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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자회담 합의의 '10대 쟁점' |프레시안, 황준호

6자회담 합의의 '10대 쟁점'…'10대 讀法'
  <분석> 전문가 진단 "'장밋빛'은 없다…곳곳에 암초"
  2005-09-21 오전 10:19:25
  19일 발표된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과 미국 등 참가국들이 파국만은 피해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맺은 결실이다. 북미가 그토록 줄다리기 했던 북핵의 평화적 이용권을 원칙적으로 인정하고 경수로 제공 문제를 '적당한 시점'에 논의키로 하는 등 핵심 쟁점에서 합의를 이뤘고, 핵 폐기와 북한 불침략 의사의 확인, 북미·북일 관계의 정상화 조치 등 과거보다 진일보한 내용이 담고 있다.
  
  그러나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라는 소극적인 동기가 작용한 합의였던 만큼 성명의 문구 곳곳에는 참가국들이 편의에 따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할 여지가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발표 하루만에 튀어 나온 '경수로 제공 시점'에 대한 논란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는 '행동 대 행동'은 고사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말 대 말' 단계에서 조차 순탄치 않은 행로를 예고한다. <프레시안>이 앞으로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는 쟁점 10가지를 추려 그 독해법을 소개한다.
  
  ▶ 쟁점 1. '빠른 시일' vs. '적당한 시점'
  
  핵 포기를 먼저 할 것이냐, 그에 대한 상응 조치를 먼저 할 것이냐는 문제는 2002년 2차 북핵 위기 발발 이후 전 시기를 관통하는 핵심 중의 핵심 쟁점이다. 북한의 요구 사항은 '체제 보장'에서 '불가침 조약' '경수로 제공' 등으로 변해 왔지만 누가 먼저 행동할 것인지는 북핵 문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북한은 한때 '동시 행동 원칙'을 들고 나왔지만 부시 미 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은 그것마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공동성명도 '핵을 포기하고 빠른 시일 내에 핵무기비확산조약(NPT)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할 것을 약속'하는 동시에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한다'고만 돼있고 선후 문제는 명시하지 않았다. 성명 다음날부터 북한은 '경수로 제공 먼저', 미국은 '핵 폐기 먼저'라며 문제를 원점으로 돌려놓는 듯한 설전을 벌였다.
  
  이같은 논란은 무엇보다 북미 간에 자리하고 있는 극도의 불신 때문이다. 이는 국제적인 구속력을 가진 법·제도적인 틀을 갖출 때에만 풀릴 수 있다. 그러나 6자회담이라는 논의틀과 공동성명은 정치적인 구속력만 있을 뿐 법적인 강제력이 미흡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따라서 11월 시작되는 제5차 6자회담은 행동의 선후를 따지기보다 한쪽이 먼저 행동했을 때 다른 쪽도 약속을 지키게 하는 '강제력'을 담보하는 장이 돼야 한다는 과제를 안고 있다.
  
  ▶ 쟁점 2. 평화적 핵 이용권 인정?
  
  미국은 제4차 6자회담 휴회기간 동안 평화적 핵 이용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유연한 태도를 취해 왔다. 이는 1단계 회담의 휴회 이유가 평화적 핵 이용권을 둘러싼 논란이었고, 경수로 제공이 평화적 핵 이용권의 하위 개념인 것에 비춰볼 때 다소 모순된 태도였다.
  
  그러나 이같은 태도 변화는 미국이 평화적 핵 이용권을 '이론적인 문제' '미래의 권리'라는 식의 추상적 개념으로 재정의한 데에 따른 것이다. '숨을 쉴 수 있는 권리는 누구나 있다'는 우리 정부 당국자의 비유대로 '평화적 핵 이용권'이라는 원론적 의미의 핵 주권은 허용하되 그에 따른 구체적인 행동은 별개의 문제로 삼으려는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한이 말하는 평화적 이용권은 그러나 실험용 혹은 산업용으로 당장 핵을 이용할 수 권리를 뜻하는 것으로 미국의 개념과 논의 수준이 다르다. 이처럼 이번 공동성명에 포함된 평화적 핵 이용권 문구 역시 서로 다른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농후해 지속적인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쟁점 3. 네오콘은 공동성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 미 행정부가 이번 공동성명을 온전히 받아들일지도 미지수다. '불법 행위에 대한 보상은 없다'는 원칙을 지속적으로 천명해 온 미국이 공동성명에 포함시키기조차 거부했던 경수로 문구가 불완전한 형태지만 일단 명시됐기 때문이다.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차관보가 성명 발표 직후부터 더욱 강한 어조로 북한의 선(先) 핵포기를 주장하는 것은 북한을 향한 외침인 동시에 북한과의 협상 자체를 거부했던 미 행정부 내 강경파(네오콘)들을 향한 '국내용'이라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부시 1기 대북 정책이 실패로 평가되면서 협상 기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강경파들이 경수로 관련 문구를 빌미로 행정부 내 협상파들을 압박하며 공동성명을 사실상 무효화하려는 시도를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 쟁점 4. 남한내 핵무기 사찰 요구 가능성
  
  '한국 영토에는 핵무기가 없음을 확인'한다는 구절은 이번 공동성명 중 눈에 띄는 대목의 하나다. 미국은 모든 핵무기 배치에 관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NCND' 정책을 취해 왔지만 한반도에서만은 주한미군에 핵무기가 없다고 명시적으로 부인해 왔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1년 전술핵무기를 모두 철수하겠다고 선언했고, 같은해 12월 노태우 대통령도 한국 영토와 영해 어느 곳에도 핵무기는 없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16일까지도 남한에 1000여 개의 핵무기가 있다며 극도의 불신감을 드러냈다.
  
  따라서 북한이 자신들이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국제적인 감시 체제에 들어가는 동시에 남한 내에도 핵무기가 없다는 것을 검증해야 한다고 요구할 가능성이 짙다. 이는 핵 폐기와 경수로 제공의 선후 문제 못잖은 논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또 설령 한국 영토 내에 핵무기가 없더라도 한국이 미국의 핵우산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한다는 주장을 결국에는 펼 것으로 보인다.
  
  ▶ 쟁점 5. 북한은 '중대제안'을 받아들일까
  
  우리 정부는 북한에 200만kW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중대제안은 신포 경수로의 종료를 전제로 한다는 입장을 일관되게 취해 왔다. 문제는 공동성명에 '중대제안은 신포 경수로 대체용'임이 명시되지 않은 채 '200만kW의 전력공급에 관한 7월 12일자 제안을 재확인했다'고만 돼 있고, 북한의 수용 여부도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 정부의 입장이 뚜렷한 상황에서 선뜻 전력을 받겠다고 하면 그것은 곧 신포 경수로의 포기를 의미하므로 북한 입장에서는 수용 여부를 모호하게 처리하는 협상 전략을 택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번 2단계 회담 초반 신포가 아닌 새로운 경수로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공동성명에는 단지 '경수로'라고만 돼 있어 신포 경수로의 끈도 여전히 쥐고 있다. 따라서 공동성명 이행 협상 과정에서 신포 경수로 공사 재개와 전력 공급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할 수 있다. 경수로 제공의 모호함과 전력 공급의 명확함을 십분 활용한다는 시나리오인 것이다.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는 만무하지만 북한이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활용한다면 협상 과정이 난관에 봉착할 수 있다. 송전의 전제가 신포 경수로의 종료임을 수없이 공언한 우리 정부도 북한과 '퇴로 없는 싸움'을 벌일 상황에 빠질 수도 있다.
  
  ▶ 쟁점 6. 송전과 경수로 공사비, 이중 부담?
  
  경수로 공사비 문제는 북한이 모든 핵을 포기하고 NPT·IAEA의 보장·감독으로 복귀할 경우에나 해당된다는 것이 북한을 제외한 5개국의 공통된 인식이지만 이에 대한 논란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0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경수로가 건설되지 않는다면) 송전 비용은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데 경수로 제공과 맞물리게 되면 어쨌든 총 비용은 줄어들 수 있다"는 계산법을 제시했다. 즉 경수로 건설이 완료될 때 송전을 중단하는 '한시적 송전'이 된다면 '무기한 송전'에 들어갈 비용이 줄어 총량상 부담을 덜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이 공동성명의 약속대로 핵 폐기 수순을 밟아 경수로를 받을 수 있는 단계가 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은 이중 부담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신포가 아닌 곳에 경수로를 건설할 경우 공사비 자체도 만만찮을 게 분명하다. '케도 식의 부담', 즉 공사비 대부분을 우리 정부가 떠맡는 일은 없다는 우리 정부의 입장은 '희망사항'에 불과할 수도 있다. 또 5개국이 북한에 에너지(사실상 중유)를 제공키로 한 약속까지 이행할 경우 비용은 크게 늘어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내에서 또 다시 '퍼주기' 논란이 재현될 수도 있는데, '민족 경제공동체 구축을 위한 비용'이라는 우리 정부의 논리가 얼마나 설득력을 발휘할지 의문이다.
  
