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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파업 현장을 가다!!

총파업 현장을 가다!!

선지현(노동자의 힘 회원)

마침내 파업이 선언되다.

25일 새벽 04시 명동성당은 기자들이 터뜨리는 후레쉬로 대낮처럼 밝았다. 공공 3사 노조위원장과 양노총은 "교섭이 계속되었지만 우리의 요구에 대해 정부는 무성의한 태도로 결렬되어 불가피하게 파업에 돌입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며 공동 파업을 선언했다. 그리고 "정부의 진전된 안이 나온다면 언제든지 교섭에 응하겠다"고 덧붙였다.
바로 철도, 발전, 가스의 노동자들이 자신감을 잃고 표류하고 있는 노동운동에 새로운 핵으로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지도부의 파업 선언 이전에 이미 파업의 불길은 대중들로부터 타올랐다.

24일 여의도에서의 전국노동자대회가 있기 전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대회 당일을 포함한 25일 새벽까지도, 공공 3사의 노동자를 제외하고는, 정부와 사측은 물론 노동운동진영 내부에서조차 파업이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민영화를 뺀 나머지 노동조건 개선을 해주면 공공 3사 집행부들이 파업을 하겠는가", "가스는 민영화 자체는 반대 안 한다면서? 그러면 막판에 정부가 많이 받아 주겠네" "공공 3사가 같은 시각에 파업하도록 정부가 가만있겠나?" "이미 정부측과 많은 합의가 있다던데?" 등 공공 3사 공동총파업을 둘러싼 회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달랐다. 여의도 광장에는 일주일은 족히 견딜만한 크기의 배낭을 메고 여러 겹의 외투에, 심지어 농구공, 배구공까지 든 노동자들로 가득찼다. 그들은 이미 파업을 위해 짐을 챙겼고, 여의도까지 왔다. 공공 3사 노동자들에게 파업은 결의된 과거였으며 현재는 김대중 정부의 '민영화 철회' 항복선언이 나올 때까지 복귀하지 않는 것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노조집행부를 압도하는 대중의 결집과 투쟁의 함성! 파업을 성사시킨 힘은 바로 여기에서 나왔다.

여의도 집회가 끝날 무렵, 방송에서는 18시부터 방용석 노동부장관과 양노총간의 면담이 추진된다고 발표 했다.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양노총의 기자회견에서는 "노동부장관과의 면담은 노정교섭이 성사되는 중요한 분수령이다. 여기에서 정부가 획기적인 안을 제출할 것으로 기대하면 충분히 교섭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면담에서 방용석 장관은 "민영화는 교섭대상이 아니며 노정교섭은 받아들일 수 없다. 다만 개별 교섭을 적극적으로 돕겠다. 그러나 파업은 절대 안 된다"는 입장을 전달했을 뿐이다.
이 시각, 공공 3사 노동자들은 건국대로, 서울대로 진입했다. 그리고 이 공동파업이 공공 3사의 '민영화 철회'를 위한 동맹파업으로까지 나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서울대에 있던 발전, 가스 노동자들은 구호를 외치면서 '동맹파업 승리'를 달아 그들의 바램을 전했다. 그리고 04시 파업 선언을 강제하고 있었다.
한편 밤이 깊어지면서 명동성당 주위에서는 교섭을 둘러싼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었다. 로얄호텔을 왔다갔다하며 서로에게 진전된 안을 요구하는 정부와 파업지도부. 하나의 정부와 3개의 파업지도부, 개별교섭은 그렇게 하나로 모아지지 못하고 정부에 의해 관리되었다. 여기에서 나올 진전된 안이란 불가능했다. 정부는 3사에게 "민영화는 교섭대상이 아니고 노동조건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지만 구체적으로 가스·철도에 대해서는 25일 04시 이전에 타결을 보기 위해 안간힘을 썼고 지도부는 흔들렸다. 파업 여부를 결정하는 지도부와 이미 파업을 결의한 조합원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여기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그러나 파업지도부는 계속되는 조합원들의 합류소식에 놀랐고 이미 압도돼 있었다. 2,500명 정도의 결집을 예상했던 발전은 이미 파업대오가 5,000명을 넘고 있었고 철도 역시 늦은 밤 기관사들이 전원 결집하면서 파업 지도부의 예상을 뛰어넘어 버렸다. 언론에서는 '민영화가 되더라도 고용승계는 보장하겠다'는 정부의 뒤늦은 교란이 시작되었지만 파업대오를 움직일 수는 없었고 따라서 지도부를 회유할 수도 없었다.

