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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 월출산 산행 + 그보다 더 긴 짜투리 이야기

연휴를 내기 힘든 이 즈음 놀러가야지, 놀러가야지 계속 다짐해도 시간이 안났다.
아무리 잔머리 굴려봐도 당일치기로 가장 쫀쫀하게 노는 방법은 역시 산행이었다.
새벽 1시 광주행 막차를 타고 4시 조금 넘어 광주에 도착하니 영암가는 첫차가 금방 있었다.
(왜 월출산이었냐면 순전히 론리 플래닛 한국판에 실린 구름다리 사진 때문이었다.)
버스 타고 영암도착해서 다시 택시타고 등산로 입구에 도착하니 대략 5시 30분쯤.
사방은 고요하고 아직 해는 뜨지 않았고 예상대로 춥다. 시골의 새벽은 항상 예상보다 더 추워서

정신이 버쩍난다. 이제 정신을 차려, 몸이 신호를 보내온다.

아무리 유명한 곳이라도 비수기엔 역시 사람이 없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휴일에만 몰아서

어디를 간다. 그래서 내가 어딘가를 가면 항상 사람이 없다. 보통 사람들과 생활주기가 달라서

그런건데, 그래서 좋다.
 
근데 예상보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해가 뜨질 않았다. 헤드 랜턴 가져올걸. 이건 예상밖 시나리오.
조금만 기다리면 해가 뜨겠지만 춥다. 그래서 어디 들어가서 컵라면이라도 하나 빨려고 기웃기웃

하다가 등산로 입구에 매점을 하나 찾았다. 언제부터 와서 기다렸는지 중년 여성 둘이 추위에

떨며 가게 앞에 서 있다. 새벽에 와도 매점이 열었을 것이라는 택시기사 말만 듣고 무조건 일찍

왔는데 문을 연 곳이 없다는 거였다.  흠..다들 인심 좀 고약하다. 자기만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으로

앞뒤 안재고 일단 태우고 본거다. 내가 택시를 탔을 때도 아예 미터기를 켜지 않고 정해놓은 금액을

요구한다. 거리를 계산해보면 미터기보다 턱없이 비싼 돈을 받는다. 여행을 하다보면 이런 짜잘한

상술에 짜증이 난다. 하긴 여행이란 게 늘 그런 면들이 있지만. 얄팍한 인심에 조금 짜증이 난다.

게다가 가게 주인은 이미 일어나서 두 사람이 떨고 있는 것을 보았는데도 문을 열어 주지 않는다.
아직 문 열 시간이  안 된건지, 아니면 공짜 손님 받기 싫어 그러는건지 이리저리 눈치만 보면서

열어주지 않는다. 짜증나서 가게 문을 두드렸다. 그랬더니 어디 일을 가야 한단다. 그래서 난

부부가 매점 운영하면서 아저씨는 농사라도 짓는 줄 알았다. 그러려니 하고 그냥 다른 쉴 곳은

없나 여기 저기 두리번. 그냥 올라가볼까 좀 올라가봤는데 너무 어두워서 아직은 무리. 다시

내려왔다. 그랬더니 아저씨는 일을 간 게 아니고 계속 가게 오픈을 준비하느라 부스럭거린다.

그냥 열어달라고 다시 두들겼다. 열어준다. 들어갔다.
뭐라도 안 사먹으면 잡아먹을 눈치다. 컵라면 하나를 샀다. 2천원을 받는다. 이런 쓰벌...

그거야 뭐 흔한 일이니...
올라갈 때 마시려고 보온통에 따뜻한 물을 받는데 천원을 달라고 한다. 헐...대박...
일부러 들으라고 큰소리로 너무하네 했더니 물 데우는데도 전기비가 들어간단다.

그래 너 잘났다. 아 됐어요 그럼 안떠요 하고 투덜대는 사이 물 한 병 다 채웠다.

그렇게 계속 밍기적대면서 적당히 시간을 때웠더니 슬슬 동이 튼다. 자 출발하자.

아저씨 영원히 굿바이. 사람도 없는데 다시 가게 문 닫으숑.
밖에 나가니 어둠 속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던 바위산이 나를 잡아먹을 기세로 서 있다.
푸르기도 하고 붉기도 한 새벽빛을 받으니 비현실적인 느낌에 조금 무서운 기운이 든다.
내 앞에 이런 산이 있었구나.
 

>> 2천원짜리 새우탕..



>> 해가 막 터오고 있다.

월출산은 코스가 그리 길지는 않았다. 가장 긴 코스를 타고 갔는데도 6시 조금 넘어 출발해서 2시

되기 전에 끝났다.
 

천황사 -> 구름다리 -> 천황봉-> 구정봉 -> 억새밭 -> 도갑사로 이어지는 풀 코스는 크게 보면 2구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정상인 천황봉까지 올라가는 길은 바위산 길이고 하산길은 경사가 완만하고 풍경에

변화가 거의 없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다음에 다시 찾는다면 정상에 오른 후에 왔던 길로 다시

하산하는 게 낫겠다. 지리산처럼 지루한 산보다는 설악산처럼 변화무쌍하고 육체적으로도 힘든 산이 좋다.

구름다리는 생각보다 금방 나온다. 천황사를 지나 1시간 정도 가면 바로 구름다리. 봉우리와 봉우리를

이어 만든 구름다리는 길이가 50여미터 밖에 되지 않지만 그래도 오감이 짜릿 짜릿 하다.
게다가 그 이른 새벽에 오르니 다른 사람은 전혀 없다. 사방이 적막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이제 조금씩

밝아지는 시시각각 그림자의 형체를 변화시키며 사방을 신비로 몰아간다. 사방이 탁 트힌 그 중심부에서

구름다리를 건너간다. 그걸 다 건너는 게 너무 아까워서 사진을 찍고 또 찍고. 이 쪽에서 보고 저 쪽에서

보면서 건넜다. 그러나 막상 건널 때는 아래를 쳐다볼 수 없었고 고개를 조금 트는 정도도 힘들었고 그냥

앞만보며 걸었다. 그 흔한 출렁출렁 장난 한 번 치지 않고 그냥 걸었다.

그리고 그 뒤부터는 또 한참 지나온 구름다리를 쳐다봤다. 아까 새벽에 봤던, 조금 늦게 출발한

아주머니 둘이 구름다리 앞에서 한 세월을 보내는 모습이 멀리 보인다. 한참을 기다렸지만 건너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어지간히 떨렸나보다.



>> 해가 떠오른다.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새벽 산행은 더 많은 장관을 연출한다. 새 디카 처음 써봤다.



>> 해가 온전히 떠오르지 않아 살짝 붉은 빛이 감돈다.

그 뒤로는 주로 경치 보는 재미로 가다서다를 반복하며 천천히 올랐다.
산에 사람이라곤 하나 없고 점점 사위가 밝아지며 산은 시시각각 장관을 연출하했다. 묘한 적막감이 좋았고
수묵담채화처럼 겹겹이 계속되는 산들이 멀어지면서 그 형체가 조금씩 희미해지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그렇게 정상에 올라 준비해온 김밥, 주먹밥 먹고 내려갈 땐 슬렁슬렁. 이렇게 새벽행 산행은 기대 이상으로
흡족한 추억을 남기고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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