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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23
    단편과 테제
    redbrigade

단편과 테제

  • 등록일
    2009/11/23 00:12
  • 수정일
    2009/11/23 00:12

- 영가진각이 육조혜능으로부터 깨달음을 얻고 나오면서 지은 게송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370 윌리엄 블레이크는 "한 송이 꽃에서 전 우주를 본다"고 했고, 라이프니쯔는 모나드가 하나의 무한한 세계 전체라고 했다. 여기엔 어떤 형이상학학적 공명이 존재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 한국사회에선 선거에 이기고 권력에 획득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주택에 관한 납득될만한 거짓말을 해야한다는 건 선거꾼들이라면 다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좌파 선거 정당이 과연 이 짓을 해야하냐는 것이다. 만약 좌파의 정치적 양식에 어긋나지 않고 권력을 획득하려면 이 조건에 급진적 전망을 부가해야 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이해타산에 밝은 소위 서민-중산층 중 어느 누구도 이 전망에 솔깃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좌파들의 고민은 여기서부터다. 이들은 지금부터라도 이에 대한 선거전략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데, 여기에는 불수의한 또는 미필적인 임무방기가 생긴다. 만약 이 유동적인 서민-중산층 계급의 이해타산을 흡족하게 할 만한 정책을 내놓는다면, 그것은 분명 주택-교육 정책일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 정책은 결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익을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거정당'이 이들의 요구를 저버릴 것인가? 무리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한 증후가 드러난다. 즉 현재 한국사회에서는 노동자계급의 이익만을 정책적 대안으로 내세우면서 집권할만한 역량을 가진 진정한 노동자계급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덫이 있기 때문이다. 주택과 교육, 노동자계급정당은 이에 대한 확실한 비판과, 그보다 더 중요하게는 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 진리에의 선의지, 그것은 마땅히 플라톤을 위해서만 남겨두자. 우리는 그를 이해하면서 더 심층으로 가야 하리라. 사유의 지층에는 진리보다 거짓이 선보다 사악한 아름다움이 더 많다는 것 .그래서 이제 철학자는 정치가이면서 고고학자, 문헌학자 더우기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 철학적 사유는 수학적 계산이나 예술작업과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것이다. 무기력한 철학은 이 사실을 자주 망각하지만 활력 넘치는 철학은 이 사실을 부단히 의식한다. 왜냐하면 선의지란 마땅히 미적 활력과 욕망의 표면에 서식하는 이념인 것이며 이 이념이 발생은 미적 무의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철학은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더 자주 예술에 경의를 표하곤 했던 것이다. 

 

- 편의상 나누자면 프랑스 철학의 한국적 갈래는 현재 두 계열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현상학과 해석학을 기반으로 논변을 중심에 놓고 체계를 겨냥하는 계열이 있고, 또 한편에는 실증적 과학을 기반으로 논변만이 아니라 개념에 집중하면서 체계보다 현실에 접근해가는 계열이 있다. 전자에는 다수의 아카데미 학자들, 예컨대 일세대 프랑스철학 연구자들이라 불리우는 박이문 등과 그 다음 세대이면서 보다 기독교적이고 전통과 문헌학적 감수성을 중시하는 강영안과 서동욱이 있으며 후자 쪽에는 주로 아카데미 외부에서 활동해 온 이정우, 류종렬, 이진경, 김재인 등이 있겠다. 문제는 이 계열이 좀 더 긴장감 있게 길항하면서 학문의 반성과 비판을 도모한다기보다 각자의 영역에 자족적으로 머물면서 후속세대들에게 어떤 길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데 있다. 특히 실물적 기반을 쥔 강단파에 유학이후 또는 박사 이후 세대원들이 대거 몰리면서 자칫 프랑스철학이 현상학적 해석학적 기반에만 관련된다는 식의 허구가 유포되고 있는 듯하다는 것이다. 