공공노동자들의 축제는 시작되었다 : 25일 새벽

명동성당이 줄다리기 협상을 하고 있을 때, 대체인력 투입을 비롯한 비상대책수립이 방송을 타고 있을 때 건국대와 서울대에서는 본격적인 파업 출정식이 시작됐다.
건국대에 모인 철도 노동자들에게 파업 출정식은 2000년 12월 15일, 어용집행부의 파업철회와 인력감축 합의라는 치욕을 씻는 자리였고, 2001년 직선제 쟁취와 민주노조 건설투쟁의 감격을 다시 한번 기억하는 자리였다. 그 과정에서 생긴 서로의 상처, 불신의 벽은 대운동장에 함께 모인 것으로, 총파업 투쟁에 함께 합류한 것으로 이미 무너졌다.
같은 시각 서울대에 모인 가스·발전 노동자들은 서로 투쟁의욕을 과시하고 있었다. "우리가 한국노총 소속이라고 투쟁을 제대로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에 제대로 싸워서 진짜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어떤 가스노조 지도부의 발언은 모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믿고 싶은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한통계약직노동자들의 400일 넘는 투쟁은 마무리 구호 '뭐야, 씨발, 죽여'로 일순간에 발전·가스 노동자들에게 전달되는 것 같았다.

파업 선언 소식이 전해진 서울대에서는 함성과 동시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파도타기가 시작됐다. 단 한번도 함께 모인 적이 없었기에 몇 번의 시도는 좌절되었다. 한번, 두 번, 세 번, 드디어 네 번째 노천극장이 노동자들이 번쩍 들어올린 하양 목장갑의 파도로 일렁거렸다. 발전노동자가 시작하면 가스노동자가 받고, 가스 노동자가 출발하면 발전노동자가 마무리하는 하얀 노동자들의 해방파도, 노동자가 선언한 공동파업이 그렇게 타오르고 있었다.
같은 시각, 건국대에서는 사수대들이 서로 악수를 나누고 부둥켜 앉으며 무사히(?) 파업이 선언된 것을 기뻐했다. 대오에서는 폭죽이 터졌다. 그리고 승리를 다짐하는 서로간의 약속이 이루어진다. 어느 조합원은 "파업 못하고 집에 가는 줄 알았어요. 사실 지부장이 도망을 갔거든요. 저희들끼리 있으면서 지부장새끼 욕하고 그러면서도 파업이 성사되지 않으면 파업에 참여한 사람이나 참여 안한 어용새끼들이나 구분이 안되잖아요. 이제 파업이 선언됐으니 조합원들하고 어용지부장새끼 죽이는 일은 확실히 하겠네요"라며 잠시 잃어버렸던 진실, 파업투쟁이 민주와 어용을 가르는 잣대가 된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가스 노조의 퇴각을 딛고 동맹 파업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 파업 첫째 날(25일)