  ▶ 쟁점 7. 평화체제를 위한 포럼은 자체 추진력을 가질 것인가
  
  이번 공동성명에서 또 하나의 성취로 꼽히는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를 위한 협상'은 한반도에 잔존하고 있는 냉전 질서를 북핵 문제의 해결과 함께 해체하려는 시도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는 노력까지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같은 시도가 북핵 문제에 발목이 잡힐 경우, 94년 북미 제네바 합의와 2002년 북일 평양선언, 97년 제네바 4자회담 등에서 처럼 한반도 신질서 구축 문제가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는 지적이다. 평화체제 구축의 '진도'가 아무리 많이 나가더라도 문제의 핵심인 북핵이 꼬일 경우 사상누각이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체제 논의가 실질적으로 진전되기 위해서는 북핵 해결이 우선 진전을 보여야 하는 것은 물론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와 맞물려 시너지 효과를 노려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또 설령 북핵이 난항을 겪더라도 포럼이 자체의 추진력을 갖고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장기적인 비전을 마련하는 장이 돼야 공동성명의 취지를 살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쟁점 8. 중국, 6자회담 발판으로 부상?
  
  이는 북핵 해결 자체에서 나오는 쟁점이라기보다 향후 한반도를 둘러싼 정세에서 나타날 중대한 문제가 될 전망이다. 6자회담에서 지도력을 인정받은 중국이 지역내 영향력을 확대하려고 할 것이며 미국은 일본과 함께 이를 견제하려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양측의 그같은 각축이 주로 한반도를 대상으로 벌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중국 언론들은 벌써부터 중국의 지역적 영향력이 확대되면 미국과 일본의 견제에 대응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우선 제5차 6자회담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 문제는 아시아 국가가 해결해야 한다는 논리를 내세울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또 이번 공동성명에서 거론된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포럼에도 참여하는 것이 기정사실화 되고 있어 '중국이 관리하는 한반도 평화체제'를 꾀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 쟁점 9. 제5차 6자회담은 약속대로 열릴 수 있을까
  
  이번 공동성명과 제5차 6자회담 사이에도 북미 접촉을 비롯, 참가국간 다각도의 접촉이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전문가들의 진단대로 공동성명은 북핵 해결의 종결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참가국들의 편의대로 해석될 여지가 많다는 점에서 세부적인 협상거리가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과거보다 더한 갈등이 노정될 수 있다는 점이다. 행동의 선후차를 두고 성명 발표 다음날부터 벌어지는 논란을 볼 때 회담이 원점으로 돌아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하는 상황에서 북한과 미국이 공동성명 문구 하나하나를 갖고 옥신각신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렇게 되면 공동성명은 아무 강제력 없는 말잔치로 끝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박순성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북미간에 실무 협상을 한 후에 6자회담을 한다는 식의 북미간의 기본틀이 없어 아쉽다"고 평했다.
  
  ▶ 쟁점 10. 북일 관계정상화 과정이 북핵 해결의 걸림돌은 되지 않나
  
  공동성명에 북일 관계정상화 문제가 언급된 것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중의원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후 밝힌 '북한과 관계정상화 추진' 입장으로 탄력받은 바 크다는 것이 지배적인 분석이다.
  
  그러나 관계정상화라는 표면적 긍정성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 해결에 있어서는 오히려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다. 북한과의 관계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인 납치 문제를 어떤 식으로든 해결하려는 일본이 북핵 테이블에까지 이 문제를 끌어들일 경우 공동성명 후속 회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북미간의 관계정상화에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더군다나 '유엔헌장의 원칙과 목적을 준수'한다는 공동성명 2조의 이면에는 북한 인권과 미사일 문제가 함축돼 있는 것으로 보여 이 문제들이 북핵 테이블에 오를 경우 '혹 떼러 갔다 혹 붙이고 오는 격'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황준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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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경수로+전력+중유' 모두 받을까? |오마이뉴스, 김태경

북한 '경수로+전력+중유' 모두 받을까?
[분석] 거세지는 북 에너지 지원 논란
텍스트만보기   김태경(gauzari) 기자   
북한과 미국이 6자회담 타결 하룻만에 경수로 건설 시기를 놓고 대립하고 있다. 여기에 기존 신포 경수로 종료를 전제로 한 한국의 중대 제안과 6자회담 합의문에서 언급한 경수로가 서로 겹친다는 주장도 나와 논란이 거세다.

정동영 통일부 장관은 21일 열린우리당 확대간부회의에 참석해 "(북·미간 대립이) 앞으로 많겠지만 얼마든지 타결이 가능하다고 본다"며 "복안도 있고 전략도 서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이번 6자회담 합의문에는 "북한은 핵에너지를 평화적으로 사용할 권리가 있다"며 "다른 참가국들은 이에 대해 존중을 표시하고,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했다"고 되어있다. 경수로 제공 자체를 약속한 것도 아니다.

북한이 경수로를 제공해야 핵무기확산방지조약(NPT)에 가입한다는 주장에 대해 미국과 일본은 "어림없다"며 일축하고 있다. 한국 정부의 고위 당국자도 지난 19일 6자회담이 타결된 직후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폐기하고 NPT에 복귀하며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안전조치를 이행한 다음에 경수로가 제공된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차관도 같은 날 "북한이 핵무기비확산조약(NPT)에 복귀하지 않을 경우 북한에 에너지를 지원할 수 없다"고 밝혔다. 중국은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 문제는 북한의 핵 폐기는 '현재형'인데 비해 경수로는 '미래형'이라는데서 발생한다. 오는 11월 열리는 5차 6자회담에서 격론이 벌어지겠지만 결국은 '동시행동'을 최대한 충족하는 식으로 결론을 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즉 북한이 NPT에 복귀하고 IAEA 사찰을 수용하는 것과 미국이 북한에 경수로 제공을 보장한다는 차원에서 북한과 원자력 협정을 체결하는 것을 동시에 이행하는 방안 등이 논의 될 수 있다.

신포 경수로 놔두고 경수로 따로 짓는 건 낭비

▲ 지난 2002년 8월 북한 함경남도 금호지구 신포에서 경수로 원자력 발전소의 본격적인 건설을 알리는 타설식이 열리는 모습.
ⓒ2005 연합뉴스
또 하나의 논란은 기존 신포 경수로와 이번 6자회담 합의문에 언급된 경수로의 상관 관계다. 우리 정부는 신포 경수로와 미래의 경수로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신포 경수로 종료를 전제조건으로 중대제안을 내놓은 우리 정부로서는 이렇게 주장해야 논리적 모순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간단치 않다.

지난 1994년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기로 한 경수로 2기는 2003년 12월 완공이 목표였다. 그러나 신포 경수로는 34.5%의 공정을 보인 가운데 지난 2003년 11월 미국과 일본의 강력한 반대로 공사가 중단된 상태다.

신포 경수로의 총 공사비는 46억달러로 계상됐으며 이미 15억4000만달러가 투입됐다. 총 공사비 가운데 70%인 32억2000만 달러는 한국이, 9억2000만 달러는 일본이, 나머지는 유럽연합(EU)이 부담하기로 했다. 미국은 비용을 내지 않는 대신 경수로 완공 때까지 연간 50만t(연간 5000만 달러)의 발전용 중유를 북한에 주기로 했다.

그런데 지난 7월 12일 우리 정부는 중대제안을 공개하면서 대북 전력 제공 비용을 신포 경수로 공사비 중 한국 부담금 32억2000만 달러 가운데 이미 쓴 11억7000만 달러를 뺀 나머지 돈에서 충당한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200만㎾ 송전선로 건설에 6000억원, 변환 설비에 1조원, 변전소 2곳에 12000억원 등 총 1조7200억원이 중대제안 이행에 필요한 것으로 추정했다. 또 해마다 200만㎾의 전력 생산에 1조원 정도가 들 것으로 보인다.

만약 34.5%의 공정이 이미 진행됐고 15억달러가 넘는 돈이 투입된 신포 경수로를 폐기하고 다른 경수로를 생각한다는 것은 심각한 낭비다. 신포 경수로는 공사를 속개하면 4~5년이면 완공될 수 있지만, 새 경수로 건설에는 또 10년이 걸려야 한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우선 경수로 부지로 신포만큼 좋은 곳이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의 한 고위당국자는 지난 20일 "북한에 대북 송전을 하되 경수로가 완공되어 발전을 시작하면 그때 대북 송전은 중단한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중대제안과 6자회담 합의문에 언급된 경수로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1조7200억원이나 들여 만든 송전 및 배전 설비가 경수로가 완공되는 즉시 필요없게 되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나오는 것이다.

