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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 등록일
    2010/11/01 20:36
  • 수정일
    2010/11/01 20:36

글쎄, 사람이 살면서 많은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 중에 누군가에게 원한을 가진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이 감정은 웬간해서는 잘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 문득 그와 관련된 어떤 상황을 접할 때 또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런 감정이 생긴다. 순간순간 그것을 억누르는 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도 묻는다.

철학은 어쨌든 지혜에 대한 사랑이고 나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적이 많다. 지혜로워지자. 원한은 지혜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진 감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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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2

  • 등록일
    2010/10/22 12:46
  • 수정일
    2010/10/22 12:46

신접살림들이 들어왔다. 티비, 침대, 장롱, 거실장, 화장거울, 세탁기 그리고 자잘한 살림살이들. 애써주신 어머님께 너무 감사하다. 들여주시기만 해도 그런데 직접 오셔서 집안 구석 묶은 때도 벗겨 주셨다. 구구도 왔다. 제 냄새가 없는 집이라 무척 낯설고 겁내 하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을 것이다. 냉장고 뒤며, 장롱 위로 자꾸만 숨어든다. 그녀는 신중하게 살림살이들이 들어갈 곳을 가늠하는 것 같았다. 피곤한 하루, 이틀이 지났고, 이제 점점 더 우리 둘의 삶이 시작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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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7

  • 등록일
    2010/10/17 16:42
  • 수정일
    2010/10/17 16:42

수시 1 논술 일정이 거의 마감되었다. 남은 학교는 항공대, 명지대, 덕성여대 정도다. 난 항공대 아이들을 맡았고, 다른 선생님들도 한 학교씩 맡을 것이다. 어수선하던 분위기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다. 다행이다.

 

오랜만에 쉬는 날. 아침 나절은 집에서 청소며 빨래를 했다. 묶은 먼지들이 청소기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옥상에 널어 놓은 빨래도 숨의 쉬기 시작했다. 늘 이런 여유가 있다면 좋을 것이지만 그건 최근의 내 일상으로 봐서는 아마 사치에 가까우리라. 아직 많은 일들이 남아 있고, 난 숨을 고르기 위해 자주 시내 팔달사로 간다. 거기 오롯이 앉아 마음을 비우면 그래도 한결 가벼워 진다. 언젠가 깊은 숲 사찰 안에 가지런히 놓인 장작들처럼 나도 고요해질 수 있을 것인가.

 

막내 아제  연락이 왔다. 집안에서 내가 공부하는 것을 거의 유일하게 인정했던 분이다. 도움을 주기를 원하시는 것 같았다. 하긴 늘 지켜보던 조카가 결혼을 한다고 하니 마음이 못내 애닲았을 것이다. 거절하면 더 실례인 것 같아 받아 들였다.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다. 그 은혜들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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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3

  • 등록일
    2010/10/03 13:22
  • 수정일
    2010/10/03 13:22

오늘 숭실대 논술 시험이 치뤄진다. 아이들이 자신감을 가지고 글을 썼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에게는 그 모든 글들이 벅찰 것이다. 이해되지 않는 단어, 파악하기 힘든 논지, 헤아리기 힘든 출제자의 의도라니. 그래도 근 한 달여를 나와 달려 왔다. 짠하다. 입시논술에 대한 모든 비난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난 이 아이들의 슬픈 눈들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깨알 같이 쓴 원고지를 가지고 와서 내 옆에 앉아 있던 녀석들, 빨간 펜이 그어질 때마다 흠칫거리며 눈에 맺히던 눈물. 다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 밖에 뭐가 있겠는가? 그들이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그 모든 허물들은 온전히 내 탓이다. 제발 이 아이들이 자존감을 잃거나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비관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말기를 간절히 빈다.

 

어제, 한철연 일로 선생님들을 뵈었다. 2년 간의 자중이라. 난 받아 들였고, 그것이 S 선생과 한철연 전체를 위한 길이라 생각했다. 어쨌든 조직적 판단 하에 내가 감당해야할  짐이라면 지고 가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조직에 대한 애정이 바래지 않도록 내가 나를 딛고 일어서야 한다.

