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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물에서 찾기나를 생각하게 만든 남의 생각

2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9/06/14
    [아고라펌] 똘똘한 명박이
    포카혼타스
  2. 2009/06/11
    [펌] "이것은 사람의 말" 6.9 작가선언
    포카혼타스
  3. 2009/06/09
    [펌] ‘촛불논쟁’ 초간단 정리
    포카혼타스
  4. 2009/06/09
    두려움 극복과 용기와 행동
    포카혼타스
  5. 2009/06/08
    [펌] 여성주의 의료생협
    포카혼타스
  6. 2009/05/24
    2009/05/24(1)
    포카혼타스
  7. 2009/05/24
    그 죽음을 바라보는 좋은 시각
    포카혼타스
  8. 2009/05/20
    엄마 보여드려야지.
    포카혼타스
  9. 2009/02/05
    [펌] 어느 촛불의 푸념
    포카혼타스
  10. 2009/01/03
    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포카혼타스

[아고라펌] 똘똘한 명박이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2739777

 

 

 

 

<글·윤무영 | 그림·김용민>

 

 

선생님 : 여러분, 일제고사 성적이 나왔어요. 면박이 학생, 나와서 성적표 받아가세요.

면박 : 제 성적은요, 잘 나왔기 때문에 선생님이 그냥 불러줘도 될 것 같아요.

선생님 : 그럼, 부를게요. 면박이 학생, 도덕은 빵점.

면박 : 성적만 좋으면 됐지, 도덕 점수가 뭐가 중요해요?

선생님 : 수학 20점

면박 : 그건 옆집에 사는 미국이 때문에 그래요.

선생님 : 자연은!

면박 : 그건 내가 잘 하는 과목인데. 저는 녹색을 좋아해요.

선생님 : 자연은 빵점. 그리고 사회는 20점.

면박 : 제가요, 그래도 다른 애보다는 성적이 좋잖아요. 저기 저쪽에 앉은 애. 어! 오늘 결석했네. 공부를 못하는 애들이 날씨가 좋으면 꼭 결석을 해요.

선생님 : 너가 만날 비교하던 그 학생은 전학갔어요. 이제 그 학생하고 비교하지 마세요. 안 그래도 그 학생이 전학갈 때 성적표를 떼어보니 면박이 학생보다 훨씬 나았어요.

면박 : 어, 그러면 이제 비교할 대상이 없네.

선생님 : 저기 구석에 있는 학생 있잖아요. 공삼이. 수학 성적이 빵점이라 면박이 학생보다는 약간 뒤떨어지잖아요. 그래도 성적은 안 올라도 매번 출석하는 정성은 알아줄 만해요. 어디든지 안 끼는 데가 없어요.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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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quot;이것은 사람의 말&quot; 6.9 작가선언

시국 선언문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가운데,

내가 본 것 중 가장 아름다운 시국선언문.

탄압받는 인간성과 감성들의 저항, 그 전방에 선 문학에 감사하며.... 펌.


제가 말한 건 요거였어요~ 젊은 작가들의 선언문! ^-^

시국선언문의 최고봉이라고 감히 아뢰옵니다. 녜.

 

 

 

 

 

이것은 사람의 말 - 작가 188인 ‘6.9 작가선언’

(* 강조는 그라쪼 ^-^)


작가들이 모여 말한다.

우리의 이념은 사람이고 우리의 배후는 문학이며 우리의 무기는 문장이다.

우리는 다만 견딜 수 없어서 모였다.

모든 눈물은 똑같이 진하고 모든 피는 똑같이 붉고 모든 목숨은 똑같이 존엄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은 극소수 특권층의 이익을 위해 절대 다수 국민의 눈물과 피와 목숨을 기꺼이 제물로 바치려 한다. 우리는 지금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고통스럽다. 본래 문학은 한계를 알지 못한다. 상대적 자유가 아니라 절대적 자유를 꿈꾼다. 어떤 사회 체제 안에서도 그 가두리를 답답해하면서 탈주와 월경을 꿈꾸는 것이 문학이다. 그러나 문학 본연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이 차라리 사치가 되어버린 시대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다급한 마음으로 1987년 6월을 떠올린다.

