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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쏘공 조세희 인터뷰

“노동자들 신음소리에 숨이 막힌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우리시대 난장이들을 위하여
 
힘겨운 말이었다. 말하는 이가 힘겹게 뱉어내는 말이었고, 듣는 이의 마음을 깎아 힘겹게 만드는 말이었다. 그의 언어는 ‘절규’였다. 그의 강의도 절규였고, 그와의 인터뷰도 절규였다. 쏟아낸 말을 세상에 뿌려대며 그는 절규했고, 말이 뽑아낸 더운 땀방울을 닦으며 또 절규했다. 30여년 전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으로 절규했던 그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절규하고 있었다. 손으로 쓰진 않았지만 몸으로 쓰고 있었고, 침묵하고 있었지만 침묵 속에서 치열했다.
 
그, 조세희.
 
그는 극도로 말을 아끼는 사람이다. 인터뷰는 물론 기고도 하지 않는다. 모두가 키득거리는 시대, 침묵보다 못한 너스레는 말장난일 뿐이었다. ‘한 말발’ 하는 사람들이 시대를 논하고 정의를 외칠 때, 그는 쉽게 혀를 놀릴 수 없었다. 침묵은 희망이 사라진 시대를 책임지는 그 나름의 의식이었다.   
 
그런 그를 만나고 싶었다. 노동자들이 총파업에 나서고 있는 이때, 총파업 첫날부터 비바람과 눈바람이 살을 때리는 이때, 노동자들을 격려해 줄 그의 한 마디 말을 듣고 싶었다. 역시 그는 숨고 숨었다. 쓰지 않는 작가가 함부로 말하는 건 옳지 않다는 뜻에서였다.
 
월간 <삶이 보이는 창>이 마련한 르포문학 강좌에서 그가 강의를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극구 사양하던 그를 노동문학운동 하는 후배들이 강권해 만든 자리라 했다. ‘험한 길’ 가는 후배들 돕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을 그렇게라도 부추겼다고, 그 후배들이 말했다.
 
생떼를 써 보기로 했다. 무작정 찾아가서 강연을 들었고, 며칠 후 또 찾아가서 만났다. 여러 번 전화를 주고받았고, 그는 또 여러 번 사양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입을 연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노동자와 약자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었다. 맞다. ‘사랑’, 그 외엔 달리 찾을 단어가 없다.
    
이 글은 <삶이 보이는 창> 강의와 개인 인터뷰, 그리고 수 차례의 전화통화 내용을 종합해 재구성한, 그에 대한 궁핍하고 작은 ‘조각글’이다.
 
63세인 그는 담배를 참 많이 피웠다.
 
“노동자들 신음소릴 듣는다”
 
“숨이 막힌다”고 했다. 전방위적 공세에 고통스러워하는 노동자들의 신음소리를 매일 같이 듣는다고 했다. 정규직 중심의 민주노총이 비정규직 차별철폐를 위해 총파업에 나서야만 하는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처한 오늘이 그를 제대로 숨 쉴 수 없게 만든다고 했다.
 
“파견근로 전면 시행과 임시직의 자유로운 사용이 가능토록 하는 정부의 비정규 노동법 개악안을 막으려고 총파업에 나섰다는 ‘11·26 파업 결의문’을 나도 읽었어. 800만 비정규 노동자로도 모자라 모든 노동자를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버릴 노동법 개악안이 국회에 상정됐고, 바로 이것은 1천500만 노동자를 눈물나는 비정규직으로 만들어 자본에게 더 큰 이윤을 보장하겠다는 의도라는 지적도 거기 들어 있었어. 지난 몇 년 동안 난 정부와 관료, 국내외 자본이 힘 합쳐서 우리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단 한 점의 인정도 안 두고 퍼부어 대는 끔찍한 폭격을 봐왔지. 내가 작가라 그런지 밤낮을 안 가리고 퍼붓는 그 끔찍한 폭격소리와 상처 입은 국민이 극도의 아픔을 못 이기고 내는 신음소리를 나는 들었어. 그 동안 얼마나 많은 가정이 파괴되었는지 생각해 봐.” 
 
