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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나를 생각하게 만든 남의 생각

[퍼온 글] 나중에 꼭 읽어볼 것!!!

http://blog.jinbo.net/imho/?pid=1429

 

베네수엘라의 Health for All

 

 

(업계로 복귀했으니 이제 공부도 열심히 해야쥐~
잠깐 틈난 사이 메일을 열어보다 보게 된 소식)




베네수엘라의 의료개혁에 대한 이야기가 Social Medicine이라는 저널의 최신호 전체를 채우고 있다.

내용 전체는 요기에서 볼수 있고(왜 구글크롬에서는 게시판 편집기가 잘 안되는걸까나~ 브라우져 바꾸기 귀챦아서 그냥 텍스트버젼으로 씀), 논문 전체가 공개되어 있다.

http://journals.sfu.ca/socialmedicine/index.php/socialmedicine/issue/current/showToc

이 저널은 일차의료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고, 라틴아메리카 소식이 대부분이다. 생긴지 얼마안되긴하지만,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듯.


블로그 http://blog.jinbo.net/BA에도 항상 Barrio Adentro에 대한 최신 소식이 올려져 있음.




아직 Abstract도 안 읽어보고 목차만 훑어본거라 할말은 없네~
번역이나 내용소개는 관심 있는 분들께 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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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1

유물론적 페미니즘(08년 여이연여름강좌) 3-1.

★ 작은 틀 ★

 

 

1. 문제 제기 - 계속되는 질문들.

 

 

1) 성의 측면에서 좀더 평등했던 분업이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

2) 위계적인 분업이 어떻게 하여 현재의 임금노동에까지 확대되었는가?

 

 

- 가사노동에 대한 분석과 여성 임금노동에 대한 분석이 분리.

70년대 초 중반, 가사노동이나 가부장제의 개념에 대한 분석 등 페미니즘에서 중요한 새로운 논의들이 등장하고, 여성의 역사에 대한 페미니즘적 연구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의 여성 임금노동자의 위치에 대한 분석에 포함되는 문제들은 상대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

 

 

- 여성의 공적인 노동력으로의 진입이 해방은커녕 여성들은 오히려 그들의 이중의 임무.

대규모 산업이 여성을 가정에서 노동시장과 공장으로 내몰고, 가족의 생계 책임자로 만들면서부터 프롤레타리아트 가정에서의 남성 지배의 최후의 보루는 모두 무너져 버렸다(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여성해방의 최우선의 전제조건은 전 여성이 공공산업으로 재투입되는 것이다.”

 

 

- 여성노동에 대한 연구는 여성이 담당하는 노동의 성격에 의해서도 밝혀질 수 있지만 여성이 처한 사회경제적 현실에 대한 조망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 자체와 그 속에서 관철되고 있는 성별 분업의 논리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뜻.

 

 

2. 여성노동에 대한 사회적 이론 검토 및 비판.

 

 

--> (강사 선생님 말씀) 여기에서 주요 이슈는 여성에 대한 차별, 불평등이 “왜” 저임금․불안정․비정규직 노동으로 현상하는가에 대한 문제 제기이다. 이런 문제 제기에 대한 논의는 크게 2가지가 있다.

 

 

1) 인적 자본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여성은 일 시킬 만하면 일을 그만 둔다>이다. 이 예는 위의 “왜”라는 문제 제기에 대한 기존 사회학 이론의 답변(자본 이데올로기) 이다. 이 논의는 이 논의의 한계를 비판하는 이중노동 시장론으로 이어진다.

 

- 노동시장은 동질적, 완전 경쟁적이며 개별 근로자의 직업적 지위나 임금 수준은 학력, 직업훈련, 업무경험, 기술습득 등 인적 자본에의 투자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인적 자본에 투자함으로 노동생산성이 질적으로 떨어지며, 이러한 차이가 결과적으로 임금이나 직업적 지위 면에서 성 차별을 가져오게 된다.

 

 

- 여성들이 가족 내의 지위 때문에 남성보다 인적 자본을 덜 가진다는 입장. 인적 자본론자들은 노동시장의 결과가 합리적 선택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비판) 직업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가족 내의 여성 지위의 결과로서 설명하며, 이는 가족 구성원이나 전체 사회 모두에 기능적인 것으로 본다는 점에서 파슨스의 기능주의와 동일한 논의의 구조를 가지고 있다. 또한 개인의 노동 전략이라기보다는 가구의 노동 전략이라는 관념을 인적 자본론과 파슨스 이론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며, 성과 노동에 관한 많은 사회학적 분석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특히 인적 자본론은 고용주가 피고용인에게 그들의 가치에 맞게 임금을 주는 완벽한 노동시장의 가정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돈을 많이 받는 직업’은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직업이고, 이는 실제 기술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강한 권력을 가진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이 고도로 숙련된 것으로 불리도록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크다.