미국이 부담하던 중유 5개국 나눠 부담... 일본의 부담이 제일 클 듯

이번 합의문에는 "중국·일본·한국·러시아·미국은 북한에 에너지를 제공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에 이어 "한국은 북한에 200만kw전력을 제공하는 2005년 7월 12일의 제안을 재확인했다"로 되어있다.

여기서 에너지는 중유를 말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보수 진영에서는 "북한은 남한의 전기도 받고, 중유도 공급받고, 경수로도 얻게 되는 등 모든 것을 얻었다"고 볼멘 소리를 하고있다.

원래 제네바 합의는 경수로 완공 때까지 중유는 전적으로 미국이 부담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중·일·러·미 등 5개국 모두 중유 공급의 당사자로 되어있다. 합의문에 각국의 구체적인 분담 액이 명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앞으로 협의를 해야 한다.

물론 현재 정부안에 따르면, 대북 송전은 오는 2008년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에 지금부터 2008년까지는 국제사회가 중유를 북한에 공급하고, 이후 전력을 직접 제공하다가 경수로가 완공된 다음에는 이를 끊으면 된다.

그러나 이런 복잡한 과정을 겪을 필요없이, 제네바 합의 때처럼 중유만 제공하다가 경수로가 완공되면 이를 끊는 것이 더 간편하고 비용도 덜 든다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국제조사문제연구소 조성렬 박사는 "경수로가 완공된 뒤 송전 및 배전 시설은 필요없겠지만 통일에 대비해 북한에 대한 사회기반시설(SOC) 건설 차원에는 의미가 있을 것"이라며 "이후 경수로가 건설된다면 대북 전력 제공에 들어간 한국의 비용은 상계하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조 박사는 "중유 공급의 경우, 미국은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데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행정부에서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것만 할 것"이라며 "한국은 전력제공을 하니까 빠질 것이기 때문에 결국 일본·러시아·중국이 대부분을 부담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중국은 이미 북한에 상당량의 석유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곧 북한과 곧 수교협상을 하게 될 일본의 부담이 제일 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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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9 공동성명, 제네바합의 비교 기사 모음

9·19 공동성명, 제네바합의와 비교해보니 / 내용·형식 훨씬 포괄적 / 국제적 구속력 더 높아
[한겨레]2005-09-21 04판 04면 1096자
‘9·19 6자 공동성명’은 북핵 문제와 관련해 1994년 10월의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서 이후 11년 만에 나온 역사적 문건이다. 이번 6자 공동성명(Joint Statement)과 제네바 기본합의(Agreed Framework)는 둘 다 법적 구속력이 없는 정치적 문서다. 그러나 두 문건은 합의 주체와 성격·내용·형식 면에서 여러모로 다르다. 우선 양자 합의였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공동성명은 6개국의 다자 합의라는 점에서 국제적 구속력이 상대적으로 높다. 북-미 간 배타적 양자 교섭이었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이번엔 한국과 중국이 적극적 구실을 했다는 점도 합의의 생명력을 높이는 대목이다.

내용적으론 제네바 합의가 영변 흑연감속로 등의 ‘동결’에 초점을 맞췄던 반면, 이번 공동성명은 “모든 핵무기와 핵계획의 ‘포기’”를 명시하고 있다. 핵 비확산협상 역사상 유례없이 포괄적인 규정이다.

대신, 관련국의 상응 조처도 포괄적이다. 제네바 기본합의는 북-미 관계의 “대사급 승격”을 밝힌 반면, 공동성명은 북-미, 북-일 관계 정상화 추진으로 폭이 넓어졌다. 이는 북한의 외교적 숙원 사업이다.

제네바 합의는 흑연감속로 포기의 ‘대가’로 경수로 제공과 중유 제공 방안을 명시했다. 이번엔 ‘대가’라는 언급 없이,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논의”라는 추상적 문구로 대체됐다. 그러나 미국 등 5개국의 에너지 지원, 한국의 200만kW 대북 직접 송전, 6자의 양자·다자적 에너지·교역·투자 증진 등 좀더 근본적인 지원·협력 방안이 덧붙여졌다.

이번 성명에 △직접 당사자가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 영구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벌이기로 하고 △6자가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수단을 모색하기로 한 것은 각별히 중요하다. 북핵 문제에만 집중했던 제네바 합의와 달리, 이번엔 북핵 문제를 ‘큰 산의 나무’ 또는 동북아 평화 프로세스의 일부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제네바 합의엔 관련 내용이 없다.

다만, 북-미 양자 사이 구체적 행동규칙을 적시한 제네바 기본합의는, ‘말 대 말’ 합의인 이번 공동성명이 ‘행동 대 행동’의 세부 일정으로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반추될 ‘준거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훈 기자 nomad@hani.co.kr

 

<6자회담 타결> '북핵' 6자회담-94년 제네바합의 차이점
[경향신문]2005-09-20 45판 05면 1425자
19일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6개항의 공동성명은 1994년 체결된 북.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에는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됐다면 6자회담은 북한의 생존을 전제로 한 '빅딜'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회담 방식=제네바 합의문이 북.미 양자회담 방식으로 타결됐다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핵문제의 협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남한,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간 협상의 산물이다. 제네바 회담과 같은 양자협상은 어느 한쪽이 약속을 깨면 합의사항이 백지화되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실제로 미국은 북측이 제네바 합의 이후에도 핵개발을 지속해온 만큼 먼저 합의사항을 어겼다고 주장하고 있고, 북측은 2003년까지 2백만㎾의 경수로를 제공하지 않아 미측이 합의문을 먼저 파기했다고 맞서고 있다.

◇의제=제네바 합의문이 북한의 핵시설 동결과 보상에 중점을 뒀다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의 핵무기와 핵관련 프로그램을 모두 폐기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문제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다. 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및 중유를 제공하고, 정치.경제적 관계정상화를 이룬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제네바 합의문을 통해 경수로와 중유공급 문제를 전담하는 국제컨소시엄인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가 출범했다.

◇대북인식=미국은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만큼 합의사항 이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94년 북한의 핵시설 단지인 영변을 폭격하려던 계획을 한국 몰래 세운 것은 미국의 대북 인식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하지만 6자회담에서 북한의 평화적 핵이용 권한을 보장하고 참가국 모두 대북에너지 제공의지를 명확히 한 것은 참가국들이 기본적으로 북한 정권이 단기간에 붕괴하지 않고 '생존'할 것임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설명이다.

◇경수로=제네바 합의문과 6자회담 공동성명은 표현에서 차이가 있지만 대북경수로 제공문제에 관련한 문구가 담겨 있다.

6자회담 틀내에서 새로운 경수로를 요구한 북측에 대해 미측이 단호히 거부하면서 결렬 위기로까지 치달았던 회담은 비록 애매한 표현이지만 '경수로'란 단어를 공동성명에 집어넣으면서 극적 반전을 이뤘다. 참가국들은 "적당한 시점에 북한에 경수로를 제공하는 문제를 논의하기로 합의"하는 선에서 조율을 마쳤다. 추후 '적당한 시점'을 정하는 문제를 놓고 논란이 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북측으로서는 사실상 '빅딜'에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남한의 협상중재=북측은 제네바 합의 당시 철저히 '통미봉남'(通美封南) 원칙으로 임했지만 6자회담 때는 '통한통미'(通韓通美)로 전략을 바꿔 남한의 중재를 적극 수용했다. 이번 회담에서는 남한이 사실상 협상을 주도했다.

베이징|박영환 기자

 

 

94년 제네바합의와 차이는‥ 미래 핵개발뿐 아니라 기존 핵도 포기

[한국경제신문]2005-09-20 954자

19일 2단계 제4차 6자회담에서 타결된 6개항의 공동성명은 1994년 체결된 북·
미 제네바 기본합의와 여러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에는 미국의 대북 공격이 임박했다는 가정이 전제가 됐
다면 6자회담은 북한의 경제적 생존을 전제로 한 '빅딜'이라는 점이 가장 큰 차
이다.

◆회담 방식=제네바 합의문이 북·미 양자회담 방식으로 타결됐다면 6자회담 공
동성명은 핵문제의 협상 주체라고 할 수 있는 북한과 미국을 포함한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6자간 협상의 산물이다.

제네바 회담과 같은 양자협상은 어느 한 쪽이 약속을 깨면 합의사항이 백지화되
는 위험부담을 안고 있다.

미국이 양자방식을 거부하고 다자간 협상 방식을 좋아한 이면에는 책임을 여러
나라와 나누고, 결렬시 다자틀을 이용해 북한을 압박하겠다는 전략이 깔려 있
었지만,적어도 표면적인 이유는 이 같은 양자방식의 허점 때문이다.

