적 적대를 확대재생산한다. 서브프라이머들의 양산, 억압, 퇴출의 주기적 반복은 그것의 결과이다. ... [155]인플레이션은 생산되지 않은 부를 분배하는 것이다. 그 분배는 극히 불균형적이다. 이번의 위기 대처 과정에서도 확인된 것처럼 소수의 은행가들, 기업가들이 대부분을 분배받고 국민들이 그 나머지를 분배받는다. 인플레이션은 물가를 상승시킬 수밖에 없는데 그 고통은 노동계급과 빈민, 즉 다중이 전적으로 짊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대안이 있는가? 금융기관이 매개하는 신용기능을 공동체가 담당하는 길이다. 현재의 은행국유화는 다중들의 희생 위에서 자본의 이윤만을 보장하는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

 

[162]전지구적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신보수주의이다. 이것은 공장을 축적기반으로 하기보다(공장을 그 일부로 삼는) 사회를 축적기반으로 하는 초국적 금융자본 주도의 자본주의이다. 화폐(달러, 유로, 엔, 위안 등), 금리, 환율, 주가 등은 뉴라이트 정치의 핵심적 무기이다. 화폐정치가 뉴라이트 정치의 본령이다. 올드라이트 중에서 케인즈주의 정치는 조세와 재정을 핵심적 무기로 삼았고 자유주의 정치는 공장착취를 핵심적 무기로 삼았다. 뉴라이트 정치에서 올드라이트 정치의 두 무기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재배치되어 금융축적의 밑바닥에 놓이게 된다. 뉴라이트는 노골적으로 부자들과 자본가들을 위하는 정치이다. 삶의 모든 것을 사고 팔 수 있는 것으로 만들면서 그 매매행위에 축적의 논리를 부과한다. 모든 교환 행위, 매매 행위, 소통행위에는 이자가 발생해야 한다. 소통으로서의 삶이 이자 체제에 포획된다. 신자유주의적 축적은 삶의 위기를 먹고 산다.

미국은 뉴라이트 정치에서 태풍의 눈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함으로써 세계자본의 순환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달러기축을 유지하는 방법은 전쟁을 하는 것이다. ... [163]전쟁은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전 지구적 복종을 구축하는 방법이다. ... 천문학적 적자가 누적되어 감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버틸 수 있는 동력이 바로 달러에 대한 믿음, 달러에 대한 세계 화폐들의 복종에서 나온다. 미국은 국채의 판매를 통해 적자를 메운다. 국채는 그 국가의 존재에 대한 신용(믿음)을 근거로 한다. 권력에서 기인하는 검은 돈들, 노동자들의 소득에서 기인하는 보험금들(국민연금, 건강보험 등)이 미국의 국채를 사들이고 이를 토대로 달러가치가 유지되며 이로써 미국의 적자를 그때그때 보전할 달러가 확보되어 왔다. ... 이것[국가보증금융회사의 부도사태]은 미국의 신용을 크게 떨어뜨릴 것이며 미국 국채의 판매는 급감될 것이다. 유로화를 비롯한 다른 화폐로의 전환이 불을 보듯 뻔하다. 군사적 군주국으로 제국체제, 즉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미국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163] FTA는 위기에 빠진 미국이 동맹국이나 주변국의 자산과 노동을 미국의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원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이다. 모든 장벽의 철거를 통해 노동, 상품, 원료,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함으로써 FTA는 위기경제의 영역을 확대하고 위기의 폭발을 유예하며 위기를 [164]더 큰 규모에서 생산한다. 한미 FTA는 그 작업의 일환이다. 한국 정부는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기 위해 (그러나 금융자본의 유입은 항상 불안정하며 단기계약 이후에는 언제든지 떠날 수 있다), 그래서 더 폭넓은 이자 행위를 하기 위해 FTA를 원한다. ... 생명, 사회정의, 윤리, 평등, 자유 등등의 모든 가치는 관심 밖이다. ... 위기를 넘어서야 한다는 명령은 매 시기에 모든 자본에게 부과된다. 그래서 한국의 대자본도 FTA를 원한다. 이렇게 해서 약육강식의 논리가 세계적 규모에 확대된다.

이런 점에서 일국적 뉴라이트는 전 지구적 뉴라이트의 기능마디이다.

 

[166]비정규직 운동은 정리해고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원직복직, 직접고용을 요구하는 당사자 운동으로 되어 있다. 이 운동은 정규직이라는 전통적 고용형태에 대한 애착을 보[167]여 준다. 과거에 정규직 고용은 생명안전의 일차적 조건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생명안전은 피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소득이 고용을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 노동과 소득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은 지난 세기에 케인즈주의 사회들에서 입증되었다. 만약 실업이나 비정규 고용상태에 있다고 해도(사실 이것이 비정규직 노동자수가 정규직 노동자보다 많아진 우리 시대의 정상적 고용양식이다) 소득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생명안전을 구태여 정규직으로 고용되기를 통해 해결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무조건적 소득보장 요구는 비정규직의 생명불안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의 해고불안을 해소하는 수단일 것이며 정규지/비정규직의 분할을 통해 지배하는 자본의 통치를 파괴하는 방식일 것이다. 촛불이 민족주의를 넘어서고, 비정규직 노동이 과거에서 투쟁의 꿈을 빌려 오는 당사자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넘어설 때 촛불과 비정규직 노동자의 투쟁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 두 개의 운동은 투쟁의 선순환 흐름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

 

[175]공포를 조성하는 대응은 일시적으로 시민들을 위축시킬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것현재 불복종의 형태로 진행되는 문화적 윤리적 성격의 시위를 삶정치적인 총파업으로 발전시키는 촉매제가 될 가능성이 더 높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수준에서의 삶정치적 파업들을 결행하고 있다. 이 삶정치적 파업들의 연쇄와 집결이 장기화되어 삶정치적 총파업으로 발전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자신들의 요구가 수용될 수 없고 불만이 해소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시점에서 이 총파업은 지금까지 운동에 극도의 절제를 요구해온 비폭력이라는 마개를 뽑아버릴지도 모른다. ... 비폭력의 마개가 뽑혔을 때 다중이 절대적이고 순수한 폭력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낼 길이 있을까? 다중의 절대적 폭력은 경찰력으로도, 군사력으로도 저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풍이나 지진과 같은 자연력이며 모든 것을 절멸시키는 거대한 죽음충동이기 때문이다.