그는 아팠다. 하루에 네 가지 약을 먹고 있었다. 조금 과하게 집중하고 신경을 쓰면 이가  흔들린다고도 했다.
 
“몸만 늙는 게 아냐. 다 늙어. 사랑도 늙고, 분노도 늙어. 내 희망도 늙는 거 같고. 그때마다 내가 소멸해 간다는 느낌을 받아. 태어나서 자라고 반목과 갈등을 계속하다, 이대로 끝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을 요즘 해. 내 성격이야. 60년대 이후로 한국사회의 흐름과 반목을 해 왔어. 너무 긴 세월이야. 40년이 넘었으니까.”
 
동시대인들이 시대에 몸을 맡겨 떠밀리고 쓸려가며 명예를 얻었을 때, 그는 시대와 반목했다. 흐르는 시간이 몸의 저항력을 빼앗아 가는 동안에도, 현실에 대한 그의 꼿꼿한 비판의식만큼은 건드리지 못했다.    
 
“이건 내가 후배 문학도들을 만날 때 하는 말인데, 내가 ‘난쏘공’을 쓸 때는 노동자들이나 핍박받는 사람들이 자신들을 억압하는 적들만 무너뜨리면 된다고 생각했어. 그때는 독재권력과 악덕 대기업, 그게 투쟁의 전부였으니까. 지금 상황은 그때보다 몇 배나 더 복잡해졌지. 착취의 방법은 더 교묘해졌고, 더 악랄해졌어. 국민이 3대에 걸쳐 세계 최장시간 착취 중노동을 해 주었는데도, 머지않아 선진 제1세계에 도착해 온 국민이 행복하게 잘 살 거라던 우리 조국은 지난 시절 범죄 독재자들이 수도 없이 약속한 그 꿈같은 낙원에는 근처에도 못 가보고, 당장 내일이 안 보이는 절망의 늪으로 끌려와 깊이 빠져 버렸어.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나는 숨이 막혀. 그래서인지 지금 우린 나침반 하나 없이 밀림 속을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그러나 나는 무엇보다 역사의 진보를 믿고, 시간이 지나면 밀림에서 나와 앞이 확 트인 개활지를 언젠간 보게 될 거라 믿어. 유럽 68혁명 때 그쪽 현장의 한 젊은이가 말했던 대로, 우리가 어떤 구조를 제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그 구조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면 안 돼. 그러나 빠져 나온 뒤에 갈 곳이 없다면, 우리는 그것에서 빠져 나올 수도 없을 거야.”
 
시간이 흐르고 상황은 복잡해졌다. 적도 색깔을 바꿨다. 볼 때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옷을 갈아입는다. 타깃을 정해 화살을 쏘려 하면 금새 색깔을 바꿔 적이 아닌 것처럼 꾸민다. 자신들이 동지라 불렀던 사람에게 비수도 꽂는다. 최근 노무현 대통령이 노동운동 진영을 겨냥해, ‘그들만의 노동운동’이라 비판한 일, ‘귀족노조’란 논리가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나가는 현실을 그는 “정치꾼들이 만들어낸 분열”이라 표현했다.     
 
“매일 여기저기서 수도 없이 뿌려대는 정치·경제적 언사들에 대해 나는 말할 게 없어. 저희 편리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지는 말들은 늘 문제의 핵심을 벗어나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야. 일반 국민이 그렇듯이 정치인들도 자기가 아는 것만큼만 말해. 물론 이 ‘앎’에는 그들이 왜곡시키는 것만큼이나 잘못도 많지. 이런 왜곡에 많은 국민들도 동의하는 건 정말 두고두고 분노할 일이지만, 문제 많은 나라의 국민들이 그런 것처럼 우리 국민도 죄 많이 지어 온 캄캄한 부패 정치꾼들이 바란 대로 ‘분열’된 상태인 거야.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에 사는 우리에게 이 분열은 또 다른 비극이지. 나는 이 나이가 되도록 선거철이 되면 정치꾼들이 되뇌는 말, 즉 ‘조국과 민족을 위해’ ‘굳은 신념 갖고’ ‘일관된 생애를 사는’ 사람을 아무리 눈 씻고 찾아도 찾을 수 없었어. 우리가 정말 신뢰할 수 있는 그런 아름다운 정치인은 실수라도 이 땅에 단 한 사람도 태어나지 않았으니까.”
 