◆의제=제네바 합의문은 북한이 흑연감속로를 동결하는 대신 미국은 경수로 및
중유를 제공하고, 정치 경제적 관계 정상화를 이룬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반면 6자회담 공동성명은 북한을 포함한 한반도의 비핵화 실현과 북·미,북·일
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동북아 안보 및 협력 방안 강구 등 포괄
적인 의제를 담고 있다.

◆대북 인식=미국은 제네바 합의문 체결 당시 북한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가정을
전제로 한 만큼 합의사항 이행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
다.

하지만 이번 6자회담에서는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음을 공식 확인해 달라진 대북 인식을 보여줬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
다.

◆과거·미래 핵=제네바 합의 때는 이전에 추출된 플루토늄 등 '과거 핵' 문제
폐기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6자회담 공동성명에서는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
기로 약속해 포기 대상을 '과거의 핵'까지 명시했다.

<연합>

 

 

''북핵타결'' 제네바·베이징 합의 뭐가 다른가
[세계일보]2005-09-20 50판 04면 1631자

19일 도출된 북핵 베이징 합의는 1994년 10월 북미 제네바 합의의 전면적인 개정판이라 할 수 있다.

제네바 합의와 베이징 합의는 모두 북핵 위기 상황을 파국 직전에 해소시켰다는 공통점이 있다.

94년 북한이 핵무기 원료인 플루토늄을 추출하면서 시작된 1차 핵 위기가 북미 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봉합됐듯이, 북한측이 2002년 방북한 미 부시 행정부의 제임스 켈리 대북특사에게 고농축우라늄(HEU)을 이용한 핵무기 개발 사실을 통보하면서 조성됐던 2차 핵 위기는 베이징 합의를 통해 해소됐다.

표면상 두 합의는 북한의 핵 개발을 중단시키고 이미 개발된 핵 물질을 폐기시킨다는 공통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두 합의는 이 같은 공통의 목표에도 불구, 성격과 내용면에서는 확연히 구분된다.

무엇보다 현 시점의 북한 핵 개발 양상이 94년 상황과는 판이한 때문이다.

94년 협상 당시만 해도 미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을 중단시키고 이미 추출된 핵 물질을 폐기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제네바 합의문이 ‘북핵 동결’에 무게를 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베이징 합의의 경우 미국은 북한이 핵 무기를 개발했다는 강한 추정, 이른바 북핵의 실체가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협상에 임했다.

이 같은 인식의 결과로 제네바 합의 당시에도 핵 물질 폐기 문제가 부차적으로 언급되기는 했지만 베이징 합의에서는 북의 핵포기 문제가 최우선 사안으로 다뤄졌다.

베이징 합의는 제네바 합의에 비해 보다 포괄적이고 근본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제네바 합의문의 골자는 ‘북한이 핵 개발을 동결하는 대가로 에너지(경수로 발전소와 중유)를 제공받는다’는 것이다. 물론 합의문에는 북미 관계 개선 문제가 포함돼 있기는 하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징적인 차원에서 거론됐을 뿐이었다. 북핵 동결이 현실적이고 긴박한 사안이었을 뿐 북미 관계 개선은 미래의 문제였다.

이번 베이징 합의는 달랐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북한 체제를 보장하는 문제가 현재 진행형으로 다뤄졌다. 북미, 북일 관계정상화는 물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문제도 가시권으로 진입했다.

이는 김정일 정권을 바라보는 협상 당사국의 시각, 특히 미국의 입장이 달라졌음을 의미한다.

외교부 당국자는 “제네바 합의 당시만 해도 미국은 북한 정권의 붕괴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협상에 임했다”며 “이런 인식 하에 핵 동결을 제외한 나머지 사안들은 이후 상황 변화를 지켜보면서 대처하겠다는 미국이었던 만큼 대북 관계 개선은 먼 미래의 일이었다”고 말했다. 베이징 협상장의 미국은 다른 모습을 보였다. 북한의 실체를 인정하고 좀더 현실적이고 공고한 북핵 해법 마련에 나섰다.


베이징 합의는 북미 양자 협상 방식이었던 제네바 협의와 달리 북핵 관련 당사국들이 머리를 맞댄 끝의 결론이다. 제네바 합의가 어이없이 파기되는 상황을 지켜본 부시 행정부는 2차 핵위기의 해법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다국적 감시체제를 원했다.

베이징 합의는 이행 단계에서도 제네바 합의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철저한 주고받기식 조치를 취해나간다는 내용을 담았다. 전력 등 에너지 지원에서부터 관계 정상화에 이르기까지 북의 핵포기를 위한 일련의 조치들을 하나씩 주고받는 식으로 진행시켜 나가자는 것이다.

조남규 기자 coolman@segye.com

 

 

 

[북핵 6자회담 타결] 제네바합의 vs 베이징합의
[서울신문]2005-09-20 20판 02면 793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 출범 이후 미국의 대북 정책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말은 ‘ABC’였다.‘Anything But Clinton’.
클린턴 행정부 때 한 것 말고는 모두 다 한다는 뜻.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상징적인 것이 클린턴 행정부 때인 94년 10월21일 1차 북핵 위기를 해결하고자 체결된 북·미간 제네바 핵합의였다.

●북·미 양자▶6개국 구속
제네바 핵합의 ‘Agreed Framework’는 북·미 양자간 합의다.
한국 정부는 미국으로부터 결과 브리핑을 듣는 선이었다.
이번에는 한국의 적극 중재·주도적 역할로 한반도 주변국 즉 중국 러시아 일본이 함께 참가했다.
제네바 핵합의를 북한이 파기했다고 보고, 주변국 특히 중국을 연계시켜 북한을 압박하고자 한 것이 미국의 목적이었지만, 결국 북·미간 결단을 하고 4개국이 상응하는 형식이다.

●포괄적 핵포기 및 상응 조치
북한은 제네바 핵합의 당시 영변의 흑연감속로 등을 ‘동결’하는 대가로 경수로 1000㎿급 경수로 2기와 매년 50만t의 중유를 공급받기로 돼 있었다.
이번에는 핵폐기를 기정 사실로 하고, 지원하게 된다.
미국을 포함한 5개국이 에너지를 지원한다.

●미국의 대북안전보장과 한반도 안보지도의 변화
미국은 제네바 핵합의에서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식 보장을 제공한다.”고 했지만 ‘The US will provide.’란 미래형으로 썼다.

이번에는 전제조건 없이 “미국은 핵무기나 재래식 무기로 북한을 공격하거나 침략할 의사가 없다.”는 안전보장을 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94년 제네바 합의와 다른점
[매일경제신문]2005-09-20 829자
◆북핵 6자회담 타결 / 北 NPT 복귀 이후◆
북한은 19일 타결된 제4차 6자회담 공동성명을 통해 94년 제네바 합의보다 더
많은 것을 얻었다.

우선 북한은 미국의 선제 공격과 군사적 위협에서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보장
을 끌어냈다.

제네바 합의문에는 '미국은 북한에 대한 핵무기 불위협 또는 불사용에 관한 공
식 보장을 제공한다'고 명시했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제네바 합의에서는 핵 공격을 하지 않겠다는 부분만 있
었고 (이번 성명에 나온) 재래식 무기로 침공 의사가 확인된 적은 없었다"며 "
체제 보장에 대한 확고한 의미를 담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미국으로부
터 기존 핵무기 불위협은 물론 재래식 무기의 불위협까지 명시적으로 보장을
받은 셈이다.

특히 이번 제네바 합의는 북ㆍ미 양자간 합의였지만 이번에는 한국은 물론 중
국 일본 러시아까지 참가한 다자간 합의라는 점에서 구속력이 크고 깨기도 어
려울 것으로 보인다.

북ㆍ미 관계 정상화 조항도 94년에 비해 더 진전된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공동성명에도 94년 북미가 합의한 쌍방간 수도에 연락사무소를 개설한다
는 내용을 담았다. 당시 북ㆍ미 관계를 대사급으로 격상시키기로 한 데 그쳤지
만 이번에는 '북ㆍ미 관계 정상화'로 포괄했다.

핵 폐기에 따른 대체에너지 확보에도 파란불이 켜졌다.

94년 당시 미국이 북한 대체에너지는 난방과 전력 생산을 위한 중유로 공급하
기로 했지만 이번 회담에서는 5개국이 협의를 통해 에너지를 지원하기로 해 광
범위한 지원을 약속받았다.

특히 우리 정부가 200만㎾ 직접 송전을 내용으로 한 '중대 제안'까지 재확인해
북한은 다양한 협상력을 확보하게 됐다.

