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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4

  • 등록일
    2010/08/24 12:18
  • 수정일
    2010/08/27 00:23

장안문

 

장안문 앞 카페. 어제부터 계속 비가 온다. 처서가 지났고, 폭염이 걷힐지도 모른다. 자꾸만 앞서가는 마음도 좀 갈앉힐 수있을 것인가? 어쨌든 삶의 위상은 내가 시시각각 생성되는 그 위도와 경도를 통과하면서 만들어진다. 어떤 지점, 또는 아무 곳도 아닌 그 지점(erehwon)에서 나는 시작하고 또 어딘가에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릴 것이다. 이 과정을 완전히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하지만 운명이 허용하는 한도(meson) 내에서 최소한의 조정은 가능하다. 삶이 하나의 평면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알 수 없는 많은 현실성의 선들과 실재의 운동이 조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 평면과 운동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듯이, 자꾸만 그 평면을 초월하려는 이 정신적 과정과 평면에 긴박된 신체가 분리된 것도 아니다. 사실은 그러한 분리를 가정하는 순간 삶은 오히려 허구적인 어떤 것이 될 것이다. 초월성으로 이탈하려는 이 정신을 붙들어 매는 것, 또는 그것을 내재성의 평면으로 탈주시키는 것, 시시각각 첨예해지는 것은 이런 것이다. 그래서 일상의 매순간이 마치 셀룰로이드판처럼 바들거리며 진동하는 것은 당연하다. 이 긴장의 지속성, 속도와 질량의 차이들, 에네르기들의 교전, 따라서 삶은 내가 어느 순간 느낄 수 있는 안정감을 부여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의 반복을, 그 심연을 받아들이는 것이 편안하다. 허무에의 적극적인 의지. 그 의지를 매순간 고양시키기. 단, 내재성의 평면에서.

 

장안문, 왕은 저 문을 통해 모든 정치적 암중모색의 속도를 조절하면서 자신의 아버지를 향해 천천히 걸어 갔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또 정신적으로도 그는 가끔 표면을 거닐기를 그만두고, 저렇게 심층으로 들어간 것이다. 삶은 점점 느려지고, 정신은 야릇한 공포와 더불어 죄책감을 덜어 내는 그 제의가 주는 편안함으로 팽팽하게 떨렸을것이다. 그때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심연은 곳곳에 있다. 저 문이 그곳으로 통하는 문 중 하나라면, 왕은 진정한 승부처에 도달한 것이다. 나와 또 다른 나, 분신과의 싸움, 마조히스틱한 쾌락, 그 에너지를 임계점까지 끌어 올리면 어떤 열락에 도달할 것인가? 죽음 충동을 넘어 생성 자체가 되는 그 쾌락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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