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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9

  • 등록일
    2010/09/09 17:06
  • 수정일
    2010/09/09 17:06

구름이 검게 내려 앉았다. 길을 걸을 때마다 구름 뭉치들이 발에 툭, 툭, 차였다. 마흔이 다 되어 가도록 길바닥에 이렇게 많은 구름들이 있는 줄 몰랐다.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비가 내렸는데, 이제는 길바닥으로 물이 흐른다. 탱탱하게 부풀어 오른 저 성기들. 두둥실, 떠 올랐다가 내 면전에서 팡팡 터진다. 저렇게 죽어 가는 것들이 도처에서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들'이 있었다. '그들'은 저렇게 죽어 가는 검은 구름 떼들 중 아직 살아 있는 족속이다. 나는 그 족속들 틈에서 귀도 막지 않고, 눈자위 근육을 파르르 떨면서 응시한다.  모두들 산책에 나선 것일까. 가방안에서 또 다른 구름뭉치들이 나오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그들'은 어째서 자꾸만 세계가 아닌 방향으로만 흐르고, 탈주하는 것일까.

 

깃발, 그 밑을 수평으로 놓인 노점들. 그 중 무엇이라도 쓸모 있다면 내버려 두어라. 깃발이 나부낄 때마다 저기 펼쳐진 구름의 잔여물들이 흔들린다. 티비 화면의 노이즈처럼, 이제 저들은 영원히 잊혀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평평한 지구, 평평한 관계, 평평한 사랑, 평평한 두려움과 평평한 불안, 평평한 섹스와 교육과 학문과 시와 열정들. 너무 무거운 가방 속에 들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이렇게 납작해 지는 것이다. 사라지는 그날까지 '그들'은 납작해지고, 또 납작해져서 거의 종잇장처럼 될 것이다. 창백하게 떨면서 엔트로피를 증가시키면서 말이다. 떨면서 견뎌 나가는 '그들'. 나는 납작해지지 않으려고 지금껏 살아 온 것일까. 아니면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너무 많다. 보르헤스의 퓨네스처럼 너무 많은 기억을 갖고 사는 것도 멍청하지만 너무 많은 것을 잊고 사는 것은 백치와 같다. 혹시 망각은 치유제가 아니라 서서히 미쳐가게 하는 어떤 전진성 질환인지도 모른다. 그 어떤 약도 소용 없는 그런 것 말이다. 때로 기억하는 것처럼 떠들어 대도 그건 스스로를 속이는 짓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래서 미치기 전에 죽기를 바라는 지도 모른다. 저렇듯 노인은 전 생애의 기억을 둥근 등 안에 숨기고 걸어 가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지나가는 저 여자는 더 이상 기억 하기 싫은 그 남자를 밟고 죽음을 향해 걸어 가는 것이다.

 

커피로 샤워를 한다면, 하루 종일 몸에서 나는 커피향을 맡으며 관에 들어 갈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다음날 깨어나도 그 향기가 남아 있기를 바라며 잠옷에 붙은 솔기를 떼어 내면서 고요하게 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은 구름들 때문에 너무나 거추장스러웠습니다. 마구 달려 오는 '그들' 때문에 세계가 더 이상 당신의 것이 아닌 줄로만 알았습니다. 혹시 그런가요? 이 세계는 '그들'의 것인가요? 제게 이 의심을 없애 주시고 내일은 구름들이 조금만 제 발에 채일 수 있도록 제 발을 개미 더듬이처럼 만들어 주십시오. 아니 아니 거대한 더듬이로 만들어 주십시오. 하나님, 사지와 머리는 필요 없나이다. 오로지 제 존재 전체가 하나의 더듬이가 되도록 해 주십시오. 번개가 칠때마다 또는 바람이 불 때마다 더듬이의 신경들이 온전히 반응하며 찌르륵 찌륵 탱탱해 지도록. 내가 당신 안에 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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