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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8/03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redbrigade

[유동하는 공포], 지그문트 바우만

  • 등록일
    2009/08/03 23:00
  • 수정일
    2009/08/03 23:00

 

독서노트를 정리하고, 영어판으로 미심쩍은 구절들이나 중요한 구절들을 확인해 보려고 했는데, 시간이 많이 지나 버렸다. 그동안 새로 해야  할 일도 쌓였고 ... . 이 책에 대한 서평을 쓸 시기도 지난 것 같다. 한 가지 말하고 싶은 것은 바우만의 '공포'라는 것이 대체 실체가 없기 때문에 해결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닐 것인데, 책을 덮고서도 그 기분 나쁘고  끈적한 페시미즘의 촉감이 계속 느껴지는 건 상당히섬뜩하다는 것만 말해 두고 싶다. 

 

세상이 악몽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책에서까지 그걸 전후좌우로 반복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싶은 거다. 하지만 실존적 문제의식을 이끌고 가는 사유의 힘에는 박수를 짝짝짝!! 

 

Zygmunt Bauman, Liquid Fear, 한규진 옮김, 산책자, 2009

 

서론 - 공포는 어디에서 와 어떻게 움직이는가

 

1.죽음의 공포

2.악과 공포

3.통제 불가능한 것과 공포

4.글로벌 공포

5.유동적 공포

 

감정적 결론 - 공포에 맞서 무엇을 할 것인가

 

원주와 참고문헌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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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공포가 가장 무서울 때는 그것이 불분명할 때, 위치가 불확정할 때, 형태가 불확실할 때, 포착이 불가능할 때, 이리저리 유동하며, 종적도 원인도 불가해할 때다. 어떤 규[12]칙성도 합리적 이유도 없는 공포, 그 낌새가 여기저기서 선뜻선뜻 나타나지만, 결코 통째로 드러나지는 않는 공포야말로 가장 무시무시하다. ‘공포’란 곧 불확실하다는 것이다. 위협의 정체를 모른다는 것, 그래서 그것에 대처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13]‘파생적 공포’란 계속해서 마음을 구획하는 프레임으로서, 자신이 위험에 빠지기 쉽다고 느끼는 감각이라고 보면 된다. 말하자면 불안의 감각 - 세상은 위험으로 가득 차 있고, 언제 어디서 뭐가 덮칠지 모르다는 느낌 - , 취약함의 감각 - 위험이 닥쳤을 때, 막을 방법이 거의 없거나 아예 없을 것 같은 느김. 여기서 취약함이란 실제 위협의 크기나 성격보다는 자신의 방어 수단을 믿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 이랄까. 그런 불안과 취약함의 감각을 세계관 속에 짜 넣고 만 사람이라면, 실제 위협이 없을 때[14]조차, 위험에 직접 맞닥뜨렸을 때에나 보일 반응을 보이게 될 것이다. ‘파생적 공포’는 자가 발전하는 공포다.

 

[15]더 무서운 사실은 공포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다. 공포는 어디서나 새어든다.

 

[17]다른 모든 인간 공생의 형태가 그렇듯, 우리의 유동적 근대사회 역시 삶을 공포와 더불어 살 만하게 만들기 위한 고안물이다. 달리 말해 위험에 대한 두려움을 무장해제하고 항복시킬 수 있는 듯한 고안물이자, 그런 공포를 낳는 위험이란 효과적으로 예장되기만 한다면 사회질서를 뒤흔들 수 없다며, 아니면 뒤흔들 수 없어야 한[18]다며 공포에 침묵을 명령하는 고안물이다.

 

[23]우리는 이처럼 방심하기에는 너무 가까이 다가왔고, 더 이상 눈을 돌릴 수 없게 된 위험에 임해서도 교묘하게 옆으로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낸다. 그 존재를 받아들이되, ‘리스크’라고 여기는 것이다. / … [24]우리는 또한 ‘예상 밖’의 결과가 있을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치밀한 계산을 했으나 그래도 예상을 뛰어넘는 뜻밖의 결과를 얻을 수도 있다면서. … 리스크란 우리가 계산할 수 있는 - 또는 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 위험이다. 계산 가능한 위험을 리스크라고 한다. 일단 그렇게 규정되고 나면, 리스크는 확실함 - 가깝게도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던 - 보다 겨우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 된다. … [25]하지만 위험에서 리스크로 주의를 돌리는 일은 종종 하나의 속임수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난다. 안전한 행동을 위한 조치가 아니라 문제를 회피하려고만 했던 것으로. … [26]정신 없이 리스크를 계산하며 매우 무시무시한 걱정거리를 옆으로 밀어버리고, 그런 식으로 우리가 도저히 막아낼 수 없는, 따라서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재난에서 주의를 돌릴 수 있다. … 덕분에 우리는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며, 악몽이나 불면증을 저만치 떨어뜨려 둔다. 하지만 우리가 실제로 더 안전해지지는 않는다. / 위험이 덜 현실적으로 되지도 않는다.

