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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2/17

  • 등록일
    2009/12/17 20:10
  • 수정일
    2009/12/17 20:10

오랜만에 집에서 늦잠을 자고, 오랜만에 하루 종일 집에서 이것 저것 공상도 하고, 정말, 오랜만에 아무 걱정 없이 있을 것 같았다. 하긴 그렇게 될 수 없을 것이다. 한 가지 늘 따라다니는 그늘이 난 있으니 말이다. 아니 이제는 한 가지가 아닌 것 같다.

 

난 사람들이 "때로는 슬프고, 기쁘고 한 게 인생이다" 는 식으로 말하는 걸 들으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누구도 '때로는'이라는 식으로 기쁘고 슬프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삶에서 언제나 슬프다. 그 슬픔을 벗어나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스피노자도 고귀한 삶이 힘들고 드물다고 했던 것이고 말이다.

 

삶은 늘 슬픔이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가 웃는 낯에 숨어 있기 때문에 슬프고, 하나의 기쁨이 잠시 머물고 있는 순간에도 그 기쁨이 물러났을 때의 지독한 낯설음 때문에 또 슬프고, 그 슬픔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해결되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

 

이 슬픔을 끝장내기 위해서는 죽음을 선택하거나, 세상을 버리고, 절대적인 어떤 것에 의지하면서 수도원이나 산사로 가는 길 밖에 없다. 난 감히 이 꿈을 꾸지는 않는다. 그래서 자잘하게나마 살아 가려고 하는 것이고, 작은 성취나마 고마워하는 것이고, 단 한 뼘의 진보나마 들뜨는 것이다.

 

오늘 같은 날은 많이 슬프다. 좀 더 늘어지게 쉴려고 했는데, 그게 안 되어서 심통이 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언제나 '불안'을 짊어지고 사는 이 허튼 육체가 측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에서 그녀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슬프고, 그것을 듣는 나도 슬프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해결하듯이 단칼에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일까?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수록 나 스스로에게 살의 같은 것을 느낀다. 그 살의는 이상하게도 건조하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저 세상으로 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왜 이 나이쯤 스스로 죽어간 사람들이 유언장을 쓰지 않고도 족했는지 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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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그리고 Salsa!

  • 등록일
    2009/12/14 12:11
  • 수정일
    2009/12/14 12:11

 

끝 그리고 Salsa!

- 《시간의 춤》, 송일곤, 2009
 
“시간만이 불멸하는 삶은 아름답다”(중국인 이민자 남편의 말) 하나의 거대한 비극. 그게 쿠바 한인들의 강제 이주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위대한 것은 이런 긍정이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불멸하는 것은 오직 죽음 뿐”이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찬사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불멸하는 것이고, 매우 신적인 것이기 때문에 경이로운 것이라고 확인한다. 이와 같다. 조선인 쿠바 이민자 세대들은 죽음을 반추하면서 삶을 긍정하는 사람들이다. 놀랍지 않은가. 이들은 말로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산다!
 
감독이 발견한 것도 그런 것이다. 애국주의적 향수를 카메라에 담는 일 따위는 너무 지겹기 때문에 아예 그러한 감상을 농담처럼 웃어넘기는 이 사람들이 작가에겐 더 친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쿠바와 한국이 야구경기를 한다면 그들은 쿠바를 응원할 것이라고 정말 진지하게 말한다. 그들에게 조국은 쿠바며, ‘꼬레’는 아득한 세대의 기억,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얼마나 다행인가?
 
그렇기 때문에 혁명도 그들의 삶에 대한 긍정을 어쩌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절이 아름다웠던 것은 혁명의 시간에 그(녀)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밖의 것은 혁명이 아니다. 하긴 혁명이 대수겠는가? 더 극적인 것은 ‘혁명의 시간’이 아니라 ‘살사(salsa)의 시간’이다. 세상을 바꾸었는데도 불구하고 춤을 추지 못한다면 옳지 않다. 그래서 쿠바 한인들, 아니 한국계 쿠바인들은 즐거운 소수자들이다.
 
우리는 이념의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너무 자주 슬프고, 너무 자주 분노하고, 너무 자주 좌절하기 때문에 냉소에 익숙하다. 냉소에 익숙하다는 것, 그것은 얼마나 처연한가? 처연함은 슬픔의 독을 삶의 여린 살에 꽂아 넣는 주사바늘과 같다. 과연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또는 민족주의든, 하나의 이념이 앞서 이들을 규정했다면 이 쾌활함이 가능했을 것인가? 물론 혁명은 위대하다. 하지만 춤이 더 즐거운 것도 명백하다. 그러니 사실 더 위대한 것은 죽음과 혁명의 기억을 껴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냉소에 찌들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도, 혁명도, 죽음도 끝나지 않는다. 춤을 춰야 하니까! “Fin y Salsa!"(영화 마지막 자막)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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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와 해체], 자크 데리다 외

  • 등록일
    2009/12/03 00:29
  • 수정일
    2009/12/03 00:29

어떻게 보면 환영할만한 시도라고 할 수도 있지만, 도대체 데리다의 언어가 맑스주의와는 전혀 상관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당연할 듯 싶다. 마르크스가 '아'라고 하는 곳에서 데리다는 '어'라고 하고 있으니 두 진영 모두에서 답답할 노릇이다.

 

일단 데리다가 맑스 옆에 서자마자 참으로 왜소해지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다. 맑스와 대면하는 그 순간부터 그는 장인 앞에 선 도제처럼 횡설수설을 멈추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것이다.

 

어쩌면 '해체'는 '해석' 앞에서 저렇듯 영원히 초라할지도 모른다. 다만 해석으로부터 멀찌감치 있으면서 아카데미의 풍족한 만찬을 즐길 때만 의기양양할 것이다. 데리다는 말년의 상대를 잘못 고른 것이다. 그도 대가임에는 틀림없고 또 고독할 뿐이지만,  맑스는 이미 역사이며, 하나의 연대기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불가능한 만남?』, 자크 데리다 외 지음, 진태원, 한형석 옮김, 도서출판 길, 2009
 
해제 : 마르크스주의와 해체의 불가능한 만남? 5
 
제1부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대한 비판
제1장 유령의 미소 ― 안토니오 네그리 27
제2장 탈물질화된 마르크스 또는 데리다의 정신 ― 피에르 마슈레 51
제3장 데리다를 화해시키기. ‘마르크스의 유령들’과 해체적인 정치 ― 아이자즈 아마드 71
 
제2부 마르크스와 아들들
서론 ― 티리 브리오 119
마르크스와 아들들 ― 자크 데리다 123
 
찾아보기 249
 
[아이자즈 아마드]
(78)(죽은 아버지의 유령은 명백히 데리다의 책의 제목-“마르크스의 유령들”-만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죽음의 종말성이라는 주제를 가리키고 있으며, 또 마르크스, 죽은 아버지의 진정한 상속인들은 공산주의자들 및 일반적으로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진 이들이 아니라 바로 와 그의 해체라는 그의 주장을 가리키고 있다.)
 
[81]하지만 데리다 텍스트의 딜레마는 그가 애도하는 있는 것이 무엇이며, 왜 지금 그것을 애도하고 있는가에 대해 이 텍스트가 전혀 불분명한 상태로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왜 소련의 몰락이 그로 하여금 애도하게 만들었는가? 왜 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의 몰락과 마르크스주의의 사망 사이의 이러한 동일시, 데리다가 이 텍스트의 다른 부분에서 대립하고 있는 자유시장론자들이 그처럼 애호하는 이러한 동일시가 이루어지는가? 과거 어느 순간에 그가 소련과 마르크스주의 그 자체를 동일시했기 때문에, 그중 하나의 종말이 다른 것의 사망을 애도하게 만드는 기회가 된 것인가? 적어도 이 한 가지 측면에서 본다면, 이 텍스트의 의미를 구조 짓고 있는 애도의 모티프는 애도의 순간에 대한 어떤 오인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83]나는 이러한 애도의 은유는 매우 명확하고 한정된 적용대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바로 데리다 자신의 철학적인 상상으로, 그는 햄릿을 연기하기를 원하고, 마르크스주의(그의 견해에 따르면 이제 마르크스주의는 유령과 마찬가지로 죽은 것이다)를 상속하기를 원하며, 이음내가 어긋난 시간을 바로 세울 수 있을 만큼 공정한 왕자-덴마크의 왕자, 해체의 왕자-가 되기를 원한다. 요컨대 그는 역사적 마르크스주의의 몰락이 신자유주의적인 우익의 승리가 아니라, 적어도 해체의 철학적, 학문적 승리와 합치하게 되기를 희망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애도 중에 있는 이유는 아버지의 죽음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 죽음의 성격 때문이며, 왕국이 해체의 왕자가 아니라 우익 찬탈자들에게 상속되었기 때문이다. ... [84]그렇다면 이것이 바로 애도의 실제 대상인 셈이다. 곧 죽음이 아니라 찬탈이 애도되고 있는 것이다.
 
[92]내가 “자기도 모르게 기여했다”고 말한 것은 진심으로 한 말이다. 내가 “자기도 모르게”라고 말한 이유는, 데리다의 작업과 영향력에 대해 유보적인 견해를 갖고 있긴 하지만(사실은 데리다 자신보다는 데리다주의자들에 대해 더 그렇다), 나는 결코 그가 우파의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분명히 그는 우익 인사들의 무리를 찾아다니거나 그들의 ‘교리’의 승리를 능동적으로 추구하지 않았다. 또 그가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에 가담을 선언한 [93]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 텍스트-이 ‘화해’의 방식-에서조차 데리다는 특히 미국에서 해체론자들이 제기했던 정치적 마르크스주의에 댛한 수많은 공격이 어떻게 노골적인 자유주의적 화용론과 철학적 공간을 공유하고 있으며, 그들의 정치적 수사법에서는, 어떻게 그가 여기에서 개탄하고 있는 우익의 ‘교리’만큼이나 신랄할 수 있었는지 제대로 고려하지 않고 있다.
 
[97]일정한 유형의 편협한 종교적 배타주의는 단지 몇몇 이슬람 국가들에 국한된 특징이 아니라 가장 커다란 승리를 거둔 시기의 서방 그 자체, 자본주의적인 유럽 그 자체의 특징이기도 하다는 데리다의 빛나는 통찰력이야말로 이 대목의 매우 신선한 측면이다.
 
