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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심법요(傳心法要)

 무심(無心)이 도(道)

 

모든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이 무심도인 한 사람에게 공양 올린 것만 못하다.

그것은 무심한 사람에게는 일체의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진여 그대로인(如如) 몸이 안으로는 목석 같아서 움직이거나 흔들리지 않으며,  밖으로는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막히거나 걸리지 않으며,  주관 객관의 나뉨은 물론 일정한 방위와 처소도 없다.

후학들이 감히 법에 들어오지 못하는 까닭은 공(空)에 떨어져 닿아 쉴곳이 없을까 두려워 해서인데,

이런 태도는 막상 벼랑을 보고는  물러나서 거기다가 널리 지견(知見)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구하는 자는 쇠털처럼 많아도 정작 도(道)를 깨친 이는 뿔과 같이 드물 것이다.

문수보살은 이치(理)에, 보현보살은(行)에 해당한다.  이치란 진공(眞空)으로서 걸림없는 도리이고,

행실이란 형식을 벗어난 끝없는 실천을 말한다.  관세음보살은 자비를, 세지보살은 지혜를 상징한다.

유마는 깨끗한 이름[정명]이란 뜻인데,  깨끗하다는 것은 성품을 두고 하는 말이고,

이름은 모습의 측면에서 한 말이다.  성품이 모양과 다르지 않으므로, 그를 정명거사(淨名居士)라 한 것이다.



누구나 한마음을 여의지 않아서 깨치면 곧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도를 배우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서 깨달으려 하지 않고 마음 밖의 경계인 모양에 집착하여 오히려 도를 등지고 있다.

간지스강의 모래란 , 이 모래는 모든 불보살과 제석, 범천 및 하늘 무리들이  자기를 밟고 지나간다 해도 기뻐하지 않고,  소나 양.벌레.개미 등이 자기를 밟고 지난다 해도 성내지 않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또한 간지스강의 모래는 보배나 향기를 탐하지도 않으며,  똥.오줌 냄새나는 더러운 것도 싫어하지 않는다.   이런 마음이 곧 무심한 마음으로서.

모든 모양을 떠난 것이다.

이렇게 무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완전한 깨달음이다.  도를 배우는 사람이 그  당장 무심한 상태가 될 수 없다면,

그 사람은 여러 겁 동안 수행해도 도를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것은 성문.연각.보살의 단계적인 공부에 얽매여 해탈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마음을 증득하는 데는 더디고 빠른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은 이 법문을 듣는 즉시 한 생각에

무심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10신(十信).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무심을 얻기도 한다.

그러므로 더디거나 빠르거나 무심을 얻으면 그만이지 거기에 더 닦고 증득할 것이 없으며,  참으로 얻었다 할 것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여 허망하지 않는 것이니 당장 한 생각에 깨친 것과  10지를 거쳐 깨친 것이 효용에 있어서는 꼭 마찬가지여서 다시 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없다.

그렇지 않으면 다만 긴 세월 동안 헛되이 괴로움을 받을 뿐이다.



선악(善惡)을 짓는 것은 모두 모양에 집착하기 때문인데 모양에 집착하여 선악을 짓게 되면.  허망하게 윤회의 수고로움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  무엇도 한마디 말에 본래의 법을 문득 스스로  깨닫는 것만 같지 못하다.   이 법 그대로가 마음이어서 마음 밖에는 아무 법도 없으며,  이 마음 그대로가 법이어서 법 밖에는 어떠한 마음도 없다.   그런데 마음 그 자체는 또한 마음이라 할 것도,  무심이라 할 것도 없다.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없앤다면 마음이 도리어 있게 된다.

다만 묵묵히 계합(契合)할 따름이다. 모든 사유와 이론이 끊어졌으므로 말하기를 '언어의 길이 끊기고  마음 가는 곳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이 마음이 본래 청정한 부처인데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지녔으며 꿈틀거리는 벌레까지도  불보살과 한 몸으로 다를 것이 없다. 다만 망상 분별 때문에 갖가지 업과를 지을 뿐이다.





供養十方諸佛이 不如供養一箇無心道人이러니 何故오 無心者는 無一切心也라 如如之體가 內如木石하야

不動不搖하며 外如虛空하야 不塞不碍하며 無能所無方所하며 無相貌無得失이라, 趨者가 不敢入此法은

恐落空無棲泊處라 故로 望崖而退하야 例皆廣求知見하나니 所以로 求知見者는 如毛하고 悟道者는 如角하니라,文殊는 當理하고 普賢은 當行이시니 理者는 眞空無擬之理요 行者는 離相無盡之行이니라,

觀音은 當大慈하고 勢至는 當大智하고 維摩者는 淨名也니 淨者는 性也요 名者는 相也니 性相不異故로

號淨名이니라,

諸大菩薩所表者는 人皆有之하야 不離一心이니 悟之卽是니라, 今學道人이 不向自心中悟하고 乃於心外에

着相取境하야 皆與道로 背하나니라, 恒河沙者는 佛說是沙니 諸佛菩薩과 釋梵諸天이 步履而過하야도

沙亦不喜하며 牛羊充蟻가 踐踏而行이라도 沙亦不怒하며 珍寶馨香을 沙亦不貪하며 糞尿臭穢도

沙亦不惡하나니

此心이 卽無心之心 이라 離一切相이니라,

衆生諸佛이 更無差別이니 但能無心하면 便是究竟이니라,

學道人이 若不直下無心하면 累劫修行하야도 終不成道이니 被三乘功行 拘繫하야 不得解脫이니라,

然이나 證此心이 有遲疾하니 有聞法하고 一念에 便得無心者하며 有至十信十住十行十廻向하야

乃得無心者하며 有至十地하야 乃得無心者하니 長短得無心하야 乃住요 更無可修可證이며 實無所得이나

眞實不虛하니 一念而得과 與十地而得者로 功用恰齊라 更無深淺이니 祈是歷劫에 枉受辛勤耳니라

造惡造善이 皆是着相이라 着相造惡하야 枉受輪廻하며 着相造善하야 枉受勞苦하나니

摠不如言下에 便自認取本法이니라,

此法이 卽心이라 心外無法하며 此心이 卽法이라 法外無心이어늘 心自無心하며 亦無無心者하니

將心無心하면 心劫成有라 默契而已요 絶諸思議故로 曰 言語道斷이며 心行處滅이라하나니,

此心이 是 本源 淸淨佛이라 人皆有之요 蠢動含靈과 與諸佛菩薩이 一體不異언마는

祈爲妄想分別하야 造種種業果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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