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2006/02

8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6/02/23
    재밌을 거 같아서 오랜만에....
    칸나일파
  2. 2006/02/19
    친구(1)
    칸나일파
  3. 2006/02/15
    와...(7)
    칸나일파
  4. 2006/02/10
    [펌/한겨레]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
    칸나일파
  5. 2006/02/07
    수감기록을 시작하며...(3)
    칸나일파
  6. 2006/02/07
    또 한 명을 보내며...(2)
    칸나일파
  7. 2006/02/02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1)
    칸나일파
  8. 2006/02/02
    보트하우스(3)
    칸나일파

재밌을 거 같아서 오랜만에....

무화과님의 [앞으로 몇 가지씩이나 남았을까?] 에 관련된 글.

어릴 땐 이런 거 많이 하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내가 좋아하는 숫자는?'

뭐 이런 거까지 전부 일기장에 정리해가면서 말이지..

오래만에 재미삼아 한 번 해본다.

 

 

Four Jobs I’ve had in my life(일생에 가졌던 네 개의 직업)

 

전쟁없는세상책임활동가

(엄마, 아빠는 매일 같이 사무실은 뭐하러 나가냐고 말한다. 갑갑한 일이지... 직장인이라면 이렇게 안 물어 볼텐데..'어이, 김과장 오늘 회사에는 뭐하러 가나?')

 

과외 

(-.-;; 중학교 수학 선생님 아들도 과외 했었다. 그 아이, 재수했다.)

 

집행국

(이거 돈벌려고 해 본 건 과외 밖에 없고. 궁색하다. 채울 게 없다.)

 

교무과 소지 

(궁색하다. 근데 아주 웃기지만 과외 말고 돈 받고 했던 일이 또 있으니 바로 이거다. )

 

I can watch over and over(몇 번이나 다시 볼 수 있는 네 가지 영화)

 

 

지구를 지켜라

(신하균 멋져, 백윤식의 발견, 내 사고 방식의 중요한 부분)

 

708호-이등병의 편지

(찡하다. 사실 이거 빼고 몇 번이나 볼 수 있는 건 없다. 몇 번이나 본 건 있지만.)

 

비트

(똥폼으로 일관하던 나날의 로망. 정우성은 비트에서 환상 그 자체였고, 비트에서 멈춰서버린 것 같다)

 

복수는 나의 것

(송강호의 대사가 모든 걸 말해주고 있다. '나 너 착한 놈인 거 알거든.' 얽고 얽히는 비극의 알레고리)


Four places I have lived(살았던 적이 있는 네 곳의 장소)

 

충남 서천(7살때 서울로 이사와서 기억이 별로 없다.)

 

서울 종암동(잠시 2년간 청량리로 외도한 거 빼고는 20년 넘게 여기 살았다. 그런데 요즘은 아파트가 너무 많이 생겨서 어릴 적 다니던 동네들이 전부 사라졌다. 가난의 기억을 반추할 곳이 없다.)

 

서울 청량리(잠시 2년간 외도했던 곳. 아버지는 경동시장이 붙어 있어서 장보기 편하다고 무지 좋아하셨다. 지금도 틈만 나면 경동시장에 간다.)

 

학생회실(수배 생활 1년 동안 머물렀던 곳. 은박지를 깔고 1년을 살아도 튼튼한 나는 정말 체력이 좋은 거 같다.)

 

 

Four TV shows I love to watch(좋아하는 네 가지 TV 프로그램)

 

네멋대로해라 (처음으로 씨디를 구워 선물할 만큼 괜찮은 드라마)

 

떨리는 가슴(네멋의 인정옥 피디도 함께한 불후의 명작)

 

개그콘서트(나는 개콘 오타쿠...뜨시!!)

 

스타리그(-.-;;)

 


 

Four websites I visit daily(매일 방문하는 네 개의 웹싸이트)

 

진보넷 (주로 몇 몇 블로그를 본다.)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 (아무 생각이 없이도 가게 된다)

네이버 (단 맛에 길들여진 나)

법무부 민원센터(병역거부자들에게 편지 보내기, 전자서신이 있어 편하다)


 

Four of my favorite foods(가장 좋아하는 네 가지 음식)

 

라면

(사시사철 먹어도 안 질린다. 떡라면 먹다가 만두라면 먹다가 최근에는 치즈라면까지 섭렵했다.)

 

설렁탕

(매일 이것만 먹자고 해서 짜증내는 사람이 있을 정도..)

 

부대찌게

(-.-;;)

 

(매끼마다 먹는다.)

 

 


Four places I would rather be right now(지금 있고 싶은 네 곳의 장소)

하늘공원

(봄날에 낮잠자기 제일 좋다.)

