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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테이너 얘기 땜에 퍼온 글. (최원님)

포카혼타스님의 [우리는 컨테이너를 넘지 '못'했다] 에 관련된 글.
 

아래 퍼온 최원님 글을 보면서, 내가 작년에 썼던 일기가 떠올라서 트랙백으로 연결해본다.

 

 

촛불논쟁 관련해서-데모스인가 중간계급인가 다중인가

최원


 



최원 2009.05.12 15:58
http://blog.aladdin.co.kr/droitdecite/2838075




조정환 씨가 최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린글(http://blog.daum.net/nalsee/16521644)에 내가 쓴 글의 일부가 인용되었는데, 내가 전반적으로 이택광씨의 의견에 동조하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것은 아니라는 점을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힌다.

촛불 안에 다양한 경향들이 있었고, 여전히 있으며, 따라서 촛불을 그 자체로 하나의 열린 갈등적 공간으로 봐야지, '치안police에 대한 희구'와 '환(등)상'에 사로잡혔던 자들의 일장춘몽에 불과했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조정환씨의 주장에 십분 동의한다. (이건 논쟁을 쫓아가다가 이번에 알게 된 것이지만) 특히 촛불이 주장했던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슬로건을 민족주의로 환원할 수 있다는 이택광씨의 주장에 대해서 나는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이 슬로건은 원칙적으로 인민주권을 표현하는 것이지 국가주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이 양자가 단순히 외적으로 대립하는 것이 아닌만큼, 그 속에 애매함 내지 모호함이라는 문제가 있지만, 이 애매함이야말로 정치의 재료 그 자체이며 따라서 결정되지 않은, 열려있는, 개입이 필요한 문제라고 본다(내가 전에 쓴 글에서 말한 결정되지 않은 문제라고 지적한 것도 이런 맥락이다).

또 이택광씨가 랑시에르의 몫이 없는 자들 개념을 10대 소녀나 여성참여자에서만 주로 찾으면서, 촛불에서는 몫이 없는 자와 몫이 있는 자가 섞여서 모종의 '환등상'을 만들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전혀 동의할 수 없다. 랑시에르에게 있어서 몫이 없는 자들은 그런 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언어적 체제(regime)의 문제, 곧 발언권의 문제이고, 따라서 몫이 없는 자들이란 치안이 침묵시키려 들고 소음으로 간주하려고 드는 말들을 평등주의적 논리에 입각하여 행하는 모든 자들을 가리킨다. 당연히 당시에 명박산성으로 상징되는 의사소통거부에 반대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높였던 사람들 모두가 몫이 없는 자들(데모스)이지, 그 가운데 어떤 집단은 몫이 없는 자들이고, 어떤 집단은 몫이 있는 자들이 아니다. 그런 식으로 천박화하면, 데모스가 정세적으로 발생하는 불안정한 탈정체화의 효과라는 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 되며, 집단 정체성에 대한 사회학적 기준들을 뽑아내고 열거하는 방향으로 퇴행할 수밖에 없다.

오히려 랑시에르적 관점에서 일관되게 논의를 가져가기 위해서는 당시 촛불대중이 충분히 '평등주의적 논리' 속에서 자신의 운동을 만들어나갔는가를 평가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예컨대 촛불대중이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해 얼마나 열려 있었는지 등에 관해 말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면에서 나는 (이 모든 이택광씨와의 이견을 명시한다는 조건 하에) 여전히 촛불대중이 전반적으로 중간계급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조정환씨가 지속적으로 주장하듯이 그 성격이 언제든 다시 변할 수 있는 열린 것이었다는 점을 동시에 명확히 하고, 이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 어떤 개입을 할 것인가를 논의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말이다.

사실 촛불이 변하기 위해서 정말 필요했던 것은, 진보진영 내지 조직된 노동자들을 비롯한 다양한 약소자들과의 거대한 합류였다. 촛불은 그야말로 '원군'을 필요로 하고 있었고, 사실 작년 촛불 패배의 결정적인 원인은 바로 이 원군이 어디에서도 나타나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촛불은 (데리다적인 의미에서의) 보충대체(supplement)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곧 자신을 성공적으로 구성하는 데에 필수적이지만, 그 보충물을 자신에게 추가하고나면 그자신을 변질시켜 대체할 어떤 것(진정한 의미에서의 데모스로 만들어줄 수 있는 것).

나는 작년에 촛불의 중간계급적 성격을 지시하면서, 노동자를 비롯한 기층 민중의 지원없이 촛불의 싸움은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역설했었다. 참세상에 올렸던 '컨테이너를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라는 글을 통해서 내가 말했던 것이 바로 그것인데, 나는 거기에서 컨테이너를 넘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어떤 물질적 힘이 반드시 요구되지만, 그것은 단순한 폭투냐 비폭이냐의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가 아니며, 그 자리에서 단순히 컨테이너를 넘어설 것인가 말것인가라는 차원에서 논의될 문제도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 논의가 파업 등을 조직화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논의로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중간계급적 촛불 자신이 혼자서 자신의 과업을 완수할 수 없는 바로 그 때에 노동자들이 나서서 그것을 급진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이 점에 있어서는 여전히 내 판단은 변하지 않았다. 촛불이 패배한 시점은 정확히 민주노총의 파업이 흐지부지된 그 시점이었다. 바로 그 전에 백만을 동원하면서 명예가 걸린 마지막 전투를 치렀지만, 곧바로 촛불은 가시적으로 사그라져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촛불 자체의 한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못된다. 촛불이 문제가 아니라, 바로 기층 운동들이 그만큼 붕괴되어 있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백승욱 교수와 같은 경우, (여기저기서 들리는 말에 의하면) 문제의 그 글에서 촛불이 87년보다도 못했던 것은 그것이 789 노동자들의 진출과 같은 것조차 이끌어내지도 못했던 것을 보면 분명해진다고 말한 것 같은데, 정말 가당치 않은 이야기다. 그 열린 공간에서 숟가락으로 떠주는 밥도 먹지 못한 것이 바로 기존의 운동진영들이었다. 87년에 노동자들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6월 항쟁이 열어놓은 정치공간 속으로 일거에 진입해 들어왔었다면, 2008년에 노동자들은 (이후 벌어진 조직내 성폭력사건에서도 드러났듯이) 그 조직들의 파산을 향해 이미 나아가고 있었고(지금도 나아가고 있듯이), 이 때문에 그 속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어떻게 촛불의 한계란 말인가?

어쨌든, 여전히 나는 두 권의 책을 모두 접해보지 못한 상태에서 논쟁에서 추가되는 정보를 바탕으로 쓰고 있다. 그러니만큼 독자들이나 인용하는 분들이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내 글을 읽어주길 바란다.

▒▒The Autonomy Re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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