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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한겨레]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

현장속 현장ㅣ유재현의 쿠바 탐방기/③ 쿠바의 무상교육

 

 

 

2005년 4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서 쿠바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82페소에서 300페소(12,000원)로 상승했다. 12,000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싶은데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었다. 비결은 배급제도에 있다. 90년대 휘청했던 쿠바의 배급제도는 2000년 이후 정상을 되찾고 있다.

여행 중에 적어두었던 쿠바의 배급 관련 메모를 옮겨본다.(1페소는 40원의 환율로 계산했고 파운드와 온스는 킬로그램으로 바꾸었다.)

“쌀 2.27㎏은 10원. 독한 시가는 3개, 순한 시가는 하나에 40원. 10월부터 초콜릿 가루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1봉지에 320원. 감자 2.72㎏ 40원. 토마토 5㎏ 120원. 생선 매월 312g 68원. 대가리 떼고 꼬리 떼면 남는 게 없다고 불만. 설탕은 백설탕과 흑설탕으로 나누어 1.36㎏씩 배급. 백설탕은 콜롬비아산.(맙소사 쿠바는 설탕수출로 먹고살던 나라였다.) 커피는 매달 142g 200원. 달걀 15일에 6개. 한 알에 36원. 성냥 3-4개월마다 (겨우)한 갑. 한 갑에 4원. 7살 때까지 하루에 우유 1리터. 이후 13살 때까지는 요구르트. 그 뒤로는 없음.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날 케이크 배급.”

 

 

1만2천원으로 한 달 살기

 


이밖에 팥, 돼지고기, 닭고기, 햄, 피카디요(Picadillo), 비누, 세제 등이 배급품목에 포함되어 있으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성인에게는 분유와 생선을 별도로 배급받을 수 있다. 덧붙여 학교와 직장에서의 급식은 무료이다.

공과금은 아바나에서 머무르던 집 고지서를 예로 든다면 전기요금 640원, 수도요금 62원, 가스사용료 200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 집의 노부부는 연금생활자인데 37년을 근무한 부인이 190페소, 43년을 근무한 남편이 231페소를 지급받고 있는 반면 관따나모의 한 할머니는 월150페소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또는 보조금은 은퇴한 노동자, 장애인, 학생 등에게 지급된다.

배급물품은 국영배급소인 보데가(Bodega)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주거지역에 따라 보데가가 정해진다. 보데가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배급물품만 구매할 수 있는 보데가이고 다른 하나는 품목은 거의 동일하지만 배급물량과 상관없이 구매할 수 있다. 단, 값은 배급가보다 비싸다. 보데가의 창고에서 빼돌린 물품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배급물품만으로 한 달을 꼬박 버티기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대략 20일 정도의 필요량을 충당한다. 나머지 필요물품은 국영상점과 페소상점, 농민시장에서 구입한다. 가격은 배급가격의 5배에서 20배까지 높다. 그밖에 달러상점이 있다. 오직 콘버터블 페소로만 지불할 수 있으며 가전제품 등 멋지고 폼나는 수입물품들은 모두 그곳에 죽치고 있다. 월12,000원으로 달러상점 출입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적용하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300페소라면 충분히 최저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 사이의 괴리는 없는 셈이다.

알려진 것처럼 쿠바의 교육은 무상이다. 학제는 초등 6년, 중.고등 3년, 대학 5년으로 짜여 있다. 이 중 의무교육은 9년이다. 교복과 책, 학용품 모두 무상으로 지급된다. 교복은 연간 2-3차례 지급하지만 신발 사정은 나빠 보였다. 적어도 모든 학생들에게 신발이 제대로 공급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고등 학생의 상당수, 대학생의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모두 무료이며 대학생은 학년에 따라 20-40페소의 보조금을 받는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의 학생들은 연금 수준의 보조금을 받는다.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 프로그램을 학교마다 두고 있으며 성인교육 역시 활발하다. 바라코아에서 모아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직업학교에는 20대 중반의 학생도 눈에 띠었고 트리니다드의 전직 치과의사였던 30대 후반인 민박집 주인은 절치부심 직업전한을 목적으로 치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두 공짜라니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교육을 비용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무상이라고 해서 훌륭한 교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심지어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서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보다는 사회와 교육이 어떻게 동거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마련이다.

쿠바의 교육을 폄하할 때 흔히 등장하는 의사를 살펴보자. 의사의 월급은 5-600페소이다. 일반 노동자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지만 의사의 주거이전을 제한하는 쿠바정부의 방침과 교육기간 동안의 불이익을 고려하면 높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쟁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래서야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할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마련이다.

 

 

누가 의사되려 할까마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쿠바에는 인구170명 당 한 명이 배치될 수 있는 6만7천여 명의 의사가 현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의 4배에 달한다. 쿠바에는 또한 (학생이 아닌)인구 36.8명마다 한 명의 선생이 있다. 선생의 월 급여는 400페소 수준이다. 누가 선생이 되고 싶어 하고,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은 왜 누군가 기술자나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일까?

아바나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던 산업공학을 전공한 대졸 출신의 젊은이에게 물었다. ‘접시를 나를 바에야 산업공학은 무엇 때문에 공부했어?’ 짓궂은 질문이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적성에 맞았고 재미있어서 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과서적으로 정답을 말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입문하는 것이 인간적인 교육은 아닌 것이다. 인간적인 교육을 사회가 보장함으로써 쿠바에서 사회와 교육은 이 상식선에서 동거하고 있다.

인간적인 교육은 유전자적인 다양성에 기초한다. 누구에게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가 그것에 순위를 매기고 경쟁에 교육을 이용한다면 교육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1천2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6만7천명의 인간들이 의술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4천8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6만4천명만이 의술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뼈아픈 일이다. 교육의 성과로 배우고 익히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란 성취감일 것이다. 의사라면 아픈 사람을 낫게 한 것, 선생이라면 아이들이 배우게 된 것, 기술자라면 기술이 빛을 발 한 것, 농민이라면 농산물을 생산한 것이 성취감이다. 이 다양한 성취감을 오직 ‘얼마를 벌었는지’로 치환하는 사회라면 인간적인 교육 또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그 사회가 필요한 인력 역시 제대로 육성해낼 수 없다. 경쟁교육은 긴요한 분야일수록 언제나 턱없이 못 미치는 인력만을 공급할 뿐이다.

 

 

영감으로서의 쿠바

 

 

배급과 교육의 예를 들었지만 쿠바는 우리와 다른 사회이다. 모든 이질적인 문화가 그렇듯이 이질적인 체제 또한 영감을 준다. 가치 있는 영감을 얻으려면 보려는 사회의 프리즘으로 비추어보아야 하다. 달러로 환산된 수치만으로 그 나라를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평균임금 1만2천원과 217만5천원 사이에 181배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한 아이의 교육비에 1억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는 사회와 한 푼도 지출하지 않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외진 두메산골의 보건소에 의사와 치과의사, 간호원 1명을 두는 사회와 의사를 찾기 위해 읍으로 도시로 향해야 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 유재현/소설가
 
‘사’자 돌림과 일반 노동자와 실업자의 사이에 넘지 못할 간극이 존재하는 사회와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몰락을 면하고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현실사회주의국가일 뿐인 쿠바. 지구 반대편의 이 이상한 나라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이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쿠바의 시선으로 쿠바를 보면 그 너머에 우리 안의 일상화된 잔혹함과 비인간성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꼴을 볼 수 있다. 그 그림자가 주는 영감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회주의적 영감이 사라진 자본주의만큼 참혹한 체제는 없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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