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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감자와 재판

 

또 다시 넉 달 만에 수감기록이다. 이 수감기록은 순 사기다. 수감생활도 다 끝난 사람이 그것도 서너 달에 한 번 씩 쓴다. 어느덧 출소한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니 이전 기억도 상당히 왜곡되었을 것이 뻔한데 게다가 갖가지 사후 정보나 지식으로 윤색되기 마련이니 이 글은 순전히 날조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되게 뻔뻔한 얘기지만 원래 그렇게 수감기록을 쓸 작정이었다. 안에서 쓰던 일기도, 수감기록도 출소하기 전에 다 버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쓰다가 지겨워서 관뒀다. 아무것도 새로울 것 없는 매일 매일을 보내니, 지금은 참 할 이야기가 많지만, 그 때는 아무 말도 하기 싫었다. 귀찮았고, 힘들었고(할 말이 없는데 억지로 말을 만들어내야 할 때 참 힘들다), 구질구질해 보였다. 그래서 버렸다. 이거 싸들고 나가서 뭐에 쓰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막판에는 하도 쓸 말이 없어서 편지도 거의 쓰지 않았다. 너무 할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펜만 들면 할 말이 없었다.


그러다 시간이 좀 지났다. 아마 몇 달 쯤. 거기서 보이지 않던 것들, 못 보던 것들, 내가 문제의 정 가운데 놓여 있을 때 깨닫지 못하는 것들, 흥분된 감정 때문에 좀체 냉정하게 바라볼 수 없던 것들. 더 냉정하게, 더 솔직하게, 더 처절하게 보이는 게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기억의 총량은 줄어들어도 해석의 총량은 자꾸만 늘어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은?? 그랬다.

시간이 지나니까 차츰 그 때 내가 왜 그랬었는지, 어떤 심정이었었는지, 무엇을 원했었는지  알게 되기도 한다. 그리고 조금은 편한 마음으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감정은 너무 얽히고 뭉쳐 있어서 제대로 이해하기까지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시간이 지나면 가끔은 안 보이던 게 보인다. 이건 누구나 경험하는 인생의 진리다. 이런 일반적인 조건 말고도 새록새록 그 때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건은 많다. 수용시설과 관련된 뉴스를 볼 때면 하고 싶은 말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다 알고 있던 것들이야. 뭘 새삼스럽게 이제와서 떠들어 대는거야? 너희들은 그런 거 원래 몰랐었어?’ 이렇게 냉소적인 반응도 나오고. ‘애초부터 이건 문제가 있었어. 그래서 내가 이런 이런 대안을 생각하고 있었지.’ 이렇게 생산적인 반응도 나온다. 심지어 얼마 전 서울구치소 내 성폭력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었으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와 너무나 가까이 있었던 사람이었을게다. 출소하고 영화 ‘오로라 공주’를 볼 때는 종반부에서 엄정화가 어떤 방식으로 복수에 성공하는 지 구체적인 실행방법을 다 맞춰내고야 말았다. 므훗해하는 내 모습. 대략 좋지 않다.


계기는 많다. 무엇보다 지금 수감 중인 병역거부자들이 보내주는 편지 속에서, 그들이 어떤 상황을 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모습 속에서, 나는 매일 그들의 기쁨과 고통을 느낄 수 있다. 이해한다. 재발견한다. 마음으로 최대한 기쁨과 고통을 함께하려고 노력하면서도 한 편으로는 미안하게도 해석하고 관조한다. 동시에 과거의 나를 해석하고 관조한다. 그 시간에 자신이 얼마나 무미건조했었는지. 얼마나 자주 자학과 가학을 일삼았었는지. 또 얼마나 많이 심사숙고했었는지. 또 얼마나 선택지가 좁았는지. 그래도 나름대로 얼마나 자신이 대견했었는지. 오늘도 날조된 기억 하나를 붙잡고 떠들 작정이다.


얼마 전 병역거부자 김태훈 씨가 1심에서 1년 8개월을 선고받았다. 이는 통상 1년 6개월을 선고하던 기존 관습에 반하는 행동이었다. 우리는 판사가 똘아이라고 욕하며 스스로를 안심시켰고 2심(항소심)에서는 당연히 1년 6개월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항소심이 기각되고 1년 8개월 원심이 확정되었다. 이 소식을 유럽 여행 중에 들었다. 쿵~. 아주 된통 세게 두들겨맞은 느낌. 기분이 나빴다. 아니 아팠다. 숫자상으로는 2개월 차이다. 그런데 수감되어 있는 사람에게는 그게 아니다.


수감생활 초반에 진행되는 검찰수사와 재판은 사람들을 극도로 긴장시킨다. 심하게 위축되기도 한다. 재판 전날이면 어떤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못자고, 이상한 꿈을 꾸기도 한다. 대개 당신에게 의미심장한 어떤 날 전야에는 그런 경우가 많을 테니 이해하기 어려운 일도 아니다.

