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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01
    불방...(3)
    참게
  2. 2007/07/23
    EBS다큐여자-굿바이 시사저널! 희망을 보다!(1)
    참게
  3. 2007/05/13
    말...말...말
    참게
  4. 2007/05/13
    사진작가 이시우씨 구속 기사(1)
    참게
  5. 2007/05/13
    EBS다큐여자-엄마, 다쳐서 미안해!
    참게
  6. 2006/06/02
    <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를 보았다....
    참게
  7. 2006/05/28
    죽음에 대한 생각
    참게
  8. 2006/05/28
    감자 심기(2)
    참게
  9. 2006/03/05
    나름대로 열심히 했다...(1)
    참게
  10. 2005/02/15
    이중성2
    참게

불방...

<다큐여자-굿바이 시사저널!>편은 지난 주에 방송되지 못했고 수정지시대로 수정을 했지만

다시 불방 처분을 받았다.  이번 주에도 방송되지 못한다.

그런 다음주에는?

그것도 불투명하다.

아주 방송되지 못할 수도 있다.

스트레스로 머리가 날아갈 것 같은 한 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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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다큐여자-굿바이 시사저널! 희망을 보다!

EBS다큐여자-굿바이 시사저널! 희망을 보다!
7월 25일(수), 26일(목), 27일(금) 저녁 9시 20분 방송
 
이번 다큐여자는 시사저널에 사표를 낸 기자들의 이야기입니다.
파업에 참여한 기자들 중 장영희, 김은남, 안은주라는 세 사람의 여기자를 중심으로
이제는 전직 시사저널 기자가 된 기자들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나는 꿈을 이룬 사람입니다. 대학 때 처음 보고 이 매체의 기자가 되고싶다고 생각했던
시사저널의 기자가 되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곳을 떠나게 되다니...'
 -안은주 기자
 
'시사저널을 끝까지 지켜주지 못해서 너무 미안합니다..'
 -김은남 기자
 
'참혹했습니다. 인간 대접을 못받은 곳에 내가 그렇게 너무 오래 있었구나...'
 -장영희 기자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오래 사랑했던 시사저널과 결별하게 했을까요?
 
무려 80개에 달하는 촬영 테입을 밤 새워 프리뷰하며 저는 정말로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래 사진이 실린 우리PD는 촬영 기간 내내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들여다 보며 울고
다녔습니다.
 
다큐멘터리는 객관적이어야 한다고 합니다.
취재 대상과 거리를 유지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합니다.
저는 원래 눈물이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Daum에서 후배들이 붙여준 '씨닉'(냉소적인)이라는 아이디를 쓰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이 프로그램을 하면서 눈물에 밥을 말아먹었습니다.
7월 2일에 방영된 MBC의 PD수첩'기자로 산다는 것'을 보신 분들도 모두 울었다고
했습니다.
 
왜, 무엇이 그렇게 우리의 눈에서 눈물을 자아냈을까요?
이 사람들은 정말로 순진한 사람들입니다.
얼핏 보면 대수롭지 않게 보일 수도 있는 '사건'을 계기로 그들은 고급스럽고
품위있는 국내 최고 시사주간지의 잘 나가는 기자에서 일터를 잃고 거리에
내동댕이쳐진 파업 노동자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6개월 넘게 월급 한 푼 못 받고 집에 있는 에어컨까지 내다 팔아가며
힘겨운 싸움을 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3페이지의 기사였습니다.
지난 2006년 6월 16일 밤 시사저널의 금창태 사장은 밤중에 인쇄소에서 경제면에
실릴 예정이었던 이 기사를 삭제했습니다.
삼성그룹의 이학수 부회장의 권한이 강화되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였습니다.
편집국에서는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습니다.
물론 사장은 편집국장과 취재총괄팀장 등을 불러 이 기사의 삭제를 종용했었습니다.
중앙일보 출신의 금창태 사장은 자신과 삼성 경영진과의 친분관계를 들먹이며
삼성이 껄끄러워 할만한 기사는 싣지 말라고 한 것이죠.
편집국장은 회의를 소집해서 기자들의 의견을 물었고 기자들이 기사를 실어야 한다고
하자 사장에게 기사를 뺄 수 없다고 하면서 인쇄소로 넘긴 것입니다.
 