남성과 여성에게 노동시장을 불평등하게 구조화시키는 제도화된 권력관계를 간과한 것이 인적 자본론, 그리고 이와 유사한 사회학 이론들이 실패한 핵심적인 이유이다.

 

 

2) 이중노동 시장론

--> (강사 선생님 말씀) 이 이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동시장이 왜 이중적인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는 이론이다.

 

- 노동시장이 완전 경쟁적이고 동질적이기보다 질적으로 구분되는 여러 부분들로 분절되어 있으며 분절된 부분들은 각기 다른 직종으로 이루어져 다른 원리 및 고용관행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 1차 노동시장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좋은 근로조건, 다양한 승진 기회, 고용의 안정성이 보장되며, 2차 노동시장은 여자, 연소노동자, 도시빈민 층으로 구성되며 저임금, 열악한 근로조건, 승진 기회의 부족, 고용 불안정성 등이 그 특징이다.

 

 

3. 노동 과정과 산업예비군 이론

 

 

1) 노동 과정-매뉴팩처로부터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에서 마르크스의 분석

 

 

- 근대산업으로의 이행 과정

① 기계의 도입

② 근대산업에 있어 숙련노동을 미숙련노동으로, 남성을 여성으로, 성인노동을 소년노동으로 대체하려는 경향.

③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 남성 노동자들의 기계발전에 대한 저항을 무화.

④ 공장 밖 생산. 여성과 어린이가 고용되는 새로운 형태의 가내공업.

⑤ 여성과 어린이의 고용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과, 남성과 여성 사이의 새로운 관계가 등장.

 

 

- 자본이 여성을 고용함으로써 갖게 되는 이익.

① 근대 산업이 가족 구성원 모두를 고용함으로써 재생산 비용이 인구의 모든 구성원에게 나누어지기 때문에 노동력 가치가 낮아지는 경향. 노동자의 재생산 비용이 줄어들면서 잉여가치가 증가.

② 여성 고용으로 상품의 수요가 증대하며 순환 과정이 빨라진다.

③ 자본주의 발전에 대한 남성 노동자의 저항을 무너뜨린다는 점.

 

 

- 여성 노동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① 여성의 낮은 훈련 비용. 노동력 재생산 비용도 낮다.

② 여성은 재생산 비용을 부담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져 여성의 노동력은 상대적으로 낮은 가치. 이것이 여성은 가족의 부차적 수입원이고 남편의 임금이 가족의 재생산 비용에 책임이 있다는 가정 때문에 여성 임금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아진다는 것에 상식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라고 설명. 남편과 아버지가 없는 경우에도 여성의 위치는 가부장적 구조에서의 가족 개념으로 규정.

 

 

2) 산업예비군 이론

 

(각주-산업예비군의 정의 1) 유동적 산업예비군의 노동자들은 때로는 근대산업의 중심부에 유인되어 들어가고 때로는 밀려 나간다. 이것은 대부분의 근대산업이 숙련노동자를 미숙련 노동자로, 남성을 여성으로 그리고 성인을 아동으로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2) 잠재적 산업예비군은 자본주의적 농업 방식의 침투에 의해 농토에서 추방된 농업인구 가운데 존재한다. 3) 정체적 산업예비군은 가내공업 등에 비정규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로 구성되는데, 그 성원은 근대산업과 농업의 임시 고용인으로부터 충원된다(베로니카 비치, “여성과 생산”, 『제3세계 여성노동』, 여성평우회 편, 창작과 비평사, 1985)).

 

- 맑스는 노동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는 때에 노동자로 하여금 임금과 고용조건에 대해 협상할 능력을 차단하는데 산업예비군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 “가장 마지막으로 고용되고 가장 먼저 해고되는” 노동자군.

노동력에 대한 수요가 있고 임금이 상승될 위험이 있을 때 임금노동에 충원될 수 있고, 그런 다음 이 수요가 감소하고 실업이 증가하는 불황의 상태에서 잉여노동자가 된다(기혼여성).

 

 

비판) 남자보다 먼저 여자가 일자리를 잃는 과정을 결정짓는 것이 자본이라고 생각한다면, 남자보다 낮은 임금으로 고용될 수 있는 여성을 먼저 그만두게 하는 것이 고용주의 이익과 어떻게 연관되는지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경험적인 증거들이 이 이론을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기도 하다. 성별 직업분리를 설명하지 못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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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다....

 

사진 한장이 대변하는 현실.

