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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 등록일
    2010/07/28 12:53
  • 수정일
    2010/07/28 12:53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 분명 둘이라는 사실, 이 사실 앞에서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 맑아져야 한다. 그 사람이 날 더 잘 볼 수 있도록. 깨끗해지고, 담백해져야 한다. 

 

이제 다른 날이, 다른 삶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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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3

  • 등록일
    2010/07/23 10:22
  • 수정일
    2010/07/23 10:22

비가 쏟아진다. 어제는 상견례를 했고, 내 삶의 한 고비를 넘었다. 행복하다. 좀 느긋해지기로 한다. 이제 시간이 지나갈 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더 많은 자존감을 주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을 중심에 놓지 말고, 나 스스로를 하나의 동심원처럼 생각하는 것. 그 주위로 깨끗하고 명쾌한 선들이 생겨나게 하는 것. 그 선들을 타고 삶의 위도와 경도를 작성하는 것. 그런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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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10/07/16 11:00
  • 수정일
    2010/07/16 11:00

주체의 '구성'이라는 과녁은 통상 정치철학의 주제로 등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함축이 어떤 집단성(collectivity)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른 길이 있을 수 있는데, 그것은 데카르트에 대한 스콜라적 번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방면에서는 마리옹(Marion)의 기여가 참조점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이 신학적 방식의 주체 구성은 필연적으로 대타자인 '신'의 위치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인식론적으로는 주체가 우위를 점할지라도(ratio cognoscendi) 존재론적으로 신의 우위(ratio essendi)를 실토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결국 이러한 주체-타자 관계의 비대칭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리꾀르가 마리옹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그것은 정치철학적으로 조우와 교전(encounter)인 것이 이들에게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이 신학적 방식의 기여가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이 겨냥하는 바를 불투명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일반적으로 주체의 정치철학적 구성을 프로이트와 맑스를 통해 거듭하는 방식 외에 신학적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생각도 한다. 여기에는 물론 프로이트와 맑스도 필요하겠지만, 라캉과 언어철학의 기여를 참조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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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9

  • 등록일
    2010/07/09 21:21
  • 수정일
    2010/07/09 21:21

바쁘고, 정신 없다. 그럴수록 난 조심한다. 스트레스에 약한 성향 때문이다. 마음이 느긋하게 돌아가지 못하면 어김없이 과부하가 오는 이 성벽이라니. 기형도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그는 자신의 감성을 작은 충격에도 바르르 떠는 셀룰로이드에 비유했었다. 그 구절이 자꾸만 맴도는 것도 어쩌면 참, 문제다.

 

어쨌든 이 성향을 쉽게 고칠 수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조심히 다룬다. 나 자신을 말이다. 양생술? 글쎄 그런 건 아직 없다. 마음을 시시각각 느끼는 것 밖에 다른 수가 없다.

 

지금은 [Green day]의 새로나온 베스트 앨범을 듣고 있다. 볼륨을 20까지 올렸다. 이리저리 흔들거리며 듣는다.

 

삶이 안녕하기만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다만 조금씩 흔들리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이제 새로운 가족이 나와 그녀를 통해 생겨날 것이다. 행복한 가족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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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06

  • 등록일
    2010/07/06 21:52
  • 수정일
    2010/07/06 21:52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 일이기에 때로는 이 '이성'이라는 것이 속절없다. 근본적으로 이성은 '자기중심적'이다. 거기서 벗어나는 어떤 일상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하지만 삶은, 또는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다. 이래서 난 영원히 그저 먹물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먹물을 이상한 이물감을 가지고 받아들이는 것이고 말이다.

 

작은 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면서 생각했다. 과연 철학이 또는 학문이 이 모든 일상의 '조우'와 우연성들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

 

분명한 것은 '환원'이라는 폭력을 행사하지 않고는 삶의 모든 것이 철학이 될 수 없다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철학은 삶의 예외이며, 삶은 철학에 있어서 '경악'이다.

 

칸트가 '경이'를 말했을 때 그것은 예술에 한한 것이었으나, 삶 자체에 이르러서 그것은 경악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방면에서 들뢰즈는 옳다. 그것은 경이를 넘어선 폭력이며, 그것을 통해서 사유는 단련된다. 이때 사유의 주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죽음이 이 주체를 확증할 것인가? 아닐 것이다.

 

많은 일들이 지나간다. 모든 것이 사람과 사람, 가족과 가족 간에 일어난다. 이것은 '초월적'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재적'이다. 이 이율배반은 칸트의 것보다 깊고, 들뢰즈의 것보다 심오하다. 다만... 너는 '해석'할 수 있을 뿐인가? 응답을 기다릴 뿐인가?(Ricoeur)...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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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과 생명, 최종심급의 합리성

  • 등록일
    2010/06/29 23:37
  • 수정일
    2010/06/29 23:37

 

* 이 글은 [대자보]에 실렸으며, [e시대와 철학](한국철학사상연구회 웹진)에 실릴 예정인 원고다.

 

 

계급과 생명, 최종심급의 합리성

- 머레이 북친 지음, 구승회 옮김[휴머니즘의 옹호](민음사, 2002)

 

 

생태주의와 합리성의 구출

기본적으로 생태철학은 ‘타자(타인과 자연)에 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익히 알려진 논리를 가져 오자면 이 사유는 데카르트 이후로 형성된 서구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에서부터 시작된다. 사실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탈근대성이라는 법정에 소환하는 것은 일종의 대유행처럼 번져 있다. 한편으로는 그의 ‘로고스 중심성’이 또 한 편으로는 그의 ‘기계론적 자연관’이 말이다. 생태적 사유가 데카르트를 이토록 괴롭히는 것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사유하는 나’를 중심에 놓거나, 그것의 존재론적 근거로 ‘신’이라는 초월적 타자를 끌어 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인식론적으로나(Cogito), 존재론적으로나(Dieu) 내재적 의미에서의 타자성(altérité)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데카르트의 합리적 이성(ratio)을 부정하는 근거를 찾을 수는 없다. 합리성은 이러한 데카르트 비판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작동하는 메타적 기제며 인간존재라면 이러한 정신적 상황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이 근거로부터 벗어나게 되면 곧장 종교나 신비주의로 향하게 된다.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 1921- )이 근본생태주의(심층생태론, deep ecology)나 원시주의(primitivism)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지점도 이곳이다.

 

‘합리성’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타자를 사유하고, 그를 위해 윤리적 토대를 마련하며, 마침내 공동체 내에 통용될 수 있는 보편적 윤리를 구축할 수 있는 유일한 지반이면서 최종적인 판단 근거인 셈이다. 하지만 현대적 상황은 이 당연하게 보이는 근거를 상당부분 상실했다. 이 책의 본래 제목인 Re-Enchanting Humanism은 북친이 어떤 지성적 전략을 가지고 자신의 생태철학을 전개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re-enchanting’이라는 북친의 개념을 우리말로 번역하기란 쉽지 않다. 글자 그대로 번역하자면 ‘재매력화’정도가 될 것이다. 역자(구승회)는 이 말을 ‘재마법화’라고 번역했다. 이 번역어가 틀렸다는 것은 아니지만 말의 본래 의미를 잘 음미하면, 북친의 의도를 좀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제목은 북친이 보기에 인간성의 가장 큰 지반인 합리성이 평가절하되거나 폐기될 대상으로 치부되는 현 상황에서 그것의 ‘매력’을 재발견하는 것이 긴요했다는 의미로 새겨야 할 것이다.

 

북친의 입장에서 합리성은 생태철학의 사회적 측면을 발견하고, 생태적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기 위한 방법론적 개념이면서, 윤리적, 미학적 판단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인간성을 <재마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본래의 뜻은 상호존중의 윤리와 함께 나누는 사회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생태 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고양되고, 자비 넘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365). 여기서 ‘인간의 잠재력’은 분명 인간의 합리적 사유 능력을 최종적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 이에 기반해서만 생태적 감수성(ecological sensibility)이 나올 수 있다. 생태적 감수성이 어떤 동물적이고 인간성 외의 신비로운 여섯 번째 감각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이중 나선 구조의 유전자처럼 인간의 생태적인 특성”이 아니며 오히려 “인간의 독특한 특징인 윤리적 의지”에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54). 따라서 합리적 사유 능력에 기반한 생태적 감수성은 인간의 원시적 공감능력이나 자연과의 일체감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풍부한 문명화, 인간 정신의 복잡 미묘한, 그리고 인간적 가치의 섬세한 진보의 결과”로 보아야 한다.

 

사실 북친의 사유는 합리성 그 자체를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근본생태론에서 흔히 주장하는 것처럼 북친의 사유 전략을 ‘인간중심주의’의 구태의연한 반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가 인간을 “모든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비하고도 <매혹적>인 존재”(400)라고 선언할 때는 일정한 제한을 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인간성에 대한 꾸준한 옹호에도 불구하고 그는 분명히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초자연적 <우주>를 향한 인간의 자기 파괴에 기초한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확장과 약탈에 근거한 휴머니즘도 반대한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19).

 

문제는 타자를 돌볼 수 있는 휴머니즘이 이론적으로 구성가능한지, 또 그것을 현실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지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북친의 문제제기는 오히려 매우 상식적인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도 밝히고 있다시피 인간 본성의 핵심으로서 합리성을 목욕물의 아이 버리듯 간단하게 처리한다면 인간이 타자를 돌볼 수 있는 인식론적 근거도 또한 윤리적 감수성도 불가능해 진다. 하긴 합리적 사유 능력과 윤리적 감수성을 버린다면 어디서 생태철학이 가능할 것인가 말이다. 이렇게 봤을 때 북친이 ‘반인간주의’라고 부르는 이러저러한 사조들(근본생태론, 신맬서스주의, 도킨스류의 환원론, 기술공포주의, 포스트모던 허무주의)이 인간이 가진 권리인 이성을 포기하는 것과 동시에 그의 타자에 대한 책임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퇴행적 사조들이 되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 결과라 하겠다. 이들 사조들은 “인간의 자기 진보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의 권능 자체를 비웃는다”(15).

 

새로운 이성과 계몽된 휴머니즘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능력과 잠재성을 떠받치는 ‘이성’을 북친은 선뜻 다르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겠다. 그는 “<이성적>이라는 것은 세련되고 추상화된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협동과 감정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포괄하는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고 정의하고 있다(18). 여기서는 주어와 술어(이성적이라는 것은 ~ 합리성이다)가 가지고 있는 상식적인 판단에 긴 수식어구들을 새로운 참조점으로 제시하는데 사실상 이러한 참조점들은 단순한 것들이 아니다. 이성, 즉 logos, ratio가 가지고 있는 본뜻이 ‘계산’, ‘비율’이라는 것을 따져 보아도 그렇고,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근현대적인 뉘앙스를 띈다는 것을 음미해 보아도 그렇다. 다시 말해 북친은 이성과 합리성이라는 고전적, 근대적 개념에 윤리적 가치들(협동, 감정이입, 책임감, 연대)을 추가함으로써 이 철학적 개념을 생태철학적 논의 속에 기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 새로운 ‘생태철학적 이성’을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고 부른다. 북친의 이러한 개념의 전용을 사유의 확장이라고 볼 것인가, 아니면 개념의 오용이라고 볼 것인가는 독자가 판단할 몫이지만 그러한 취사선택 외에 이 논의 속에는 중대한 역사적 결절점이 담겨 있다는 것을 봐야 한다.

 

북친 자신이 이러한 개념의 전용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근거를 파악하고 있는지 어떤지는 책 속에 드러나는 바가 없다. 하지만 그가 생태 신비주의(근본생태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판하면서 68혁명을 떠올린다거나, 하이데거를 비판하면서 아우슈비츠를 언급하는 곳에서 이러한 전용의 역사적 근거를 추론할 수 있다. 그는 생태신비주의의 역사적 출현을 “신좌파가 몰락하면서 이어진 직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관념을 선호하는 이념적 풍토”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 하이데거의 철학 자체가 가지고 있는 원시주의적이고 낭만적 반동성(인간 현존재를 ‘전락verfallen’한 것으로 파악하는)이 그의 나치 추종을 이끌었다고 말한다. 책의 이러한 논의들 속에서 북친은 혁명의 좌절이 이성의 좌절(신좌파의 좌절)을 불러왔으며, 이 좌절에 대한 반작용이 생태신비주의와 같은 반인간주의라고 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혁명의 좌절과 마찬가지로 전쟁으로 인한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이 이성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지고, 그것을 통해 하이데거류의 반동적 사상이 유행하게 되었다고 북친은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신비주의와 반동적 낭만주의가 인간성의 부정적 측면만을 과도하게 부각시키고, 마침내 인간혐오주의를 부추긴다면? 하지만 역사적으로 인간의 혐오스러운 측면이 충분히 드러났다는 것도 사실이다. 북친의 생태철학은 여기서 타협하기보다 자신의 관점을 역사성 너머로 밀어붙이는 전략을 택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인간들의 실패’를 ‘이성의 실패’로 간주하기보다 일종의 이성의 간계(Hegel)의 실패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때 이러한 간계를 이끄는 것은 한 줌도 안 되는 지배계급이다. 이 방면에서 북친의 생태철학은 스스로 말하는 것처럼 ‘사회생태론’이 된다.

 

따라서 이성의 능력, 즉 합리성을 재발굴하는 것은 지배계급의 이익추구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러한 비판의 목록에는 그들의 경제적 탐욕과 그를 기반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뿐만 아니라 그들의 비정하고 반인간적인 윤리까지 포함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비판의 필연적 결론은 바로 이성의 능력 안에서, 또한 그것을 통해서 이성의 능력을 확장하는 것이고, 궁극적으로 "균형잡힌 연방적 네트워크, <직접 민주주의>, 지역 위원회와 지역 대표 위원회가 행정적으로 통합된 탈중심화된 공동체"를 완성하는 것을 겨냥해야 하는 것이다(403). 이렇게 해서 이제 휴머니즘은 애초에 전쟁과 혁명으로 실패한 그것이 아니라 “계몽된 휴머니즘”이라고 지칭된다. 계몽된 휴머니즘은 과학기술에 대한 ‘공포’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과학기술의 윤리적 사용을 통해, 또한 정치적 올바름의 기준 하에서 인간성을 타자와 결합하는 것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 이러한 타자와의 결합 속에서 북친은 ‘생태적 감수성’을 쇠락한 원시주의로부터 끌어내어 이성과 문명의 옷을 새로 입히는 것이다.

 

 

사회생태론의 아포리아

북친의 이러한 시도들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사조들이 더 새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하고 있는 사유 전략의 어떤 측면이 충분히 의미 있는 울림을 가질 수 있는 것은 과도하게 비합리주의로 경도되어 인간 혐오에까지 이른 첨단의 논의들을 다시 내재성의 장으로, 또는 인간성의 첨예한 현실성의 장(계급과 생명)으로 끌어 내린다는 데에 있다. 요컨대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철저한 내재적 사유와 현실주의에서 당대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현실주의의 측면에서 북친은 근본 생태주의나 환원주의, 포스트모던 허무주의가 간과한 계급적 상관관계와 그것의 생태문제와의 연관성을 파악할 수 있었으며, 내재적 사유를 통해 신비주의와 각종 종교적 반인간주의에 반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또 다른 문제는 과연 북친의 생각처럼 이성 그 자체를 통해 이성의 비판이 (칸트에서처럼)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성의 능력 가운데 비판의 지점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비판의 가능성 또는 능력과 실천의 능력은 다른 근원에 속한 것이 아닌가? 그가 말하는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있어야 할 바로서의 실재를 보는 우리의 능력을 모호하게 하는 물신성을 제거할 때,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성적 존재로서 자아실현을 위한 살아 있는 잠재력을, 그리고 세계 내에서 창조적이고 자기 개선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을 옹호할 수 있다”(400)면 그 있어야 할 바를 보는 눈이 이성임과 동시에 자아실현을 위한 잠재력의 실재적인 근원이라면 그것은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또한 동시에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하여야 하며, 동시에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는 윤리적 역할을 간직해야”(402)한다는 것이 그의 요청이라면 이 막중한 윤리적 역할을 떠맡을 주체가 다시 그 간교한 이성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다시 한 번 북친의 말을 되새기자면 ‘살아 있는 이성’은 “협동과 감정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을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이성의 개념 함축은 그의 현실주의(‘있는 그대로의 능력’)와는 다른 방면에서의 당위적 요청(‘있어야 할 바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북친이 말하는 이 생태적 주체는 다름 아닌 칸트적인 도덕 주체 또는 선험적 주체의 생태철학적 번안이 아닌가?

 

그렇다면 애초에 북친이 제기한 계급적 노선은 여기서 심각한 딜레마에 봉착하거나 일정한 절충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생태적, 환경적 부정의를 일으키는 계급이 부르주아지이며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적 동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저항세력에게 있다면 이들의 이성적 능력 또한 계급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런데 환경 부정의에 저항하는 인민들만이 이성의 저 넓은 외연 안에 포함된다면 상관없겠지만 사실상 이성의 능력이라는 칸트적 개념 함축은 계급적 바운더리를 희석시키고 보편화 시키는 기제라 하겠다. 오히려 이런 생태적 주체 개념이 수긍될 만한 영역은 계급적 영역이 아니라 심층생태론의 영역에 있다는 것도 주목해야 한다. 위 인용문에서 북친이 쓰고 있는 ‘자아실현’이라는 것이 실제로 심층생태론의 핵심 주장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지역적 생태 공동체를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을 일구어 내기 위해서는 저러한 윤리적 요청에 긍정적으로 답하는 부르주아와의 타협은 이론적으로 장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가 한 인간으로서 선하다 하더라도 하나의 계급으로서 부르주아의 욕망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는 맑스의 테제는 이제 폐기되어야 하는 것인가?

 

생명과 계급

북친의 사회 생태론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비판 능력(현실주의, 내재적 합리주의)과 심오한 통찰(“인간의 자연지배는 인간의 인간 지배에서 비롯된다.”)에도 불구하고 이론적으로 이러한 난점을 노정하는 것은 이 이론이 (비록 ‘사회주의’에 찬성하고 있다 할지라도) 선명한 이념적 구도를 내장하고 있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문제 지점 자체가 북친의 사회 생태론이 가지고 있는 매우 급진적(radical)이고 진보적(progressive)인 측면이라고 본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이러저러한 사조들은 이 문제 영역에 한발자국도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을 회피하거나 자기중심적으로 환원할 뿐이다. 따라서 북친의 논의는 다른 어떤 생태주의보다 최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나는 북친 이론의 현실주의와 내재성은 계급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큰 주제에 착목한다고 본다. 여기에 ‘살아 있는 합리성’이라는 실천적 요청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정치철학과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이라는 오래된 주제를 다시 들여다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큰 주제를 다 다루기 위해서는 따로이 생태철학적 논의가 담긴 한 권의 책이 필요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한 거친 단초만을 밝혀 볼 수 있다. 사실상 이것은 어떤 절충주의나 양자택일의 문제가 될 수 없다. 프롤레타리아(혹은 다중)가 생명에 대한 윤리적 요청을 개인적으로 결단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식의 단순한 주의적 해결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신비주의로의 샛길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급 지향성이 생명과 생태정의를 위한 윤리적 요청들을 마련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는 철저하게 사회 구조 분석을 통해서 정당화되어야 하며, 지금/여기 펼쳐지고 있는 운동의 현실태 내에서 구명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이러한 내재적 장 안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기회주의만을 볼 수도 있다. 북친의 말처럼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사람들에게 생태문제는 배부른 중산층의 소일거리 이상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생태 윤리의 실천과 완성은 생계문제가 나타나는 그 만큼의 강도 내에서 그것이 발현되기 위해 미래의 어떤 혁명적 상황을 기다려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자연과 인간의 관계 내에서 어떤 본성의 일치를 발견하는 것은 먹고 사는 일이 시급한 것만큼이나 확연하게 보인다. 사실 이러한 불투명한 상태, 생명과 계급이 형이상학적으로는 이상하게도 하나의 지반 내에 있으면서도 현실 상황 내에서는 심각한 간극을 노정한다는 이 상태가 철학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기도 하다. 네스(Naesse)가 자신의 두 가지 원칙(생명중심윤리, 자아실현)을 일종의 세계관으로 파악하고 결단의 문제로 제시했을 때 그것은 계급이라는 한 쪽의 관점을 온전히 희생한 것이다.