 

[184]전광판의 거대한 영상들은 다른 생각을 가질 겨를을 주지 않으면서, 아니 다른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억제하면서 광화문 네거리에서 시민들의 시선을 빼앗는다. 자본의 영상은 네거리의 상공을 점거하고 있다. [185]자본의 거리정치는 이렇게 영상을 통해 밤낮으로 어떤 제지도 받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 촛불의 거리투쟁이 살수, 체포, 연행, 구금, 구속, 구타, 협박의 소나기를 맞으면서 피난의 행진을 하는 것과는 달리.

 

[186]민족주의는 화폐나 자본과 공존가능하며 심지어는 그것들에 의존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민족주의는 중소자본의 육성을 문제해결의 수단으로 사고해 왔다. 신자유주의에 의해 철저히 해체되고 기반을 잃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중소자본이다. 촛불에서 민족주의의 득세는 촛불의 운신기반을 좁히는 것으로 작용했고 특히 다양한 유형의 노동하는 사람들의 적극적 참가를 가로막는 것으로 기능해 왔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다중의 삶의 문제는 민족주의를 통[187]해 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이주노동자들의 경우는 촛불 속에 민족주의적 뉘앙스를 갖는 ‘국민’ 관념이 부상하면서 집회나 시위 참가에 어려움을 느껴왔다. ... 촛불의 다양성을 좀 더 실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와 같은 배제적인 관념보다 훨씬 개방적인 관념을 발명해야 한다.

 

[194]한국의 경우 그것은 노무현과 민주당 등에 의해 그 정치적 표현을 얻는다. ... 촛불봉기에서 반이명박, 반뉴라이트 쟁점을 이끄는 흐름 중의 일부는 이 신자유주의 좌파를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해방적 민족주의 흐름의 일부도 그러하다. 그래서 촛불봉기의 초기에 신자유주의 좌파 정파는 무시되었지만 촛불이 약화될수록 신자유주의 좌파에 대한 지지와 의존의 경향은 증대했다. 그래서 촛불 전체가 신자유주의 좌파 흐름과 은연중 동화되어가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에 대항해온 사회(민주)주의는 촛불봉기에서 한 발을 빼고 있었고 촛불을, 노동자투쟁으로 이어질 전주곡으로만 볼 뿐 자신들이 뛰어야 할 로두스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흐름이 있다. 이 흐름도 세밀하게 나누면 우파와 좌파로 구분할 수 있다. 민주노총에 기반을 둔 민주노동당의 일부에 의해 표현되는 사회민주주의 우파는 한국적 특수성 때문에 민족주의 우파로 나타나기도 한다. 정규직 노동자, 농민, 지식인, 학생 등을 정치적 대의기반으로 삼는다. 이 정치경향은 촛불봉기에 참가했지만 적극적이지는 않았다. 그 아래에 사회민주주의 좌파가 있다. 사노련, 노동자의 힘, 노동해방실천연대 등이 이에 속한다. 진보정당은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좌파가 혼재된 정파로 존재한다. 정규직/비정규직 선을 따라 노동계급 구성이 변화함에 따라 사회민주주의 좌파는 점점 비정규직 운동에 깊이 [195]개입하는 것으로 사회민주주의 우파와 차별성을 띠는 경향이 있다. 촛불의 초기에 금속노조, 화물연대 등의 노동자운동이 촛불과 연결되었고 촛불봉기가 장기화되면서 기륭, KTX, 이랜드, 코스콤 등의 비정규직 노동자 투쟁이 촛불과 연결되는 경향을 보이지만 아직 확고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회민주주의 흐름은 촛불을 중간계급 운동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상의 대의주의 정파들에 의해 대의되지 못하거나 혹은 그러한 대의를 거부하는 사회적 존재들이 있다. 이들은 사회학적 차원에서 노동의 공통되기에 기초한다. ... 직접행동주의적 아나키즘과 코뮤니즘은 이러한 경향을 정치화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201]비정규직이 위기의 삶을 의미하는 한에서 정규직화는 하나의 대안일 수 있겠지만 이것은 두 가지 점에서 문제적이다. 하나는 현재의 자본관계가 기술, 정보, 지식, 정동(affect)에 광범위하게 의존함으로써 직접적 노동(직접적 고용자)에 덜 의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고려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한에서 더 많은 직접적 노동의 안정적 사용에 대한 요구는 탈근대자본주의를 근대의 자본주의로 복귀시키라는 요구를 의미하게 되어 비현실적 복고경향을 드러낸다. 둘째 설령 이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고 할지라도 그 요구의 지향은 안정된 자본주의의 구축에 있게 되고 노동해방의 전망을 닫게 만든다. 즉 이 요구는 방어적이고 수동적인 요구이다.

현대의 비정규직문제는 고용불안정의 양상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의 실제적 본질은 삶의 불안정, 삶의 안보(안전보장)의 취약화의 문제이다. ... 그러므로 고용요구는 실제로는 삶의 안전보장에 대한 요구로 이해되어야 한다. 닥쳐온 고용위기는 자본(관계)이 다중의 삶의 안전을 더 이상 보장할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징후이다. 그러므로 자본관계와는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을 보장받고 삶의 행복을 추구할 방법을 찾는 것이 다중이 직면한 문제이다. 이 문제를 풀어나갈 바탕은 삶의 생산과 재생산 능력으로서의 노동이다.

 

[202]오늘날 착취는 사회화된 노동, 일반노동에 대한 착취이며 이런 의미에서 모든 사람은 자본관계에 이용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피고용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취업노동자)은 직접 고용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자본이 이용하도록 만드는 역할, 즉 지주소작관계 한에서의 마름과 비슷한 역할을 떠맡아 가고 있다. 개별 자본에 직접 고용되지 않거나 불안정하게 고[203]용된 사람들이 삶의 위기를 겪고 있는 정도가 높은 만큼 취업과 정규고용은 삶의 안전보장(보험)의 성격을 더 강하게 갖게 된다. ... 이로부터 ‘일정하게 보장받는 직접고용 노동자’와 자본 사이에 비보장노동자에 대항하는 안보동맹이 맺어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다. 그 동맹은 주권적 안보동맹일 것이다.

