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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5/28
    죽음에 대한 생각
    참게
  2. 2006/05/28
    감자 심기(2)
    참게

죽음에 대한 생각

한 방송작가가 죽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1956년생이란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러나 아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1983년, 내가 KBS에서 처음 드라마라는 것을 배울 때 그녀는 나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다.   서로 친분은 없었지만 얼굴과 이름은 아는 정도였다.   나는 드라마 극본 공모에 당선이 되고도 드라마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그녀는 공모에 당선되지 못했어도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드라마 대신 다큐멘터리를 선택해서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살았다.   나는 그녀가 쓰는 드라마를 보았고, 더러는 재미있게 더러는 재미없게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 큰 작가로 성공한 그녀를 경이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들 중에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도 큰 관심을 갖지않았고 우연히 만날 기회도 없어서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지내왔다.   그런데 5월 23일 인터넷 기사로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간암 발병 한달 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왠지 마음이 씁쓸하고 우울했다.

작년에 나와 동갑인 두 사람의 여성 방송작가가 죽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 마음이 심란하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그들이 나와 직업이 같고 동년배라는 사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탓이다.

마흔 아홉, 또는 쉰, 쉰 하나는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년에 척수종양 수술을 받을 때도 나는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신마취를 하고 꽤 힘든 외과수술이라 수술동의서에 서명도 했을텐데 그 과정도 수술실에 들어가서 마취를 기다리던 순간도 별로 뚜렷하게 인상에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나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 죽음의 순간이 언제라도 불쑥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이 삶이 지속될거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 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죽음은 늘 남의 일이었고 현실이 아니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건 괴롭다는 표현의 하나일 뿐 실제로 이 목숨을 끊어버리고 지금의 이 현존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늦추고 물리치고 삶을 계속하지만 또 한쪽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죽음의 방문을 받고 소리없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내 나이는 생각지도 않던 병으로 돌연히 죽을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적된 스트레스와 생의 무게에 짓눌려 갑자기 튀어나오는 병, 혹은 병이라는 것을 미처 감지하기도 전에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예전과 똑같다.

지금 오늘 이 순간과 같은 생의 현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거라고 생각하며....신체와 정신이 서서히 낡아가기는 할 망정 갑자기 그 기능을 멈추는 일은 없을거라고 막연히 믿으며 그저 하루하루 어리석게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참....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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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심기

감자를 심었다.

아니 감자를 묻었다.

작년에 어머니가 보내주신 감자를 먹지 않은 채 쌓아두었더니 싹이 잔뜩 나 버렸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니 감자인들 먹겠는가?

1주일에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먹는다 해도 거의 한 끼를 때우는 식으로 대충 먹고 만다.   그래서 어머니가 애써 농사지으신 감자는 방 안에서 싹을 키우며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버리자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땅을 대충 일구고 감자를 묻었다.  그 중에 몇 개라도 살아서 감자꽃을 피우고 뿌리가 들게 된다면 이번에는 싹이 나기 전에 착실히 먹어보리라.  어설프기 짝이 없는 농사꾼 흉내처럼 사는 것이 다 그렇게 어설프게 대충 때우는 식이 되어버렸다.   왜 그럴까?  왜 그랬을까?  아프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유예하고 유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하지 않아도 나는 아프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산 지가 꽤 되었다.  그러나 그건 다만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가족들은 어느 정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봐 주지만 사회생활에서는 그건 통하지 않는 일이다.  아무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나는 알리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환자라면 나는 어설프게 일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면서 혹은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나는 아프다.  허리가 아파서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힘들고 조금만 무리하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환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해 왔다.   그건 내가 원한 일이다.   장기적인 치료로도 완전히 나아질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병을 끼고 살면서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아픈 것 때문에 번번이 의지가 꺾이고 더 철저히 해야 하는 일을 대충 넘어가게 된다.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나는 아픈 것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다.   자꾸만 의지가 꺾이고 요령을 부리게 된다.  싹이 나버린 감자를 묻으면서 나는 일상생활의 오랜 부재, 밥 해먹고 살기를 포기한 나의 일상에 대한 유기를 반성했다.   냉장고 속에 늘 오래 되어 썩어가는 음식을 담고 살아가는 일을 이제 더 이상 참지 말고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   아픈 것을 조금 더 참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어차피 나는 나 스스로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지 오래 되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나는 환자로 살지 않고 고통을 참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의 책임을 다 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나....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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