[99]하지만 내가 강조하고 싶은 요점은, 데리다가 “해체는[마르크스주의와의 절연에 대해-아마드] 결코 아무런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흥미를 지닌 적도 없다”고 주장할 때, 또는 해체는 항상 마르크스주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단지 마르크스주의보다 더 심화된 것/급진적인 것이었을 뿐이라고 주장할 때, 그는 해체의 역사를 [100]다소 감추거나 재서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및 다른 곳에)서 데리다가 해체-해체는 본질적으로 지난 25년여 동안 다소 제한된 학문 집단 내에서 텍스트 해석학으로 존재해왔다-와 마르크스주의-이것은 19세기의 기원은 차치한다 해도 20세기의 세계사에서, 옳았든 틀렸든 간에(대부분은 옳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매우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사이에 일종의 동등성 관계를 확립하려고 하는 데 대해서는 논평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점을 차치한다면 데리다 자신이 훨씬 더 어처구니없는 반마르크스주의적 급진주의와 전반적으로 거리를 유지해왔다는 점은 분명 사실이다. 하지만 북미, 특히 예일 대학에 있는 아주 많은 수의 그와 가까운 동료들, 데리다가 국제적인 지위를 얻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고 데리다 자신이 거리를 두려고 하지 않았던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 중 어던 이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더 마르크스주의에 적대적이었지만,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적대감은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이었다. 좀더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모든 오류 및 잘못은 마르크스주의의 아주 많은 정신들 쪽에서 기인한 반면, 해체의 역사는 아무런 흠결이 없다는 것이 데리다 자신의 설명의 놀라운 특징이다. 정확히 모든 종류의 순수함의 수사법에 대한 해체로 그처럼 유명한 철학자가 최근의 지성사에서 해체의 위치를 설[101]명할 때에는 이렇게 무비판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적어도 아주 놀랍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103]우리는 이미 모종의 역설을 간파해냈다. 곧 보통 마르크스의 이름과 결부되었던 어떠한 정치 전통, 철학 전통도 데리다가 “마르크스의 정신”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동일시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러한 전통들의 패배가 마르크스의 죽음의 순간과 동일시되고 있으며, 그 다음에는 이 애도의 계기가 되고 있다. 이러한 역설은 이제 훨씬 더 복잡하게 뒤얽힌다. 자기 자신을 이러한 “어떤 마르크스의 정신”과 [104]동일시하기 위해 데리다는 단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모든 정치적 실천 및 철학전통을 벗겨내야 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를 “약속”의 비규정성 속에서, “메시아적, 종말론적” 양식에 따라 회복하려고 해야 한다.
 
[107]“교리/독단론”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미 사회 계급, 이데올로기, 상부구조와 같은 마르크스주의 개념 장치의 대부분을 포기해야 했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를 해체와 화해시키는 과정 도중에 우리 자신을 극단적인 형태의 반(反)정치 속에 정면으로 위치시키도록 초대받는다. “공[개]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 결집 없이, 당과 조국, […] 공동 시민권 없이, 어떤 계급으로의 공동적 소속 없이 […] 반푸닥거리의 형태를 띤 […] 제도 없는 동맹” 등등. 데리다는 우리에게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과제는 “비판들/비평들”을 생산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이는 아주 작가적인 “인터네셔널”인 것 같다) “비판/비평”의 대상도 명시하는데(민족, 국가, 국제법), 단 아주 명시적인 부정성(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을 넘어서, 그리고 여기 명백히 함축되어 있는 과도한 주의주의를 넘어서, 몇몇 비평작가들과 다른, 정확히 어떤 사람이 이 인터네셔널에 들어가는지는 불분명하게 남아 있다. 적어도 몇몇 문장들(“공[개]적인 것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며”, “일종의 반푸닥거리”)은 이것이 프리메이슨과 유사한 조직 같다는 인상을 준다.
 
[109]데리다의 “새로운 인터네셔널”-이는 “익명성”의 다른 이름인 것으로 보인다-의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것이 아무런 “공동체”도 구성하지 못하는 유목적인 개인들을 절대화하고 있을뿐더러 하이데거에 대한 반향은 차치한다고 해도 거의 종교적인 어조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도래하고 있는 것의 절대적 미래” 같은 문장들이 재림에 대한 수많은 잠재적 이미지들을 환기한다면, “사막과 같은 경험”이나 “타자와 사건에 대한 기다림” 같은 다른 문장들 및 비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이미 “법칙화”되어 있는 어떤 “경험”에 대한 환기에서, 우리는 세 가지 주요한 유일신 종교 모두에 포함되어 있는 신비적 전통에 공통적인 종교적 체념이나 포기의 강력한 언어 표현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고된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다소간 프리메이슨 식의 성격을 띤다고 해서 놀랄 것은 아무것도 없다.
 
[112]데리다가 불가능하지만 열정적인 화해를 실현할 수 있도록 ‘어떤 마르크스의 유령’을 남겨두기 위해 다른 모든 ‘마르크스의 유령들’은 배제되어야 하는가? 정확히 말하면 시신이 아니라 유령성을 회수하자고 역사 전체를 쓰레기처럼 내버려야 하는가? ‘새로운 인터네셔널’의 도래를 예고하기 전에 데리다는 자신은 과거의 인터네셔널들의 경우에는 결코 활용한 적이 없었다고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데리다의 텍스트에는 어떤 오인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을까? 우리는 적어도 그가 옹호하는 반(反)정치는 우리를 ‘새로운 인터네셔널’이 아니라 한낱 포틴브라스로, 곧 낡은 질서 그 자체의 한 변형인 ‘새로운’ 질서로 인도할 것이라는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는 아버지의 유령도 햄릿도 예견하거나 견뎌내지 못하는 어떤 과정을 통해 일어나는 체계적인 복고다.
 
[113]정치적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친숙한 범주들을 포기하는 것을 전제하며, (비록 데리다 자신은 자신에게 ‘메시아적인 것’은 종교적이지 않다고 반복해서 주장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메시아적이라고 선언할 뿐만 아니라 또한 강력한 종교적 상상계로 가득 차 있는 논거들로 인해 화해 자체가 영향을 받는, 해체와 마르크스주의를 화해시키려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이 텍스트에는 어떤 고결한 태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곧 신자유주의적인 승자들과 동일화하지 않으려는 거부의 몸짓, 자신의 저항적인 자세를 포기하지 않으려는 거부의 몸짓, 우파의 승리감을 꿋꿋이 견뎌내려는 의지에 대한 긍정, 심지어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더 어려운 유럽사의 한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와 동일시하려는 용기가 그것이다. 이 점에 대해 나는 자연히 데리다와 [114]어떤 친화성을 느끼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그가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제안한 자기비판을 해체에 대하여 떠맡는 것을 여전히 너무 꺼리고 있는 것 같다. ... 자신과 마르크스주의-또는 그가 표현하는 대로 한다면 “마르크스주의의 어떤 정신”-의 결합을 긍정하면서도 데리다가 이러한 해체론의 근거들 중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사실은 아주 확고하게 그것들을 재진술하고 있다는 것, 또한 이제는 해체론이 과거에 보여주던 거의 자기도취적인 긍정의 태도와 갈등을 빚을 만한 종교적 고통의 어조를 도입하고 있다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티리 브리오]
[124]『마르크스의 유령들』은-이 점을 다시 환기해두자면- 그 나름의 방식으로 이미 일종의 ‘응답’, 단지 하나의 응답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직접적인 초대 및 긴급한 명령에 대한 응답이자, 매우 오래된 요구에 대한 응답이고자 했기 때문이다. 책임(responsabilité)에 함축되어 있는 ‘예’라는 것은, 그것이 얼마나 원초적일 수 있든 간에, 하나의 응답(réponse)으로 남아 있다. ‘예’라는 것은 항상 유령의 명령에 대한 응답처럼 울려 퍼진다. 명령은 우리가 생생한/살아 있는 현재로도, 죽은 이의 순수하고 단순한 부재로도 식별할 수 없는 어떤 곳으로부터 도래한다.
이는 곧 이러한 응답의 책임은 이미 존재론으로서의 철학 또는 현존으로서의 존재의 현실성에 대한 담론인 존재론-이 점에 관해 우리는 많은 것을 또다시 말해야 할 것이다-의 지반에서 떠나왔다는 말과 [125]같은 뜻이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제기된 많은 논쟁은-우리는 이 점에 관해 이미 검증했던 게 되겠지만-겉보기에는 추상저이고 사변적이지만, 수십 년 전에 프랑스에서 사람들이 말하곤 했듯이, “우회할 수 없는” 또는 “사령탑의 자리에 있는” 이러한 형식의 질문 주위에서 이런저런 순간에 서로 교차하기 때문이다. 질문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산에서 존재론으로서의 철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 마르크스로부터 우리에게 도래했고 또 여전히 도래할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정치철학인가? 더욱이 존재론으로서의 정치철학인가? 그리고 겉보기에는 추상적인 이러한 질문에 대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정당한가?
 
[132]이 질문은 정확히 말하면 삼중의 질문이다. 1) “정치적인 것”의 질문(특히 “마르크스”에서 “정치[133]적인 것”의 본질과 전통 및 한정에 관한 질문). 2) 또한 “철학적인 것”의 질문(특히 “마르크스”에서 존재론으로서 철학에 관한 질문). 3) 따라서 사람들이 이러한 이름들/명사들 아래, 특히 “마르크스”라는 이름/명사 아래 공통적으로 식별/동일시할 수 있다고 - 이는 이 이름들 간의 불일치를 드러내기 위해서이긴 하지만 - 믿고 있는 그러한 장소들의 질문. 이 세 개의 질문(“정치적인 것”, “철학적인 것”, “마르크스”)은 분리될 수 없다. 『마르크스의 유령들』에 한 가지 “테제” 또는 한 가지 가설이 존재했다면, 그것은 오늘날 이러한 분리 불가능성을 가정할 것이다. 이러한 테제(또는 가설)의 세 가지 주제는 사실은 하나를 이룰 뿐이다. 이것들은 자신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공통의 장소를 추구하고 있는데, 이는 비록 우리가 그것을 보지는 못한다 해도 그것들의 장소이며, 그것들의 역사적 접합의 장소다.
 
[마르크스와 아들들-데리다]
[139]내가 최근 10여 년간 출판했던 모든 텍스트들(적어도 『정신에 대해서. 하이데거와 질문』)에서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역시 질문 형식이 지닌 의존성, 심지어 모종의 부차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바로 여기에서, 처음 보기에는 양립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 두 가지 일을 함께 실행하려고 시도하는 어떤 담론이 지닌 분할 가능성, 주름(pli), 또는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140]렇게 말할텐데-이중성에서 비롯한다. 두 가지 일이란 한편으로 응답 자체에 의해 최면화되거나 억압되는 질문들을 다시 일깨우려고 시도하는 것이며, 또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질문을 감시하고(veille), 질문의 전야(前夜, veille) 자체로서 질문에 선행하는 긍정(필연적으로 혁명적인), 명령, 약속, 요컨대 어떤 (oui)의 유사수행성을 떠맡는 것이다.
 