 

[35]‘타이타닉 신드롬’은 문명의 ‘종잇장처럼 얇은 외피’를 뚫고 ‘문명화된 삶의 기본 요소들’ - ‘문명화’, 곧 ‘조직화’된 삶의 요소다. 즉 정규적이고, 예측 가능하고, 균형이 잡혀 있고, 일정한 행동 방식을 지시하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 이 여지없이 제거된 무의 한복판으로 떨어지는 것에 대한 공포다. 그것은 혼자만의 추락, 또는 여럿이 함께 하는 추락이겠지만, 어떤 경우에든 ‘삶의 기본 요소들’이 끊임없이 공급되고 믿을 만한 의지처가 존재하는 세계로부터 추방되는 것이다.

 

[49]오늘날의 <빅브라더>는 그 이름을 따온 조지 오웰의 빅브라더처럼 사람들을 안에 가둬두고 줄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들을 밖으로 쫓아내고, 쫓아낸 사람은 쫓아낼 만하며 절대로 다시 돌아올 수 없음을 강조한다.

 

[55]모든 교훈담은 공포의 증폭을 통해 효과를 낸다. 하지만 고전 교훈담이 구원을 포함했다면 - 공포에는 결국 해결책이 뒤따르며, 공포를 유발하는 위협을 피할 방법이 있고, 따라서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결말로 이어진다 - 우리 시대의 ‘교훈담’은 잔인무도하다고 할 수 있다. 아무런 구원의 약속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

 

[57]죽음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어떤 다른 성질과도 비교가 안 되는 성질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른 모든 성질을 침묵하게 하는 성질. 우리가 겪어서 아는, 또는 들어서 아는 모든 사건은 과거가 있듯 미래도 있다. 죽음만이 예외다. 모든 사건은 하나의 약속을 포함한다. … 죽음만이 예외다. 죽음에는 단지 하나의 문장만 따라붙는다. “모든 희망을 버려라”

 

[59]모든 인간의 문화란, 죽음에 대한 의식 속에서도 삶을 활기 있게 하도록 고안된 교묘한 장치로 해독될 수 있다.

 

[60]메멘토 모리 - memento mori - , “죽음을 기억하라”는 경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한 주장에 따라붙곤 한다. 그것이야말로 죽음의 임박성이 주는 효과를 억제하고자, 그것에 충분히 맞서 싸울 수 있다는 인식을 주려 애쓴 증거다. 그런 주장이 귀에 들어오고, 그 주장에 몰입하고, 믿어버리고 나면,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더 이상 잊으려 애쓸 - 언제나 잊을 수 없게 마련이지만 - 필요가 없어진다.

 

[75]약해진 독이 언제 어디서나 넘치기 때문에, 죽음의 공포는 차라리 압도적인 박력으로 닥쳐들지 않는다. 그 소름끼치는 악몽으로 사람의 혼을 짓누르지 않는다. 죽음의 공포는 너무도 평범한 것이 되어, 삶을 마비시킬 지경에 이르지는 않는다. / 그러므로 죽음의 평범성은 죽음의 해체와 손잡고 나타난다. 죽음의 해체는 죽음의 평범화를 필연적으로,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죽음의 순전하고 궁극적인 공포와 맞서는 일을 피하려는 희망에서 비롯된 해체 과정이 하나의 저항 불가능한 도전을 다수의 평범하고 근본적으로 해결 가능한 과제들로 바꾼다면, ‘죽음과 함께 살아가기’를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려는 희망에 따른 평범화 과정은 그런 맞섬 자체를 흔해빠지고 거의 매일처럼 일어나는 일로 바꾸어 버린다. 평범화는 죽음을 일시적인 경험으로 만든다. 본질적으로 삶과는 맞닿을 수 없는 죽음을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 엮어 넣음으로서. 인생을 끊임없는 죽음의 예행연습으로 바꿈으로써, 그리고 그처럼 죽음을 친숙하게 해, 누구나 ‘종말’에 익숙해지고, ‘절대적인 피안’으로서의 죽음이, 완전하고 완벽한 불가사의로서의 죽음의 의미가 희석되기를 꾀함으로써.