 

하지만 ‘생명’이 곧 ‘계급’이라면? 다시 말해 사회진화론적으로 정당화되어 온 그 지배계급의 논리를 뒤집을 수 있다면? 정치철학적으로 말하자면 이것은 일종의 마키아벨리의 가면(알튀세르), 또는 한비자의 혁신이 될 것이다. ‘생명 또는 계급’이라는 양자택일이나 ‘생명과 계급’이라는 절충주의를 넘어 ‘생명이 곧 계급, 계급이 곧 생명’(生卽民)이라는 전복의 논리가 가능할 것인가? 이 논리와 더불어 ‘살아 있는 합리성’이 그 최종심급에서 긍정된다면 우리는 두 가지 분할 불가능한 방향에서 하나의 생태철학, 생명의 철학을 획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즉 생명에서 계급으로 가는 존재론적 방향, 계급에서 생명으로 가는 정치적 방향. 하나는 이론의 심급, 또 하나는 실천의 심급. 이 방향을 좌로 우로 꿰는 붉은 실은 물론 ‘살아 있는 합리성’이 될 것이다.-redbrigade

 

 

『휴머니즈의 옹호』, 머레이 북친 지음, 구승회 옮김, 민음사, 2002

 

머리말

1장 인간됨의 역사

2장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어머니 가이아까지

3장 신맬서스주의

4장 생태신비주의와 천사 신드롬

5장 원시주의와 신화

6장 기술공포와 그 귀결들

7장 포스트모던 허무주의

8장 과학과 반과학: 아무래도 좋다

9장 휴머니즘의 옹호

맺음말

 

머리말

[13]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힘은 악마적임이 분명한데, 거대 기업과 민족 국가의 힘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 강력한 영향력과 복합성으로 인하여 인간 본래의 자유와 공동체에 대한 믿음의 흔적을 지워버림으로써, 이 가공할 힘은 인간의 삶을 억압적으로 만들어버렸다.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소규모 부락이나 촌의 이웃간에는 아주 친밀한 <사회적 삶>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일상의 사소한 일에서부터 세계적인 규모의 사회적인 사건에 이르기까지 삶의 모든 영역을 결정하는 막강한 힘을 가진 거대 제도에 넘겨 주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14]내가 이 책을 쓰는 이유는 바로 이들[여성, 비특권층, 진정한 환경주의자, 순수 과격주의자]과의 약속 때문이다.

 

[15]명시적인건 암시적이건 이들은 인간의 자기 진보 능력, 기술적 재능, 진보의 잠재성,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성의 권능 자체를 비웃는다. 이런 경멸적 태도 전반을 나는 마땅히 반인간주의antihumanism라고 부르고자 한다.

반인간주의 - 이는 합리주의, 다양한 사회주의, 그리고 자유주의의 일부에서 개진된 휴머니즘의 이데올로기와 날카롭게 대립된다 - 는 사회 문제를 거의 또는 모조리 무시하는 세계관이다. 반인간주의가 전하는 메시지는 주로 정신 위생이나 개인적 도피에 관한 것, 또는 이성과 자기 [16]혁신능력과 같은 인간적 속성이 자연계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관련된다. ... 서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문명, 진보, 과학 따위의 실재성을 부정하거나, 존중되어야 할 목표로서의 그 가치를 부인함으로써 그것들을 격하시킨다.

... [17]이성을 <로고스 중심성logocentricity>의 전제적 형태와 같은 것으로 간주하는 마당에 단순히 논리적 담론이라는 이성주의적 규범을 들추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반인간주의의 분위기는 본능적으로 진리를 발견하는 일보다는 정신주의적, 비이성적 <통찰력> 획득에 경도되어 있다. 동일성, 상호연관, 우주적, 생태학적 따위의 어휘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는 점을 접어두더라도, 반인간주의의 어휘는 무모하리만치 모호하다.

 

[18]세속적이고 자연주의적인 세계관을 지지하는 나로서는 당연히 이 책의 제목에 <재마법화re-enchanting>라는 표현을 쓴 이유를 밝힐 의무가 있다. 이 낱말은 휴머니즘을 <재마법화>하자는 뜻이 아니라, 반인간주의의 견해와 일치하는 신비주의를 마법화bewitchment한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이성적>이라는 것은 세련되고 추상화된 철학적 의미가 아니라, 협동과 감정이입, 생명권에 대한 책임감,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라는 새로운 개념을 포괄하는 살아 있는 합리성을 뜻한다.

 

[19]이 책은 현상태아 거기에 담긴 정신성과 결코 타협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것을 포함하는 초자연적 <우주>를 향한 인간의 자기 파괴에 기초한 반인간주의에 반대하는 것만큼이나 자기 확장과 약탈에 근거한 휴머니즘도 반대한다. 인간은 세계에 의미와 이유를 부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생명체와 근본적으로 다르지만, 또 한편으로 인간은 바로 이 비범한 능력 때문에 인간 이외의 존재와 지구 전체에 대해 책임감을 지녀야 한다.

... 나는 천사 같은 인간과 악마 같은 인간이라는 이원론을 지양하고, 한편으로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체와의 유사성을 주장하는 동시에 특수한 요구를 정당하게 강조하는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인간됨의 역사

[27]더욱 나쁜 점은 오늘날의 반인간주의는 그 선구자들에 비해 인간이 직면하고 있는 중대한 관심사와 사회적 지평을 결정하는 문제에 대한 접근을 더욱 흐릿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안고 있는 대부분의 생태적, 사회적 질병이 현존하는 사회의 위험천만한 착종 때문이라면, 문제는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며, 사회가 지구의 재구성을 위해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가공할 기술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이다. 이렇게 뚜렷하게 대두되는 사회 문제를 무시하는 것, 이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서 이성의 중요성을 얕잡아 보는 것, 소위 합리적 사회라고 불리는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를 완성해야 할 필요를 무시하는 것 등, 내가 생각하기에 이 모든 것은 자기 파괴적인 태도이다. 우리의 사회 문제와 생태문제는 너무나 중대한 문제이기 때문에, 비합리적인 반인간주의로[28]의 전환은 온전한 정신으로 합목적적인 행위를 하는 인류의 능력을 마비시킬 것이다.

 

[31]19세기 낭만적 반인간주의자들과 계몽적 휴머니스트들 간의 논쟁과는 대조적으로, 현재의 반인간주의자들의 주장에서는 합리성에 대한 믿[32]음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단순히 선언적이지만은 않은 이들 반인간주의자들의 진술은 신학적인 은유로 가득 차 있는데, 이는 회의적인 독자들이 스스로를 신이 부여한(혹은 신성이 부여한) 명령을 어긴 이단처럼 느끼게 하려는 의도로밖에 볼 수 없다. 과격한 목소리는 통찰력을 대신하고, 단조롭게 반복되는 주문이 낡은 시대의 낭만주의자들의 도발적인 시낭송을 대신하여, 이성은 직관뿐만 아니라 아무런 설명도, 분석도 필요없는 신비한 <힘>이라는 모호한 암시에 굴복한다.

 

[34]자연은 매 순간 동태적이며, 무엇보다도 발전적이다. 식물과 동물은 자기 보존을 위해 능동적으로 작용하고, 새로운 생태 공동체eco-community를 창조하기 위해 상호작용한다. 생명 양식life-forms은 끊임없이 태어나고 성숙하고 죽으며, 우리가 찬양해 마지 않는 파노라마를 유지하기 위한 네트워크 혹은 정교한 먹이 사슬에 참여한다.

 

[35]사실 인간은 진화의 매우 특별한 결과물이다. 인간은 다른 어떤 생명 양식도 가지지 못한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 한편으로 인간은 동물과 동일한 진화 과정을 거치기 때문에 동물들의 발생 초기에 발견되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진화 과정의 혼란 때문에, 인간은 동물적인 조상들을 뛰어 넘어 더 잘 발달되었다. 인간은 비상한 지적 능력과 해부학적 유연성, 전례 없는 의사전달 능력, 명백하게 변화하며 고도로 유연한 조직(우리는 그것을 사회라 부른다), 자기 혁신을 위한 비상한 능력에 기초하여 진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사회의 제도적, 상호적, 가변적, 혁신적인 본질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 사회는 정확히 말해서 엄격한 인간적인 현상인데, 사회는 이른바 <사회적 곤충social insect>이라는 유전적으로 판에 박은 듯한 무리 - 상대적으로 느슨하고, 진화론적인 면에서 무리, 군집, 혹은 그와 유사한 집단의 정적인 동물 군집 - 와는 명백히 대조된다. 설령 그런 동물 군집의 개체 변화가 다른 여러 종에서 발견되더라도, 동물 군집이 변화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의식적으로 고안되고 틀 지어진 제도적 구조도 없다. 이와 대조적으로 집단, 부족, 부족 국가, 전제 국가, 민주 정치제와 공화국을 형성하는데 그 각각은 풍부하게 서로 연결된 구조와 상호 주관적인 관계와 문화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쿠데타나 봉기, 혹은 다른 성격의 민중 운동으로 변화하기도 한다.

 

[36]모든 인간은 반드시 포유류이지만, 모든 포유류가 반드시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실로 동물과 인간 사이에는 진화적[37]인 연속성 뿐만 아니라, 명백한 단절이 있다. 사회의 출현에 선행하는 자연이 동물성이라는 생물학적 영역을 포함하는 한, 우리는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처럼 <일차 자연first nature>으로서의 생물학적 진화와 <이차 자연second nature>으로서의 사회적 진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인간의 계통을 유기적 진화 또는 일차 자연으로 인정한다면 이차 자연도 일차 자연에서 발전된 것이고, 일차 자연에 포함된다. 같은 논거에서 환원론자의 궤변으로는 인간과 인간 이외의 생명 양식의 매우 현실적이고 질적인 차이를 해명하지 못한다. 일차 자연 및 이차 자연 - 즉 생물학적 자연과 사회적 자연 - 은 후자가 전자로부터 출현한 것인 동시에 아주 풍부하게 차별화되어 있는 연속체이다. 양자는 서로 상호 작용하지만 이차 자연은 일차 자연의 초월적 형식이며, (적응을 특징으로 하는) 동물성의 (자기 개선을 특징으로 하는) 인간성으로의 지양을 나타낸다.

 

[38]내 요점은 반인간주의자들이 별 생각 없이 오직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예외적인 합리적 능력을 전제한다는 것인데, 이들은 이러한 능력을 인간의 <교만>과 <오만>의 근원이라고 비난한다. ... 사실상 ... 그들은 명백히 사악한 <믿음>을 비난하기 위해 이성에 의지한다. ...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신념 체계 혹은 어떤 탁월한 인간적인 [39]지식 유형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이성으로 회귀하지 않을 수 없다.

 

누군가가 지식을 직관적 믿음으로 보든지 혹은 이성적인 명시성에 기초한 믿음으로 보든지 간에, 동물도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믿을 만한 증거는 없다. 동물이 신앙을 가진다고 기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존의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합리적으로 행동한다고 믿을 근거는 없다. 인간을 예외로 하고 신념체계는 동물의 능력을 넘어선다.

 

[43]인간이 된다는 것은 결국 의식적으로 환경에 작용하여 이를 개조하고, 생각 없이 적응하는 수동적인 영역을 넘어, 의식적으로 스스로를 개조하는 능동적 영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이성적 동물이 된다는 뜻이다. 이성을 대신하는 <초자연>, <신>, <하늘의 문> 따위에 대한 신비주의적인 믿음은 인간을 자연 진화의 밖으로 내팽개칠 뿐 아니라, 인간종과 자연계의 유대를 갈라놓는 가상의 초월적 영역을 순수한 무로부터 창조한다.

 

[46]사실상 인간 종에 있어서 일차 자연으로부터 사회 생활이나 이차 자연이 갑작스럽게 출현한 것도 아니며, 자연계로부터 돌연히 <단절>되었던 [47]것도 아니다. 신체 해부학에서는 인간을 분배, 협동, 그리고 가족 지향적인 동물이 되게 해주는 사회적 삶의 초기 요소들을 설명하고 있다. 일차 자연은 인간의 먹이를 구하는 위대한 지능과 지혜로운 약탈자로 자리매김되는 해부학적 발전 - 이는 모든 동물에게서 발견되는 발전이다 - 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특히 초기 유인원에 있어서 연합과 상호 작용이라는 복잡한 생활양식을 산출하는 일련의 발전에 의해 형성되었다. 무한히 긴 세월동안 상호부조가 다른 종이 아닌 어떤 특수한 종에게 뚜렷한 혜택이었듯이, 초보적인 연합 방식은 자연적, 사회적으로 선택적이었던 다른 동물종이 아닌 유인원에게만 혜택을 주었다. ... 따라서 협동, 상호관계, 집단 보호, 그리고 음식을 찾아 헤매기 좋아하는 이러한 기질은 (우리의 조상은 사냥꾼이라기보다는 썩은 고기를 찾아 헤매는 야생 동물과 더 흡사했다) 사자의 생존을 위해 강한 이빨과 발톱이 <선택>되었듯이 <선택>된 것이다.

 

[53]오늘날의 원시주의자가 석기 시대의 생태 공동체를 수동적인 것인 양 찬양하고 있지만, 이는 결코 수동적인 문화가 아니었다. 그들은 환경을 단순히 주거 장소로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 어떤 선사 인류 공동체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기술들 - 예를 들면 유라시아의 툰드라에 있는 활과 화살, 정교한 창과 창 던지는 사람, 직조, 공들여 짠 장식적인 옷감, 부적, 남성과 여성 성기에 대한 묘사, 복잡한 은신처 -을 고안해 냈다. ... 유라시아 툰드라의 매머드 사냥군들에서부터 마들렌기[구석기 시대 후기] 남부와 중부 유럽의 약탈자들까지, 호모 사피엔스는 집단적으로 주변 세계에 끼어들면서, 가히 폭발적으로 창조적인 기술과 예술을 산출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석기 시대의 인간은 자연에 대한 몽유병적인 숭배자가 아니라, 교역 물품 및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심지어는 기존의 종족을 몰살시키고, 더 풍부한 음식과 자원이 있는 지역으로 이주하는, 방랑적이고, 호기심 많으며, 엄청난 재능을 지닌 존재였다.

 

명백한 생태학적 감수성ecological sensibility을 불러 일으키는 자연에 대한 신비로운 경외는 이중 나선 구조의 유전자처럼 인간의 생태적인 특성은 아니다. 오직 다른 삶의 형태와 그들의 필요에 대해 민감하게 관심[54]을 보이는 인간의 독특한 특징인 윤리적 의지만이 물질적인 필요의 충족을 넘어서는 생태학적 감수성을 산출할 수 있다. 생태학적 감수성은 현대 원시주의자들이 특수하게 사용하는 <홍적세적 의식>이 아니라, 풍부한 문명화, 인간 정신의 복잡 미묘한, 그리고 인간적 가치의 섬세한 진보의 결과이다.

 

[55]내가 오늘날 나른한 중산층 사이에 그럴듯한 원시주의나 신비주의에 대한 탐닉이 유행한다고 강하게 주장할 수 없듯이, 수렵, 채집하는 우리 선조들이 그렇게 <마법에 걸린> 세계에 살았다는 주장 역시 망상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구석기 문화의 사람들 역시 약탈자 무리와 전쟁, 제물, 포로의 고문으로부터, 그리고 물질적 불확실성과 위험한 육식동[56]물, 요절로부터 실질적인 위험을 경험했다, 사실 그들의 유물을 분석해 보면 쉰 살 넘게 산 구석기인은 아주 드물었으며, 오직 반수만이 겨우 스무 살까지 살아남는 정도였다. 자연이 동물 세계보다 인간 세게를 덜 가혹하게 둘러싸고 있다는 환상도 없었다.

 

[57]요약하자면, 인간화의 과정은 현 사회의 병폐를 바로잡기 위해 합리성과 상상력, 깊은 생각과 미래에 대한 조망을 갖는 것을 의미한다. 외관상 우리의 자비심은 일차자연과 이차자연의 진화과정에 개입하도록 강요하며, 또한 그러한 진화과정이 합리적이고 윤리적이게 만든다. 궁극적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becoming human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자의식을 갖는다는 뜻이고, 의식적으로 실감나게 자연계와 사회의 능동적인 행위자로 참여한다는 의미이다. 일차자연과 이차자연의 의식적인 산물로서 우리는 고도의 초월성 속에서 양자를 융합시킬 수 있는 외로운 행위 주체이다. 여기서 초월성이란 불필요한 고통이나 파괴, 재앙, 퇴보가 없는, 내가 <자유 자연free nature>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 <자유 자연>은 <생각하는 자연thinking nature>일 것이며, 자연 환경의 도전을 다룸에 있어서 더 큰 주체성과 융통성을 지향하는 자연계의 충만한 진화과정일 것이다.

 

계몽된 휴머니즘은 사회를 이성적[합리적]일 뿐만 아니라 지혜롭게 만들어주고, 윤리적이면서 열정적으로 미래를 조망하게 해 준다는 희망찬 메시지이다. 이 메시지가 오늘날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하면 - 그리고 그것이 <희망>으로 충만해 있지 않으면 - 이성적이고 생태적인 사회를 향한 어떤 움직임도 불가능하다.

 

[59]자유의 영역을 획득한다는 것은 인간을 다양한 수준으로 비굴하게 만드는 악마적인 힘들 - 지배적인 정치, 경제적 권력, 돌팔이, 야바위꾼 등 -을 구축하라는 요구이며,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행위주체로서의 인간이 존재하듯이,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행위하는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다.

 

2. 이기적인 유전자에서 어머니 가이아까지

[61]사실 표면상으로는 과학적인 반인간주의와 반합리적 입장은 별 차이가 없다. 근자에 들어 신이라든지 천국, 불멸성 따위의 존재를 수학적으로 입증했노라고 떠벌리는 물리학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데에서 볼 수 있듯이 정통 과학의 분과에서조차 초자연계에 대한 유비추리가 횡행하고 있다. 과학과 사이비 과학이 함께 손을 잡고 신비에 싸인 반인간주의를 향해 속절없이 표류하고 있는 것이다. 사회생물학이 본질적으로 인간의 지성을 <이기적 유전자>의 단순한 부산물로 환원하고 있다면, 가이아 가설이 펼치는 범지구적인 환상은 인간을 지구의 기생물에 불과한 것으로 격하시킨다.

 

[63]1975년에 출간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로 대중적 성공을 거둔 도킨스와 마찬가지로 윌슨도 유전자는 주어진 종의 기능에 이바지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된다고 본다. 종들은 주로 유전자의 상태와 성장을 보살피고 영속시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결국 종들은 일차적으로 유전적 진화의 매개 수단이 되는데, 이것은 생물학과 윤리학에 커다란 파문을 불러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조야한 환원주의적 관점이다.

 

[66]유전자의 자율성을 우위에 두고 유전자에 의해 기계적으로 조종되는 타율적인 유기체를 그 아래에 놓는 것은 그야말로 마차를 말 앞에 매단 꼴이다. 오히려 윌슨의 공식을 완전히 뒤집어, 마음과 뇌의 기능을 강화시켜 주는 유전자는 사회 생물학이 얘기하는 가혹한 유전적 속박으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킨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인간이 충분히 합리적이기만 하다면, 자유 의지와 지향성, 사변적 통찰, 도덕적 기준 따위를 진화시킴으로써 인간의 행동 특성을 기계적으로 조종하는 <분자구조>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주장이 훨씬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72]『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의 이기심과 인간의 이기심을 연결시키는 것으로 시작하여, 어디서 은유가 끝나고 실체가 시작되는지를 설명하지 못하는 도킨스가 초래한 혼란 - 이것도 유전적 모방의 반응인지 모르지만 - 으로 마무리된다. 그는 <유전자에게는 선견지명이 없다>고 경고한다. <유전자는 미리 계획하지 못한다. 유전자는 단지 존재할 뿐이며 어떤 유전자는 다른 유전자보다 더 잘 살아 남는다. 그뿐이다.> 유전자와 멤은 태풍 속의 연처럼 대기 중에 떠다닌다. 인간만이 지닌 특성을 이처럼 소란스럽게 떠벌리는 경우도 보기 드물 것이다.

