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대학 모집공고

from 잡기장 2009/01/22 16:38

드디어 2009학년도 불교대학 모집공고가 떴다.

 

종교보다 가르침으로서의 불교철학을 공부해 볼 생각이다.

 

http://www.jungto.org/search/notice.html?sm=v&p_no=10&b_no=39181&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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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2 16:38 2009/01/2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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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정부 출범 이후 나타난 여느 사건들과 같이 이번 용산 철거민 참사 역시 현 정부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그대로 보여주었다고 본다.

 

무엇보다 발화의 위험성이 있었음에도 별다른 설득 없이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조기 진압을 시도한 것은 현 정부가 무엇을 더 우선시 하는가를 가감없이 드러낸 하나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여론을 보면 이번 사건 역시 찬반으로 뜨겁다.

 

조중동을 위시한 보수언론과 여당은 철거민들의 화염병 사용을 부각시키며 부당한 폭력(심지어는 테러라고 표현하고 있다)에 대한 경찰의 정당한 공권력 행사라고 정당화시키고 있고, 철거민들의 사망은 안타깝지만 이는 검찰의 수사를 통해 그 원인과 책임이 규명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야당과 일반 시민들은 경찰특공대까지 투입하여 과잉진압한 경찰을 규탄하며 철거민들을 사망에 이르게 만들 만큼 시급한 진압이 필요했는지 묻고 있다. 그 바탕에는 1년 동안 쌓인 현 정부에 대한 강한 불신이 깔려 있다.

 

인터넷 글들을 보면 네티즌들의 주장은 대략 이렇다.

 

(경찰 및 정부 옹호자들의 입장)

 

1. 대부분의 다른 철거민들은 이주를 하였는데 남은 철거민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생때를 부리고 있기 때문에 진압은 정당하다. 즉, 철거민들의 농성에 정당성이 없다.

2. 철거민들이 시너와 염산, 화염병을 투척하고 있었기 때문에 진압은 불필요했다. 일반 시민들에게 피해가 가는 것을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3. 다른 시민단체가 합류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서둘러 진압을 해야 했다. 경찰은 검거한 철거민들 중에 상당수는 다른 곳에 사는 사람이었다며 전문 시위꾼의 개입이 있음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의견들을 보면 대체로 철거민들이 화염병과 염산 등을 사용한 것이 부당하며, 이것이 경찰의 논리에 상당한 힘을 실어주게 된 느낌이다. (경찰이 주장하는 다른 시민들에게 피해가 간다든지 전문 시위꾼의 개입설 등은 논점을 흐리는 전형적인 플레이로 대다수 시민들은 이를 이미 간파하고 있는 듯 하다)

 

(철거민 옹호자들의 입장)

 

1. 그들은 생존권이 걸린 싸움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들이 정부의 뜻대로 거기서 나가게 된다면 먹고 살 일이 더욱 힘들게 된다. 이런 상황이라면 폭력진압이 아니라 정부가 나서 타협을 했어야 했다.

2. 화염병 등의 사용이 옳은 건 아니지만 용역깡패와 경찰들이 그들을 내쫓기 위해 폭력을 휘두를 것이 명확했기 때문에 자위 수단으로서 인정해야 한다. 화염병을 사용했다고 그들의 싸움이 정당성을 잃는 것은 아니다.

 

어느 입장이던 간에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가슴 아파하고 있다. 당연한 거 같지만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공감대가 형성되었다는 건 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역사적으로 입장이 다른 쪽을 죽이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사회가 얼마나 많았던가를 생각해보면...

 

사건이 흘러가는 양상을 예측해보면, 두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되다가 검찰의 조사결과가 나오고나면, 아마도 그 결과는 정부는 사망한 사람들에 대한 도의적인 유감은 표하지만 자신들의 과실은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정당한 법집행은 반드시 필요했다란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할 가능성이 클 거라 예상된다. (사태가 어찌되었든 검찰의 조사결과가 경찰의 과실로 밝혀질 거라고 생각하는 국민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주위 사람들과 얘기해보면 두 입장 다 나름 수긍가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찬반이 갈린다. 이번에 사망자가 없었더라면 여느 철거민들의 싸움처럼 묻혔겠지만, 평소에는 경찰력의 법집행에 손을 들어주는 사람이 좀 더 많은 거 같다. 철거민은 이기적인 사람들이고 경찰은 그 사람들을 정리하는 집행자의 이미지인거다.