 

- 해석학적 지평이란 곧 해석의 지평이기도 할 것이다. 해석은 해석학적 대상의 앞과 뒤로 들고 나기도 하지만 그 해석이 시간 자체를 앞뒤로 들고나기도 한다. 하이데거가 다시 정당화된다. 즉 해석이 시간이 곧 실존의 시간이라는 것. 난 이 경우를 대중분석의 많은 예에서 본다([씨네 21] 720호 특집 참조). 

 

- 물론 핵심은 칸트적인 통찰이다. 즉 질문보다 그 질문의 가능조건 말이다. 하지만 이로부터 다시 칸트와 결별이 필연적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범주론이 아니라 감성론이며 변증론이 아니라 이념론 그것도 차이의 이념론이기 때문이다. 

 

- 인식근거에서 존재근거로의 전회는 칸트의 코페르니쿠스가 아니라(사실 이 코페르니쿠스는 가짜다), 맑스와 들뢰즈의 코페르니쿠스라야 가능하다. 존재란 의심할 여지 없이 하나의 신체다. 이로써 데카르트의 학문의 나무도 그 뿌리를 바로 하고 서게 된다. 이 뿌리는 형이상학이 아니다. 그것은 삶의 존재론이며 곧 윤리학이고 정치철학인 게다. 형이상학은 여기서 이 뿌리의 양분을 길어 자라난 열매일 것이고, 이 열매가 바로 일상이고 습관이며, 세계관(Weltanschauung)이다. 

 

- 철학의 적은 분열증이라기보다 언제나 강박증이었다. 강박을 적으로 삼음으로써 철학은 결국 예술보다 빈곤한 어떤 것이 되었으며 그 외부에 스스로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를 남겨두게 되었다. 마치 디오니소스처럼.

 

- 최근 정성일의 말처럼 영화는 상영과 관람을 통해 한시적인 코뮌을 구성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제영화 내재적 가치와 형이상학 아래에 놓인 영화의 정치학일 것이다.  이때 영화는 영화보기이며 행위주체들은 씨네필이길 넘어 씨네워리어 또는 씨네밀리탕트일 것이다. 68년 혁명 당시 씨네마떼끄 프랑세즈를 지켜낸 누벨바거들이 그들일 것이다.

 

- 한때의 적멸이 스친다. 등언저리가 서늘하다. 여기는 도저한 실재의 난만지대. 난 순간순간 스스로를 잡았다가 놓치기를 반복한다. 포르트다포르트다포르트다...

 

- '非'인가 '反'인가? 하긴 회의론은 스스로에 모순된다. 하지만 회의론이 스스로에게 진리를 요구하지 않는 순간 그것은 진리의 유령, 그것의 도플갱어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의 디오니소스는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으며 다만 생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 생성이 '순진무구'한가?

 

- 이제 철학의 임무는 과학과 해석학을 조우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조우는 형이상학과 정치경제학과 자연과학이라는 삼위격 안으로 수렴되고 그로부터 발산할 것이다.

 

- 의미론의 연속된 두 층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층위는 천문학적 알레고리로 주로 설명되는 고도로 추상화된 층위(형이상학)이고 둘째는 주로 기계적 역설을 횡단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극사실적인 층위(예술)다. 이 두 층위의 극단적 스팩트럼으로 갈수록 개념과 이념은 점점 더 희박해진 공기 속에서 탄생하며 외연은 뚜렷해지는 대신 내포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개별성이 보편성보다 앞서는 것이다(이 방면에서 예술과 철학은 구분되지 않는다). 상식(doxa)은 이 두 층위의 혼효면 위에 서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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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할 것인가? 권력이 권능을 멸시하고, 거기에 봉사하기보다 자신의 위세에 나르시시즘적으로 집착하기 시작한다면 말이다. 만약 이 권력이 그 나르시시즘으로 인해 파쇼화되고 권능의 외침을 정치적으로 '고립'시킴으로써 다중 낱낱이 서로 무관한 듯이 취급한다면 말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단결은 아니고 공명이 이루어지려면 여기서 어떤 전술이 필요할 것인가? 절대적 폭력을 동원해 권력을 단두대로 이끌 것인가, 아니면 권력을 똑같이 멸시하는 방법을 통해, 권력 스스로가 자신의 노예적 신분을 깨닫도록 할 것인가? 혹은 이대로 멸시와 모멸을 감내하면서 노예의 가면을 마다하지 않으며, 삶을 소모할 것인가?      