박종철의 죽음이 앞에 있었고 이한열의 죽음이 뒤에 있었다. 그 죽음들의 대가로 민주주의를 쟁취했고 힘겹게 그것을 가꿔왔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아니다. 우리에게는 이 모든 것을 망각할 권리가 없다. 이명박 정권 1년 만에 대한민국은 1987년 이전으로 후퇴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각자가 하나의 정부인 작가들이 이 자리에 모였다. 조직도, 집행부도, 정강도 없다.

우리는 특정한 이념에 기대어 발언하지 않는다. 이명박 정부가 아무런 이념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이 내세운 ‘중도실용주의’라는 가짜 이념은 집권 1년도 못 돼 폐기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도처에서 헌법 위에 군림하는 독재의 얼굴을 본다.

용산 철거민들의 생존권을 짓밟는 와중에 여섯 명의 무고한 목숨을 앗아가고도 이명박 정부는 끝내 사죄하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강행하여 국민적 저항에 직면했지만 저들이 행한 일은 위선적인 사과와 광범위한 탄압이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언론 장악을 기도했고 도심 광장과 사이버 광장에 차벽을 치고 철조망을 세웠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사태는 이 정부가 시대착오적인 색깔론과 천박한 관료주의로 문화예술의 토대를 위협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전직 대통령을 겨냥한 사상 최악의 표적수사와 비열한 여론몰이는 그를 벼랑에서 투신하게 하였다. 민주주의의 가치는 매장되었다.

이 모든 일에 적극 가담한 정치검찰과 수구언론을 우리는 민주주의의 조종(弔鐘)을 울린 종지기들로 고발한다. 살아있는 권력에는 굴종하고 죽은 권력에는 군림하면서 영혼을 팔고 정의를 내던진 정치검찰들, 증오와 저주의 저널리즘으로 민주화의 역사를 모독하고 민주주의의 가치들을 조롱하는 수구언론에 우리는 분노한다.

우리가 저들과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참혹해진다. 저들을 여전히 검찰과 언론이라고 불러야 하나. 곰팡이가 온 집을 뒤덮었다면 그것은 곰팡이가 슨 집이 아니라 집처럼 보이는 곰팡이일 뿐이다. 저 권력의 몸종들과 함께 민주주의의 일반 원리와 보편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으면서 달려온 이명박 정권 1년은 이토록 참담하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서 우리는 깊은 절망을 느낀다. 저들은 수치를 모르고 슬픔을 모른다. 수치와 슬픔을 아는 것이 사람이고, 사람됨이라는 가치에 헌신하는 것이 문학이다. 우리는 문학의 이름으로 이명박 정부를 규탄한다.

이곳은 아우슈비츠다. 민주주의의 아우슈비츠, 인권의 아우슈비츠, 상상력의 아우슈비츠. 이것은 과장인가? 그러나 문학은 한 사회의 가장 예민한 살갗이어서 가장 먼저 상처입고 가장 빨리 아파한다. 문학의 과장은 불길한 예언이자 다급한 신호일 수 있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프리모 레비는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아무런 권리도 없을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 가지 능력만은 남아 있다.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과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면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아직 종이와 펜이 있다. 그러니 동의하지 않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끝내 저항할 것이다. 민주주의의 정원을 갈아엎고 있는 눈먼 불도저를 향해, 머리도 영혼도 심장도 없는 권력자와 그 하수인들에게 저항할 것이다.

가장 뜨거운 한 줄의 문장으로, 가장 힘센 한 문장의 모국어로 말할 것이다. 사람의 말을, 사람만이 할 수 있고 사람이니까 해야 하며 사람인 한 멈출 수 없는 그 말을. 아름답고 정의로운 모든 문학의 마지막 말, 그 말을.

 


우리는 작가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말을 합니다.
우리는 각자의 글을 씁니다.
우리는 각자의 나라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쓰는 글의 바탕에 언제나 인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념이 아니라 사람의 편에 섭니다.


우리는 모였습니다.
참혹한 오늘을 불러온 것도 우리이지만
참다운 내일을 만드는 이도 우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권의 야만에 분노합니다.
사람의 설 자리가 사라진 현실에 분노합니다.