 

[204]비정규직 법안은 다중의 연합을 파괴하고 다중 내부에 위계제를 도입하면서 소수의 안정된 고용노동자를 매개로 하여 다수의 비정규직 불안정노동자를 파견근로, 기간제 근로 등의 형태로 착취하려는 제도 구축 시도이다. 우리는 비정규직 제도를 더욱 확장하고 또 확고하게 안착시키려는 이 법적 시도의 나쁜 효과를 폭로하고 그것에 맞서면서 노동기본권에 기초한 고용안전이라는 방어적이고 복고적인 주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준비해 나가야 한다. 그 디딤돌은 무조건적 보장소득 요구이다. 그것은 현행의 일반적 공통노동과는 더 이상 부합하지 않는 현재의 사적 자본관계를 척결하고 자본관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에서 삶의 안전보장을 이룰 관계를 새롭게 창출하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것이다. 이것은 촛불의 취지와 완전히 일치한다.

 

[206]자본주의는 두 가지 공리에 기초한다. 첫째, 소득(임금)을 얻으려면 [207]노동을 해야 한다. 둘째, 노동하려면 고용되어야 한다. 첫째가 가치법칙이요 둘째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본원적 축적이다. 첫째가 노동의 계량화, 시간화이며 둘째가 생산수단으로부터 분리된 노동자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창출이다.

그런데 이 공리들은 자본가 예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공리들은 케인즈주의에 의해 자기부정되었다. 케인즈주의는 노동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소득을 주는 것을 국가의 원리로 삼음으로써 개별화된 노동과 개별화된 소득 사이에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국가적으로 승인했다. 이후 개별노동과 개별소득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는 생각을 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로서만 가동될 수 있었다.

 

[208]이것[무조건적 소득보장]은 부르주아 정치체 속에서 충분히 달성될 수 있는 과업은 아니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생산자와 생산수단의 분할, 지배자와 피치자의 분할,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분할, 이윤과 임금의 분할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정치체는 더 이상 현 단계의 인류사회를 광범한 동의하에 꾸려나갈 수 없다. 대다수 사람들을 생존선 이하의 비정규직으로 몰아넣고 소수의 사람들만이 이자와 이윤을, 그리고 일종의 마름 수당인 정치적 임금을 특혜적으로 받는 정규직으로 분할하고 있는 현재의 부르주아 정치만큼 그것을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없다. 비정규직은 폐지되어야 한다. 정규직도 폐지되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욕망에 따라 자유롭게 일하면서 그 생산물이 자유롭게 분배될 수 있는 관계는 새로운 정치체에 의해서만, 다중지성의 코뮌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

 

[209]민족주의 비판, 즉 반민족주의가 뉴라이트를 생산했다는 것이다. 뉴라이트는 신자유주의이다. 이것은 자본의 초국적화의 경향을 내면화한 민족주의 비판이다. 거대 독점자본, 초[210]국적화한 재벌들, 초국적 금융자본들이 힘을 얻기 위해서 민족주의를 걸러내야 했다. 뉴라이트는 민족이라는 단위가 오늘날 자본주의의 발전에 조응하지도 자본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뉴라이트의 반민족주의는 전적으로 자본축적의 논리학이다. 뉴라이트는 근대에 한 몸으로 결착되어 있던 민족과 국가를 분리시키고 민족주의 대신 애국주의를 옹호한다. 신자유주의적 세계자본은 국가를 폐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축적을 위한 마디로 삼는다. 즉 국가는 세계자본주의에 필요하다. 뉴라이트는 바로 이 필요에 맞추어 애국을 주장한다. 뉴라이트에게 애국이란 국가를 자본축적의 지렛대로 이용한다는 의미이다.

 

[215]역사적으로도 국가는 내부적으로 억압(치안)의 기관이었고 대외적으로는 전쟁의 기관이었다. 국가는 국민을 보호하지만 그 보호는 주어진 영토 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노동을 착취하여 부를 축적하고 그들을 국민으로 조직하여 착취의 영토를 확장하는 동력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호와 억압은 국가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민민연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정부에 대한 기대가 붕괴된 것 위에 정립할 때, 그리고 촛불연대 선언문이 자신의 정치학을 대한민국의 국가적 존엄성의 위기 위에 정립할 때 이 두 선언문은 스스로 국가가 되려는 권력의지에 함몰하였거나 위기에 빠진 국가를 구제하려는 십자군 전쟁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국가, 애국, 국민은 ... 반동적이며 수구적인 가치이다. 이것은 나치즘, 파시즘, 일본군국주의, 네오콘 등에서 그 극단적 완성을 보게 되는 가치이며 근대의 이른바 ‘정상’ 국가들이 매일매일의 정치에서 착취와 수탈을 위해 끊임없이 동원하는 이데올로기들이다.

 

[216]국가는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바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에 따라 정립된 정치체계를 지칭하지 않고 접속하여 협력하는 삶의 네트워크를 지칭할 때 의미를 갖는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가치가 아니다. 민주주의는 국가형태를 파괴하고 다중들 자신에 의한 다중들 자신을 위한 다중의 자치형태를 발견하는 힘을 지칭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에 의한 모든 사람의 모든 사람을 위한 자기지배가 민주주의의 실제적 잠재력이다.

 

[218]연대기구가 설정하고 있는 ... 목적은 존엄의 촛불에 외부적인 것이며 국가와는 다른 유형의, 즉 코[219]뮌 유형의 자율적 공동체 구축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연대 기구 조직화의 움직임은 촛불을 살림으로써만 가능한 것이다. 연대기구들이 정식화하고 있는 정신들은 퇴행적이지만 다중들은 촛불을 살린다는 첫 번째 이유 때문에 연대기구가 여는 시공간을 촛불의 자기목적, 즉 촛불의 자치를 위해 활용할 수 있다. 그리하여 그 시공간을 창조의 시공간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촛불에서 국가주의적 권력정신을 해체하기 위해서라도, 흩어져 있던 촛불들이 서로 배우기 위해서라도, 또 촛불을 가르치기를 좋아하는 저 지도자들과 전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리라.