 

[75]이타심이라는 주제가 사회 생물학자들을 괴롭히는 이유는 명백하다. 이타심의 존재는 이기적 개인을 만들어낸다는 이기적 유전자(윌슨도 도킨스처럼 이 말을 사용한다)의 이미지에 타격을 주기 때문이다. ...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타심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웹스터 국제 사전』(제3판)을 보면 이타심이란 <때로 윤리적 원칙에 따른, 다른 사람이 이익에 대한 계산되지 않은 고려, 배려, 또는 헌신>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 이와 대조적으로 사회 생물학자들이 규정한 이타심의 정의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 『인간 본성에 대하여』에서는 이타심을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는 자기 파괴적 행동으로서, 완전히 이성적일 수도 있고, 자동적, 무의식적일 수도 있으며, 의식적이기는 하나 내재적인 정서적 반응에 인도될 수도 있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77]진심에서 우러나온 배려가 다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것처럼, 분노에 의한 것이든 애정에 의한 것이든 순수한 충동으로서의 열정은 참된 이타심을 고취시킬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기로 하자. 사실 이타심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예는 일상적인 사회생활 속에서 나타난다. 이타심은 또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독재정치와 특권층에 항거하여 심각한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반군에 지원하는 사람들이나, 1936년부터 1939년까지의 에스파냐 내전에서 허리에 폭탄을 묶고 프랑코주의자의 탱크를 폭파시킨 혁명군 자폭대를 생각해 보라. 이타심의 특수한 사례를 찾기 위해서 반드시 전쟁터를 둘러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일례로 미국의 민권 운동가들이 흑백을 가리지 않고 함께 버스를 탄 채 남부로 내려가 행진을 벌이면서, 무장한 백인 폭도와 악의에 찬 경찰과 경찰견에 맞섰던 일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윌슨은 이러한 일상적인 이타심의 비근한 예를 간과하고 있다. 영웅적일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순간의 열정에 지배되기 쉬운 충동적 행동보다 [78]사회적 정의와 자유에 대한 사려 깊고 지속적인 관심이 오히려 더 참된 이타적 행동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79]나는 침팬지가 <잔인하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잔인하다>는 것은 인간 세계 밖에서는 의미가 없는 가치지향적인 어휘이다. 침팬지들은 단지 침팬지답게 살 뿐이다. 나는 다만 의인화시키기 좋아하는 영장류 동물학자들이 침팬지를 마치 사람인양 여기고 인간과 닮은 성질을 찾으려 하거나 침팬지가 마치 도덕적 책임과 인지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과장하는 것을 비판할 따름이다. 침팬지의 <전쟁>과 <희생>에 관해 발표된 자료들을 보면, 진화 과정에서 인간과 5백만 년 이상 떨어져 있는 종으로부터 무리하게 인간적 행동을 해석해 내려는 연구가 상당히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81]윌슨의 유전자 중심주의는 <이기심>이나 <이타심> 같은 개념이 가능하려면 먼저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문화가 있어야 하고 원초적인 <근[82]원적 감정>이 사회적 명분 아래 활성화될 수 있도록 해주는 도덕 체계가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다. 만일 사회를 인간의 현상이 아니라 단순한 생물체 - 유기체 뿐 아니라 유전자와 멤까지 포함해서 - 의 집합으로 환원한다면 문화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된다. 거기에는 살아 있는 존재의 집단은 있지만 변화 가능한 제도로 조직된 사회는 없다.

 

[83]사회생물학자들이 사회 현상을 다루려 할 때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윌슨의 어휘에서 사회, 위계, 지배, 집합, 무리, 계급 제도, 공동체, 경쟁 따위 낱말들의 정의 - 그리고 그 함의 -를 살펴 보면 그가 사회구조[84]와 윤리적 현상을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개념들은 명백히 사회적인 전제를 지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윌슨은 이를 협소한 생물학적 정의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사회적 현상을 유전자로 환원함으로써 생물학과 사회 간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을 구분할 수 없게 만든다.

 

[86]사회 생물학자들 자신은 부인하지만, 그들은 결국 인간을 <유전자 기계>로 환원하고, 외삽추리를 통해 사회, 정신, 위대한 사회적 이념 따위를 철저하게 유전자 중심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우리는 이제 <세계의 탈마법화>를 애도하기 위해 베버를 들먹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 유전자의 올가미가 인간과 인간의 위대한 업적을 억압해 오는 동안 탈마법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88]마걸리스와 세이건은 휴머니즘을 뒤집기 위해서 자기들의 견해를 거리낌 없이 과장하곤 한다. 뿐만 아니라 해파리에서 늑대에 이르는 온갖 다세포 생명체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단지 <소우주의 일부가 확장된 것>이라는 얘기도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는다. 소우주 없이는 우리가 기능할 수 없다는 얘기는 평범한 생물학적 사실에 불과하다. 지구와 생물권을 유지하고 심지어 우리의 소화 작용을 돕는 일에 이르기까지 소우주의 활동이 엄청나게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유전자와 원형질을 구성하는 화학적 요소는 왜 거론조차 하지 않을까?

마걸리스와 세이건은 단순한 <정보>를 지혜, 지성, 혁신 따위와 혼동하고 있는 것 같다.

 

[91]사회 생물학이 인간을 <유전자 기계>로 환원하고 소우주론이 인간을 박테리아로 환원하였다면, 가이아 가설은 인간을 어머니 대지 - 유신론적으로 말하면 가이아 - 에 창궐하는 <지적인 벼룩>으로 환원한다.

 

[92]이 이론은 그럴싸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러브록은 대부분의 초기 가이아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환원주의자이다. 다만 사회 생물학자들이나 소우주론자들보다 규모가 좀더 우주적일 뿐이다. 그는 또한 인간 혐오주의자이다. 그는 <지구상의 어느 곳에도 살아 있는 것과 살아 있지 않은 것 사이에 분명한 구분은 없다>고 말한다. <바위와 대기의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살아 있는 세포에 이르기까지에는 단지 강도[93]상의 서열이 있을 뿐이다.> 살아 있지 않은 <물질>과 살아 있는 <물질> 사이에는 단계적이면서도 고도로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무시하고 단순히 에너지 수준만으로 <서열>을 매기는 러브록의 가이아 개념은 특정한 생명체에 대해 진정한 관심이나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93]러브록의 『가이아의 시대』는 지구가 시생대로부터 중세와 현대로 진화하여 마침내 인간과 그의 행동에 도달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리고 있다. 각각의 생명체는 초유기체적 신체의 일시적인 세포에 불과하다는 생각과 함께 러브록의 반인간주의는 절정에 이른다. <빈민촌이나 제3세계의 빈민들에 관한 휴머니즘적 관심, 그리고 죽음, 재난, 고통이 마치 그 자체로 죄악인 것처럼 여기는 혐오스러울 정도의 강박관념 - 이런 생각 때문에 사람들은 인간이 무자비하게 자연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게 된다.> 마걸리스식 소우주론자의 관점에서 사회를 바라보는 러브록은 이렇게 선언한다. <빈곤과 재난은 밖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94]가 행한 바의 결과일 뿐이다.>

러브록이 아무 때나 들먹이는 이 우리의 정체는 신비스럽기 그지없다. 혹시 이 속에는 러브록이 인간성을 매도하는 만큼이나 <무자비하게 자연을 지배하는 빈민촌이나 제3세계의> 무능력한 군중들도 포함되는 것일까? 아니면 혹시 경쟁적이고 막강한 힘을 가진 은행가, 기업가, 주식 중개인, 정치 마피아를 비롯하여 세계 도처에서 사회를 사실상의 파멸로 몰아가는 그와 유사한 특권층도 여기에 포함되는 것일까?

사회문제에서 비롯된 분열을 도외시한 채 생물학자 러브록은 짐짓 오만스럽게 얘기한다. <고통과 죽음은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우리는 오래도록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가이아가 어떤 형벌을 내리든, 우리는 사회적 폐해 또는 심지어 사회적 참상마저도 개의치 않는 생물학주의의 이름으로 이를 감내해야 한다.

 

[96]이기적인 유전자와 독립된 소우주와 가이아 사이에는 진화의 산물인 인간의 고유한 특성이 끼어들 여지가 거의 없어 보이며, 인간 정신에 잠재된 고결함에 대한 신념도, 위대한 사회적 이념과 생태학적 통찰을 위한 확실한 자연주의적 근거도 없어 보인다. 사회 생물학과 가이아에 대한 윌슨과 러브록의 이론에서 이성은 아무런 구실을 하지 못하며 오로지 [97]모호하게 이해된 <과학>과 생화학만 남게 된다. 세계의 <재마법화>라는 거창한 기획을 펼치는 사회 생물학, 소우주, 가이아에 관한 거의 모든 저작들은 각기 다양한 방식을 통해 인간을 유전자기계로, 미생물의 집합으로, 지적인 벼룩으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종의 특성을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거니와 ...

 

3. 신맬서스주의

[100]급진적인 이념과 환경에 대한 대중적 관심의 결합을 무산시킨 하나의 저술을 들라면 바로 에를리히의 『인구폭탄』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70년대 초에 에를리히의 책은 사회비판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등장하고 있던 환경 운동을 몹시 조야하고 때로는 혐오스럽기까지 한 생물학주의로 빗나가게 만드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우리는 그 영향을 오늘에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다.

에를리히의 책이 야기한 방향전환은 냉전 이데올로기나 닉슨 정부의 숨 막힐 듯한 반동주의와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에를리히 자신은 스스로 무슨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추악한 인간 혐오증과 반인간주의 등, 이 책이 전하고자 했던 조야한 메시지는 고도로 수구적인 정치적 견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버팀목이 되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이 책은 인구 문제와 생태문제에 대한 편협한 생물학적 해석을 뒷받침하는 일종의 반동적 선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에를리히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뉴델리의 빈민가를 택시로 지나가다가 엄청난 사람의 무리 때문에 길이 막혀버린 <어떤 지긋지긋한 밤>의 충격을 묘사하고 있다. 에를리히는 혐오감에 몸서리치면서 외친다. “음식을 먹는 사람들, 세수하는 사람들, 잠자는 사람들, 누군가를 만나고, 다투고, 비명을 질러대는 사람들, 택시 창문으로 손을 디밀고 구걸하는 사람들, 대소변을 보는 사람들, 버스에 매달리는 사람들, 가축을 모는 사람들, 사람, 사람, 사람, 사람들 ... ”

 

[107]이런 권위주의적인 조치{강제적 불임}는 사회, 정치 영역에서 그것이 해결하고자 했던 문제보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것이다. 여기저기에서 벌어지는 강압적인 조치와 가혹한 인구 정책들은 통상적으로 자동판매기의 품목처럼 따로따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다. 그 정책들은 총체적인 권위주의의 맥락에 수용되며, 그 논리적 귀결은 삶의 영역을 점점 파고드는 보다 포괄적인 사회 통제와 이[108]를 집행하는 국가 조직의 강화로 이어진다.

 

[110]『인구폭탄』은 백지에 휘갈기는 아이처럼 경솔한 주장으로 정치, 사회, 문화 방면에 걸친 독자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 책은 사람들에게 굶주림의 원인이 착취와 내전, 정치적 불안정, 경제적 탐욕 따위가 아니라 자원 고갈 때문이라고 가르쳤다. 자원 고갈이 당장 닥쳐올 것처럼 과장했고 이는 다시 가까운 미래로 투사되었다. ... 그는 자기를 경모하는 수천명의 청중들 앞에서 강연하였으며, <인구제로성장(ZPG)>이라는 악의 찬 조직의 결성을 직간접적으로 돕고 그 의장직을 맡았다. ... ZPG 열광자들과 신맬서스주의자들은 사회, 경제적 비합리성에 대한 당시의 비판을 <좌파적 독단>[111]이니 <과격한 종파주의>니 하면서 매도하였다.

 

[119]『인구론』은 영국 고아원과 구빈원의 악명 높은 만행이라든지 요즘 같으면 비교적 가볍게 처리될 범죄를 저지른 빈민을 사형에 처하는 관행 따위에 이데올로기적 구실을 마련해 준 것이 사실이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그 후로 수십 년간 산업 노동계급에 대한 무자비한 착취를 정당화해 주었다. 맬서스주의 이데올로기는 당대의 비열함을 부추기고 공장과 농가의 노동자에 대한 가혹한 착취를 지원하는 데 매우 효과적으로 이용되었다. 이런 일들은 종종 인간의 복지를 염려하는 최소한의 양심마저 결여된 채 광적으로 추진되었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맬서스의 인구 이론을 원용하자, 사회적 다윈주의라 불리는 한층 더 살벌한 사조가 생겨났다. 자연선택에 관한 이론이 이데올로기적으로 변질된 데 대해서 다윈은 아무런 책임도 없었다. 그러나 스펜서H. Spencer를 비롯한 추종자들에 이르러 자연 선택은 지배계급의 사회 이데올로기로서 막대한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영국의 귀족 가문, 약탈을 일삼는 은행가와 기업가, 전망밝은 소규모 사업자와 제조업자, 다양한 계층의 노동귀족 등을 부모로 둔 방탕한 자녀들은 이제 스스로를 <자연으로부터 선택받은 자>, 즉 사회 영역으로 전이된 자연 선택과 적자생존의 산물로 여기게 되었다.

 

[119]그와 동시에 자본주의의 생존 경쟁에서 패배한 자들 - 특히 노동계급과 빈민 - 은 보다 <적합한> 개인을 선택하기 위한 진화의 행진에서 낙오된 불가피한 희생자로 멸시당했다. 자연법은 기업의 영광과 이익을 위해 그들을 착취하라고 명했고, 그들이 자연에 의해 생존하고 성공하도록 선택된 엘리트들에게 더 이상 봉사할 수 없게 되면 폐기물로 처분하도록 명했다.

 

[134]ZPG의 자료는 이렇게 경고한다. <현재의 인구 증가율이 계속되면 세계 인구는 너무나 조밀해져 2537년에는 - 아찔한 만큼 단숨에 미래로 건너뛰었다 - 한 사람 앞에 1제곱미터씩만 남게 될 것이다.>

우리는 전에 이미 2537년(이 연대의 정확성은 참으로 감탄할 만하다)에 대해서는 아니더라도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에 대한 유사한 <예측>을 경험한 바 있다. 이들 대부분이 그릇된 것으로 판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최근의 자료는 ZPG의 예측과 모순된다. 1993년 5월에 제네바에서 열린 <유럽 인구 회의>의 보고에 따르면, 유럽 대륙에서 가장 인구가 조밀한 지역의 출산율이 급격하게 감소해서 2043년에는 유럽 인구가 지금보다 1억 명이나 줄어들 것이라고 한다. 이탈리아의 인구는 5천 4백만에서 4천만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는 높은 결혼율과 낮은 이혼율에도 불구하고 출생률이 이미 1.0%를 밑돌고 있다(한 지역의 인구가 감소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려면 출생률은 2.1%가 되어야 한다).

 

[136]제3세계 출산율이 이렇듯 현격하게 감소한 것이 ZPG와 UN, <인구폭탄론자>들의 불길한 예측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분명치 않다. 그러나 한 세대 전만 하더라도 서유럽에서 제로 또는 마이너스 출산율에 이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신맬서스주의자는 거의 없었다. 이미 밝혀진 것처럼, 유럽은 생활수준과 교육의 개선이 인구축소로 이어진다는 인구통계학의 원리가 옳음을 입증했다. 그러나 제3세계가 기록한 인구 감소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실현된 것이다.

사실 일부 제3세계 국가에서는 자녀의 수를 줄이도록 부모들을 설득하는 아주 미온적인 방법을 사용해 왔다. 중국은 부부가 아이를 단 한 명만 갖도록 요구하는 비자발적인 수단을 동원했는데 이는 중국에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4다. 이러한 방법의 주된 희생자는 특히 농업지역과 극빈계층에 속하는 여성들이었다. 한편으로 제3세계 여성들 - 그리고 남성들 - 이 불임 시술을 받도록 하는 것은 가족 계획 단체와 정부 기관의 소위 <대리인>들에게 아주 짭짤한 이득을 안겨주는 수익성 있는 사업이었다.

 

[137] 나는 오늘날 진행되고 있는 대규모의 도시화가 바람직하다거나 경제적으로 건전하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주제를 다룬 이전의 책에서 나는 읍이나 소도시 규모로 인간과 생태계의 크기에 맞추어 건설된 새로운 유형의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오랫동안 주장해 왔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인구 통계학의 종말론적인 인구 예측과 음울한 이미지는 대부분 극히 불확실할 뿐 아니라 도덕적으로 결함이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환경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 반인간주의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이용되어 왔으며, 그것이 초래한 도덕적 결과라는 측면에서 볼 때 에를리히, 하딘, ZPG의 추종자들이 개진한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예언들보다도 더 해롭다고 할 수 있다.

 

[138]의식을 지닌 행위자가 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은 생물권 내에서 그들을 독특한 존재로 만든다. 인구 통계학적인 측면에서 훨씬 관련이 깊은 것은 오히려 인구 문제를 야기시키는 사회 환경, 특히 성장 위주의 시장 경제와 지속 가능하고 건전한 환경 사이의 양립 가능성이다.

 

4. 생태신비주의와 천사 신드롬

[141]모든 생태 신비주의자들이 반드시 인간을 혐오하고 인간의 조건에 냉담하다는 말은 아니다. 좋게 보자면 이들 중 다수는 본질적으로 환경보호주의자이다. 이들은 동물과 식물의 안녕에 세심한 배려를 보이는 것이 사회적 정의에 대한 관심의 연장이라고 생각한다. 자연계에 대해 책임감을 지닌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야생 생물이나 산림지, 미개간지 등의 유실에 대한 국민적 관심을 일깨우려는 이들의 노력을 나무랄 수가 없다. 생태파괴가 점점 확산되고 있는 시대에 이런 갸륵한 [142]충정은 특히나 바람직한 것이다.

 

[144]탈중심화, 다양성, 공생에 관한 일반적인 언급을 제외하면 환경 위기에 대한 네스의 치유책은 피상적 생태론자들의 개량주의적인 활동과 별로 다를 바 없음을 덧붙여야겠다. 새로운 사회적 분배의 문제에 대한 심층 생태론의 전망은 사실 무척이나 온건하였다. 그러나 강단에 고착되어 있다는 제약 때문에 네스와 그 추종자들은 1970년대에 미국에서 출현한 새로운 생태론의 흐름 - 테크놀로지, 공동체, 정치 분야에 걸친 - 으로부터 근본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그들의 글에서는 국제적으로 펼쳐지고 있던 환경운동과의 연계를 찾아볼 수가 없다. 심층 생태론이 하나의 운동이었다면 그것은 환경 위기를 일깨우고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사회의 방식을 변화시켜야 할 필요에 대한 대중적 의식을 확대하고자 적극적으로 애쓰는 집단들과 거의 교류가 없었던 지극히 사변적인 [145]운동이었다고 할 수 있다.

 

[147]심층생태론처럼 극히 단순하고 독창성이 떨어지는 이론이 애당초 어떻게 처음에는 미국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유럽에서 뿌리내리게 되었을까?

네스의 생태철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로 그 단순성, 그 천진난만한 메시지 때문이다. 심층생태론은 추종자들에게 지적인 면을 크게 요구하지 않는다. 흔히 단순한 설교와 은유로 제시되는 직관과 선험적 개념들은 막연히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라도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오랫동안 이용해 온 것과 똑같은 직관적 원천으로부터 그 메시지를 끌어온다. 요컨대 심층생태론은 머리보다 가슴에 호소하며, 어떻게 <단순한 삶>을 살고 <생태적으로> 행동할 것인지 일러주는 감상적인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에는 노력이 별로 필요 없다.

 

[150]심층생태론이 부상하는 데 가장 중요한 -세션즈와 드볼의 노력보다 훨씬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신좌파가 몰락하면서 이어진 직관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관념을 선호하는 이념적 풍토였다. 그러한 관념들은 산발적인 정치적 행동주의와 아시아의 신비주의에 대한 변함 없는 매력을 뒤섞어 놓았던 1960년대의 반문화 내에도 이미 존재했었다. 신좌파의 소멸과 더불어 캘리포니아에서는 <뉴에이지> 세대에 반문화적 신비주의가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유행했다. 신비주의의 밀물이 나르시스적인 부산물을 무수히 쏟아내면서 선벨트를 강타하자 그 여파로 미국에 신비 지대라 할 만한 문화 지역이 형성되었다.

 

[151]마침내 심층 생태론을 캠퍼스에서 더 넓은 대중의 영역으로 끌어낸 것은 네스의 <생물권 평등주의> 내지 <생물 중심주의>에 구호적 성격을 부여한 <어스 퍼스트Earth First!>라는 직접 행동을 표방하는 자원보호 [152]운동이었다.

