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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멧돼지들-<차우>, 신정원, 2009

  • 등록일
    2009/10/17 01:35
  • 수정일
    2009/10/17 01:35

*이 글은 개인적으로 매우 속이 쓰린 글이다. 묵혀 두었다가 이제야 올린다.

 

영화는 착란과 전도(顚倒) 또는 사시(斜視)의 스펙타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고 굳이 영화관에 갈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태생적으로 서사구조의 안정성, 즉 시점과 시제, 주체와 시공간의 평형성(stability)을 거스르는 경향을 띈다. 놀라운 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절하고, 편집하는 와중에 기억을 일신하거나 뒤섞음으로써 영화가 오히려 실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1) 말 그대로 이것은 원인(cause; 작가-주체의 의도)이라기보다, 준원인(quasi-cause; 광경과 편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편집증적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효과를 통해 이미지의 분열증을 극화(dramatization)한다. 그래서 장르가 더 극단적일수록 그 영화는 점점 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공리계를 따라 재코드화 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2) 각각의 시퀀스는 야바위 상자에 담긴 주사위들의 각 면 위에 놓인 점들과 같아서 ‘흔들고, 여는’ 그 과정 모두가 작가의 지향성과 시선을 빗나간다. 숏과 시퀀스는 이렇게 자기구성(self-constitution)되며, 작품 전체는 거대한 우연의 긍정을 통해서만, 그것을 전제하고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3) 이러한 영화 예술의 특성은 마땅히 소수성(minority)이라 명명될 수 있겠다.(4)

 