책에서 이 기사가 빠진 사실을 알게 된 편집국장은 항의성 사표를 던졌고
사측은 이를 즉시 수리해 버렸습니다.
이에 항의하는 장영희 취재총괄팀장에게 무기정직이라는 중징계를 내렸고
24명의 기자 중 무려 열일곱 명에게 징계를 내렸습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정말이지 기자들로서는 청천벽력이었습니다. 
 
기자들이 가장 분노한 것은 기사를 삭제한 그 자체도 문제였지만
그 과정의 몰상식함과 사태에 대응하는 사측의 태도였습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다수의 언론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사측은 자신감을 얻었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시사저널사태에 대한 '알 권리'조차 빼앗긴 상황에서
기자들은 외로운 싸움을 해야 했습니다.
같은 언론계의 동료기자들이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침묵으로 일관하는
종이신문의 기자들은 자본권력 앞에서 이미 기자이기를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그 일로 기자들은 노조를 결성하고 파업을 하고 사측의 직장폐쇄로 맞서며
1년을 끌다가 지난 7월 2일에 파업 기자 전원의 사표 제출로 막을 내렸습니다.
 
그동안 금창태 사장은 취재진과 독자, 시민단체 대표 등 23명을 고소하는 어이없는
행각을 벌였습니다.
 
우리가 장영희와 김은남, 안은주 기자를 취재하기 시작했을 때 김은남 기자는
제2기 노조집행부의 사무국장을 맡은 참이었고 사측과 협상을 벌이다가
사주인 심상기 회장의 서울문화사 앞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회사측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습니다.  사과는 커녕 나중에는 기자들에게
동료 5명의 목(사표)을 가져오면 나머지는 받아주겠다는 파렴치한 제안까지
했습니다.
 
촬영 도중 가장 마음 아팠던 부분은 김은남 기자와 정희상 기자(노조위원장)이
심상기 회장의 북아현동 집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던 모습입니다.
회사가 부도났을 때 2년 가까이 월급을 못받으면서도 지켜냈던 회산데,
18년을 이어온 시사저널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어서 마지막으로 심회장과의
만남과 대화를 시도해 보려는 노력이었습니다.
그러나 심회장은 자기 회사에서 십수년을 근무해온 기자들이 오뉴월 땡볕에
밥을 굶고 있는데도 8일 동안 집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들을 외면했습니다.
 
단식 8일째 되는 날 노조 총회를 열고 회사와의 결별과 새매체 창간에 뜻을 모은
그들은 드디어 그토록 사랑했던 '시사저널'의 장례식을 치릅니다.
편집국의 명패 앞에 흰 국화를 바치며 흐느끼는 기자들의 모습,
뒤돌아서서 눈물을 감추는 그들의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보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이 이야기는 해피엔딩입니다.
왜냐하면 전직 시사저널 기자들이 새 매체를 꾸리기 위해 정기구독자와 투자자를
모은다는 소문이 퍼지자 이틀 만에 1만원, 2만원의 푼돈으로 2억이 모아졌을 만큼
이 새 매체에 대한 시민들의 성원이 쏟아졌으니까요.
그 뒤로도 기자들 자신도 당황스러울 정도로 많은 분들이 구독 신청과 투자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노순동 기자가 '도대체 우릴 뭘 믿고 그렇게 돈을 주십니까?'라는 글을 올렸을
정도니까요.
 
그들은 말합니다.
감히 뻔뻔하게 청합니다.
이름도 없습니다.  법인도 없습니다. 사무실도 없습니다. 그저 있는거라곤 새 매체에
함께 가기로 한 22명의 기자와 좋은 책을 만들겠다는 약속밖에는....
아, 그 뿐이 아닙니다. 
국내 주간지 중 가장 세련된 레이아웃을 자랑하는 시사저널을 만든 실력있는
비기자직 7명도 그들이 사표를 내는 날 함께 사표를 내고 새 매체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최고의 인적 인프라...그것이 현재 그들이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자산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새로 만드는 책은 이전의 시사저널과 같으면서도 다를 거라고.
품위와 깊이와 공정성은 계승하되 좀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소외된 곳을
더 깊숙이 조명하는 그런 책이 될거라고.
그들은 이제 거리에서 광고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 조차 외면하지 않습니다.
자기들의 일을 알리기 위해 거리에 나섰을 때 부딪친 무관심의 벽이 너무나
차가웠음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거리에 천막을 치고 겨울밤을 지새보았기 때문에
오뉴월 땡볕에 밥을 굶어가며 콘크리트 바닥에서 누워보았기 때문에
이제 그들은 노숙자의 심정도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성합니다.
우리가 기자로 있었을 때 우리는 과연 소외당하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얼마나 관심을 가졌던가?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던가?
 