 

남산

(평상에 누워 하늘을 본다. 바람소리에 사르륵 거리는 나뭇잎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살. 한 순간 시인이 된 거 같다. 근데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죽치고 앉아 소주를 마실 때가 많기 때문에 찜을 잘해야 한다.)

 

초등학교 운동장

(열심히 뛰노는 아이들을 보면 그냥 행복해진다. 내가 초딩 때는 매일 해질때까지 운동장이 바글바글했는데, 요즘은 아이들이 학원을 많이 다니니까 방과 후엔 운동장이 썰렁하다. 사람들이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아이들이 떠난 자리를 동네 아줌마들이 걷는다. 나는 가끔 뛴다. 기분이 좋다.)

 

바다

(항상 느낌이 다른 거 같다. 항상 무섭고 신비롭다)

 

 

 

Four bloggers I’m tagging(태그를 넘기는 네 명의 블로거)

 

-아랫집 사람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친구

언제부턴가 나는 단체활동과 관련된 경우가 아니고는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는다.

불행한 일이지만 사람들을 만나도 별로 즐겁지 않을 때가 많다.

왜 이렇게 되었는 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부담스럽다.

내가 상태가 좋지 않으면 더더욱 사람들 만나기가 부담스럽다.

 

 

탈출구 같은 것일까? 이런 상태일수록 연애에 더 집착하게 된다.

연애가 잘 되지 않으면 그 때서야 사람들을 찾는다.

위로가 필요하다. 아주 이기적인 욕구다.

내가 힘들 순간이 찾아와야 비로소 타인과 소통하려 하고 타인의 손길을 요구한다.

 

 

이틀 전에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서로 친구라 부를 만한 관계를 맺어본 적도 없으면서, 희한하게 연락이 끊기지 않는 사람.

민망하지만 '친구'라 부르지 않고는 딱히 뭐라 말하긴 힘든 그런 친구.

그 친구는 십년 전, 같은과에 입학했던 동기다.

우리는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 입장이 서로 달라 으르렁 거리던 사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쪽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고 나 혼자 흥분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어이없는 녀석으로 보였을거다.

그토록 맹목적이고 저돌적인 사람일 수 있다는 게 말이다.

그러다 그 친구는 학교를 옮겨 재입학을 했다. 그리고는 서로 연락한 적이 없었다.

 

 

그러다 우리가 다시 만난 것은 아무래도 '병역거부'가 계기가 되었다고 해야 맞겠다.

보석으로 잠깐 나와 있는 사이, 그 친구는 응원의 메세지를 보내왔다.

한 사오년 만에 연락이 닿은 것 같다.

그리고 감옥에 있을 때 면회도 한 번 왔고, 편지도 한 번 보내왔다.

 

 

그렇게 해서 이틀 전, 우리는 다시 만났다.

나는 또 일방적으로 수다를 떨었다. 의외로 친구와 얘기가 잘 통했다.

 

 

 

친구는 내게 힘내라고 동화책 한 권을 선물했다.

동화책 선물, 아주 독특하다. 그 친구는 항상 나 만큼이나 독특하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발버둥칠수록 정작 그 활동가들은 우울하고

아프게 된다는 현실이 갑갑하지. 진짜 좋은 세상을 내 안에 품고 있으면,

나도 저절로 좋고 행복하고 남들 보기에 부러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친구는 속표지 가득 응원의 메세지를 적어두었다.

 

 

그래, 나도 그런 생각으로 가득할 때가 있었다.

너무나 많은 희망을 품고 있어서 하루 하루가 즐겁고

그런 나를 보는 사람들도 덩달아 즐거워지는.

그런데 지금은 왠지 너무 밝고 희망 가득찬 사람을 보면 거.짓.말 같다.

내 마음은 어딘가 모르게 심히 뒤틀려 있는 것 같다.

 

 

'어린 아이같은 마음으로 세상을 살면 기쁜 건 기쁘고 슬픈 건 슬프고 자랑스러울 땐

자랑스러울텐데...'

 

다시 한 번, 그런 마음으로 살아보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와...

블로그 방문자가 벌써 1000명이다.

 

네이버에 있을 때는 하루에 두세명 왔다가는 게 고작이었다.

 

진보넷 블로그 떳나보다. 이 정도인 줄 몰랐다.

 

이거 슬슬, 신경, 쬐금 쓰인다.

 

자기 검열하는 거 아냐...