[차우]는 이 소수성을 이미지의 표면 위에 전시하는 매우 특유한 영화다. 그러니까, [차우]는 괴수영화, 아니 코메디 영화, 아니 이 모든 장르-부정성(‘아니’) 바로 곁에, 영화에 ‘대한’ 담론을 배치함으로써 스스로 ‘극곁극’(play-beside-play)을 구현한다.(5) 실재로 이 영화는 ‘사시’(관객과 직접적으로 시선을 맞교환할 수 없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은유. 그것은 항상 ‘해석’을 경유한다)인 마을 이장과 마을의 치안담당 경찰의 술자리 대화에서 시작한다. 술자리 자체가 횡설수설로 시작해서 황당하게 끝나지만, 이 장면의 진실성은 거기 있다기 보다 작가가 이제부터 이런 횡설수설로 장르를 충돌시키겠다고 미리 선언한 것이라 하겠다. 장르는 하나의 주사위 면, 또는 당구공과 같아서 작가는 흔들고 열거나, 큐대를 들어 불분명한 강도 조절을 하는 정도에서 임무를 다할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거나, 운명이며, 이도저도 아니라면 불가해한 신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전체의 경첩은 빠져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겠지만 이 헐렁거리는 숏과 시퀀스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웃음’인데,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페이소스’라는 것이다. [시실리 2km](2004)에서부터 시작된 ‘뜬금없고 썰렁한’ 신정원의 문체론(stylistics)은 여기서 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웃음과 페이소스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또한 가히 변태적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이 불쾌감의 잔영을 동반한 쾌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감독이 가진 ‘B급 감수성’의 발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초과하는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오컬트적 요소, 또는 이미지의 페티시즘 말이다. 물론 이 영화 텍스트를 의미론의 측면에서 읽는다면 이 초과분은 처음에 말했듯이 극곁극의 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이렇게 손쉽게 내리면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 곤란한 것은 극곁극의 형식을 취하는 영화텍스트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텍스트보다 더한 텍스트적 가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은 곧 그 드라마의 ‘효과’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6)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작가는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관객 입장에서 이런 류의 유사 오컬트 무비는 불편한 코미디에 가깝다는 것을 작가가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어, 라는 건 매우 당황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사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멧돼지가 뒤뚱거리면서도 놀라운 속도로 돌진하다가 옆으로 미끄러지고 앞으로 뒹구는 장면은 한강대교 하부 난간을 건너다니며 어이없게도 귀여운 재주를 부리던 봉준호의 [괴물](2006)의 샘플링이라 할 만하다. 또한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의 독특한 사건구조는 바로 장르 간 충돌을 기획하는 것인데 이것도 낯설지 않다. 특히나 호러 계보 안에서 샘 레이미([이블 데드], 1982)나 토비 후퍼([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1974)는 누구나 인정하는 하이브리드 거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고전적 B급 호러 씨네아스트들과 신정원, 봉준호가 다른 점은 하이브리드 효과가 저예산이라는 제작조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의식적 포획을 따라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최근의 샘 레이미([드레그 미 투 헬])에게 그 시절은 추억일 뿐이겠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 애초에 제기되었던 괴수영화와 코메디 사이의 장르충돌 뿐 아니라 B급 호러와의 관계다. 그리고 이 복합성을 고려하자마자 우리는 최초의 그 문제, 즉 ‘불쾌의 쾌’, ‘페이소스와 웃음의 결합’이 가리키는 그 준원인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정원 감독이 고전적 하이브리드의 형식을 가져오되 그 내용과 표현을 자기 식으로 구축했다는 것이다. 샘 레이미와 토비 후퍼의 장르실험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데 반해 신정원의 장르충돌은 호러를 중추적 요소에서 물리고 그 자리에 괴수를 놓음으로써 그와는 다른 효과를 달성한다. 그 웃음의 근방에서 떠도는 변태적 페이소스라는 효과 말이다. 이 페이소스가 웃음의 진정한 준원인인 이유는 그것이 웃음과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페이소스로부터 웃음에 이르기까지, 정서의 스펙트럼 전체를 주파하는 계열 전체를 작가의 실험이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하는 그 정서의 속도에 편승하여 플롯이 삐걱거리는 순간순간에 다양한 강도에서 그 스펙트럼의 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경험 전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잠겨 있는 이 웃음과 페이소스의 스펙트럼과 강도 전체를 그로테스크 싸카즘(grotesque sarca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7)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주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작가가 이 미학적인 정서 가공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이 말은 역으로 ‘가장 최초에’라고 바꾸어 쓸 수 있다) 드러내는 것은 뭘까? 결국 괴수는 죽고 인간들은 행복해진다. 이건 그렇게 담대한 결론은 아니다. 오컬트에 육박하는 플롯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 상투적인 결론을 두고 어이없어 하는 것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보너스 장면을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 마지막 보너스 씬은 싱거운 결론을 상쇄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이 내내 느꼈던 그 정서적 이물감의 정체가 바로 고전적 드라마의 근간을 이루는 선입견에 대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콜러리지가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고 했고, 고다르가 관객이 영화관 안과 밖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그 고다르의 관객이 상정하는 하나의 ‘신념’을 말한다.(8) 신정원은 이 신념과 선입견을 극곁극 형식을 통해 역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차우]에는 인접한 두 극 A와 B가 있다. 관객은 이 두 극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극은 1형식 문장의 주어와 보어처럼 서로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두 극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수 있는데, 두 극을 이어주는 동사가 부정법 동사기 때문이다. 이 부정법 동사는 딱 부러지는 ‘~이다’(be)가 아니라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임’(to be)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극)의 경첩(시간성)은 덜렁거린다.

 

A극은 관객이 줄곧 쫓아다니는 주요 플롯이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객은 모두 콜러리지와 고다르의 지평에 얌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극 B가 있다. 즉 중반부에 인물들 각자가 ‘포수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만화적 장면(B1)이나, 뜬금없는 극중 캠 촬영 장면(B2),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친 여인의 집 장면(B3). 이 장면들은 극 A가 가지는 서사적 완결성을 번번이 위반하고, 주술구조를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극 B는 극 A에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극 A 가운데서 빼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 B는 A에서 스스로를 ‘빈자리’로 제시한다. 즉 주어 A는 술어 B 없이도 견뎌낸다. 여기서 극의 시퀀스들을 이어주는 시간성은 순전히 맥락 없다. 당연히 이게 작가의 장르충돌의 효과인 것이고 말이다.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극 A는 B와 완전히 대체 가능한가?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B 극들 각각도 그러하다. 만약 그러한 대체를 가능하게 하려면, 영화가 시간성과 그것을 짊어진 주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홍상수식 시간 구성과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구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대체(alternative)가 아니라, 전치(transference)와 응축(condens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는 대상 간의 교환을 통해 둘 중 하나를 표면상 무화시키는 은유적 과정이지만, 전치와 응축은 어느 대상도 무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서 그것들을 표면상으로든(전치), 이념 상으로든(응축) 인접시키는 환유적(전치), 상징적(응축)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극 A와 B는 이런 환유적, 상징적 관계로 [차우]라는 이미지 계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극A와 극B(그리고 B들) 사이에는 교환과 자리바꿈이 가능하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구조의 일방향성(bon-sense)을 수시로 역방향성(para-sense)으로 구현할 수 있는 틀거리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체 줄거리에서 극B는 그것 자체로 확장될 때 하나의 단일한 플롯으로 구성될 수 있다. 즉 이 극 B들은 하나의 응축된(condensed)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극 B의 상징들 중 전체 이야기들(즉 A와 다른 B들)의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극B3이다. 어째서 이런 구성을 기획한 것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미친 여인’은 영화 전반부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하면서 관객들에게 단순한 폭소나 불안을 선사하는데,(9) 후반부로 갈수록 이물감이 심해져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극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 이 ‘미친 여인’ 에피소드가 가진 전치와 응축의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치와 응축이 통속적인 정신분석에서 오로지 오이디푸스 방향만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에피소드는 그러한 일방향성을 비웃고 어떤 형태화할 수 없는 이념들로 향한다는데 있다.