 

[153]<어스퍼스트>의 전성기에 운동원과 지지자들은 명백히 반인간주의적인 견해를 공유하고 있었다. 운동원과 지지자들(이 둘을 구분하기는 힘들다)은 각자 다양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가장 목소리가 높았던 지도자들은 공공연한 맬서스주의자들이거나 바로 노골적인 인간혐오주의자였다. 신좌파의 전략과 로고를 내걸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사회 현실에 대해서는 심각한 비판을 가하지 않았다. 가장 목소리가 높은 대표자들 대부분이 강조한 것처럼 <어스 퍼스트!>는 사회 문제를 <휴머니즘적>인 것으로 -털이나 깃이 달린 인간 외의 종이 아니라 경멸스러운 인간 종에 관계된 문제로- 간주하였다. <어스 퍼스트> 회지에 그려진 주먹[154]을 쥔 로고가 원래 무엇을 뜻했든 간에, 1980년대 초에 이르자 잡지의 편집인과 필자들은 심층 생태론을 이론적 틀로 수용하고 미국 생태론의 선두주자 격인 드볼과 세션즈에게 지면을 할애했다.

 

[15]따라서 드볼과 세션즈가 자신들의 궁극적 규범은 <당연히 통상적인(!)> 기계론적 가정들과 매우 협소한(!) 자료의 정의에 기초한 현대 과학의 방법으로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다. 경멸적인 감정이 서린 이 한마디는 심층 생태론의 <규범>을 비판적 분석의 손길이 닿지 않는 벽장에 가두어, 심층 생태론으로 하여금 과학의 <방법>과 추론적 논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준다. 이성을 벗어 던짐으로써 심층생태론은 자신들의 견해에 비판적인 방법이나 자료도, 그 역시 직관적으로 물리치고 만다.

이 과정에서 심층 생태론은 과학적 방법이 <기계론적>이라는, 점점 확산되고 있지만 그릇된 이미지에 호소하고 자신의 연구 영역을 <매우 협소한 자료의 정의>에 한정시킨다. 그런 반과학주의는 향기 가득한 <신비 지대>의 아쉬람에서는 무난히 통용되겠지만 <과학의 방법>은 단지 그런 다양한 생각들이 신비주의자 구루들(개중에는 박사 학위를 가진 이도 있다)이 빚어낸 예언이 아니라 객관적 사실이라는 경험적 증거를 요구할 따름이다. 달리 말해서 과학의 방법은 그들이 자칭하는 통찰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객관성의 기초 위에서 생각들을 판단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객관적인 기준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천사들에 대한 체험으로부터 인종 <공해>의 파쇼적 공포에 이르기까지 이 세계가 점점 더 초자연적이고 기만적이며 위험스러우리만치 권위주의적인 직관에 덮여가고 있는 마당에 그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또한 과학의 방법이 항상 기계론적인 것도 아니다. 흔히 <과학적 방법>이라는 것도 표현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과학적 분[158]석과 관련된 구체적인 기술은 과학의 부문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심층 생태론은 <과학의 방법>이 <매우 협소한 자료의 정의>에 한정된다는 대중적 편견에 편승하는 셈이다. 오늘날의 우주론은 엄청나게 포괄적이고 창조적이며 어떤 면에서 변증법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연구영역이어서, 만일 그 방법이 협소하다면 그것은 다소 심각한 무지를 드러낼 뿐이다.

 

[159]그러므로 자신들이 직관한 규범이 <심원한 질문의 과정을 통해 도달한 것이며 철학적, 종교적 차원의 지혜로 이행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는 드볼과 세션즈의 주장은 하나의 수사에 불과하다. 어떤 <심원한 질문의 과정>도 직관에만 의존할 수는 없으며 여기서 거론되고 있는 네스의 경우는 더군다나 그렇다. 드볼과 세션즈의 <심원한 질문>이 그들이 정당한 경험으로 간주하는 것 이외의 경험적 현실로 뒷받침될 수 없다면, 이를 문제삼는 일 자체가 불가능해지고 만다. (과학을 포함한) 객관적 지식과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전제를 승인하지 않고는 <철학적, 종교적 지혜>를 얻을 수 없을 터인데, 그 두 가지는 특권적인 직관과 양립할 수 없다. 합리성과 경험에서 동떨어진 질문의 과정이라면 이미 온전한 질문이라고 말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또한 직관들이 단지 개인의 신념에만 근거하고 있다면 참인 직관과 거짓인 직관의 구분도 없어진다.

그것은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인류가 샤먼이나 성직자, 족장, 군주, 전사, 장로, 지배 계급, 독재자 등에 의해 축적된 <직관들>을 떨쳐버리는 데만도 수천 년이 걸렸다. 그들은 모두 자기들의 <직관에서 나온 지혜>를 빙자하여 엄청난 특권을 누리면서 하위 계층에 혹독한 시련을 가했다. 만약 이들의 행동을 저지할 합리적 탐구의 요청과 신비주의적인 통찰을 점검할 과학적 진리 기준을 잃는다면 엘리트 계층은 마음 놓고 농간을 부려서 검증되지 않은 신념 체계와 비합리적인 관행, 그리고 순전히 주관적인 사회관 및 세계관을 빌미로 수많은 사람들을 굴복시키고 착취하고 살해할 것이다.

 

[160]드볼과 세션즈가 직관해 내는 두 개의 <궁극적 규범> 중에서 보다 심각한 문제는 먼저, <자기 실현>이다.

최근의 반문화에서 서양철학적이고 종교적이고 심리학적인 <자기실현>이라는 표현만큼이나 자주 회자된 어휘도 드물다. 자기 실현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필경 개인 특유의 독특한 잠재력을 자유로이 발전시킨다는 뜻일 것이다. 자아와 개별성이라는 이러한 서구적인 이미지는 수백 년에 결쳐 형성되어 온 것이다. 드볼과 세션즈는 그것을 <쾌락의 만족을 추구하거나 현세나 내세에서 협의의 개인적 구원을 얻기 위해 애쓰는 고립된 자아로 정의되는 현대 서구적 자아>라고 경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62]더군다나 인간 이외의 존재나 심지어 무기물에까지 자아 개념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자아를 구성할 수 없는 현상들을 너무나 의인화된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산과 강에 자아를 부여한 뒤 계속되는 <기타 등등>이라는 구절은 우리로 하여금 불모의 달, 별, 별들 사이의 우주, 은하계를 계속 떠올리게끔 만드는데, 이것들은 말하자면 전체 우주와 조화를 이루면 상호 연결되어 있는 <큰 자아 속의 자아>들인 셈이다.

 

[165]드볼과 세션즈가 믿는 것처럼 인간과 인간 이외의 영역 사이에 <확고한 존재론적 구분이 없다>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제외하면 무생물은 물론이고 생물권의 어떤 종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인간 이외의 존재와 인간 사이의 존재론적 구분은 매우 실제적인 것이다. 인간은 분명히 영장류이고 포유동물이며 척추동물이다. 인간은 아직까지 자기의 동물적인 피부를 벗어날 수 없다. 유기체 진화의 산물인 인간은 복잡한 생명체에게 통상적으로 즐거움과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주는 자연 변화의 지배를 받는다. 하지만 진화라고 불리는 현상이 있음을 알고 있는 -적어도 알 수 있는- 존재는 인간 뿐이라는 것은 결정적인 사실이다. 오직 인간만이 죽음이 현실임을 안다. 심지어 인간만이 자기 실현이니 생명 중심적 평등이니 <큰 자아 속의 자아>니 하는 생각을 품을 수 있다. ... 그 엄청난 특성과 위업을 단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 사이의 정도 차이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하고 인간의 의식을 철새의 비행 기술과 동등하게 보는 것은 너무나 어처구니 없는 일이기 때문에, 어린이라면 몰라도 교수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166]근거 없는 개인적 신념을 마구 늘어놓아서 독자들을 혼란에 빠트린 드볼과 세션즈는 인간에게나 가능한 <심층적인 물음과 명상>을 통해 얻은 결론이라는 허울 아래 독자들을 <모든 다른 종들의 지배자나 주인이 아니라 생명 공동체 내의 평범한 시민>으로 격하시킨다. ... 인간이 그저 생물권 민주주의의 한 <평범한 시민>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인간은 어떤 동물종보다도 우월하다. 심층 생태론자들은 우월[167]성을 권위주의적으로 해석해서 <모든 다른 종들의 지배자 또는 주인>과 동일시하지만, 만약 내가 가진 사전이 정확하다면 우월하다는 것은 계급, 지위, 권위가 더 높을 뿐만 아니라 <더 큰 가치를 지닌, 뛰어난, 비범한> 것을 뜻하기도 한다. 우월성이 단순히 교사나 선사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특성인 <지식, 통찰, 지혜를 더 많이 가짐>을 의미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선별 기준이 까다로운 심층 생태론의 사전에는 빠져 있는 모양이다.

 

[168]심층생태론자들은 여전히 생물권의 시민이라는 바로 그 명분을 들어서 우리 자신의 생존에만 몰두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쉽게 말해서 심층 생태론자들은 우리에게 평민이 될 것을 요구하는 동시에 무척이나 비범하고 특출나게 생각하고 행동할 것을 기대하는 -심지어 종용하기까지 하는- 셈이다. ... 인간이 스스로를 단지 생물권 내의 평범한 시민으로 보거나 다른 모든 종들과 동등하다고 간주해도 인간은 결국 보이지 않는 조종자가 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 인간은 동물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윤리적 [169]규범에 인도되는 동시에, 도덕과 무관한 자연계와 인간이 권리 및 내재 가치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부정함으로써 윤리를 저버려야 한다.

 

[170]사회에 존재하는 권리, 도덕적 구속력, 지식, 철학 등의 복잡한 목록을 마치 인간이 없이도 생성되고 지속될 수 있을 것처럼 기계적으로 생물권에 전가하는 것은 자연계와 인간의 상호작용을 지나치게 신비화하고 인간의 고유한 용어가 지니는 풍부한 내용을 무화시키는 것이다.

 

[171]심층생태론은 인간의 정신을 사소한 것으로 취급하면서도 자기들의 기본적인 교의에 대한 지지를 요청할 때는 인간적인 호소에 크게 의존한다. 인간의 개별성을 우주적 차원에서 신비적인 큰 자아 속의 자아로 흡수한다는 생각은 반동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사실상 개인이 통제할 수 없는 사회적 힘과 제도의 공격으로 인해 자아가 위축되어 버린 대중 사회에서 통제력 상실이 중대한 사회적 병리로 드러나고 그나마 지니고 있던 자율성과 자유마저 여성, 유색인, 빈민, 소외계층이 다국적 기업, 비인간적 관료주의, 국가 등의 권력에 넘겨주도록 강요당하는 마당에 <인류의 탈중심화>를 외치는 것은 문화적, 사회적 야만의 길을 터주는 우려스러운 결과를 빚을 것이다.

 

[173]심층생태론에는 맬서스적 유산의 잔재가 남아 있다. 드볼과 세션즈에 의하면 식량 생산을 넘어서는 인구 성장에 대한 맬서스의 경고는 <산업 기술적 낙관주의의 드센 물결 때문에 잊혀지고 말았다>.

 

[178]우리들 하나하나가 스스로의 사고와 생활습관을 고치기만 하면 생물권 내에서 바람직한 생태학적 습관을 지닌 시민이 될 수 있다는 것이[179]다. 생태위기와 원인을 인간 본성의 문제로 보는 그런 견해는 -사회생물학이나 생태 신비주의처럼- 대중의 관심을 생태학적 혼란의 사회적 근원으로부터 (종교적 차원까지는 아니더라도) 심리학적 차원의 논리로 돌려 놓았다.

 

[182]현대의 사교숭배는 과거처럼 세속적 지식의 결여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지식이 범람하는 시대에 나타난다는 점에서 더욱 기이한 현상이다. [183]신비주의적이고 특히 반이성적, 반인간주의적인 숭배가 팽배해진 까닭은 사람들이 비록 막연하게나마 실재의 본성에 관해 너무 많이 알게 되고 또 자신이 발견한 것에 두려움을 느끼기 때문이다. 과학과 이성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막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독립적 존재임을 일깨워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형이상학과 고급 문화의 영향이 과장되지 않도록 덧붙이자면, <신은 죽었다>는 헤겔과 니체의 얘기나 세계가 <탈마법화>되어 있다는 베버의 얘기가 강단에서 아무리 역설되었다 하더라도 여기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5. 원시주의의 신화

[194]나는 고도로 세련된 기술로 인해 더욱 가혹해져 가는 경쟁적인 <자유기업> 경제가 토착민이나 구미인들에게 절실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자본 축적과 이익에만 골몰하지 않는 삶의 방식을 지지한다. 나는 또 특권적인 소수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기술 산업> 사회를 편들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인간의 삶은 생태적이고 인간미가 있는 예술과 이상과 영성으로 채워지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나 물질적 불안정과 노역의 짐을 진 삶은 인간의 삶을 의미 있고 창조적이게 만들어 주는 개인적, 사회적 자유를 지켜낼 수 없다. 실제로 그런 자유가 있어야만 생태학적 감수성을 키울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박탈당하고 사회적으로 혜택 받지 못한 사람들이 배를 곯아가면서 야생 생물과 숲의 보존에 신경 쓸 수는 없다. 다른 생명체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이기에 앞서 그들에게는 먹고사는 일이 더 시급하다.

생태학적 감수성은 또한 이상화된 <원시> 세계로 돌아가려도 애쓰는 데서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선사 시대의 부족 사회에서 인류는 [195]통제할 수 없는 자연의 힘과 명백히 그릇되고 신비화된 현실상에 거의 완전히 지배되었던 것이다.

 

[207]생태 신비주의자와 원시주의자들은 성서에서 인간에게 <지배 의식> -보다 적절히 말하면 <청지기 의식>-을 불어 놓는 구절을 늘상 들먹이고 있지만, 사실상 창세기의 여호와는 다산성이나 창조성의 측면에서 대지의 여신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성서에 따르면 유대 기독교의 신은 우주와 빛과 온갖 종류의 생명체를 창조하였다. 여호와는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남무를 그 땅에서 돋아나게>(창세기 2: 8-9) 하였다. 여호와는 기능적인 신일 뿐만 아니라 심미적인 신이기도 하다. ... 인간에게 청지기의 임무를 맡기기는 했지만 명백히 생명 중심적인 사고를 지닌 이 신은 ... 이들[생물들]에게 은총을 베풀고는 이들이 <새끼를 많이 나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고 새들도 땅위에 번창할 것을>(창세기 1: 20-23) 분부한다.

 

[226]현대의 토착민들은 자기가 잡은 동물을 학대하며 때로는 불필요한 고통을 가하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보르네오의 농민들은 고기 맛을 부드럽게 해준다는 속설에 따라 돼지를 미친 듯이 때려 죽이는 관습을 대대로 이어오고 있다. 에스키모들은 조금도 가책을 느끼지 않고 개를 발로 차거나 때리면서 몹시 가혹하게 다루는데, 대초원의 인디언들도 대부분 개를 이런 식으로 대한다.

 

[231]나는 다만 식량 채집인들이 다른 생명체보다 덜 실용적으로 환경을 대했다는 생태 신비주의와 원시주의의 통념을 깨뜨리려는 것뿐이다. 사실 식량 채집인들은 그 모든 심령주의에도 불구하고 환경을 철저히 활용했다. 게다가 채집인들과 동물 간의 관계는 매우 빈약한 것이었다. 구석기 시대 말기의 사냥꾼들이 동굴 벽에 동물의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했다고 해서 그들이 동물을 <형제>로 여겼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버섯을 친척으로 여겼다는 얘기만큼이나 사실이 아니다. ... 생태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식량 채집인들이 세계를 살아 있는 것으로 여겼다면, 이런 견해는 세계가 실제로 살아 있었다는 사실로 설명될 수 있다. 그들의 세계는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세계였으며 그들이 알고 있는 유일한 세계였다. 채집인들의 눈에 세계가 신성하게 비쳤다면 (그들이 신성함을 현대의 구미인과 같은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치고) 그것은 채집인들이 자신의 환경과 <소통하려는>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어느 정도 환경을 통제하려는 - 강한 실용적 요구로부터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 주술과 의식은 매우 실용적인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고 그들의 꿈 속에 나타난 미지의 영적 세계를 설명해 주는 효[232]과적인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232]겉보기에 오늘날의 특정한 생태학적 감수성과 유사하다고 해서 그 진실성 여부와 무관하게 주술 종교적 태도를 찬양하는 것은 커다란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다. 마치 2만 년이라는 세월이 그들의 사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은 듯이 현대의 식량 채집인들이 목가적인 <구석기 시대의 영성>을 간직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무지하기 때문이지 고대적인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 <구석기적 영성>의 부활을 외치는 것은 인간에게 무지를 중요한 가치로 받아들이라고 요구하는 것이며, 과학과 철학, 사회 이론, 심리학 등으로 열려진 매혹적인 세계를 그야말로 <탈마법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희망은 무지와 미신과 단순한 두려움으로 점철된 신화적인 과거로 돌아가는 데 있지도 않고, 탐욕과 경쟁과 지배로 점철된 현 상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있지도 않다. 과거로부터 간직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 가령 한편으로는 좁은 지역에서 식량을 채집한 <원시> 공동체 내에 존재했던 고도로 협동적인 정신을 끌어 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근세에 해방 운동을 통해 옹호된 보편주의와 인간 평등의 이념을 끌어 오는 미래에 우리의 희망이 놓여 있다.

협동과 보편주의가 함께 융합될 수 있다면 진정으로 합리적인 사회가 출현할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사회 속에서 <다시 마법화된> 인류는 더불어 나누는 영성을 키워가면서, 사회적 세계뿐 아니라 자연적 세계의 안녕도 당연하게 인정하는 감수성과 협동으로 가득 찬 사회를 누리게 될 [233]것이다.

 

6. 기술공포와 그 귀결들

[242]<진보하는> 기술적 성취의 도움을 받은 자본주의는 그리하여 기술인technological person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는 과학과 기술에 산업의 논리를 투사한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개인의 자율성>과 <정치적 자유>가 보장된 사회라는 자기 신비화를 추가함으로써, 신비화의 층을 두껍게 만들었다- 이는 과학, 기술, 이성도 무자비한 팽창을 위해 자신의 정언 명령을 만든다는 신화이다.

이처럼 교묘한 신비화는 모든 생태 신비주의를 현혹시켰으며, 자본주의 경제와 시장의 운동을 둘러싸고 있는 <미스터리>를 강화하였다. 산업사회라는 그럴듯한 가명은 자본주의와 동의어일 뿐만 아니라 산업 사회는 애초부터 자본주의를 에워싸고 있던 신비화를 더욱 교묘히 합성함으로써, 지금고 실질적으로 자본주의를 대체해 가고 있다.

 

[242]2차 세계 대전 이후에 전개된 눈부신 과학적 발전과 기술적 [243]혁신은 매우 독특한 사회관계와 무한 성장하는 시장 사회의 산물이다. 과학과 기술이 사회에 대하여 <자율적>이라는 관념, 즉 과학과 기술이 사회를 인도하는 지배적 요인이라는 관념은 실로 가장 위험한 환상이다.

 

[247]기술공포는 비판적 조사를 필요로 하는 심각한 반인간주의적인 문제를 야기한다. 첫째, 기술 공포는 헌신적인 환경주의자들과 문화 비평가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분명한 사회적 관심사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사심 없는 사람들에게 심각하게 투쟁할 수 없고, 다만 동의하는 척할 수밖에 없는 문제 -과학기술-에 주목하도록 강권한다. 이것이 기술공포의 가장 심각한 병폐이다.

둘째, 기술 공포론자들은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의 성원들이 생계 수단과 그들의 자유를 행사할 자유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사회는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전략적 물음을 답하지 못한 채 남겨둔다.

 

[251]워너의 조망은 사회 권력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를 은폐하고 있다. 기술이 사회의 역동성을 제고하는 측면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기술은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이익을 증진시키려는 이기적인 소유주들과 경영자들이 전략적으로 배치한 독특한 수단이다. 새로운 기술이 인간과 인간의 가치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는 워너의 저서는 이런 영향이 -보통 사람들이 <기술 몽유병>으로 고통을 받는 수준에서가 아니라 -실제의 삶에서 경제적 요소를 통해 압도적으로 행위를 주도하는 제한된 사회 엘리트들의 조작의 결과임을 이해하지 못하게 가로막는다.