 

아웃사이더를 자청하는 칸나일파는 슬슬 고민에 빠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펌/한겨레] 유재현의 쿠바 탐방기

현장속 현장ㅣ유재현의 쿠바 탐방기/③ 쿠바의 무상교육

 

 

 

2005년 4월 최저임금을 인상하면서 쿠바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82페소에서 300페소(12,000원)로 상승했다. 12,000원으로 한 달을 살 수 있을까 싶은데 모두들 그렇게 살고 있었다. 비결은 배급제도에 있다. 90년대 휘청했던 쿠바의 배급제도는 2000년 이후 정상을 되찾고 있다.

여행 중에 적어두었던 쿠바의 배급 관련 메모를 옮겨본다.(1페소는 40원의 환율로 계산했고 파운드와 온스는 킬로그램으로 바꾸었다.)

“쌀 2.27㎏은 10원. 독한 시가는 3개, 순한 시가는 하나에 40원. 10월부터 초콜릿 가루를 배급하기 시작했다. 1봉지에 320원. 감자 2.72㎏ 40원. 토마토 5㎏ 120원. 생선 매월 312g 68원. 대가리 떼고 꼬리 떼면 남는 게 없다고 불만. 설탕은 백설탕과 흑설탕으로 나누어 1.36㎏씩 배급. 백설탕은 콜롬비아산.(맙소사 쿠바는 설탕수출로 먹고살던 나라였다.) 커피는 매달 142g 200원. 달걀 15일에 6개. 한 알에 36원. 성냥 3-4개월마다 (겨우)한 갑. 한 갑에 4원. 7살 때까지 하루에 우유 1리터. 이후 13살 때까지는 요구르트. 그 뒤로는 없음. 15살이 될 때까지 생일 날 케이크 배급.”

 

 

1만2천원으로 한 달 살기

 


이밖에 팥, 돼지고기, 닭고기, 햄, 피카디요(Picadillo), 비누, 세제 등이 배급품목에 포함되어 있으며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은 성인에게는 분유와 생선을 별도로 배급받을 수 있다. 덧붙여 학교와 직장에서의 급식은 무료이다.

공과금은 아바나에서 머무르던 집 고지서를 예로 든다면 전기요금 640원, 수도요금 62원, 가스사용료 200원을 지출하고 있었다. 이 집의 노부부는 연금생활자인데 37년을 근무한 부인이 190페소, 43년을 근무한 남편이 231페소를 지급받고 있는 반면 관따나모의 한 할머니는 월150페소의 연금을 받고 있었다. 연금 또는 보조금은 은퇴한 노동자, 장애인, 학생 등에게 지급된다.

배급물품은 국영배급소인 보데가(Bodega)에서만 구매할 수 있고 주거지역에 따라 보데가가 정해진다. 보데가는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배급물품만 구매할 수 있는 보데가이고 다른 하나는 품목은 거의 동일하지만 배급물량과 상관없이 구매할 수 있다. 단, 값은 배급가보다 비싸다. 보데가의 창고에서 빼돌린 물품이 암시장에서 거래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

배급물품만으로 한 달을 꼬박 버티기란 어렵다는 의견이 많았다. 지역과 가정에 따라 편차가 있겠지만 대략 20일 정도의 필요량을 충당한다. 나머지 필요물품은 국영상점과 페소상점, 농민시장에서 구입한다. 가격은 배급가격의 5배에서 20배까지 높다. 그밖에 달러상점이 있다. 오직 콘버터블 페소로만 지불할 수 있으며 가전제품 등 멋지고 폼나는 수입물품들은 모두 그곳에 죽치고 있다. 월12,000원으로 달러상점 출입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 모든 것을 적용하면 4인 가족을 기준으로 300페소라면 충분히 최저생계를 유지할 수 있다. 최저임금과 최저생계비 사이의 괴리는 없는 셈이다.

알려진 것처럼 쿠바의 교육은 무상이다. 학제는 초등 6년, 중.고등 3년, 대학 5년으로 짜여 있다. 이 중 의무교육은 9년이다. 교복과 책, 학용품 모두 무상으로 지급된다. 교복은 연간 2-3차례 지급하지만 신발 사정은 나빠 보였다. 적어도 모든 학생들에게 신발이 제대로 공급되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중고등 학생의 상당수, 대학생의 대부분은 기숙사에서 생활한다. 모두 무료이며 대학생은 학년에 따라 20-40페소의 보조금을 받는다. 석사과정과 박사과정의 학생들은 연금 수준의 보조금을 받는다.

장애인에 대한 특수교육 프로그램을 학교마다 두고 있으며 성인교육 역시 활발하다. 바라코아에서 모아로 가는 길에 지나쳤던 직업학교에는 20대 중반의 학생도 눈에 띠었고 트리니다드의 전직 치과의사였던 30대 후반인 민박집 주인은 절치부심 직업전한을 목적으로 치과 전문의 과정을 이수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 모두 공짜라니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교육을 비용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무상이라고 해서 훌륭한 교육이라고 말할 수도 없다. 심지어 평등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한다고 해서 훌륭하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 보다는 사회와 교육이 어떻게 동거하고 있는지가 더욱 중요하게 마련이다.