 

[77]그러므로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죽음, ‘그대’의 죽음, ‘3인칭’이 아닌 ‘2인칭’의 소멸, 내게 가깝고 내가 아끼는 사람의 상실, 나의 삶과 한데 얽혀 있는 사람의 영원한 부재만이 ‘특별한 철학적 경험’으로 이어진다. 그런 죽음은 내게 죽음의 종말성을, 회복 불가능성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86]우리는 ‘죽음의 임박함을 인식하고 살아가기’라는 상황에서 활기차게 살기 위한 세 가지 전략을 대략 훑어보았다. 첫 번째는 유한한 삶과 영원 사이에 다리를 세우는 것이었다. 죽음을 모든 끝의 끝으로 보는 대신, 새로운 시작 - 영원한 삶의 - 으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두 번째 전략은 주의를 - 또한 고민을 - 죽음 자체 - 보편적이고 불가피한 사건인 -에서 돌리고, 대신 죽음의 구체적인 ‘원인’들 - 무력화하거나 저항할 수 있는 - 에 주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은유적 예행연습’을 통해 ‘절대적[87]이고’ ‘궁극적이며’ ‘회복 불가능하고’ ‘결코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종말성, 그 소름끼치는 진실을 희석시키는 것이었다.

 

[89]공적인 이미지에 뿌리내리고 나면, 기표는 그 원래 기의에서 분리되어 유동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유동하는 기표는 은유적, 또는 환유적으로 무한히 다양한 기의들과 접속할 수 있다. /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특별한 기표, 즉 ‘죽음’은 이런 식으로 독특하고 기이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이유는 우선 그것은 이중으로 체현된다. 죽음의 임박성은 삶을 원초적 공포로 찌들게 한다. ... 그러나 이는 다른 한편으로, 적어도 잠재적으로는 매우 강력한 삶의 촉진제가 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삶에 거대한 중요성을 부여한다. ... 그리고 동시에 그 삶의 의미를 빼앗아간다. 그 놀라운 잠재력은 질서를 재편성하고 무너뜨리기를 꾀하는 모든 세력들이 노린다. 따라서 그것은 온갖 목적[90]을 위해 활용되고 조작된다.

 

[95]공포와 악은 샴쌍둥이다. 어느 하나와 만난다면 다른 하나와도 만나게 된다. 아니면, 이 둘은 하나의 경험을 두 가지로 부르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에 이름을 붙인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느끼는 것에 이름 붙인 것이다. 하나는 ‘저기 저곳’, 즉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며, 다른 하나는 ‘여기 이곳’, 즉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 그것이 악이며, 우리가 악하다고 여기는 것, 그것이 두려운 것이다.

 

[96]이 때문에 그토록 많은 철학자들이 악이 존재하는 이유를 설명하려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그리고 단지 사실을 천명하는 것에 만족했다. 그것은 바로 ‘원초적 사실’로서, ‘악은 존재한다’이다. ... 이해 가능한 세계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은 악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할 때 불거지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설명자 - explanans, 설명을 해 주는 것 -를 찾으려는 절망적인 노력 끝에 악이라는 관념에 기대고는 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 대상 - emplanandum, 설명을 필요로 하는 대상 - 의 위치에 두[97]려면 인간 이성은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103]“리스본은 세계가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다른 인간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보여주었다. 자연을 인간과 분리하는 것이 근대화 프로젝트의 일부였다면, 리스본과 아우슈비츠 사이의 거리는 그것을 얼마나 떨어트려 두기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 리스본이 전통적인 변신론이 더 이상 희망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었다면, 아우슈비츠는 그 변신론을 대신한 것도 하나같이 절망적임을 확인시켜 주었다.”(니먼, Neiman)

 

[109]인간이 만든 악은 이제 과거의 자연적 악 - 두 악은 선후배-동반자-선대와 후대 관계다 - 만큼이나 예측을 불허한다. ... 인간이 만든 악은 자연재해와 다를 것 없이 움직인다. 근대정신은 자연재해를 정복하겠노라 선언했고, 그렇게 했으며, 지[110]금도 하고, 앞으로도 하리라 하고 있건만.