조세희 선생은 여러 번 ‘중복성원’을 비판했다. 여기에도 속하고 저기에도 속하는 사람들, 그들의 언어와 행위는 우리에게 상처만 줄뿐이라고 했다. 더 이상 아름다울 수 없는 말로 독재에의 항거를 외쳤던 사람들이 그 독재자의 후예들에게 부역하며 떵떵거리는 현실을 이야기하며, 그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말은 빨라졌다. 쉽게 내뱉고, 쉽게 주워담는 그들을 그는 ‘괴물’이라 했다.
 
“‘누구누구를 위하여’는 사실상 있을 수가 없어. ‘민중을 위하여’가 어딨어. 한국사회에서 이 시간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은 부자든가, 도둑이든가, 바보 중에 하나야.”
 
언어는 배반당했다. 그래서 그는 더 말수를 줄이며 살았다.   
 
“공무원노조, 아무도 죽일 수 없다”
 
전국공무원노조에 대한 정부와 여론의 맹폭에도, 그는 몸서리쳤다. 
 
“나는 정말 무서운 것은 ‘무지’라는 생각을 종종 해. 나 자신은 어느 노조의 조합원도 아니고, 정말 아무 것도 아니지만 우리 공동체 안의 일들을 생각하다 보면 공포심에 사로잡힐 때가 많아. 이런 공포심을 제대로 설명하기란 쉽지 않아. 파업 참가자들에 대한 전원 중징계·파면·해임 또는 ‘전교조식으로 복직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말들을 쉽게 하는데, 아직 정리하지 못한 가까운 과거의 일들에 사로잡혀 있어서 그런지 우리 시대의 이런 무지와 잔인함에 난 몸서리가 쳐져. 이때 들리는 파면·해임·복직불가라는 말이 내게는 ‘너희는 직장에서 쫓겨나고, 너희 가정은 이 어려운 시절에 경제적 압박을 못 이겨 파괴되고, 너와 가족은 피눈물을 흘릴 것'이란 말로 들려. 막말로 ‘우리말 안 들으면 너희는 죽는다!'는 뜻이야. 그러나 이걸 알아야 해. 긴 독재시절 함께 죄 짓고 그 죄의 단물 빨며 잘 살아 온 썩어문드러진 인간들이 자기들한테 좋도록 우리나라가 더 오래 재난에 빠져 허덕이게 하고 싶겠지만, 우리 역사는 오늘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어. 무엇보다 공직사회 개혁과 부정부패 척결을 앞세운 공무원노조를 이젠 아무도 죽일 수 없어.” 
 

공무원노조 파업은 3일 만에 끝났고, 정부는 파업참가자 처벌에 분주하다. 처벌에 소극적인 자치단체엔 각종 불이익을 주겠다고 위협하고 있고, 거부하는 자치단체장은 검찰에 고발했다. “전교조 때처럼 복직되는 일도 없을 것”이란 말도 수 차례 강조하고 있다. 과거 전교조에 엄청난 시혜를 베푼 것처럼.   
 