쿠바의 교육을 폄하할 때 흔히 등장하는 의사를 살펴보자. 의사의 월급은 5-600페소이다. 일반 노동자보다는 조금 높은 편이지만 의사의 주거이전을 제한하는 쿠바정부의 방침과 교육기간 동안의 불이익을 고려하면 높은 편이라고는 할 수 없다. 경쟁교육에 익숙한 사람들은 ‘그래서야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할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마련이다.

 

 

누가 의사되려 할까마는…

 

 

그러나 현실적으로 쿠바에는 인구170명 당 한 명이 배치될 수 있는 6만7천여 명의 의사가 현업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의 4배에 달한다. 쿠바에는 또한 (학생이 아닌)인구 36.8명마다 한 명의 선생이 있다. 선생의 월 급여는 400페소 수준이다. 누가 선생이 되고 싶어 하고, 누가 의사가 되고 싶어 하는 것일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우리들은 왜 누군가 기술자나 노동자가 되고 싶어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은 궁금해 하지도 않는 것일까?

아바나의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고 있던 산업공학을 전공한 대졸 출신의 젊은이에게 물었다. ‘접시를 나를 바에야 산업공학은 무엇 때문에 공부했어?’ 짓궂은 질문이었다. 잠시 머리를 긁적이던 그는 ‘적성에 맞았고 재미있어서 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교과서적으로 정답을 말했다.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해 입문하는 것이 인간적인 교육은 아닌 것이다. 인간적인 교육을 사회가 보장함으로써 쿠바에서 사회와 교육은 이 상식선에서 동거하고 있다.

인간적인 교육은 유전자적인 다양성에 기초한다. 누구에게나 잘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렇지 못한 일이 있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있다. 사회가 그것에 순위를 매기고 경쟁에 교육을 이용한다면 교육은 인간성을 상실하게 된다.

1천2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6만7천명의 인간들이 의술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히려 4천8백만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데 6만4천명만이 의술을 공부할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 뼈아픈 일이다. 교육의 성과로 배우고 익히게 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대가란 성취감일 것이다. 의사라면 아픈 사람을 낫게 한 것, 선생이라면 아이들이 배우게 된 것, 기술자라면 기술이 빛을 발 한 것, 농민이라면 농산물을 생산한 것이 성취감이다. 이 다양한 성취감을 오직 ‘얼마를 벌었는지’로 치환하는 사회라면 인간적인 교육 또한 제자리를 찾을 수 없을뿐더러 그 사회가 필요한 인력 역시 제대로 육성해낼 수 없다. 경쟁교육은 긴요한 분야일수록 언제나 턱없이 못 미치는 인력만을 공급할 뿐이다.

 

 

영감으로서의 쿠바

 

 

배급과 교육의 예를 들었지만 쿠바는 우리와 다른 사회이다. 모든 이질적인 문화가 그렇듯이 이질적인 체제 또한 영감을 준다. 가치 있는 영감을 얻으려면 보려는 사회의 프리즘으로 비추어보아야 하다. 달러로 환산된 수치만으로 그 나라를 평가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평균임금 1만2천원과 217만5천원 사이에 181배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한 아이의 교육비에 1억 원 이상을 지출해야 하는 사회와 한 푼도 지출하지 않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외진 두메산골의 보건소에 의사와 치과의사, 간호원 1명을 두는 사회와 의사를 찾기 위해 읍으로 도시로 향해야 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 유재현/소설가
 
‘사’자 돌림과 일반 노동자와 실업자의 사이에 넘지 못할 간극이 존재하는 사회와 평등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회 사이에는 몇 배의 차이가 존재하는가.

천국도 지옥도 아닌, 몰락을 면하고 여전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현실사회주의국가일 뿐인 쿠바. 지구 반대편의 이 이상한 나라를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이상으로 이해할 필요가 우리에게 있을까?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쿠바의 시선으로 쿠바를 보면 그 너머에 우리 안의 일상화된 잔혹함과 비인간성의 음습한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꼴을 볼 수 있다. 그 그림자가 주는 영감으로 우리 사회가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다면, 좀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렇게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 사회주의적 영감이 사라진 자본주의만큼 참혹한 체제는 없는 법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수감기록을 시작하며...

1년 3개월을 조금 넘는 수감생활.

그 어느 때보다 많은 글을 읽.고.썼.다.

 

3평이 채 못되는 공간에 7명이 함께 산다. 출입은 불가능하고 방 안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만이 인정된다. 인터넷을 할 수도 없고, 누군가에게 핸드폰을 때릴 수도 없다. 그러면 누구라도 글을 읽.고.쓴.다.