 

[256]여기서 나는 맨더에게 죄를 묻거나 나와 그의 경험을 교환하고 비교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의 기술공포증은 배부른 삶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 후 베이비붐 세대가 지녔던 기술 공포와 똑같은 맥락에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족할 것이다. 항생물질 사용을 반대하는 그의 주장은 아이들이 치명적인 중이염으로 위험한 유양돌기 수술을 받고, 어른들은 조그만 부상에도 심각한 병을 앓게 되던 시기를 생각하면, 죄송하지만 참으로 배부른 소리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항생물질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1940년대 초 연쇄 구균 감염으로 인해 죽었을 것이다.

 

[269]기술에 대한 하이데거의 관점은 그의 광범위한 세계관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세계관은 여기서 논의될 수 없을 만큼 너무나도 다양하고, 기술 공포에 대한 현재의 비판을 중지해야 할 만큼 방대한 해석적 노력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그래서 정교한 물질의 <표현>을 위해 테크네가 제거될 때 나타나는 <드러냄>에 대한 하이데거의 처리 방식에 상당한 원시주의적 물활론이 내재해 있다는 점을 말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 기본적으로 기술적 상호 관계에 대한 이런 해석은 정적주의로의 퇴행 -형이상학적으로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으로-을 반영한다. [270]하이데거는 수동성의 메시지, 혹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함과 동시에 <드러나게끔> 하려는 노력으로 이해된 인간 활동의 수동성의 메시지를 주장한다. 하이데거가 부산하게 <세계> 내에 <주지주의>, 민주주의, 기술적 개입을 펼쳐 놓을 때, 나치주의자로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기>보다는 매사에 지나치게 이데올로기적으로 관여하지만 않았더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둔다>는 것이 그저 진부한 도교적, 불교적 격언의 수준에 머물렀을 것이다.

 

7. 포스트모던 허무주의

[275]5월에 발발한 학생 폭동과 노동자계급의 총파업은 지적 측면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무관하다. 정치적으로 세련된 대부분의 급진파 학생들에게조차 포스트모더니즘은 아직 낯설기만 했다. 1960년대에 등장한 푸코와 같은 강단 <스타>들은 프랑스 학생 운동과 5월 학생 봉기(일명 68사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급진파 학생들의 사상에 자양분이 된 것은 주로 사르트르의 휴머니즘, 카스토리아디C. Castoriadis가 이끄는 <사회주의냐 야만이냐Socialism ou Barbarie> 그룹의 파리식 자유주의적 사회주의, 드보르G. Debord의 상황주의, 르페브르H.Lefebvre의 [276]일상성 비판, 그리고 불특정한 문화적 아나키즘 등이었다.

 

[279]포스트모더니즘은 분명히 20세기 말에 확산된 아노미와 절망감을 반영하는 해체와 상대주의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그것이 <피로에 지친> 허무주의적인 사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현 사회의 정당성을 쉽사리 용인하고, 심지어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기존의 사회 조건 하에서 별 탈 없이 지내도록 방조하기조차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스스로 사회의 반역자임을 자처하는데, 이는 오로지 현 사회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문제들에 한해서만 통하는 얘기다.

이성, 논리적 정합성, 역사주의의 의의을 폄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로는 대중적 저항에 방향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고, 반생태적인 다국적 자본주의에 맞설 지적 수단을 마련해 주지도 못하며, 진지한 사회 변화 기획을 위한 기반은 더더욱 제공해 줄 수가 없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상대주의를 만연시키고 계몽주의 사상가들과 그들의 급진적인 후예들이 착수한 <보편주의적> 기획을 해체시킴으로써 일종의 사회적 근시안을 산출하고 만다. 단적으로 말해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억압받고 소외된 문화 집단이 겪는 좌절감에 대해 개인적으로 저항하는 나르시스적 모험을 제외하고는 지배세력에 맞서는 모든 진지한 저항세력들을 무장해제시킨다.

 

[284]니체의 노골적인 인간경멸과 이성 모독, 그리고 은유에 불과한 것으로서 진리관 따위는 그를 추종한 많은 반동주의자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 니체의 독특한 정신과 화려한 문체는 그의 문학적 궤도 속으로 우리를 너무나 쉽게 끌어들여 박력 있고 생기 넘치는 결론으로 미혹시킨다. 그러나 그의 사상을 지탱하는 인간 혐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니체는 천사가 아니었으며 자기를 천사라고 부르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라고 경멸하였을 것이다. 니체의 책이 매우 다양한 시대의, 폭넓은 분야의 사상가들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것은 구슬리면서 동시에 거드름을 피우고, 자기 확신적이면서 동시에 모순투성이인 그의 격렬한 스타일(문체)에 힘입은 바 크다.

 

[289]푸코의 견해가 이끄는 논리적 귀결에 따르면, 자유분방한 개인들이 모여서 9월의 군중과 같은 <기능적인> 결사체로 응결되는 경우가 아닌 한, 애초부터 어떤 종류의 사회도 지배 없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다. 변덕스러운 군중 행동이 합리적으로 조직화된 인간 행동의 토대를 침식할 수 있다는 얘기는 이론의 요건을 갖추지 못했거나 심한 경우에는 이론적 자각의 수준에조차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푸코의 [290]권력 비판은 삽화적 성격이 강하고 극히 정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재편성을 보여주려는 그의 시도는 오히려 권력을 너무나 광대하고 파악하기 어렵게 만들어 버린다. 우리는 권력의 아주 사소한 세부 사항까지 알 수 있는 반면에 권력의 전제 조건과 구조, 그리고 특히 그것을 지탱해 주는 핵심적인 사회 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권력을 강압의 행사로만 보면(1972년 9월의 군중도 분명히 이것을 행사했다!) 권력은 너무나 편재해 있어서 대처할 수 없게 되고 만다.

 

[229]『존재와 시간』은 주로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서 주제를 끌어내고 독일 낭만파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반계몽주의적 관념들을 빌려온 뒤에, 동사를 명사화한 형이상학적 어휘를 사용하여 본래성으로부터 비본래성으로의 <타락fall>또는 <빠짐falling, verfallen>을 해명한다. 예를 들어 <타락하다to fall>는 종교적 의미가 베어 있는 동사이지만 형이상학적인 명사인 <빠짐falling>으로 바뀌면 그 의미를 알기 어려워진다. 이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가리키는 <내던져져 있음throwness>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존재와 시간』을 읽어 보면 우리는 지금까지 한동안 계속해서 <빠져>온 것이 분명한데도, 하이데거는 이 어휘를 성서에 하나의 사건으로 집약되어 있는 유사 종교적 타락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아무튼 하이데거의 <빠짐>은 성서의 <타락>을 세속화한 개념으로 상실에 대한 형벌을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다. ... 그의 후기 저작들에 의하면 우리는 상실에 대한 엄숙하고 묵시론적인 형벌을 여태껏 치러왔거나 지금 치르고 있는 중이다.

 

[301]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을 쓸 무렵에 이미 그의 존재론에 <지도자의 원칙>을 도입하고 있었던 것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반동적 엘리트주의자라는 사실이다. 엘리트들에게 <사람들> -니체의 경우에는 <군중>- 이란 본래적인 소수를 위한 비본래적인 소재와 다름 없다.

 

[304]1930년대 초반에 파시스트적이고 민족주의적인 연설과 강연을 떠들썩하게 펼쳤던 하이데거의 형이상학은 이제 횔덜린의 시나 언어의 개체 발생적인 역할, 아시아의 유신론을 상기시키는 정적주의에 대한 철학적 암시 따위로 전환하면서 훨씬 평온하고 숙명론적인 어조를 띠게 되었다. 하이데거의 전후 저작들은 신비주의와 묵시론적인 유신론으로 가득 차 있다.

 

[305]프랑스의 전후 철학자들이 하이데거 사상이라는 어두운 바다에 몸을 담근 것은 진지한 사색에 하나의 재앙이었다. <금세기가 저물어 가는>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 짐을 짊어지고 있다. 프랑스의 숭배자들은 니체와 하이데거의 모든 저작을 이 두 독일인이 본래 지녔던 것보다 더욱 모호하고 여러 면에서 더욱 반현대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다. 물론 파시즘과 민족주의의 색채에서는 훨씬 못 미치지만.

 

[318]간단히 말해서, <욕망기계>를 어떻게 사회적 혁명의 노선으로 나아가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는 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혼란스러운 언어와 문체 덕택에 정밀한 비판적 검토에서 면제된 들뢰즈와 가타리는 합리적 사고와 결과에 대해 포스트모더니즘의 전형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그들은 이성을 <나무>에 비유하면서, 뿌리(정초, 근거), 형상(논리), 구조(정합성)로 이루어진 지식에 대한 해묵은 서구식 은유를 거부하고 그 대신 땅 밑에서 꿈틀거리면서 덩굴손을 밀어 올리는 <뿌리줄기>라는 자기들의 은유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다원성, 이질성, 탈중심성, 무정형성 -한마디로 부정합성의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이 <뿌리줄기>라는 이미지와 방법은 역사를 일화와 불연속적인 사건들로 용해시키는 푸코의 미시 분석을 연상시킨다. 아니나 다를까 푸코는 『앙띠 오이디푸스』에 뜨거운 성원을 보내는 서문을 썼다.

 

[327]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쿤의 기여는 대체로 지엽적이고 기술적인 것이었다. 사실상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쿤은 <과학의 방법>에 관한 책을 쓴 것이 아니다. 귀납과 연역의 장점에 관한 탐구는 이미 약 2천3백년 전의 아리스토텔레스 시대에 시작되어 중세에 기독교 스콜라 학자들에 의해 형식화되었다. 실험(베이컨), 사변적 가설과 연역적 접근법의 결합(휴얼W. Whewell), 유사성과 차이의 기준을 이용한 자연현상의 원인 규명(밀J. S. Mill) 등과 같은 방법론상의 논의는 오랜 계보를 지니고 있다. 최근에는 논리 실증주의의 검증 원리와 포퍼K. Popper의 반증 원리에 의해 과학의 방법론에 관한 더욱 복잡하고 난해한 이론들이 개진되었다.

 

[328]쿤이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과학자들도 일반인들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전지적이고 객관적인 지적 대가가 아니라 한갓 인간일 뿐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도 특정한 범형이나 세계관을 교육받은 뒤에는 변화에 저항하는 경향을 띠게 된다. 이들은 굳어진 신념을 침해하는 명백한 변칙 사례의 타당성과 중요성을 놓고 (때로는 비합리적일 정도로) 시비를 벌인다. 이들은 자신이 직면하는 의견의 불일치 때문에 <위기>를 맞기도 하지만 때가 되면 새로운 범형을 <정상과학>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이것은 또 다른 범형 이동의 고뇌를 겪게 되기까지 지속된다. 이들은 보통 사람의 행동의 특징을 이루는 열렬한 감정, 조절된 반응, 굳어진 관습, 정신적 장애, 격한 충동 따위를 모두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모두 말하고 행한 뒤에 - 쿤은 이 점을 간과하고 있는데 - 과학자들은 사호하지 않은 다른 일을 진지하게 행한다. 종교적 광신자, 몽롱한 신비주의자, 완고한 반합리주의자들과 달리 과학자들은 조만간 사실과 논리적 추론, 합리적 평가 따위의 요청에 답해야 한다. 이들은 모든 실험 과정에서 <과학적 방법>을 따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최소한 이들의 초자연적이거나 신비적인 요소들에 의지하지 않고 자기들의 주장을 수학적으로나 실험적으로 증명해야만 한다. ... [329]다시 말해 과학자들이 가설에 어떤 식으로 도달하건 간에 - 직관이나 잡담, 꿈, 환상, 체계적 사고 등 어떤 방식으로건 - 이들의 가설이 과학계에서 받아들여지려면 증명이라는 신중하게 공식화되고 실험적이고 논리적인 기준을 통과해야만 한다.

 

[329]과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냉철한 객관적 규범에 기초한 단계적 절차를 따르지 않는다는 그의 논증으로 인해, 과학적 검증 방법 자체를 타파하여 현실 세계에 관한 지식의 원천인 과학의 완전성을 파괴하려는 의도를 지닌 저술 활동이 촉발되었다.

 

[337]일부 페미니스트들은 영성은 더 심층적이고, 유기체적이고, 직관적이고, 신경감각적인 우주 이해의 기관을 가지고 있는 반면 남성은 기계론적이고, <로고스 중심적>이고, 신경학적으로 둔하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여성은 그들의 성적 상대에게는 낯선 통찰력을 가지고 육체적 현실을 바라본다. 이런 견해는 고대로 소급되는 연금술적이고 그노시스적인 지혜, 불가해하고 마술적이고 신비주의적인 개념들의 부활을 조장하였다.

 

[339]오늘날 핵심적인 페미니스트들의 대변자들은 과학으로서의 과학과 <남성적> 형태의 이성을 비난한다. 이 메시지는 여성을 호르몬이 일으키는 어리석은 감정 덩어리로 여기는 전통적인 가부장제이 여성 이미지 - 여성만의 독자적인 이해 방식을 창안해 내야만 하고 <유기체적 지혜>를 선천적으로 타고난다는 -를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페미니즘 내의 이런 추세는 곧바로 반합리주의를 조장한다.

 

[344]과학과 그 업적에 관한 그 어떤 논의도 파이어아벤트를 거론하지 않고는 완전하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반합리주의와 상대주의는 너무나 숨김 없고 극단적이어서 방법론적 아니키즘을 지지하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사상계의 혼돈을 찬미하는 환희의 노래처럼 들린다. 의도적이건 아니건 파이어아벤트는 보편적인 윤리적 허무주의를 위한 전제들을 확립한다. 따라서 그의 저작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과학적 방법>이나 과학적 기준조차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처럼 절망적으로 여기게 된다.

 

[345]과학자라 하더라도 자기 자신의 신조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학적 기준은 여전히 과학자들이 어떻게 가설을 형성하는가에 상관없이 실험과 증명을 요구한다. 과학자들이 어떻게 자기의 가설에 도달하는가 하는 것은 심리학 연구에서는 흥미로운 주제겠지만, 그 가설의 타당성이 과연 입증될 수 있는지 또는 과학자들이 터무니없는 환상이 아니라 사실을 다루고 있는지 하는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파이어아벤트는 이 핵심적인 문제들의 기반을 철저히 흔들어 놓는다. 그는 특정한 가설을 형성하는 데는 고정된 방식이 없다는 것 - 이는 [346]그 자체만으로는 다소 진부한 문제이다. -을 보여주려고 하지만 왜 특정한 증명이 다른 증명 대신 받아들여지는지에 대한 그의 설명은 다소 자의적인 면이 있다. 과학은 모든 종류의 관념들을 위한 놀이터인 셈이다. 이 각축장은 고도로 창조적일 수도 있지만, 반면에 그가 찬양하는 아나키적 <관념들의 시장>에서는 불가해한 설명을 늘어놓는 점쟁이, 사주쟁이, 무당 등이 현상에 대해 신중하게 추론된 설명과 그 타당성을 증명하는 과학자들 못지 않은 지위를 갖는다.

 

[347]파이어아벤트식 궤변은 그가 처리할 수 없는 문제를 단순히 비켜갈 뿐이다. 그것은 즉 작용력이 없는 과학은 결국 - 때로는 신속히 - 폐기 된다는, 다른 여러 자칭 <학문>에는 해당되지 않는 사실이다.

파이어아벤트는 <과학의 효율성은 과학적 전통에 속하는 기준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객관적인 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면서 논점을 얼버무린다. 이는 과학기술 - 그것이 정확할 경우 -의 타당성을 유지하려면 실천에서 작용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관해서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순전한 궤변이다. ... 만일 우리가 스탈린이나 히틀러의 생활 방식을 실재로 받아들인다면 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강제수용소의 공포나 아우슈비츠의 참상에 대해 불평할 수 있겠는가?

... [348]그러나 『방법의 거부』에도 파이어아벤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곤 하는 견해들을 심하게 과장하고 있다는 자체의 <방법론>이 없지는 않다. 파이어아벤트를 괴롭히는 <고정된> 방법과 <고정된> 합리성 이론은 실상 과학자나 합리주의자들의 마음 속에서 파이어아벤트가 우리에게 역설하는 것처럼 그렇게 <고정되어> 있지 않다. 과학과 이성은 특히나 변화와 변용에 개방적이었으며, 광신적인 교조주의와 미신으로 점철된 역사에서 가장 해방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오히려 파이어아벤트는 표면적으로는 불가침이지만 실제 연구에서는 위반되곤 하는 과학적 방법의 <고정성> - 이는 증명이 진리의 궁극적인 심판자라는 과학적 기준을 침해하지 않는다 -을 다룰 때 사소한 주장은 무시해 버린다.

 

[357]윤리적 문제를 단순히 <존재하는> 동등한 주관적 <전통들> 사이의 권력 게임으로 환원시키는 이런 얘기는 더 이상 소박한 상대주의의 산물로 간주될 수 없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파이어아벤트는 우리 시대의 반인본성을 나무라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 견해를 모조리 취향의 문제로 환원시키는 냉소주의에 토대를 마련해 준다. 하나의 윤리적 판단이 다른 윤리적 판단을 압도하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으로건 지적으로건 얼마나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보드리야르가 사회적, 문화적 조건에 그대로 굴복한 것처럼, 아나키즘 인식론으로 무장한 파이어아벤트는 자기 말대로 반유대주의건 인종차별이건 상관없이 <아무래도 좋은> 무도덕의 진공 속에 독자들을 몰아넣는다. 그리고 인종차별과 인도주의 간의 투쟁에서 <아무래도 좋다>면 도덕 중립적인 파이어아벤트의 강령은 당연히 이기는 편을 지지할 수밖에 없다.

 

9. 휴머니즘의 옹호

[359]사실 개인적 무력감과 위기감이 팽배한 시대에 종교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종교는 퇴행하는 사회의 탁월한 진정제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오늘날 시장에서 텔레비전 수상기와 비디오카세트레코더 다음으로 성장속도가 빠른 상품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만 현기증 나는 것은 이 엄청난 이데올로기적 반혁명이 순식간에 출현하였다는 사실이다. 25년 남짓한 기간 동안에 나는 (나이 지긋한 독자들 역시 그랬겠지만) 아나키, 문화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다소 과장되면서도 투쟁적인 사회적 급진주의가 금세기에 와서 전례 없는 정치적 정적주의quietism에 자리를 내주는 것을 목격하였다. 지구 가이아에 수동적으로 거주하고, 단순히 <존재하는be-ing> 새로운 지혜가 사회적 저항과 혁명적 비전의 뇌관을 제거해 버린 것이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외침은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이라는 외침으로 뒤바뀌었다. 전자가 한때 개인의 운명을 보다 넓은 사회에 결부시키고 자기 실현의 형식으로 사회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면, 후자는 사회적인 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대체시키고 자기 구원을 위해 사회로부터 한발 물러날 것을 요구한다.

 

[360]반인간주의적인 이 조류들은 구체적 양상에서는 서로 다르지만 한 가지 특성으로 공유하고 있는데 발전지향적인progressive 철학자들은 그것을 매개가 결여되어 있다고 말할 것이다. 즉 그들의 사고가 현실 세계의 발전 과정을 반영하는 해명되고 구체화된 전개 방식을 결여하고 있다는 뜻이다. 반인간주의자들은 애초부터 현상을 즉각적, 직접적, 직관적으로 - 그리고 환원적으로 - 사고하고 느끼고 감지한다. 직접적인 것은 기본적이고 단순하고 초기적이고 주어진 것인 반면에 매개된 것은 연속체의 확정 가능한 단계, 즉 발달의 결과이다. 매개는 또한 구별 가능하고 서술 가능하며, 철학적 용어를 빌리면 <한정적>인 단계로서 개념적 명확성과 합리적 해석을 특징으로 한다.

 

[362]이 반인간주의 세계관은 결코 겉보기처럼 무해한 것이 아니다. 사실, 어떤 직접성immediacy의 철학에도 항상 불순한 결과가 따른다.