알지도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그들은 그것이 모두 빚임을
깨달아 가고 있습니다.
그 빚을 갚기 위해서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수없이 자문하고 있습니다.
적금을 깨고 휴가비를 아끼고 비상금을 털어 그들의 계좌에 돈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보여줘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진정한 해피엔딩이 되려면 오는 9월 그들이 창간호를 내놨을 때
쌈지돈을 털어낸 독자들이 환한 웃음으로 그 책을 반길 수 있어야겠지요.
정말 잘 투자했다고 정말 정기구독하길 잘했다고 만족스러워 해야겠지요.
 
'뉴스를 볼 수도 안 볼 수도 없는 세상'이라고 후원금을 보낸 한 독자가 말했습니다.
언론에 대한 가없는 불신과 염증을 표현한 말이겠지요.
'참언론실천시사기자단'이란 이름으로 출발한 그들은 독자들의 그 엄중한 말 속에
담겨 있는 채찍을 결코 잊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PD수첩이 시사저널 사태의 파국까지의 전말을 보고했다면
우리는 오히려 새 출발에 의미를 두고 프로그램을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 그들은 무엇을 잃고 무엇을 얻었는지 보여주고,
중병에 걸린 것이 아닌가 우려되는 우리 사회의 건강을 이 정도나마 유지하고
있는 것은 바로 상식을 존중하는 시민들의 힘이라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말 없는 다수의 희망입니다'
라는 후원자의 격려댓글처럼 그들이 다수의 희망을 비추는 빛으로 다시
돌아오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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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말...말

 

그저 모든 것을 말로만 때우려는 사람들이 지겹다.

제대로 된 말을 할 줄도 모르면서 립서비스를 남발하는 사람들이 역겹다.

그리고 말을 글로 써야하는 내 직업이 두렵다.

말과 글은 다른 것이다.

 

차라리 말하지 않는 사람들이 반갑다.

입에 발린 말 따위 하지 않는 사람들.

마음에 없는 말 같은 건 아예 입에 올리지 않는 사람들.

꼭 듣고 싶은 말 조차도 해주지 않는 사람들.

차라리 그들이 더 고맙다.

책일질 수 없는 말을 하는 것보다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나를 위해서 당신들을 위해서 더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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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이시우씨 구속 기사

 
 
"제 남편,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현장] 국가보안법 폐지 걸고 21일째 단식중인 이시우씨 특별면회
 
장윤선 기자
 
 
▲ 지난 4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평화사진작가 이시우씨의 아내 김은옥씨.
 
ⓒ 오마이뉴스 장윤선
"남편이 21일째 단식하고 있습니다. 서울 옥인동 대공분실에서 첫 면회를 할 때 그는 '국가보안법을 안고 함께 죽기로 각오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본 남편은 한번 말하면 반드시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제발, 제 남편이 그냥 죽게 내버려두지 마세요. 석방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지난 4월 19일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된 평화사진작가 이시우(39ㆍ본명 이승구)씨의 부인 김은옥(42)씨는 9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열린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서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남편이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과 똑같은 피의자 신분이었지만 대우가 천양지차였던 것도 섭섭하지 않았다. 기자들이 서울 남대문경찰서에 이동스튜디오까지 차려놓고 밤새우며 김 회장 부자를 취재하는 것도 그러려니 했다. 같은 공간에 수감돼 있는 남편에 대해 단 한 줄도 쓰지 않아도 '기자들 그렇지 뭐' 했다.

그러나, 사람이 21일 동안 곡기를 끊고 묵비권을 행사하는데도 무반응인 것에는 화가 났다. 무심코 넘기기에는 남편의 건강이 점차 나빠지고 있다. 그것은 불안으로 이어지고 있다. 밥을 굶고 있는 남편이 한술이라도 뜬다면 더 바랄 게 없는 상황이 됐다.