사람들은 잘 보지도 않던 신문을 꼼꼼히 분석한다. 신문 하나로 두시간을 버티는 사람도 있다. 한 번도 써보지 않은 편지를 쓴다고 예의 식상한 문구를 끄집어낸다. '겨울이 가까워오니 바람이 차가워지네요. 감기 조심하세요.' 따위를. 사람들은 갑자기 한문을 공부하고, 영어를 공부한다. 그것도 질리면 네모네모 로직을 구입한다. 그래도 지치면 그 다음엔 월간잡지들을 섭렵한다. 최고 인기가 많은 건 여성지다. 속옷 광고 모델들이 벽지를 대신한다.

 

읽고 쓰는 일은 때로 커다란 즐거움이기도 했지만 어쩔 때는 집착이기도 했고, 어쩔 때는 절박한 몸부림이기도 했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다는 몸부림. 뭔가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몸부림. 결국엔 나는 살아있다는 심리적 보상. 그래서 가끔은 재미도 없는 책을 꾸역꾸역 오기로 읽는다.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이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읽은 책이 쌓이면 시나브로 날아간 시간들이 모두 헛되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자신에게 지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읽고 쓰다가 의도하지 않게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기도 하고 진지한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좀 더 제대로 쓰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그래서 처음엔 일기를 썼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자 쓸 내용이 없었다. 언제나 같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게 지겨웠다. 수감생활 중반을 넘어서면서 독서도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억지로 책을 붙들고, 몇 페이지 넘기지 못하고 다시 덮고. 혼자서 옥신각신 '이걸 읽어 말어' 고민만 하는 시간이 늘어갔다. 이미 지겨움이 다른 모든 욕구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그 만큼 할 일이 없었고, 더 정확히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일희일비의 연속. 하루에도 여러번씩 오르내리는 바이오리듬. 잠자리에서 결심했다가 날이 밝으면 쓰레기통에 쳐박히는 수많은 결심들. 그러기를 반복하다 컨디션 좋은 어느 하루. 이 번에는 일기가 아니라 에세이를 써보기로 작정한다. 그리고 쓴다. 수감기록을. 여러 가지 의미를 부여해가면서. 그러다 또 결국엔 그만두었다.

 

 

출소하고 한참 시간이 지났다.

 

많은 사람들이 수감생활에 대해 물어온다. 곧 수감될 병역거부자들과 후원을 맡을 사람들이 가장 적극적으로 질문 공세를 펼친다. 의.외.로. 나에겐 아주 사소하고 단순했던 일들이 사람들에게는 구체적인 정보가 된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정보를 필요로 한다. 또 단순한 지적 호기심 때문에 궁금해한다. 그런데 알려진 건 거의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을 다녀왔지만 여전히 감옥의 일상은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다. 감옥을 다녀온 사람 누구도 자신을 전과자라고 소개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군대 이야기처럼 술자리에서 자랑스럽게 떠들 이야기가 못된다. 나는 수감기록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병역거부자들은 대체로 집단주의와 위계질서에도 비판적이기 때문에 수감생활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할 말이 아주 많다. 사실은 내가 지루하다고만 느꼈던 그 일상들이 아주 많은 문제들을 시사하고 있었다. 인권을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위계질서를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남성성의 세계를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여기는 군대 못지 않은 현장이다.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에서는 위계적이고 폭력적인 군대 문화의 피해자였던 주인공이 마지 못해 가해자가 되아가는 상황들을 묘사하고 있다. 나는 그 영화를 보는 순간, 많은 경험들이 스쳐 지나갔다. 계속 자의식을 건드려서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수감기록이 필요다는 생각을 굳혔다.

 

또 병역거부를 비판하는 사람들 역시도 병역거부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모르면서  '군대 2년에 비하면 감옥 1년 6개월도 과분하다'고 말한다. 과연 그런가? 난 군대를 안 갔다와서 잘 모르겠다. 제대로 보고 나서 그런 말을 하라고 해야겠다. 함부로 지껄이는 말 때문에 또 한 번 상처를 입는다는 것도 모르면서. 아무 것도 모르는 그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감옥에 갇히는 것만은 막아보자는 입장에서 소극적으로 병역거부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 나는 수감기록을 쓰기로 마음 먹었다. 마치 의무처럼 느껴진다.

 

 

우려되는 건 단 한가지, 술자리에서 계속 내뱉는 군대 이야기처럼 일방적인 설교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배타적인 경험을 소유했다는 이유로 장벽을 만들고 싶지 않다. '넌 경험이 없어서 잘 모를 수 밖에..'라고 말하는 순간, 그건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또 한 명을 보내며...