 

[111]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 그런 특권을 안전히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준칙이 적용되거나 제시되어 그들과 다른 류의 사람들을 배제하는 데 쓰일 경우 - 그런 사람들이 무능하다거나 무가치하다거나 하는 관념을 [112]빌미로, 그 밖에 편리하게 써먹을 수는 있지만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논쟁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다 붙이며, - 근대적 이성은 별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지 않다. ... 지금껏 근대적 이성은 보편성보다 특권을 위해 봉사해 왔다. 어떤 보편성에 대한 꿈이 아[113]니라, 우위를 차지하려는 욕망 그리고 차지한 우위를 지키려는 목표가 근대적 이성을 발휘케 하는 주된 동기였으며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욕망과 목표에 이끌린 것이었다.

 

[114]그러나 더 큰 공포, 진정한 메타 공포meta-horror, 다른 모든 공포를 키워내는 인큐베이터와 같은 공포는, 하나의 깨달음에 있다. 그 깨달음이란 내가 이런 문장을 쓰는 동안이나 독자들이 이런 문장을 읽고 있는 동안에도 우리는 한결같이 마음 한구석에서 이러한 생각을 지워버리고 싶어한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때 우리는 악이 계속 모습을 숨기는 한편 ‘끓어 오르고 팽배해지도록’ 허용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한다. 그런 악의 가능성을 반박하고,, 단지 허풍일 뿐이라고 믿기를 거부함으로써, 또한 한나 아렌트가 아이히만의 재판에서 증언한 심리학자들의 보고서에서 찾아낸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계속 모른 체하거나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여섯명의 정신과 의사들은 그를 ‘정상’이라고 진단했다. 그중 한 사람은 ‘적어도 그를 진찰한 뒤의 내 정신 상태보다는 정상’이라고 했다. 그리고 나머지는 그의 전체적인 정신상태, 아내, 자식, 부모, 형제, 친구들에 대한 태도가 ‘정상일 뿐 아니라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밝혔다. 또한 최고법정이 항소심을 마칠 때까지 옥중의 아이히만을 정기적으로 방문했던 목사가 모두의 의견을 최종적으로 확인시켜 주었다. 그는 아이히만이 ‘긍정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했다.”

 

[119]유동적 근대를 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오히려 불안만 양산하고 있지만 말이다. 의심을 거둘 수 없고,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 [120]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바구니로는 안심이 안 되기 때문에, 새 바구니가 보일 때마다 달걀을 나눠 담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파트너쉽보다 ‘네트워크’에 더 많은 희망을 얻는데, 네트워크에서는 ‘나는 당신에게 충실하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고 받을 전화번호가 언제나 몇 개는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질적인 결핍을 양적으로 보충하려고 한다. ... 그러나 그런 안전 추구책의 성과를 되짚어 보면 좌절된 희망과 꺽여버린 기대가 즐비하게 떨어져 있음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길에 보이기로는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인간관계다.

 

[130]‘근대성’이란 오로지 계속적이고, 전면적이며, 강압적인 근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끝없이 새롭고 끝없이 연장되는 우회로 - 종종 지름길로 위장된다 -를 뚫는 일을 줄여 말한 것이다.

 

[132]모두가 카트리나가 오고 있음을 알았고, 대피소로 피하기에 충분한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 지시에 따라 행동할 수는 없었고, 달아날 수 있었을 시간을 활용할 수도 없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비행기를 잡아탈 돈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온 가족이 트럭에 올라 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어디로 갈 수 있었[133]을까? 모텔도 숙박료가 필요하고, 그런 돈을 내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잘 사는 사람들은 더 쉽게 집을 버리고, 재물을 포기하고, 살아남기 위해 도망칠 수 있었다. 그들의 재산은 보험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카트리나는 그들의 생명은 위협했어도 재산은 위협할 수 없었다. 반면 비행기 표 값이나 숙박료를 낼 수 없었던 사람들의 재산은, 비록 얼마 안 되는 재산이었지만, 치명적인 피해를 입었다. 아무도 그 손실을 보상해주지 않았다. 그들의 손실은 영영 회복 못할 손실이었고, 그중에는 그들이 평생 한 푼 두 푼 모은 예금도 포함되어 있었다. / 카트리나는 차별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 그러나 자연재해는 모든 희생자들에게 똑같이 ‘자연’스럽지 않았다. 허리케인 자체는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었지만, 허리케인의 결과는 분명 사람의 작품이었다.