“전교조 때를 운운하지만, 그때 권력이 얼마나 무지했어? 공포심도 엄청나게 조장했고. 그런다고 전교조가 죽었나? 정약용 선생의 <목민심서>를 보면 부정부패로 잘 산 조선의 공무원 이야기가 수도 없이 나와. 백성을 못 살게 괴롭힌, 말로 다 못할 악한 도둑 공무원 이야기도 있어. 거기엔 가난한 백성을 울리며 세금 열을 거두어 다섯을 국가에 바치고 다섯을 저희 집에 몰래 숨기는 이야기, 더 심할 땐 두셋을 국가에 바치고 일고여덟을 도둑질해 축재하는 이야기까지 나와. 조선은 깊은 속병이 들어 모로 쓰러져 누웠고, 내부의 적들인 이 부정부패한 자들은 쓰러진 조선을 뜯어먹으며 통통하게 살이 쪘어. 비쩍 마른 불행한 백성과 달리 저희만 행복하게 잘 산 거야. 공무원노조 이야기를 하다가 조선의 부패 공무원, 무지와 탐욕·잔인·부도덕성 때문에 역사에 ‘나라 망하게 한 내부의 적’으로 기록된 옛날 도둑들 이야기까지 했는데,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아주 간단해. 이번에 파업에 참가해 이미 끔찍한 고통을 받기 시작한 공무원노조 조합원들이 조선이 아닌 현대 한국의 더러운 부정부패에 연루되고 말 그대로 부도덕한 집단이라면, 공무원노조는 스스로 와해돼서 한국에 존재할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나 내가 보기엔 정반대야. 모든 운동에 앞장선 사람들은 우리 공동체의 전체 구성원들과 비교할 때 무엇보다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지. 그들은 먼저 갖가지 악조건과 싸워 이긴 다른 노동조합이 그랬던 것처럼 조국의 캄캄한 현실 때문에 눈물을 흘려본 사람들이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무거운 고통의 짐을 지고도 좀더 나은 우리의 미래를 위해 아름다운 꿈을 꾸는 사람들이니까.” 
 
세상과 불화하는 사람 
 
근래 사람들은 그의 얼굴을 자주 접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그가 글을 발표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지만 실은 그의 이름을 우린 도처에서 듣고 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는 공안연구소가 아직 그의 ‘난쏘공’을 ‘용공문건’에 올려두고 있단 사실이 드러났고, 도처에서 발표하는 한국대표작가에 그의 이름이 오르고 있으며, ‘난쏘공’이 중고등학생 논술자료로 빠지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이름만이 아니다. 그는 실제 몸으로 우리와 함께 있었다. 반전평화운동 조직에 참여했고, 때마다 진보정당 지지선언을 했으며, 무엇보다 각종 집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노동자 집회엔 거의 빠지지 않는다. 몸이 아파도 사진기를 둘러매고 집을 나선다. 그 사진기로 노동자들의 숨결을 느끼고, 호흡한다.  
 
“가끔 집회장엘 가서 사진을 찍어. 사진을 찍으려면 현장에 있어야 돼. 현장에 못 가고선 찍을 수 없지. 내가 카메라를 들고 어딜 간다는 것은 현장 깊숙이 들어가는 거야. 글을 쓰는 사람은 집에서 써도 돼. 하지만 사진은 아니지. 현장에서 현장을 호흡해야 돼. 사진기를 대고 있으면 노동자들 숨소리가 다 들려. 내가 글도 못 내놓고 있는데, 노동자 친구들 외로움 탈 수 있으니까 내가 가서 외로움의 분량이 줄어들 수 있다면 하고 바라면서 가는 거야. 근데 얼마 전 시청 앞 집회에서 민주노총 금속연맹 조합원들을 만났어. 집회에 참가한 노동자들을 ‘귀족노조’라고 욕할 때야. 내가 알기로 금속연맹의 조합원들을 이끄는 선두차의 멘트는 언제나 빛나. 그건 투쟁을 이끄는 모든 말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인간적이야. 그래서 금속연맹의 선두차는 내가 뛰어 올라서 탄다고. 헌데 그날 굉장히 불행한 일이 있었어. 노동자들이 경찰에 맞는 거야. 젊은 노동자들이 나 보고 피하래. 그 빛나던 투쟁 대열이 몇 십분 후에 시청 뒤쪽 골목에서 이른바 막강한 공권력에 짓밟힌 거야. 그 동안 나도 몇 차례 다친 적 있어. 내가 늙어서 잘 피하질 못해 그런 거야.”
 
조세희 선생에게 노동자들과의 만남은 그 자체로 ‘작품활동’이다. 
 
“우리가 꼭 구호나 투쟁 몸짓으로 만나는 건 아니어도 어떤 연대의 시간을 가질 때, 그들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생활 자체가 나에게로 와서 나를 흔들지. 그래서 나는 작품은 많이 못 써도, 내 안에는 여러 편의 작품이 들어 있다고 말하지.”
 