우리는 보고 싶습니다.
이견을 두려워하지 않고 국민과 소통할 줄 아는 정치가의 얼굴을.
우리는 듣고 싶습니다.
아첨과 왜곡의 목소리가 아니라 공정하고 진실된 언론의 발언을.
우리는 느끼고 싶습니다.
이 땅의 주인은 국민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확신과 자부를.
우리는 되찾고 싶습니다.
본래 우리 것인 광장과 집과 대지, 스스로 흘러 생명일 수 있는 강물을.
우리는 꿈꾸고 싶습니다.
그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사람이 죽어나가지 않는 사회,
양심과 이성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
자유와 평등은 원래 사람의 것이라 믿고 자라날 수 있는 아이들의 미래를.


우리는 입을 엽니다.
이것은 사람의 말입니다.

 

 

‘한줄선언’ 참가자 명단

강경희 강성은 강 진 고나리 고명철 고봉준 고인환 고찬규 곽은영 구효서 권 온 권혁웅 권현형 권희철 김경인 김경주 김경후 김 근 김나영 김남극 김남혁 김대성 김명기 김미월 김미정 김민정 김사과 김사람 김사이 김 산 김선재 김성중 김소연 김 안 김양선 김애란 김 언 김연수 김요일 김윤환 김이강 김이은 김이정 김자흔 김재영 김정남 김정란(소설가) 김지녀 김지선 남상순 맹문재 명지현 문동만 문혜진 박대현 박민규(시인) 박 상 박상수 박성원 박수연 박슬기 박시하 박연준 박정석 박창범 박형서 복도훈 박형숙 박형준 박혜상 방현희 배영옥 백가흠 백지은 서성란 서안나 서영식 서영인 서효인 서희원 성기완 손세실리아 손홍규 송기영 송승환 송종원 신용목 신해욱 신형철 신혜진 심보선 안상학 양윤의 양진오 여태천 오창은 우대식 원종국 원종찬 유용주 유정이 유형진 유홍준 윤성희 윤예영 윤이형 윤지영 이경재 이기성 이기호 이덕규 이도연 이동욱 이만교 이문재 이민하 이선우 이성미 이성혁 이순원 이시영 이신조 이 안 이영광 이영주 이용임 이용헌 이은림 이장욱 이진희 이 찬(평론가) 이현승 이현우(로쟈) 이혜경 이혜미 임수현 임영봉 임지연 장무령 전도현 전성욱 전성태 전형철 정여울 정영효 정우영 정은경 정주아 정한아(시인) 정혜경 정홍수 조강석 조동범 조성면 조연정 조연호 조용숙 조원규 조 윤 조 정 조해진 조형래 조효원 주영중 진은영 차미령 채 은 천운영 천수호 최성각 최진영 최창근 하성란 하재연 한세정 한용국 한지혜 함기석 함돈균 해이수 허병식 허윤진 허 정 홍기돈 홍준희 황광수 황규관 황호덕 총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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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촛불논쟁’ 초간단 정리

http://blog.naver.com/non_organ/70047340582

 

아놔... ㅋㅋ 디씨인싸이드 말투는 모든것을 녹여버린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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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극복과 용기와 행동

http://blog.jinbo.net/goodgame/trackback.php?pid=3

그리고 결과에 후회하거나 억울해하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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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여성주의 의료생협

http://blog.jinbo.net/imho/?pid=1442

소개하기로 한 여성주의 의료생협에 대한 기사입니다.

언니네 채널넷(www.unninet.co.kr) 2009년 1월 특집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 中

 

2009/01/10 10:45
[104호]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주의
(어라&무영, unni@unninetwork.net )

만 3년 후인 2012년 여성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을 설립하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의기투합한 어라와 무영은, 2009년 1월 1일부터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함께 만들 이들을 찾아다니고 있다. 이 자리에서 어라와 무영이 풀어내는 이야기들...