 

[136]자연의 맹목적인 변덕스러움에 맞서 인간을 보호한다는 것이 근대 문명이 내놓은 핵심 공약이었다. 그러나 그 프로젝트를 근대에 실천할 때 자연을 덜 맹목적이고 덜 변덕스럽게 하는 일은 핵심이 아니었다. 대신 그 효과를 선택적으로 배분하는 일이 핵심이었다. 자연재해의 파괴력을 무력화해보려는 근대의 노력은 법질서 유지와 [137]경제발전의 패턴으로 이어졌다. 의도적이든 아니든, 이는 사람들을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부류와 가치가 없는 삶unwertes Leben으로 나누었다. 그 결과, 공포 또한 불균등하게 분배되었다. 그 어떤 이유의 공포라도 말이다.

 

[147]관료제의 이념형에 접근하려는 조직의 행동은 그 구성원들에게 아직 남아 있는 도덕적 양심과는 무관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 관료제는 그 과제의 집행자들에게서 집행 결과와 반향에 관한 책임을 면제하는 점에서도 두드러진다. 그것은 ‘…을 위한 책임’을 효과적으로 ‘…에 대한 책임’으로 바꿔버린다. 말하자면, 어떤 행동이 그 대상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한 책임을 상급자, 명령권자에 대한 책임으로 바꿔버린다. ... 따라서 모든 관료들은 아닐지라도 거의 대부분의 관료들은 자신에게 떨어지는 명령의 기원을 모호하게, ‘저기 위에서’라는 식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이것은 이중의 효과를 낸다. 첫째 - 한나 아렌트의 멋진 문구를 떠올려 보자 -, 책임의 ‘부동’(浮動)이다. 책임의 소재를 정확히 묻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지며 단지 실제적인 목적에서 ‘누구의 책임도 아니다’는 결론으로 몰리게 된다. 둘째, 이들 관료들이 따라야 할 명령은 절대적이고 저항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신의 명령’에 비해 결코 덜 강력하지 않다.

 

[150]소비 시장을 통해서는, 이른바 ‘기술 페티시즘’이 도덕 관련 결정을 적당한 상품의 선택으로 번역해버린다. 모든 도덕 관련 충동이 상품처럼 출하될 수 있다는 듯. 모든 윤리적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는 듯. 아니면 최소한 저 생명과학, 생명공학, 의약학 산업의 힘을 빌려 단순화되고 간소화될 수 있다는 듯. ‘윤리를 잠재우기’는 고요한 양심과 도덕적 눈멃이라는 상품들과 한데 묶여 패키지로 판매된다. / 도덕적 조건의 모호성과 도덕적 선택의 이중성에 임해 공포는 진정되지않는다. 반대로 정면대결을 피하고 기술적 과정에 집중한 결과 - 그런 과정은 도덕 행위자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과정이며, 통제는커녕 개입조차 할 수 없는 과정이다 - 확대되고 만다. ‘윤리의 수면제’를 손에 넣는 값은 윤리 문제에 대한 통제권을 ‘거대한 미지’의 영역엘 넘기는 것이다. 미지의 영역에서는 인간의 예측능력과 반격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재난이 만들어지고 있다.

 