[유봉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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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 류한수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진보평론  제16호
류한수

20세기 전쟁의 연대기와 지리

류한수∙영국 University of Essex 박사수료/ 역사학과



머리말

이 글의 목적은 지난 세기, 즉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연대기를 조망해보는 데 있다. 너무도 진부한 표현이지만, 인류가 생긴 이래로 전쟁은 끊이지 않았다. 20세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 세기 동안 200여 회에 이르는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과 이전의 전쟁 사이에는 적지 않은 차이점이 존재한다. 우선 전투 기술의 측면에서 보자면, 오와 열을 갖춘 대형 간의 격돌이라는 전쟁의 성격이 옅어졌다. 개인 화기의 성능이 크게 향상되고 다른 무엇보다도 대포가 가장 중요한 살상 무기로 활용되면서 보조를 맞추며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전투 대형은 더 이상 통용될 수 없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유사 이래 가장 뛰어난 돌파력을 자랑해 오던 기마 부대가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는 것이다.
과학 기술도 전쟁에 총동원되어 무기의 살상 효과가 극대화되었다.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무연 화약, 탄창식 소총, 후장식 대포, 기관총, 가시철사가 20세기에 전쟁터에서 널리 사용되면서 전투원의 사상 비율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 과학 기술이 전쟁에 응용됨으로써 전투의 참상이 가중되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전쟁이 바로 1905년의 러시아-일본 전쟁이다. 이 전쟁의 독특성은 단지 유럽 군대가 아시아 군대에게 패했다는 사실에만 있지 않다. 러시아-일본 전쟁은 전투에서 발생한 사상자 수가 병으로 인한 사상자 수를 넘은 최초의 전쟁이었다. 과학 기술은 전혀 새로운 형태의 무기, 즉 전투기, 폭격기, 탱크 등을 개발해 내기도 했다. 전쟁에 응용된 과학 기술의 결과는 살상 효과의 극대화에 그치지 않았다. 질량과 에너지에 관한 자연의 근본 비밀을 풀어낸 물리학이 전쟁에 동원됨으로써 인류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궁극적인 파괴 무기인 핵폭탄이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에서 두드러지는 훨씬 더 중요한 점은 전쟁과 민간인의 관계에서 일어난 근본적 변화이다. 20세기 이전까지 전쟁의 참상은 기본적으로 전선에 국한되었고 전투 행위의 직접적 피해가 후방에 미치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서 군대뿐만 아니라 국가 행정기구와 국민경제 전체가 동원되는 총력전(total war)에서는 비전투원, 즉 민간인도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총력전에서 적에게 승리를 거두려면 적군뿐만 아니라 적국의 전쟁 수행 기구(war machine)도 무너뜨려야만 하기 때문에 전쟁 수행 노력(war effort)에 동원되는 민간인은 무기를 들지 않더라도 살상 대상이었다.
물론 20세기에 일어난 전쟁은 지역에 따라 전개 양상과 성격이 달랐고 빈도와 분포가 고르지 않았다. 북아메리카와 오세아니아에서는 전쟁의 불길이 타오르지 않았지만, 유라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만 1억에 가까운 전투원이 동원되는 전쟁터가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해서 20세기 전쟁의 연대기를 유럽, 아시아, 사하라(Sahara) 이남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대륙으로 나누어서 살펴볼 것이다. 다만 서남아시아는 전쟁과 전쟁에 준하는 무력 충돌이 워낙 잦은 권역이므로 따로 떼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유럽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에는 열강의 군대가 장기간에 걸쳐 대결을 벌이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20세기에 접어들어서도 대체로 평온이 유지되었다. 1911-12년에 이탈리아가, 1912-13년에 발칸반도 국가들이 나날이 쇠퇴하는 투르크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인 것 이외에는 전쟁이 없었다. 그러나 한 세기 동안의 평화는 1914년 산산이 부서졌다. 세계 패권국가로 발돋움하려는 독일과 기존의 패권 국가인 영국, 프랑스 사이에 조성된 긴장이 20세기에 들어서 고조되던 가운데 독일의 동맹국인 오스트리아 제국과 러시아의 후원을 받는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충돌하면서 도화선에 불이 붙어 결국 1914년 7월에 제1차 세계대전이 터졌다. 1914년 6월 28일에 페르디난트 오스트리아 황태자가 보스니아(Bosnia)의 사라예보(Sarajebo)에서 반(反) 오스트리아 비밀결사의 조직원인 세르비아 인 청년에게 암살되었다. 7월 28일에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포고를 하자, 세르비아의 후견 국가인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내렸다. 이에 오스트리아와 동맹 관계에 있던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곧바로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단기전을 예상한 각국 국민들의 환호성 속에 시작된 ‘대전쟁’(Great War), 즉 제1차 세계대전은 얼마 되지 않아 끝이 보이지 않는 대량 살육전으로 바뀌었다. 양면 전선을 피하려는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먼저 승리를 거둔 뒤에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 군을 제압한다는 슐리펜(Schlieffen) 계획에 따라 벨기에를 제압하고 프랑스로 진격해서 파리에 접근했다. 8월말에 독일군이 타넨베르크(Tannenberg)에서 러시아의 대군을 격파해서 동부 전선에서 주도권을 잡았으나, 9월초에 마른(Marne) 회전에서 영국-프랑스군이 독일군을 밀어냄으로써 독일의 속전속결 계획에 차질이 생겨 전쟁이 기동전에서 진지전으로 바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지리한 참호전의 양상을 띠었다.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1916년 2월부터 6월까지 베르됭(Verdun)에서 독일군이, 7월부터 11월까지 솜(Somme)에서 영국-프랑스군이 대공세를 펼쳤으나, 각기 극히 큰 피해만 입고 별다른 전과를 올리지 못한 채 교착 상태가 지속되었다. 기관총과 철조망으로 강화된 참호를 일렬횡대 대형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는 방어자 측이 절대 유리했으며, 공격자는 막대한 피해를 피할 수 없었다. 솜 전투에서 영국군의 인명 피해는 42만 명에 이르렀다. 전투 첫날에만 사상자가 6만 명(전사자 1만 9천 명)이 나왔지만, 전진한 거리는 몇 십 미터에 지나지 않았다. 제해권을 누린 연합국은 중구 열강을 해상 봉쇄했고, 이에 맞서 독일이 편 무제한 잠수함 공격 작전은 미국에게 참전의 빌미를 주었다. 1918년 여름에 전세를 역전하기 위해서 편 독일의 대공세가 실패했고, 11월에 독일에서 혁명이 발생하면서 전쟁은 중구 열강의 패배로 끝이 났다.
제1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유럽의 지도가 크게 바뀌었다. 패전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체되어 독립 국가가 여럿 탄생했다. 1917년에 전쟁의 중압을 이겨내지 못한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해체되고 혁명 정부가 들어섰다. 볼셰비키 정권과 이에 반대하는 세력 사이에 벌어진 내전은 1921년까지 지속되었다. 내전을 피비린내 나는 전쟁으로 만든 것은 14개국의 간섭이었다. 세계 혁명의 전위를 자처한 볼셰비키와 볼셰비즘을 전염병으로 여긴 국내외의 반혁명 세력이 세계 육지의 1/6에서 충돌한 이 내전의 직간접적인 결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편 수백년간 영국의 통치에 반발하면서 독립을 염원해 왔던 에이레 인들이 대전의 와중인 1916년 4월 24일에 이른바 ‘부활절 봉기’를 일으켜 무력 항쟁을 계속했으며, 1921년 12월에 마침내 에이레 자치국이 탄생했다.