백발의 노신부, 문정현 신부의 눈물

김씨는 이날 오후 4시 문정현 신부와 함께 서울 서초동 검찰 청사를 찾았다.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조사를 받던 이시우씨는 휴게실에 미리 나와 김씨와 문 신부를 맞이했다. 이씨의 표정은 밝았지만 한 마디씩 이어가는 게 힘겹게 느껴졌다. 서울구치소 교도관들은 일시적이지만 마비증상이 있었다면서 의사의 검진이 필요한 상태라고 전했다.

교도관들의 말을 듣던 김은옥씨가 눈시울을 붉히자 이씨는 웃으면서 "문제없다"며 "잘 판단 하겠다"고 뜻을 굽히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이 폐지될 때까지 단식으로 항거하겠다는 그의 의지는 불변이었다.

백발의 노 신부는 이시우씨의 넉넉한 웃음을 바라보다 울컥했다. 눈물로 안타까움을 전하던 문 신부는 검게 그을린 두 손을 마주한 채로 "나도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25일간 단식했던 사람"이라며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고 탄식했다.

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국가보안법이 노무현정권 말기가 되니 어느새 다시 살아나 꿈틀거리며 표현과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도구로 활동을 개시한 것은 진보진영의 치욕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분강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보안법이 사문화 된 법이라고 했지만 영어의 몸이 된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고 토로했다. 국가보안법 사문화는 결국 거짓말이 됐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했다.

검찰 면회에 동행했던 권오헌 양심수후원회 회장은 이씨에게 "당신의 결정을 믿는다"면서 "어떻게 힘을 보탤 수 있는지 밖에서 고민해보겠다"고 말했다. 이씨는 "여러분들이 나 하나를 위해 애쓰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죄송하다"면서 "국가보안법 폐지운동은 감옥에서도 사회에서도 계속 돼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씨의 부인 김은옥씨는 말이 없었다. 밥을 계속 굶을 것이라면 물과 소금이라도 자주 마셨으면 좋겠다는 게 그녀의 당부였다. 기력이 쇠잔해진 이시우씨가 약 10분간의 면회를 마치고 간단한 포옹을 한 뒤 표표히 사라지자 부인 김씨는 다시 검사의 방으로 향했다.

"검사님, 남편이 20일 동안 화장실 한번 못 갔어요"

"검사님, 남편이 20일간 단 한번도 화장실에 못 갔어요.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남편이 검사실로 조사받으러 오면 물 좀 충분히 주세요. 하루에 2리터는 족히 마셔야 버틸 수 있습니다. 남편이 물을 달라고 요구할 때까지 기다리지 마시고, 먼저 물을 건네셨으면 합니다."

김은옥씨는 가방 끈을 빙빙 돌리면서 몇 차례 당부했다. 말을 마치고 검사실을 나오는 복도에서 김씨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아들인 모양이었다. 아침에 끓여놓은 청국장과 반찬을 꺼내먹으라고 당부하는 목소리는 매우 밝았다. 힘겨운 일이 있어도 결코 웃는 낯을 버리지 않는다는 그녀의 말끝에는 삶의 피로도가 뚝뚝 묻어났다.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아들아이와 먹고살기도 바쁜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이 구속돼 더 살기 어렵게 됐다거나, 길거리에 나앉지 않고 사는 게 인생 최대의 목표라거나,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인천 강화로 삶터를 옮긴 뒤 동네사람들과 '자장면 파티'를 할 생각이었는데 경찰의 압수수색으로 파토 났다고 말하는 대목은 차라리 슬픔이었다.

 
▲ 평화사진작가 이시우 석방대책위는 9일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석방촉구와 국가보안법 폐지"를 주장했다.
 
ⓒ 오마이뉴스 장윤선
 

이에 앞서 열린 '이시우씨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서 최병모 변호사(전 민변 회장)는 "사상과 양심,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국가보안법이 다시 살아 여러 사람들을 옥죄는 걸 보면 80년대 군사정권이 체육관선거를 자행하던 때와 뭐가 달라진 것인지 의문"이라며 "민선 민간정부가 무려 3차례나 들어섰지만 아직도 국가보안법으로 처벌받는데 과연 민주화 됐다고 볼 수 있는 것이냐"고 토로했다.

최 변호사는 "주한미군측이 브리핑을 통해 공개한 내용을 사진 찍고 기사 썼다고 해서 수사기관이 나서 기밀이라고 난리치면서 국가보안법으로 처벌하는 나라는 대한민국뿐"이라면서 "주인 눈치 보면서 노예 노릇하는 미국의 속국 아닌지, 식민지가 아니고 무엇인지 의문"이라고 개탄했다.