 

그래서 어제와 오늘은 슬픈 표정들이 마음 속에 늘었다. 아이들과 나 자신의 얼굴. 그건 하나로 겹쳐지면서 희뿌윰하게 멀어져 간다. 다 끝난 일들과 앞으로 올 결과에 대해 침묵하면서 길 끝에 있을 집을 그려 보면서 말이다. 그 길 끝에 집이 없다면, 또 다른 길을 가면 된다. 집 없는 길 위에서 침묵하며 걷는 것, 그것이 희망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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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4

  • 등록일
    2010/09/24 11:22
  • 수정일
    2010/09/24 11:22

추석 사흘 동안 바빴다. 학원 강의, 그리고 대구, 광주, 다시 학원 강의. 그녀가 대구 집에 들러 어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다행히 어머니는 매우 반가워하시고, 그녀를 이뻐라 하셨다. 좀 정신 없는 소리를 또 하신 것 같긴 하지만 그동안 그녀도 많이 들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다만 집안 구석구석 낡은 가구들이며, 오래된 티비와 냉장고 때문에 좀 서글펐던 것 같다.

 

이제 다시 생활과 공부로 돌아 간다. 약간의 계획 수정. 밤마다 하던 발췌 작업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자기 전에 반드시 어느 정도 하고 자야 한다. 방송대 강의와 그녀 세미나를 도울 일도 남았다. 논문과 번역 일도 쉼 없이 진행될 것이다. 늦추기 말고, 하지만 느리게 가야 한다.

 

몇 일간의 폭우 뒤에 완연한 가을이다. 서른 아홉의 가을이 오고 있다. 삼십대의 마지막 가을인 것이다.더 나아가야 한다. 생각해야 할 것들과 써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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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16

  • 등록일
    2010/09/16 12:32
  • 수정일
    2010/09/16 12:32

사흘을 정신 없이 보냈다. 방송대 강의, 학원 강의, 교재 준비. 그래도 근 한 달여 만에 그녀의 책을 정리했다는 것이 뿌듯하다. 그녀의 손때가 묻은 것들을 오랫동안 방치해 두었으니 벌을 받아야 할 것 같다는 느낌도 든다. 기초 서적은 제일 아래 칸에, 서양 문학과 전집은 둘째 칸과 셋째 칸에, 비평서는 셋째 칸 왼쪽에, 시집은 둘째칸 왼쪽과 내 책꽂이 여기 저기에, 그리고 이론서는 제일 윗칸에. 그렇게 정리하고 나니 그 책들이 우리 그간의 추억들을 빤히 비춘다. 저 책들, 그리고 함께 놓인 내 책들. 그 많은 고통과 기쁨들. 그 우여곡절 속에서도 저 책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다. 때로는 눈물 흘리던 밤 머리맡에, 때로는 같이 걷던 종로 거리 커피숍 테이블 위에, 또 서로를 위무하던 신대방동 그 방 창가에, 서로 책 하나를 두고 토론하고 낄낄거리던 그 많은 날들의 편린 속에, 저들은 칸칸이 우리를 바라 보고 있었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저것들. 난 그만 울음이 나올 것 같았다.

 

천방지축으로 튀어 다니던 그 시절에도 저것들은 우리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었다. 하지만 저 책들이 없는 우리 삶을 생각할 수 있을까? 언제난 저들은 지척에 있었고, 우린 고마운 줄도 모르고 지나치곤 했다. 하긴 앞으로도 오랫동안 책들은 우리를 그렇게 응시하며 우리와 함께 살아갈 것이다.

 

문자들과 함께 산다는 것은 일종의 반복되는 제의를 즐긴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문자들은 산 자들, 또는 한 때 빛났던 그들의 흔적들을 한 번 더 기념하는 일일테니 말이다. 조금의 경외심도 없다면 이 문자들을 첫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그토록 지독하게 음미할 리가 만무하다. 문자를 대한다는 것은 하나의 세계를 대한다기 보다, 이런 저런 삶을 내가 다시 산다는 것이기도 하다. 죽은 것처럼 보이는 문자들이 내게로, 우리에게로 와서 우리 삶의 칸칸이 빛을 주었듯이 말이다. 책이란, 문자란 그렇게 검은 날개의 천사처럼 언제나 우리 주위를 배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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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 등록일
    2010/09/09 17:06
  • 수정일
    2010/09/09 17:06

구름이 검게 내려 앉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구름 뭉치들이 발에 툭, 툭, 차였다. 마흔이 다 되어 가도록 길바닥에 이렇게 많은 구름들이 있는 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가 내렸는데, 이제는 길바닥으로 물이 흐른다.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저 성기들. 두둥실, 떠 올랐다가 내 면전에서 팡팡 터진다. 저렇게 죽어 가는 것들이 도처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렇게 죽어 가는 검은 구름 떼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족속이다. 나는 그 족속들 틈에서 귀도 막지 않고, 눈자위 근육을 파르르 떨면서 응시한다.  모두들 산책에 나선 것일까. 가방안에서 또 다른 구름뭉치들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그들'은 어째서 자꾸만 세계가 아닌 방향으로만 흐르고, 탈주하는 것일까.