[141]내가 문제로 [142]삼은 것은 이론적, 실천적 차원에서 역사적인 파국적 실패들을 해명하기 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어떤 유산을 다른 식으로 재정치화하는 것이다. 첫째로 정치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것과(무엇보다도 국가/상태État의 관점에서 파악된 현실성이나 현존성, 보편자의 개념, 그리고 당의 관점에서 파악된 세계시민적 시민권 및 인터네셔널의 개념과) 용접했던 것-우리의 근대성에서 이는 바람직한 결과를 낳기도 했지만, 특히 심각한 폐해를 낳았다-에서 벗어나 있는 어떤 정치적인 것의 차원을 향해 이러한 유산을 돌려놓는 일이 중요하다.
 
[149]도착적 수행문(perverformatif). 내가 방금 지적한 “유사 수행성”은 적어도 두 가지, 한 단어로 두 가지를 의미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이러한 재정치화의 필연성과 관련을 맺고 있으며, 내가 보기에는 바로 여기서, 일정한 조건들 아래 재정치화를 작동시켜야 할 것 같다.
A. 적어도 지난 25년 동안 씌어진 나의 모든 텍스트에서처럼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도 수행적 차원(단지 좁은 의미의 언어만이 아니라 내가 흔적 및 기록écriture이라고 부른 것)에 대한 고려가 나의 모든 논변을 규정하고 과잉규정했던 게 될 것이다.
B. 과잉규정했던이라고 말한 이유는, 존 오스틴의 개념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과는 다른 어떤 것이 동시에 문제가 되었기 때문이다(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나는 나 자신이 “오스틴”에[150]게 그의 유산에게,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 시대의 주요한 사상 중 하나 또는 주요한 이론적 사건 중 하나, 가장 풍요로운 이론적 사건 중 하나에게 충실하면서 불충실했기에, 충실함을 통해 불충실했기를 바란다). 나는 오랫동안 내부로부터 수행문 이론을 전환시키기 위해, 해체하기 위해, 곧 이 이론을 과잉규정하고, 다른 식으로, 다른 “논리로” 작동시키기 위해 노력해왔다.
 
[163]나는 또 『마르크스의 유령들』 및 나의 작업 일반을 포스트모더니즘 내지 포스트구조주의라는 ‘유’(類)의 단순한 한 가지 종(種)이나 경우 또는 사례로 간주하려는 모종의 성급한 시도 때문에 충격을 받는다. 이 통념들은 바로 가장 미흡한 정보를 지닌 공중(대개의 경우 거대 언론)이, “해체”를 필두로 자신이 좋아하지 않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거의 모든 것들을 쓸어 담는 잡동사니 부대자루들이다. 나는 내가 포스트구조주의자도 포스트모던스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 나는 결코, 더군다나 내 나름대로 활용하기 위해 “모든 메타서사의 종말의 예고”에 관해 말한 적이 없다.
 
[213]『마르크스의 유령들』의 중심에 존재하는 메시아성 및 유령성보다 유토피아나 유토피아주의에 더 낯선 것은 없으며, “은밀한” 형태를 띤 유토피아나 유토피아주의라 할지라도 그렇다. ...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의도적으로 유토피아라는 단어를 “피하”(shun)려[214]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메시아성(내가 경험의 보편적인 구조로 간주하는, 그리고 어떤 종교적 메시아주의로 환원되지도 않는)은 결코 유토피아적이지 않다. 메시아성은 모든 지금-여기에서 가장 구체적이고 가장 현실적인 사건의 도래, 곧 가장 환원 불가능하게 이질적인 타자성을 지시한다. 도래하는 (것의) 사건을 향해 쏠려 있는(tendue) 메시아적인 근심(appréhension)보다 더 “현실주의적”이고 더 “직접적인” 것은 없다. 나는 “근심”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건을 향해 쏠려 있는 이러한 경험은 동시에 기대 없는 기대이기 때문이다(곧 이러한 경험은 능동적인 대비, 어떤 지평에 의거한 예상이지만, 또한 지평 없는 맡김exposition이기도 하며, 따라서 욕망과 불안, 긍정과 두려움, 약속과 위협이 뒤섞인 환원불가능한 합성체다). ... 내가 여기서 메시아성에 대해 제시한 정식화가 추상적인 것으로 보일지도 모르지만(정확히 말하면 이는 사건, 도래하는 [것의] 현실적 타자성과 맺고 있는 관계의 보편적 구조, 모든 존재론에 ‘앞서는’ 또는 그것과 독립적인 사건에 대한 사상이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가장 구체적인고 가장 [215]혁명적인 긴급성이다. 결코 유토피아적인 것이 아닌 메시아성은 지금 여기서 사태, 시간, 역사의 통상적인 경로를 중단시킨다. 그것은 타자성 및 정의에 대한 긍정과 분리될 수 없다. 그 다음 어떻게 이러한 무조건적 메시아성이 이러저러한 독특한 실천적 상황에서 자신의 조건들과 협상해야 하느냐는 질문에 분석과 가치평가, 따라서 책임의 장소가 놓여 있다. 분석과 가치평가, 책임은 매순간, 각 사건의 전야에, 각 사건의 진행 도중에 재고찰되어야 한다.
 
[223]문제는 계급적인 소속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이 아니며, 시민권이나 당을 제거하거나 부인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계급이나 당 또는 시민권을 본질적인 토대나 지주로 삼고 있지 않은 어떤 인터네셔널에 대한 호소다. 이는 계급이나 시민권 또는 당을 고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규정된 맥락에 따라 가능한 한 엄밀하게 이것들을 고려해야 한다.
 
[226]내가 보기에 내가 메시아주의 없는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이고 유사 초월론적인 구조는 역사(정치적 역사이든 일반적인 역사이든 간에)의 어떤 특수한 순간과도, 어떤 특수한 문화(아브라함적인 문화이든 아니든 간에)와도 연결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메시아성은 어떤 메시아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로도 사용되지 않으며 어떤 메시아주의도 모방하거나 반복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메시아주의도 확증하거나 약화시키지 않는다.
 
[227]한편으로, (메시아적이라는) 이 단어는 내가 보기에는 상대적으로 임의적이거나 외재적인 것 같다. 이 단어는 수사법이나 교육학적인 거치를 지니고 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성이라고 부르는 것과 닮은 것(하지만 그것으로 환원되거나 동일시되지는 않고서라고 곧바로 덧붙여두겠다)을 친숙한 문화적 환경을 참조함으로써 좀더 잘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된다. 내가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것이 언젠가 이해가 될 맥락에서는-만약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전통적인 메시아주의나 “메시아”에 대한 암시 없이도, 심지어 “없는”이라는 말이 없이도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낡은 단어들 아래서 모든 이름이 변화했던 게 될 것이다.
 
[228]첫째, “마르크스”라는 이름의 사건(및 그것이 지닌 모든 구성소와 전체, 결과)이 유럽적이고 유대, 기독교적인 문화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무시하거나 부인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 전체는 “메시아”가 무언가를 의미하는 문화에서 출현했으며, 이 문하는 “국지적인” 문화 또는 인류의 역사 속에서 손쉽게 구획될 수 있는 그런 문화로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침전 작용을 다시 드러내는 일은 결코 무익하지 않으며, 이것이 그 침전 작용으로부터 모든 종류의 정치적 귀결들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그렇다.
 
[246]마지막으로 단지 스피노자만이 아니라 마르크스 자신, 해방된 존재론자 마르크스도 마라노였다는 생각을 던져보면 어떻게 될까? 유대계 독일인으로 변장했던 스페인, 포르투갈 출신의 일종의 불법이민자로서, 기독교 신자로 개종하고 심지어 약간은 반유대주의자인 것처럼 처신했던 사람이라고. ... 마라노들은 너무나 잘 은폐하고 너무나 잘 변장해서 그들 스스로 자신이 변장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다! 또는 그들은 그 사실을 잊어버리고 억압하고 부인하고 부정해버렸다. 우리는 ‘진짜’ 마라노들, 현실적으로, 현재적으로, 현행적으로, 실제로, 존재론적으로 마라노인 사람들이 더 이상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이 또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또한 얼마 전부터 마라노주의라는 물음은 죽었다고 주장해 [247]왔다.
나는 전혀 그렇다고 믿지 않는다. 여전히 아들들과 딸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 선조들의 복화술사 환영들을 육화하거나 윤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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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 등록일
    2009/11/28 18:15
  • 수정일
    2009/11/28 18:15

홍상수, 지식인 지옥?

- <첩첩산중>(옴니버스 영화《어떤 방문》중, 홍상수, 2009)

 

 

멜리에스가 환상적인 달나라 여행을 필름에 담아 대중 앞에 내 놓았을 때, 그것은 일종의 마술쇼에 가까웠다(《달나라 여행》, 1902). 그것은 테크놀로지와 놀이의 경이로운 결합이었다. 따라서 “예술은 애초부터 기술이었다”라는 로버트 저매키스(Robert Zemeckis)의 말은 영화라는 매체예술에 이르러 완전히 증명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아무리 테크놀로지와 예술이 결합한다 하더라도 거기에 일정정도의 네러티브가 부재한다면 그 필름은 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이 되지 못한다. 거장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1968)가 단지 조잡한 테크놀로지의 전시가 아니라 뛰어난 선견지명으로 완성된 ‘시네마’(‘무비’가 아니라)로 평가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따라서 영화가 기술이고 또 예술이라면, 거기에는 그 기술-예술의 필요충분조건으로서의 창조적 네러티브, 즉 사건구조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여기서 사건구조는 시나리오만이 아니라 카메라와 편집을 통한 시공간의 분할을 모두 포괄한다. 작가(감독)의 특유성은 이 사건구조의 창조를 위해 이미지를 얼마만큼 극단적으로 또는 근원적으로 다룰 수 있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홍상수는 이 영화예술의 본질을 끝까지 고수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초기작인 《강원도의 힘》(1998)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고집스럽고 때로는 시니컬한 작업방식은 이제 ‘딱 홍상수식’이라는 레떼르를 달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사실 어느 정도 홍상수식 시네마에 물릴 때도 되었건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영화가 나올 때마다 (정말) 작정하고(!) 본다.