또한 최 변호사는 "국가보안법 존폐는 민주화 정도와 연결되는 것"이라며 "아직 민주화 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국가보안법의 희생자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사회민주화를 위해 더 싸워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는데 힘을 보태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표현의 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여전히 활보

소설가 정도상씨는 "이번 이시우씨 구속사건의 핵심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것이 가장 큰 문제"라며 "헌법이 보장하는 창작의 자유를 침해한 것에 대한 저항이 필요하다"고 피력했다.

정씨는 "국가보안법은 생명과 평화를 저해하는 법"이라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활동이 개인을 넘어 사회적 확대, 국가적 확대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사진작가 이상엽(이미지프레스 대표)씨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에게는 작업의 유사성이 있다"며 "공안당국이 다큐 사진가들에게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으로 국가보안법 잣대를 들이댄다면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에 다름 아니"라고 개탄했다.

이씨는 또 "해외의 유명작가들도 이시우씨와 마찬가지로 DMZ를 많이 촬영했었다"면서 "이시우씨의 사진을 국가보안법상 국가기밀 탐지ㆍ회합통신으로 처벌하기에는 너무 아름답지 않느냐"고 말했다. 분단을 바라보는 예술적인 의지가 담긴 사진이라는 것이다. 행동하는 지식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오늘 같은 일을 당하게 됐다고도 덧붙였다.

2007-05-09 19:37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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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S다큐여자-엄마, 다쳐서 미안해!

EBS다큐여자 - 엄마, 다쳐서 미안해!

5월 2일, 3일, 4일 (수, 목, 금) 밤 9시 20분 방송

 

5월은 어린이의 달이다. 어린이의 달 특집으로 어린이 안전사고에 대해서 방송해야 한다고 했을 때

조금 당황스러웠다. 사고가 나서 아이가 다쳤거나 죽었을 때 부모가 느끼는 고통이 얼마나 클텐데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텐데 그 상처를 건드리는 프로그램을 해야 한다는게 너무 부담스러웠다.

예상대로 섭외도 잘 되지 않았다.

 

고맙게도 어린이의 안전에 대한 사회의 관심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된다면 출연하겠노라는 부모님들이 있어서 프로그램을 제작하게 되었다.

2006년 10월 1일 대전의 한 놀이동산에서 스윙드롭이라는 놀이기구를 타던 초등학교 6학년 여자어린이 두 명이 추락하는 사고가 일어났다. 안전벨트를 착용하지 않았는데 아르바이트생이 놀이기구를 출발시켜서 일어난 사고였다. 높이 35미터 상공에서 시멘트 바닥으로 추락한 유정이는 심각한 외상과 뇌손상을 입고 생사의 기로를 헤매다 겨우 살아났다.

그후 7개월, 유정이의 가족들은 지옥과 같은 나날들을 견디며 오직 유정이가 예전같은 모습으로 돌아오기만을 기원하고 있다. 유정이는 왼쪽은 전신이 다 부서질 정도로 다쳤고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뇌출혈로 인한 뇌 손상으로 정상적이던 열 세살 어린이의 지능이 5,6세 정도의 아이처럼 퇴행한 것이다.

 

유정이의 아빠는 구두공장 기술자였는데 회사가 부도 나자 대전 시내에서 구두수선점을 하고 있다. 엄마 역시 아빠의 일을 돕고 있었다. 중3인 큰 딸 유진이와 중1이 되었을 유정이 자매가 건강하게 커가는 모습을 보람으로 삼고 열심히 살아온 엄마, 아빠에게 유정이의 사고는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었다. 엄마는 하루 종일 유정이 시중을 드느라고 거의 일을 하지 못하고 아빠는 고통 속에서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엄마 몫까지 더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유진이 역시 엄마, 아빠가 유정이한테 매달려 있느라고 신경을 써주지 못해 많이 힘든 상황이지만 동생을 위해 꿋꿋하게 견디고 있다.