 

두 입장의 근거들은 나름 수긍할만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 쉽게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하지만 후자의 입장에 있는 나로서는 답답하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은 안타깝지만, 사회의 정의를 지키기 위해 설득의 여지도 없이 장기 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몰아내는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설득이 충분했는가? 보상이 타당했는가? 정당한 절차에 따라 했는가?

 

 

이 문제들도 분명하게 규명을 해야 하겠지만, 이 질문들은 핵심이 아니다.

나는 근본적인 문제는 현 정부의 사람에 대한 태도에 있다고 본다.

 

여차 하면 공권력이란 이름으로 포장된 폭력을 동원해 해결하겠다는 편의주의적 발상의 근본에는 사람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없다. 정부를 이끌다보면 국민들에게 커다란 영향력을 끼치는 선택을 해야하는 상황에 자주 부딪히게 되고 결국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된다. 선택은 그 결과가 단순히 일회적이거나, 무조건 다수를 위한 것이어서만도 안되며 정치인의 특성상 자신이 대변하는 이익집단도 대변해야 할 만큼 복잡한 성질의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결정의 근본에는 인간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고, 국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국민이 국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철학이 기본이 깔여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의심이 여지가 없다. 이 정부에는 그런 철학이 있는가?

 

나는 노무현 정부의 경우 그 정부의 성격이 어떻든 최소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라크 파병이나 FTA추진 등 진보단체에서 보기에 배신감을 느낄 정도로 어이없는 결정을 할 때도 그 결정을 하게 되기 까지 국가의 미래에 대한 깊은 고민이 깔려 있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이건 노 전 대통령의 평소 행실과 언변을 통해 느낄 수 있고, 그건 상당부분 진실이었다고 생각한다. (감추려고 해도 감출 수 없는 건 있기에).

 그리고 정치인들이 최소 인간에 대한 따뜻함이 있어야 국정철학을 토론하고 승부하는 민주주의의 기본틀이 마련된다고 본다. 인간중시라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었기 때문에 사사로운 이익을 국민의 이익인양 포장하려 하지 않고 무엇이 더 국민을 잘 살게 하는가에 대한 토론이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유토피아를 말하고 있는건가?

 

다시 돌아와서, 이번 정부의 지난 1년간의 태도를 보면 인간에 대한 따뜻함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더 화가 나는 건 말끝마다 '국민을 위해서'를 붙인다는 거다. 정치인이니 그 속성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마음 속에선 위선자를 볼 때의 증오가 끓어 오른다.

 

이번 사태에서 정부가 농성중인 철거민을 단순히 공사를 방해하는 이익집단이라는 시각을 넘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인간으로써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고 믿고 있었더라면 이런 결과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입법권과 공권력에 사법권까지 쥐고 흔드는 정부가 무슨 일을 하든 언제나 변명의 여지는 존재하고, 그로 인해 찬반이 갈리는 논란은 끊임없이 발생할 것이다. 우리가 그 논란에 뛰어들어 찬반을 가리는 동안 누군가는 또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죽어갈 수 있고, 누군가는 인간다운 대우를 받지 못하고 공권력에 희생될 것이다. 합의하기 어려운 찬반의 논란 속에서 이런 일은 계속해서 반복될 것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질문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했단 말인가? 그냥 설득하면서 마냥 기다리거나, 그들의 요구를 전부 수용해 해결해야만 했나? 그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사실 나도 그 답이 궁금하다. 비판자가 반드시 대안을 제시할 필요는 없지만 대안 없는 비판은 언제나 공허함만은 남긴다고 믿기 때문에 반드시 생각해 볼 문제다. 좋은 대안은 찬반을 아울러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고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부분일 것이므로.

