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02/02

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02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1)
    칸나일파
  2. 2006/02/02
    보트하우스(3)
    칸나일파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최호근 지음, 책세상)

 

 

1.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20세기는 학살의 세기였다.

20세기는 폭력의 세기였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린 말들이다. 그 만큼 인류는 또 다른 인류를 상대로 많이 싸웠고, 많이 죽였다. 그래서 결국 국제사회는 최소한의 제어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 제어장치는 한없이 미흡하고 그 미흡한 제어장치마저도 수없이 부정되고 있으나 제어장치를 강화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반인도 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이 있음에도 제노사이드 범죄를 따로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제노사이드 범죄는 반인도 범죄 및 전쟁 범죄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 책은 이런 학술적인 물음에 답할 목적으로 쓰여진, 논문같은 책이다. 그럼에도 곳곳에 배어있는 분노의 목소리가 충분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반인도 범죄나 전쟁범죄로는 규정할 수 없는 특정 집단에 대한 말살계획이 제노사이드다. 제노사이드는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집단학살이다. 국가 내지는 준국가 집단이 시스템을 동원해서 조직적이며 계획적으로 특정 집단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제노사이드 범죄다. 21세기형 범죄인 동시에, 기계화된 인강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범죄다.

 

저자의 분류법에 따르면 가장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범죄는 다음과 같다.

 

1. 프런티어 제노사이드 - 예)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학살, 영국의 테즈메이니아인 학살(호주)

2.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 -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 우생학에 근거한 무차별적 학살

3. 민족과 종교가 결합된 제노사이드 - 예)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4.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제노사이드 - 예) 스탈린 치하의 정치집단 학살/소수민족 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5. 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 - 예) 프랑스의 알제리인 학살

6. 종족 분쟁과 제노사이드 - 예) 르완다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인 학살

 

대부분 얼핏 한 두번쯤은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그 구체적인 정황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위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제대로 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2.

구체적인 상처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함께 아파하고 극복할만한 용기가 있을까? 상처를 외면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래서는 상처를 인정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이건 과거일 뿐이라고,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제주 4.3이나 보도연맹과 같은 한국적 경험이 제노사이드 범죄로 규정될 수 있는 지는 미지수이지만 우리 역시 충분한 집단학살의 경험을 갖고 있는 만큼, 이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50년은 망각의 역사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을 보고 듣고 끝내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도 집단적인 광기 속에서 자라나는 폭력의 씨앗을 본다. 황우석에 대한 집단적 열병과 맹목적인 지지 속에서, 4년마다 반복되는 월드컵에 대한 열광 속에서, 경제적/군사적 강대국을 꿈꾸는 집단적 열기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편한 심기 속에서, 문화적 교류현상이 아니라 국익의 수출로 인식되는 한류 열풍 속에서 그런 광기를 본다.

 

병역거부는 이러한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작은 행동이다. 나는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는 논리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부정되었다. 이건 실제 전쟁이 아니라, 단순한 훈련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신이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그 훈련은 무엇을 전제로 한 훈련인가? 그저 나는 재수 좋게 빗겨가기만을 바랄 것인가? 아주 작은 일부터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걸 부정하고 냉소하다보면 내가 서 있을 자리는 아주 좁아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보트하우스

1

원래 장정일하면 마광수와 함께 90년대 '야한 소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작가라는 인식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내가 작가 장정일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수감 도중에 우연히 '생각(행복한 책읽기)'이란 책을 읽게 되면서다. 장정일의 잡생각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의 생각도 흥미롭지만(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지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인생편력이 흥미를 갖게 만든다.

 

어릴 때 여호와의 증인이었고, 그 핑계로 중학교에서 학교생활을 마감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폭력 전과로 소년원에 갔고 그 곳에서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며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는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을 여러 편 냈으나 점차 소설로 업종전환, 시인처럼 노력 안하고 날로 먹는 인간들이 어딨냐며 강도높게 시창작을 비판.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외설시비가 일더니 급기야 유죄판결로 또 구속. 지금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가 6권까지 발간 되었으며 2000년 '보트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호기심에 읽게 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수감 중 내 독서편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다섯 시면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평생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던 그의 꿈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장정일의 독서일기 6'에서 '독선과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독서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로까지 여겨진다'는 과격한(?) 독서관을 피력하기 시작한 그는 요즘 TV프로그램을 하나 맡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 인기를 타고 한 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의 소설들이 김영사 이름을 달고 다시 나왔다.

