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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어떤 이야기들이 나올지 모두는 아닐지라도 일부 예상될 수 있다. 당시 내 거취에 관한 내용이 분명 다루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끔찍하다. H는 얼마나 집요한가. 이렇게 해서 끝까지 나를 괴롭힐 것인가? 단호하게 행동해야 한다. 피도 눈물도 없다는 말은 이럴 때 하는 말일 것이다.
분명하게 밝히자. 그리고 앞으로의 내 거취도 함께 그렇게 하자. 조직 내에서 더 이상 나 자신의 자유를 희생해서는 안 된다. 이제 난 혼자가 아니니 더 그렇다.
원한이 깊은 자를 대하기는 두렵다. 이 사람은 사태를 보는 눈이 멀어 있으므로, 사랑을 모른다. 분노는 무지에서부터 나오고 사랑은 이해에서 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 사람을 대할 때는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대개의 사람들이 이 사람과 같다는 사실이다.
원한이 깊은 자는 자신의 상처를 정당화하기 위해 타인의 고통을 필요로 한다. 그 고통이 곧 스스로의 상처가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 맹목, 이 어두운 본능. 감정은 상상력이 동요하는 그 순간 상상력의 에너지를 먹고 자란다. 지혜로 향하지 않고 죽음으로 향하는 상상력은 곧 원한이 될 것이다. 그 원한이 다시 상상력의 방향을 재정립할 것이고, 지혜와는 더 멀어진다.
어떻게 대할 것인가? 그의 원한이 타자의 고통을 수반한다는 그 사실을, 그리고 그 고통이 결코 자신의 상처보다 작지는 않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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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괴로워하는 사이에 사랑은 저 멀리 있다. 현격함. 또는 서러움.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이렇게 슬퍼한다. 내가 투쟁하는 그 지점에서 너는 저만치 떨어져 있고, 오히려 그것이 더 안전하다. 내가 원하는 것도 그것이다. 하지만 더러 이렇게 슬프다. 이런 경우 나는 어째서 홀로인가?
장안문 앞 카페. 어제부터 계속 비가 온다. 처서가 지났고, 폭염이 걷힐지도 모른다. 자꾸만 앞서가는 마음도 좀 갈앉힐 수있을 것인가? 어쨌든 삶의 위상은 내가 시시각각 생성되는 그 위도와 경도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다. 어떤 지점, 또는 아무 곳도 아닌 그 지점(erehwon)에서 나는 시작하고 또 어딘가에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과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지만 운명이 허용하는 한도(meson) 내에서 최소한의 조정은 가능하다. 삶이 하나의 평면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알 수 없는 많은 현실성의 선들과 실재의 운동이 조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평면과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자꾸만 그 평면을 초월하려는 이 정신적 과정과 평면에 긴박된 신체가 분리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그러한 분리를 가정하는 순간 삶은 오히려 허구적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초월성으로 이탈하려는 이 정신을 붙들어 매는 것, 또는 그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탈주시키는 것, 시시각각 첨예해지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매순간이 마치 셀룰로이드판처럼 바들거리며 진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긴장의 지속성, 속도와 질량의 차이들, 에네르기들의 교전, 따라서 삶은 내가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의 반복을, 그 심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다. 허무에의 적극적인 의지. 그 의지를 매순간 고양시키기. 단, 내재성의 평면에서.
장안문, 왕은 저 문을 통해 모든 정치적 암중모색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갔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그는 가끔 표면을 거닐기를 그만두고, 저렇게 심층으로 들어간 것이다. 삶은 점점 느려지고, 정신은 야릇한 공포와 더불어 죄책감을 덜어 내는 그 제의가 주는 편안함으로 팽팽하게 떨렸을것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심연은 곳곳에 있다. 저 문이 그곳으로 통하는 문 중 하나라면, 왕은 진정한 승부처에 도달한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 분신과의 싸움, 마조히스틱한 쾌락, 그 에너지를 임계점까지 끌어 올리면 어떤 열락에 도달할 것인가? 죽음 충동을 넘어 생성 자체가 되는 그 쾌락 말이다.