 

나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나 원론적인 접근만으로도 해결은 가능하다고 본다.

 

우선 일단 의심스러운 것은 남은 철거민들이 정말 돈 한 푼 더 뜯어내려고 남았을까 하는 문제와 정부가 성심성의껏 그들의 생존권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노력하였는가이다.

 

그들이 법에 따라 명시된 돈만 받고 나섰을 때 그 돈으로 현재의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면 형식적인 논리로 그들을 이기적이라고 몰아부칠 수 없다고 본다. (그들이 얼마를 받게 되었는지, 다른 이들은 얼마를 받고 그곳을 떠났는지는 알 수 없다)

 

국가가 소득에 따라 차별적인 세금을 걷는 것과 철거민들의 삶을 돌볼 의무를 가지는 것은 상통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기대를 버린지 오래지만) 조중동과 정부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런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과연 정부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했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보단 '화염병'으로 상징되는 행위에 초점을 집중시키고 있단 거다. '왜?'가 빠진 조중동의 변하지 않은 잣대는 한국사회를 병들게 하는 대표적인 요인이다. 나를 미워하는 측이 이런 잣대를 사용해 나를 평가할 때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소름이 돋는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민들은 조중동의 의도대로 '그들이 왜 그랬을까?'란 질문엔 그다지 관심이 없다. 마치 왜?란 질문이 사태의 본질에 접근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인 것을 모르는 양..

 

 

결론은 이렇다.

 

1. 철거민들을 이렇게 내몰게 된 원인을 철저히 파악할 것. 사람을 죽여도 정당방위라면 감안이 되듯 이들이 정말 생존권을 위해 싸운 거라면 정상참작이 되어야 한다. 법을 어겼다고 처벌하기 앞서 먹고 살 여지는 마련해줘야 하는 게 아닌가. 국민을 죽이는 법이라면 그건 법도 아니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그 원인 제공요인(법이든 정부든)의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2. 만약 이들이 갈 곳이 충분한데도 돈 벌이를 위해 집단이기주의로 똘똘뭉친 사람들이라는 것이 명백히 드러난다면 그에 맞는 처벌을 하면 된다. 법조항이 없다면 만들면 되고, 동일한 원인으로 다시 이런 사태가 일어난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공권력을 투입하면 된다. 대신 이런 조항들은 형평성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3. 궁극적으로 법과 규정을 가능한 완벽하게 갖춰 이런 분쟁의 소지가 있을 때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겠다. 또한 특히 경쟁이 심한 우리나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현하기 힘든 일일 수도 있지만, 사람이 우선이라는 기본이념을 일깨우는 교육과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겠다.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누가 잘못했는가에만 초점을 맞추면 머지않아 이런 사건은 다시 일어날 것이다.

무엇이 문제였던가에 집중하고 그걸 해결하려고 노력할 때 명랑사회 건설에 다가설 것임은 초딩도 아는 상식이다.

 

 

+1. 이번 참사와 관련된 내용 링크

 

현장 진입을 요구하는 현역 의원을 폭행한 경찰

 

용역깡패들의 횡포

 

경찰의 입장

 

철거민들의 비현실적인 보상금

 

'2억 들인 식당에 보상비는 5천만원'

 

2005년 오산진압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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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1 18:14 2009/01/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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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초중고를 거쳐 대학에 이르기까지 제대로 된 교육은 커녕

16년 동안 '착한 산업인력화 수술'을 받고 심각한 휴유증에 시달리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써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무궁한 답답함과 개선욕구를 가지고 있다.

 

미래 학자 엘빈 토플러가 그랬던가?

 

대한민국의 기업은 9점인데 교육은 1점이라고.

 

크게 공감한다.

 

초중고등학교 교육도 별 볼 일 없지만,

특히나 비판적 사고를 가진 지성인을 배출해야 하는 대학이 쓰레기장이 된지 오래다.