재판 당일 행동지침에 얽힌 갖가지 미신이 있다. 같은 방 쓰는 사람이 재판을 앞두고 있는 날에는 한 방을 쓰는 사람 모두가 물이나 국에 밥 말아먹으면 ‘재판 말아먹는다’고 금지, 밥에 김 싸먹는 것도 금지, 컵라면도 금지, 비벼먹는 것도 금지, 뭔 놈의 금지가 그리 많은 지. 그런데 이걸 안 지키면 당사자는 아주 불쾌해한다. 미신이라해도 남이 관습을 안 지켜주면 괜히 불쾌하고 불안한 것은 당연하다. 판사의 말 한마디에, 판사가 판결문을 읽는 그 몇 분 사이에, 경우에 따라서는 평생의 운명이 좌우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꼭 고무신만 신고 간다. 전 날부터 고무신을 광이 나도록 깨끗이 닦아두는 사람도 있다. 수능 백일 전날 온갖 선물 주고 받는 거랑 비슷하지 않나? 잘 찍으라고 포크를 선물하는 따위의. 사람들은 아주 긴장되고 힘겨운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제의(祭儀)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어찌 보면 실효성이 없는 일종의 주술행위지만 고난을 이겨내고자 하는 그 나름의 의식적 행동이기도 하다.


나는 글재주가 없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재판부에 제출하는 항소이유서나 반성문을 여러 차례 대필해 준 경험이 있다. 학생운동을 하다가 수감된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이다. 예의 ‘존경하는 재판장님~’으로 시작해서 ‘선처를 부탁드립니다’로 끝나는 그 반성문은 사실 아무 내용도 담고 있지 않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반성문이 큰 효력을 발휘한다고 믿고, 또 실제로 어떤 판사는 반성문을 안 쓰는 자에게 괘씸죄를 적용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심지어 판사의 종교적 성향을 조사해 같은 종교를 믿으며 새로 태어났다고 은근슬쩍 종교적 권위에 기대는 사람도 있다. 늘 어느 재판부에 판사 아무개는 어떤 경향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기 마련이고, 아무개 판사랑 친한 변호사를 찾는다고 돈을 들이 붓는 경우도 있다. 당연한 일이다. 판사의 한마디에 모든 것이 달려 있으니. 판사들은 매순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진지해야 한다. 하지만 여전히 찌질이 판사들도 많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병역거부자 재판 과정에서 우리는 찌질이 판사들을 너무도 많이 만났다.


병역거부 운동에서 다가오는 재판에 대비하는 것이, 판사들의 변화를 촉구하고 형량을 낮추고 보석을 받아내는 것이, 변호사들과 함께 변론을 작성하고 법원에 제출할 병역거부 이유서를 설득력 있게 써내는 것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할 때가 있었다. 그 때는 전례가 없었으므로 모든 과정이 항상 새로운 상황이었고,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그러나 1년 6개월 형이 관습처럼 굳어지면서 수사나 재판과정이 다소 안정되기 시작했다.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은 예외없이 1년 6개월을 받았다. 당연히 그렇게 예상하고 이런 저런 계획도 짜고, 재판에 대비한다. 그런데 예상이 깨졌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속담이 실재하는 상황. 엄습한다. 구치소에서는 일도 없다. 일이 없는 심리적 불안상태. 굉장히 힘들다. 김태훈 씨 소식을 전해듣는 순간 가슴이 답답해졌다. 누구에게 말도 못하고 혼자 고뇌하는 시간을 이겨냈으리라. 그래도 나는 믿는다. 병역거부자들이 강한 사람이라고. 그래서 마음고생 후에 더 강해질 것이라고. 또 바란다. 최대한 빨리 이 상황을 이겨내고 새로운 활력소를 찾기를.


이제 남는 것은 똘아이 판사를 심판하는 일이다. 자신은 판결을 내려보기만 했지 판결을 받아보지는 못했으니 피고인으로 재판정에 서야만 하는 사람들, 소위 피고인의 심정을 잘 모를 것이다. 엘리트 코스만 밟아온 사람들이 남을 판단하는 위치에 서서 가장 강력한 권위를 행사한다는 사실 자체를 어찌할 수는 없다. 누구를 그 자리에 세워도 완전무결한 판결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판사라면, 국가권력의 정점에 서서 남의 인생을 쥐락펴락 하는 사람이라면, 좀 영리해야 한다. 공정하고 냉정해야 한다. 착한 심성을 가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판사는 왜 똘아이인가? 우선, 공부를 안했다. 이론 공부도 안했고 세상물정 돌아가는 공부도 안했다. 그래서 똘아이다. 병역거부자에 대한 판결이 주관적인 감성에 치우치는 순간, 권위는 추락한다. 똘아이가 제 고집을 신념이라 우기기 시작하면 피곤해진다. 볼테르는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의견을 말할 권리를 위해 싸우겠다’고 했다. 적어도 민주사회에서 판사질 하려면 그 정도는 돼야 한다. 국가권위를 빌어 누군가를 판단할 때는, 판사의 개인적 감정이나 주관적 판단에 근거해서는 안 된다. 판사는 판사의 재량을 이야기한다. 법이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얼마든지 재량껏 판결을 내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더 강조하는 것이다. 당신 재량에 한 사람의 삶이 달려 있다고 생각하라. 당신이 판사 앞에 서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라. 영리한 판결이 세상을 움직이기도 한다. 역사적인 판결이 큰 변화의 시발점이 되기도 한다. 어떤 판결은 역사적인 ‘쪽팔림’으로 남기도 한다.

또 있다. 이 판사가 똘아이인 이유. 판사는 무오류의 권력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무오류의 권력이란 민주사회에선 애초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군대, 사법부, 경찰, 검찰, 정당, 국회 등 각종 권력집단의 구성원들이 자신을 무오류의 화신이라 착각하고 있다. 반성도 없고, 회개도 없고, 회한도 없다. 자신의 결정이 항상 옳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누군가는 그 착각을 깨줘야지. 판사님 앞으로 편지나 한 통 쓸까? 신경도 안 쓸텐데...심난한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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