파업 첫 째날 아침이 밝았다. 이미 방송에서는 '가스 노사 타결' 보도가 계속 나오고 있었다.
이때 명동성당에서는 가스노조위원장이 조용히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했고 이어 나머지 지도부들도 사라졌다. 성당에 있던 발전·철도 파업지도부들은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 서울대에 있는 가스 노동자들은 몰랐다. 일어나자 마자 대오를 정비하고 줄지어 아침 도시락을 탔다. 지난 밤, 출정식과 문화제의 열기가 아직 채 가시지 않은 듯, 얼굴은 밝았다. 11시쯤 되었을까. 가스노조 집행부들이 서울대에 모인 조합원들을 모았다. 위원장은 "모두가 요구하는 것은 구조개편 철회일 것이다. 그러나 교섭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50%이다. 이것은 한계"라며 업무복귀 명령을 내렸다. 누가 모른단 말인가? 그래서 파업을 하고 있는 것 아닌가?
욕이 여기 저기에서 나왔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씨발", "우리는 2,000명밖에 안 된다. 단독파업으로는 불가능하고 연대투쟁을 해야 된다. 그런데 왜 먼저 타결하는가" "노사정위원회 논의는 현실 가능성이 별로 없지 않는가? 왜 그것을 믿는 지 모르겠다"
항의는 빗발쳤다. '악법도 법'이라던 한 파업지도부의 발언은 조합원들의 항의에 묻혔다. 지부별로 나뉘어져 토론을 벌였지만 지도부의 업무복귀 명령은 그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자 파업지도부는 총사퇴를 말했다. 그리고 조직보존을 주장했다. 계속되는 지도부의 설득, 이에 대한 조합원들의 항의는 지도부의 결정을 뒤엎는 대중적 저항으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은 접었다. 버스가 들어왔고 하나 둘 짐을 싸고 차에 올랐다. 발전노동자들은 이 광경을 그대로 보고 있었다. 일부 대오에서 '같이 가자'는 구호를 계속 했다. 함께 투쟁하기로 했으니 끝까지 같이 싸우자는 요구였다. 가스노동자들은 발전 노동자들을 보지 않았다. 아니 볼 수 없었다.

한편 언론에서는 국무총리 담화문이 발표되고 있었다. 곧이어 '가스구조개혁은 시기, 방법을 노사가 함께 논의하여 추진키로' 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있었다. 결국 민영화를 수용하고 만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신문들은 일제히 '민영화 일정 차질 불가피', '민영화 추진 제대로 가고 있는가'라는 기사를 실었다. 엄살을 부리는 보수언론은 민영화에 대항하는 공공노동자들의 투쟁에 총자본의 확실한 입장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김대중이는 '민영화 변함없는 원칙'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럼 그렇지!

파업투쟁은 언제나 지도부를 중심으로 한 일사분란한 명령체계가 허용되는 시기이다. 이것을 내용적으로 뒤집는 민주주의가 형성되는 것이 바로 조합원들의 자유발언대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여기에서 조합원이 주체가 되는 투쟁의 가능성을 보았다.
자유발언에 나온 한 발전 노동자는 "그 동안 집사람에게 미안했다. 집사람은 사회보험 노조 조합원이다. 보통 파업하면 40, 80일이다. 임신 7개월에도 링겔 맞으며 파업하러 갔다. 온갖 회유에도 단결하는 모습을 보면 지도부는 자기 역할을 하고 동료를 서로 신뢰하는 분위기가 너무 부러웠다. 지난 2000년 겨울, 남편이란 작자는 파업한다고 아침에 가서 저녁에 들어왔다. 정말 창피했는데 엊그제 엄마는 관광버스, 아빠는 기차로 집회 왔다. 어제 추운 밤을 보내며 많은 생각을 했다. '우리 마누라는 매일 이렇게 투쟁해왔구나!' 낙오하지 말고 끝까지 함께 할 것을 다짐했다"며 스스로 투쟁 결의를 만들어나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건국대에서는 "파업이 끝나면 잠꼬대로 파업가를 부르겠다. 행여나 교섭대표가 안을 정리해 가지고 오면 그냥 잘됐다고 돌아가지 말자",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도 오늘밤이 지나면 무뎌질 것이다. 현장에 있을 때는 파업 D-day가 하루씩 앞당겨질 때 압박감이 있었는데 어제 파업선언 때는 황홀했다. 꼭 이겨서 돌아가자."
어눌한 말투, 어색한 구호, 버벅대면서도 조합원들은 자신의 결의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조합원 전체가 있는 자리에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대중들은 지도부의 어떤 유창한 연설보다도 높은 지지도를 보낸다.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고 함성을 지른다. 그런 서투름이, 어눌함이, 나서서 이야기하는 사람과 자신을 일체 시키는 것 같다.
그렇게 발전·철도 노동자들은 단련되고 있었다.

