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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원래 김기덕 영화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오래간만에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개봉했다고 했지만, 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유명한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탔다는 소식에 관심이 갔다.

김기덕 영화가 영화제에서 상 타는 것이 처음은 아니어서 그런가보다 싶었지만, 최고상이라고 하니 “이번에는 뭔가 좀 다른 맛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가 생겼다.

언론에서도 요란스럽게 떠드는 바람에 혹하는 마음이 생겨서 오래간만에 김기덕 영화를 봤다.

 

김기덕의 영화를 봤던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인터넷을 검색해봤더니 ‘사마리아’가 가장 최근에 본 영화였다.

거의 10년 만에 김기덕의 영화를 보는 것이었다.

최근 몇 년을 제외하고는 거의 해마다 영화를 내놓을 정도로 열심히 영화를 찍었는데 내가 본 것은 4편 정도가 다였다.

그 4편중에서도 줄거리나 주제가 제대로 기억나는 것은 ‘나쁜남자’뿐이었고, 나머지는 어떤 영화였는지 제대로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불편하고 섬뜩한 기억들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을 뿐.

전부 강한 영화들이었는데, 그의 얘기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이유는 김기덕 영화 특유의 불편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떤 외진 곳에서 조용하게 자기 얘기를 하다가 막판에 섬뜩한 방식으로 자해를 해버리는데, 그 방식이 너무 섬뜩해서 앞에서 무슨 얘기를 했고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건지를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자기 폐쇄적 공간에서 자학적인 미학을 추구하는 김기덕의 영화가 그래서 싫었다.

그의 치열함과 열정, 그리고 영화적 재능을 인정한다고 쳐도 섬뜩한 인상 말고는 기억에 남는 게 없었던 것은 철학적 깊이가 부족했기 때문인 것도 같았다.

그런 그의 영화의 특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학적인 섬뜩함에 대해서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마음의 준비를 했고, 몇 년 동안의 고통 뒤에 내놓은 영화가 유명한 영화제에서 대상을 받을 정도이기 때문에 깊이가 생기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도 약간 해봤다.

 

다행스럽게 제주도에서 ‘피에타’를 상영하는 영화관이 한 군데 있었고, 영화제 수상 이후에는 상영시간도 늘어서 낮 시간에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주중 낮 시간이었고 대중적으로 인기가 별로 없는 영화였는데도 영화관에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그리고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역시 김기덕스럽게 매우 투박하고 거칠게 영화는 시작했다.

초반부터 섬뜩한 장면들이 수시로 나왔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했고, 그동안 워낙 잔인한 영화들이 많아서 그 정도는 잔인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다.

불편한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섬뜩할 정도는 아니었다.

작위적인 상황 설정, 조민수를 제외한 나머지 배우들의 어설픈 연기, 매우 거친 장면들로 인해 좀처럼 영화에 빠져들기가 힘들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했지만 중간 중간 한숨이 계속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도 김기덕은 묵직하게 자기만의 방식으로 얘기를 계속 이어갔고, 그 거친 방식에 조금 익숙해지면서 영화에 살며시 젖어 들어갔다.

그리고 후반부에 반전이 이뤄지고 영화는 묵직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면서 강한 메시지로 마무리됐다.

“이래서 최고상을 줬던 것이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봤던 김기덕 영화하고는 뭔가 다른 느낌을 주기는 했다.

작위적 설정 속에서도 지루하거나 무리하지 않게 얘기를 끌어가다가 막판에 강한 임팩트를 주면서 자해를 하던 방식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자해를 하면서 강한 임팩트를 계속 주다가 막판에 더 강한 임팩트로 마무리를 하는 방식은 영화가 더 거칠어진 반면 깊이를 느낄 수 있게 했다.

그동안 쌓여왔던 그의 고통과 고민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마초적인 점은 여전했지만, 자학에서 구원으로 한 발 나아간 점도 성찰의 깊이를 알 수 있게 했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남자가 아니라 여자가 중심에 서 있는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이겠지...

 

자기 폐쇄적 공간에서 사람들의 관계로 얽혀 있는 사회 속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 관계라는 것도 서로 단선적으로 얽혀 있는 폐쇄적 관계였다.

자학에서 구원으로 한 발 깊어졌다는 해도, 중심에는 자학으로 복수하는 여성을 놓음으로서 남성의 구원을 이끌어간다는 점은 마초적이고 자학적인 그의 독특한 미학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의 영화가 좀 더 넓어지고 깊어지기는 했지만, 자기 폐쇄적이고 자학적인 남성 영화라는 점은 그대로였다.

 

조민수의 연기가 인상적이었는데, 상대역인 이정진의 연기가 너무 어설퍼서 더 빛나는 점도 있었다.

그리고 조민수가 연기하는 캐릭터가 낯설지 않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나서 조민수 캐릭터에 선글라스를 끼워봤더니 이영애가 나왔다.

진한 화장 속에 싸늘하게 원한을 감춘 조민수가 선글라스를 벋고 무뚝뚝한 표정으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인간의 악마성과 복수에 대해서는 ‘친철한 금자씨’도 만만치는 않은데, 영화 속에서 흘린 피의 양을 보면 ‘친절한 금자씨’가 좀 더 쎈 거 같기는 하다.

용서와 구원이라는 점에서도 ‘밀양’에서 묵직하게 다뤘던 것인데, 런닝타임이 좀 더 긴 ‘밀양’이 더 깊이가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남는 것은 김기덕스러운 거친 영상인데, 거친 표현에서는 이미 많은 영화들이 충분히 넘어서고 있기 때문에 비교할 수 없고, 그 거친 표현을 계속 이어가면서 더 강한 마무리를 해내는 능력이 남는다.

그 점에서는 내가 본 영화중에 최고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야수파 화가의 거친 그림을 보는 듯했다.

김기덕 감독이 예전에 미술을 공부했다고 했던가?

 

그 유명한 고흐의 ‘해바라기’나 ‘별이 빛나는 밤에’를 처음 봤을 때 “뭐, 이런 게 유명하다고 그래?”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서 전문가를 통해서 그의 그림에 대한 설명을 들어서야 “그래서 유명한 그림이라고 하는구나”라고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고흐의 삶에 대한 전기를 읽고 나서야 “아~ 대단한 그림이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고흐의 그림을 보면 그의 열정과 치열함과 재능은 느끼지만 감동을 느끼지는 못한다.

‘피에타’를 보고나서 고흐가 생각났던 이유는 그래서다.

‘피에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전문가를 통해서 들어야만 이해할 수 있고, 그의 영화가 얘기하려는 기독교적이고 서구적인 구원관에 대해서도 누군가의 얘기를 들어야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없는 감동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앞으로도 김기덕 감독이 영화를 계속 만들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당분간 그의 영화를 보고 싶은 생각은 나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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