 

[229]많은 사람들이 다중 개념에 제기해온 문제 중의 하나가 이것이다. 이민, 이주를 전형적 사례로 삼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에 대한 긍정이 만약 그것이 즐거운 것이라거나 행복한 것이라는 등의 감성적 진단에 기초한 것이라면 랑시에르(그리고 여타 사람들)의 ... 비판의 적확한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보다 나은 삶을 찾아 헤매는 이주, 이민은 글자 그대로 비참에 대한 반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주에 대한 네그리와 하트의 긍정은 이 유목적 운동이 갖는 역사적 세계사적 의미에 대한 진단에 기초한 것으로서 비참에도 불구하고 이주가 갖는 변형의 힘을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의 비판은 과녁을 빗나간다.

... 농촌에서 도시로 몰려드는 농민의 프롤레타리아화는 비참의 산물이지만 그것의 역사적 의미는 그들이 추방된 자로서 느끼는 감각이[230]나 감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주하는 다중의 유목적 운동은 그것이 비참에 의해 조건지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인류인들의 국경을 넘는 혼종과 새로운 주체성의 탄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기이며 코뮤니즘을 새로운 수준에서 구축할 잠재력의 축적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랑시에르가 ‘인민’이라고 부르고 싶어하는 그 아무개n'importe qui가 오히려 다중으로부터 특이성을 지워버리고 난 후에 남는 찌꺼기의 이름이 아닌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촛불들은 이런 ‘인민’이기에는 너무나 다채색이고 특이하다.

 

[234]보호의 사랑은 연대의 사랑과 같은 것이 아니다. 보호자와 위안자는 그것이 뜨거운 사랑에 불탈 때조차 위계의 상층에서 보호받는 사람들을 억압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보호의 구조는 권력의 구조이며 그래서 억압은 보호의 이면이다. 그래서 다중이 보호에 만족하고 그 보호의 틀 속에 안주하게 되면 그들의 행동의 자유는 협소해 지고 상상력의 폭도 좁아진다. 그래서일 것이다. 청소년들이 어느날 태평로 아스팔트 바닥에 대자보를 붙여두었던 것은. “우리를 보호하려고 하지 말라. 우리를 대[235]상화하려 하지 말라. 우리는 이 투재의 주체이다.” .... 보호와 위안을 일시적 방패막으로 삼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힘을 재정비하고 다시 ‘투쟁의 독자적 주체’로 나서야 한다. 보호의 사랑에 길들여질 것이 아니라 투쟁 속에서 단련되는 공동체의 사랑을 쟁취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자칭의 보호자들과 대립하는 방법으로? 아니다. 주체의 입장에 확실하게 설 수 있을 때, 자칭하는 보호자는 원군일 수 있다. 이 원군의 권력망을 살짝 벗어나면서 그 원군의 힘을 싸움의 동력으로 배치할 수 있다면.

 

[236]선거에서 패배했다는 것은 선거가 다중들의 정치적 승리를 위한 고유하고 적절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대의민주주의는 다중의 정치적 형태로서 극히 취약하다는 것이 다시 한 번 확인되었다. 선거에서 승리하기란 거리에서 승리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들고 설령 승리한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변질 없이 지켜나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대의는 본질적으로 굴절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237]촛불이 중산층의 의제라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널리 확산되는 생각이 있다(박노자, 김종엽). 이 생각은 비정규직의 투쟁이 촛불에서 주변화되는 것을 고려한 판단이다. 그러나 비정규직 투쟁의 주변화가 촛불의 [238]중산층성을 뒷받침하는 증거일까? 의제를 신원주의적으로 해석한다면 부분적으로는 그렇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이 서로 접근하기 위한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양자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을 의제의 계급성으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피상적이며 안이한 해석으로 보인다. 촛불은 단일의제를 갖는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다양한 의제들을 포함하는 용광로이다. 삶의 다양한 요구들이 촛불을 통해 제안되었다. ... 하지만 현재의 비정규직 투쟁은 이 잠재력을 충분히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 왜 비정규직 투쟁이 무조건적 보장소득과 같은 공통적 요구를 제기하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는 것일까? 그럴 때 사회적 연대의 잠재력이 더 커질 수 있는데도 말이다. 현재 비정규직 투쟁의 당사자 운동적인 이 제한성이 촛불과 비정규직 투쟁의 결합을 방해해온 요소가 아닌지 진지하게 질문할 필요가 있다.

 

[240]일본은 단일한 통일체가 아니다. 한국이 이미 두 개의 민족(부르주아지와 다중)을 포함한 복합체이듯이, 일본도 두 개의 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복합체이다. 누가 이 복합체를 단일한 통일체로 보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각국의 지배계급, 즉 민족부르주아지이다. 민족부르주아지는 복합체인 한국이나 일본을 단일한 통일체로 환원함으로써 국민적 통합을 강조하고 저항, 혁명을 억제한다. ... 민족국가는 다중의 정치형태일 수 없고 오직 자본의 정치형태일 뿐이다.

 

[242]혁명은 영구적인 것이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의 주요한 정치적 과제를 설정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문제와 연결된 모든 계급계층이 동시에 동원되어야 한다. 문제와 연루된 세력들 모두가 동원되지 않고서 문제는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누가 주도하는가 혹은 할 것인가가 현재의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투쟁에서 공동행동을 할 것인가? 아닌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동행동의 가능성을 침식하며 결국 투쟁의 역량을 해체한다. ... 다양한 전선들이 공동의 목표로 집중[243]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그것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반대이다.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모든 세력이 결집하되 이후의 방향들(민족주의, 사회(민주)주의, 자율주의 등)은 각 참가자의 의향과 욕망과 생각에 맞게 열어두는 것.

 

[243]어떤 이데올로기, 어떤 관념을 갖고 있느냐보다 적대성, 즉 정치적인 것의 실재성을 단언하고 있느냐 없느냐가 더 중요하다. 그것에 어떤 방향을 새길 것인가는 참가자들 자신에 의해 결정될 문제이지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 결코 아니다. 로두스는 적어도 지금으로서는 촛불 외부의 딴 곳에 있지 않다. 새로운 과학은 그 속에서 나와야 한다. 파시즘 경험을 떠올리며 ‘대중의 성격구[244]조의 비합리성과 조작가능성’을 우려하면서 봉기행동으로부터 멀리 자리잡고 ‘과학’이라는 이름하에 그 외부에서 망루적 비평을 하는 것에 만족하게 된다면 그것은 대중운동에 대한 원천적 부정으로 귀착되지 않겠는가?