 

좋은 글이 있어 링크하려던 김에 끄적거림.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090120081606219&p=pressian&RIGHT_COMM=R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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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20 18:09 2009/01/20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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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돌아가는 꼬락서니가 정말 심상치 않다.

 

경제 어려운 거야 전 세계적 현상이니 일단 그렇다 치더라도

이를 해결해야 할 의무가 있는 정부의 일하는 꼬라지를 보면 정말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이다.

 

지금 나라 상태를 보면 

앞으로 나가는 건 사치요,

얼마나 뒤로 덜 후퇴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있는 듯 하다.

(삼천포로 가려는 MB와 그걸 막으려는 국민들)

 

민주주의의 기본도구인 논리와 토론, 설득은 어디다 팔아먹었는지

수시로 말이 바뀌는 주장(방송법), 헌법을 무시하는 법개정(집시법), 괘씸죄라는 절대권력시대에서나 볼 법한 권력기관의 행패(미네르바 구속) 등 두목이 명령을 내리면 무조건적 복종이 판치는 조폭사회에서 벌어지는 비합리적인 일들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기껏 정부가 명분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선진사회 건설? 경제 살리기? 민생 안정?

 

아, 초딩도 알만한 거짓말을 하는 그들은 부끄럽지도 않을까..

자연스레 욕하게 만들어서 사이버 모욕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책략인 것인가?

 

한 나라를 이끈다는 거대 정당과 소위 지도자들의 수준이 어찌 이렇단 말인지 상식적인 판단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허나 좀 냉정하게 생각하여 그네들이 바보가 아님을 감안할 때, 

이런 비합리적인 것들은 의도된 것일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어이없는 사건들을 계속 일으켜서 반대파들을 선명히 하고,

각종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그들의 싹을 자른다.

그런 후 편하게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다.

 

이런 시나리오 아닐까?

 

권력의 속성상 그렇다 쳐도

MB정부의 지난 1년을 돌아봤을 때 실소를 금치 못하겠는건

그들의 수단이 너무 졸렬하기 때문이다.

 

나는 한나라당이 추구하려는 정책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비판을 해야지)

MB나 한나라당이 부자당인거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정권을 잡았으니 주요 자리에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 심는 건 민주주의 사회라면 기본이다. 그래야 국민의 지지를 업고 선출된 정부가 국정철학을 구현할 수 있으니까.

 

문제는 양식있는 국민들이라면 이젠 진절머리가 나겠지만

수시로 말바꾸는 태도, 토론하면 드러나는 논리의 빈약함, 권위주의, 불공정, 비합리 등이 정부의 주요 수단이고 이게 국민들을 열받게 하는 거다. 한마디로 철학도 없고 논리도 없단 얘기니까. 그런 빈약한 논리를 갖고 안 먹히니까 무력을 사용하려 한다.

옛날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학교선생들이 즐겨 사용하던 "대들면 맞고 보는거다"식.

 

21세기 민주사회에서 왕권통치로 나아가려는 삐그덕거림이 가속화되고 있다.

 

사설이 길어져버렸다.

 

원래 하려던 얘기는 양식있는 만화가들이 MB악법에 대한 만화를 연재하기로 하였단 기사를 보고 공감이 가서 돌려보고자 하였던건데..

 

1화는 강풀이 그렸는데 글로 이해하는 거보다 훨씬 낫다.

이럴 땐 만화가 가진 힘이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건강한 민주사회에서 살고 싶은 분들은 한 번씩 읽어봅시다!

 

 

(출처)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052103&CMPT_CD=P0000&CMPT_CD=P0000

 

(참고글) s리장님의 관련 글 (무단 링크함 -_-;)

http://blog.jinbo.net/save_nature/?pid=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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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9 17:37 2009/01/19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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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버터플라이

from 잡기장 2009/01/17 14:29

Le Papillon (The Butterfly) / 프랑스 / 2002

 

감독 : 필립 뮬 (Philippe Muyl)

출연 : 미셸 세로(Michel Serrault), 클레어 부아닉(Claire Bouanich)

 

 

금요일 저녁, 일찍 퇴근을 하고 대학로로 달려갔다.