그러한 결과 중 첫 번째로 역사의 폐기 - 역사의 실재성, 중요성, 통일성, 의미의 거부 -를 들 수 있다. 여기서는 인간이 일차 자연에서 진화하여 원시적 유대를 초월한 것은 하나의 <전락>으로 간주된다. ... [363]나는 모든 반인간주의자들이 반드시 이런 신념 체계를 지니고 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 사회문제에 대해 반인간주의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태도는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단선적이고 통일된> 역사가 없다면 진보도 없다. 이런 진보를 거부하면서도 반인간주의자들은 역사가 지향성을 가진다고 - 인간사에 있어서 거대한 퇴보를 겪고 있다고 - 주장한다. 이들은 역사 과정에서 인간은 뼈아픈 실패와 참상을 겪기도 하지만, 그 속에서 어떤 합리적인 토대를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역사를 통해 인간의 지성은 더욱 세련되고, 도덕 체계는 억압과 사회적 고통에 맞서 더 큰 책임을 지게 되고, 예술은 인간의 조건에 더욱 민감해지고, 사회는 더[364]욱 세속화되고, 지식은 보다 사려 깊은 반성과 검증 기준에 따르게 되는 이 모든 발전이 한바탕 에피소드로 파편화되고 (지성, 도덕, 예술, 지식, 사회의 발전) 각각은 마치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별도의 생명력을 지니는 것처럼 상대적으로 취급되기에 이른다. ... 진보라는 개념 자체를 파기하고, 심지어 무엇이 진보이고 무엇이 진보가 아닌지 판단할 기준마저 박탈해 버린 반인간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문명의 개념을 상실한 채 정처 없이 떠돌게 만든다.

 

[365]내가 인간성을 <재마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본래의 뜻은 상호존중의 윤리와 함께 나누는 사회에 바탕을 둔 합리적이고, 생태 지향적이며, 미학적으로 고양되고, 자비 넘치는 세계를 창조할 수 있는 인간의 잠재력을 깨닫는 것이 중요함을 지적하려는 데 있다.

 

[366]진화를 이해하고 역사적으로 사고하려면 전통 논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분화되지 않은 잠재력을 끝없이 확산되는 특수성, 복잡성, 총체성으로 내모는 내재적 추동력을 찾아야만 한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인간을 통일시키는 거대한 축 - 독립적으로 발전하는 문화들 사이의 유사성, 인간이 역사를 통틀어 직면하는 공통의 문제, 그리고 인간이 궁리해 낸 공통의 해결책 -을 찾아야만 한다.

나의 의도는 흔히 전통 논리와 대비되곤 하는 변증법 논리를 성파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생물학이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통찰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이 생물학적 법칙의 산물 이상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깨닫지 못하고서는 인간과 사회가 일차 자연으로부터 출현한 사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할 뿐이다.

 

[368]대부분의 반인간주의자들이 일종의 불간섭주의적인 은거, 자연과의 수동적 관계에서 인간의 구원을 찾으려 한다면, 나는 그 반대로 문화의 중요한 기능은 인간이 자연 진화의 산물이건 사회 발전의 산물이건 간에 그들로 하여금 합리적이고 창조적으로 세계에 개입하고 기존의 조건 위에서 향상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369]반인간주의자들이 볼 때 이런 계몽된 휴머니즘은 개조되지 않은 휴머니스트의 과격한 인간 중심주의처럼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인간이 거대한 사회적, 생태적 위기에 직면해 있는 것은 지나친 문명화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충분히 문명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회진화가 문명을 향해 막힘없이 단선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거나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그러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리가 자유롭고 합리적이고 자기 의식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잠재력을 반드시 실현하리라는 보장도 없다. 사회 발전을 인간의 완전한 계몽을 향한 이성의 발현으로 간주했던 헤겔처럼 철저하게 목적론적인 철학자조차 역사를 <도살장>이라고 표현했다.

 

[370]넓은 의미에서 이성적인 사회를 성취하기 위한 인간의 잠재력은 자유를 성취하는 데 있다. 자유는 상호 관련 있는 다양한 성취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행위의 다양한 과정 사이에서 선택하기 위한 기회,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삶을 창의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기회, 인간과 자연의 세계를 인간적으로 다루기 위한, 상호 보완의 윤리에 따라 행동하기 위한 기회. 사회 조직의 공동적 틀을 창조하기 위한 기회, 그리고 우리의 모든 활동에 이성을 이용하기 위한 기회를 획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이성적으로 유도된 선택, 어떤 기초적인 미덕들, 급진적으로 민주화된 제도들은 인간성을 부여받고 자유로운 인간형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분적으로 실현된 잠재력으로 구성된다.

이런 의미에서 동물은 본질적 자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 동물은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지 못한다. 그저 자신들이 발견한 세계 안에 존재할 뿐이다.

... [371]이와 대조적으로 인간은 (한정된 수준의 영장류를 제외하고) 실질적으로 그들의 자연적 거주지에는 존재하지 않는 형식 안에서 자신들을 만들어가고 선택하면서 다양한 대안들을 상상해 낼 수 있다. 인간은 놀라운 유동성으로 명확하게 이해되거나 예기된 필요에 따르기 위해 주위의 환경을 다시 만들 수 있다.

 

[375]한편 인간 만사에 이성적으로 추론 가능한 진보 - 그렇다! 진보이다 - 와 합리적 발전 노선을 인정한다고 해서 불연속성, 퇴보, 전환, 막다른 골목이 없다는 말은 아니다. 사실 인간사에서 단선적이고 궤도를 벗어나지 않는 진보란 없다. 만약 역사가 야만과 공포로 얼룩지지 않은, 멋진 신세계를 향한 불굴의 행진이었다면, 그야말로 더욱 신비스러웠을 것이다.

 

[384]역사를 완전히 <불연속적인 것>으로 만들고, 인간 행위의 부정적인 면에 집착하거나, 비관주의에 빠져서 진보와 방향성, 인류 발전의 정교함을 경박하게 부정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그 자체의 불완전성은 논외로 하더라도, 오랜 시간 큰 대가를 치른, 어쩌면 불가피한 물질적, 문화적 성숙의 과정을 무시하고 있다. 이 과정은 세계에 대한 제한적이고 신비적인 편협성을 벗어나, 인간성과 자유의 이상을 발전시켜 온 시련의 과정이었다. 사회적 행동의 탈맥락화를 위한 관습적인 추론 능력으로 회귀하는 일은 역사에 대한 포괄적 관점을 무력하게 만드는 일이며, 선과 악의 조화에 도달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약화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은 우리를 기계적으로 구분된 진보로 환원시키고, 인간 행위의 미묘함으로 퇴보시키고, 전적으로 인간이 서로에게 가하고 있는 역사적 조류를 무시하고, 일회적인 파도에 우선권을 부여한다.

 

[385]나는 인간들이 통찰력 있게 자신의 환경을 변화시키고, 이 환경을 보다 안전하고 안정적이며 풍요롭게 하고, 최소한의 노력으로 보다 편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의식>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말하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인류의 행위와 사유에 항상 내포되어 있었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이건 기술적 가능성과 사회적 관계가 확립되고 나면, 부단히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었다.

 

[388]피붙이가 아닌 사람들을 사회적 공통성이라는 끈으로 묶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매개물은 바로 도시이다. 세계적 규모로 성장한 도시에서는 다양한 혈통의 인종들이 모여 장인으로서, 상인으로서, 혹은 다양한 관리인으로서 공통 관심사를 이야기하며 자연스레 교류할 수 있다. 그들은 종종 서로를 보호해 주는 길드를 결성하기도 하는데, 업무상의 분화와 [389]마찬가지로 시민으로 결속된 길드는 혈통으로 결속된 전통적인 결합체인 <부족>보다 더 결속력이 강하다.

씨족에서 시민으로, 혹은 생물학적 사실들로 구성된 삶으로부터 시민적(더 넓게는 사회적) 요소로 구성된 삶으로의 인류의 이동은 사람들을 이차 자연으로 매개하는 정교한 진화를 만들어 간다.

 

[390]만약 내가 애초에 유럽에서는 역사적, 이데올로기적인 요소들이 독특한 위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과 개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화를 산출하였고, 다른 문화권에는 없는 건강한 자연주의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강조하지 못한다면, 이런 견해는 불완전한 것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 역사적, 이데올로기적 요소들이 독특한 위상을 갖게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개인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관심을 공시에 강조하는 독일법과 로마법의 조화, 기독교가 개인의 정신에 부여한 개인은 가치 있고 각기 특별하다는 생각, 토마스 아퀴나스로 대표되는 유럽 신학에 뿌리를 둔 합리적 준거,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으로서 자유 농민, 자유 목축업자, 도시 기술자, 완전히 독립된 상업 부르주아지, 상대적으로 약해진 봉건 영주로 구성된 혼합 경제의 출현을 들 수 있다.

 

[392]이성적으로 공유된 이해comprehension를 가진 정치 공동체를 [393]추구했던 계몽주의는 이성적인 경제 공동체를 요구했던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유형의 사회주의가 주장하는바, 삶의 기본적 수단을 인간의 필요에 봉사하는 위치에 두지 않으면, 표면상 민주주의적인 정치제도라 하더라도 그것은 성취되었다고 할 수 없다. 이런 정치 제도의 활용은 물질적인 수단과 공적인 행정에 참여할 자유 시간을 가진 자들의 특권을 유지하는 데 봉사할 뿐이다. 그로 말미암아 정쟁을 일삼는 정당과 국회의원들 사이에서 해결되어야 할 입법상의 문제로 환원함으로써, 사회 문제를 신비화하게 된다.

사회주의가 정치적, 물질적 측면에서 민주주의와 완전하게 결합되고, 나아가 전면적인 사회 변화를 향한 구체적인 전략으로 무장되어 있는 바로 그러한 시대에, 휴머니즘은 비로소 가장 고취되고 유망하며 <매혹적인> 순간에 도달한 것이라고 말한다 해서 결코 감상적인 것을 아닐 터이다.

 

[395]지금은 20세기의 어떤 시기보다도 양차 대전 중간 세대들이 지켜온 희망이 붕괴되고 있는 시점이다. 그 이유는 19세기에 촉발된 위기에 대한 해석 방식이 부분적으로 거짓이었기 때문이다. 고전적 사회주의는 상업의 보편화, 평준화 역할이 국지적인 변형에 머물러 있는 인간 존재human being로부터 독특한 평범성으로 통일된 인간humanitas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사실을 통찰력 있게 받아들였다.

... 급진적 사회운동의 필요성 - 급진적 사회 사상의 고전기에 아주 분명해졌던 바와 같이 - 은 <성불enlightenment>하기 위한 불교 집단이나, 아쉬람을 만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으로 대체된다.

 

[398]휴머니즘의 옹호는 낡은 유령의 탈마법화에서 시작된다. 이 정신은 이해할 수 없는 꿈의 세계에서 도출된다. 무당과 설교자들이 냉소적으로 구성한 신과 신성이라는 은폐된 영역은 인간이 자신을 단순하게 의인화[399]하여 투사해 낸 것이다. 역사와 역사가 보여주는 풍부한 경험을 삭제해 버리고, <즉각적이고> 매개되지 않은 원시성에 대한 신비적 추구, 문명에 의해 오염되어 인간 본성의 관점으로 세속화된 원죄에 대한 신화적인 통념, 실재 혹은 <존재>를 드러내는 가장 <확실한> 수단으로서 비이성적이고 직관적인 것의 실체화, 그리고 <자연 지배>라는 관념을 포함하여 수천 년 동안 우리를 지배해 온 계급과 계층의 이익관심이 그것이다.

 

[399]만약 자유가 단순히 덜 발달된 원시 문화에 나타나는 신화와 주술이 주입된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과 같은 의미라면, 문학 작품, 적절한 휴식처, 충분한 음식, 생명을 지켜주는 의료 서비스에 의지하지 않는 편이 더욱 자유로운 상태일 것이다. 자유가 이런 <순수>의 상태라면 끝없는 밤의 공포는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의무와 관습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원시> 인간보다는 하이에나와 얼룩말이 훨씬 더 자유로울 것이다.

 

[400]있는 그대로의 그리고 있어야 할 바로서의 실재를 보는 우리의 능력을 모호하게 하는 물신성을 제거할 때, 오직 그렇게 할 때만 우리는 이성적 존재로서 자아실현을 위한 살아 있는 잠재력을, 그리고 세계 내에서 창조적이고 자기 개선적 주체로서 휴머니즘을 옹호할 수 있다. 이성적 존재는 고통과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죽음에 대해 무엇보다도 민감하다는, 정확히 그 이유에서 인간 이외의 생명체의 복지를 위한 윤리적 책임을 가질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 사실 이런 정신만이 오직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과 자연계의 사태를 의식적으로 다룰 수 있다. 한마디로 좋든 싫든 오직 인간만이 이성과 과학과 경험의 누적적 결과인 놀랍도록, 정교한 지식을 가질 수 있으며, 오직 인간만이 최소한 잠재적으로라도 모든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신비하고도 <매혹적>인 존재이다.

 

맺음말

[402]신중한 사상가라면 있는 것을 정당화하기보다는 있어야 할 바를 숙고하기 위하여 바로 이 <현실>의 배후를 통찰하여야 한다.

내가 여기서 있어야 할 바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현실적인 것을 의미하지만, 관념과 사회적 행위라는 한 세기 이상 간직되어 온, 열린 자유와 자기 의식이라는 숨은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가 간결하게 주장한 대로 <관념이 현실을 추종하여야 할 뿐 아니라, 현실 또한 관념을 따라야 한다>. 실제로 나는 합리적이라고 인식된 관념이 <현실>을 인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이다. 말하자면 우리는 인간의 무한한 잠재력에 대한 합리적인 현실화를 추구하여야 하며, 동시에 불합리하고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판하는 윤리적 역할을 간직해야 한다.

 

[402]첫째 우리는 현재의 생태학적 위기를 설명하는 사회적 정수를 재발견 - 생태학적 감수성을 위한 필요를 포함한 - 해야 한다. 이 정수는 계몽된 휴머니즘의 중핵이다. 계몽된 휴머니즘은 비판적이면서도 재구성적이고, 관념적이면서도 실천적이며, 사변적이면서도 참여적이다. ... [403]둘째, 우리는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전망을 전면적으로 재수립하기 위하여 이성의 권능을 강화해야 한다. 그것은 현 사회를 전면적으로 대체할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우리는 이미 상품 생산과 시장, 자본을 마치 역사의 한계와 다양한 인간관계를 넘어서서 신이 부여한 것인 양 가정하고 있다. 수십 년 전부터 내가 주장해 온 새로운 사회는 자율적이고, <공동체적인 코뮌>이어야 한다. 이는 균형잡힌 연방적 네트워크, <직접 민주주의>, 지역 위원회와 지역 대표 위원회가 행정적으로 통합된 탈중심화된 공동체이다. 이는 오늘날 중앙 집권적 국민 국가에 대적하는 대응권력으로 작동할 것이다. 내가 <직접 민주주의>라는 말로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특수한 이익관심에 이끌리는 민족, 인종, 성 집단과는 구별되는, 자유 시민의 대면적 집합체를 말한다. 하지만 보편적인 인간적 이익관심으로 통일되지 않고, 사안의 불일치 때문에 괴로움을 겪는 공동체는 명백하게 특권적이고 특수한 관심사를 무너뜨림으로써 구성된다. 그들 자신의 고유한 사회 경제적 이익관심을 가진 이들 특수 집단은 공공의 복지와 안녕보다는 자기가 속한 집단의 관심사에 주목하기 때문에, 시민 정신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셋째, 우리는 노동시간(필연의 영역)을 줄이고 여가 시간(자유의 영역)을 늘릴 수 있는 기술과 과학을 진보시켜야 한다. 모든 사람의 필요가 충족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공공 행정 서비스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시[404]간이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주어지지 않는다면, 누구도 진실로 자유롭지 못하다.

... 넷째, 우리는 정의와 자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완전히 재개념화해야 한다. 생명의 순환이라는 과점에서 인간 개개인은 점점 (물리적인) 힘이 약해지고 있다는 의미에서건, 한 사람을 다른 사람(물리적인 힘, 어떤 특정한 능력 등등의 차이에 근거한)과 구분하는 능력, 경험, 지식의 차이라는 관점에서건, 어떤 사회에서도 만인이 <똑같을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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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우, [주체란 무엇인가], 그린비, 2009

  • 등록일
    2010/01/07 02:45
  • 수정일
    2010/01/07 02:45

 

이정우 선생이 이 책을 쓴 이유는 분명하다. 그의 말대로 그가 철학을 시작한 지점이 이 개념이고, 모든 철학은 '주체' 개념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나의 연구 주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한 철학자가 사유를 시작한 로두스는 아마 영원히 미탐사인채로 남을 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지점은 언제나 그가 돌아와야 할 곳이기도 하고, 그래서 영원히 알 수 없는 곳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정우 선생은 두 권의 저서를 더 예고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사건이란 무엇인가: 정치적 맥락에서] 그리고 [진보의 새로운 조건들]이 그것이다. 선생은 전자를 '사건론'이라 부르고 이 책을 '주체론'이라 하면서 이 두 책이 [진보의 ... ]를 보완한다고 말하고 있다. 

 

주로 '개념론'을 쓰면서 철학사적인 작업을 해온 당대의 가장 뛰어난 한국지성 중 한 사람인 이정우 선생이 이제는 실제로 '자신의 철학', 말 그대로 '주체의 철학'을 하기로 결심한 듯하다. 그러니 시작에 불과한 이 작은 책자를 읽고 허기진 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책들이 많이 기대된다. 

 

  

『주체란 무엇인가-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 이정우 지음, 그린비, 2009.
 
1. 술어적 주체를 넘어
주체와 술어 / 집합적 주체들 /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으로서의 시간
2. 차생(差生)과 정체성
자기차이성 / 고유명사로서의 주체 / 객체성과 주체성의 갈등과 화해
3. 인식론적 역운(逆運)
진리가 오류로 둔갑할 때 / 역운의 극한
4. 타자-되기
주체화를 둘러싼 투쟁 / 거대 주체를 무너뜨리기 / 타자 없는 주체 / 타자-되기
5. 무위인(無位人)
‘우리’들의 계열학 / 상생적인 되기의 함정: 남북한의 예 / 진정한 우리-되기의 가능근거: 무위인
맺음말
후주 및 관련 저작들
 
[12]주체 물음의 반복 아래에는 ‘나’라는 힘이 숨어 있다. 그것은 자의식을 갖춘 개체가 좋든 싫든 품을 수밖에 없는 힘이다. 이 힘이 주체 물음을 반복되도록 만든다. 그러나 이런 반복에는 아이러니가 숨어 있다. 물음의 반복에는 해(解)의 불완전성이 함축되어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 물음을 던지게 하는 내적 힘은 그 물음의 반복을 통해 스스로의 동일성을 계속 흐트러뜨리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왜 주체는 스스로에의 물음을 멈추지 않는 것일까?
주체가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하는 선험적 지평transcendental horizon[13]은 시간이다. 끈덕지게 되돌아오는 물음-힘은 시간을 그 가능조건으로 해서 반복된다. 시간은 ‘나’의 물음이 새롭게 되돌아 올 수밖에 없도록 강요한다. 이 강요는 시간이 생성시키는 이런 타자성과 관련된다. 시간의 지평 위에서 주체는 타자들과의 마주침을 통해 생성해 가며, 그로써 자신의 동일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 상실로부터의 회복은 주체의 자기 변형을 요구하며, 이런 요구는 자기에의 물음을 반복케 하는 것이다. 이런 반복을 통해서만 주체는 해체되는 자신을 재구성해 나갈 수 있다. 해체는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타자와의 마주침에 충실할 때 주체는 반드시 해체되어 갈 수밖에 없으며 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체성은 그런 해체 과정과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동일성을 만들어 가는 능력이며, 그래서 늘 차이생성differentiation과 동일성의 교차로/전장(戰場)에서 성립하는 존재이다.
 