첨삭할 거리가 쌓여있다. 동녘에서 부탁한 원고교정도 밀려 있다. 번역을 몇일 째 못하고 있다. 방송대에 보낼 우편과 우리 카페 일도 밀려 있다. 무엇보다 논문 준비를 못하고 있다.
많은 일들이 이리저리 흩어져 있다. 하나하나 해나가야 하리라. 하지만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생각하다보면 가슴께가 좀 묵직해진다. 바쁜 날들이다. 중심. 이 중심을 천천히 걷는 것. 그것이 필요하다. 중심을 천천히 되도록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기. 천천히, 보다 천천히.
비가 온다. 오랜만에 산책하기로 한 계획을 접는다. 오래동안 비가 오면 우발성이 필연성이 되는 것일까? 시간의 작은 단위 안에 빗방울이 하나씩 떨어지는 것은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이 많은 빗방울들이 낙하하는 그 점 안에 어떤 필연성이 있을 것인가? 이를테면 이러한 우발성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계획을 추진한다면, 그것은 의지의 자발성이 만들어내는 필연일 것이다. 실재(reality) 안에서 빗방울들은 일종의 법칙처럼 움직이지만, 현실(現實) 안에서 그것들은 완연한 우발성이다. 그렇다면 '나'는 실재하는 것이긴 하지만 현실은 아닐 것이다.
이 부분, 바로 이 방면에서 나는 사유를 진행하고 있다. 현실성과 실재성. 실재하지만 현실은 아닌 것, 또는 그 역. 도대체 현실은 실재성의 운동으로부터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일까? 나는 지금 이 두 범주의 차이를 말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확증되는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도대체 아리스토텔레스가 최초로 완전태를 이야기했을 때 그것은 실재인가 현실인가? 프로이트가 실재(현실?)에 대해 이야기 했을 때 그것은 과연 이념의 혼동은 아니었을까?
다시 빗방울이다. 개체로서의 빗방울들, 하지만 하나의 무한집합으로서의 빗방울들. 전체가 개별적인 것들의 총합 이상이라면 이 빗방울들은 실재 이상일 것이다. 그러나 '무한'이 되어서야 하나의 현실이 되는 이 비선형적인 운동들은 어디에서 비약을 이루는 것인가? 실재로부터 현실로, 또는 개별로부터 무한으로. 아니면 그것은 연속적인 어떤 것인가? 베르그송인가, 라이프니츠인가?
심상한 질투심, 혹은 적의라고 할까? 어쩌면 이것은 나 자신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인지도 모른다. 사실상 이 감정은 철학적으로는 무용하다. 문학적 잔영들. 감정이란 애초에 상상으로부터 나오며 그 방향이 내성을 향하느냐, 바깥을 향하느냐에 따라 어떤 질적인 변화를 노정한다. 질투는 바깥을 향할때 힘이 되지만, 내성을 갉아 먹기 시작할 때 문제가 된다.
초연해지는 것, 그래서 내성의 명징함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은 항상 철학적 태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철학하기는 그래서 지혜 외에는 어떤 것에도 매달리지 않는 것이다.
이사를 마치고 팔달문 앞 '할리스'에 잠시 앉았다. 오늘 강선생님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점심 나절이면 끝날 것 같던 이사가 오후 늦게야 끝났기 때문이다.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그래도 흔쾌하신 것 같았다. 다른 동학들이 그 분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H는 전화를 받자마자 문자에 답하지 않아 서운한 듯이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은 내 질문을 잊지 않고 계셨다. 그게 중요하리라.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가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내 질문, 그리고 서양철학 전통 안에 실재성과 다른 현실성이 존재하는가, 라는 두 번째 질문. 몇 주 전부터 나를 이끄는 이 질문에 선생님은 한 번 계속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러한 구별도 서양철학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귀뜸해 주셨다. 하지만 짧은 통화 내용으로는 그 근거에 대해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난 선생님의 첫번째 답변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좀 더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아무튼 최근은 '은둔'의 사유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렇다고 현실로부터 물러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사유 자체의 '물러남'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향은 심층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허공을 가리키는 것일까? 지금은 가늠이 안 된다. 더 생각해 볼 밖에.