사실 ‘미친 여인’이 그녀의 희생대상(처음에는 거지-아이 그 다음에는 포수-어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나를 엄마라고 불러!”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은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통속적 정신분석이 “너는 아빠(엄마)를 사랑한거야! 그(녀)와 관계하고자 한거야!”라고 윽박지르며 환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석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말이다.(10)

 

하지만 작가는 이 여인의 이러한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러한 시도 자체를 희화시키고, 우리가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감당하는 그러한 권력의 폭력이 사실은 맥락을 벗어난 ‘억지’일 뿐이라는 실재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에피소드가 단순히 이념적 차원에서 작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전통극이 가지는 일방향성을 역행한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미친 여인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행의 누승적 역량에 종지부를 찍는 이 에피소드가 이념 층위에서가 아니라 영화적 층위에서 획득한 효과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감독 자신이 영화에 대해 가지는 의견(doxa)이며, 이를 통해 희한하게도 역설(para-doxa)을 산출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감독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라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이미지의 아상블라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영화는 아상블라쥬다. 하지만 이제 술어 규정이었던 것이 주어로 간다. ‘아상블라쥬는 영화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아상블라쥬는 현실이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건 이리저리 뜯어 붙인 이미지의 조합들, 이접(disjunction)들인 것이다. 영화에서 시작하여 현실로 가는 이 방향은 영화가 현실을 과잉결정하는 그 순간이며, [차우]에서는 미친여인이 마지막 보너스 씬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웃겨 줄 때 등장한다. 이 방향은 사실 애초에 이와는 다른 방향, 즉 관객이 극장이라는 현실 공간에 자리를 잡고, 영화라는 허구를 감상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 역방향의 출현, 고다르의 신념이 거부당하는 사건, 이미지에 감염되는 순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제대로 박살나는 장면은 마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 엘리스가 꾸는 꿈이 실재의 소녀들에게 전이된 것과 같은 것이다. 가히 ‘엘리스 효과’(Alice effect)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여기 있다.(11) 하긴 미친 여인의 집들과 거기 등장하는 어린 거지와 어른 사냥꾼은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들처럼 현실과 관념이 구분되지 않는 동화적인 맥락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우도 마찬가지다. 이 멧돼지, 또는 그 어린 새끼 멧돼지들까지, 처음부터 이들은 엘리스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않겠는가? 장면 B는 서사적 이야기 A의 구멍이 아니라, 오히려 A가 구멍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온전히 이 효과를 극단까지 밀어붙일 때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사건’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 영화 [차우]의 괴수가 엘리스의 것이든, 험프티덤프티의 것이든 그건 새롭지 않다. 다만 그들을 만나고, 또는 나와 동시대의 관객들이 함께 이미지를 ‘흡수’하면서 공히 그것에 감염되는 그 시간이 더 새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영화가 있으면 다시, 하나의 새로운 코뮌이 탄생하는 것이고, 1시간에서 2시간, 또는 그 이상의 러닝타임 동안 나-우리는 타오르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새로운 시간성을 경외하면서 해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로지 이미지-가상의 한갓 놀이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성과 문명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고통스럽고 또 우습고, 어이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재를 우리 눈앞에 들이 민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차우]는 결국, ‘극곁극’의 형식을 빌어 장르충돌 실험에 괴수영화를 도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시퀀스와 플롯을 이념 층위에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 층위에까지 밀어 붙임으로써 영화와 더불어 현실을 탈신화화, 탈이념화시킨다. 그 시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첨예한 실재, 즉 영화와 현실, 그리고 권력,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로서 [차우]의 특유성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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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은 영화가 기억을 어떻게 가공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실재를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사실 홍상수의 작품 전체가 기억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상당한 나르시시즘에 육박한다. 그의 영화는 내내 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포지션을 유지하지만, 기억에 대해 해석하고 그를 통해 지식인들의 심리를 전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그 자신과 지식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 만약 재코드화의 길을 따른다면 그 영화는 장르에 충실한 ‘재밌는’ 영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3) 영화가 언어적 해석(비평)에 대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보다 폭넓은 수용성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제작 과정 자체를 생각해 봐도 이러한 경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스텝들 간의, 감독과 제작자 간의 조우와 교전(encounter)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홀로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채우면서 생산되지 않는다. 영화는 주체적(subjective) 작업이라기보다 간주체적(intersubjective)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4) ‘소수성’은 들뢰즈의 의미를 따른다. 그것은 ‘이디쉬어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 카프카’라는 말로 특화될 수 있겠다. 『카프카』, 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참조.