 

그들 가족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살아날 가망이 2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는 의사들의 말에도 결코 실망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은 채 20일 넘게 중환자실 앞을 지켜온 유정이 엄마 방미해씨. 그녀는 정말로 강한 어머니였다. 자기가 울면 아이한테 좋지 않을까봐, 자기가 괜찮다고 믿어야 유정이가 살 수 있다는 생각에 모든 고통을 안으로 삭히고, 잘될거야, 유정이는 꼭 살아날거야, 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고 믿음을 가졌던 그 엄마의 힘이 유정이를 살게 한 것 같았다.

유정이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는 동안 엄마, 아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온 정성을 다해 유정이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일 밖에는. 엄마, 아빠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긍정적인 마음을 가져야 유정이가 살아난다고 믿었다는 말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유정이가 어린애처럼 퇴행하고 몸도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게 된 것은 불행한 일이지만 7개월 동안 유정이 곁을 지키면서 엄마는 아이에게 더많은 사랑을 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고 했다.

아무리 나쁜 일이라도 그 속에는 좋은 것도 들어 있다고 유정이 엄마는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유정이는 지능이 퇴행했을 뿐만 아니라 단기기억상실증에 걸려있다. 사고 당시의 일과 그밖에 몇 가지 일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잠을 잘 때면 두 손과 두 발로 침대 난간을 단단히 부여잡고 잔다. 유정이의 무의식 속에 추락에 대한 공포가 남아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유정이는 아직 잘 걷지도 못하고 턱과 이가 부서져 말도 잘 하지 못한다. 게다가 너무 오래 누워 있어서 생긴 욕창 때문에 말 못할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그런데도 유정이는 오히려 자기 때문에 고생하는 엄마를 위로한다.

어느 날 다치기 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엄마에게 "엄마 미안해...꿈돌이랜드 가서 미안해....꿈돌이랜드 가서 떨어져서 미안해."라고 어눌한 발음으로 엄마를 위로한다.

그런 말을 하는 유정이를 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엄마, 서로가 서로에게 "사랑해"라고 말하는 그들 모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교통사고로 입원해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중학생 정민이 아빠와 동병상련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이던 유정이 아빠. 병원으로 돌아가는 길에 절규하듯 쏟아놓는 말 "작년 9월 30일로 시간을 되돌려 놓고 싶다"는 그 말도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말이었다.

 

또 한 사람 유정이의 6학년 담임이었던 송옥선 선생님.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는 유정이를 매일 같이 보러 와서 친구들이 써준 힘내라는 메모들을 보여주고 읽어 주면서 한 시간 씩 기도를 올리던 선생님의 지극한 마음은 엄마가 유정이를 지키는데 너무 큰 힘이 되었다. 유정이 엄마는 선생님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할거라고 말한다. 유정이는 꿈이 뭐냐고 물어보면 꼭 선생님이 되겠다고 대답한다. 송옥선 선생님 같은 선생님이 되겠다고.

 

유정이네 가족은 오늘도 병실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유정이를 위로한다. 사고 나기 전처럼 네 식구가 한 집에서 함께 잠자고 함께 생활하면서 오순도순 살아갈 그 날을 기다리면서. 아무리 힘들어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다면 그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두 알고 있다.

 

유정이가 하루 빨리 건강한 모습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엄마의 소원처럼 중학교 교복을 입고 의젓한 모습으로 학교로 돌아가 공부하는 날이 오기를... 유정이네 가족들이 저녁 밥상에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함께 밥을 먹는 그 날이 오기를.... 프로그램을 하는 동안 수도 없이 눈물을 흘리며 마음 속으로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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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필름의 연대기>를 보았다....

5월 30일....월요일날의 밤샘 휴유증과 감기 때문에 정신이 들지 않았지만...

나루가 참여한 영화이고 타이틀이 땡겨서 홍대앞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대한민국이 미쳐가고 있다....에 완전 공감했다....

 

16명이 모여서 이런 프로젝트를 했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을 가능한 일로 만든

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관객이 많았다는 것도 기분 좋았다.   지난번 경순이의 '쇼킹 패밀리'를 보러 갔을 때도

비록 객석이 많진 않았지만 어쨌든 표가 매진될 정도로 관객이 들었다는 것이 흐믓했는데...  독립영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아서 다행스럽고 반가운

일로 보였다.

 

'불타는....'에 대한 느낌은 우선 좀 산만하다는 것이었다.

여러 감독의 공동 연출이라 해도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이 좀더 분명했으면

좋았을텐데....구성이나 전개 방식이 달라도 각각의 에피소드들을 엮어나가는 힘이

느껴졌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었다.