[152]한편 우리가 취하는 행동은, 이따금 도덕적 고려와 충동에 따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가 당장 무엇을 쓸 수 있느냐에 따라 이루어진다. 우리 행동의 기동자(機動者, spiritus movens)로서, 원인(cause) 대신 의도(intention)가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 / 50년 전, 인간을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로 보는 근대적 관점에 근거한 베버의 ‘이해사회학’을 열렬히 추종했던 슈츠(Alfred Schütz)는 너무도 당연하다고 알려진 “... 때문에(because) 행동한다”는 도식을 자기기만이라고 파악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목적 추구적인 인간은 “... 하기 위해(in order to) 행동한다”라고 고쳐야만 정확할 것이라고 [153]주장했다. 그러나 지금 보면 정반대의 명령이 통용된다. 목적이란 윤리적 의미가 있는 목적이란, 갈수록 우리의 행동을 소급해 추인(ex post facto)하는 데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165]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어떤 행동의 효과가 너무 빠르게 확산되면서 정규화된 통제의 범위를 벗어나버리고, 행동을 합리적으로 설계하는 데 필요한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버린다. 우리가 사는 세계를 취약하게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확률로 일어나는 위험이다. 그것은 ‘리스크’ 개념이 보통 지시하는 현상과는 완전히 동떨어져 있다. 원칙적으로 계산 불가능한 위험은 원칙적으로 불규칙한 조건에서 발생한다.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사건들이 발생하고, 사건의 반복성이 낮으며, 어떤 정해진 법칙이 없다는 것이 법칙이 되는 세상에서 그것은 불확실성의 다른 이름이다.

 

[166]우리의 객관적 책임의 범위와 실제 책임을 수용, 가정, 실천하는 범위 사이의 간격은 지금 줄기는커녕 늘어나는 추세다. 후자가 전자의 범위를 포괄할 수 없는 주된 이유는, 뒤피의 말처럼, 종래는 규범적 책임 이론이 ‘의도’와 ‘동기’에 크게 의존함으로써 자기 규제적 의미가 컸는데, 그런 관점은 오늘날의 전 지구적인 상호[167]의존성 환경에서는 문제에 대처하기 부절절한 데가 있다. ... 고의적인 개인행동으로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부유한 나라의 이기적인 시민들이 자신들의 웰빙에만 전념하며 다른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것을 방치하는 것’ 사이의 차이는 갈수록 줄어들고, 갈수록 변명이 안 된다.

 

[168]유동적 근대의 모자이크 - 만화경에는 또 하나의 역설이 존재한다. 우리의 행동 수단과 자원이 성장할수록, 그리하여 더 먼 시, 공간까지 뻗어나갈 수 있게 될수록, 우리의 공포도 성장한다. 그런 수단과 자원이 우리가 보는 악을, 또한 아직 볼 수 없지만 결국 나타나고야 말 악을 대처하는 데 부적절하기 때문이다. ... 인류 역사상 최고의 기술 수준을 갖춘 세대는 불안과 무력감에 최고로 시달리는 세대이기도 하다. ... 우리는 [169]“분명 유례없이 안전한 세상에 살아간다.” 하지만 그러한 “객관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유례없이 위협을, 불안을, 공포를 느끼며 살고, 패닉에 빠지기 쉬우며, 안보와 관련된 것이면 뭐든지 민감하게 반응한다.

 

[171]그들은 잘라버릴 지휘선이랄 게 없었다. 제거한다면 하급자들이 혼란과 무력감에 빠질 고위층도 없었다. / 마크 데너의 의견으로는, “알카에다는 이제 알카에다주의가 되었다.”

 

[177]오늘날 테러리즘의 성격을 볼 때, 무엇보다도 그것이 ‘부정적 세계화’의 환경에서 진행됨을 볼 때,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개념부터가 자체 모순을 가질 수밖에 없다. / 영토를 침공하고 점령하던 시대에 고안되고 개발된 현대 무기 체계는 영토를 초월하고, 근본적으로 종잡을 수 없으며, 기동력이 탁월한 표적을 포착, 타격, 파괴하는 일에는 도무지 부적합하다. 그런 표적은 소수의 분대이든지 심지어 단 한 사람으로, 숨기기 쉬운 무기로 가볍게 무장하고 다닌다. 그들은 다른 테러 행위를 하러 이동하는 중에 포착하기가 극히 어렵고, 목표한 장소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사라져 버려, 그들이 누구인지 알아낼 단서도 거의 남기지 않는다.