공공노동자 동맹파업은 마침내 민주노총 연대파업을 이끌어 냈다 : 파업 둘째 날(26일)

26일 공공 3사의 공동총파업이 민주노총 연대파업을 이끌어냈다. 민주노총은 25일 비상투본대표자회의에서 결정한 '26일 06시까지 철도·발전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연대파업에 돌입한다'는 방침을 실현시켰다. 공공 3사의 공동파업선언에 민주노총은 움직였다. '총파업에 준하는 총력투쟁'으로 총파업의 의미를 스스로 격하시켰던 민주노총이, 지난 7월 5일 총파업을 선언하고도 총파업에 돌입하지 못했던 아픔을, 수치를 겪었던 민주노조운동이 이제 공공 3사의 총파업을 계기로 '살아 숨쉬는' 파업을 감행하게 되었다. 민주노총의 연대파업 결의는 분명 지난 투쟁에서의 패배감, 무력감을 만회할 기회임에 분명하다. 또한 '연대'파업 결정으로 '투쟁하는' 민주노총의 정체성을 다시금 생각게 하는 것이었다. 종묘에 모인 연대파업대오가 건국대와 서울대로 진입할 때 거점을 지키고 있던 사수대들은 두 줄로 서서 대오를 환영했고 '연대파업으로 투쟁승리'를 외쳤다. 그리고 그 외침은 어느 때보다도 들떠 있었다.
그렇게 노동자들은 하나가 되었다.

건국대 : 유인물을 뿌리는 헬기에 돌을 던지는 조합원들
오전부터 철도노동자들은 지부별 체육대회를 벌였다. 24시간 맞교대로 만날 수 없는 갑 반과 을 반 조합원들은 함께 운동을 하는 게 아마도 몇 년 만인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지부별 장기자랑에 이어 대동놀이, 제기차기와 윷놀이로 한층 흥이 돋구어질 무렵, 갑자기 헬기가 무차별 유인물을 살포한다. 바닥의 모래들이 일어 조합원들을 덮치고 흥은 깨졌다. 그러자 조합원들은 헬기에 돌을 던지고 욕을 퍼붓는다. 그리고는 유인물을 불태워버렸다.

서울대 : "배신하지 않겠다. 배신하지 말아달라" : 산개 전술 선택
점심을 먹자마자 발전노동자들은 조별로 모여 심각한 토론을 벌인다. 거점을 계속해서 사수하면서 공권력 침탈을 맞을 것인가 아니면 침탈 전에 산개해 파업대오를 유지할 것인가를 조합원들이 토론한다. 그리고 이들은 산개를 결정했다. 서로가 확인되지 않고, 개별로 복귀해버리면 파업대오가 순간 무너져 버릴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지도부는 왜 산개를 결정했을까? 위원장은 전화 연설을 통해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 조합원들도 배신하지 말아달라. 조합원들이 복귀하지 않고 대오를 유지한다면 내가 먼저 조합원들을 배신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도부를 믿고 지도부의 복귀명령이 있을 때까지 절대로 복귀하지 말아라. 그러면 나도 조합원들을 믿고 끝까지 지키겠다'며 어느 때보다도 강한 어조로 투쟁명령을 내렸다.
연대파업을 선언한 민주노총 지도부와 투쟁대오 1,500명의 조합원들, 그리고 전면파업을 벌이고 있는 사회보험 동지들까지 들어와 가스가 나간 흔적은 없어졌고 노천강당은 파업출정식을 할 때처럼 가득찼다. 조합원들의 투쟁구호는 더욱 커졌고 힘이 들어갔다. 연대파업의 힘이 발전노동자들에게 그대로 전이된 것 같았다.
집회가 끝난 후, 발전노동자들은 먼저 집회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사복을 입고, 타사업장 조끼를 입기도 하면서 5-7명씩 흩어져 산개를 시작한 것이다. 교문을 나선 발전노동자들의 얼굴은 산개 결정에 대한 의심 따위는 없었다. 오히려 위원장의 '나는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복귀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복귀하지 말아라'라는 말을 곱씹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발전노동자들은 안개처럼 사라졌다.