 

희한한 것은 여기에 있다. 내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홍상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 다수가 (필자를 포함하여) 먹물께나 든 지식인들이다. 그런데 홍상수가 영화 안에서 능청스럽게 놀려대고 키득거리게 만드는 대상이 또 이 지식인들이 아닌가? 언젠가 나는 홍상수의 이 끝없는 지식인에 대한 조롱과 희화는 역설적으로 지식인에 대한 홍상수 자신의 애정, 결국 자기 자신(작가 자신도 프랑스 유학씩이나 다녀온 지식인이 아닌가?)에 대한 나르시시즘의 발현이라고 썼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파악도 부족할 듯싶다. 왜냐하면 이 ‘나르시시즘’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밝혀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에 개봉한 홍상수의 《첩첩산중》은 그 나르시시즘이 무엇인지 알게 해 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건 ‘나는 그래도 창피한 줄 안다’는 것이다. 너무나 간단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이지만, 어쩌랴, 지식인이란 그런 족속들이다. 간단한 사실을 복잡한 진리(aletheia)로 떠드는 자들 말이다. 중요한 것은 이 간단한 사실을 사람들이 매우 자주 망각(letheia)하고 살기 때문에 (데리다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경매가’가 한없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만 하더라도 그렇다. 그가 주장한 것은 더도 덜도 아니고 바로 ‘나는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다’다. ‘창피한 것을 아는 것’과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사이에 무슨, 루비콘 강 쯤 되는 심연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다들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홍상수는 지식인들을 놀려대면서도 그 지식인들이 창피한 줄도 알고 그래서 ‘괴물이 되지는’(《생활의 발견》 중 김상경의 대사) 않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또 홍상수의 적정수준의 페시미즘도 한 몫하고 있다. 사실 창피스러운 줄 아는 것과 괴물이 되지 않는 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굉장한 덕목이 아니라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테지만 생활과 욕망이란 것이 그 덕목의 실천을 참으로 힘겹게 만든다는 인생관이 그것이다.《첩첩산중》에 등장하는 지식인들도 그렇게 산다. 창피하지 않으려고, 자기 자신을 위무하고 때로는 위악을 떨면서 말이다.

 

거두절미. 홍상수는 이번에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 이후 오랜만에 글쟁이들을 등장시킨다. 주요 등장인물은 4명이다. 전주 어느 대학의 교수 겸 소설가인 전 선생(문성근), 그의 한때 제자이자 애인이었던 미숙(정유미), 그리고 미숙의 예전 애인이자 데뷔한 소설가인 명우(이선균), 마지막으로 미숙의 절친이며 현재 전 선생의 애인이자 또 제자인 진영(김진경). 그리고 까메오로 잠깐 실제 소설가인 은희경씨가 등장한다. 이들 배우들의 역할 면면만 봐도 벌써 실소가 나온다. 그렇다 하더라도 제자가 애인이고 친구가 또 그 애인의 애인인 이 요지경 상황이란 게 그리 별스럽지도 않다. 그러니까 홍상수 영화에서만이 아니라 실제 삶에 있어서도 그렇다는 말이다. 작가가 이들 지식인들의 그 별스럽지 않은 삶을 ‘요지경’으로 만드는 것은 이들이 이러한 삶 자체의 비루함을 처음에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홍상수의 다른 영화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나지만 이 영화에서도 지식인들(또는 그 지식인 중 한 명)은 마침내 그 삶의 비루함과 창피스러움을 깨닫게 되는데, 영화의 종반부에 가서 그러하다.

 

이 영화도 그래서 당연히 마지막 장면이 핵심이다. 여기서 극중 모든 등장인물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모두 모인다. 그 전날 과음(과연 홍상수 영화에서 음주란 무엇일까?)을 한 네 명은 각자의 연인(섹스파트너?)과 모텔에서 하루 밤을 보낸 뒤 모텔 앞 식당에서 딱, 마주친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따로 상을 봐서 먹다가 가려던 찰나, 식당 문 앞에서 마침내 전 선생이 화를 버럭 내며 다른 커플(미숙-동우)을 불러 세운다. “야! 이 새끼들. 일루와! 너네 왜 인사도 안하냐? 어제 진영이만 버려두고 너네 둘이 갔다며? 그래서 진영이가 나한테 전화했다. 그래서 술 마셨고, 늦어서 잠깐 들어가서 쉰 거야.” 전선생과 진영의 사이를 아는 미숙은 들고 있던 커피잔을 훽 던지며 말한다. “그만해요! 창피한 줄 아셔야지! (동우를 보며) 야, 나 간다. 넌 뒤에 따라와!” 그리고 화면전환, 모텔촌의 건물들을 비추는 카메라. 첩첩산중, 아니 첩첩모텔중.

 

미숙은 혼자 차를 몰고 어디로 갔을까? 평론가 정성일도 지적했다시피 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클로징 시퀀스가 매우 정교한 장면의 대칭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씨네21』730호 참조). 나는 정성일의 이 평에 한 가지 더 추가하고 싶다. 즉 이러한 구조적 대칭성은 곧장 이념적 대칭성, 다시 말해 이 등장인물들이 매우 정교하고, 섬세하게 서로의 욕망을 거래하고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는 것 말이다. 여기서 미숙의 존재는 네러티브 상에서나 구조상에서나 매우 특유하다. 그녀가 보이스오버의 주인공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러한 장면의 대칭구조에 파열구를 내는 당사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실 미숙은 등장인물들이 자신의 욕망을 거래의 대상이나 가벼운 섹스스캔들의 대상으로 삼는 것과는 달리 매우 절실하게 거기 매달린다. 영화의 첫 장면에 그녀가 차를 몰며 전주로 가면서 혼잣말로 뇌까리는 “죽어도 돼, 죽어도 돼”라는 말은 이 절실함이 표현된 것이라 하겠다. 미숙의 이 절실함의 정체는 분명 문학 창작에 대한 욕망이다. 어쩌면 그녀는 자신의 창작활동을 위해 전선생과 사귀고, 그와 헤어지자 바로 동우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 그런 혐의가 짙다. 그녀가 충동적으로 은희경의 집을 찾아가서 “선생님이 제일 잘 쓰세요. 이제부터 글만 쓸거에요.”라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말하는 것도 그런 욕망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동일 것이다. 하지만 일종의 ‘전이’(transference)를 바라는 이런 행동은 매우 유아적이며, 그래서 실현 불가능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자기 욕망에 끝없이 집착하는 미숙이야말로 나름 대로들 쿨한 이들 지식인-작가들과는 달리 지식인의 본질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전선생에게 쏘아부친 그 말이 그걸 증명한다. 하지만 미숙이 어떤 모범적인(?) 지식인상을 드러낸다고 해서는 매우 곤란하다. 홍상수 영화에서 그것보다 더 웃기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인이란 건 그저 좀 아는(본질적으로는 스스로가 모른다는 것을 아는, 또는 창피한 줄 아는) 그런 존재이지, 어떤 휘황찬란한 아방가르드가 아니다.

 

흔히들 홍상수 영화를 지식인들의 희화로 읽곤 한다. 그건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몇 가지 첨언을 해야 완전히 옳을 것이다. 그 희화라는 것을 통해서 당대의 지식인들의 본질이 유전(流轉)된다고 말이다. 예술(pathos)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로고스(logos))에 대한 상당한 부정을 통해 성장하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로고스가 반겨야할 일이기도 하다. 그 로고스가 당대를 지나 살아남는 것은 그러한 부정성의 전염을 통해서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긴 언제나 로고스는 파토스를 질투하거나(플라톤), 경외하거나(니체), 경제적 하부구조에 얽매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맑스)으로 간주하지 않았던가? 존경스런 칸트조차 ‘숭고함’에 대면하여 어쩔 줄 몰라 했으니 말이다.

 

혹시 홍상수는 ‘구름’이나 ‘개구리’를 선사하려고 작정한 당대 한국 사회의 아리스토파네스일지도 모를 일이다. 창피스러운 줄 모르는 지식인들을 위해 창피스러운 영화를 계속 만드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 redbriga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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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09/11/23 00:12
  • 수정일
    2009/11/23 00:12

- 영가진각이 육조혜능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나오면서 지은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70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송이 꽃에서 전 우주를 본다"고 했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가 하나의 무한한 세계 전체라고 했다. 여기엔 어떤 형이상학학적 공명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 한국사회에선 선거에 이기고 권력에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주택에 관한 납득될만한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건 선거꾼들이라면 다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 선거 정당이 과연 이 짓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만약 좌파의 정치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려면 이 조건에 급진적 전망을 부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해타산에 밝은 소위 서민-중산층 중 어느 누구도 이 전망에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좌파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선거전략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불수의한 또는 미필적인 임무방기가 생긴다. 만약 이 유동적인 서민-중산층 계급의 이해타산을 흡족하게 할 만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주택-교육 정책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정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정당'이 이들의 요구를 저버릴 것인가? 무리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증후가 드러난다. 즉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정책적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집권할만한 역량을 가진 진정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덫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 노동자계급정당은 이에 대한 확실한 비판과,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진리에의 선의지, 그것은 마땅히 플라톤을 위해서만 남겨두자. 우리는 그를 이해하면서 더 심층으로 가야 하리라. 사유의 지층에는 진리보다 거짓이 선보다 사악한 아름다움이 더 많다는 것 .그래서 이제 철학자는 정치가이면서 고고학자, 문헌학자 더우기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수학적 계산이나 예술작업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이다. 무기력한 철학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만 활력 넘치는 철학은 이 사실을 부단히 의식한다. 왜냐하면 선의지란 마땅히 미적 활력과 욕망의 표면에 서식하는 이념인 것이며 이 이념이 발생은 미적 무의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자주 예술에 경의를 표하곤 했던 것이다. 

 

- 편의상 나누자면 프랑스 철학의 한국적 갈래는 현재 두 계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상학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논변을 중심에 놓고 체계를 겨냥하는 계열이 있고, 또 한편에는 실증적 과학을 기반으로 논변만이 아니라 개념에 집중하면서 체계보다 현실에 접근해가는 계열이 있다. 전자에는 다수의 아카데미 학자들, 예컨대 일세대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라 불리우는 박이문 등과 그 다음 세대이면서 보다 기독교적이고 전통과 문헌학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강영안과 서동욱이 있으며 후자 쪽에는 주로 아카데미 외부에서 활동해 온 이정우, 류종렬, 이진경, 김재인 등이 있겠다. 문제는 이 계열이 좀 더 긴장감 있게 길항하면서 학문의 반성과 비판을 도모한다기보다 각자의 영역에 자족적으로 머물면서 후속세대들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특히 실물적 기반을 쥔 강단파에 유학이후 또는 박사 이후 세대원들이 대거 몰리면서 자칫 프랑스철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적 기반에만 관련된다는 식의 허구가 유포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 해석학적 지평이란 곧 해석의 지평이기도 할 것이다. 해석은 해석학적 대상의 앞과 뒤로 들고 나기도 하지만 그 해석이 시간 자체를 앞뒤로 들고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다시 정당화된다. 즉 해석이 시간이 곧 실존의 시간이라는 것. 난 이 경우를 대중분석의 많은 예에서 본다([씨네 21] 720호 특집 참조). 

 

- 물론 핵심은 칸트적인 통찰이다. 즉 질문보다 그 질문의 가능조건 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다시 칸트와 결별이 필연적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범주론이 아니라 감성론이며 변증론이 아니라 이념론 그것도 차이의 이념론이기 때문이다. 