때문에 활자화된 작품에서 그는 ‘과작작가’지만, 삶이 만들어낸 작품에서 그는 분명 ‘다작작가’다.   
 
그는 그러나 안타까워했다. 돈도 먹을 것도 없어 아이들 옷에 주머니를 달아주지 않았던 엄마, 고기 사 먹을 돈이 없어 엄마 몰래 옆집 고기 굽는 냄새 맡으러 가던 아이들, 그 아이들의 아빠, 117센티미터의 키에 32킬로그램의 몸무게를 지닌 난쟁이 아빠 때문이다. 자기 말에 책임지지 않는 시대에, 언어에 대한 책임감을 부여잡고 쉽게 쓰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그지만, 오늘의 난쟁이들의 고통을 마음껏 써 주지 못하는 처지를 그는 마음 아파했다.    
 
‘산업화시대’ 한국사회가 너무 아파 절규했던 그는 ‘정보화시대’를 구가하는 지금까지 절규하고 있다. ‘난쏘공’의 언어가 지금도 아픈 까닭은 그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지만, ‘난쏘공’의 선명한 피 같은 아픔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노동현실이 변했다지만, ‘난쏘공’의 단어 하나하나는 아직 가시 같고 면도날 같다. 짧게 끊어 치는 ‘난쏘공’의 단문들이 절규하는 듯한 그의 말투를 닮았다는 사실도 그를 만나고서야 알았다. 목이 쉬고 핏줄이 터지게 외치고 싶은 말들을 그 짧은 문장들 사이에 꾹꾹 눌러 앉혔다는 사실도 이제서야 알았다.      
 
“사람은 생이 주어지는 순간부터 죽기까지 누구나 한 번은 절규한다고 해. 난 그 말을 믿어. 어느 역사에든 빛나는 순간이 있어. 그 순간을 찾아 봐. 거기엔 절규하는 사람이 있어. 그 순간의 역사가 빛나는 건, 그 사람의 절규가 너무 진실하고 정의롭고 아름다워서 후대 사람들이 버리지 않고 잘 모아 놓았기 때문이야.”
 
63세, 그는 요즘도 혁명을 꿈꾼다. 피 흘리는 혁명이 아니다. 꿈꾸는 것 그 자체가 그에겐 혁명이다. 아름다운 사람이 죽으면 하늘의 별이 된다고 믿는 것, 고통받는 사람이 있는 한 신화는 계속된다고 ‘포기하지 않고 끝끝내’ 믿는 것, 그게 그가 꿈꾸는 혁명이다. 더운 날, 강가에 앉아 기다리는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다. 
 
조세희, 그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너무 쉽게 화해하고, 너무 쉽게 과거의 적에 동화되는 시대, 그 시대와 반목하며 가난하게 살아 온 사람. 그는 세상과 불화할 수밖에 없고, 세상에 의해 따돌림당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입으론 ‘시대와의 불화’를 외치고, 몸으론 독재자와 그 후예들을 비호하며 떵떵거리는 사람들이 ‘불화’란 아픈 단어까지 오염시키고 있을 때, 조세희의 불화는 우릴 행복하게 한다. 그의 한 마디 말처럼. 

“외길 가는 사람은 외로워도 그 길 가야 돼. 그래야 행복해.”

 

매일 노동뉴스 이문영 기자 글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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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몇 안되는 의미없는 날

비로 오늘.

                     

예비군 훈련날.

                          

도대체 이걸 왜 하나 싶다.

1년차때는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제대한지 얼마 안되었을때니까 옛날 생각도 나고

현역일때 군종병이어서 못쏴본 총도 좀 쏴보고.

              

2년차, 3년차, 그리고 올해 4년차.

여전히 이걸 왜 해야해 라는 고민의 정답은 없다. 정답이 있을리가 없잖아.

                         

군복입혀놓고 예비군이랍시고 모여서 자신들의 무용담을 꺼내놓고

현역들이 "선배님~" 하고 부르면

"너희는 북한군이 싫어? 예비군이 싫어?" 식의 농담이나 꺼내놓고

이상하게 그 옷만 입혀놓으면 태도가 껄렁해 지고 얼굴은 무기력함이 넘쳐 흐른다.

