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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자 35회 #metoo


1


읽는 라디오 ‘살자’ 서른 다섯 번째 방송을 시작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김성민입니다.


요즘 metoo운동의 열기가 대단해서 페이스북에 그에 대한 글들도 심심치 않게 올라옵니다.
제가 페이스북 친구가 많지 않아서 그리 많은 글을 접하는 건 아닙니다만
어느 분이 계속 올리는 글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연극계에서 중견활동가로 있는 그분은 이윤택 문제가 불거진 이후 관련한 글들을 계속 링크하시더군요. 연극계에 몸담고 있으니 특히 더 민감하게 다가오겠거니 했습니다.


그런데 관련된 글들을 링크하며 써놓은 얘기가
처음에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런 줄 몰랐다”라고 하더니
“나도 권력을 가졌다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반성한다”라고 하더니
권력으로 갖은 악행을 벌이는 이들을 사정없이 몰아치시더군요.
그분의 글을 보고 짜증이 나서 페이스북 친구를 끊어버렸습니다.


연극계에서 잔뼈가 꿁으신 그 분은
리더의 권위를 맹목적으로 강화하는 도제적 시스템에 대해
인간을 서열화하는 기수문화에 대해
내부문제를 봉합해버리는 온정주의적 조직문화에 대해
그 외에 제가 알지 못하는 연극계 내부의 문제에 대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모든 악행의 뿌리인 가부장적 사회질서에 대해
단 한마디의 반성이나 성찰도 없이
이윤택과 그 주변의 권력자들을 매도하는데 목소리를 높임으로서
자신의 결백함과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metoo운동에 대해 입을 함부로 놀리는 게 무섭기는 하지만
“이건 정말 아닙니다!”

 

2


요즘 언론을 보면
관련된 뉴스를 계속 쏟아내면서
진지하게 덧붙이는 말이 있습니다.
“이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문제로 바라봐야 합니다.”


언론에서 주장하는대로라면
사회각계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권력집단 중에서
일부가 비정상적으로 부도덕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됩니다.
그래서 그런 자들을 가려내서 축출하고
권력시스템을 좀 더 민주화한다면 해결되는 문제라는 겁니다.


언론에서 이렇게 얘기해주시면 저는 너무 고맙지요.
저처럼 별볼일 없는 사람들은 metoo운동의 대상에서 제외되서
추악한 권력자들을 소리높여 욕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이미 10여 년 전부터 운동사회의 성폭력문제에 대해 아주 요란하게 난리를 쳤는데도
진보진영에서 아직도 이런 문제가 나오는 건 왜일까요?
진보세력이 민주적이지 못하고 일부 지도층이 타락해서 그런 건가요?
그리고 저처럼 권력이라는 건 쥐뿔도 없는 놈이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휘두르는 건 왜일까요?
유전적으로 성충동을 조절하지 못하는 질환을 갖고 있어서 그런가요?
아니면 구제불능의 인간말종이라서 그런가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타락한 일부 지도층의 문제도 아니고
권력시스템이 민주적이지 않아서도 아니고
구제불능의 인간말종들 때문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잖아요.
이미 이 사회 곳곳에 성폭력이 일상화돼 있다는 걸요.
저 같은 놈들이 너무 너무 너무 많아서 아닌 놈들을 찾는 게 더 쉽다는 걸요.


단언컨대 지금의 문제는 권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성폭력이 일상화되고 내면화된 완고한 가부장적 사회시스템의 문제이고
여성을 유희대상으로 바라보면서 즐기는 남성 중심의 마초문화가 문제입니다.
이걸 애써 권력의 문제라고 떠들어대는 이들은
metoo운동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사회의 권력자들입니다.

 

3


처음 안태근의 문제가 폭로됐을 때 많이 찔렸습니다.
성폭력의 정도로만 보면 제가 저지른 성폭력이 안태근보다 더 심했거든요.
이어서 고은의 문제가 폭로됐을 때 표정관리를 해야했습니다.
고은이나 저나 매한가지이기는 했지만 저는 그렇게 대범하지는 못했으니까요.
그 뒤를 이어 이윤택의 문제가 폭로됐을 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이윤택에 비하면 제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뒤로 조민기를 비롯해 많은 이들이 거론될 때 웃음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유명한 놈들이 계속 관심을 받아야 저 같은 놈은 잊혀지니까요.


그리고는 편한 마음으로 metoo운동에 대한 기사들을 읽습니다.
요즘 언론보도를 보면 metoo운동에 대해 자세히도 보도를 해줍니다.
피해자가 어떤 식으로 당했는지 너무 자세히 보도를 해줘서
관음증적 호기심을 충족하기에 충분하거든요.
그리고 나서 “에이, 이런 개만도 못한 놈들!”이라며 시원하게 욕을 해주면
withyou운동에 참여하는 게 됩니다.
이런 와중에 김어준 같은 분이 ‘metoo운동의 음모론’을 얘기해주시니
남자들은 쫄지말고 당당해도 될 것 같습니다.


metoo운동이 거세다고 하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살만한 나라입니다.