 

- 인식근거에서 존재근거로의 전회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사실 이 코페르니쿠스는 가짜다), 맑스와 들뢰즈의 코페르니쿠스라야 가능하다. 존재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신체다. 이로써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도 그 뿌리를 바로 하고 서게 된다. 이 뿌리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존재론이며 곧 윤리학이고 정치철학인 게다. 형이상학은 여기서 이 뿌리의 양분을 길어 자라난 열매일 것이고, 이 열매가 바로 일상이고 습관이며,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 철학의 적은 분열증이라기보다 언제나 강박증이었다. 강박을 적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은 결국 예술보다 빈곤한 어떤 것이 되었으며 그 외부에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남겨두게 되었다.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 최근 정성일의 말처럼 영화는 상영과 관람을 통해 한시적인 코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영화 내재적 가치와 형이상학 아래에 놓인 영화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영화보기이며 행위주체들은 씨네필이길 넘어 씨네워리어 또는 씨네밀리탕트일 것이다. 68년 혁명 당시 씨네마떼끄 프랑세즈를 지켜낸 누벨바거들이 그들일 것이다.

 

- 한때의 적멸이 스친다. 등언저리가 서늘하다. 여기는 도저한 실재의 난만지대. 난 순간순간 스스로를 잡았다가 놓치기를 반복한다. 포르트다포르트다포르트다...

 

- '非'인가 '反'인가? 하긴 회의론은 스스로에 모순된다. 하지만 회의론이 스스로에게 진리를 요구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유령, 그것의 도플갱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만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생성이 '순진무구'한가?

 

- 이제 철학의 임무는 과학과 해석학을 조우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우는 형이상학과 정치경제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삼위격 안으로 수렴되고 그로부터 발산할 것이다.

 

- 의미론의 연속된 두 층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층위는 천문학적 알레고리로 주로 설명되는 고도로 추상화된 층위(형이상학)이고 둘째는 주로 기계적 역설을 횡단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극사실적인 층위(예술)다. 이 두 층위의 극단적 스팩트럼으로 갈수록 개념과 이념은 점점 더 희박해진 공기 속에서 탄생하며 외연은 뚜렷해지는 대신 내포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개별성이 보편성보다 앞서는 것이다(이 방면에서 예술과 철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상식(doxa)은 이 두 층위의 혼효면 위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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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이 권능을 멸시하고, 거기에 봉사하기보다 자신의 위세에 나르시시즘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만약 이 권력이 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파쇼화되고 권능의 외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다중 낱낱이 서로 무관한 듯이 취급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단결은 아니고 공명이 이루어지려면 여기서 어떤 전술이 필요할 것인가? 절대적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단두대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똑같이 멸시하는 방법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자신의 노예적 신분을 깨닫도록 할 것인가? 혹은 이대로 멸시와 모멸을 감내하면서 노예의 가면을 마다하지 않으며, 삶을 소모할 것인가?      

- 좌파 진영 내의 중도파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낙청과 최장집을 읽어야 한다.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어떤 책을 내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진영의 형세가 변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백낙청이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냈고, 최장집은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어떠할 지 윤곽이 잡히는 바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이 좌파내 급진 진영의 또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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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6시 수원터미널. 틀어 놓은 티비 두 대에서 각기 다른 방송국의 각기 다른 애국가가 나온다. 터미널 안이 온통 왕왕 울린다. 밖은 짙은 안개가 이미 점령했다. 안개를 뚫고 그 옛날 박정희의 탱크가 불쑥 포신을 내밀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수원의 새벽이다. 난 광주로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말이다. 박정희 따위는 발톱에 때만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사랑은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역사보다 더 훌륭하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동선이 점점 활발해진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 좌측 옆구리에에서 불빛이 흘러 나온다. 6시 9분. 이제 날이 훤하다.

 

-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그것이 깨지면 그 이상의 '연대'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이명박을 봐라. 어째서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으로 협력하지 않는지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저 평범한 사람살이의 규칙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요즘 들어 한 가지 일 때문에 자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혹시 나도 또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은 없는가, 또는 나도 모르게 신뢰를 저버린 적은 없는가, 자꾸 묻게 된다. 한 번 신뢰가 깎이면 돌이킬 수 없다. 이후로 신뢰에 관련되었던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 이제 글을 거두어들일 때다. 한동안 외부에 글을 쓰는 것을 줄여야 하겠다.  

 

- 논쟁적 서평쓰기가 거쳐야 할 것들: 원전대조→발췌→다른 서평 참고→사전숙고→쓰기

 

-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싶은 거다. 섬 바위에 새기는 외딴 글. 그러나 날빛 글.

 

- 새벽 2시. 혼곤한 정신이다. 머리 속에 N극만 있는 자석 덩어리가 해마 근처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풀벌레  소리가 온 동네에 왕왕 울린다.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까?

 

-강의준비: 강의교재검토->2차자료검토(프랑스철학+강영안)

 

- 흐린 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피아노는 Listz일까? 낯익다. 감사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서 이 기간이 좀 갔으면 싶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실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내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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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7

  • 등록일
    2009/11/17 02:17
  • 수정일
    2009/11/17 02:17

어떻게 보면 한낱 경제라는 것이 삶의 중심에서 교교하게 그 삶을 좌우한다. 맞는 말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을 간과했다가는 큰 일일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중추적인 요인을 짐짓, 또는 과감하게 물릴 줄 도 알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경우에 그렇게 물리는 것이 이후에 다른 실익이나 더 큰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특히나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하여간 앞으로 꽤 오랫동안은 내 경제의 규모를 너무 과소평가해서 가난을 자처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라는 거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무엇보다 그 경제가 나의 이익이 아니라 나를 지탱하고, 또 나에게 그 온 생을 기댄 한 타자를 위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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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실에 새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느낌이다. 사람이 바뀌었고, 일이 다르게 진행되고 있으며, 내 각오도 다르다. 무엇보다 판단의 신중을 기하고, 집행에 책임을 지며, 반드시 다른 사람의 의견을 돌아 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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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4

  • 등록일
    2009/11/14 11:54
  • 수정일
    2009/11/14 11:54

이번 호 [씨네21]을 보다가 영화 [파주]에 관한 김연수의 글에 인용된 중식(이선균 분)의 말이 한참 머리 속을 떠돌아 다닌다. 중식은 왜 이런 일을 하냐, 는 은모의 말에 "처음엔 멋있어 보여서 했고,  다음엔 갚을 빚이 생겨서 했는데, 지금은 일이 자꾸 들어 오네"라고 대꾸한다. 참으로 심드렁한, 그래서 너무나 슬픈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김연수의 해석이 또 참 서글프고 아프지만 절절하다. 중식의 저 말은 그러니까, '생애전환기'(40대)에 처한 스스로에게 답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난 저 중식의 말과 더불어 '생애전환기'라는 단어에 우뚝, 멈췄다. 생애전환기라... 맞는 말이다. 김연수도 그렇지만, 나도 생애전환기지 않은가?

 

학원 원장에게 대학 강의와 연구실 일로 일을 더 이상 못하겠다고 했다. 하긴 원장도 고등부 준비를 하면서 예전같지 않은데다, 내가 보기에 더 이상 내가 있어야 할 이유도 없다. 사표를 날리고 광주로 왔다. 생각했던 대로 그녀는 걱정이 앞서는 것 같다. "3시간 30분 전에 일 그만두고 광주로 달려 왔어요. 그런 얘긴 내일 해도 되지 않나요?" 난 내가 서운한 게 옳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그녀도 성급했다는 것을 인정하리라.

 

하여간 이제 생애전환기고, 난 그나마 안정적이던 돈줄을 내던졌고, 이제 다시 '안정'을 되찾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더 심각한 결심도 남았다. 그건 일종의 내개 남은 삶 전반에 대한 성찰, 정도가 될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내 생이 30대 이후로 또 한 풀 꺽여 돌아갈 것이라는 것이고, 또 그만큼 삶이 밀도 있게 전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밀도', 그래 밀도가 문제다. 그 밀도를 조절하는 것은 온전히 내 몫이고, 내가 얼마나 삶을 주도면밀하게 가져가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지금은 그렇다. 몇 가지 떠오르는 것. 잠을 줄이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공부를 더 많이 하며, ... 시간을 지배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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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의 러닝타임, 121분-<내 사랑, 내 곁에>, 박진표,, 2009

  • 등록일
    2009/10/17 01:48
  • 수정일
    2009/10/17 01:48

* 마찬가지로 속 쓰린 글이지만 조금은 위안이 되는 ...

 

신체는 소멸한다. 인간은 죽는다.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 이 명제는 가히 선험적(transzendental)이라 할만하다. 선험적이라는 것은 실재적이라는 것이고, 실재적이라는 것은 흉내(imitation)낼 수는 있어도, 그것을 겪을(suffer)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연기에는 흉내 내는 것이 있고, 겪는 것이 있다. 연기론 교과서를 펼치면 이 두 분류를 유명한 두 극작가의 이름을 들어 명명하고 있다. 스타니슬라브스키와 브레히트. 겪는 연기는 스타니슬라브스키의 것이다. 그러나 메소드(method) 연기라 칭하는 이 연기법은 ‘육체의 변형’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어떤 연기든 ‘~되기’(becoming)을 실행한다. 이것은 의식적인 장을 연기 대상과 겹쳐 놓는 ‘속임수’가 아니라, 육체와 의식의 지각장(perceptual field)을 연기대상의 근방역에 이르기까지 육박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도는 필연적으로 마조히스틱한 자기부정의 상태를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배우의 육체는 카메라 앞에서 단순히 피사체일 뿐이다. 그는 본래부터 가지고 있는 인격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가 부여한 인격을 오로지 ‘연기’해야 한다. 그런데 연기는 피사체로서의 자기위치를 끊임없이 부정할 수밖에 없다. 그 부정을 통해 배우는 이미지의 평면만을 생산하는 카메라에 심도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연기’ 즉 ‘~되기’는 카메라와 배우 간의 끊임없는 교전의 현장이라 할 수 있다.

 

배우 김명민은 이 교전의 장을 손쉬운 의식의 지각장으로 하지 않고, 육체의 지각장으로 선택했다. 사유만이 아니라 느낌과 감각에 이르기까지 남김없이 ‘제 것’으로 만드는 힘든 길을 선택한 것이다. 영화는 극중 백종우의 증세가 어떻게 고스란히 김명민의 것이 되는지 시시각각 재현하고 있다. 집요하게도 카메라는 그러한 과정 전체에 대사나 사건으로 다가가기보다, 김명민-육체, 혹은 백종우-육체 그것 자체의 전시만으로 그러한 재현에 이르려고 한다. 하지만 김명민의 것이 된 백종우의 육체는 그러한 재현의 시도를 번번이 물리고 스스로가 ‘배우’이며 이것은 ‘연기’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것이 문제다. 연출과 연기의 간격이 두드러지는 지점 말이다. 감독은 김명민이 “연기에 미친 배우”(『씨네21』722호)라고 평가하지만, 광기라는 것은 이해불능의 타자를 지칭할 때 쓰는 말이지 감독이 배우에게 쓸 수 있는 말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권능 너머로 탈주했다는 것을 시인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어떤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현장에서 도대체 김명민의 육체가 겪고 있는 고난을 제대로 필터링한 스텝이 몇이나 될 것인가? 그리고 어째서 김명민은 그토록 멀리까지 달아나 버린 것인가?