 

[245]촛불이 승리한다. 하지만 그 승리는 우리가 도달해야 할 어떤 상태를 가리키는 과정이 아니라 국가에 위임된 자신의 권력을 되찾고, 시장에 내맡겨 놓은 삶을 되찾아 의식적으로 자기통제하며 타인과의 비시민적, 비시장적 관계방식을 창출하고, 주로 자본가들만이 이용권을 갖고 있는 문명을 자신의 것으로 되찾아오는 기나긴 투쟁, 파괴와 해체를 수반하는 투쟁의 과정, 현재의 모순을 극복하고 활력을 키우는 항구적 운동 그 자체를 가리킨다.

 

[248]모든 지성은 중앙 명령권자에게 주어져 있고 조직과 체계는 그것을 관철시키는 구조이다. 규모가 크고 검정색 일색이며 표정조차 없는 그 지성이 집중지성, 중앙지성이다. 전통적으로 지배계급은 이러한 중앙지성에 의지해 왔다.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 약칭인 미국의 CIA나 한국의 구 ‘중앙정보’부 등이 그 사례이다. 근대에 중앙지성은 거대한 힘을 발휘했지만 지금 그것은 급격히 능력과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다른 한편에 개개의 특이한 지성들과 그 네트워킹에 기초를 둔 다중의 집단지성이 있다. 겉으로 보면 다중지성은 오합지졸로 보인다. 통일된 사전행동계획이 없다. 언제 어디서 모인다는 식의 커다란 지적 연결선만이 주어져 있을 뿐이다. ... 개개인들은 매순간 정보들이 수집되고 처리되고 전송되는 지성망의 마디로서 기능한다. 명령과 통일이 아니라 연결과 협력이 다중의 집단지성의 관건이다. ... 명령권자들만이 사유하고 나머지는 그에 복종하는 중앙지성과는 달리 집단지성에서 다중들은 직접사유하며 언제 결합되고 언제 물러날지를 전체에 대한 고려 위에서 스스로 결정한다.

 

‘집단지성인가 중앙지성인가?’라는 물음은 그것이 양자택일적 의미를 지니는 한 잘못 제기된 물음잉다. 우리 시대의 모든 것이 집단지성에 의존하고 있고 그것이 노동양식이자 삶의 양식으로 되어가는 한에서 집단지성은 어떤 선택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집단지성은 다중의 지성형태일 뿐만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들을 다중으로 편성하는 힘이다.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을 이용하고 착취함으로써 생존한다. ... 중앙지성은 집단지성의 외부에서 집단지성의 착취자로 기능하는 한에서 집단지성 발전의 장애물이다. ... 그래서 집단지성의 발전과 진화는 중앙지성의 해체와 재전유, 그것의 집단지성화를 통해서, 중앙지성의 기관들을 집단지성의 네트워크 마디로 재편함으로써 효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 집단지성은 지금까지의 사회변화의 [251]결과이자 동시에 미래 사회변혁의 조건이고 동력이다. 그것은 일과적인 것도 방법적인 것도 아니다. 오늘날의 인류는 집단지성 위에섯, 그것에 근거하야 도약해야 한다 집단지성은 우리가 도약해야할 로두스 섬이다.

 

[251]집단지성과 다중지성은 다르다. 어떻게 다를까? 다중지성은 특이성들의 접속과 혼종, 그ㅡ리고 새로운 것의 생산을 통해 작동함에 반해 집단지성은 다양한 것들 사이의 비판과 배제를 통해 특정한 경향의 헤게모니를 생산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 같다. 집단지성에서는 다중이 집단으로 환원되고 수축되는 것이 아닌가? [252]집단지성은 토론을 통해 지배적인 것을 구축한다. 하지만 다중지성은 다양한 생각들과 감정들, 능력들의 모자이크를 구축한다. 집단지성은 새로운 유형의 당이다. 우리 시대에 적응된, 재구축된 당이다. 다중지성은 이러한 당들의 참여를 보장한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보다도 전통적 당들이 대상으로 삼았던 대중들의 특이화이자 특이화된 대중들의 지각적 정동적 지성적 움직임이다.

 

[254]촛불봉기는 배후나 지도에 의해 이끌려가고 있지 않다. 우리는 서로 생각과 감정을 전염시키면서 집단적 지성체로 성장해 가고 있다. 전염은 촛불봉기가 살아나가는 방식이다. 그것은 탈근대적 소통방식이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라 탈근대민주주의의 동력이다. 이것은 포퓰리즘과 혼동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260]미네르바의 예측이 거듭해서 맞아떨어지는 것은 미네르바 자신도 알고 있듯이 현재 전 세계의 지배자들이 새로운 것을 창안하지 못하고 낡은 것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은 예측불가능하지만 낡은 것은 예측가능하기 때문이다. 미네르바의 경제예측의 날카로움은 금리, 환율, 주가, 부동산, 물가, 인수합병, 투기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에 기초하며 그 운동 경향에 대한 통찰력 있는 파악에 근거한다. 그리고 그 예측에 대한 권력의 공포는 오늘날 금융세계의 특징에서 기인다.

 

[262]미네르바의 예측활동은 권력으로부터 서민들을 분리 시켜내지만 그들을 온전히 다중의 시간 속으로 가져가지는 못한다. 이제 미네르바의 지혜가 촛불의 정열을 품고 촛불의 정열이 미네르바의 지혜를 장착할 때이다. 지성과 몸의 합체 속에서 자본에 묶였던 예속의 끈이 끊어진다. 드디어, 미네르바의 촛불, 촛불의 미네르바.

 

[267]촛불의 깊은 저층에서는 이 다양성들 사이의 끊임없는 대류, 전염, 공명이 발견된다. ... 온갖 사람들의 분노, 사랑, 결의, 지혜, 용기, 헌신 등이 촛불을 지속시키고 있다. 이와 달리 촛불의 상층으로 올라가면 갈수록 정파적 이해관계와 패권의식이 행위자들의 판단과 행동을 제약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자신의 판단과 취향과 욕망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촛불이 단일한 투쟁형태, 투쟁방향, 투쟁조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만큼 촛불에 위험한 것은 없다.