 

[181]폭력대응은 테러가 꽃피는 토양에 거름을 줄 따름이며, 사회, 정치적 이슈의 근본적 해결책 시행을 방해하는 역할만 한다. 테러리즘이 쇠퇴하고 소멸되려면 그 사회, 정치적 뿌리가 근절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일련의 보복성 군사작전보다, 심지어 일련의 전면적인 경찰 행동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한다. / 테러와의 현실적인 전쟁은 이미 반쯤 파괴된 이라크나 아프카니스탄의 도시와 마을들을 더욱 철저히 파괴하는 식으로 수행되어서는 안 된다. 가난한 나라들의 빚을 탕감하고, 부유한 나라의 시장을 가난한 나라의 주요 상품에 개방하고, 지금 취학 기회를 전혀 얻지 못하고 있는 1억 1천 5백만 명의 아동이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하는 일, 그리고 이와 비슷한 행동들을 고안하고, 결의하고, 실행하는 일이 진정한 테러와의 전쟁 전법이다.

 

[202]악순환이다. 테러리즘이 위협은 또 다른 테러리즘을 부르고, 점[203]점 더 큰 테러로 몸집을 불려 수많은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테러리즘은 그 자체의 의도된 충격으로, 그러한 행동의 계획과 모의에 대한 염려로 그런 효과를 산출한다. 테러에 떠는 사람들이야말로 테러리스트들의 가장 믿을만한 동맹자라고 - 비록 자의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 부를 만하다. ‘한편으로 이해가 가는, 안전에 대한 욕망’은 언제고 누군가에게 교활하고 기민하게 악용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욕망은 이제 산발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해 보이는 테러 행위 때문에 한껏 부추겨지고 있으니, 결국에는 그 욕망이야말로 테러가 추진력을 얻는 기본 자신임이 밝혀질 것이다.

 

[205]국민국가라는 기계, 영토 주권을 지키도록, 또 내부자와 외부자를 뚜렷이 구분하도록 발명되고 훈련된 기계는 지구의 ‘인터넷 지구촌화’라는 예상 못한 상황에 부딪쳤다. 날이 갈수록, 테러 행위가 거듭될수록, 국가에서 운영하는 법질서 관련 기구들은 새로운 위험에 대처할 능력이 없음이 분명해지고 있다. 정통의, 존중되던 그리[206]고 겉으로만 그럴듯해 보이고 믿을 만해 보였던 여러 범주와 특질들이 무색해지고 있다.

 

[208]부정적 세계화의 힘 앞에 강제로 열린 사회에서 새어 나오는 권력과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 멀리, 서로 반대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 21세기에 우리가 마주칠 가능성이 매우 높은 문제점은 바로 권력과 정치가 다시 만나도록 해야 한다는, 실로 거대한 도전이다. 이 문제점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는 이번 세기의 최대 과제 중 하나가 되리라. 그리고 그것을 성공한다면 그만큼 대단한 위업도 없으리라. / 국민국가라는 집 안에서 헤어졌던 파트너를 재결합시키는 것은 그런 도전에 대한 가능한 대응책 중 가장 가망이 없는 것이다. 부정적으로 세계화된 세계에서, 모든 가장 근본적인 문제들 - 다른 모든 문제의 접근 기회와 방식을 제어하는, ‘메타 문제들’ - 은 세계적이며, 세계적인 문제인 이상 지역적인 해결책은 부정된다. / 전지구적으로 발생하고 전 지구적으로 강화된 문제에는 지역[209]적 해결책이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권력과 정치의 재결합이 이루어지려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야 가능하리라.

 

[216]사람들 사이의 악의와 적대에 대해서는 불안 해소의 약속이 단지 완전히 지켜지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약속 달성의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아니 심지어 전보다 더 나쁜 상황이 되었다고 의견이 일치한다. ... 이런 식의 드라마에는 반드시 악당이 있기 마련이다. 인간 악당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앞서 보았듯, 잔인하거나 이기적이면서 우리에게 냉정하고 우리를 싫어하는 존재 역시 인간이다. 다른 인간들, 전문가의 견해에서든 일반인의 믿음에서든, 자연의 장난이나 신체상의 특이한 이상 등까지도 어느 정도는 책임이 ‘다른 인간’에게 있다고 여겨진다.

 

[218]“위험에 대한 공포가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공포가 얼마나 커지느냐, 무엇으로 변하느냐가 중요하다. 사회적 삶은 사람들이 벽 뒤에 숨고, 경호원을 고용하고, 방탄차량을 몰고 다닐 때, 가스총과 권총을 휴대하고 권법 수련을 하게 될 때 변화한다. … 문제는 이런 행동들이 뭔가 질서가 무너져 있다는 의식을 강화하며, 따라서 그런 행동을 계속 양산한다는 데 있다”(David Althe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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