병역거부를 하고 나서부터 여러 병역거부자들이 수감되는 모습을 지켜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저마다 각자의 표정이 있다. 모두 슬퍼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모두 담담해하지도 않는다. 어떤 이들은 안절부절 못하고 어떤 이들은 담담해하고 어떤 이들은 해석하기 힘든 표정을 짓는다.

 

병역거부자보다 더 힘든 건 그들을 보내는 가족들이다. 표정에서 그 안타까움을 읽을 수 있다. 보통 아버지들은 마지막까지 말이 없다. 아직도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모습이다. 그러나 얼굴에는 두려움이 가득하다. 반면 내가 느끼기에 어머니들은 훨씬 더 적극적인 모습을 보일 때가 많다. 눈물을 흘리는 것도 어머니고, 향후 일정을 캐묻고 수감생활을 꼼꼼히 체크하는 것도 어미니다. 어머니들은 보통 아버지들 보다 쉽게 병역거부의 가치를 인정한다. 최소한 이해하려 애쓴다. 아무래도 경험의 차이가 큰 것 같다. 아버지들은, 동시에 가장이었고 군인이었기 때문에 언제나 두고 두고 자식이 겪게될 사회적 불이익을 생각한다. 앞이 깜깜하니까 당장 해야할 일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병역거부를 긍정하는 데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불과 몇 년 사이에 형량은 반으로 줄었고, 국회에서는 입법이 추진되고 있고, 언론은 끊임없이 병역거부자들을 보여주고 있다. 그 성과들에 만족해하면서 한 명 한 명 수감되는 모습에 무뎌지기도 한다. 각자 영리하게 수감생활을 꾸려가고 더 밝은 모습으로 나오리라 생각하며 편하게 마음을 먹는다.

그러나, 오늘 또 한 명의 병역거부자 재판에 다녀오고 나서 지금 내 기분은 아주 예민하다. 그가 재판을 받고 형사의 손에 이끌려 가고 남은 사람들은 그를 보내며 걱정한다. 오늘 어머니는 냉정하게 다가올 날들을 준비하고, 아버지는 마냥 답답해하시고 이모는 시종일관 불안한 듯 수다를 떨다가 울기를 반복한다. 아버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지만 그런 행동엔 익숙치 못하다.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들은 왜 갇혀야 하나? 그들이 죄인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란?'

물론 그 이유란 열가지도 더 들 수 있다. 그러나 그 열가지 이유인즉, '인간에게 평화란 비현실적인 이상일 뿐'이라는 사고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도 잘 안다.

 

매번 병역거부자들을 보낼 때마다 짜증과 분노와 무기력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안고 돌아온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

제노사이드 - 학살과 은폐의 역사(최호근 지음, 책세상)

 

 

1.

20세기는 전쟁의 세기였다.

20세기는 학살의 세기였다.

20세기는 폭력의 세기였다.

 

 

이제는 진부한 표현이 되어버린 말들이다. 그 만큼 인류는 또 다른 인류를 상대로 많이 싸웠고, 많이 죽였다. 그래서 결국 국제사회는 최소한의 제어 장치들을 마련했다. 그 제어장치는 한없이 미흡하고 그 미흡한 제어장치마저도 수없이 부정되고 있으나 제어장치를 강화시키는 노력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반인도 범죄와 전쟁범죄 규정이 있음에도 제노사이드 범죄를 따로 규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정확히 제노사이드 범죄는 반인도 범죄 및 전쟁 범죄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이 책은 이런 학술적인 물음에 답할 목적으로 쓰여진, 논문같은 책이다. 그럼에도 곳곳에 배어있는 분노의 목소리가 충분히 마음을 아프게 하고, 뒤돌아보게 만든다.

 

반인도 범죄나 전쟁범죄로는 규정할 수 없는 특정 집단에 대한 말살계획이 제노사이드다. 제노사이드는 인종적,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으로 동일한 정체성을 지닌 집단 전체를 대상으로 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집단학살이다. 국가 내지는 준국가 집단이 시스템을 동원해서 조직적이며 계획적으로 특정 집단을 제거하려는 계획이 제노사이드 범죄다. 21세기형 범죄인 동시에, 기계화된 인강성의 바닥을 보여주는 범죄다.

 

저자의 분류법에 따르면 가장 대표적인 제노사이드 범죄는 다음과 같다.