 

이 모든 것을 간과하자. 그렇다면 영화는 충분히 진실에 가 닿았는가? 위에서 말한 소통부재의 디렉팅(directing)과 소통부재의 액팅(acting)에도 불구하고 카메라는 피사체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것인가?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앵글은 시종일관 김명민의 신체를 부감으로 잡거나 밝은 조명 아래 드러냄으로써 신성화한다. 그것은 마치 종교영화에서 종종 보이는 예수의 육체와 같다. 고난의 흔적이라고는 깡마른 거죽밖에 없는, 그나마 인공의 광선 아래 순백으로 빛나는 그 육체 말이다. 과연 루게릭 병이 그와 같이 성스러운 신체 상태를 유지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일까? 여기서는 이제 카메라 앵글마저 김명민의 신체를 배반한다. 그가 메소드 연기를 위해 수 십 kg을 감량한 그 기간 동안 그의 육체는 온전히 감량의 흔적만을 피사체로서 감당할 뿐, ‘연기’로 드러나야 할, 고통은 오간데 없어지고 말았다. 그의 신체는 멜로드라마, 최루성 가족영화, 추석 개봉작이라는 낭창낭창한 레떼르를 가장하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기에 급급한 모습이다. 마치 루게릭 병으로 인해 안면근육 마비로 우는데도 불구하고 웃음이 생기는 것과 같이 김명민은 이 영화 안에서, 전시되고 성화된 자신의 육체와, 메소드 연기를 통해 고통스럽고, 루게릭 병으로 또 더 고통스러운 자신의 지각체계라는 무간지옥에 빠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관객은 김명민의 편이 되고 싶지만 저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다. 어째서 백종우는 이지수(하지원 분)에게 참으로 이기적이게도 결혼하자고 한 것이며, 도대체 이지수는 어떤 4차원 소녀이기에 그것을 선뜻 받아들이고, 그도 모자라 임종에 이르기까지 그를 지키는 것일까?

 

한가위에 사람들의 희생정신을 북돋우고 ‘긴 병에 장사 없다’는 시쳇말에 의식적으로 거스르기로 작정한 영화라 하기에는 김명민의 육체가 너무나 부질없다. 저 신체가 121분짜리일 뿐이라니 말이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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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스의 멧돼지들-<차우>, 신정원, 2009

  • 등록일
    2009/10/17 01:35
  • 수정일
    2009/10/17 01:35

*이 글은 개인적으로 매우 속이 쓰린 글이다. 묵혀 두었다가 이제야 올린다.

 

영화는 착란과 전도(顚倒) 또는 사시(斜視)의 스펙타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지 않고 굳이 영화관에 갈 리가 없다. 그러니까 영화는 태생적으로 서사구조의 안정성, 즉 시점과 시제, 주체와 시공간의 평형성(stability)을 거스르는 경향을 띈다. 놀라운 것은 시간과 공간을 분절하고, 편집하는 와중에 기억을 일신하거나 뒤섞음으로써 영화가 오히려 실재를 드러낸다는 것이다.(1) 말 그대로 이것은 원인(cause; 작가-주체의 의도)이라기보다, 준원인(quasi-cause; 광경과 편집)의 영향을 더 많이 받으며, 편집증적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표면의 효과를 통해 이미지의 분열증을 극화(dramatization)한다. 그래서 장르가 더 극단적일수록 그 영화는 점점 더 사이코드라마에 가까워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어떤 공리계를 따라 재코드화 되는 길을 따르지 않는다.(2) 각각의 시퀀스는 야바위 상자에 담긴 주사위들의 각 면 위에 놓인 점들과 같아서 ‘흔들고, 여는’ 그 과정 모두가 작가의 지향성과 시선을 빗나간다. 숏과 시퀀스는 이렇게 자기구성(self-constitution)되며, 작품 전체는 거대한 우연의 긍정을 통해서만, 그것을 전제하고서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다.(3) 이러한 영화 예술의 특성은 마땅히 소수성(minority)이라 명명될 수 있겠다.(4)

 

[차우]는 이 소수성을 이미지의 표면 위에 전시하는 매우 특유한 영화다. 그러니까, [차우]는 괴수영화, 아니 코메디 영화, 아니 이 모든 장르-부정성(‘아니’) 바로 곁에, 영화에 ‘대한’ 담론을 배치함으로써 스스로 ‘극곁극’(play-beside-play)을 구현한다.(5) 실재로 이 영화는 ‘사시’(관객과 직접적으로 시선을 맞교환할 수 없는 영화의 운명에 대한 은유. 그것은 항상 ‘해석’을 경유한다)인 마을 이장과 마을의 치안담당 경찰의 술자리 대화에서 시작한다. 술자리 자체가 횡설수설로 시작해서 황당하게 끝나지만, 이 장면의 진실성은 거기 있다기 보다 작가가 이제부터 이런 횡설수설로 장르를 충돌시키겠다고 미리 선언한 것이라 하겠다. 장르는 하나의 주사위 면, 또는 당구공과 같아서 작가는 흔들고 열거나, 큐대를 들어 불분명한 강도 조절을 하는 정도에서 임무를 다할 것이다. 나머지는 관객의 몫이거나, 운명이며, 이도저도 아니라면 불가해한 신적인 어떤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 전체의 경첩은 빠져 있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대번에 알겠지만 이 헐렁거리는 숏과 시퀀스들 사이로 새어 나오는 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웃음’인데, 희한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웃음이 ‘페이소스’라는 것이다. [시실리 2km](2004)에서부터 시작된 ‘뜬금없고 썰렁한’ 신정원의 문체론(stylistics)은 여기서 부터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리고 웃음과 페이소스의 결합이 가져다주는 효과가 또한 가히 변태적이라고 할 만한데, 그것이 불쾌감의 잔영을 동반한 쾌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두고 감독이 가진 ‘B급 감수성’의 발휘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그것을 초과하는 ‘간질거리는’ 뭔가가 있다. 이를테면 오컬트적 요소, 또는 이미지의 페티시즘 말이다. 물론 이 영화 텍스트를 의미론의 측면에서 읽는다면 이 초과분은 처음에 말했듯이 극곁극의 구조에서 나온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답을 이렇게 손쉽게 내리면 해석의 여지가 없어진다. 곤란한 것은 극곁극의 형식을 취하는 영화텍스트가 알려지기 위해서는 다른 텍스트보다 더한 텍스트적 가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해석은 곧 그 드라마의 ‘효과’와 마찬가지기 때문이다.(6) 그래서 중요한 것은 해석이 느리지만 확고한 걸음을 옮길 수 있도록 질문을 다시 하는 것이다.

 

우선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작가는 어째서 이런 선택을 한 것일까? 관객 입장에서 이런 류의 유사 오컬트 무비는 불편한 코미디에 가깝다는 것을 작가가 알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런데도 웃지 않을 수 없었어, 라는 건 매우 당황스러운 여운을 남긴다. 사실 이러한 시도 자체는 낯선 것이 아니다. 이를테면 거대한 멧돼지가 뒤뚱거리면서도 놀라운 속도로 돌진하다가 옆으로 미끄러지고 앞으로 뒹구는 장면은 한강대교 하부 난간을 건너다니며 어이없게도 귀여운 재주를 부리던 봉준호의 [괴물](2006)의 샘플링이라 할 만하다. 또한 앞서도 얘기했다시피 이 영화의 독특한 사건구조는 바로 장르 간 충돌을 기획하는 것인데 이것도 낯설지 않다. 특히나 호러 계보 안에서 샘 레이미([이블 데드], 1982)나 토비 후퍼([텍사스 전기톱 살인 사건], 1974)는 누구나 인정하는 하이브리드 거장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 고전적 B급 호러 씨네아스트들과 신정원, 봉준호가 다른 점은 하이브리드 효과가 저예산이라는 제작조건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의식적 포획을 따라 기획되었다는 것이다. 하긴 최근의 샘 레이미([드레그 미 투 헬])에게 그 시절은 추억일 뿐이겠다.

 

여기서 문제는 이제 애초에 제기되었던 괴수영화와 코메디 사이의 장르충돌 뿐 아니라 B급 호러와의 관계다. 그리고 이 복합성을 고려하자마자 우리는 최초의 그 문제, 즉 ‘불쾌의 쾌’, ‘페이소스와 웃음의 결합’이 가리키는 그 준원인을 감지할 수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신정원 감독이 고전적 하이브리드의 형식을 가져오되 그 내용과 표현을 자기 식으로 구축했다는 것이다. 샘 레이미와 토비 후퍼의 장르실험은 한바탕 웃음으로 끝나는데 반해 신정원의 장르충돌은 호러를 중추적 요소에서 물리고 그 자리에 괴수를 놓음으로써 그와는 다른 효과를 달성한다. 그 웃음의 근방에서 떠도는 변태적 페이소스라는 효과 말이다. 이 페이소스가 웃음의 진정한 준원인인 이유는 그것이 웃음과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페이소스로부터 웃음에 이르기까지, 정서의 스펙트럼 전체를 주파하는 계열 전체를 작가의 실험이 드러내고 있다는 데서 발견할 수 있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하는 그 정서의 속도에 편승하여 플롯이 삐걱거리는 순간순간에 다양한 강도에서 그 스펙트럼의 톤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 경험 전체, 작가와 관객이 함께 잠겨 있는 이 웃음과 페이소스의 스펙트럼과 강도 전체를 그로테스크 싸카즘(grotesque sarcasm)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7)

 

그리고 이제 두 번째 주제에 대해 질문할 수 있다. 과연 작가가 이 미학적인 정서 가공과정을 통해 최종적으로(이 말은 역으로 ‘가장 최초에’라고 바꾸어 쓸 수 있다) 드러내는 것은 뭘까? 결국 괴수는 죽고 인간들은 행복해진다. 이건 그렇게 담대한 결론은 아니다. 오컬트에 육박하는 플롯과는 판이하게 다른 이 상투적인 결론을 두고 어이없어 하는 것보다 그 다음 이어지는 보너스 장면을 잘 살펴보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 마지막 보너스 씬은 싱거운 결론을 상쇄하는 것과 동시에 관객이 내내 느꼈던 그 정서적 이물감의 정체가 바로 고전적 드라마의 근간을 이루는 선입견에 대한 도발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준다. 그것은 콜러리지가 “불신의 자발적 중단”이라고 했고, 고다르가 관객이 영화관 안과 밖을 구분한다고 했을 때 그 고다르의 관객이 상정하는 하나의 ‘신념’을 말한다.(8) 신정원은 이 신념과 선입견을 극곁극 형식을 통해 역전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차우]에는 인접한 두 극 A와 B가 있다. 관객은 이 두 극을 취사선택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두 극은 1형식 문장의 주어와 보어처럼 서로를 제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두 극은 서로에게 등을 돌리고 있을 수 있는데, 두 극을 이어주는 동사가 부정법 동사기 때문이다. 이 부정법 동사는 딱 부러지는 ‘~이다’(be)가 아니라 언제든 변형이 가능한 ‘~임’(to be)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극)의 경첩(시간성)은 덜렁거린다.

