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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1회)

 

읽는 라디오 ‘내가 우스워 보이냐?’ (21회)

 

 

 

1

 

안녕하세요.

음~ 오래간만에 방송을 진행하려니 조금 긴장이 되는 군요.

저는 이 방송을 진행하는 성민이기는 하지만, 좀 나이가 많은 성민입니다.

이 방송을 보시는 분이 황당하기는 하겠지만, 2012년의 성민이보다는 16년은 더 나이를 먹은 성민이입니다. 지난 방송에서 2012년의 성민이가 10년 후 성민이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이런 저런 일로 바쁘다보니까 제때 답장을 못해서 다시 6년이 지나서야 이렇게 방송으로 답장을 하게 됩니다.

저는 지금 2028년 한국에서 정말 오래간만에 이 방송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세월이 어느새 이렇게 흘러서 저는 이제 예순에 접어든 할아버지가 돼 버렸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지금의 성민이가 풀어가야 할 숙제를 위해서 그 얘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할아버지가 돼 버린 제가 전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오래간만에 이 방송을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2012년의 성민이를 비롯해서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을 미래와 지금의 제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한 번 비교해보시지요.

 

 

2

 

제가 어렸을 때 봤던 만화영화에 대한 얘기부터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1969년에 태어난 저는 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까지 보냈던 어린이로서의 기억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거의 50년 전 기억이라서 가물가물하기는 하지만, 그 시절에 봤던 만화영화들은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몇 년 전에 우연히 어릴 적에 봤던 만화영화 중에 한 프로를 보게 됐는데, 정말 감회가 새롭더군요.

 

여러분은 혹시 ‘미래소년 코난’이라는 만화영화를 기억하시는지요?

제 나이 또래라면 거의 대부분 기억하시겠지만, 잘 모르시는 분들도 있으실 텐데, 일본 출신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초기 작품입니다. 1978년에 만들어진 총 26부작짜리 TV용 애니메이션인데, 2028년을 살아가는 제가 보더라도 50년의 세월이 무색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명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둡고 칙칙한 거대한 공장과 군대의 섬 ‘인더스트리아’, 밝고 여유로운 목가적 공동체의 섬 ‘하이하바’, 작고 고독하지만 사람과 자연과 동물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사는 코난의 고향 ‘홀로 남은 섬’을 주요한 축으로 얘기가 전개됩니다.

엄청난 발가락 힘을 갖고 있는 ‘코난’에서부터 시작해서, 텔레파시로 할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라나’, 개구리를 엄청 좋아하는 못생긴 ‘포비’, 애꾸눈에 이마에 흉터가 있는 라나의 할아버지 ‘라오 박사’, 인더스트리아의 싸늘한 여자 ‘몬쓰리’, 얼굴이 네모난 최고의 악당 ‘레프카’, 길다란 콧수염의 변덕쟁이 ‘다이스 선장’ 등의 아주 개성이 강한 인물들이 등장해서 지구를 둘러싼 싸움을 흥미 진지하게 그리고 있습니다.

지구를 정복하려는 인더스트리아 사람들과 자신들의 삶을 지키려는 하아하바 사람들이 대결하다가 결국 인더스트리아는 무너지고 사람들은 하이하바에서 다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코난과 일행은 ‘홀로 남은 섬’으로 다시 돌아와서 평화롭게 살아간다는 내용이 주된 줄거리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코난과 라나와 포비가 벌이는 모험이 재미있어서 푹 빠져서 보곤 했었는데, 50년이 지나서 다시 이 영화를 보니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더군요.

 

매회 마다 이야기가 시작될 때면 어두운 빌딩 숲과 어두운 하늘 위로 비행선들이 날아 디니는 장면과 함께 암울한 배경음악 속에 다음과 같은 멘트가 나오곤 했습니다.

 

“서기 2008년 7월 인류는 전멸이라는 위기에 직면했었다. 핵무기를 훨씬 능가하는 초자력무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해 버린 것이다.

지구는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켜 지축은 휘어지고 다섯 개의 대륙은 거의 대부분 바다 속에 가라앉아 버렸다.“

 

제가 어렸을 때만해도 온갖 공상과학 만화영화에서 온통 ‘서기 2천 몇 년’ 하는 식이어서 2000년 그러면 엄청 먼 미래의 꿈과 같은 시대인줄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서 미래소년 코난이 살았던 2008년은 먼 과거가 돼버렸군요. 바로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시절이지요. 다행스럽게 2008년에는 핵무기를 훨씬 능가하는 초자력무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해버리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영화를 만들던 1978년은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매우 심하게 진행되던 시기여서 핵무기 경쟁이 극한으로 치닫던 시기였습니다. 산업화에 따른 환경파괴도 만만치 않은데다가 석유를 무기로 한 중동 산유국들의 감산조치로 오일쇼크가 세계를 강타하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런 시대적 현실을 반영해서 하야오는 이 영화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핵무기를 훨씬 능가하는 초자력무기가 세계의 절반을 일순간에 소멸해버리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이유로 지구는 일대 지각변동을 일으켰고, 많은 섬들이 바다 속에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필요이상으로 여러분의 두려움을 만들 것 같아서 하지 않겠습니다마는 이미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2년에도 충분히 그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징후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활발해진다는 아주 상식적인 얘기만 하겠습니다.