 

1. 프런티어 제노사이드 - 예)북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 학살, 영국의 테즈메이니아인 학살(호주)

2. 나치 독일의 제노사이드 - 유대인, 집시, 장애인,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등 우생학에 근거한 무차별적 학살

3. 민족과 종교가 결합된 제노사이드 - 예)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 보스니아와 코소보의 인종청소

4. 혁명의 이름으로 일어난 제노사이드 - 예) 스탈린 치하의 정치집단 학살/소수민족 학살, 캄보디아 킬링필드

5. 식민화 과정에서 일어난 제노사이드 - 예) 프랑스의 알제리인 학살

6. 종족 분쟁과 제노사이드 - 예) 르완다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학살, 인도네시아의 동티모르인 학살

 

대부분 얼핏 한 두번쯤은 들어 알고 있는 것들이지만, 우리는 그 구체적인 정황을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을까? 위와 같은 역사적 사건들을 제대로 접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

 

 

2.

구체적인 상처를 대면하게 되었을 때 함께 아파하고 극복할만한 용기가 있을까? 상처를 외면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래서는 상처를 인정할 수도, 치료할 수도 없다. 언제나 이건 과거일 뿐이라고, 여기서 그만 멈추고 싶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기 최면이다.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며 제주 4.3이나 보도연맹과 같은 한국적 경험이 제노사이드 범죄로 규정될 수 있는 지는 미지수이지만 우리 역시 충분한 집단학살의 경험을 갖고 있는 만큼, 이제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지난 50년은 망각의 역사였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것, 내가 듣고 싶지 않은 것. 그것을 보고 듣고 끝내는 말하고 행동하는 것으로 변화는 시작된다.

지금도 집단적인 광기 속에서 자라나는 폭력의 씨앗을 본다. 황우석에 대한 집단적 열병과 맹목적인 지지 속에서, 4년마다 반복되는 월드컵에 대한 열광 속에서, 경제적/군사적 강대국을 꿈꾸는 집단적 열기 속에서, 다름을 인정하지 못하는 불편한 심기 속에서, 문화적 교류현상이 아니라 국익의 수출로 인식되는 한류 열풍 속에서 그런 광기를 본다.

 

병역거부는 이러한 시스템에 반기를 드는 작은 행동이다. 나는 시켜서 어쩔 수 없이 가담했다는 논리는 이미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부정되었다. 이건 실제 전쟁이 아니라, 단순한 훈련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럼 실제 전쟁이 일어났을 때 당신이 어디에 서 있을 것인가? 그 훈련은 무엇을 전제로 한 훈련인가? 그저 나는 재수 좋게 빗겨가기만을 바랄 것인가? 아주 작은 일부터 지금 이 순간에 할 수 있는 일들이 있다. 그걸 부정하고 냉소하다보면 내가 서 있을 자리는 아주 좁아진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보트하우스

1

원래 장정일하면 마광수와 함께 90년대 '야한 소설'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문제작가라는 인식 밖에 없었다. 그러다 내가 작가 장정일에게 관심을 갖게된 것은 수감 도중에 우연히 '생각(행복한 책읽기)'이란 책을 읽게 되면서다. 장정일의 잡생각을 모아놓은 책인데 그의 생각도 흥미롭지만(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지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온다) 그의 인생편력이 흥미를 갖게 만든다.

 

어릴 때 여호와의 증인이었고, 그 핑계로 중학교에서 학교생활을 마감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폭력 전과로 소년원에 갔고 그 곳에서 작가가 되기를 결심하며 미친듯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읽기는 무서운 아버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했다. 시인으로 등단해서 시집을 여러 편 냈으나 점차 소설로 업종전환, 시인처럼 노력 안하고 날로 먹는 인간들이 어딨냐며 강도높게 시창작을 비판. 1996년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외설시비가 일더니 급기야 유죄판결로 또 구속. 지금은 '장정일의 독서일기(범우사)'가 6권까지 발간 되었으며 2000년 '보트하우스'를 마지막으로 더 이상 소설은 나오지 않고 있다.

 

호기심에 읽게 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수감 중 내 독서편력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 시에 출근하고 다섯 시면 퇴근해서 집에 들어와 침대에 누워 평생 책이나 읽었으면 좋겠다던 그의 꿈은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장정일의 독서일기 6'에서 '독선과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 독서는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로까지 여겨진다'는 과격한(?) 독서관을 피력하기 시작한 그는 요즘 TV프로그램을 하나 맡을 정도로 유명해졌다. 그 인기를 타고 한 동안 찾아보기 힘들었던 그의 소설들이 김영사 이름을 달고 다시 나왔다.

 

2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드는 궁금증이 몇 가지 있다.

장정일은 왜 SM이나 변태성욕을 끊임없이 소재로 다뤄왔을까? 

은행원, 소설가를 비롯해서 왜 항상 비슷한 캐릭터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할까?

글쓰는 행위는 그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걸까? 그래서 무엇을 전달하고 싶은걸까?