어라 : 요즘 나의 고민은 60살까지 여성운동을 하면서 여성주의 공동체를 이뤄 살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하는 것이다. 공동체를 고민하면서 의료, 건강, 생활과 관련된 고민이 점점 크게 다가왔다. 건강하게 살 권리가 정말 중요한 권리라는 것과, 건강하지 않은 사람들의 권리가 단순히 ‘환자로서의 권리’로 환원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믿는다.
갈수록 여성 의료인의 수는 많아지고 있지만, 여성 의료인에 의한 친절한 진료를 넘어 의료 서비스 자체가 여성주의적으로 재편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성의 몸과 건강에 대한 관심은 증대되고 있다. 우리 여성들은 여성의 몸을 설명하는 긍정의 언어를 스스로 만들어왔고(예를 들어, 폐경을 완경으로 부르거나, 처녀막을 질주름, 삽입성교를 흡입성교로 바꿔부르는 등), 적극적인 의료소비자로서 행동함으로써 성차별적인 의료인을 퇴출시키고 여성 친화적인 의료 환경을 조성해왔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단순히 보건의료서비스의 ‘이용자’거나 ‘소비자’이기를 거부하고 있다.


무영 :사실상 지금도 거의 모든 여성들은 무급 보건의료종사자이다. (물론 병의원에 고용되어 일하는 유급 보건의료종사자의 대다수도 여성들이지만.)
아픈 가족을 간호하거나, 입원한 가족을 간병하거나, 가족 중 누군가가 당뇨로 인해 특별한 식사 처방을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식사를 준비하는 일은 대부분 여성의 몫이었다. 주변 사람의 건강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발견하는 사람도 여성이며,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도 여성이다.
여성들은 스스로를 치료하고 주변을 돌보는 역할을 해왔고, 그래서 나는 여성들이 가장 1차적인 의미에서 보건의료(서비스)의 ‘생산자’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런 입장에서 여성들에 의해, 여성주의적으로 운영되는 병의원에 대한 아이디어가 생겨났고, 여성주의 의료생활협동조합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어라: 생활협동조합은 ‘공동으로 소유되고 민주적으로 운영되는 사업체를 통하여 공동의 경제적, 사회적 필요와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결성한 자율적인 조직’이다.
그리고 ‘의료’생활협동조합은 지역 주민과 의료인이 함께 출자하고 운영하는 지역 사회의 1차 의료기관으로서, 건강권 실현을 위한 활동과 건강한 생활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활동을 해 나가는 조직이다. 질병 중심의 예방, 치료, 재활만이 아니라 지역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하는 곳이다. 한국에서는 1994년 첫 의료생협이 안성에 들어섰고, 서울(영등포, 노원), 원주, 안산, 인천, 대전, 전주, 청주, 용인, 수원, 성남 등에서 건강한 의료생협운동이 지속되고 있다.


무영: 의료생활협동조합의 4가지 전제는 다음과 같다.

1) 건강한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주민단체이다.
2) 예방, 보건, 건강과 이를 보장하는 제도에 충실한다.
3) 지역주민의 참가를 보장하는 민주적 의료기관을 소유한다.
4) 조합원이 주인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장으로서 ‘소모임(반)’ 조직이 있다.

즉 의료생활협동조합(의료생협)이란 지역주민들의 참여를 기반으로 민주적으로 운영됨으로써 의료기관이 사유화되어 이윤 중심으로만 운영되는 것을 막고, 지역 사회의 건강 실현을 위해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조직인 것이다.
지역 사회의 누구나가 스스로의 몸과 건강에 대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경험은 자신의 의료적 권리, 건강권에 대해 고민해보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명박 정권이 들어섬으로써 나날이 심각해지는 사회공공성 후퇴에 맞서 저항하는 의미도 가질 것이다.


어라 : 이러한 의료생협이 여성주의와 접목되었을 때, 나는 정말 큰 가능성이 생길 것이라고 기대한다. 여성들이 돈을 출자하여 조합원이 되고 의료생협의 운영 방식을 결정하는 여성주의 의료생협. 어떤 것이 여성주의적 진료일지 함께 고민하고, 여성주의 의료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야간에는 의료생협이 성폭력·가정폭력 위기 지원 센터가 될 수도 있고, 기회비용 때문에 다른 1차 의료기관에서는 시행하기 힘든 가정 방문 진료도 시행할 수 있다. 여성 노인을 위한 데이케어센터(Day Care Center)를 운영하거나, 여성 노인 요양 시설을 건립할 수도 있다. 여성주의 의료 정책들을 만들기 위한 운동도 계속하고, 여성의 몸과 경험을 녹여낼 수 있는 새로운 여성주의 의료용어들을 만들 수도 있으며, 이런 내용들을 여성 건강 강좌를 통해 퍼뜨릴 수도 있다.