                      

예비군으로의 동질감? 그따위껀 없지.

                            

처음 해본 지역예비군. 향방작개훈련.

산으로 올리더니 한 삼십분쯤 지나고 내려오란다.

                   

그리곤

"훈련 성공리에 잘 끝마쳤습니다" 신호를 한다.

                           

물론, 아무리 철저하고 엄선된 프로그램을 가지고 와도 예비군훈련에서는 실패할 것이지만.

                               

일년에 몇 안되는 의미없는 날 중 하나다 예비군 훈련날은.

                      

전시가 되면 예비군들은 현역과 마찬가지로 부대에 편입이 된다.

과연, 몇 %의 예비군이 총을 들고 적군을 향해 총을 쏠 수 있을까.(왜 총을 쏴야해?! 평화롭게 살면 안돼? 라는 질문은 다음에)

                            

                                   

그런데,

그런 오늘,

                                

나는 인감을 등록하러 동사무소에 가서

지장을 찍으라는 직원에게

"왜 지장을 찍어야 해요?" 라는 당연한 질문조차 하지 않고 손가락을 내밀었으니.

                                                       

그리고, 예비군훈련을 좀 제대로 하면 안됩니까? 라는 질문을 하지않고

핸드폰 노래를 틀고 듣고 있었으니.

                         

할말 다했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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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할 시간이 필요해

푸른시민연대 총회 및 볼링대회를 했다.

                                             

시민단체의 특성 상 회원들이 참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그 역할이 제기능을 다하는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오늘 한겨레와 경향신문에 시민단체에 관련된 기사들이 나왔던데, 요지는 돈.

                                                                     

월 80을 받지만, 월 800의 역할을 하자! 늘 마음속으로 외치는 말인데 아직은 쉽지가 않다.

월요일이라 더 그랬을까? 아주 정신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진지한 고민이 좀 필요한데.

                                                           

내일은 예비군 훈련. ㅋㅋㅋ 덕분에 진지한 고민을 할 시간을 얻었다.

                        

사진은 총회 및 볼링대회 모습~

                               

 

상근자들과 회원들.

                                       

                               

 

                                                  

다문화센터팀 자칭 에이스 수혁!

                                 

                                                 

                         

활동가들 모습 

                                        

                                     

                             

 설정된 사진. 꼬미가 "난 의식하고 찍는 사진 싫어요!" 라고 하길래- ㅋㅋㅋ

                                        

                                                            

홍규. 도시락 폭탄 투하는? ㅋㅋ

                                               

                                                

 

승연이. 세상은 좁더라. 그치? ^^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스타일의(ㅋㅋ) 이주노동자 센터 국희.

                                        

                                          

                       

어머니학교와 이주노동자센터 상임활동가들. 좌 박운주, 우 이연숙

                                    

                                            

병행쌤!

                                

                                        

발군의 파워볼링, 쇼립씨.

                                    

                                        

어머니학교 새내기 교사 민정이, 진영이. 귀여운 친구들.

                                   

                                          

환호하는 모습이 아닌 또랑에 빠트리고 "보지마!" 라고 외치는 모습이다.....ㅠㅠ

                                   

                                       

 

선투씨와 이름을 아직 못외운.... ㅠ 다문화센터 회원과 활동가들.

                                 

                                                     

 

연숙이. 좋은 친구가 생겨서 좋다. 어제의 내 라이벌 ㅋㅋㅋ

                                   

                                         

 

문화게릴라, 문화기획팀 고미경 상근활동가. 요즘 꼬미때문에 기분이 좋다!

                             

                                      

 

오성이형. 늘 한결같은 모습이다.(사실 딱 두번봤다 ㅋㅋㅋㅋ)

                              

                                             

 

미진누나와 엽이~

                              

                                       

 

헌수. 키가 190은 된다. 아주 부럽다. ㅋㅋㅋ 연애축하!

                                   

                                          

썬투씨. 말로만 듣던 썬투씨!