철도노동자들의 절반의 승리, 과연 그대로 돌아갈 것인가? : 파업 셋째 날(27일)

조합원들은 술렁거리고 있었다. "민영화 저지 못하면 죽자는 것이다. 그 합의문 받자고 여기까지 왔나" "지부장은 도망가고 아무 것도 모르지만 옳은 일이라 결합했다. 하지만 합의문 소식 듣고 우리가 민영화 철회 때까지 투쟁할 수 있을 지.... 가슴아픈 건 결과가 너무 실망스럽다는 것이다" 자유발언에 나선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그들은 투쟁의 목표가 무엇인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민영화가 철회되지 않으면 합의문도 휴지조각이 될 수 있다는 사실 또한 꿰뚫어 보고 있었다. 또 한편에서는 "조합원 총투표가 실시되어 가부가 결정될 때까지 우리는 거점을 떠날 수 없다."며 이미 합의서를 체결한 지도부에 대해 항의하고 나섰다. 이미 그들은 투쟁의 요구가 무엇인지도, 민주주의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지도부는 "표현상의 모호함은 있지만 내용적으로 우리는 승리했다. 8개월 집행부 역량의 힘이다"라며 "이것이 실천될 것인지 휴지조각이 될 것이지는 앞으로 현장에서 어떻게 투쟁하는가에 달려있다. 합의문의 내용을 채워나가는 것은 이제 우리의 몫이다. 이번 한번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스로 미완성의 합의문을 인정하고 있었다.
현장에서는 합의안을 비판하는 유인물이 돌고 있었다. 혼돈이었다. 야유하는 조합원들과 박수치며 환호하는 조합원들, 현장투쟁을 결의하는 현장간부들과 승리했다고 선전하는 현장간부들, 정말 혼돈이었다. 명백한 것은 민영화는 철회되지 않았다는 사실뿐이었다.
위원장의 업무 복귀가 떨어지자 지부별로 모여 조합원들은 현장에 돌아가 어떻게 말할 것인지를 토론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희망도 절망도 없었다. 그 눈은 아직도 투쟁이 끝나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철도 노동자들은 아직 이 투쟁의 승리도 패배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투쟁을 준비할 것이다. 그래야 승리한다는 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는 듯 했다.

발전노동자들의 투쟁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 28일 이후 현재(3월 3일 오전)까지

서로를 생각하며 복귀하지 않는 것, 이 약속을 지켜야 한다. 그러면 저 강한 공권력이 발전노동자들 앞에 무력하게 무릎꿇는 장면을 보게 될 것이다.

가방만 남겨있던 서울대, 5,300의 발전노동자들은 어디에 있을까? 복귀율 0%, 여전히 강고하게 투쟁을 벌이고 있는 발전노동자들, 그들의 흔적은 발전노조 홈페이지에서나 발견된다. '한달 이라도 상관없다. 발전매각이 철회될 때까지 지도부를 믿고 절대 복귀하지 않겠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용기일까? 파업 한번 해보지 못했던 발전노동자들은 과연 김대중 정부의 4년 치적(?)을 무너뜨리고 지배체제까지도 흔들고 있는 지금 이 대격돌을 알고 있는 것일까?
발전노조 상황실은 바쁘다. 벌써 지역마다 가대위가 결성되어 회사의 상황설명회장을 가로막고 동네에 벽보를 붙이고, 신문도 만들고... 투쟁 2군단이 새로 생긴 것이다. 이제 이 투쟁을 지켜내는 일이 우리에게 남아 있다.
"서로를 생각하며 복귀하지 않는 것, 이것을 약속해야 합니다. 그러면 보게될 것입니다. 저 강한 공권력이 여러분들 앞에 무력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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