 

더 이상 석유에 의존하지 못하는 세상이 된 ‘미래소년 코난’에서는 태양열 에너지를 생산해서 인류를 지배하려는 욕망에 불타오르는 레프카와 몬쓰리가 인더스트리아에서 군대를 앞세워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합니다. 그들은 인더스트리아의 센터인 삼각탑과 군대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을 강제노동을 시키고 있었고, 평화로운 하이하바까지 점령해서 그곳의 생산물을 빼앗아 갑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0년대에도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석유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여기저기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지구온난화로 세상이 망가지고 있는데도 개발경쟁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사람들은 발버둥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하겠지요?

 

그런 현실이 바뀌지 않고 가속을 받아 이어진 2028년에 저는 살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살이라는 게 단선으로만 흐르지는 않기 때문에 그에 맞선 여러 가지 노력들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흐름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얘기해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50년 전에 봤던 ‘미래소년 코난’에 대한 얘기를 16년 전을 살고 있는 여러분에게 들려드리는 이유를 한번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3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0년대에는 영화가 참 많이 만들어졌습니다.

지금도 영화산업이 완전히 죽은 건 아니지만 그때만큼 활발하게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그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제가 보기에는 현실이 영화를 너무 앞질러 가버렸기 때문이지 않을까 합니다. 영화의 상상력이 현실 앞에서 고갈돼 버리고, 그에 따라서 통찰력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봤던 007이라는 영화에서는 제임스 본드라는 뛰어난 첩보원이 녹음기와 사진기 기능이 함께 잦춰진 휴대용 전화기를 들고 다니면서 영화적 상상력을 보여줬는데,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2년에는 이미 제임스 본드의 최첨단 무기를 뛰어넘는 전자기기들이 넘쳐나고 있지요?

제가 어릴 때 봤던 외화 중에서 가장 신기했던 것은 ‘전격제트작전’이라는 미국 드라마에 나오는 말하는 자동차 키트였는데, 이미 내비게이션은 그 놀라운 기능을 뛰어넘고 있을 것입니다. 그 외에도 영화적 상상력이 2010년대에 현실이 된 경우는 무궁무진합니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은 신기한 것만 현실화되지는 않았습니다.

2000년대 초반 두 대의 항공기가 공중에서 납치돼서 미국의 상징적인 빌딩 두 곳을 무너트려버립니다. 그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라는 명목으로 세계 곳곳에서 첨단무기를 총동원한 전쟁이 벌어지고, 그에 맞선 테러조직들은 폭탄과 화학약품 등을 동원해서 미국과 그 우방국 국민들을 불안하게 만듭니다. 이미 그 시점부터 현실이 헐리우드의 블록버스트 영화들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공포영화들이 현실의 공포마저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해서 고전하고 있고, 스릴러나 액션영화들은 황당한 과장을 제외하고는 현실의 흉악범보다 못한 범인들이 주를 이룹니다.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시절에 유명했던 ‘도가니’라는 영화도 현실이 너무 끔찍해서 영화에서는 많이 희석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0년대에 벌써 현실이 영화의 상상력을 넘어서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6년이 지난 지금은 영화의 상상력이 현실을 도저히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 돼 버렸습니다.

 

아주 가끔 2010년대에 만들어진 옛날 영화들을 볼 일이 있는데, 그중에 좀비들이 나오는 영화들을 보면 참 낭만적으로 영화를 만들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바이러스나 자연재해 같은 이유로 세상 사람들이 온통 좀비로 변한 과거 영화 속 세상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떼거지로 몰려다니는 좀비들과 소수의 영웅들이 단순한 액션을 보여주지만, 사회적인 이유로 좀비가 넘쳐나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숨 막히고 피 말리는 하루하루가 이어집니다.

이미 여러분이 살고 있는 그 시절에도 연쇄살인범이나 반인륜적인 흉악범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고 있을 뿐 아니라, 순간적인 화를 이기지 못하거나 좌절감을 삭히지 못하는 사람들이 곳곳에서 흉기를 휘두르는 일도 수시로 일어나고 있겠지요?