 

깃발, 그 밑을 수평으로 놓인 노점들. 그 중 무엇이라도 쓸모 있다면 내버려 두어라.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저기 펼쳐진 구름의 잔여물들이 흔들린다. 티비 화면의 노이즈처럼, 이제 저들은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평평한 지구, 평평한 관계, 평평한 사랑, 평평한 두려움과 평평한 불안, 평평한 섹스와 교육과 학문과 시와 열정들. 너무 무거운 가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납작해 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그날까지 '그들'은 납작해지고, 또 납작해져서 거의 종잇장처럼 될 것이다. 창백하게 떨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서 말이다. 떨면서 견뎌 나가는 '그들'. 나는 납작해지지 않으려고 지금껏 살아 온 것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 보르헤스의 퓨네스처럼 너무 많은 기억을 갖고 사는 것도 멍청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것은 백치와 같다. 혹시 망각은 치유제가 아니라 서서히 미쳐가게 하는 어떤 전진성 질환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약도 소용 없는 그런 것 말이다. 때로 기억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도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미치기 전에 죽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저렇듯 노인은 전 생애의 기억을 둥근 등 안에 숨기고 걸어 가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저 여자는 더 이상 기억 하기 싫은 그 남자를 밟고 죽음을 향해 걸어 가는 것이다.

 

커피로 샤워를 한다면, 하루 종일 몸에서 나는 커피향을 맡으며 관에 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날 깨어나도 그 향기가 남아 있기를 바라며 잠옷에 붙은 솔기를 떼어 내면서 고요하게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구름들 때문에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마구 달려 오는 '그들' 때문에 세계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닌 줄로만 알았습니다. 혹시 그런가요? 이 세계는 '그들'의 것인가요? 제게 이 의심을 없애 주시고 내일은 구름들이 조금만 제 발에 채일 수 있도록 제 발을 개미 더듬이처럼 만들어 주십시오. 아니 아니 거대한 더듬이로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님, 사지와 머리는 필요 없나이다. 오로지 제 존재 전체가 하나의 더듬이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번개가 칠때마다 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더듬이의 신경들이 온전히 반응하며 찌르륵 찌륵 탱탱해 지도록. 내가 당신 안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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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7

  • 등록일
    2010/09/07 14:18
  • 수정일
    2010/09/07 14:19

오랜만에 좋은 날씨다. 장안문 근처에서 뒷바퀴에 펑크가 났다. 자전거를 끌며 걸어서 지동시장 근처 자전거점까지 왔다. 수원천이 옆으로 흐르고, 사람들은 어쩐지 나른해 보였다. 드문드문 나무 밑 벤취에 앉아 쉬는 사람들, 천변에 늘어선 점포들, 아직 따가운 햇살이 그 모든 생들에 비추고 있었다. 어쩌면 걸으며 휴식을 취하는 이 오후 한 나절이 내겐 가장 소중할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얼마나 되뇌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늘 마음이 앞서곤 했다. 이제 그럴 필요가 있을까? 하긴 생이 저렇듯 나른하게 졸고 있는 노인의 어깨에 햇살처럼 기대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날은 궂고 비가 오고 천둥이 칠 것이다. 그 누구든 이 반복되는 휴식과 분주함을 벗어나진 못한다. 하지만 이것은 비극적일 뿐, 죽음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

 

 번역물을 접는다. ... 커피숍 통유리 밖으로 또 많은 차들이, 사람들이 지나간다. 나는 산책자가 되고 싶다. 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명징한 의식을 가지고, 욕망을 적요한 심층에 달래고, 세상의 모든 우발성을 인정하면서, 그렇게 도시를 커다란 하나의 원형감옥처럼 바라보고 싶다. 저기 감시탑에는 사실상 아무도 없다. 실재와 환영을 만들어 내는 것은 오히려 이 원형감옥의 구조 자체. '환영의 한계', 짐 자무시는 [리미트 오브 컨트롤]을 만들면서 자신의 영화를 그렇게 규정했다.  실재 자체가 영화의 환영이라면 내가 걷고 보고 느끼는 이 모든 것은 실재일 것이고, 동시에 영화며, 또 동시에 환영이다. 그러나 현실은? 난 그것을 보고 싶다.