무영 : 의료생협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3000만원의 출자금과 300명의 설립 동의인을 모집해야 한다. 앞으로 3년! 우리가 여성주의 의료기관을 부설로 운영할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준비할 시간이다.
비혼 여성들, 레즈비언, 결혼 관계 내에 있는 여성들, 장애 여성, 여성 노동자, 이주 여성, 여성 노인과 아이들 누구나 차별없이 진료받을 수 있는 환경 속에서, 돌볼 수 있을 때 돌보고 돌봄이 필요할 때 돌봄을 받는 그런 여성주의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어라는... 작년 12월부터 낮에는 노원구에 있는 함께걸음 의료생협에서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밤에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따기 위해 인터넷으로 공부하는 ‘주경야독’의 여성주의자로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준비하기 위해, 현재 한국의 의료생협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풀뿌리 운동을 통해 지역 네트워크를 어떻게 조직해 나가는지 배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노원구) 함께걸음 의료생협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의료생협에서 운영하는 여러 가지 지역 복지사업을 수행하기 위해 사회복지학을 공부 중이다. 그래서 요즘 아주 바쁘다.


무영은...올해 3월부터 한 대학병원에 가정의학과 전공의로 취직하여 3년간의 수련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 의대에 처음 들어올 때 산부인과나 정신과를 전공하여 성폭력 피해자 여성들을 위한 의료지원활동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으나,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위한 1차 의료를 수련하기 위해 가정의학과로 진로를 바꾸었다. 여성주의 의료생협에 고용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추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면서 환자분들을 진료할 예정이고, 여성주의적 의료의 구체적인 모습과 여성주의 보건의료운동을 의료현장 안에서 고민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3년간 고생 예정이다.


* 지역 사회와 여성주의를 기반으로 하여 운영될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함께 준비해 나가고 싶으신 분들, 조합원이 되어 여성주의 의료생협을 함께 운영해가고 싶으신 분들을 모집합니다. 평소 여성 보건운동에 관심이 있으시거나 생활협동조합 운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 여성주의 공동체 건설에 애정이 있으신 분들! 연락주세요. ^-^

어라 : yuwon2@gmail.com
무영 : muyoung98@hanmail.net

*한국의 의료생활협동조합 운동을 더 알아보고 싶은 분들은 의료생협연대의 홈페이지를 방문해주세요. 아래 홈페이지에서 각 지역의 의료생협으로 들어가실 수도 있습니다.



의료생협연대 : http://medcoop.ewonju.com

* 이미지 출처*
위에서부터 http://www.fotoya.net/common/photoviewR.aspx?photoID=3235819&searchValue=%ec%a7%84%ec%b0%b0%ec%b9%98%eb%a3%8c%ec%8b%a4
http://club.cyworld.com/50155463230/-65850525
http://club.cyworld.com/50155463230/-675587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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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4

EM님의 [2009/05/24] 에 관련된 글.

블로그의 글로밖에 만나보지 못했지만

바로 그 글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EM님도 노의 죽음으로 힘들어가고 계시는구나...

맘이 많이 아프다.

그의 죽음으로 내 삶 안의 사람들이 깊은 슬픔에 빠져,

내 삶의 슬픔도 너무 많이 커졌다.

 

무엇이 이 좋은 사람들을 이토록 슬프게 하는걸까?

나는 왜 그의 죽음으로는 건너건너 아는 사람의 자살 소식 만큼밖에 슬퍼지지 않고

그의 죽음이 만들어낸 수많은 슬픔들 때문에만 슬퍼지는걸까?

 

나는 뭐가 다른가?