한편 승전국이 강화조약에서 전쟁 책임을 모조리 패배한 독일에게 돌리자, 독일인들은 베르사이유 강화를 “베르사이유의 명령”(Diktat)으로 여기며 복수심을 불태웠다. “독일인 2백만 명이 헛되이 쓰러졌을 리가 없다. … 아니다, 우리는 용서하지 않는다. 우리는 요구한다. 복수를!”이라는 히틀러(Hitler)의 말에서 제1차 세계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이 되지 못했음이 잘 드러난다. 베르사이유 조약을 일컬어 “강화가 아니라 20년간의 휴전”이라고 한 프랑스 군 원수 포슈(Foch) 장군의 예언은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비극은 전쟁이 또다른 전쟁, 그것도 인명 피해에서 ‘대전쟁’을 다섯 배 능가하는 전쟁의 씨앗을 뿌렸다는 데 있다.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입헌주의, 법치, 의회 민주주의가 적어도 이상으로는 존중을 받았지만, 전후에는 그 원칙이 조소의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탈리아에 파시즘 정권이 들어서고, 독일의 바이마르(Weimar) 공화국이 나치 손에 자연사했다. 유럽에 드리워진 전쟁의 먹구름은 에스파냐 내전에서 더욱 짙어졌다. 1936년에 인민 전선 정부가 에스파냐에 들어서자, 가톨릭교회, 대지주, 자본가의 불만을 등에 업고서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마드리드(Madrid)를 공격하는 프랑코(Franco) 장군 휘하의 반군을 노동자 민병대와 국제 여단(International Brigade)이 막아내면서 공화국 합헌 정부는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와 독일이 노골적으로 프랑코를 지원하는 데도 영국과 프랑스가 불간섭 정책을 표명하며 인민 전선 정부를 사실상 방치한 데다 인민전선 정부의 내분마저 일어남으로써, 반군이 우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1939년 3월말에 마드리드가 반군에게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 독재 정부의 수립으로 끝을 맺었다. 반군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양대 파시스트 국가인 이탈리아와 독일이 동맹을 맺음으로써 유럽의 정세는 더욱 더 심하게 요동쳤다.
파시즘의 위협을 가장 절실히 느낀 소련이 영국과 프랑스에게 군사 동맹을 제의했지만, 두 나라가 ‘붉은 러시아’와 제휴하기에는 불신의 골이 너무 깊이 패어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소련의 안위를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모든 것에 앞세우는 스탈린(Stalin)에게 히틀러가 다가갔고, 상극으로 여겨지던 소련과 독일이 1939년 8월 23일에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면 전선의 위협을, 소련은 당분간이나마 서구의 전쟁에 말려들 위험을 피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에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폴란드의 동맹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전격전(Bulitzkrieg)을 구사하면서 대군이었지만 구식인 폴란드 군을 격파한 독일군은 1940년 봄에 북구까지 수중에 넣었다. 전투 없이 대치만 하는 영국-프랑스와 독일의 ‘기묘한 전쟁’(Phoney war)은 독일군이 5월 중순에 마지노(Maginot) 선을 우회해서 기동전을 펴면서 끝이 났다. 전격전에 압도당한 프랑스는 항전을 포기하고 6월 18일에 백기를 들었다. 영국은 독일 공군의 영국 본토 공습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지만, 살아남는 데 급급한 상황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유럽 대륙을 석권한 히틀러는 소련을 제압하는 것이 영국의 항전 의지를 꺾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1939-40년 겨울에 벌어진 소련-핀란드 전쟁, 이른바 ꡐ겨울 전쟁ꡑ에서 붉은 군대는 추위를 이용하면서 분투를 벌이는 소규모 핀란드 군의 고정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허덕이다가 가까스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쟁에서 붉은 군대의 취약성을 확인한 독일 지도부는 몇 주 안에 소련을 제압할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1941년 6월 22일에 불가침 조약을 깨면서 소련을 전면 기습 공격했다. 독일군은 혼란에 빠진 붉은 군대를 유린하며 9월에 레닌그라드(Leningrad)를 포위했고 11월초에는 모스크바에 이르렀다. 그러나 모스크바 공방전에서 독일군이 예상치 못한 붉은 군대의 반격에 밀려 모스크바 점령에 실패하면서 애초에 단기전을 예상한 전쟁이 장기전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패망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나라는 바로 소련이었다. 독일군 사상자 및 포로 1천3백만 명 중 80%, 즉 1천만 명이 유럽의 동부 전선에서 나왔다.
레닌그라드는 900일 동안 적에게 봉쇄당한 상태에서 1백만 명이 넘는 희생자를 내면서도 항복하지 않고 끝끝내 버텨냈다. 1942년 여름에 시작된 스탈린그라드(Stalingrad) 전투가 이듬해 2월초에 붉은 군대의 승리로 끝나자 독일군의 불패 신화가 깨지면서 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1943년 7-8월에 쿠르스크(Kursk)에서 독일군이 자신의 주특기인 여름철 탱크전에서 패하면서 다시는 주도권을 되찾지 못하고 수세에 몰리기 시작했다. 전쟁의 대세가 이미 소련에게로 기운 1944년 6월에 영미군이 노르망디(Normandy)에 상륙해서 ‘제2전선’을 열었다. 독일군은 동서 양쪽에서 연합군에게 난타를 당하며 급속히 무너졌다. 환몽에서 깨어난 히틀러가 베를린(Berlin)의 제국 청사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한 1945년 4월 30일에 소련군이 국회 의사당 꼭대기에 낫과 망치가 그려진 깃발을 올리면서 적어도 천 년은 가리라던 독일 제3제국이 무너졌다.
1945년부터 유럽은 오랜 평화를 누렸다. 1991년까지 전쟁에 준하는 무력 충돌은 단 세 차례 일어났다. 종전 직후 그리스에서 정부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지만, 영국이 개입해서 공산주의 세력을 제압함으로써 내전은 사망자 16만 명을 내고 1949년에 종결되었다. 1956년에 헝가리에서 반소 봉기의 불길이 치솟았으나, 1만 2천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채 소련군에게 진압 당했다. 1968년의 체코슬로바키아의 반소봉기 역시 실패했다.
두 차례의 파멸적인 세계 대전을 겪은 유럽이 한동안 누리던 평화는 1990년대에 깨졌다. 원래부터 ‘유럽의 화약고’라는 말을 들어오던 발칸 반도의 민족 분규를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라는 틀 속에서 가까스로 봉합해온 티토(Tito)가 죽은 지 10년 뒤인 1990년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연방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연방 체제를 지키려는 세르비아 세력과 분리 독립을 원하는 민족 사이에 내전이 벌어졌으며, 유럽 연합(EU)와 미국에게 분리 독립권을 인정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소수파인 세르비아 인들이 알바니아계 이슬람교도와 크로아티아 인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이 주요 싸움터가 되었다. 각 세력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잔학 행위가 벌어졌고, 특히 코소보 자치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에게 ‘인종 청소’라고 할 만한 공격이 가해졌다. 전체적으로 수십만 명의 사망자와 2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이 발생했다.
다민족 국가인 러시아도 몸살을 앓고 있다. 독소 전쟁의 와중에서 스탈린의 민족 강제 이주 정책으로 혹독한 시련을 겪었던 체치냐(Chechnia)는 분리 독립을 요구했고, 경제적인 문제는 제쳐두고라도 소수 민족에게 분리 독립을 인정해주는 사례가 러시아연방의 해체로 이어질 가능성을 두려워하는 러시아 정부는 그 요구에 응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되고 1994년에 러시아 군이 체치냐로 진격해서 수도 그로즈늬이(Groznyi)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러나 체치냐 인들은 굴복하지 않고 끊임없는 테러로 러시아를 괴롭히고 있다.