ㅋㅋㅋ

 

어디선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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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페미니즘 척결 -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자본주의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

  ▣ 사회주의정당건설운동 ▣ 주류 페미니즘 척결 -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자본주의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
    혁사 무당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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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8년 12월 30일 15시 03분 46초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탤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억압을 '남성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그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들에겐 유감스런 얘기겠지만, 내 주변의 진보주의자 남성들은 하나같이 주류 페미니즘(정확하게, 90년대 이후 한국의 주류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정치적으로 진보적일 뿐 여성이 처한 성적 억압엔 무감각한 형편없는 남근주의자들인 건 아니다. 그들은 적어도 '여성100인위원회'의 활동을 원칙적으로 지지하고 <밥꽃양>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을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로 파악하는 남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른바 여성에 대한 성적억압과 싸운다는 페미니즘을 하나같이 마땅치 않아 한다.

나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다. '노력하는 마초'인 나는 주류 페미니즘을 몹시 마땅치 않아 한다. 내가 그 페미니즘을 마땅치 않아 하는 이유는 그들의 '사회의식'이 분명한 사회적 억압의 하나에서 출발하면서도, 모든 건강한 사회의식이 갖는 인간해방운동의 보편성을 거스르기 때문이다. 사회의식이란, 단지 제 사회적 억압을 사회에 호소하는 게 아니라(만일 그런 게 사회의식이라면 '서초구민들'이나 '의사들'의 빌어먹을 호소도 사회의식일 테니), 제 사회적 억압을 통해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을 깨닫고, 제 억압을 모든 사회적 억압의 지평에서 조망하고 겸손히 연대하는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의 상태를 말한다.

주류 페미니즘은 다른이의 사회적 억압에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이를테면 주류 페미니즘은 모든 사회적 억압의 출발점인 계급 문제에 대해 정말이지 무관심하다. 그들은 아마도 여성이라는 계급이 일반적인 의미의 계급보다 더 근본적이라 생각하는 듯하다. 과연 그런가. 페미니즘을 둘러싼 해묵고 아둔한 논쟁이기도 하지만, 여성의 억압이 근본적으로 계급에서 오는가 성에서 오는가는,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이 하층계급 남성에게서 억압 받을 가능성'을 살펴보거나 '중산층 혹은 상류계급 여성의 억압과 하층계급 여성의 억압을 비교'해봄으로써 간단히 알 수 있다.

주류 페미니즘이 그런 저급한 사회의식에 머무는 실제 이유는 그 페미니즘의 주인공들이 작가, 언론인, 교수(강사) 따위 '중산층 인탤리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성적 억압의 보다 분명한 피해자인 하층계급 여성의 고통을 이해할 만한 처지에 있지 않으며, 그 고통을 이해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단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인 성적억압을 '남성일반과의 문제'로 만드는 데 열중한다. 건강한 싸움보다 나른한 카타르시스에 익숙한 그들은 그들이 증오해마지 않는 남근주의를 넘어서기는 커녕 흉내내며(이를테면, 한 대중적인 페미니스트 잡지는 가수 박진영을 '먹고 싶은 남자'라 지칭한다), 심지어 투항한다(이를테면, 한 도발 전문'페미니스트는 정치적 남성인 생리적 여성을 대통령으로 밀자고 주장한다).

나는 성적억압의 실체인 가부장제가 전적으로 자본주의에 의한 것이라 주장하는 덜떨어진 맑시스트가 아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자본주의가 가부장제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가부장제의 기본 단위인 가족은,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기본 단위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족을 위해 묵묵히 헌신하는 '좋은 여성'의 실제 임무는 오늘 노동력(남편)을 뒷바라지하고 다음 세대의 노동력(자식)을 양육하는 것이다. 자본은 남성에겐 노동의 일부라도 지불하지만 그들을 노동할 수 있게 뒷바라지하거나 양육하는 여성에겐 한푼도 지불하지 않는다. 자본의 입장에서 '좋은 여성'이란 얼마나 유익한가.

봉건사회의 관습인 듯한 가부장제가 근대사회(자본주의사회)에서 끈질기게 집행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 집행은 제도 교육, 미디어, 도덕 따위 이런저런 자본의 선전장치를 통해 마치 공기를 마시듯 뱃속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진행된다. 가부장제와 싸운다는 주류 페미니즘은 실은 그 선전장치의 성실한 일부다. 유한하기 짝이 없는 그들은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사회적 억압을 일반화하여 카타르시스하는 데 열중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제 억압을 통해 보편적 인간해방운동에 이르는 정당하고 필연적인 기회와 가능성을 성실하게 차단한다. 그 페미니즘은 그저 남근주의의 이면이다.

(김규항, 씨네21 2002/0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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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그리스 사회주의자가 말하는 그리스 반정부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