 

[269]조직화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집화와 시위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 수단이다. 조직화를 창조로 이해했을 때 집회와 시위는 참여자들의 적극적 자기표현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고 새로운 삶의 형상이 출현하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조직화되는 것은, 아니 정확하게 말해 스스로 조직화하는 것은 약동하는 생명력이지 개물화된 인격체들이 아니다. [270]조직화를 질서로서 생각할 때에만 이미 현존하는 개물화된 인격체들을 명령-복종관계 아래에, 혹은 동원체계에 묶어내는 것을 조직화로 이해하게 된다. ... 그러나 조직화는 그 이상일 뿐 아니라 반드시 그 이상일 때에만 의미를 갖는 사건이다. 조직화는 생명의 새로운 진화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자 예술이다. 생명이 막혀 있는 지점을 뚫고 이루어질 때 그 시간에 그곳에서는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생명이 특이화된다. 생명의 특이화가 나타나지 않는 조직화, 기존의 것들이 단순히 반복되고 있을 뿐인 조직화, 이것은 그 규모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고 단지 형태만을 바꿀 뿐이다.

 

[274]지금 조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은 현 시기에 필요한 네트워크 형태를 찾아야 한다는 주장으로는 설득력이 있고 또 필요하며 실제로 지금도 촛불을 들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간절한 요구에 부응하는 하지만 이것이 비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조직화에 대한 협소한, 그래서 결국은 유효하지 못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것이며 향후에 이러한 이미지가 고정될 때 촛불 운동 전체를 질곡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 그렇지 때문에 촛불봉기가 밟아온 조직화의 진화과정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 단적으로 말해 지금 조직화에 대한 긴급한 요구는2008년 5월~6월간에 이루어졌던 리좀적 조직화가 탄압으로 파괴되거나, 역량의 고갈로 취약해지거나, 다른 부분과의 네트워크에 실패하여 이탈하거나, 봉기의 진화가 직면한 장애에 대한 해결전망을 찾지 못하고 잠복함으로써 이완되고 기능마비된 상황에서 이를 대체할 다른 조직화의 모색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미조직화에서 조직화로의 발전인 것은 결코 아니다. 이 점이 강조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새로운 조직화의 움직임이 이 점을 유념하지 않는다면 다중의 봉기가 다시 치솟을 때, 지금 구상되는 조직적 형태를 조직화의 유일한 형태로 보고 이것을 그 거대한 운동에 부과하려는 시대착오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276]촛불들을 결합시키고자 하는 노력들이 오히려 촛불들을 분열시키고 있는 것이다. 왜 이렇게 될까? 조직화(organization)가 질서화(ordering)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다. 질서화란 명령-전달-실행의 체계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이 체계에 결합된 개개인들은 기계부품으로 전화된다. 이것은 오늘날 공장, 당, 국가, 군대 등이 취하고 있는 형태이다. 근대적 조직화는 질서화와 다른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촛불은 처음부터 질서화에 대한 항의였고 그것에 대한 거부를 독특한 특징으로 내보였다. ... 독립된 중앙지도부를 구축하려는 노력이 모두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여기에 있다. 촛불들은 지도부를 요청하는 듯하면서도 실제로 지도부를 거부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여왔다. 그러나 이것은 이중성으로서보다는 지도력의 독특한 형태, 독특한 존[277]재방식에 대한 요구로 해석되어야 하지 않을까? 궁극적 전쟁지도는 특이한 개개인들의 네트워크, 집단지성과 집단의지, 요컨대 다중지력에 의해 이루어지되 개별의 전투지도는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지도란 다중의 위가 아니라 옆에, 아니 실제로는 안에 있어야 한다는 생각. 다중은 자임하는 지도부들을 봉기에 이용하면서 그들의 권력화를 차례차례 붕괴시켜 왔다고 해야 하지 않는가?

 

[277]조직되어야 하는 것은 특이한 힘들이지 인격체가 아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사회적 생산력들, 사회적 투쟁력들이 조직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 ‘력들’=‘힘들’은 산재하며 이동적이고 가변적이다. 그 어느 것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관계망 속에서 때로는 격류처럼 때로는 호수처럼 움직인다. 법률적 인격체들이 질서정연하게 조직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뭔가를 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 사회를 생산하고 재생산하는 힘들이 공명, 전염, 촉발, 가책, 호기심, 놀이, 결의 등 각각이 다른 이유들, 조건들, 맥락들, 목적들에서 합류하지 않았던가? 이것은 결코 어떠한 조직화도 없이 자연과정을 방치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각각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하고 자신의 내적 계획을 수립하며 그 욕동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질서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더 많이 직접적인 행동으로 자신의 느낌과 생각에 욕망과 전망을 표현하는 것이 필요하다. 정신적 신체적인 더 많은 직접행동들(직접행동을 가투로 환원지 말 것, 몸으로 하는 행동만으로 환원하지 말거)이 필요하며 이것들이 서로 공명하고 전염되고 서로 감싸고 융합되면서 새로운 차원을 열어나가는 것이 창조로서의 조직화, 자기조직화의 과정일 것이다. ... [278]조직화 이후에 오는 행동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서 행동 속에서 이루어지는 조직화!

 

[279]이날 시위는 지도력의 자생적 형성과정을 보여주었다. 하나의 독립된 부분이 전체를 이끌기보다 서로가 보완하면서 대오를 살려내려는 집단의지가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전대협이 대오를 이끌 때는 구호 선창권이 리딩에게 독점되었다. 이날 구호선창은 여러 사람에 의해 다양한 시점, 다양한 지점에서 이루어졌고 길잡이가 이것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강력하고 자신감 있는 지도는 시위대의 사기를 높이는 반면 시위대 개개인의 표현욕구를 억제하는 측면도 있었음이 반증되었다. 지도력은 지속적으로 분산되어야 하고 실제로 모든 사람들이 지도력을 갖도록 연습되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저항과 창조의 영속성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이 맹아적으로 인지된 날이다. 강력한 그러나 독립적인 지도부는 시위대를 대중으로 만들며 내부로부터의 지도력의 형성과정을 억제하는 효과를 갖는다.