[15]주체로서 존재하는 것들은 우선 개체로서 존재해야 한다. 개[16]체성이 없는 곳에 주체성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 [17]이 모든 ‘것들’이 나름대로의 개체성을 담고 있다.
하나의 개체, 즉 어떤 방식으로든 어떤 ‘것’으로 존재하는 것이 자기의식을 가지게 될 때 주체성이 성립한다. ‘자기’의식이란 어떤 가름의 의식을 뜻한다. 즉 나와 나 아닌 것은 다르다는 것,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에는 불연속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할 때 자기의식이 발생한다. ... 원칙적으로 좁은 의미에서의 개체들, 즉 생명체들은 모두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식물들은 0으로 수렴하는 자기의식을 가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일찍이 헤겔이 심오하게 분석해 주었듯이, 타자성otherness 없이는 주체성도 없다. 나를 나‘이다’라고 긍정하는 것은 반드시 내가 아닌 타자를 내가 ‘아닌’ 존재로서 나로부터 구분해야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 ‘아님’을 매개해서 나-‘임’으로 되돌아올 때에만 인간 고유의 자기의식이 가능하다. 이런 가름과 되돌아옴으로부터 자기의식이 탄생한다. 이 자기의식은 그 자기의식의 주체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동시에 불행하게 만든다. 주체는 자기의식을 가짐으로써 고도의 역능을 갖추게 된다는 점에서 행복하며, 타자와의 불연속이라는 근원적인 소외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불행하다. 자기의식을 갖춘 존재는 그 자기의식에 집착하면서도 동시에 그로 인한 불연속을 메우려고 한다는 점에서 모순된 존재 또는 이율배반적인 존재이다.
 
[22]경쟁의식은 질시를 낳게 되고, 질시는 우월감/열등의식은 증오심을 낳게 되고, 증오심은 고통을 낳게 된다. 그래서 자신의 술어들 - 각종 형태의 “출신”, 전공, 직업/분야, 재산, 신체적 특징들, … 등 - 에 집착하는 자아의식(흔히 말하듯이, “자아의식이 강한” 의식)은 불행한 의식이다. 술어적 주체로 구성되는 사회/세상이라는 곳을 살아가는 우리 인간은 누구도 이런 고통을 피해갈 수 없다.
이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우리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이름-자리들의 체계가 존재론적이고 가치론적인 실체가 아니라는 것, 그것들은 실선으로 그려져 있는 듯이 보이지만 자의적인 - 소쉬르적 뉘앙스에서 - 분절선들 이상의 아무-것도-아니라는 것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가능하다. 장자는 이 아무-것도-아님을 ‘만물제동’(萬物濟同)이라 가르쳤다. 이 ‘제동’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일반성-특수성으로 이루어진 삶의 격자가 깨끗하게 지[24]워지고 보편성, 즉 분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질서의 무(無)이지만 또한 어떤 분절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무한한 질서를 담고 있는 허(虛)가 도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이 보편성=‘허’ 위에서 독특한 특이성들을 그려 나갈 수 있게 된다. 이때 우리는 더 이상 위(位)를 가지지 않는 무위인이 된다.
 
[26]물질적인 맥락에서만 추상화해 본다면, 개체들 역시 어떤 면에서는 ‘우리’들이다. 하나의 신체는 숱한 세포들의 집합체이기에 말이다. ‘나’는 이런 숱한 ‘우리’들 - 나 자신인 ‘우리’까지 포함해서 - 이 중층적으로 포개져 이루어지는 드라마(사건)이다.
‘나’는 하나이지만 확장된 나로서의 ‘우리’는 무수히 많다. 나는 한 가족, 한 학교, 한 정치단체, 한 직장 … 에 동시에 속해 무수한 ‘우리’들의 교집합에서 성립한다. 숱한 ‘우리’들로 구성되지만, 또한 역으로 숱한 ‘우리’드로 해체된다. ‘나’와 숱한 ‘우리’들 - 사회 - 사이에는 이율배반적 관계가 성립한다. 개인과 사회의 드라마는 이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연원한다.
 
[31]시간이 주체성의 선험적 지평이는 것이 단지 주체가 시간 속에서 변해 간다는 사실을 뜻하는 것만은 아니다. 나아가 주체가 시간의 지평 위에서 살아간다는 것만을 뜻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은 주체를 역설적으로 조건 짓는다. 수동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측면에서 주체는 규정들의 변화에 의해 변모를 겪어 간다. 시간적 지평 위에서 주체는 변화를 겪는다. ... 그래서 시간이라는 조건은 나의 수동성의 조건인 동시에 능동성의 조건이다.
 
[33]삶의 범주들은 대부분 한 개인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사회적-역사적으로 축적된 거대한 체계이다. ‘인간’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곧 그런 체계 안에 내던져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한 개인은 각 범주에서 하나씩의 술어들을 뽑아 내어 그것들을 통접시킴으로써 ‘자기’를 만들어 가고자 한다. 이것은 술어들의 그물로 되어 있는 거대 그물 속에서 자기의 자리를 잡아 가는 과정이며, 자기의 이름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그 그물이 고착되어 있을수록 ‘자기’의 구성은 상투적일 수밖에 없다. 이때 주체는 그물 속에 갇힌 새처럼 펄럭이면서 그저 좀 나은 이름-자리를 잡으려고 몸부림치게 된다.
이 새장에서 탈주하고자 한다면 술어들의 그물과의 끝없는 투쟁이 필요하다. 그물코를 찢어 그물의 모양 자체를 바꾸어 나가는 각종 실험들을 통해서만 삶의 술어적 그물은 변해 갈 수 있다. 주체는 일정하게 주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끝없이 수선되는 직조물이라 할 수 있다. 한 시점에서 한 주체를 규정하고 있는 이름들(일반명사들), 즉 규정성들의 공간에서 그 주체가 차지하고 있는 이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탈주하면서 스스로를 끝없이 수선하려 한다. 이 점에서 주체는 공간적 구성체일 뿐만 아니라 시간 속에서 계속 변화를 겪는 활동체이기도 하다. 주체는 “나는 ~이다”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는 ~이/가 되고 있다”를 통해[34]서 성립한다. 이 ‘~’이 그물 속에 이미 결정되어 있는 그물코가 아니라 그 자체 생성해 가는 어떤 것일 때, 주체란 ‘~되기’를 통해서 살아가는 것이다. 이 주체는 명사-형용사의 주체이기보다는 동사의 주체, 동사로서의 주체이다.
 
[37]산다는 것은 곧 겪는다는 것이고 겪는다는 것은 시간의 지평 위에서 끝없이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는 것이다. 시시각각으로 변해 가는 지각, 계속 생성해 가는 타인들과의 만남, 부딪쳐 오는 숱한 사건들 … , 이렇게 주체는 살아가는 한 크고작은 차이들을 만나며 그때마다 변해 간다. 스피노자식으로 말해, 주체는 끊임[38]없이 신체적으로 변양되고 동시에 정신적으로 감응한다. 만일 이런 차이생성이 모두 각각의 파편으로 고립된다면,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계속 산산조각 나게 될 것이다. ... 주체는 시간의 지평 위에서 ‘시간의 종합’을 통해서만 주체로서 성립한다.
주체에서의 시간의 종합은 우선 크게는 두 가지 수동적 종합의 틀 속에서 이루어진다. 생명체로서의 주체는 생존이라는 조건/틀 속에서 수동적 종합을 행한다. 생명체의 동일성은 시간과 차생을 겪으면서 와해되지만, 생명체는 이것들을 흡수하는 메타 동일성을 수립함으로써 자신의 역동적 동일성을 보존해 나가야 한다. 차이생성의 거대한 와류 - 이른바 “진화” - 에 휩쓸려 와해되지 않기 위해서는 시간의 종합이 필수이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기억이라면, 기억이야말로 생명의 기초적 본성이라 하겠다. 기억은 차이들의 계열화 속에서 보존되는 자기(=자기 차이성)를 가능하게 한다. 차이생성과 싸워야 하는 생명체의 생존조건이 시간의 수동적 종합을 가져 온다.
... [39]따라서 여기에서의 ‘수동성’이란 소극성이나 무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종합의 주체가 진정 주체일 수 없는 상황을 가리킨다. 그러나 자연과 사회라는 이중의 객체성 위에서 살아가야 하는 주체에게는 이런 수동적 종합 위에서만 능동적 종합도 가능하다.
시간을 종합하는 존재로서의 주체는 자신 안에 자신으로부터의 차이생성을 머금게 된다. 이 차이생성은 자기에게 그 자기와 차이 나는 자기들을 가져오며, 주체는 이 차이들을 시간의 종합을 통해 소화해 냄으로써 주체로서 성숙해 간다. 주체의 이런 성격을 ‘자기차이성’이라고 부를 수 있다.
 
[40]기억은 차생의 종합을 통해 보존되는 자기 - 자기 차이성 -를 가능케 한다. 시간적 지평에서의 차이들은 구체적인 존재함의 기본 조건이다. 세계는 기본적으로 차이들의 생성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억하는 주체는 내적 복수성internal multiplicity을 통해서 성립한다. 내적 복수성은 외적 복수성과 다르다. 공간 속에 외연도적으로 펼쳐져 있는 수적 복수성으로서의 외적 복수성과 대비적으로, 내적 복수성은 시간을 종합하면서 강도적으로 접혀 있는 질적 복수성이다. 기억이란 다름 아닌 내적 복수성이다.
술어들의 집합, 이름-자리가 공간적 주체를 구성한다면, 자[41]기차이성, 내적 복수성, 기억이 시간적 주체를 구성한다. 시간적 주체는 공간적 주체를 해체/재구성하면서 열린 주체를 가능케 한다. 그러나 시간적 주체가 시간을 배반할 때 이런 열림은 닫혀버린다. 자기차이성은 기억을 통해 가능하지만 또한 기억을 통해 닫혀 보리기도 한다. 주체가 기억을 바탕으로 자기차이성을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만, 기억에 갇힌 자기차이성에서 물러나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기억이란 주체에게 이렇게 이율배반적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자기차이성의 긴장이 존재한다.
 
[43]주체는 사건들의 총체 - 열린 총체 -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것이 누군가가 “산다”는 것을 뜻한다.*
*이런 주체는 어떤 집합체의 요소이기를 그친다. 가로지르는 주체는 어떤 면에 속하는 점이 아니라 운동하는 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가 맺는 관계들의 양상도 자신이 속한 면에 입각해 이뤄지는 집합론적 관계 맺음이 아니라 선적인 운동을 통해서 생성해 가는 관계 맺음이다. 한 사람의 주체성은 주어진 무엇이 아니라 이런 운동이 결과적으로 만들어 가는 고유한 어떤 길일 것이다.
 
[44]주체는 빈위들/사건들의 총체가 형성하는 객체성을 가로지르면서 성립하기에, 단적으로 주어지는 주체성 같은 것은 없다. ... 개체 나아가 주체는 (실제 이름을 가지든 가지지 않든) 고유명사로서 존재하지만, 그 고유명사는 거대한 객체성의 한 얼굴로서 성립하는 것이다. 한 개체/주체의 고유함은 객관적 세계의 한 갈래로서만 성립한다. ... [45]이런 이유에서 개인의 ‘단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개인의 단독성도 결국 세계의 한 얼굴이라는 점을 무시하는 것이다. 규정성들, 우주의 법칙성들, 사회-역사적 구조들을 떠난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개인의 단독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여전히 개체를 실체화하는 것이다. 개인의 고유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그의 개체성을 실체화하기보다는 ‘이-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47]삶에서의 필연성을 인식하지 못할 때 자유는 주관적 환상이 되어 버린다. 역으로 자유의 가능근거를 확보하지 못하는 필연성은 인간적 삶을 뒷받침하는 철학이 될 수 없다. ... 근대 이후 꾸준히 이어져 온 한 경향은 인간이 이룩한 인식의 성과에로 인간 자신을 흡수시켜 보려 한 경향이다. ... 그러나 이런 식의 시도들은 여러 가지 문제점, 특히 어리석음을 함축한다.
첫째, 존재와 인식의 순환성의 문제이다. 인간은 인식주체로[48]서 어떤 대상을 규정하지만, 그런 규정 자체가 바로 인식주체의 어떤 조건들의 결과라는 점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그물로 고기를 잡을 때면 바다가 그 그물처럼 생겼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 그물을 더 잘 만들면 더 많은 고기가 잡힐 수 있다. 특정한 그물을 실체화하거나 고착화하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존재와 인식은 끝없이 순환적이며, 인식론적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으면서 그 순환의 고리들을 더 정교화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50]진정한 정체성을 만들어 간다는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지혜의 문제이다. 이는 곧 인식론적-존재론적 우와 윤리학적 우로부터의 탈주이다. 철학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지나 무식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어리석음이란 어떤 사실을 ‘모르는’ 것(무지)이나 말과 행위에서의 난폭함(무식)이 아니라 철학적 요점을 빗맞히는 데에서 유래한다. 무지하지 않기도 또 무식하지 않기도 어렵지만, 어리석지 않기는 특히 어렵다. 철학적 요점을 이해하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빼어난 아니 위대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학자들에게서도 철학적 어리석음은 자주 발견된다. 진정한 주체성/정체성을 만들어 나가는 것은 인식론적-존재론적으로나 윤리학적으로나 어리석음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인간은 자신이 주체성의 한가운데 있다고 생각할 때 종종 선험적 착각에 빠지곤 한다. 왜일까? 자신이 주체성(대상의 정복) [51]한가운데에 있노라고, 드디어 ‘진리’에 도달했노라고 확신할 때, 그는 객체성과 부딪히는 과정, 그 역동적인 과정을 사상해 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53]관계를 떠난 순수 내면적 자기-만듦은 대개 허구적인 만듦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체-화의 선상을 따라 이루어지는 자기-만들기가 아니라 허구적 주체성에 침잠하는 상상적 만듦일 뿐이다. 실재적인 자기-만들기가 중요하다. 그러나 실재적인 자기-만들기는 늘 쉽지 않다. 타인이란 늘 힘겨운 존재이다. 눈길은 이 힘겨움을 드러내는 곳이다.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자기는 시선들의 교차로에 존재한다. ... 사회적 장 안에서의 나는 그런 눈길들의 총체가 결집되는 그 무엇이다. 스스로를 만들어 가는 나는 그런 눈길들로, 술어적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의 공간을 마련하는 나(소요하는 나), 또는 그런 눈길들과 실제 투쟁하고 그것들을 변화시키려 행위하는 나(투쟁하는 나)이다. 전자는 그물코들에 속하지 않는 사각지대에 숨는 나이고, 후자는 그물코들의 구조를 바꾸어 가는 나이다. 그러나 소요에만 빠져 있는 나는 선상에서 성숙해 가는 나가 아니기에 결국 허구적인/상상적인 나에 그치며, 투쟁의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객체회되는 나는 그물코를 바꾼다면서 스스로를 그물코 구조에 흡수해 들어가는 얄궂은 나에 불과하다.
 
[58]문제가 되는 것은 진리와 오류의 실체론적 구분이 아니라, 진리가 오류로 화하고 오류가 진리로 화하는 생성과정(과 그것이 함축하는 주체의 생성과정)이다. 논의했듯이 변이해 가는 이율배반적 구조의 선상에서 생성하는 주체는 곧 인식상의 변이를 겪는 주체이기도 하고 또 진리와 오류가 갈라지기도 하고 뒤바뀌기도 하는 (그 자체 생성하는) 선상에서 살아가는 주체이기도 하다. 특히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것은 진리가 오류로 화하는 과정 즉 ‘역운(逆運)’의 과정이다.
 
[59]인식이란 본래 순수한 것도 고상한 것도 아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생물학적인 것이며 생존경쟁의 한 요소로서 작동한다. 인식하는 자는 주체가 되고 인식의 대상이 되는 자는 객체가 되며, 때문에 인식이란 “먹느냐 먹히느냐”라는 생물학적 현[60]실의 인식론적 버전, 즉 “인식하느냐 인식당하느냐”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다. 원초적인 맥락에서의 인식이란 결국 주체화와 객체화의 투쟁인 것이다.
 
[63]정보를 통한 세계의 객체화와 그렇게 형성된 객체성에 의한 주체의 객체화에 있어 가장 극단적인 경우는, 물론 아직은 상상적인 이야기이지만, 인간이 자신의 생각/마음을 객체화함으로써 다시 정보망의 객체로 전락하는 경우일 것이다.
 
[65]인간은 자신이 만들어낸 의미를 통해서 스스로를 주체화한 것으로 착각하지만 결국 그 의미에 의해 객체화화되곤 한다. 의미는 주체가 대상에게 던지는 빛이지만, 공시에 다시 주체에게 되돌아와 형성되는 그림자이기도 하다. 이렇게 주체-화와 객체-화의 이율배반적 놀이는 인간의 자기이해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이는 다음과 같은 삼단논법적 구조를 가진다. 1)세계는 X이다. 2)인간은 세계의 한 부분이다. 3)고로 인간 역시 X이다.
 
[66]자본주의적-기술적 주체들은 다른 주체들을 객체화해 그들의 프로젝트에 복속시키려 한다. 이런 기도는 특히 TV, 신문, 영상, 인터넷을 비롯한 대중매체와 대중문화를 동원해 이루어진다. 다른 주체들은 이런 객체화에 복속되거나 일정 정도 저항한다.
[*다른 곳에서도 여러 번 말했지만, 나는 ‘대중문화’를 어떤 분야/장르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문화가 만들어지고 전파되고 소비되는 특정한 양태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한다. 실험영화들은 대중문화가 아니지만 『일주일 만에 읽는 칸트』나 「날아라 아인슈타인」등은 대중문화이다.]
 
[76]자신의 힘으로 포섭하지 못했던 객관적 소여가 주체 속에 녹아들어 감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충한다. 이런 존재는 우선 스스로의 개별성을 지향하는 존재이며, 주체성은 개별성을 전제한다. 주체란 개체적이든 집단적이든 일정한 개별성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다. 개별성은 생명체 특히 동물에게서 두드러지게 성립하며, 따라서 주체화란 생명의 어떤 성격 특히 동물성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주체-화가 그 안에 이미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성격을 품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래서 주체-화의 문제는 그 근저에서부터 이미 윤리학적인 문제를 품고 있다.
 
[77]‘sub-jectum’(subject)에는 이런 이중적인 의미(‘아래에 던져진 것’이자 ‘주체’)가 깃들어 있다. 이중체로서의 ‘sub-jectum’이 가지는 이런 동적 구조가 우리가 앞에서 만났던 역동화된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의 구조를 형성한다. 인간세는 이런 이중체들의 드라마(사건, 상황)이다.
이런 이중체들이 엮어가는 드라마는 타자를 내리누르고 솟아오르려는 욕망과 권력의 드라마이다. 이런 근본적인 구조 때문[78]에 모두가 하나 되는 이상향, 영원한 평화, 완전한 사랑 같은 것은 불가능하다.
 
[78]이것은 곧 개체/집단에서의 주체화와 객체화의 균형의 문제이다. 나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만큼 타자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것, 타자를 객체화하는 만큼 나 자신도 자발적으로 객체화되는 것. 이러한 주체화와 객체화 사이에 균형이 무너질 때 타자[79]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다양한 시도들이 등장하게 된다. 서로의 타자성을 인정하는 균형 속에서만 주체화와 객체화를 둘러싼 갈등도 균형을 잡는다.
 
[82]결국 주체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통해서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주체들의 균형은 근거 없이 주어진 거대 주체성을 와해시킴으로써 가능하다. 그러나 사실상 이 세상에 그늘을 만들지 않는 어떤 주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때문에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 못지 않게 스스로가 그늘을 만들지 않으려는 끝없는 노력이 요청된다. 거대한 주체성을 무너뜨리는 것은 투쟁의 삶이고, 그늘을 만들지 않으면서 사는 것은 소요의 삶이다.
 
[86]거대주체의 형성은 바로 그만큼의 그늘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고, 주체화∞객체화에서의 폐색(閉塞)현상을 만들어내게 된다. 이런 폐색으로부터의 탈주는 항상 ‘되기’를 통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A가 B가 된다는 것은 A-임에서 B-임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상상적으로만 가능할 뿐이며, 또한 A와 B의 동일성을 그대로 남기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A와 B의 차이를 건너뛴다는 것은 곧 A와 B의 동일성 자체는 유지된다는 것을 뜻한다. 차이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에 다름 아[87]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핵심은 이 ‘차이의 체계=동일성의 체계’라는 거대한 동일성 그 자체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것은 ‘차이들’differences이 아니라 ‘차이화/차이생성’differentiation의 지속적인 운동, 즉 되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는 곧 모든 개체들, 주체들은 사실상 dA, dB .......일 뿐 A, B가 아니라는 생성존재론적 깨달음에서 시작된다. 이때 모든 관계는 A와 B가 아니라 dA와 dB의 관계가 된다. 그래서 되기란 늘 변별적 동일성들에서의 건너뜀이 아니라 그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생성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런 생성, 즉 공히 생성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미분적인 되기가 곧 타자-되기라 할 수 있다. 이 타자-되기가 모든 윤리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가 아닐까.
[*차이와 차이화/차이생성을 구분하지 않으면 큰 오해에 빠진다. A, B, C의 차이들의 체계는 곧 동일성의 체계이다. 차이들의 체계가 그 자체 A, B, C의 동일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차이들의 체계=동일성의 체계 자체를 생성시키는 것이다. ‘차이의 정치학’과 ‘되기의 정치학’을 동일시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이다. 되기의 정치학이 무너뜨리려는 것이 바로 차이의 정치학이기 때문이다.]
 