흥행할 거 같지 않은 이 프랑스 영화를 의외로 몇 군데 CGV에서 올려놓고 있어

전망 좋은 자리가 남은 대학로를 선택하였다.

(참고로 대학로 CGV는 팝콘이 맛없다;)

 

줄거리는 이곳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http://bloggernews.media.daum.net/news/2369618

(마우스 오른쪽 클릭 후 새창에서 열기로 보세요)

 

화질이 엉망이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프랑스 영화 특유의 과장 없는 연출과 유머는 익숙하지 않고 밋밋하다.

얼마전 더폴에서 본 뛰어난 영상미 탓인지 이 영화의 자연은 그저 뒷동산 같은 느낌이었다.

내가 헐리웃과 한국상업영화의 강한 인스턴트 맛에 길들여져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유럽영화는 대체로 나랑 잘 안맞는 듯 하다.

 

비록 강력한 감동을 안겨주진 않지만

영화는 인생에서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준다.

 

패러글라이딩을 하려는 커플들이 비행을 앞두고 

무서워하며 포기하려는 여자에게 '나를 사랑한다면 증명해봐'라고 말하는 남자를 보고

곧 헤어질 커플이라고 말하는 할아버지.

 

'왜?'라는 꼬마의 질문에

'사랑에는 조건이 있어서는 안된다. 사랑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라고 대답하는 할아버지.

 

어린 딸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소중한 사람이 내가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사랑한다고 표현하라'고

충고한다.

 

'우리가 100살을 사느냐 150살을 사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인생이란 똑깍똑깍 매 순간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에게는 그 순간순간(찰나)이 중요할 뿐이다.'

 

이 영화의 묘미 중 하나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할아버지와 꼬마가 주고 받는 노래다.

 

서로의 질문에 재치있게 대답을 하는데

가장 인상깊었던 건,

 

'왜 저녁이 되면 햇님은 숨나요?'

 

'그건 다음날 반대쪽에서 나타나 우리를 놀래키기 위해서란다'

 

프랑스식 유머인가 보다^^

 


 

(둘은 영화 내내 빠삐용을 외치는데 자꾸 절벽 위에서 탈출을 감행하던 더스틴 호프만의 '빠삐용'이 생각나 집중을 방해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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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7 14:29 2009/01/17 1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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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fe de Los Maestros (부에노스 아이레스 탱고카페), 2008

 

감독 : 미구엘 코헨

출연 : 호라시아 살간, 레오폴도 페데리코 외 전성기 때 한가락 하던 연주자들 다수

 

 

메인곡 : Carlos Garcia Y Orquesta - Al Maestro Con Nostalgia

(MP3를 구하지 못해 링크를 걸어둠. 새 창으로 열어서 들으세요 -_-)

 

(탱고는 노인과 젊은 여인이 춰도 잘 어울린다)

 

사실 영화는 상당히 산만하게 전개된다.

밋밋하면서도 산만한 전개 탓에 92분이라는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중간중간에 시험에 드는 시간이 있다.

 

혹자는 영화의 대미를 장식하는 연주만으로도 전반부의 힘든 시간을 참아낼 가치가 있다고 하였지만 너무 기대해서였을까, 제대로 한방 터뜨려주길 기대했던 마지막 연주회 장면이 과도한 편집으로 흐름이 끊기는 경우가 많아 집중을 방해하였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충분히 감동적인 이유는 단지 탱고의 음율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니다.

과거의 영광을 누렸던 왕년의 연주가들이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모여 연주회를 준비하는 모습은 그들이 활동했던 시기이자 탱고의 전성기였던 4,50년대의 기록화면과 겹쳐지고, 그들에게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공연이라는 엄숙함이 탱고의 경쾌한 선율과 어울려 묘한 감정을 불러 있으킨다. (실제 연주를 준비한 23인의 평균 연령은 80세 이상이었며, 영화 촬영 기간 중 3명이 작고하셨다..)