 

[282]그러므로 촛불은 군사적 대응을 방어의 무기로 잘 활용하되 그것에 함몰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장기적으로는 군사적 대응을 극복하고 새로운 차원을 열어젖히면서 그 새로운 차원에 군사적 대응력을 종속시켜야 한다. ... [283]자본은 다중의 이 네트워크에 의지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을 공격할 수 있는 실제적 무기는 군사적인 것에 있지 않고 이 생산의 지점에 있다. ... 삶정치적 총파업은 두 가지 의미에서 전통적인 노동자 총파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첫째 1980년대의 전투적인 노동자 파업과는 달리 1990년대 이후 노동자 파업은 중앙에 의해 조절되면서 제도적 성과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둘째, 삶정치적 총파업은 공장에서의 파업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들, 가정, 교회, 언론, 학교, 군대, 회사, 백화점, 마켓 등에서 파업이 조직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삶정치적 총파업은 자본주의적으로 조직되는 삶의 모든 영역에 파국을 도입하는 경로이다.

 

[291]우리는 살수차 대 유모차의 대립이라는 사태를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살수차의 도덕에 유모차의 윤리가 대립했으며 살수차의 법에 유모차의 삶이 대립했었다고. 우리가 지키고 가꾸어야 할 것은 도덕과 법이 아니라 윤리와 삶이라고. 도덕은 시민사회 속으로 이입된 법이라고. 윤리는 삶의 자기표현이라고.

 

[295]여기서 국가에 대한 비판을 넘어서는 주체성의 측면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권력이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현재의 촛불이 권력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또한 이것은, 위임된 권력, 대의 권력이 항상 다중의 언론과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침해함으로써만 유지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이것은 국가가 다중을 감시하고 처벌할 것이 아니라 다중이 권력의 소음, 권력의 얼굴, 권력의 돈을 감시하고 행동으로 제약하며 권력을 처벌할 삶정치적 방안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만든다. 이를 위해서 촛불 자신이 권력의 대상이 아니라 주체로 서는 것, 권력을 직접 행사하는 것, 스스로를 제헌권력pouvoir constituant으로 정립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있을까?

 

[297]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좋은가라고 묻는 습관은 누가 나를 지배하는 것이 좋은가라는 노예적 문제틀에 속한다. 어느 누구도 우리 자신의 지배자가 되지 않게 하는 것, 모든 사람들 하나하나가 권력자로서 자신의 존엄한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떤 조건에서 그것이 가능한가를 숙고하는 것이 촛불에게 주어진 정치적 과제이다.

 

[298]맑스는 루이 보나빠르트의 집권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철저성의 사례로 파악했다. 두더지는 가장 파괴하기 쉬운 적이 등장할 때까지 부르주아 사회로 하여금 생산력을 가동하도록 자극하는 방식으로 혁명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부르주아 사회의 가능성을 남김없이 실현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회가 도래할 수 있는 물적 전재들과 비물질적 전제들이 형성될 때까지 사회의 순환을 밀어붙인다. 이것이 혁명의 철저성이다. 철저성은 혁명의 영원성이 발현되는 방식이다. 촛불은 영원하고도 철저한 혁명의 지속성이 출현하는 현 국면이다.

 

[312]대통령은 어떤 의미에서도 (도덕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윤리적 의미에서의 선일 수 없다. 윤리적 선은 자기역능의 확장이다. 그 확장은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은 윤리적 의미에서의 악이다. 그것은 나의 역능의 확장이 아니라 축소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촛불은 좋은 대통령을 뽐는 데 열중할 것이 아니라 어떠한 외부적 명령도 거부하면서 오직 자신의 판단과 결정에 따라 행동하는 주권자로서의 개개인들이 무제한적으로 자유로운 연합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추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의 추구과정에서 때로 덜 나쁜 대통령을 필요로 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315]촛불이 제기한 문제는 결코 의회에서는 풀릴 수 없는 문제이다. 다중들의 직접행동, 그 직접행동의 전지구적 전염, 촛불코뮌의 구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 문제는 풀릴 수 없다. 촛불봉기를 압력수단, 봉기수단으로만 이용하고 그것을 제헌적 권력기관으로 보지 않는 모든 정치적 경향들을 경계하고 그것들과 거리를 두어야 한다. 다중의 직접행동이 아닌 다른 수단은 문제를 덮고 지연시키고 왜곡시킬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문제는 이명박이 아니라 촛불이다’라고 책임전가하며 촛불을 폭력으로 짓밟는 것으로 나타날 것이다.

 

[333]비폭력의 이상에 우리가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까? 그것은 방어폭력을 통해서이다. 권력의 거대한 폭력에 맞서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지키는 방어행위를 통해서 비폭력의 이상에 한걸음이라도 접근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방어폭력은 대항폭력인가? 정당한 저항적 대의가 있다면 선제적으로 폭력을 행사해도 좋다는 의미인가? 그렇지 않다. 폭력을 선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는 어떠한 저항적 대의도 존재하지 않는다. 폭력의 축소는 인류가 추구해온 시민적 이상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비폭력적 삶, 비폭력적 관게에 도달할 수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사고해야 한다. 선제폭력은 폭력상황을 가속시킬 것이고 결국 시민들의 패배를 가져올 것이다. 방어폭력은 폭력을 해체하고 무력화하기 위한 폭력이며 폭[334]력의 최소화,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운동이다. 방어폭력은 정당방위로서 현존하는 법에 의해서도 보장되어 있다. ... 방어폭력의 일차적 형태는 도주이다. 납치하려는 사람들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들의 물리력의 행사범위를 신속하게 벗어나는 것이 자신을 방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설마 나를 때리겠는가 하는 생각은 권력과 경찰에 대한 터무니없는 믿음, 환상적 신뢰에 기초한다. 도주에도 불구하고 폭력범과 납치범들이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위협할 때는 자신을 방어할 가능한 최선의 방책을 찾아야 한다.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방어폭력이 비폭력의 이념을 실현하는 방법이다. 실제적 의미의 비폭력은 싸움의 전술이 될 수 없다. 비폭력은 폭력의 해체를 지향하는 이념이다. 그것은 절대적 폭력상태인 자연상태로부터 시민사회를 건축하는 혁명적 협력의 이념이어야 한다. 혁명적 협력으로서의 비폭력은 자신의 생명과 신체를 방어하는 방어폭력을 통해 현재의 사회적 협력을 방어하며 그것을 독점폭력의 강제로부터 분리시켜 내기 위한 것이며 강제적 협력이 아닌 자발적 협력을 창출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시민들의 실제적 전술이어서는 안 되고 이념이어야 한다.