 

A극은 관객이 줄곧 쫓아다니는 주요 플롯이다. 이를 통해 작가와 관객은 모두 콜러리지와 고다르의 지평에 얌전히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극 B가 있다. 즉 중반부에 인물들 각자가 ‘포수전설’의 주인공이 되는 만화적 장면(B1)이나, 뜬금없는 극중 캠 촬영 장면(B2), 그리고 가장 중요한 미친 여인의 집 장면(B3). 이 장면들은 극 A가 가지는 서사적 완결성을 번번이 위반하고, 주술구조를 과잉결정(overdetermination) 상태로 몰고 간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이 극 B는 극 A에 무언가를 더함으로써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극 A 가운데서 빼버림으로써 스스로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극 B는 A에서 스스로를 ‘빈자리’로 제시한다. 즉 주어 A는 술어 B 없이도 견뎌낸다. 여기서 극의 시퀀스들을 이어주는 시간성은 순전히 맥락 없다. 당연히 이게 작가의 장르충돌의 효과인 것이고 말이다.

 

더 나아가 보자. 그렇다면 극 A는 B와 완전히 대체 가능한가? 완전히 가능하지는 않아 보인다. B 극들 각각도 그러하다. 만약 그러한 대체를 가능하게 하려면, 영화가 시간성과 그것을 짊어진 주체를 직접적으로 다루어야 하는데 이는 홍상수식 시간 구성과 ‘기억’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이 영화는 그런 구성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대체(alternative)가 아니라, 전치(transference)와 응축(condensation)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체는 대상 간의 교환을 통해 둘 중 하나를 표면상 무화시키는 은유적 과정이지만, 전치와 응축은 어느 대상도 무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서 그것들을 표면상으로든(전치), 이념 상으로든(응축) 인접시키는 환유적(전치), 상징적(응축) 과정이라 하겠다. 따라서 극 A와 B는 이런 환유적, 상징적 관계로 [차우]라는 이미지 계열 안에 나란히 놓여 있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극A와 극B(그리고 B들) 사이에는 교환과 자리바꿈이 가능하고,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서사구조의 일방향성(bon-sense)을 수시로 역방향성(para-sense)으로 구현할 수 있는 틀거리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전체 줄거리에서 극B는 그것 자체로 확장될 때 하나의 단일한 플롯으로 구성될 수 있다. 즉 이 극 B들은 하나의 응축된(condensed) 상징인 것이다. 그런데 극 B의 상징들 중 전체 이야기들(즉 A와 다른 B들)의 맥락을 벗어나는 것이 바로 극B3이다. 어째서 이런 구성을 기획한 것일까?

 

여기에 등장하는 ‘미친 여인’은 영화 전반부에서 미미한 역할만을 담당하면서 관객들에게 단순한 폭소나 불안을 선사하는데,(9) 후반부로 갈수록 이물감이 심해져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는 극 전체를 웃음거리로 만들어 버린다. 내가 보기에 바로 여기, 이 ‘미친 여인’ 에피소드가 가진 전치와 응축의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전치와 응축이 통속적인 정신분석에서 오로지 오이디푸스 방향만을 가리키는데 반해, 이 에피소드는 그러한 일방향성을 비웃고 어떤 형태화할 수 없는 이념들로 향한다는데 있다.

사실 ‘미친 여인’이 그녀의 희생대상(처음에는 거지-아이 그 다음에는 포수-어른)에게 요구하는 것은 단 하나인데, “나를 엄마라고 불러!”라는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이 여인은 폭력을 행사한다. 마치 통속적 정신분석이 “너는 아빠(엄마)를 사랑한거야! 그(녀)와 관계하고자 한거야!”라고 윽박지르며 환자가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분석적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말이다.(10)

 

하지만 작가는 이 여인의 이러한 협박과 폭력을 통해 그러한 시도 자체를 희화시키고, 우리가 아이에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공통적으로 감당하는 그러한 권력의 폭력이 사실은 맥락을 벗어난 ‘억지’일 뿐이라는 실재 자체를 전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에피소드가 단순히 이념적 차원에서 작동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는 그 자체로 충분히 전통극이 가지는 일방향성을 역행한다. 그러면 이 영화에서 또 다시 미친 여인이 등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역행의 누승적 역량에 종지부를 찍는 이 에피소드가 이념 층위에서가 아니라 영화적 층위에서 획득한 효과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감독 자신이 영화에 대해 가지는 의견(doxa)이며, 이를 통해 희한하게도 역설(para-doxa)을 산출한다고 말하고 싶다. 즉 감독은 이 에피소드를 통해 ‘영화라는 거, 그거 별거 아니야, 이미지의 아상블라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거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작가가 의도한 대로 영화는 아상블라쥬다. 하지만 이제 술어 규정이었던 것이 주어로 간다. ‘아상블라쥬는 영화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 ‘아상블라쥬는 현실이다.’ 우리의 기억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건 이리저리 뜯어 붙인 이미지의 조합들, 이접(disjunction)들인 것이다. 영화에서 시작하여 현실로 가는 이 방향은 영화가 현실을 과잉결정하는 그 순간이며, [차우]에서는 미친여인이 마지막 보너스 씬에 등장하여 관객들을 웃겨 줄 때 등장한다. 이 방향은 사실 애초에 이와는 다른 방향, 즉 관객이 극장이라는 현실 공간에 자리를 잡고, 영화라는 허구를 감상하는 선을 따라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렇게 되었다. 이 역방향의 출현, 고다르의 신념이 거부당하는 사건, 이미지에 감염되는 순간, 오이디푸스 삼각형이 제대로 박살나는 장면은 마치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에서 어린 엘리스가 꾸는 꿈이 실재의 소녀들에게 전이된 것과 같은 것이다. 가히 ‘엘리스 효과’(Alice effect)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여기 있다.(11) 하긴 미친 여인의 집들과 거기 등장하는 어린 거지와 어른 사냥꾼은 ‘이상한 나라’의 등장인물들처럼 현실과 관념이 구분되지 않는 동화적인 맥락 안에서 꿈틀거리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우도 마찬가지다. 이 멧돼지, 또는 그 어린 새끼 멧돼지들까지, 처음부터 이들은 엘리스의 세계에 속한 것이지 않겠는가? 장면 B는 서사적 이야기 A의 구멍이 아니라, 오히려 A가 구멍이라는 가설이 가능해지는 것은 온전히 이 효과를 극단까지 밀어붙일 때 가능하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중요한 것은 영화를 하나의 개념이 아니라, ‘사건’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이 영화 [차우]의 괴수가 엘리스의 것이든, 험프티덤프티의 것이든 그건 새롭지 않다. 다만 그들을 만나고, 또는 나와 동시대의 관객들이 함께 이미지를 ‘흡수’하면서 공히 그것에 감염되는 그 시간이 더 새로울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의 영화가 있으면 다시, 하나의 새로운 코뮌이 탄생하는 것이고, 1시간에서 2시간, 또는 그 이상의 러닝타임 동안 나-우리는 타오르는 이미지를 둘러싸고 새로운 시간성을 경외하면서 해방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오로지 이미지-가상의 한갓 놀이인 것만은 아니다. 현실이 전쟁과 폭력으로 인간성과 문명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과는 반대로, 영화는 이미지를 가지고 고통스럽고 또 우습고, 어이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실재를 우리 눈앞에 들이 민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다. [차우]는 결국, ‘극곁극’의 형식을 빌어 장르충돌 실험에 괴수영화를 도입함으로써 그 효과를 극대화하였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시퀀스와 플롯을 이념 층위에 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 층위에까지 밀어 붙임으로써 영화와 더불어 현실을 탈신화화, 탈이념화시킨다. 그 시도가 결과적으로 가장 첨예한 실재, 즉 영화와 현실, 그리고 권력, 그 모두를 드러내는 것이다. 하나의 텍스트로서 [차우]의 특유성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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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홍상수의 [오, 수정](2000)은 영화가 기억을 어떻게 가공하고 그를 통해 어떻게 실재를 드러내는지 보여준다. 사실 홍상수의 작품 전체가 기억에 대한 작가 자신의 해석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상당한 나르시시즘에 육박한다. 그의 영화는 내내 지식인에 대한 냉소적 포지션을 유지하지만, 기억에 대해 해석하고 그를 통해 지식인들의 심리를 전시하는 바로 그 순간 그것이 바로 그 자신과 지식인에 대한 무한한 ‘사랑’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2) 만약 재코드화의 길을 따른다면 그 영화는 장르에 충실한 ‘재밌는’ 영화는 될 수 있을지언정, ‘좋은’ 영화는 아닐 것이다.

 

3) 영화가 언어적 해석(비평)에 대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보다 폭넓은 수용성을 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또한 영화제작 과정 자체를 생각해 봐도 이러한 경향이 압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스텝들 간의, 감독과 제작자 간의 조우와 교전(encounter)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지, 홀로 책상에 앉아 원고지를 채우면서 생산되지 않는다. 영화는 주체적(subjective) 작업이라기보다 간주체적(intersubjective)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4) ‘소수성’은 들뢰즈의 의미를 따른다. 그것은 ‘이디쉬어와 독일어를 쓰는 체코인 카프카’라는 말로 특화될 수 있겠다. 『카프카』, 질 들뢰즈 지음, 이진경 옮김, 동문선, 2001 참조.

 

5) 극중극(drama-within-drama)이 표면과 심층을 나누고 심층의 잠재성을 무한히 퇴행시키면서 끊임없이 표면으로의 강제적 도발을 기획함으로써 극 자체의 ‘본질’을 캐묻는 반면, ‘극곁극’은 잠재성 차원을 그대로 보존하고 단지 표면효과를 통해 ‘의미’를 환기함으로써 극의 분열증들, 좌절들, 더 나아가 극의 ‘무의미’ 차원을 드러낸다. ‘극곁극’은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임을 밝혀둔다.

 

6) 물론 일반적인 드라마나 극중극도 해석을 요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그 해석 없이도 인상들의 조합이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구성함으로써 독자를 쉽게 이해시키지만, 극곁극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곳곳에 서사구조의 일관성과 독자의 시선을 방해하고 정서적 반응을 비껴가는 사건들이 출몰한다. 문학 작품으로 치자면 카프카의 텍스트, 특히 『성』에서의 느닷없는 유머(이는 니체의 텍스트에서도 보인다-들뢰즈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와 마찬가지로 니체의 텍스트를 웃음 없이 읽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썼다), 이현화의 『불가불가』에서의 반복구(“불가불가”)와 이접된 역사적 사건들의 계열들이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물론 이 방면에서 가장 위대한 텍스트는 루이스 캐럴의 것들이다.