 

탱고의 시대가 지나며 남미가 경제위기를 겪고, 70년대 이후 디스코와 같은 서양 음악이 탱고의 자리를 대신하면서 그들의 존재도 쓸쓸히 잊혀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탱고는 아르헨티나가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을 나타냄과 동시에 그들의 화려했던 젊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탱고의 선율은 경쾌한 듯하면서도 뭔가 우수에 젖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런 느낌이 영화의 전개와 잘 맞아떨어지는 듯 하다. 공원에서 남녀노소 구분없이 탱고를 즐기는 그들의 모습은 나의 현재를 돌아보게 만들고, 미래를 꿈꾸게 해준다. 

 

 

영화 전반부에 이런 말이 나온다.

 

"탱고를 듣고도 가슴이 떨리지 않는다면, 그 시간에 다른 걸 하는 게 낫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정신인가?

열정적인 탱고를 듣고 가슴이 떨리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럼에도 가슴 떨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감정이 메말랐다고 비난을 퍼붓기보다 그 시간에 자신의 마음을 동하게 만드는 다른 것을 찾아 보라며 따뜻하게 조언을 해준다.  

 

만약 이것이 탱고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면 탱고는 다른 장르와의 경쟁을 택하기 보단 열정 추구하는 모든 행위에 동등한 가치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열린 예술이라 할 수 있다. 탱고는 자신에게만 관심을 가져달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불사르는 모든 행위는 아름답다고 전하는 것이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열정을 찾아라. 그것이 탱고가 아닐지라도.'

 

비약인지는 모르겠지만 체게바라가 추구했던 평등과 연대 정신을 그의 조국을 상징하는 음악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별로 관계는 없을 듯 하다 -_-)

 

저 한마디에 꽂혀 

눈빛이 살아있는 노인네들이 연주하는 탱고를 가슴 깊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읽어볼만한 꺼리]

 

거장들의 탱고, 시네아트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욕망과 애환

 

영화 배경설명

 

관련기사 모음

 

아르헨티나(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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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5 08:12 2009/01/15 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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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he Fall

from 잡기장 2009/01/11 23:22

The Fall, 2006

 

감독 : 타셈 싱(Tarsem Dhandwar Singh, India)

주연 : 카틴카 언타루(Catinca Untaru), 리 페이스(Lee Pace)

 


 

영화에 대한 리뷰는 아래를 참조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요즘 능력있는 블로거들이 참 많다.

 

더 폴 - 영화에 대한 사랑이 넘치는 타셈 싱의 동화

 

(극중 공주가 입은 옷. 혹시 훗날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부인될 사람에게 입히고 싶은 마음이 드는.. -ㅅ-)

 

감독은 'The Sell'(2000)을 만든 인도인인데, 어릴 때 히말라야 산기슭에서 수학을 한 뒤 미국으로 넘어가 영화를 공부하였다고 한다. 뛰어난 영상으로 호평을 받는 감독이란 평을 볼 때 왠지 그가 히말라야에서 접한 대자연의 웅장함에 매료되어 제작하는 영화마다 영상에 공을 들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감독은 한 작품을 만드는데 최소 5년 이상을 공들이는 특유의 장인정신을 발휘하는 감독이다.

 

이 영화도 제작에 6년 이상 걸렸다는 것과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갈 때 알 수 있듯이 전 세계를 돌며 아름다운 자연을 CG없이 담아낸 것은(장소섭외에 무려 17년이 소모되었단다) 감독의 영화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배우들이 등장하는 만리장성이나 에펠탑 등 이동이 쉽지 않았을 것이 뻔한 장면이 0.1초만에 휙휙 지나가는 것은(어쩌면 제작진들이 의상만 입었을 수도 있지만-_-) '어.. 저래도 돼?' 라고 오히려 걱정이 될 정도로 화통한 감독의 성격을 보여주었다. 파란 마을을 구현하기 위해 CG를 사용하기 보다 마을에 페인트를 나누어 주어 칠하도록 주민들을 설득하였다는 수고로움도 이 감독에겐 당연한 과정일 뿐인듯 하다.