 

영화적인 여섯번째 감각? 또는 아뢰야식? 또는 신적 직관(스피노자)? 이것들이 현실을 보게 하는 것일까? 여전히 어떤 것도 명징하지 않다. 도대체 난 명징한 '무엇'을 보고 싶은 것일까? 오히려 난 그 '무엇'을 창조해 내는 편이 낫지 않을까? 현실이라니!  이 속도를 가늠하는 것은 과연 의미있는 짓일까? 나는 혹시 이 덧없는 것들 중에 가장 덧없는 어떤 것을 '현실'이라 명명하고 불가능한 탐색을 하는 것은 아닌가?

 

Sapere Aude! 하지만 아직 미명이다. 왜냐하면 아직 '덧없음'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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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30

  • 등록일
    2010/08/30 12:34
  • 수정일
    2010/08/30 12:35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최악의 사태는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현재로서는 선생님들도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나는 그것을 이해한다. 그리고 일이 발생하게 된 정치적 맥락과 그 당사자들의 마음도 알 수 있다. 심정들의 착종. 감정들과 판단들. 그 모든 비물질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동선들 가운데 '나'는 하나의 매듭으로 존재한다. 이 매듭을 풀고 조직의 평면이 매끄러워진다면, 나는 무언가의 아래(sub) 나 자신을 던질(ject)수 있다. 조직 보위적 사고? 그렇다. 그러나 이것은 동시에 모두가 사는 길일 것이다.

 

만약 합리적 동선만이 있다면 그 조직은 죽은 것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아래에서 들끓는 지옥의 움직임이 존재해야 한다. 위험한 좁은 길과 증오의 불길이 일렁이는 그 무의식의 벼랑 앞에 서면 아찔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나는 거기서 마땅히 저 아래를, 그 심층을 주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야 한다.  그리고 오랜 기다림이 찾아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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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7

  • 등록일
    2010/08/27 13:48
  • 수정일
    2010/08/27 13:48

당대에 가장 흔하게 작동하는 심리 현상은 '원한'(ressentiment)과 원망(Wunsch)이 아닐까?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 원망, 가장 강한 그 무의식은 사실상 결코 그 대상(objet)을 쟁취할 수 없는 운명에 놓여 있다. 대상과의 동일시의 본질은, 그래서 '비동일시'가 된다. 문제는 이 비동일시의 운명 안에서 인간은 지속적으로 그것의 충족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기보다, 인간은 허무를 의지하기 때문이다(니체).  그렇다면 이제 문제는 이러한 원망충족의 지향을 방해하는 것들이다. 이때 무의식의 카덱시스는 자신이 위장하고 있는 그 원망충족이라는 희망에 반해 '진실'을 알려주는 모든 대상들에게 적의를 품는다. '너는 끝내 좌절할 것이고, 남는 것은 허무밖에 없다'는 그 진실 말이다.

 

이 진실은 곧 생의 덧없음을 표현하는 것임에도, 원한에 휩싸인 자는 이 덧없음을 인정하기보다 거기에 화려한 미래라는 위장물을 덧씌운다. 그것이 바로 허무를 의지함으로써 원망충족의 좌절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 끈질김, 이 무서운 집착. 이것들은 자신의 나르시스적 원망을 향하면서 끝없는 사랑을 고백하지만, 그것을 방해하는 것에 대해서는 목숨을 건 투쟁을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당대적 현실이라면, 지금 인간들은 서로를 공멸로 몰고가지 않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이 된다. 제도와 관습, 그리고 조직적 고려가 투여된 합의 같은 것들은 이런 각자의 투쟁을 공통된 이념 아래 포섭하고, 하나의 사회적이면서 동시에 선험적인 어떤 자아, 초월적 통각을 도출하기 위한 과정이며 그 매듭들이다. 본질적으로 분열적인 사회체는 이 과정을 통해 기능부전에 빠지지 않고, 각각의 매듭(노드)들을 통해 속도를 조절한다. 결국 분열증의 평면에 편집증의 매듭들. 이것이 사회체의 전체 구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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