 

어떤 부분은 상당한 집중력이나 흡인력이 느껴졌으나

어떤 부분은 반복이 너무 많고...주입식으로 메시지를 떠먹이는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각각의 에피소들를 배열하는 순서에 대해서도 좀더 치밀한 고려가 있었으면

싶었다.  옴니버스 방식의 구성에도 개연성은 보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독립영화의 제작현실을 약간은 알고 있는 나로서는 불가피한 여건 상의 문제가

이런저런 아쉬움을 남겼으리라고 생각했다.

아무튼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고, 좀더 많은 관객들이 이 영화를

보았으면 하는 생각도 했다.

상영회가 계속 열리고 있다는 것이 고무적이다.

온라인상으로 감상할 수 있다는 얘기도 반갑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객석에 앉아서 영화를 감상한다는 것은 여러 모로 의미가 있는

일이다.   나 자신도 아직 독립영화 제작에 관한 꿈을 갖고 있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더많은 영화를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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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한 생각

한 방송작가가 죽었다.

나보다 한 살 많은 1956년생이란다.

나는 그녀를 모른다.

그러나 아주 모른다고 할 수는 없다.

1983년, 내가 KBS에서 처음 드라마라는 것을 배울 때 그녀는 나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했던 사람이다.   서로 친분은 없었지만 얼굴과 이름은 아는 정도였다.   나는 드라마 극본 공모에 당선이 되고도 드라마 작가가 되지 못했지만 그녀는 공모에 당선되지 못했어도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나는 그녀가 작가가 되기 위해서 엄청난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드라마 대신 다큐멘터리를 선택해서 각자 자기 일을 하면서 20년 넘게 방송작가로 살았다.   나는 그녀가 쓰는 드라마를 보았고, 더러는 재미있게 더러는 재미없게 생각을 하며 나름대로 큰 작가로 성공한 그녀를 경이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별로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작가들 중에 그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나도 큰 관심을 갖지않았고 우연히 만날 기회도 없어서 그저 그런 사람이 있다는 정도만 알고 지내왔다.   그런데 5월 23일 인터넷 기사로 그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간암 발병 한달 만에 갑작스런 죽음을 맞게 되었다는 것을.  

왠지 마음이 씁쓸하고 우울했다.

작년에 나와 동갑인 두 사람의 여성 방송작가가 죽었단 소식을 들었을 때도 그렇게 마음이 심란하더니 이번에도 그랬다.

그들이 나와 직업이 같고 동년배라는 사실이 남의 일 같지 않은 탓이다.

마흔 아홉, 또는 쉰, 쉰 하나는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작년에 척수종양 수술을 받을 때도 나는 죽음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전신마취를 하고 꽤 힘든 외과수술이라 수술동의서에 서명도 했을텐데 그 과정도 수술실에 들어가서 마취를 기다리던 순간도 별로 뚜렷하게 인상에 남아있지 않다.

아마도 나는 누구나 죽는다는 것, 그 죽음의 순간이 언제라도 불쑥 찾아올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그저 언제까지나 지금과 같은 이 삶이 지속될거라고 생각하는 지극히 어리석은 사람들 중의 하나인 모양이다.

죽음을 생각하고 죽음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죽음을 준비하며 살아야 인생을 제대로 살 수 있다고 똑똑한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죽음은 늘 남의 일이었고 현실이 아니었다.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많이 있었지만 그건 괴롭다는 표현의 하나일 뿐 실제로 이 목숨을 끊어버리고 지금의 이 현존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수명이 늘어나고 의학이 발달해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늦추고 물리치고 삶을 계속하지만 또 한쪽에서는 속수무책으로 죽음의 방문을 받고 소리없이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수없이 많다. 

내 나이는 생각지도 않던 병으로 돌연히 죽을 수 있는 나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적된 스트레스와 생의 무게에 짓눌려 갑자기 튀어나오는 병, 혹은 병이라는 것을 미처 감지하기도 전에 찾아오는 삶의 마지막 순간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나는 아직도 예전과 똑같다.

지금 오늘 이 순간과 같은 생의 현존이 언제까지나 계속될거라고 생각하며....신체와 정신이 서서히 낡아가기는 할 망정 갑자기 그 기능을 멈추는 일은 없을거라고 막연히 믿으며 그저 하루하루 어리석게 똑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며 무의미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참....한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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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심기

감자를 심었다.