 

재미와 영상, 감동 모두를 느낄 수 있는 영화로 적극추천!!

 

+1. 일요일 저녁, 후배 덕에 뜻하지 않게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영화를 보게 되어 흐뭇하다^^ (이대 ECC 안에 생긴 아트하우스모모에서 봤는데 그간 CGV등 대형 체인만 기웃거린 나로서는 놓친 좋은 영화가 많았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2. 이 영화의 전반적인 평이 '스토리는 좀 어설프지만 영상이 아름다운 영화'인 듯한데 내 소감은 좀 다르다. 이 영화는 영웅들의 모험이 주 스토리가 아니라 알렉산드라와 로이의 현실 세계에서의 관계가 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영웅들의 모험이 허황되고 연관성이 엉망인 것은 로이가 어설프게 지어내었단 걸 표현한 것이지 결코 구성을 대충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영웅들이 모험이 제대로 되었더라면 그저그런 영화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어설픈 모험이 로이의 상황과 아이의 천진난만한 상상력을 더 잘 표현해 주었기에 중간중간 웃음이 뻥 터지는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었다.

 

+3. 여주인공 꼬마애 너무 귀엽다 ㅎㅎ

(카틴카 언타루, 1997년 생?!)

 

[기억에 남는 대사]

 

로이 : "나는 맹세한 적이 없어. 맹세했을 때 손가락을 꼬았기 때문에 그 맹세는 무효야"

 

진지한 상황에서 터지는 이런 유머는 정말 최고다!^^

 

왜 이 영화가 메이저에 안 걸리는 거지? 걸리면 대박날 거 같은데...

 

 

[검색하다 발견한 참고자료들]

 

영화 '더 폴'의 촬영지, 인도의 블루시티 조드푸르


씨네21 (영화를 보신 분이라면 꼭 읽어보세요!) 

 

타셈 싱 감독의 뮤직비디오 모음

 

더 폴의 촬영지1

 

더 폴의 촬영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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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23:22 2009/01/1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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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Man from Earth

from 잡기장 2009/01/11 13:07


♪ 'Forever', Chantelle Duncun ♪

 

만사천년을 살아온 크로마뇽이 있다.

 

그는 신기하게도 성인이 된 이후 늙지 않았기에 동료들로부터 때론 추앙받기도 하고, 때론 사탄으로 몰리기도 하였으나 어떤 경우에도 그는 한 곳에 오래 머무를 수가 없었다.

 

빙하기가 지나고 지구가 점차 따뜻해지자 그는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길고 긴 여행을 시작하였고, 새로운 부족과 문명을 만나면 한동안 거기에 합류해 살곤 하였다. 그러다 사람들이 유독 그만 늙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릴 즈음이 되면 그는 홀연히 떠나곤 하였다. 그는 질병에 걸려 여러번 죽을 고비에 처했으나 용케 살아남았다.

 

세월이 흘러 도시국가가 형성되면서 이동이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국가 간 경계가 뚜렷하게 되면서 이동에 제약을 받게 되고 새로운 도시에서 그는 이방인으로 배척받거나 심지어 스파이로 오인받기도 하였다. 그는 몇 번이나 적응에 실패하게 되자 결국 도시국가를 떠나 원시부족사회로 돌아갔으나 그곳에서도 그리 오래 생활하지 못하였고, 결국 다시 동쪽으로의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현재 인도라 불리는 곳에 도달한 그는 당시 활동하던 부처의 소식을 듣고 그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게 된다. 부처의 제자가 되어 크게 깨달은 그는 다시 서쪽으로 발길을 돌려 사람들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전파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는 동양에서 배운 의술을 활용하여 병자들을 고치고 사람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가르침을 전파하며 로마의 지배하에 있는 지역에서 활동한다.