 

[337]2008년 8월 16일 비폭력의 얼골로 살아왔던 시민들이 자연상태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연상태에서의 시민들은 더 이상 시민이 아니며 자연인일 뿐이다. 자연인으로서의 개인들은 절대적 폭력의 체현자들이다. 법은 이들에게 장애물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국가의 무력은 자연인들의 적이다. 자연인들은 무력에 의한 폭력의 재현 혹은 대표를 거부하면서 자신에게 적대적인 무력을 해체시키려 한다. 그래야만 새로운 시민상태의 구성으로, 사회적 협력존재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의 무력에 대항하는 자연인들의 폭력은 새로운 권력을 구성하는 힘, 제헌권력이다.

 

[341]“법은 불법에 양보할 필요가 없다.” 불법이라도 양보해야 한다는 종교적 무저항주의가 봉기 속에 널리 확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대한민국 형법이 우리에게 각성시키는 무언가가 있다. 촛불봉기에서 국민들은 지금 자신들이 법이고 정권이 불법이라는 인식을 널리 공유하고 있다. 정권은 [342]그 반대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법이고 봉기에 참가한 국민들을 폭도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합법성을 둘러싼 두 개의 인식이 대립하고 있는 순간이 지금이다. 이 대립은 인식론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인식을 진리로 만드는 것은 실천을 통해 그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 촛불봉기에서 승리한다면 다중이 행사한 방어적 폭력은 법에 의해 정당화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이 행하고 있는 지금의 연행들, 경찰폭력들 등은 법에 따라 처벌될 것이다. 만약 패배한다면 민중의 행위는 물리적 폭력행사는 물론이고 도로점거 등 일체의 시위동작이 폭도의 행위로 몰려 처벌될 것이다. 이명박 정권의 폭력은 정당화될 것이다. 우리는 폭도인가 법인가? 광주민중항쟁에 참가했던 시민들에게 던져졌던 이 질문이 다시 촛불봉기에 나선 시민들에게 던져지고 있다. 여기에는 무엇이 진리인가를 둘러싼 거대한 인식론적 내기가 걸려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가 없는가라는 실천적 내기가 동시에 걸려 있다.

 

[357]그러므로 촛불은 5년의 수명을 갖는 문제가 아니다. 촛불은 전 지구적 평화를 갈망하는 삶정치적 성찰의 무기이며 사람들의 마음속에 깃든 혁명적 불빛이다. 거대함을 욕망하지 않으면서 작은 그러나 무수한 것들의 의지를 모아 그려내는 근원적 혁명에 대한 갈망이다. 촛불은 몇 개월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며 몇 년의 수명을 갖는 것도 아니다. 촛불은 영원하다. 그것은 일시적으로 꺼질 수는 있지만 완전히 꺼질 수는 없다. 일시적 꺼짐은 촛불의 잠재화일 뿐이지 소멸이 아니다. 비가시화일 뿐이지 비실재화가 아니다. 생명이 영원한 만큼 촛불도 영원하다.

 

[364]13. ... 현대자본주의는 점점 더 많은 인구를 임금, 소득에서만이 아니라 신용에서도 배제한다. 그리고 그럴수록 가치의 부로서의 실현은 더욱 어려워진다. / 14. 사회적 협력은 다중 서로의 신뢰에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의 실제적 사랑에 의지한다. 배제와 차별과 위계는 이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밑바닥에서부터 파괴한다. 신용사회, 금융자본지배의 사회, 금융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다중의 협력에 의지하면서 이 협력을 끊임없이 깨뜨리는 살아 있는 모순이다.

 

[366]21. 신용의 실추, 신용의 경색, 자산의 파괴, 화폐보유의 증대, 이것들은 다중의 생산적 공동체를 파괴한다. 믿음의 부재, 사랑의 실종은 그 자체가 전쟁상태이다. 대규모의 전쟁들이 이를 조건으로 유발된다. 신용자본주의에서 전쟁자본주의로의 이행. 전쟁자본주의는 신용자본주의의 이면으로 도사리고 있었다. / 22. 자본주의가 신용과 전쟁 사이를 오가는 체제임을 직시할 때에 다중이 먼저 수행해야할 일은 자본주의의 비밀을 구석구석 밝히는 일이다. 촛불은 이 일을 시작했다. 신용, 신뢰, 사랑, 협력을 사유화, 시장, 권력, 국가의 수중에서 해방시키고 그것을 자율적인 기관으로 전환시키는 일을. / [367] 23.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로 역전되는 메커니즘을 절단하는 것이 필요하다. 삶의 공동체가 가치공동체, 화폐공동체로 나타나지 않도록 고용/비고용, 노동/비노동, 임금/비임금, 정규/비정규의 분할기계들을 해체하여 공통화기계가 작동되게 하는 것, 중앙지성 대신 다중지성, 민족주의 대신 인류인주의, 국가 대신 다중의 코뮌. 24. 촛불은 삶이며 삶은 촛불이다. 자본의 전체주의를 깰 때 삶, 생명, 산-노동의 시간이 열린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자본의 신용이 깨지는 시간이 바로 삶의 신용이 열리는 시간이다. 이 틈새에서, 위기와 공황의 구멍 속에서 해방의 시간이 열린다. 새로운 세계, 새로운 삶, 새로운 관계, 새로운 살(flesh)이 열리는 시간. 촛불의 시간, 촛불의 전명화, 촛불의 세계화, 모든 사람들의 촛불되기, 그래서 절대적일 뿐인 민주주의.

 

[370]6. 신자유주의에서 화폐는 다른 모든 종교의 상위에 있는 종교로 된다. 자본가들만이 아니라 노동자들, 빈민들도 자본의 신도로 된다. 착취, 강탈, 협박, 사기 그리고 이것들을 통한 권력관계 생산은 화폐종교의 근본주의적 교리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인격의 근본토대이다. / 7. 자본은 자본가들의 종교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 불만과 소외에 빠진 피착취자들의 종교이기도 하다. 자본은 자본의 심부름꾼이나 원천동력들, 즉 자본의 노예들 모두에 대한 구원자이다. 자본은 노예의 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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