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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가 죽었다

  • 등록일
    2009/08/03 23:24
  • 수정일
    2009/08/03 23:24

늦게 일어나서 하루종일 집에 있었다. 원고를 정리하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고, 가끔 멍하니 창문 너머 저~기 아파트 사이에 끼어 있는 하늘을 보았다. 깨느른하게 접혀 있는 하늘, 지금은 어두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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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은 토요일날 광주에서 돌아와 바로 하남으로 가야 했다. 사촌 형수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마흔 아홉에 암으로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조문객들의 수가 적었다. 사촌형의 성격이 고립적인데다가 괴팍해서 인간관계가 좋지 않아서이기도 하겠지만 말이다. 형수는 그 나이 동안 돈만 벌었다. 그걸 아이들에게 썼고, 집을 사고, 땅을 사고, 전원주택을 사는 데 썼으며, 이제 좀 더, 마음껏 자신만을 위해 펑펑 쓸 수 있는 시기가 되자, 죽었다. 인생 뭐 별거 있나, 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성남 인근에 있는 화장터에서 유골을 들고, 판교에 있는 집에 오기까지 사촌형은 초췌한 얼굴로 눈물만 훔쳤다. 한 마디도 없었다. 그리고 고모와 고모부, 숙모, 작은 사촌형과 나, 사촌형님과 그 아이 둘, 이렇게 거실에 주욱 둘러 앉아 정말 한 20분 동안 또 아무 말도 없이 있었다. 전원주택이라 주위는 고요했고, 거실 창문 너머 정리가 안 돼 웃자란 잡초들 사이로 고양이가 울고 지나갈 뿐이었다.

 

사촌형은 일가친척들에게도 인심을 잃었었다. 그리고 형수 쪽 친척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거실에서의 그 침묵은 그 서먹하고, 때론 적대적이었던 오랜 감정의 골을 잔인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었던 거다. 내가 몇 마디 시덥잖은 농담을 했고, 고모가 이제 아이들과 힘 내서 살아라, 고 다짐한 후 점심을 먹고 일어섰다. 단 한 시간도 머물지 않은 거다.

 

헤어지면서, 난 형님에게 "연락 드릴게요"라고 했다. 형님은 순간 내 눈을 빤히 보았다. 난 그 말이 그저 인사치레라는 걸 그제야 알았고, 사촌지간에 할 말은 아니라는 것도 그때야 눈치챘다. "인제 가믄 언제 보노?"라고 작은 사촌형은 조카들에게 물었다. 차라리 그게 더 솔직한 말이었다. 사실 볼 일이 인제 있겠나, 싶었다. 그래도 조카들이 꼬마였을 때, 사촌형 내외가 대구에 있고, 나도 거기서 까까머리로 학교를 다닐 때 우린 한 자리에 종종 모였었다. 화투도 치고, 음식을 먹고, 일도 거들었었다. 아이들을 무등 태우기도 했고 말이다. 그런 즐거운 시절, 하하호호 하던 그 모든 날은 이제 간 것 같다. 왜냐하면 누군가 죽는 그 순간 그(녀)의 봄날도 우리의 봄날도 기어이 가고야 마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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