[91]수많은 주체들 - 개인적 주체들과 집단적 주체들을 포괄하는 극히 다양한 주체들 - 은 각각 하나의 계열을 형성한다. 그리고 이 계열들 사이에 다양한 방식의 이어짐, 끊어짐, 갈라짐, 합쳐짐, 엇갈림 ... 이 성립한다. ... 수많은 ‘우리’들이 갈라진다. 매일 수많은 부부들이 갈라서고, 회사들이 분열되고, 정당들이 따로 살림을 차린다. 하나의 주체가 둘 이상의 주체로 갈라선다. 갈라짐은 하위 주체성들의 [92]형성으로 귀착한다. 이럴 경우 ‘우리’의 술어들은 두 ‘우리’의 술어들로 변환되며, 그로써 술어들의 다른 계열들이 형성된다. 어떤 술어들은 보존되고 어떤 술어들은 파기되며, 어떤 술어들은 변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새로운 주체성들이 형성된다.
 
[93]전체-주체성 안에 그 주체성의 빛을 받지 못하는 그늘이 있을 때, 그렇게 객체화된 그늘은 주체성을 획득하려 하고 그때 전체-주체성에 금이 간다. 그래서 그 금은 정확히 주체화∞객체화의 선상에서 발생한다.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는 경우는 전체-주체성이 그 부분들을 억압할 때이다. ... 갈라짐이 도덕적 당위를 획득하지 못하는 경우는 정당한 전체를 부분들의 이기적인 욕망에 입각해 와해시키려는 경우다.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하게 획득한 권력을 쿠데타로 전복시키려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 갈라짐은 독특한 ‘이-것’들의 창조가 이[94]루어질 때 진정 의미를 가지게 된다.
 
[96]한 주체가 타자를 정복하고자 할 때 그 타자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요청된다. 그러나 두 주체가 대치할 때 각자는 서로에 대한 허상을 요청한다. 그 허상이 각 주체의 존립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다. 각 주체는 타자에 대한 허상을 통해서 내부 결속력(그러나 사실은 지배층의 동일성)을 다져 왔으며, 더 나아가 그러한 허상들의 창출에 암묵적으로 공조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박정희와 김일성은 거울 이미지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가 붕괴될 때 허상들 역시 무너질 것이고, 그러한 와해는 그 주체의 중심(지배층의 동일성) 역시 무너뜨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대치의 와해는 각 주체 내의 핵심 주체가 아니라 그 핵심 주체에게 압력을 가해 온 역사의 힘(타자들의 힘) 자체였다고 해야 한다.
 
[97]냉소주의는 모든 섬세한 차이들을 비웃음의 동일성으로 환원시킬 뿐이다.
 
[98]통일을 통해 계급적 모순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통일은 과거의 핵심주체들을 와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화시켜 줄 것이다. 즉 민족은 통일될지 몰라도 지배 구조는 와해되기는커녕 강화될 것이다.
이렇게 새로운 그늘이 메워질 때 또 하나의 그늘이 생겨나는 것은 그러한 과정이 진정한 되기가 아니라 거대 주체에 의해 이[99]루어질 때이다. 이 경우 진정한 이-것이 생성하기보다는 구조적인 재조정만이 이루어질 뿐이기에 말이다.
...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다양한 저항주체들의 개입이 요청된다. 더 정확히 말해 저항주체들의 상승변증법=상생이 요청된다. 저항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은 끝없이 차생하는 힘이지만 또한 그 안에 새로운 형상들을 창조해 낼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래서 생명은 연속적이면서도 (절대 불연속은 죽음의 세계이다) 거기에는 다양한 형태의 개별화를 가능케 하는 힘 또한 내장되어 있다. 삶의 모든 드라마는 생명의 이런 힘에서 출발한다. ‘우리-되기’ 역시 이런 생명의 힘의 한 발현이다.
 
[100]사회의 집합론적 구조, 존재론적으론 생명의 배반인 죽음을 또 가치론적으론 불평등을 함축하는 이런 구조를 ‘위’(位)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무위인이란 이런 위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학적 행위이기도 하다. 무위인으로 산다는 건 단지 위를 거부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위를 겁부하고 허공에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여기에서 무(無)는 위의 없음이 아니라 오히려 위의 잠재성이며, 숱한 위의 형태들이 점선들로 존재하는 허(虛)이다. 무위인이란 이 허의 차원으로 내려가 삶의 또 다른 방식들을 사유하고 현실로 다시 올라와 새로운 이-것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그때에만 무위인은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재적인 것이며, ‘우리-되기’에 창조적으로 공헌할 수 있다.
 
[101]인간은 단순한 개체로서 존재하지 않으며 나아가 생명체로서만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인간이란 주체로서 존재한다. 인간은 개체이자 생명체이자 주체이지만, 전자의 두 층위가 필수적인 것이라면 마지막 층위만이 고유하고 충분한 것이다.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를 돌아다보면서 사유할 때 주체의 문제는 피해갈 수 없으며, 어떤 논의를 하든 사유의 핵심에 놓여 있는 문제라 하겠다.
개체 특히 생명체로서의 인간으로부터 주체로서의 인간으로 간단하게 넘어가는 것만큼 경계해야 할 것도 없다. 뇌과학이나 사회생물학을 비롯해서 우리 시대에 나타나고 있는 천박한 경향, 즉 다양한 학문을 존재론적 차원에서 진정으로 종합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과과학의 성과를 조악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야말로 인간-주체의 이해에서 무엇보다 우선 극복해야 할 태도이다. 주체의 이해는 무엇보다 그를 고유한 주체로 만들어 주[102]는 어떤 기호, 의미, 상징계, 사회, 문화 - 무엇이라 하든 - 문턱을 넘어서 논의되어야 하며, 이 문턱을 충분히 고려하면서 논의되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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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 용서는 없다

  • 등록일
    2009/12/31 18:57
  • 수정일
    2009/12/31 18:57

누구도 기뻐하지 않았다. 용산 참사 타협 소식이 나오는 티비를 망연자실 바라보며 “아, 이렇게 끝나는 구나” 했다. 아니 몇몇이 기뻐했을 것이다. 정운찬 총리, 오세훈 시장, 이명박 대통령, 아마도 김석기 전 경찰청장. 그들은 용산 참사 ‘타협’을 ‘해결’이라고 했다. 많은 노력을 했으며, 서로가 공을 세웠노라고 추어주기 바빴다. 하긴 총리는 그러라고 기용했고, 시장은 대권을 잡고 싶은 것이며, 대통령은 삽질을 계속해야 하니까. 그러나 무엇이 해결되었는가? 보상을 해 줄 것이라고? 살인을 했는데? 유감이라고? 사람을 생짜로 태워 죽여 놓고? 이제 장례를 치러도 좋다고? 죽인 것도 모자라 그나마 산목숨을 드잡이하고, 겁박하고, 기어이 감옥엘 보내 놓고? 한 마디만 하자. 지랄이다. 아주 생지랄이다.

 

그러니 누구도 기뻐할 수 없는 것이다. 신부님이 유족들을 껴안고 그저 서러워 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자회견 내내 영정을 바라보고 끌어안고, 또 쓸어 보며, 이젠 말라 비틀어져 나올 것 같지 않던 눈물이 쏟아졌던 것이다.

 

그동안 남일당 건물은 해방구가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고 또 나갔다. 이렇게 용산은 시퍼런 새벽, 한 국가의 수도 한 가운데에서 권력이 저지른 살인행각을 만천하에 증명하는 장소가 되어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순이다. 빈소이면서 또 해방구라니.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다. 여기 이 땅에서는 죽음으로써만 비로소 해방된다는 그 섬뜩한 현실 말이다. 또한 그것은 상처와 같았다. 자본이 생살을 뜯어 먹고 간 자리. 그리고 그 자리는 고스란히 그곳을 지나가는 시민들의 가슴에 새겨졌다. 외면하든 또는 슬퍼하든, 그 장소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지 않고는 살 수 없었던 것이다. 죽고 나서야 해방이 허용되는, 그래서 늘 슬픔 속에서 쓰린 가슴을 한 뭉치씩 부여안고서야 비로소 저들 권력의 부라퀴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도 시민들은 인정해야만 했다. 용산을 잊은 시민들은 그들처럼 자신들이 죽어갈 수 있다는 그 엄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던 것이다.

 

신부님들과 유족들 그리고 용산의 동지들은 죽을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했다. 용산은 고립되었고, 엄동설한이 온 것이다. ‘타협’할 수밖에 없었던 그 대부분의 책임은 방관자들에게 있다. 끝까지 그들과 함께 하지 못했던 우리들, 운동 주체들, 지식인들이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왜 그들이 울어야 하나? 우리가 가슴을 쥐어뜯으며 울어야 하지 않나? 그들의 울음을 보면서 ‘그나마 이것이 절반의 승리다’라고 입바른 소리나 해야 하는가? 그래서? 수고했다고? 살인자들이 희희낙락하고 있는데? 장례라도 치룰 수 있어 잘 되었다고? 아들이 제 아비를 죽인 누명을 뒤집어쓰고 감옥에 있는데? 웃기는 소리다. 지금 똑같이 지랄하잔 건가?

 

이제 남일당이 헐리고 그 선명하던 모순이 우리 눈앞에서 사라질 것이다. 망각이 찾아올 것이고, 희번덕거리는 건물이 들어서고, 돈 없는 민중들은 쫓기듯이 도시 외곽으로 밀려날 것이다. 그리고 또 어딘가에서 철거가 시작되고, 거래를 하고, 사람이 죽을 것이다.

 

살인자들. 우리는 알고 있다. 용서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너희가 똑같이 죽을 때까지, 우리 자신도 남일당을 방치한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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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설명한다는 것

  • 등록일
    2009/12/26 16:49
  • 수정일
    2009/12/26 16:49

한 가지 신기한 것은 내게는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개인이력이 타인들에게는 낯설게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금은 서양철학, 그 중에서도 프랑스 철학을 전공으로( 이 말은 아마 '벌어먹고'라는 말과 같을 것이다) 하고 있지만, 내 학부 전공은 불교학, 그 중에서도 원시불교 쪽이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은 꽤나 신기하게 생각한다.

 

여기다가 고등학교를 검정고시로 조기졸업 했다는 사실까지 보태면 웬만한 사람들은 모두 엄청 혼란스러워한다. 게다가 대학은 또 1년 늦게 간 거다. 하긴 이게 뭐 상식적으로 아귀가 맞아 떨어지는 경로는 분명 아닐 것이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정리되는 내 이력은 그래서 대충,  "검정고시->1년 잠적->대학입학(불교학)->대학원석박사(프랑스철학)", 이렇게 된다. 아 하나 더 빠졌다. 대학 10년 수학. 입학년도와 졸업년도를 계산해 보면 딱 10년동안 대학이라는 곳에 있었던 게 된다. 이런 제길!

 

요즘에는 나이도 들고 이런 걸 꼬치꼬치 캐 묻는 '면접관'을 만날 일도 없고 해서 괜찮지만, 예전에는 이런 이상이력의 구멍들을 설명하기 위해 꽤나 심난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란 '상식'에 대한 무의식적인 종속심리가 있어서 거기에서 벗어나는 것은 죄다 '어둠의 세계'에 속한 것으로 보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검정고시'로 조기졸업했다는 것까지는 그나마 괜찮지만, 대학 입학 전 1년을 뭐했는지(혹시 조폭의 세계? 혹은 어떤 종류의 음침한 오타쿠의 세계?), 또는 어째서 대학을 10년씩이나 다녔는지(학생운동 수배? 아니면 불우한 가정형편?)에 대해 설명하다 보면 갑자기 좌중이 숙연해지곤 했던 거다. 설명 안 하면 나란 물질이 온갖 의혹에 휩싸이게 되고, 설명하자니 도통 재미없고(왜냐면 사람들이 바라던 그런 '활극'은 없으니까)  그런 것이었다. 

 

또 사실대로 설명을 해도 반신반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교보다 시립도서관 인문과학실과 문학자료실에서 살았다는 둥, 원효의 [대승기신론소]를 읽고서 고승은 아니라도, 땡중이라도 되려 했다는 둥 ... 이런 식으로 말하면, 사람들은 당췌 '감'이 안 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런 인생이 그들에게는 없었으니까.

 

결국에는 자기들 편한 대로 나를 야쿠자 세계에 접수시키거나(실제로 난 이런 분을 봤다. 그전에 실컷 위와 같은 설명을 해 드렸는데도 말이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공부하는 학자로 보거나(대체로 이렇게 본다. 하긴 집이 좀 가난하긴 했다. 서울 상경때 딱 5만원이 내 주머니에 있었으니까),  아니면 고맙게도 독학으로 상당한 경지에 이른 철학자로 보거나, 그래 주신다. 이 모든 소위 '파악'들이 공교롭게도 '내'가 아니다. 편하신대로들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나로서는 난감하고 말이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나'를 설명해야될 상황이 되면 그냥 귀찮다. 그렇다고 맘대로들 상상하시게 놔두자니 짜증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괜히 애먼 사람들한테 화도 내게 되고 말이다. 

 

난 내 이런 상황이 개인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또 한국사회의 사회적 의식의 '보수성'을 가늠할 만한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타자에 대한 시선이 관습화되어 있고, 일생의 타임라인이 대체로 유사하고 고만고만한 삶만이 인지되는 사회에 우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곳에서는 메인스트림이라는 것이 너무나 확고해서 거기 속하지 못한 모든 것들이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주변화되거나 소수화되는 이력이나 삶이 매우 자주 사회적 폭력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이들은 이미 사회적 '인정투쟁'의 장에서 애초부터 애매모호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에 메인스트림과 그에 가까운 당사자들에게는 매우 거슬리는 이물감을 안겨다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서와 같이 이럴 경우 사람들은 스스로의 방어기제라는 것을 동원해서 이 이물감을 애써 없애 버리려고 하거나(기억의 왜곡), 제거하려고(차별화와 억압)한다. 왜냐하면 이것을 인정하기보다 이렇게 하는 것이 훨씬 손쉽기 때문이다. 말보다 주먹이 더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어찌 보면 나란 물질이 어째서 평소에는 사람좋게 보이다가 문득문득 성격이 더러워지는지 그 원인을 알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여간 이 자본주의하고도 천박한 한국 사회에 살자니 편협한 시선들이 귀찮다 못해 멍청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 멍청한 시선으로 나를 훓어 보는 걸 견디지 못해서 쌍욕이 나오는 게다. 세상의 모든 마이너에게 느끼는 연민도 여기서 나오는 것일 게고 말이다.

 

하여간 메인스트림에서 비껴서 있는 마이너의 스탠스가 더 익숙해질 때가 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짜증이 밀려오지 않고도 슬슬 웃어가며 능구렁이처럼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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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침묵, Epiphany의 함성

  • 등록일
    2009/12/21 02:21
  • 수정일
    2009/12/21 02:21

 

 

위대한 침묵, Epiphany의 함성

- 《위대한 침묵》, 필립 그로닝, 2009

 

오프닝은 눈보라와 불빛이다. 그리고 침묵이 이어진다. 외삽 되는 검은 화면에 말씀(logos)들이 새겨진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침묵으로부터 온다.” 장면 전환. 카메라가 수도원 건물들을 잡아낸다. 견고한 저 건물들. 문득 화면이 블로우 업으로 돌아간다. 작게 울리다가 이내 높아지는 수도원의 종소리. 그리고 옷자락 스치는 소리, 수사들의 오래된 방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리고 다시 침묵. 말씀들. “가진 것을 모두 버리지 않은 자는 나의 제자가 될 수 없다.”

 

2시간 42분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 긴 러닝타임 동안, 눈이 먼 늙은 수사의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약 5분여의 대사와 산책과 눈썰매 타는 동안의 수사들의 몇 마디 말, 그리고 미사를 하는 동안의 기도 소리 외에 어떤 ‘인간의 소리’도 이 영화에는 없다. 잠깐 잠깐씩 화면을 블로우 업 시키는 것 외에 별다른 편집 기술도 동원되지 않는다. 대신 무엇이 있는가? 감독은 분명 이렇게 묻고 있다. ‘당신들, 무슨 소리를 듣는가?’

 

인간의 목소리 대신 여기에는 무심한 수도원 건물들이 있고, 알프스 협곡을 통해 불어오는 세찬 눈보라가 있으며, 긴 주랑과 그곳을 들락거리는 짐승들이 있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카메라의 표면성이 잡아 내지 못하는 어떤 것, 이것(aliquid)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영화를 보는 내내 보고, 듣고,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름 붙이자마자 존재 저편으로 사라진다.

 

그 신성하고 언설 불가능한 것이 이 영화의 모든 부분, 심지어 가장 하찮아 보이는 오브제들 속에서 들끓고 있다. 그것을 느끼지 못하면 곤란하다. 감독이 원하는 건 그런 것이니까. 이를테면 이 질릴 정도의 롱 테이크 속에서 삶에 속하지만 삶과는 다른 어떤 것, 인간의 신체를 하고 있지만 신의 말씀인 어떤 것이 편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들끓는 것을 보거나, 느끼기 위해서 모든 인간의 음성을 거두어야 한다. 그 음성이 사라진 자리에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은 일상적인 지각체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미세지각들이다.

 

저 멈춰진 화면 속의 건물들, 회백색의 계단들, 그리고 무릎 꿇고 기도하는 수사들의 내부로부터 표면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흔들리는 원자들의 클리나멘을 느끼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이 2시간 42분의 명상이 제대로 된 경지에 이를 것이다.

 

영화 후반부. “여기 내가 있다”라고 말씀은 전한다. 그리고 수사들의 모습들이 하나하나씩 비춰진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구체적으로 말을, 아니 더 선명해진 침묵을 건넨다. 말씀이 저들 수사들 하나하나 속에 있다고 한다. 그리고 늙은 수사의 벗은 몸을 차분히 쓸어내리는 화면. 그러니까 ‘나’는 늙어 쪼그라든 신체 안에 있다는 것이다. 또 비춘다. 수도원의 오래된 노동자들. 또한 그들에게 말씀은 “내가 있다”고 한다. 침묵은 선명해진다. 점점 더 선명해져서, 빛이 되기도 하고, 쟁여진 장작들 사이 검은 틈으로 스며들기도 하며, 젊은 수사의 미소 안에 머물다 가기도 한다.

 

침묵이 선명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영화가 필름의 표면 아래에 숨겨 왔던 어떤 것이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는 뜻이다. 작가의 관점에서 그러한 폭발은 주로 수사들과 노동자들을 거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숨겨져 있던 그것을 수사들과 노동자들, 심지어 감독이 끄집어내는 것이 아니다. 숨겨진 그것이 이들을 매개로 스스로 터져 나오는 것이다. 존재는 오직 생성하는 것이므로, 제 차례에서야 모습을 드러낸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은 운 좋게도 발을 담근 자에게 그 차가운 느낌을 ‘단 한 번’ 전해줄 뿐이다.

 

그러니 우리는 미사를 집전하고 성서 주해서를 낭독하는 거룩한 천상의 장면(초반부)에서부터 수사들의 면면과 노동자들의 투박한 모습이 미디엄 숏으로 흘러가는 지상의 장면(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존재의 에피파니를 따라 명상해 온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말씀이 ‘여기 있다’고 한 것은 분명 지상에 이르러서이지만 결국 그는 언제나 거기 있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강이 그런 것처럼, 침묵의 강도 발을 담그든 말든 언제나 흐를 뿐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에피파니의 함성을 들을 수 있는 자는 운이 좋은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어린 양들은 운이 나쁜 나머지, 명상의 경지가 아니라 잠의 밑바닥에서 두 시간 동안 편히 쉴 수도 있을 터.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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