                            

                                         

 

우승축하! 상금 10만원! 물론 뒷풀이비 ㅋㅋㅋ

                               

                                    

 

기분 좋았던 술자리. 술자리로 인해 단체에서 홀로 밤을 지새게 되었지만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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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쓸쓸한 날

사람의 마음은 늘 알 수가 없다.

                              

좋았다가, 싫었다가, 기뻤다가, 슬펐다가, 마음에 들다가, 마음에 들지 않다가,,,,,,,,,

                                      

그런데, 가장 숨막히게 만드는 것은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모를때다.

지금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하고 말해야 할지 모를때.

이럴때 그냥 잠자코 있으면 될 것 같았는데, 그러다 보면 많은 것을 놓치고 잃게 되는것 같다.

                         

지금도 그렇다.

내가 어떻게 해야하는지 잘 모르겠고

이러다 놓치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이야기를 꺼내자니 아직 그럴 시기가 아닌것 같고.

                                             

내가 생각하는 천천히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천히가

같은 천천히였으면 좋겠다.

                          

나는 실수하지 않기 위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신중해야 하고 또 신중해야 하고

그래서 천천히, 천천히 걸어 갈 수 밖에 없는데,

남들이 볼때 이 천천히가 너무 느릿느릿, 미적지근하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알아 주겠지, 라는 마음 하나만으로는 부족한것 같다.

확신?

그래, 그게 부족한가 보다.

억지로도 아니요

강요해서도 아니요

성급하게는 더더욱 아니요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다.

우연히도 스물일곱의 친구들을 근 열명이나 만난 오늘.

친구들이 사는 모습과 나의 모습을 비교하게 된다.

                          

누구하다 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누가 잘살고 있고 누가 못살고 있는지를 따질 필요도 없다.

                           

다만,

"나도 그래~" 라는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되지 않겠어? 그게 언제가 되던지 간에.

되야 될 것이라면 언젠가는 되겠지. 되야지.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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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을 여세요

                   

외근을 다녀오는 길에

작은 골목에 있는 가게를 보았다.

                              

낡디 낡아 톡 치면 부서져 버릴 간판과

언제부터 잠겨 있었는지 모르는 철문.

                                  

우리나라 자영업자 중 25%는 가게만 열어놓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즉, 장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쩔 수 없이 열어놓고는 있는.

                           

내가 사는 곳이 수지여서 그런가.. 괜히 수지미용실이라는 간판이

정감있게 다가왔는데 ^^

                     

조금 바라보고 있다가 뒤돌아 갈길을 가면서 든 생각은

                  

저정도 크기의 가게 하나만 있으면 좋겠다- 라는 것이었다.

꼭 해보고 싶은 가게가 있다. 조만한 크기여도 괜찮을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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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심담긴 한마디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벽을 쓰윽 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남겨 놓으라고 있는 공간이니까 자신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었다.

                                

한참을 재미나게 읽다보니 가슴아픈 사연도, 기쁜 사연도, 슬픈 사연도 가지가지였다.

이렇게 글로라도 풀지 않으면 가슴아픈 사연은 술로도 극복될 수 없을만큼 쓰린 기억이었겠지.

                                                 

그 속에서 예전에 적어놓았던 나의 메모도 발견을 했다. 혼자 큭큭큭 웃었다.

                      

한때 마이너 신문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이틀정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였나 보다. 남자동기 다섯명이

각자의 꿈을 적었는데,

                 

졸업을 한 두명은 그 꿈이 이루어 지지 않았고

졸업을 앞둔 두명은 그 꿈을 향해 가고 있고

외국에 있는 한명은 아마 꿈이 이루어 질 것 같다.

                     

한참을 보고 또 보며 옛날을 회상했고,

다른 사람의 글을 보고 괜히 내가 그 상황이 된거 같아 가슴아프기도 했고

'독도는 우리땅' 이라는 글에 술기운이 더해져 괜히 울컥 했던 밤이었다.

                               

 


                                       

목표가 있다면 이루어 지겠지.

하버드대 합격하길 빕니다-

                      

                                    

                               

늘 단짝이었던 후배들.