그는 나에게 다른사람들한테와 어떻게 다른가?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의 죽음은 다른 수많은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고 혼잣말로 마지막에 중얼거리게 되는 말이 있음을 깨닫는다...

그의 자살은 그녀의 자살과 무엇이 다른가?

혹은 같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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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죽음을 바라보는 좋은 시각

magister님의 [노 전대통령의 자살] 에 관련된 글.

그의 죽음이 불러오는 찜찜함과 우려와 고민들이

이렇게도 정리될 수 있다.

손 끝에서 노는 감정과 두서없는 생각이 누군가의 말로 이렇게 잘 정리될 때,

나는 엄청 큰 선물을 받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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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보여드려야지.

[펌] 어느 촛불의 푸념

촛불에서 멀어져야 할 날이 다가옵니다.

 

제 마음이 어떨지 아실까요...

말 안해도 누가 알아주길 바라는 거... 이거야 말로 연인들마저 싸우게 만드는 이유 1순위라죠... ^^

 

 

작년 한해동안 촛불 열심히 들었습니다.

뭘 이만큼 열심히 해본적이 없었다 싶을만큼, 막 뛰어들고 내던져가면서요.

 

저는 많은 걸 바랬습니다.

처음엔 광우병 소고기 수입 반대로 시작했지만,

저 개인의 마음에 품었던 목표는 어마어마한 것이었지요.

우리가 언제 한번 이루어보지 못했던, 사람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상, 그런 세상을,

피 보지 않고 이룰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혈 혁명. 아니, 어쩌면 혁명이라는 말 조차 낡은 것으로 치부될, 인류의 진보가 기다리고 있을거라고 꿈꿨습니다.

(장르로 치면 거의 판타지죠... ㅋ)

그래서 6월 10일날, 인파에 낑겨가지고 뒷사람이 든 촛불에 머리카락 타면서도 행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꿈을 꾸는 대가로 제가 본 것, 겪은 것들은 저에게 많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상처'라는 말을 떠올리는 순간 즉각 떠오르는 이 생각들이 만들어지기 까지,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저를 훑고 지나갔습니다.

 

그 와중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것을 얻기도 했습니다.

2008년을 너무나 소중하게 만들어준 사람들이요. 

숨통을 트이게 해주는 사람들.

행동함으로써 저에게 배울 것을 만들어주시는 분들.

꾹꾹 참고 있던 눈물도 그 앞에서는 맘껏 터뜨릴 수 있게

온 마음을 다 열고 안아주시는 분들.

어디서 뭘 하며 사시다가 지금 이렇게 만나게 되었는지...

신기하기만 할 뿐인... 그런 분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앞으로 어디서 뭘 하고 있든, 이분들과의 대화와 경험이 제 행동과 생각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될거라는 직감이 듭니다.

 

 

그런데도,

저는 지금 어느때보다도 나약해져 있습니다.

 

촛불 든 이유가 무엇이냐, 고 누가 묻는다면 제가 대답할

일차적인 목적들은 아직까지 모두 좌절되었거든요.

천사들을 만나는 축복을 받았지만,

천사들을 만나기 위해 촛불 든건... 사실 아니었으니까요.

 

이제 잠시 촛불을 내려놓아야함을 받아들이면서 뒤를 돌아보니,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그런 현실 위에서, 이 나약한 인간이, 돈과 출세의 가치관이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나아가서

'역사는 정의가 승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외치면서

얼마나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점점, 직접행동의 광장에 나와서 우리가 겪는 수모는 모질어집니다.

매일, '촛불 들면서 가장 치욕적이었던 날'의 날짜가 경신됩니다.

'이제 나도 많이 독해졌구나. 이정도로는 눈물도 나지 않으니 말이야' 하고 생각한 다음날이면

또 다른 믿을 수 없는 일이 나를 압도해, 그간 쌓아온 '독한 이성'을 허물어버립니다.

 

앞으로 더 심해질텐데. 님들은 계속 이 괴로움을 겪어야 할텐데

나는 거기서 한발 물러나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요 며칠간은 생각없이 뛰어들기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아까는 시민을 납치해가는 버스 앞을 막고섰는데, 아랑곳 않고 코앞까지 다가오는 버스 앞유리의 운전석을 보며

그래 그대로 지나가라 하는 생각을 해버렸습니다.