 

그를 따르는 추종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명성이 커지자 로마는 그를 국민들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다시 떠나기로 마음 먹고, 동양에서 익힌 운신법을 활용하여 심장박동을 일시적으로 줄여 사람들이 그가 죽었다고 믿게 만들었다. 그러곤 사람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빠져나오려 하였다. 그의 무덤을 지키던 추종자 몇몇은 죽었던 그가 걸어나가는 모습을 보았고, 그는 사람들에 의해 부활한 신의 아들이라 칭해지며 전설이 되었다.

 

그는 그곳을 떠났지만 그의 가르침은 신화와 결합, 종교화 되어 2천년동안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종교로 자리잡게 된다. 그는 자신이 훗날 예수라 칭해지며 자신이 전파하고자 한 가르침은 왜곡되고, 수많은 신화와 이권으로 점철된 조직이 세상을 지배하는 모습을 목도하게 된다.

 

그는 그 후에도 좀 더 세련된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며, 그가 늙지 않는다는 것을 주위에서 알아차릴 즈음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 'Man from Earth(2007)'의 줄거리를 재구성한 것이다.

 

영화는 1시간 반 동안 각계의 전문가들이 이사를 떠나는 한 교수의 집안에 모여 떠드는 내용이 전부이다. 그러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은 영화로 강추!!

 

원시인이 죽지 않고 살아온 것이 사실인가를 공방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지만 단연 하이라이트는 예수에 관한 부분이다. 주인공이 자신을 예수였다고 밝히며, 현재 전파되고 있는 대부분의 신화들은 구라이며 왜곡된 것이라고 말한다. 독실한 신앙심을 가졌던 신학교수는 엄청난 혼란과 분노를 느끼며 그가 예수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한다. 최근 어머니께서 열심히 예수를 믿음으로써 행복을 되찾는 것을 봤던지라 종교에 대해 관심이 어느때보다 증가되어 있었던 나는 이 장면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왜 신학교수의 혼란과 부정에 거부감이 들었을까?

 

거의 모든 종교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으나

믿음은 진실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믿음은 경전에 기록된 사실에 기반해서 형성되는 듯 하지만 실은 믿음을 위해 기록이 사용되어 진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일단 믿음이 만들어지고 나면 사실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믿음은 없는 것도 만들어 낼 수 있고,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해주는 강력한 도구가 된다. 나아가 믿음은 신앙의 시작이 된 토템사회부터 현재의 소위 문명사회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강력한 통치수단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나는 믿음하면 십자군전쟁이 떠오르고, 히틀러와 일본 전체주의가 떠오르고,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떠오른다. 믿음에 기반하여 보면 모든 폭력은 정당하지 않은 것이 없게 되어버린다. 믿음(정확히는 종교)에 거부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믿음은 그 위험성 만큼이나 무척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믿음을 통해 암치료를 편안한 마음으로 극복하였으며 부정적인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었다. 어머니의 변화를 통해 가정은 화목하게 바뀌었고, 행복함이 넘치게 되었다.

 

나는 어머니를 보면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본질은 결국 자신을 내려놓고, 남을 생각하는, 다시 말해 욕망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이타적 행위를 통해 행복을 공유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종교인만 있다면 세상이 어지러울 이유는 없다.

 

결국 믿음이 갖는 강력한 긍적적 효용성을 고려한다면 '어떤 믿음이어야 하는가' 라는 원론적인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나아가 믿음이 행복을 위한 순수한 도구로 사용된다면 행복을 위해 굳이 믿음만이 전부가 아닐 수도 있다.

 

대부분의 종교가 신을 철저히 믿고, 그 신의 말씀에 충실히 따름으로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본다면, 불교는 부처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자신의 내면을 변화시킴으로서 행복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행복을 느끼는 행위는 비슷한 모습으로 구현되지만, 그걸 위해 사용되는 엔진은 '믿음'과 '성찰'이라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믿음에 나를 내던질 준비는 되어 있지 않으므로, 불교를 택하였다.

 

 

믿음은 빠르지만 위험하나

성찰은 느리지만 안전하다.

 

나는 성찰을 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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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1 13:07 2009/01/11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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