아니 감자를 묻었다.

작년에 어머니가 보내주신 감자를 먹지 않은 채 쌓아두었더니 싹이 잔뜩 나 버렸다.  집에서 밥을 먹지 않으니 감자인들 먹겠는가?

1주일에 집에서 밥을 먹는 날이 며칠이나 될까?  먹는다 해도 거의 한 끼를 때우는 식으로 대충 먹고 만다.   그래서 어머니가 애써 농사지으신 감자는 방 안에서 싹을 키우며 말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냥 버리자니 아무래도 마음에 걸려 땅을 대충 일구고 감자를 묻었다.  그 중에 몇 개라도 살아서 감자꽃을 피우고 뿌리가 들게 된다면 이번에는 싹이 나기 전에 착실히 먹어보리라.  어설프기 짝이 없는 농사꾼 흉내처럼 사는 것이 다 그렇게 어설프게 대충 때우는 식이 되어버렸다.   왜 그럴까?  왜 그랬을까?  아프다는 핑계로 많은 것을 유예하고 유기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철저하게 하지 않아도 나는 아프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용인되는 것처럼 착각하며 산 지가 꽤 되었다.  그러나 그건 다만 나 혼자만의 생각일 뿐이다.   가족들은 어느 정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고 봐 주지만 사회생활에서는 그건 통하지 않는 일이다.  아무도 내가 아프다는 것을 알지도 못하고 나는 알리지도 않는다.  만약 내가 환자라면 나는 어설프게 일을 하지 말고 집에서 쉬면서 혹은 병원에 다니면서 치료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나는 아프지만 아프지 않은 것처럼 행세하며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나는 아프다.  허리가 아파서 오랫동안 앉아 있기가 힘들고 조금만 무리하면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통증에 시달린다.   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환자로 살아가기를 거부해 왔다.   그건 내가 원한 일이다.   장기적인 치료로도 완전히 나아질 수 없는 병이기 때문에 병을 끼고 살면서 아프지 않은 것처럼 살아가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잘 되지 않는다.  아픈 것 때문에 번번이 의지가 꺾이고 더 철저히 해야 하는 일을 대충 넘어가게 된다.    심각한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아프지 않은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게 살았던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들처럼 되지 않는다.   나는 아픈 것을 이기기가 너무 힘들다.   자꾸만 의지가 꺾이고 요령을 부리게 된다.  싹이 나버린 감자를 묻으면서 나는 일상생활의 오랜 부재, 밥 해먹고 살기를 포기한 나의 일상에 대한 유기를 반성했다.   냉장고 속에 늘 오래 되어 썩어가는 음식을 담고 살아가는 일을 이제 더 이상 참지 말고 어떻게든 해결해야겠다.   아픈 것을 조금 더 참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도록 노력해야겠다.   어차피 나는 나 스스로 환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지 오래 되었다.   나는 환자가 아니다.  나는 환자로 살지 않고 고통을 참고 보통사람들과 똑같은 일상의 책임을 다 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그러나....정말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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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대로 열심히 했다...

....고 생각하지만 영 결과가 신통치 않을 때 정말 실망스럽고 풀이 죽는다.

 

그런데 사실은 나는 언제나 열심히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열심히 한다는 것이 어디까지냐고 반문한다면?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나는 어쨌든 적극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정말 열심히 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보아도 답은 나온다.

 

자꾸만 자꾸만 열심히 하기가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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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성2

사람은 누구나 이중성을 갖고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사실일까?

사실인 것 같다.

그러나 그 정도의 차이라는게 아주 엄청날 때는 자칫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이다.   지극히 이중적인 인간, 위선의 도가 지나친 인간에 대해서 우리는 얼마만한 혐오감을 갖는가?   

그리고 사람은 자기 자신이 얼마만큼 이중적인 사람인가에 대해서 스스로 잣대를 가질 수 있을까?

거의 어려운 문제다. 

나는 내가 얼마나 이중적인 인간인지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정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은 자신만만하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있는 아무개는?  또 아무개는?   그것은 더 알 수 없는 일이고 장담할 수 없는 문제다.

이중적인 잣대로 세상을 보는 일, 그것은 오랫동안 습성화되어 굳어버린 습관이라 할 수 있고....

 

투명한 사고란 지성보다는 감성의 문제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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