버스 진로 방해한다고 경찰이 떠다밀어 넘어져서는,

위로 겹쳐넘어지는 사람들의 무게에 잠시 압사의 공포를 느꼈다가,

그도 나쁘지 않지, 란 생각이 들어버렸습니다.

 

아마 오늘처럼

내일 밤에도 저는 멀쩡히 살아있겠지요.

그리고 그 다음날쯤 부터 '마음의 촛불은 항상 타고 있을거다!'란 말을 스스로 경멸하며

제 인생의 한 줄기를 따라가기 시작할겁니다.

병행할 수 있을지, 없을지,

한번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은 얼마나 멀어지게 될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일이 나의 인생에 급 반전을 불러올지...

지금은 전혀 모르겠습니다.....

 

용산학살 전날 밤 

용산 현장 길 건너편에 깐돌아비님하고 서있다가

건물 꼭대기의 깨진 창문가에 나와서 담배 피우시던 철거민 예닐곱분한테

팔로 큰 하트모양을 만들어 응원을 했던 것이,

고작 그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것이,

또다시 그 자리에 선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너무 괴롭습니다.

 

과연 우리는 승리할 수 있을지,

'우린 승리해야 한다' 라고 말할 순 있어도,

'우린 승리할 것이다!' 라고 큰소리 쳐도 되는건지,

그 말이 나를 아프게 하고

남을 아프게 하지 않을지

한없이 조심스러워지고

아파지는 날입니다. 

 

 

 

거의 모든 순간이 기억나는 이 특별한 한 해를 돌아보고 싶었는데,

글을 쓰고보니 저에게 필요한건 그보다는 그냥 넋두리였나보네요.

이런 영양가 없는 푸념을 해놓고 그래도 마음이 좀 편해지는 걸 보니까요... ㅎㅎㅎ

 

 

(아, 이얘기는 꼭 해야지.

저 이래놓고 다음날 또 나와도 면박주지 마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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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가 쿠바를 떠나면서 카스트로에게 보낸 편지



이 글은 체가 쿠바혁명 이후 쿠바 공직에 봉직하던중, 자신은 혁명가이지 정치가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쿠바 제2인자의 자리를 버리며 아프리카와 남미의 혁명현장으로 향할때 카스트로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이다.
-게바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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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식적으로 당이 가지는 민족적 지도력에서 차지하는 나의 위치, 수상으로서의 지위, 고위 실력자로서의 지위 그리고 쿠바 시민권, 이 모든 것을 사양합니다. 그 어떤 법적 절차도 나를 쿠바에 묶어두지 못합니다. 유일한 끈은 약속이 그렇듯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또 다른 속성을 갖고 있습니다.

지나간 생활을 돌이켜볼 때 나는 혁명의 승리를 공고히 하기 위해 충분한 자부심과 헌신적인 마음을 가지고 일해왔다고 믿습니다. 나의 유일한 중대 실수는 시에라마에스트라에서 투쟁을 시작할 때 부터 보다 당신을 더 신뢰했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했다는 것과 지도자와 혁명가로써의 당신의 자질을 충분히 그리고 빨리 이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화려한 날들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당신과 같이 있으면서, 찬란하지만 아직은 슬픈 카리브해 위기의 날들을 우리의 민중과 더불어 살아왔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그 당시 어떤 정치가도 당신보다 화려하게 산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무런 주저 없이 당신을 따랐다는 점과 위험과 원칙에 대하여 사고하고 그것을 직시해 평가하는 데 있어 당신과 일치했다는 점도 자부심을 갖습니다. 세계의 또 다른 국가들은 저의 순수한 노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쿠바 최고 지도자로서의 책임감 때문에 당신이 하지 못한 것을 나는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온 것입니다.

당신과 헤어진다고 생각하니 내 마음이 기쁨과 슬픔으로 엉클어집니다. 하나의 건설자로써 내 마음을 여기에 두고 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랑하는 것들 중 가장 소중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를 자식처럼 받아주었던 쿠바 국민들을 두고 떠납니다. 그런 사실들은 나를 몹시 가슴아프게 합니다.