 

2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드는 궁금증이 몇 가지 있다.

장정일은 왜 SM이나 변태성욕을 끊임없이 소재로 다뤄왔을까? 

은행원, 소설가를 비롯해서 왜 항상 비슷한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할까?

글쓰는 행위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그래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걸까?

 

장정일은 지루한 일상을 싫어한다. 또 그 일상을 유지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삐딱하다. 반체제적이라기 보다는 반사회적이다. 객기도 있었다. 그의 소설에는 도덕적인 저항 따위를 꿈꾸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항상 변신을 꿈꾸는 인물들이 나온다. 전형적인 샐러리맨으로 항상 은행원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그런 욕망의 표현이다. 가난 속에 성장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소설가로 변신한다. 소설가는 글을 통해 끊임없는 변신을 꿈꾸는 존재다. 장정일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소설만 양산해내는 소설가들을 욕한다. 소설가의 욕망은 뭇대중의 욕망과 달라야 하는데 오늘의 작가는 아파트든 자동차든 대중들이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고 한국 소설은 보나마나한 것이라고 욕한다. 변신, 또 변신. 장정일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 그래서 '보트하우스'에선 카프카의 '변신' 모티브까지 차용해서 소설을 한층 더 난해하게 만든다. 타자기가 된 사람, 저울보다 더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 등등.

 

소설 '보트하우스'에서 애라의 생각을 따라가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되풀이의 연속, 그것이 지옥이다. 따라서 희망 또한 단순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심지어 강남이 천국이라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반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 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은 반복의 유혹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이리하여 그의 소설에는 성행위가 많이 강조되는데, 그것도 평범한 성행위 묘사는 별로 없다. SM과 변태성욕을 긍정하는 이유도 변신의 욕망 때문일까? 아무튼 그가 연애와 섹스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각'에 보면 소파에 연인과 누워 하루 종일 키스하는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섹스를 하는 순간에 순간적인 해방이 자주 이뤄지고, 섹스가 새로운 변신의 출발점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심지어 타자기가 된 여인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자판 한가운데 정액을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섹스가 이제는 변신이라는 적극적인 행위 속에도 가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성적 욕망이 대부분 남성의 언어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겠다.

 

3.

....

 

"화해와 통합은 당신의 관심사가 아닌가요?"

"그건 기업가들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화해와 통합을 통해서 이득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작가는 화해와 통합을 획책해서 부정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에게 경고를 하는 한편 독자에게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합니다. 매개 없는 화해와 통합을 판매의 비결로 삼는 베스트셀러에겐 없는 덕목이지요...(중략)" (보트하우스,162페이지)

 

장정일은 단순히 삐딱하지 않고 시스템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회에 대한 냉소와 반감도 자주 표현된다. 그렇다면 그는 체계적으로 저항을 해 볼 생각은 없는걸까? 아마도 그는 소설이 지나치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만 화해와 통합을 거스르는 일탈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동은 각자의 몫이니까.

 

4.

 

이 쯤에서 왜 소설 제목이 보트하우스인지 말할 수 있겠다. 보트하우스에서 그는 비치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누워 얼음이 둥둥 떠있는 콜라나 마시며 아무 생각없이 사는 꿈을 꾼다. 그는 끝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끝맺었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에게 주문하는 이유는 뭔가?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그 노인처럼 거친 파도와 맞서라고 자신을 유혹해 달라고. 그래서 방치되고 있는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가 건전한 시민의 독서관을 피력하고, 진보적 매체에 기고글을 쓰고, 책소개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건 제 나름의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평생 책만보는 편안한 인생은 이제 쫑난거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애초에 그런 생활이 안맞는 사람이 있다. 그런 생활이 잘 맞게 된다 해도 그 땐 이미 정체성마저 바뀐 후일지 모른다. 그는 아마도 후자를 택하겠지.(하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이 나오면 좋을텐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