 

장정일은 지루한 일상을 싫어한다. 또 그 일상을 유지하는 사고방식에 대해서도 삐딱하다. 반체제적이라기 보다는 반사회적이다. 객기도 있었다. 그의 소설에는 도덕적인 저항 따위를 꿈꾸는 인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항상 변신을 꿈꾸는 인물들이 나온다. 전형적인 샐러리맨으로 항상 은행원을 등장시키는 이유도 그런 욕망의 표현이다. 가난 속에 성장하고 부양해야 할 가족 때문에 일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그가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소설가로 변신한다. 소설가는 글을 통해 끊임없는 변신을 꿈꾸는 존재다. 장정일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평범한 소설만 양산해내는 소설가들을 욕한다. 소설가의 욕망은 뭇대중의 욕망과 달라야 하는데 오늘의 작가는 아파트든 자동차든 대중들이 욕망하는 것을 똑같이 욕망한다고 한국 소설은 보나마나한 것이라고 욕한다. 변신, 또 변신. 장정일의 소설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 그래서 '보트하우스'에선 카프카의 '변신' 모티브까지 차용해서 소설을 한층 더 난해하게 만든다. 타자기가 된 사람, 저울보다 더 정확하게 무게를 측정하는 사람 등등.

 

소설 '보트하우스'에서 애라의 생각을 따라가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되풀이의 연속, 그것이 지옥이다. 따라서 희망 또한 단순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는 것, 그것이 희망이다. 심지어 강남이 천국이라면, 거기 사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반복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반복으로부터 우리를 가장 크게 구해 내는 건 사랑이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랑은 또 보고 싶고, 또 만나고 싶고, 또 만지고 싶은 반복의 유혹으로 우리를 구원한다. 그래서 사랑은 가장 큰 희망이다

 

이리하여 그의 소설에는 성행위가 많이 강조되는데, 그것도 평범한 성행위 묘사는 별로 없다. SM과 변태성욕을 긍정하는 이유도 변신의 욕망 때문일까? 아무튼 그가 연애와 섹스의 가치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생각'에 보면 소파에 연인과 누워 하루 종일 키스하는 순간이 정말 행복하다는 표현이 나온다. 섹스를 하는 순간에 순간적인 해방이 자주 이뤄지고, 섹스가 새로운 변신의 출발점으로 묘사되는가 하면, 심지어 타자기가 된 여인이 다시 사람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자판 한가운데 정액을 뿌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섹스가 이제는 변신이라는 적극적인 행위 속에도 가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성적 욕망이 대부분 남성의 언어로 전달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야 하겠다.

 

3.

....

 

"화해와 통합은 당신의 관심사가 아닌가요?"

"그건 기업가들이나 정치가들이 하는 거지요. 왜냐하면 화해와 통합을 통해서 이득을 챙길 수 있으니까요. 진정한 작가는 화해와 통합을 획책해서 부정 이익을 챙기려는 집단에게 경고를 하는 한편 독자에게 깨어 있을 것을 권고합니다. 매개 없는 화해와 통합을 판매의 비결로 삼는 베스트셀러에겐 없는 덕목이지요...(중략)" (보트하우스,162페이지)

 

장정일은 단순히 삐딱하지 않고 시스템을 잘 아는 사람이다. 사회에 대한 냉소와 반감도 자주 표현된다. 그렇다면 그는 체계적으로 저항을 해 볼 생각은 없는걸까? 아마도 그는 소설이 지나치게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만 화해와 통합을 거스르는 일탈을 보여주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행동은 각자의 몫이니까.

 

4.

 

이 쯤에서 왜 소설 제목이 보트하우스인지 말할 수 있겠다. 보트하우스에서 그는 비치파라솔 그늘 아래 긴 의자에 누워 얼음이 둥둥 떠있는 콜라나 마시며 아무 생각없이 사는 꿈을 꾼다. 그는 끝내 아무 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끝맺었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에게 주문하는 이유는 뭔가? 노인과 바다'에 등장하는 그 노인처럼 거친 파도와 맞서라고 자신을 유혹해 달라고. 그래서 방치되고 있는 보트가 물살을 가르며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그가 건전한 시민의 독서관을 피력하고, 진보적 매체에 기고글을 쓰고, 책소개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건 제 나름의 노력을 시작했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침대에 누워 평생 책만보는 편안한 인생은 이제 쫑난거다. 합리적으로 설명할 순 없지만, 애초에 그런 생활이 안맞는 사람이 있다. 그런 생활이 잘 맞게 된다 해도 그 땐 이미 정체성마저 바뀐 후일지 모른다. 그는 아마도 후자를 택하겠지.(하고 생각한다) 다음 소설이 나오면 좋을텐데...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