나는 당신이 가르쳐 준 신념, 우리 민중의 혁명정신, 그리고 제국주의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갈 것입니다. 그래서 대항해 싸워 성서러운 의무를 수행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것들을 가지고 전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것들이야 말로 깊은 상처를 치료해줍니다.

다시 언급해두고자 하는데 쿠바혁명으로 생기는 의무감을 떠나 어떤 책임감으로부터 쿠바를 자유롭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 나의 최후의 시간을 그 어떤 다른 하늘 아래에서 갖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마지막으로 생각하는 것은 쿠바국민 특히 당신에 대한 생각일 것입니다. 당신의 가르침, 모범에 대해 감사드리며, 나는 나의 행동 최후결과에 충실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내가 어디에 있든지 쿠바 혁명가의 한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고 그러한 자격으로 행동할 것입니다.

나는 아내와 자식에게 어떠한 물질적 재산도 남겨두지 않았으며 또한 그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정부가 그들의 생활과 교육을 위해 충분한 것을 제공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과 우리 민중에게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그것은 불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들에게 바라는 것을 말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승리를 위해 끝없는 전진을
조국이냐 죽음이냐
나의 모든 혁명적 열정으로써 당신을 포옹합니다.

Che's farewell letter to Fidel Castro

HAVANA
Year of Agriculture (1965)

Fidel:

I remember many things in this hour—how I met you in the house of María Antonia, and how you proposed that I come with you, and all the strain of the preparations.

One day they passed by to ask who would be advised in case of the death, and the real possibility of it struck all of us. Later we knew that it was true, that in a revolution one triumphs or dies (if it be a true one). Many comrades were left along the road to victory.

Today everything has a less dramatic tone, for we are more mature, but the event is repeating itself. I feel that I have fulfilled the part of my duty that bound me to the Cuban Revolution on its territory, and I take my farewell of you, my comrades and your people who are now my people.

I formally renounce my posts in the leadership of the Party, my post as Minister, my rank as Major, my status as a Cuban citizen. Nothing legal binds me to Cuba, only ties of another kind that cannot be broken, as can official appointments. Looking back over my past life, I believe that I have worked with sufficient faithfulness and dedication in order to consolidate the revolutionary triumph. My only deficiency of any import!!!ance is not to have trusted you more from those first moments in the Sierra Maestra and in not having understood soon enough your qualities of leader and revolutionary.

I have lived through magnificent days and at your side I felt the pride of belonging to our people in the luminous and sad days of the Caribbean Crisis. Rarely has any statesman shone more brilliantly than you did in those days. I feel pride, too, in having followed you without hesitation, identifying myself with your way of thinking and seeing and of judging dangers and motives.

Other regions of the world claim the support of my modest efforts. I can do what is forbidden to you because of your responsibility to Cuba, and the time has come for us to separate.

Let it be known that I do it with a mixture of joy and sorrow: I am leaving here the purest of my hopes as a builder and the most loved among my beloved creatures, and I leave a people who accepted me as a son; this rends a part of my spirit. On new battlefields I will carry with me the faith that you inculcated in me, the revolutionary spirit of my people, the feeling of having fulfilled the most sacred of duties: to fight against imperialism wherever it may be; this comforts and heals any wound to a great extent.

I say once more that I free Cuba of any responsibility save that which stems from its example: that if the final hour comes upon me under other skies, my last thought will be for this people and especially for you, that I am thankful to you for your teachings and your example, and that I will try to be faithful up to the final consequences of my acts; that I have at all times been identified with the foreign policy of our Revolution, and I continue to be so; that wherever I may end up I will feel the responsibility of being a Cuban revolutionary, and I will act as one; that I leave nothing material to my children and my wife, and this does not grieve me: I am glad that it be so; that I ask nothing for them, since the State will give them sufficient to live and will educate them.

I would have many things to say to you and to our people, but I feel that they are unnecessary; words cannot express what I would want them to, and it isn’t worthwhile wasting more sheets of paper with my scribbling.

To victory forever. Patria o Muerte!

I embrace you with all my revolutionary ferv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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