아시아

20세기 전반기에 아시아 대륙은 일본 제국의 팽창에 연루된 전쟁으로 홍역을 치렀다.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놓고 러시아와 힘을 겨루다가 1904년에 전쟁에 돌입해서, 랴오둥(僚東)과 한반도에서 러시아 육해군을 제압했다. 이듬해 러시아 제국은 발트해 함대를 극동으로 보내 전세를 뒤집으려 했지만, 오히려 쓰시마 부근에서 일본 해군에게 참패했다. 일본은 이처럼 유럽의 강국과 겨루어 승리를 거둔 다음에야 비로소 유럽 열강과 대등한 존재로 인정받았다. 1929년의 세계 대공황으로 타격을 입은 후발 자본주의 국가 일본은 중국 침략으로 활로를 뚫으려 했다. 일본 정부도 통제하기 힘든 세력으로 자라난 관동군(關東軍)이 1931년부터 만주를 장악하기 시작했으며, 1937년부터는 중국 전체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중일 전쟁의 와중에서 중국 민간인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었다. 대표적인 예로 1937-38년 겨울에 난징(南京)으로 진격한 일본군이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는데, 3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는 주장이 있다.
일본의 중국 침탈은 중국 내전과 맞물려 진행되었다. 일본군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중국 대륙에서 활개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국민당이 일본군보다는 중국 공산당과 싸우는 데 주력했기 때문이다. 국부군(國府軍)의 대공세에 몰려 1934년 10월에 이른바 ‘대장정’(大長征)에 나선 홍군(紅軍)은 간신히 추격을 뿌리치고 한 해 뒤에 옌안(延安)에 도착해서 안전한 근거지를 마련했다. 1937년에 일본의 침공이 본격화되고 항일 여론이 들끓자 9월에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군이 기세를 올리며 점령 지역을 넓혀갔지만, 광활한 중국 대륙은 일본이 한 입에 삼킬 수 있는 먹이가 아니었다. 일본은 도시라는 점, 그리고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선을 통제했을 뿐 면을 장악하지는 못했고, 일본군의 기세도 차츰 하향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의 팽창은 멈추지 않았고, 소련과의 국경 분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몽골의 할하 강에서 1939년 5-9월에 일본군과 소련군 사이에 대규모 교전이 벌어졌는데, 기갑전에서 우위를 보인 쥬코프(Zhukov) 장군 예하의 소련군이 일본군을 쳐부쉈다. 이 전투를 러시아는 할힌골(Khalkhin-Gol) 전투, 일본은 노몬한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결과, 일본은 시베리아 진출을 포기했다. 일본이 살 길은 중국 침탈을 포기하고 군사비를 줄여서 국내 투자를 늘리는 것이었으나, 팽창의 관성과 지도부의 경직된 사고와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피해 의식이 겹치면서 영국 및 미국과 겨룬다는 결단을 내렸다. 이 결단에 따라 일본 해군 기동 함대가 1941년 12월 7일에 진주만 기습을 감행했다.
진주만 기습이 성공을 거두어 일본 해군은 태평양에서 미국 해군에게 우위를 누리게 되었고,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전진해서 전쟁 개시 4개월 만에 서구 열강의 동아시아 지배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일본 해군은 1942년 6월 초에 미드웨이(Midway) 해전에서 오히려 열세인 미국 해군에게 일격을 당해 주력 항공모함을 모두 잃는 손실을 입었고, 그 뒤로는 주도권을 되찾지 못하고 점령지 방어에 급급하게 되었다. 1945년에 접어들어 마리아나(Mariana) 군도와 유황도가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장거리 폭격기의 일본 본토 공습이 가능해졌다. 일본의 주요 도시가 미군 폭격기의 폭탄 세례를 피할 수 없었다. 가미가제는 일본의 패전이 멀지 않았음을 드러내주는 현상일 뿐이었다. 8월 6일에 히로시마에, 사흘 뒤 나가사키에 원자 폭탄이 떨어지고 8일부터 시작된 소련군의 진격에 관동군이 무너지자, 2백만 명이 넘는 인명 피해를 감수하며 버티던 일본 정부는 결국 15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중국에서 일본군이 무장해제 되어 물러난 지 한 해 뒤 국민당과 공산당이 격돌했다.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으면서도 국부군은 농민의 지지를 받는 팔로군(八路軍)에게 크게 밀리기 시작했다. 대만에 배후 근거지를 만들던 국민당의 고압적 정책에 분노한 대만 본토인이 1947년 2월에 봉기를 일으켰다. 그러나 국민당의 무자비한 봉기 진압으로 대만 전역에 시체가 나뒹구는 참상이 벌어졌다. 1960년에 대만 당국은 이른바 ‘2.28 대란’의 사상자가 6,300명이라고 발표했다.
한편 1948년 4월에 양쯔(楊子) 강을 건넌 팔로군은 국민당 주력 부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장제스(蔣介石)가 1949년 12월에 미군 함정을 타고 대만으로 탈출함으로써 중국을 괴롭히며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내전의 막이 내렸다.
아시아의 맹주가 되려는 일본이 미국에게 완패한 뒤, 동아시아는 냉전의 주전투장이 되었다. 냉전이 최초로 열전(熱戰)으로 비화된 지역은 한반도였다. 1950년 6월에 북한군의 침공으로 시작된 한국 전쟁에서 북한 지도부의 무력 통일 노선이 성공하는 듯 보였지만, 미군의 신속한 개입으로 전황은 급격히 바뀌어 12월에는 오히려 북한 정부가 붕괴될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미군의 북진에 위기를 느낀 중국이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기치를 내걸고 개입함으로써 상황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1951년부터 전쟁은 진지전이 되었다. 전선에서는 양측의 일진일퇴가 거듭되었고, 북한 전역은 미군의 폭격으로 2층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페허가 되었다. 37개월간의 전쟁 기간에 남한군과 UN군의 사상자는 각각 32만 명, 16만 명이며, 북한 및 중국 측 사상자는 150만 명이었다. 폭격과 테러로 무수한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극동에서 승부를 보지 못한 냉전은 주 전투장을 동남아시아로 옮겼다.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 개입 때문에 인도차이나 인들은 기나긴 전쟁의 터널을 지나야만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베트남 식민 통치에 저항하는 운동이 1930년대에 솟구치기 시작했다. 저항 지도자 호치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베트남 독립을 선언했지만, 프랑스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프랑스 정규군의 공격에 베트남이 게릴라전으로 대응하는 양상이 8년간 계속된 1차 인도차이나 전쟁은 1954년에 디엔비엔푸(Dien Bien Phu)에 침투해서 진지를 구축한 프랑스 공수 부대가 베트남군에게 포위되어 항복하면서 매듭이 지어졌다. 식민 통치를 포기한 프랑스는 제네바에서 베트남과 휴전 협정을 맺었는데, 그 골자는 북위 17°선을 잠정 군사 경계선으로 정하고 2년 뒤에 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국가를 수립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그러나 통일 베트남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설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친미 정치가 고딘디엠(Ngo Dinh Diem)을 내세워 베트남 남부에 단독 정부를 세우고 제네바 협정 준수를 거부했다. 베트남은 또다시 기나긴 전쟁의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남베트남 정부군과 민족해방전선(NLF) 게릴라의 대결로 진행되던 전쟁은 1964년에 통킹(Tonking)만에서 북베트남군 어뢰정이 미군 구축함을 공격했다고 주장하며 미군이 북베트남을 “석기 시대”로 만드는 북폭을 개시하면서 미군과 북베트남군의 전면 전쟁으로 바뀌었다. 1960년대 후반기에 50만 명으로 불어난 미군이 한국군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와 더불어 작전을 벌였지만, 농민의 지지를 받는 민족해방전선 게릴라와 북베트남 정규군은 1968년의 ‘구정 공세’를 기점으로 전쟁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했다. 결국 미국이 1973년에 베트남에서 손을 떼고 1975년 4월에 사이공(Saigon)이 함락됨으로써 기나긴 전쟁이 종식되었다. 20세기 전반기에는 게릴라전이 큰 의미를 지니지 못했다. 세기 전환기에 남아프리카에서 보어(Boer) 인들이 대영제국군을 상대로, 필리핀에서 농민이 미군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펼치면서 적을 괴롭히기는 했지만, 정규군에게 승리를 거두지는 못했다. 에스파냐 내전에서도 공화국 지지 세력은 반군 점령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구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때도 특기할 만한 게릴라 부대는 발칸 반도와 피점령 소련에서만 찾아 볼 수 있었으며, 이 지역의 게릴라조차도 전쟁의 대세에는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기에 베트남과 쿠바는 대중의 지지를 받는 게릴라가 훨씬 뛰어난 전투력을 갖춘 정규군과 맞서 싸울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승리까지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미군 46,000명이 목숨을 잃었으며, 베트남 측 사상자는 수백만 명에 달했다.
베트남 전쟁의 결과는 인도차이나 전체에 변화를 몰고 왔다. 캄보디아에서 1970년에 쿠데타로 들어선 론놀(Lon Nol) 친미 정권이 크메르 루즈(Khmer Rouge)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내전과 미군의 폭격으로 캄보디아 인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75년에 크메르 루즈가 마침내 수도 프놈펜(Phnom Penh)을 점령하고 집권했지만, 과격한 사회 개조 정책을 강행한 폴 포트(Pol Pot) 치하에서 1백만 내지 3백만 명이 죽음을 당했다. 1978년 12월에 베트남군이 개입해서 프놈펜을 점령했고, 정글 게릴라로 전락한 크메르 루즈는 차츰 소멸의 길을 걸었다.
베트남의 캄보디아 무력간섭은 1979년에 중국과 베트남의 전쟁을 불러일으켰다. 베트남 전쟁에서 중국이 베트남을 후원했다고 해도, 두 나라 사이에는 이념상의 동질성을 뛰어넘는 갈등 요소가 존재했다. 해묵은 민족 감정을 제쳐두고서라도 베트남이 소련에 밀착하고 화교를 억압하고 캄보디아에 무력 개입을 하자, 중국군 25만 명이 베트남을 ‘징벌’한다면서 2월 17일에 베트남 영토로 진격했다. 그러나 수에서는 밀리지만 전쟁 경험이 풍부한 베트남군이 효과적으로 맞받아치면서 중국군에게 적지 않은 피해를 입혔다. 3월 3일에 중국 정부는 베트남을 ‘징벌’한다는 애초의 목적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면서 철수했고, 베트남도 교전 행위를 중단해서 중국-베트남 전쟁은 2만 명으로 추산되는 사상자를 남긴 채 끝을 맺었다. 이 전쟁에서 두 나라는 매우 ‘절제’하면서 전투를 치렀다. 중국군은 베트남 영토 안으로 마치 자로 잰 듯 정확히 30킬로미터를 진격한 뒤 멈추었으며, 두 나라 모두 공군 투입을 극도로 자제해서 확전을 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된 인도 아대륙도 전화를 비껴가지 못했다. 1947년 8월 14일에 영국 정부가 종교에 따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한다는 결정을 내리자,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 사이에 유혈 분쟁이 일어나 무려 1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뒤 두 나라 사이에 전쟁이라고 하기에 충분한 국경 분쟁이 세 차례 일어났다. 카시미르(Kashmir) 지방에서 주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이슬람교도가 힌두계 지배층에 맞서 봉기를 일으키자 파키스탄이 군대를 파견했고 힌두계 지배자가 인도에게 개입을 요청하면서 1948년에 1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이 터졌다. 휴전 조약이 맺어진 뒤로도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다가, 1965년에 결국 2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나 양 측 사이에서 대규모 탱크전까지 벌어졌다. 3차인도-파키스탄 전쟁은 1971년에 파키스탄이 동파키스탄 분리 독립을 지원하는 인도를 응징하면서 벌어졌다. 전쟁은 파키스탄의 패배로 끝이 났고, 방글라데시라는 독립 국가가 태어났다. 한편 인도와 중국 사이에도 한 차례 전쟁이 있었다. 두 나라는 1959-62년에 일명 ‘히말라야 전쟁’이라고도 하는 국경 분쟁을 벌였는데, 사상자 11,000명이 나오는 교전 끝에 부탄(Bhutan)은 인도에게, 라다흐(Ladakh)는 중국에게 귀속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서남아시아와 북아프리카

