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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2

  • 등록일
    2010/08/12 19:55
  • 수정일
    2010/08/30 12:35

이사를 마치고 팔달문 앞 '할리스'에 잠시 앉았다. 오늘 강선생님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점심 나절이면 끝날 것 같던 이사가 오후 늦게야 끝났기 때문이다. 가지 못할 것 같다는 내 말에 선생님은 그래도 흔쾌하신 것 같았다. 다른 동학들이 그 분 주위에 있었기 때문이리라. H는 전화를 받자마자 문자에 답하지 않아 서운한 듯이 말했다. 어쨌든 선생님은 내 질문을 잊지 않고 계셨다. 그게 중요하리라.

 

진리(truth)가 아니라 실재(reality)가 중요하지 않은가,라는 내 질문, 그리고 서양철학 전통 안에 실재성과 다른 현실성이 존재하는가, 라는 두 번째 질문. 몇 주 전부터 나를 이끄는 이 질문에 선생님은 한 번 계속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리고 뒤이어 그러한 구별도 서양철학 전통 속에 존재한다고 귀뜸해 주셨다. 하지만 짧은 통화 내용으로는 그 근거에 대해 짐작하기는 어려웠다. 난 선생님의 첫번째 답변에 방점을 찍기로 했다. 좀 더 생각해 보는 것 말이다. 

 

아무튼 최근은 '은둔'의 사유가 시작된 시점이다. 그렇다고 현실로부터 물러나지는 않는다. 그럴 수도 없다. 사유 자체의 '물러남'이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방향은 심층을 가리키는 것일까, 아니면 허공을 가리키는 것일까? 지금은 가늠이 안 된다. 더 생각해 볼 밖에.

 

이것저것 번쇄한 관념들을 하나로 모아 가는 과정이라는 건 분명하다. 내가 의도했든 하지 않았든 이 경향은 내 정신이 내 생활과는 관련 없이 의지를 몰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중하고자 하는 이 의지, 이제 불혹을 바라보면서 생기는 이 의지는 내 철학적 삶에 어떤 흔적을 남길 것인가? 묵묵히 걸어가 보는 거다. 아무도 이 길 위에 나와 더불어 있지 않으며, 그렇다고 나 혼자인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없다는 것은 곧 보편의 인격, 또는 득실대는 자연의 호명을, 그리고 이 도시의 충만한 부재, 다시 말해 모든 것과 함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떤 범신론도 아니고, 과대망상도 아니다. 다만 내 신체와 정신이 걸러내는 세계의 파편들을 나의 의지, 곧 '정신의 시중을 받는 의지'(자코토)가 가감 없이 철학으로 전환시키고 있다는 표식이다. 이 표식을 언제든 느끼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철학적 기분 속에서 삶과 텍스트 모두에 향기를 부여하는 것, 그것이 지금은 중요하다. 과연 어떤 우발성이 내 정신에 가해질 것인가? 나는 매일매일이 하나의 사건 속에 있는 무수한 사건'들'처럼 나 자신을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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