 

5) 극중극(drama-within-drama)이 표면과 심층을 나누고 심층의 잠재성을 무한히 퇴행시키면서 끊임없이 표면으로의 강제적 도발을 기획함으로써 극 자체의 ‘본질’을 캐묻는 반면, ‘극곁극’은 잠재성 차원을 그대로 보존하고 단지 표면효과를 통해 ‘의미’를 환기함으로써 극의 분열증들, 좌절들, 더 나아가 극의 ‘무의미’ 차원을 드러낸다. ‘극곁극’은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임을 밝혀둔다.

 

6)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나 극중극도 해석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해석 없이도 인상들의 조합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독자를 쉽게 이해시키지만, 극곁극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곳곳에 서사구조의 일관성과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고 정서적 반응을 비껴가는 사건들이 출몰한다. 문학 작품으로 치자면 카프카의 텍스트, 특히 『성』에서의 느닷없는 유머(이는 니체의 텍스트에서도 보인다-들뢰즈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텍스트를 웃음 없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이현화의 『불가불가』에서의 반복구(“불가불가”)와 이접된 역사적 사건들의 계열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방면에서 가장 위대한 텍스트는 루이스 캐럴의 것들이다.

 

7) ‘그로테스크’란 개념은 기형도 작품에 대한 김현의 유명한 정의에서 나와서 현재 비평계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유된 개념이다. ‘싸카즘’은 ‘싸티르’(satyr)와 ‘겪음’(suffer)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이 글 전반부에 해석한 사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이는 앞서의 극곁극 개념과 더불어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8) “영화는 꿈이다. 그러나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극장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9) 이런 역할효과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 여인은 맥락 없이 등장하여 폭소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 정위되면서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희극적 등장인물,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광대들은 비극이 슬픔과 불안 때문에 내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해서 장광설 따위를 펼치기도 한다.

 

10) 분석 차원에서 폭력이 정신분석에 의해 자행된다면, 물리적 차원에서 이는 파쇼적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이 권력은 자신이 호명하는 주체성 외에 다른 주체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율적 주체성을 불러낼 경우, 또는 반대와 저항의 논리를 광장에 갖고 나올 경우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11) 물론 이 개념은 루이스 캐럴에게 헌정된 것이다. 엘리스가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에서 현실은 꿈과 뒤섞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축하고, 독자를 논리적으로 현혹하여 그 현실 자체를 무화하여 그 결과물로 웃음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효과가 발생하려면 이미지나 텍스트의 강도가 현실이나 기억의 단면을 침범해서 트라우마를 형성하거나 사고패턴에 일시적인 또는 장기적인 충격을 가해야 한다. 통상적인 드라마의 반전은 극 안에서만 그치기 때문에 그런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역설과 다른 것은 역설이 논리적인 기반을 가짐에 반해 엘리스 효과는 정서적 기반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웃음은 결코 박장대소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grotesque sarcasm과 흡사하게 고통마저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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