너희는 영원할 수 있을거야 징글징글한것들! ^^

                                   

                                               

                               

                               

이별한 사람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다는,

자주 오게 될것 같다는 슬픈 내용.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마음이 따뜻한 직교 친구들의 낙서.

근데, 데이빗은 누구였더라?

                        

                                

                                     

                              

CPA와 7급공무원(공무원이 짤렸다)을 준비하는 친구들은 여전히,

삼성 SDI와 마이너 신문사를 꿈꾸던 친구와 나는 다른 곳에서 열심히,

옆에 지혜남편을 꿈꾸는 친구는 외국에서 열심히.

                                      

어떤 꿈을 또 꾸게 될지는 모르지만,

우리, 열심히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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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짐, 격려

 

모든 일은 직접 부딛치면서 경험을 해야 풀리는 법이다.

                 

책에서 아무리 본대로., 누가 "이렇게하면 돼!" 라고 아무리 확신을 가지고 알려줬다 한들,

직접 해보면 또 그게 아니다.

                              

야인시대 드라마를 군대에서 보았는데, 그때 나는 김두한보다 하야시가 더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하야시가 원래는 조선사람이라고 하니

'아, 그래서 하야시를 의리있고 남자다운 사람으로 그렸나?' 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주부터

                 

사람들의 인식변화를 위해

                                   

아침에 15분씩 거리로 나가기로 했다.

                                     

처음엔 많이 쑥스럽고 창피하기도 하겠지만,

한달이 지나고 두달이 지나고 한 육개월쯤 지나면 마치 거리의 동상처럼 여기지 않을까,

그리고 그쯤되면 내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게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아침 9시 10분부터 25분까지 회기역 앞으로 나가보려고 한다.

                                   

뭐든지 몸으로 부딛쳐야 하는 거니까.

                       

 


                       

슬픈 소식들이 많이 들리는 요즘인데,

                         

다 잘될거야. 힘내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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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잘될거다

오랜 인연을 유지하고 있는 후배 할머님께서 돌아가셨다.

이 친구와는 벌써 8년째구나. 2000년도 부터니까.. 처음 인연을 맺게 된건 불순한 만남이었으나

                 

8년째 어찌보면 가장 든든한 내편이지 싶은 친구인데,

                              

8년이 지났지만, 이 친구가 힘들어 하는 모습은 보기가 안쓰럽다.

                                 

늘 강조하지만, 다 잘될거야. 기운내 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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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9일.

하나,

진심으로 아끼는 후배 조모상에 결국 가지 못했다.

                              

하루종일 미안했던 이날.

                         

둘,

소중한 친구가 한명 생겼다.

                    

이제는 친구로.. 긴 시간 함께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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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선을 왜 해?

라는 질문을 수도없이 받았었다.

                    

그때마다 "몸으로 표현하는게 좋아" 라고 대답했었다.

                     

그땐 문선이 좋았고, 시간이 더 지나고 민가가 더 좋아지게 되면서

                          

"민가가 좋으니까" 라고 말했다.

공연도 많이 하고 활동도 많이 했었는데, 실제 사진이나 영상은 많지 않다.

시간이 더 지나면 좀 아쉬워 지겠다 이거. ^^

                     

그것보다, 이제는 한곡도 제대로 못할 체력이 된것이 아쉽다. 휴휴휴


05년 다맛제. [들어라 양키야]

06년 다맛제 [소나기]

05년 다맛제 [들어라 양키야]

05년 정기공연 [청년시대]

04년 새터 [파도앞에서]

07년 평화이야기 거리공연


단지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좋았고 몸을 움직이면서 멋진 동작을 하는 것이 좋았다.

                          

그러면서 점차 이런것들(이런 표현 구리다)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고 우연한 기회에 들었던

"전화카드 한장" 이라는 노래는

                           

민가쟁이, 문선쟁이의 길로 빠지게 만들었다.

                       

내 인맥의 대부분이 무천활동으로(가톨릭대몸짓패) 만난 인연들이니까 고마운거지.

                    

한곡씩 한곡씩 좀 파봐야겠다 이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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