이것저것 번쇄한 관념들을 하나로 모아 가는 과정이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 경향은 내 정신이 내 생활과는 관련 없이 의지를 몰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중하고자 하는 이 의지, 이제 불혹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이 의지는 내 철학적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묵묵히 걸어가 보는 거다. 아무도 이 길 위에 나와 더불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나 혼자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곧 보편의 인격, 또는 득실대는 자연의 호명을, 그리고 이 도시의 충만한 부재, 다시 말해 모든 것과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범신론도 아니고, 과대망상도 아니다. 다만 내 신체와 정신이 걸러내는 세계의 파편들을 나의 의지, 곧 '정신의 시중을 받는 의지'(자코토)가 가감 없이 철학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표식이다. 이 표식을 언제든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철학적 기분 속에서 삶과 텍스트 모두에 향기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과연 어떤 우발성이 내 정신에 가해질 것인가? 나는 매일매일이 하나의 사건 속에 있는 무수한 사건'들'처럼 나 자신을 다룬다.
어쨌든 현실은존재하는 것들의 조우과 교전이며, 나는 그 틈새에서 실존할 수밖에 없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간격을 나의 것으로 올곧게 전유하는 것. 사실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일어나는 고민들은 완전히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회피할 것인가? 습관성의 도피. 이것은 가볍게 뛰어 넘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매순간 그러한 극복의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간격에 대한 습성이 교정되고 나면, 이제 권태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사물들, 사람들, 그리고 그 관계성의 총체들. 나는 이 모든 것들을 다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지식이란, 또는 나아가 지혜란 무용지물이다. 무용지물에 대한 사랑. 그것이 철학이고, 철학을 하는 삶이기 때문에 인식 안에는 필연적으로 '덧없는 것들에 대한 회한'이 존재한다. 하긴 스피노자도 이러한 덧없음으로부터 철학을 시작했지 않은가? 간격(또는 괴리), 권태, 그리고 덧없음. 철학을 한다는 것은 이 세 가지 복합적인 삶의 범주들을 똑바로 마주 대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땅에 발을 디디고 하늘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그 반대로 땅에 발을 디디고 심층을 가리킬 수 있을 것인가?
내가 겨냥하는 것들은 매우 높거나, 아니면 매우 낮다. 높을수록 가 닿을 수 없고, 낮을수록 팽팽한 긴장이 느껴진다. 현실성, 그리고 하나의 관념. 실천과 페시미즘. 돌연 내가 하는 모든 행위들이 돌이킬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있다고 느껴질때 그리고 그것이 시간의 순환 과정에서 임계지점, 나선의 출발지점에 와 있다고 느껴질때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가 나를 가르치는 도제기간은 영원히 도래하는 것이지 한 점 안에 응축되거나, 중심에서 발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생성의 과정이기에 한 번도 나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한 번도 내 것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내 것이 아닌 사랑들아'(기형도). 그렇기 때문에 회피가 아니라 뒤로 물러 나는 것 이 필요하다. 물러나는 것, 매 순간 이러한 은둔을 적극적으로 행하는 것, 그것이 교전의 전략이다.
어제 이사하고 죽은 듯이 10시간 정도를 잤다. 새로 옮긴 집은 그전보다 새 집은 아니지만, 더 넓다. 우리 새 보금자리, 그리고 가끔 가족들이 와서 쉴 공간이 생긴 게다. 베란다 창과 안방 창으로는 뒷 마당 감나무와 은행나무가 흔들거리며 인사한다. 가끔 새도 지저귀고 말이다. 그녀가 좋아하는 풍경. 난 나무 가지 틈 사이로 슬쩍슬쩍 속살을 보이는 하늘에다 대고 기도했다. 이 보금자리에서 우리 가족들이 행복해질 수 있길.
다음 주에는그녀의 짐이 도착한다. 어머님과 아버님도 오실 것이다.완전히 마음에 들진 않으시더라도, 마음으로 안심하셨으면 좋을 것이다. 이 집에서 삶이 다만 평화롭고, 아늑하고, 기쁘기를.
어쨌든 나 자신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시기다. 아니, 앞으로 남은 생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의 집중점, 고정점이 생기는 것, 그리고 어디로 가든 그 고정점 주변에서 또는 그 점과 더불어 움직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하고도 귀하다. 집중! 집중! 집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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