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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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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장정일하면 마광수와 함께 90년대 '야한 소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작가라는 인식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내가 작가 장정일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수감 도중에 우연히 '생각(행복한 책읽기)'이란 책을 읽게 되면서다. 장정일의 잡생각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의 생각도 흥미롭지만(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지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인생편력이 흥미를 갖게 만든다.

 

어릴 때 여호와의 증인이었고, 그 핑계로 중학교에서 학교생활을 마감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폭력 전과로 소년원에 갔고 그 곳에서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며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는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을 여러 편 냈으나 점차 소설로 업종전환, 시인처럼 노력 안하고 날로 먹는 인간들이 어딨냐며 강도높게 시창작을 비판.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외설시비가 일더니 급기야 유죄판결로 또 구속. 지금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가 6권까지 발간 되었으며 2000년 '보트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호기심에 읽게 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수감 중 내 독서편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다섯 시면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평생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던 그의 꿈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장정일의 독서일기 6'에서 '독선과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독서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로까지 여겨진다'는 과격한(?) 독서관을 피력하기 시작한 그는 요즘 TV프로그램을 하나 맡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 인기를 타고 한 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의 소설들이 김영사 이름을 달고 다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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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드는 궁금증이 몇 가지 있다.

장정일은 왜 SM이나 변태성욕을 끊임없이 소재로 다뤄왔을까? 

은행원, 소설가를 비롯해서 왜 항상 비슷한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할까?

글쓰는 행위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그래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걸까?

 

장정일은 지루한 일상을 싫어한다. 또 그 일상을 유지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삐딱하다. 반체제적이라기 보다는 반사회적이다. 객기도 있었다. 그의 소설에는 도덕적인 저항 따위를 꿈꾸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항상 변신을 꿈꾸는 인물들이 나온다. 전형적인 샐러리맨으로 항상 은행원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그런 욕망의 표현이다. 가난 속에 성장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소설가로 변신한다. 소설가는 글을 통해 끊임없는 변신을 꿈꾸는 존재다. 장정일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소설만 양산해내는 소설가들을 욕한다. 소설가의 욕망은 뭇대중의 욕망과 달라야 하는데 오늘의 작가는 아파트든 자동차든 대중들이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고 한국 소설은 보나마나한 것이라고 욕한다. 변신, 또 변신. 장정일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 그래서 '보트하우스'에선 카프카의 '변신' 모티브까지 차용해서 소설을 한층 더 난해하게 만든다. 타자기가 된 사람, 저울보다 더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 등등.

 

소설 '보트하우스'에서 애라의 생각을 따라가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되풀이의 연속, 그것이 지옥이다. 따라서 희망 또한 단순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심지어 강남이 천국이라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반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 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은 반복의 유혹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이리하여 그의 소설에는 성행위가 많이 강조되는데, 그것도 평범한 성행위 묘사는 별로 없다. SM과 변태성욕을 긍정하는 이유도 변신의 욕망 때문일까? 아무튼 그가 연애와 섹스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각'에 보면 소파에 연인과 누워 하루 종일 키스하는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섹스를 하는 순간에 순간적인 해방이 자주 이뤄지고, 섹스가 새로운 변신의 출발점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심지어 타자기가 된 여인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자판 한가운데 정액을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섹스가 이제는 변신이라는 적극적인 행위 속에도 가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성적 욕망이 대부분 남성의 언어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겠다.

 

3.

....

 

"화해와 통합은 당신의 관심사가 아닌가요?"

"그건 기업가들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화해와 통합을 통해서 이득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작가는 화해와 통합을 획책해서 부정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에게 경고를 하는 한편 독자에게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합니다. 매개 없는 화해와 통합을 판매의 비결로 삼는 베스트셀러에겐 없는 덕목이지요...(중략)" (보트하우스,162페이지)

 

장정일은 단순히 삐딱하지 않고 시스템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회에 대한 냉소와 반감도 자주 표현된다. 그렇다면 그는 체계적으로 저항을 해 볼 생각은 없는걸까? 아마도 그는 소설이 지나치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만 화해와 통합을 거스르는 일탈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동은 각자의 몫이니까.

 

4.

 

이 쯤에서 왜 소설 제목이 보트하우스인지 말할 수 있겠다. 보트하우스에서 그는 비치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누워 얼음이 둥둥 떠있는 콜라나 마시며 아무 생각없이 사는 꿈을 꾼다. 그는 끝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끝맺었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에게 주문하는 이유는 뭔가?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그 노인처럼 거친 파도와 맞서라고 자신을 유혹해 달라고. 그래서 방치되고 있는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가 건전한 시민의 독서관을 피력하고, 진보적 매체에 기고글을 쓰고, 책소개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건 제 나름의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평생 책만보는 편안한 인생은 이제 쫑난거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애초에 그런 생활이 안맞는 사람이 있다. 그런 생활이 잘 맞게 된다 해도 그 땐 이미 정체성마저 바뀐 후일지 모른다. 그는 아마도 후자를 택하겠지.(하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이 나오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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