2000년대까지만 해도 자살로 좌절감을 표시했던 사람들이 2010년대 들어서면서는 타인에 대한 공격으로 표현방법을 바꾸더니 2020년대가 되면 그 방식이 집단화됩니다. 그렇게 좀비들이 곳곳에서 출현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좀비들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더 많은 사람들을 좀비로 내몬다는 점입니다. 사회가 불안할수록 법과 처벌이 강화되는 것이 약극화 된 사회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 때문에 좀 더 많은 사람들을 처벌하도록 몰아붙이게 되고, 사회적 안전망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른 무리들을 기만적으로 통제하려다보니 그들이 사회적으로 격리 되는 결과만은 만들어냅니다. 결국 사회는 더욱 불안해지고 좀비들이 집단화될 수 있는 저수지만 더 늘어나는 꼴이지요. 민주니 진보니 하면서 그런 현실을 비판했던 세력들은 뻘짓만 하다가 넘쳐나는 좀비들에 놀라 안전지역으로 숨어버리거나 좀비무리에 섞여 버리게 됩니다.

이런 세상에서 영화가 재미있겠습니까?

 

 

4

 

물론 2028년을 살아가는 이곳도 사람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암울하지만은 않습니다. 하지만 10여 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 볼일 없이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인데다가 자신이 좀비가 돼 버린 저 같은 늙은이에게 비관보다는 낙관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겠지요?

멀지 않은 과거에 살고 계신 여러분 중에 저와 같은 좀비로 살아가시게 될 분들이 눈에 보이지만,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이 한 번의 방송을 통해 여러분들과 만나는 것 밖에 없어서 안타깝습니다.

 

10년 전인 2018년에 한 사회학자가 좀비의 집단화를 막자면서 좀비가 될 가능성이 높은 집단을 분석해놓은 논문을 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 논문에서 ‘좀비가 될 자가진단법’이라는 표를 여러분에게 소개하려고 합니다. 아래 항목 중에 다섯 가지 이상 항목에서 “예”라는 답을 하시는 분들은 미래에 좀비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좀비가 될 자가진단법

 

1. 지난 3년 동안 멋을 부리기 위해 옷이나 액세서리를 구입해본 적이 없다.

2. 내 집을 갖는다는 계획을 이미 포기했다.

3. 나에게 경조사가 생겼을 때 연락할만한 사람이 열 명을 넘지 않는다.

4. 노후의 삶을 고민하는 것 자체가 싫다.

5. 내 고민을 진지하게 얘기할 사람이 없다.

6. 잠을 자기 위해 술이나 약을 먹는 경우가 1주일에 2회 이상이다.

7. 배가 고프지만 밥을 먹는 것이 귀찮아서 간식으로 떼우는 일이 1주일에 2회 이상 있다..

8. 나에게 상처를 줬거나 내가 상처를 줬던 사람들이 수시로 떠오른다.

9. 감정변화가 수시로 일어나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10.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아프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5

 

자기가 지금보다 16년 후에 살고 있는 좀비라고 주장하는 저를 여러분이 어떻게 생각하실 지는 충분히 예상이 됩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살고 있는 현실은 이미 영화 속의 세상을 넘어서고 있고, 역사의 흐름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살고 있는 2012년에 세상은 점점 미쳐가고 있지 않습니까?

미래에 저와 같은 좀비가 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여러분 자신과 주위를 차분하고 진지하게 둘러보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비 좀비 여러분, 두려워하시지 마시고 제 손을 잡으십시오.

 

삭막한 세상에서는 음악도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진행하는 이 방송에서 음악 하나 소개하지 못하고 제 얘기만 늘어놓게 됐습니다.

삭막한 세상에서 늙은 좀비가 된 제가 이 방송을 마치면서 옛 기억 속에 있는 음악 하나는 소개하고자 합니다.

50년 전 제가 어린아이였을 때 들었던 ‘미래소년 코난’의 주제곡을 들으면서 늙은 저의 마지막 방송을 끝내겠습니다.

 

 

푸른 하늘 저 멀리 새 희망이 넘실거린다

하늘 높이 하늘 높이 뭉게구름 피어난다

여기 다시 태어난 지구가 눈을 뜬다 새벽을 연다

태양처럼 거친 파도 헤치고

달려라 땅을 힘껏 박차고

아름다운 대지는 우리의 고향

달려라 코난

미래소년 코난

우리들의 코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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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방송에도 누군가의 참여를 기다립니다.

방송에 대한 의견도 좋고

전하고 싶은 얘기도 좋고

광고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해도 됩니다.

아니면 쓸데없는 얘기 주절거려도 되고요. ㅋㅋㅋ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문을 열어 놓고 있겠습니다.

 

성민이 mk102938@hanmail.net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고내리 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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