- 좌파 진영 내의 중도파를 알기 위해서는 당연히 백낙청과 최장집을 읽어야 한다. 이들이 어떤 행보를 보이느냐, 어떤 책을 내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진영의 형세가 변동하기 때문이다. 최근 백낙청이 [어디가 중도이며, 어째서 변혁인가]를 냈고, 최장집은 [민중에서 시민으로]를 냈다. 제목만 봐도 내용이 어떠할 지 윤곽이 잡히는 바다. 어떻게 하면 이들을 효과적으로 비판하고 넘어설 수 있을까? 이것이 좌파내 급진 진영의 또 하나의 과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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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6시 수원터미널. 틀어 놓은 티비 두 대에서 각기 다른 방송국의 각기 다른 애국가가 나온다. 터미널 안이 온통 왕왕 울린다. 밖은 짙은 안개가 이미 점령했다. 안개를 뚫고 그 옛날 박정희의 탱크가 불쑥 포신을 내밀 것 같다. 심상치 않은 수원의 새벽이다. 난 광주로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해 말이다. 박정희 따위는 발톱에 때만한 가치도 없지 않은가? 사랑은 역사보다 더 오래 되었고, 역사보다 더 훌륭하니까.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동선이 점점 활발해진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들, 좌측 옆구리에에서 불빛이 흘러 나온다. 6시 9분. 이제 날이 훤하다.

 

- 사람 사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다. 그것이 깨지면 그 이상의 '연대'도 '협력'도 불가능하다. 이명박을 봐라. 어째서 국민 대다수가 그에게 마음으로 협력하지 않는지를. 도덕적인 잣대를 들이대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건 그저 평범한 사람살이의 규칙이지만,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는 걸 말하고 싶은 거다. 요즘 들어 한 가지 일 때문에 자꾸 '신뢰'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혹시 나도 또한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한 적은 없는가, 또는 나도 모르게 신뢰를 저버린 적은 없는가, 자꾸 묻게 된다. 한 번 신뢰가 깎이면 돌이킬 수 없다. 이후로 신뢰에 관련되었던 그 누구도 그를 완전히 믿지 않을 것이다.

 

- 이제 글을 거두어들일 때다. 한동안 외부에 글을 쓰는 것을 줄여야 하겠다.  

 

- 논쟁적 서평쓰기가 거쳐야 할 것들: 원전대조→발췌→다른 서평 참고→사전숙고→쓰기

 

- 나는 ‘다른’ 글을 쓰고 싶은 거다. 섬 바위에 새기는 외딴 글. 그러나 날빛 글.

 

- 새벽 2시. 혼곤한 정신이다. 머리 속에 N극만 있는 자석 덩어리가 해마 근처에 떡하니 버티고 앉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풀벌레  소리가 온 동네에 왕왕 울린다. 멀쩡하게 버틸 수 있을까?

 

-강의준비: 강의교재검토->2차자료검토(프랑스철학+강영안)

 

- 흐린 날, 라디오에서 나오는 피아노는 Listz일까? 낯익다. 감사 때문에 상태가 영 좋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어서 이 기간이 좀 갔으면 싶다. 아무리 그래도 연구실에 하루 종일 앉아 있는 건 그리 좋은 게 아닌 듯 싶다. 어쨌든 내 시간이 충분히 있어야 하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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