 

4


그런데 도대체 왜 가해자는 온통 권력자들 뿐일까요?
그것이 궁금하십니까?
제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궁금증을 해결해드리지요.


성폭력 사건 중에 80% 이상은 드러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해자의 대부분이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성폭력을 저질렀던 대부분의 여성은
저와 늦은 시간까지 단둘이 술을 마실 수 있는 관계였습니다.
그만큼 신뢰와 믿음이 있었던 관계였는데
제가 그 믿음에 성폭력이라는 칼을 휘둘러버린 거지요.
그러기에 피해자들의 상처는 더 심각하지만
역으로 그 관계 때문에 그 문제를 드러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 문제를 드러내서 김성민을 매장하는 건 문제가 되지 않는데
그럴려면 피해자가 얽혀있는 사회적 관계들도 손상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용기를 내서 들춰냈다한들
술 먹고 실수한 걸로 치부해버리기 일쑤고
정말 용기를 내서 사법처리를 시도한다고 해도
무협의처리 되거나 벌금 얼마내고 마는 게 고작입니다.
그마저도 독한 놈한테 걸리면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역고소당하기도 하고요.
그러는 가운데 피해자는 ‘행실이 조신하지 하지 못한 여자’로 낙인찍히기 십상이지요.
현실이 이럴진데 누가 삼중사중의 장벽을 뚫고 나설수 있겠습니까?


제가 성폭력을 저질렀던 분 중에는
저의 행동을 용서해주신 분도 있습니다.
그만큼 저에 대한 인간적 신뢰가 깊었던 것이겠지만
그 용서로 인해 저는 또 다른 여성에게 성폭력을 반복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도 똑같은 상황에서 고민해야 했겠지요.
그렇게 저는 오랫동안 상습적인 성폭력을 저지르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겁니다.


이런 일들이 곳곳에 널려있어서 부풀어오른 풍선처럼 팽팽해있는데
어느 순간 한 여성이 용기를 내서 송곳으로 풍선을 터뜨린겁니다.
그제야 그동안 쌓였던 것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져나오는 거지요.
하지만, 그것도 피해자가 다수이고 상대가 사회적 지도층인 경우에 한해 언론의 조명을 받습니다.
그러니 저같은 놈은 안심해도 되는 겁니다.

 

5


어릴 때 제 아버지는 술만 먹으면 어머니를 두들겨 팼습니다.
그런 집안이 정말 끔짝하게 싫었습니다.
“왜 우리 집만 이러냐”고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른이 돼서 알게 됐습니다.
우리 집은 남들과 다를 바 없는 아주 보편적인 가정이라는 걸요.


나이가 드신 아버지는 더 이상 어머니를 때리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개관천선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어머니를 때리는 모습을 보고 눈이 뒤집힌 아들에게 맞을 뻔한 이후로
아들의 권위에 순종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여자들을 종 대하듯이 하는 태도가 바뀌지는 않았습니다.


그 아들이 자라서 어른이 됐습니다.
아버지를 제압한 아들은 더 이상 물리적 폭력을 휘두르지는 않습니다.
그대신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자행하지요.
어렸을 때 우리 집이 이 사회의 보편적인 가정이었듯이
지금의 제 모습도 이 사회의 보편적인 남성의 모습입니다.
홍상수 영화에서 줄기차게 보여줬던
찌질하고 구질구질하면서도 권위를 찾으려고 애쓰는 한국 남자 말입니다.

 

6


오늘 제가 쏟아낸 얘기를 듣고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이 계실 겁니다.


“너의 그 잘못된 행동을 남성들 전체의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는 건 너의 범죄를 사회의 문제로 묻어버리려는 술책이니냐? 마치 ‘한국 남자들은 다 그래’라는 식으로 호도하지 마라!”


그런 분에게는 한국남자답게 대답하고 싶습니다.


“에이~ 왜그래? 다 알면서~”


그리도 또 이런 얘기를 하시는 분도 있을 겁니다.


“너의 범죄를 이런 식으로 고백한다고 네 죄가 사하여지는 것도 아니고, 너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들이 위로받는 것도 아니다. 고백이라는 형식을 빌려 너의 죄를 얼렁뚱땅 용서받으려는 것 아니냐?”


그런 분에게는 이렇게 변명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제가 쏟아낸 말들이 다시 제게 칼날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metoo 나도 안태근이다
#metoo 나도 고은이다
#metoo 나도 이윤택이다
#metoo 나도 조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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