 

7) ‘그로테스크’란 개념은 기형도 작품에 대한 김현의 유명한 정의에서 나와서 현재 비평계에 상당히 광범위하게 전유된 개념이다. ‘싸카즘’은 ‘싸티르’(satyr)와 ‘겪음’(suffer)의 요소를 함께 가지고 있는 용어로서 이 글 전반부에 해석한 사태와 잘 맞아 떨어진다. 이는 앞서의 극곁극 개념과 더불어 필자가 새로 제시하는 개념이기도 하다.

 

8) “영화는 꿈이다. 그러나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극장은 현실이기 때문이다”

 

9) 이런 역할효과도 매우 특이한 것이다. 이 여인은 맥락 없이 등장하여 폭소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호러의 문법 안에 정위되면서 불안의 분위기를 조성하기도 한다. 전통적으로 드라마의 희극적 등장인물, 이를테면 셰익스피어의 광대들은 비극이 슬픔과 불안 때문에 내파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등장해서 장광설 따위를 펼치기도 한다.

 

10) 분석 차원에서 폭력이 정신분석에 의해 자행된다면, 물리적 차원에서 이는 파쇼적 정치권력의 핵심적인 속성이다. 이 권력은 자신이 호명하는 주체성 외에 다른 주체성을 알지 못한다. 만약 어떤 자율적 주체성을 불러낼 경우, 또는 반대와 저항의 논리를 광장에 갖고 나올 경우 어김없이 폭력이 행사되는 것이다.

 

11) 물론 이 개념은 루이스 캐럴에게 헌정된 것이다. 엘리스가 등장하는 그의 이야기들에서 현실은 꿈과 뒤섞이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구축하고, 독자를 논리적으로 현혹하여 그 현실 자체를 무화하여 그 결과물로 웃음을 선사한다. 따라서 이 효과가 발생하려면 이미지나 텍스트의 강도가 현실이나 기억의 단면을 침범해서 트라우마를 형성하거나 사고패턴에 일시적인 또는 장기적인 충격을 가해야 한다. 통상적인 드라마의 반전은 극 안에서만 그치기 때문에 그런 효과를 달성하지 못한다. 그리고 이것이 일반적인 역설과 다른 것은 역설이 논리적인 기반을 가짐에 반해 엘리스 효과는 정서적 기반에 충실하다는 것이다. 즉 여기서 웃음은 결코 박장대소가 아니다. 그것은 앞서 말한 grotesque sarcasm과 흡사하게 고통마저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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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카엘](아모스 오즈, 1968)

  • 등록일
    2009/10/06 00:20
  • 수정일
    2009/10/06 00:20

또 하나 독서의 흔적을 남긴다.

 

 

『나의 미카엘』, 아모스 오즈, 최창모 옮김, 민음사, 1998

 

[7]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것은 어렸을 때는 내게 사랑하는 힘이 넘쳤지만 이제는 그 사랑하는 힘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다.

 

[9]고양이는 자기를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은 결코 사귀지 않지요. 고양이는 결코 사람을 잘못 보는 법이 없거든요.

 

[20]잠시 동안 그는 커다랗고 슬픈 꼬마처럼, 머리카락이 거의 다 잘려나간 꼬마처럼 보였다. 나는 그에게 모자를 사주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싶었다.

 

[23]겨울밤에 예루살렘의 건물들은 검정색 배경 앞에 얼어버린 회색의 형상처럼 보인다. 억눌린 폭력을 잉태하고 있는 풍경. 예루살렘은 때로 추상적인 도시가 된다. 돌과 소나무, 그리고 녹슨 쇳덩이들.

 

[25]잔인한 시련에서 자긍심이 솟아나왔으므로 나는 그 시련을 소중히 여겼다. 권력의 수복. 나는 병이 낫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었다. 로젠설 선생님의 말로는 어떤 의미에서는 병이 자유로움을 주기 때문에 아픈 것을 더 좋아하고 낫기를 거부하는 아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그해 늦겨울에 병이 다 나았을 때 나는 유배감을 경험했다. 나는 연금술을 일으키는 힘을, 꿈과 현실을 구분짓는 선을 넘어서 나에게 꿈을가져다 주던 힘을 상실해 버렸던 것이다. 아직까지도 나는 깨어난다는 것에 대해 실망감을 느낀다. 나는 심각한 병에 걸리고자 하는 막연한 나의 열망을 비웃고 있다.

 

[31]{미카엘}비가 오면 예루살렘은 사람을 슬프게 만들어요. 사실은 예루살렘이 언제나 사람을 슬프게 하는데 그것이 매일 매순간, 매년 매시에 종류가 다른 거죠.

 

[32]{미카엘}한나 고양이들은 겨울에, 그것도 가장 추운 날 가장 발정을 많이 한다는 거 알고 있어요? 결혼하면 나는 고양이를 기를 거예요. ... 난 외동아들이에요. 고양이들은 어떤 제약이나 관습에도 묶여 있지 않으니까 교미하면서 소리를 지르는 거예요. 발정한 고양이는 낯선 사람에게 붙잡혀서 죽도록 짓눌린다고 느끼나봐요. 그 고통은 육체적인 거죠. 타는 듯하고.

 

[36]물론 나는 그가 고양이를 기르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는 정말로 나에게 평온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째서 내가 결혼할 사람이 아주 강해야 한다는 걸까?

 

내 곁에서 침묵하며 걷고 있었다. 그와 나, 우리들은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기묘한 한 순간, 나는 내가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아니면 시간이 현재가 아니라는 격한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 모든 일은 전에 겪은 것이다. 아니면 누군가 여러 해 전에 어떤 사악한 남자 곁에서 이 칠흑 같은 좁은 길을 다라 걷고 있을 것이라고 내게 경고했을 것이다. 시간은 더 이상 평탄하지도, 흐르고 있지도 않았다. 시간은 일련의 갑작스러운 격발이 되어버렸다. 어쩌면 내가 어렸을 때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꿈 속이든지, 무서운 이야기 속이든지. 갑자기 나는 말없이 내 곁에서 걷고 있는 그 희미한 형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40]그가 외투 단추를 끌러 나를 안으로 끌어들였다. 우리는 실재였다. 나는 억눌려 있던 그의 공포를 받아들였다. 나는 그것을 즐겼다. 당신은 내 것이에요, 내가 속삭였다. 절대로 다시는 멀어지지 말아요, 하고.

 

[47]보통 사람이 철저한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거짓은 늘 저절로 드러나버린다고 말이다. 그건 마치 너무 짧은 담요 같은 것이다. 발을 덮으려고 하면 머리가 드러나고 머리를 덮으면 발이 빠져 나오고. 사람은 그 구실 자체가 불유쾌한 진실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무언가 숨기기 위해서 복잡한 구실을 만들어낸다. 반면에 완전한 진실은 철저하게 파괴적이고 아무런 결과도 가져다 주지 못한다. 보통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조용히 서서 지켜보는 것뿐이다.

 

[91]잠을 자지 않을 때에 아이는 눈을 뜨고는 새파란 섬을 보여 주곤 했다. 나는 이것이 이 아이의 내면의 색이라고, 눈이라는 틈을 통해서 아기 피부 아래에서 몸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밝은 파란색의 작은 방울이 보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106]날은 여전히 흔적을 남기지 않고 지나갔다. 나는 매일, 매시의 경과를 이 글에 기록해야 하는 엄숙한 의무를 지고 있으며 그 이유는 나의 날들은 나의 것이며 나는 평온하고 날은 예루살렘 가는 길에 기차에서 내다본 낮은 산들처럼 쏜살같이 지나가기 때문이다.

 

[109]나는 그의 자제력을 사랑했다. 그것을 깨부수고 싶었다.

 

[199]나는 기쁨과 기대로 몸을 떨면서 창가에 서 있었다. 덧창 사이로 붉은 구름에 뒤덮여 밝은 안개의 미세한 틈을 뚫고 지나가려는 해를 지켜보았다. 잠시 후에 해는 갑자기 나타나서 나무 꼭대기를 밝은 빛에 휩싸고 뒤쪽 발코니에 걸려 있는 양철을 번쩍이는 광채로 뒤덮었다. 나는 거기에 사로잡혔다. 맨발에 잠옷차림으로 나는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섰다. 창틀에는 서리꽃이 피어 있었다. 실내복 차림의 한 여자가 쓰레기통을 비우러 나왔다. 그 여자의 머리카락도 나처럼 헝클어져 있었다.

 

[209]땅은 억제된 화산 위에 놓인 초록색 껍질에 불과하다.

 

[212]이 남자는 언제 자제력을 잃을 것인가? 아, 한 번만이라도 저 사람이 겁에 질린 것을 한번만이라도 보았으면. 기쁨으로 환호성을 지르고. 미친 듯이 달리고.

 

[231]죽음과 나는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가깝고도 먼 사이. 인사나 겨우 하는 정도인 아는 사람.

 

[233]꿈이 산산조각나면 민감한 사람들은 구부러지는 것이 아니라 깨진다.

 

[233]<너의 파괴자들과 너를 소멸시킨 자들이 네 앞에 나아가리라.> 이사야서의 이 구절이 가지는 의미는 두 가지이다, 라고 교수가 말했다. 우선 히브리 계몽운동은 그 자체 내에 궁극적적으로는 파멸에 이르는 사랑을 키웠다. 그 다음에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앞으로 나아가> 낯선 땅을 보게 되었다. ... 소수의 꿈구는 사람들과 투사들, 현실에 반기를 든 현실주의자들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부흥은 없었을 것이고 말 그대로 파멸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위업을 달성하는 것은 언제나 꿈꾸는 사람들이라고, 교수는 결론지었다.

 

[265]<말해 봐요, 미카엘> 나는 혐오감을 감추려고도 하지 않고 물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죠?> 미카엘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질문에 대해서 잠시 동안 생각했다. 그 동안에 그는 테이블에서 부스러기를 모아 자기 앞에 한 무더기로 쌓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질문은 무의미해.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야. 그냥 살고 있지. 그걸로 끝이야>

<미카엘 갠츠, 당신은 태어났을 때와 똑같이, 보잘 것 없는 존재로 죽을 거예요. 그걸로 끝이에요>

<사람은 누구나 장단점이 있지. 그걸 진부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그 말이 맞을 거야. 하지만 진부하다는 건 진실의 반대는 아니야. ‘2 더하기 2는 4이다’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그래도 …>

<그래도 미카엘, 진부하다는 것을 확실히 진실의 반대고, 나{266}도 언젠가는 두바 글릭처럼 미쳐버릴 거고 그건 다 당신 책임일 거예요, 얼간이 갠츠 박사님>

<진정해 한나>

 

[292]평화로운 미풍이 소나무를 건드려 흔들어 놓는다. 먼 하늘이 서서히 창백해진다. 그리고 저 광대한 공간에 조용하고 차가운 정적이 내려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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