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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네팔노동자와의 만남

한 네팔노동자와의 만남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에게 전설처럼 알려진 95년 네팔노동자농성을 떠올리며- (민정기자)

찬 겨울 명동성당앞에서 그들은 온몸에 쇠사슬을 감고 "때리지 마세요", "우리는 노예가 아니예요"라고 온몸으로 외쳤다. 한국 정부가 그후 95.2.14 노동부 예규 제258호 "외국인 산업기술연수생의 보호 및 관리에 관한 지침"을 제정하게 된 것도 이들의 저항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2002년 2월,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지금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필자는 심근경색으로 병원신세를 치르다 호전되어 고국으로 돌아가는 파키스탄 노동자를 동행해 김해공항을 찾았던 중 2층 로비에서 우연히 95년 네팔노동자 시위현장에 있었던 딜립다바(Dilip Thapa)를 만나게 되었다.

한국어가 능수능란한 그는 정말 점잖은 한국말만을 구사하는 친구였다. 대개 이주노동자들이 제조업 작업장에서 일하면서 반말이나 거친말을 배우기 마련인데 말이다.
대뜸 명동성당 농성에 대해 감탄어린 눈으로 물어보니, 오히려 당사자는 별것 아닌 체한다. 당시 자신은 네팔 공동체의 리더나 임원진도 아니었고, 적극적으로 한 것도 아니었다고. 단지, 당시에는 한국에서의 이주노동자들의 상황이 워낙 열악했기에 함께 하게 되었을 뿐이라며, 되려 크게 부각시키는 것에 대해 부담스러워했다. 13명의 네팔 연수생들이 농성에 참가했던 것으로 알려진것과는 달리 여러명의 미등록 노동자들도 당시 함께 했었다고 한다. 그 자신도 미등록 신분이었다.
92년 15일 관광비자로 입국할 당시, 그는 이곳 낯선땅에서 10년을 체류하게 될 것을 예상했을까?
스무살 나이에, 그는 누나한테 돈을 빌려서 부모님께는 외국으로 놀러갔다 온다는 말을 남기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애초 그는 3년동안 열심히 돈벌고 돌아가려 했으나 어쩌다보니 10년씩 체류하게 되었다며 멋쩍게 웃는다.
명동성당 농성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93년에 결성된 네팔공동체(NCC)와의 인연 때문이다.
남들앞에서 튀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저 네팔 친구들과 함께하는 것이 좋아 참여하게 되었단다.
한국체류기간동안 그는 수원과 안양지역에서 일했다. 비디오 판넬을 만드는 공장에서 인쇄작업을 해왔다.
7년전 피켓들고 농성할 때와 지금을 비교할 때 달라진 것이 무엇이냐는 나의 물음에 "요즘은 이주노동자들에게도 수당도 잘 주고 임금체불도 많이 줄었다. 옛날처럼 욕을 하거나 폭행을 하는일도 많은 줄어든 것 같다. 우리가 농성할 당시인 95년만해도 외국인노동자들이 한국인 관리자들에게 맞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러면서도 그가 바라는 점이 있다면, 한국사람과 이주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이 비슷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8시간 일하는 한국사람과 주야 맞교대로 12-13시간씩 일하는 이주노동자 임금을 비교할 때 그래도 한국사람의 임금이 높은 경우가 많다고.
한국의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보호를 위해서는 한국인노동자와의 이해와 연대가 필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노동조건의 차이 때문에 한국인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간에 불화가 많다고 한다.

혈기왕성한 20대를 한국에서 보낸 그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가장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예요?" 웃으며 말없이 가방을 뒤진다. 전도연이 표지모델로 나온 영화잡지다. "전도연을 제일 좋아해요...착해 보이잖아요."
어느새 한국인보다 더 한국적인 그가 네팔에서도 또다시 오랜 적응기간을 필요로 하는것은 아닐까? 그래도 가족들과 함께이겠기에 괜한 걱정은 접어둔다. 네팔에도착하면 자신의 생활모습을 글로 적어 보내겠다는 그의 약속이 빨리 지켜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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