19세기 이래 제국주의 이해관계의 각축장이 된 서남아시아와 북 아프리카에는 반제국주의적 성격을 띠는 무력 분쟁이 20세기 중후반까지 자주 일어났다. 이집트의 나세르(Nasser) 대통령이 1956년에 수에즈(Suez) 운하를 국유화한 뒤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력 개입한 영국-프랑스군에게 완패를 했으면서도 국제 여론의 힘을 빌어 결국은 침공군을 물리친 사건은 아랍 민족주의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알제리 독립 전쟁은 아랍권의 민족주의가 다른 형태로 제국주의에게 거둔 또다른 승리였다. 19세기에 프랑스의 식민지가 된 알제리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민족해방전선(FLN)이 1954년에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FLN의 테러 전술과 프랑스인 알제리 정착민(Pieds noir)의 무자비한 대응이 맞부딪히면서 알제리 전역이 피가 피를 부르는 폭력의 도가니에 빠졌다. 1957년부터 프랑스군이 사태에 직접 개입해서 프랑스 정규군 병력의 절반과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하며 FLN를 공격했지만, 알제리 인의 저항과 독립 요구는 수그러들기는커녕 거세져만 갔다. 8년간의 전쟁 동안 프랑스 군 1만 2천 명이 사망했으며, 알제리 인 1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견디다 못한 프랑스 정부는 알제리는 프랑스다라는 정책을 포기하고 알제리 인이 국민 투표로 독립 여부를 결정하도록 허락했으며, 1962년 7월에 알제리 인은 완전 독립을 선택했다.
중근동을 “세계의 화약고”로 만든 아랍-이스라엘 전쟁은 대영 제국의 모순에 찬 통치 정책의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도중에 영국이 아랍의 자치와 유태인 국가의 건설을 동시에 약속하면서 분쟁의 씨앗이 뿌려졌던 것이다. 이로써 이스라엘과 여러 주변국 사이에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전쟁이 벌어졌다.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 건국이 선포된 뒤 이스라엘과 이집트, 시리아, 요르단 사이에서 벌어진 1차 중동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수적인 열세를 극복하고 대승을 거두어 독립을 확고히 했다. 1956년에는 이스라엘 군이 수에즈 운하 위기를 틈타 이집트를 공격해서 시나이(Sinai) 반도를 점령했다. 그 뒤 10여년 간 이어진 평화기에 양측은 최신식 무기를 구입하며 무장을 강화했다. ‘6일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제3차 중동 전쟁(1967.6.5-10)에서 이스라엘 군은 가자(Gaza) 지구, 요르단(Jordan) 강 서안 지대, 골란(Golan) 고원을 차지했다. 거듭되는 패배에 절치부심하던 아랍 국가들은 ‘욤 키푸르(Yom Kippur) 전쟁’이라고도 불리는 4차 중동 전쟁에서 보복을 꾀했다. 1973년 10월에 이집트가 남쪽에서, 시리아, 이라크, 요르단이 북쪽에서 이스라엘을 밀어붙여 초반에 큰 전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랍측은 초반의 우세를 지키지 못하고 이스라엘 측의 반격을 받아 밀렸다. 아랍의 맹주였던 이집트에서 나세르의 뒤를 이어 지도자가 된 사다트(Sadat)가 1970년대 후반부터 평화 노선을 걸으면서 대규모 전쟁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서남아시아에서 전란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미국의 전폭적인 후원과 묵인 아래 UN의 결의를 무시하며 팔레스티나를 압박하는 이스라엘과 생존권 수호에 나선 팔레스티나 해방 전선(PLO)사이에서 무력 충돌이 그치지 않았다. 1982년에 이스라엘 군이 레바논의 PLO 기지를 공격했다. 피를 피로 씻는 비극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1993년에 PLO와 이스라엘 사이에 협정이 체결되어 팔레스티나 인에게 제한된 자율권이 부여되었다. 그러나 평화 협상의 진전은 지지부진하기만 한 형편에 있으며, 이스라엘의 강압 통치에 맞선 팔레스티나 인의 인티파다(Intifada)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소련의 붕괴를 재촉한 아프가니스탄 전쟁은 소련판 베트남전이라고 할 수 있다.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추진하다가 반발에 부딪혀 위기에 몰린 아프가니스탄의 사회주의 정권을 지원하기 위해 소련군 10만 명이 1979년 12월에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주했다. 그러나 무자헤딘(Mujahedin) 전사들이 중심을 이루는 반군이 소련군에게 저항하면서 러시아-아프가니스탄 전쟁이 시작되었다. 무자헤딘은 미국의 무기 지원을 받아 강력한 저항군으로 자라나 정부와 소련군을 괴롭혔다. 도시와 도시를 잇는 간선 도로를 간신히 지키는 소련군과 험준한 산악을 근거지로 보급로를 노리는 무자헤딘 양자 어느 쪽도 상대를 완전 제압할 수 없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개입은 미국의 베트남 개입과 닮은꼴이 되어갔으며, 결국 소련군은 계속되는 인명 피해와 불어나는 전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1989년에 철수함으로써 소련의 간섭 전쟁은 끝이 났다. 수년 뒤 반군이 수도 카불(Kabul)를 점령했지만, 내부 분열이 일어나 내전이 계속되었다. 1996년에 이슬람 신정(神政)국가 건설을 목표로 삼는 탈레반(Taliban)이 무자헤딘 세력을 무너뜨리고 세력을 착실히 늘려 1999년에 국토의 90%를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전쟁과 내전에서 1백만 명이 희생되었고 엄청난 수의 난민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아랍 국가 사이의 전쟁도 엄연히 존재했다. 1980년대에 접어들자 페르시아만에서 전쟁의 불길이 솟아올랐다. 서구식 근대화를 추진하던 팔레비(Pahlevi) 황제 정권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주도한 혁명으로 무너지면서 이란이 혼란에 빠지자, 이란과 해묵은 국경 분쟁을 빚어왔던 이라크의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dam Hussein)은 호기라고 판단하고 1980년 9월 22일에 이란을 공격했다. 이슬람 세계의 왕정 국가들과 소련은 이슬람 원리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이라크를 지원했다. 주로 소련에게서 얻은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이라크 군이 조기에 승리를 거두리라고 예측되었지만, 성전(聖戰, Jihad)을 외치는 혁명 지도자 호메이니(Khomeini)에게 분전을 촉구 받은 이란 군이 반격에 나서면서 전쟁은 의외로 길어졌다. 혁명 이후 서방의 지원이 끊겨 과거의 전투력을 잃어버린 이란은 이라크의 세 배에 이르는 인구를 바탕으로 엄청난 사상자를 감내하면서 싸워 이라크 군의 소모를 촉진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1982-83년에 이라크가, 1984년에는 이란이 대공세를 펼쳤지만, 양 쪽 다 큰 피해를 입고도 큰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그 뒤로 지상전은 소강상태를 맞이하면서, 혁명 전에 구비한 낡은 무기를 들고 복수심을 불태우며 ‘지하드’를 수행하는 이란 군과 현대식 무기로 중무장한 이라크의 기계화 부대가 대결하는 양상이 지리하게 지속되었다. 혁명의 열정으로도 힘의 소진을 메울 수 없게 된 단계에 이른 이란이 UN의 휴전 중재안을 받아들이고 이라크도 호응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은 1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1988년 8월에 끝을 맺었다.
그러나 8년 만에 페르시아만에 모처럼 찾아온 평온은 야심가 사담 후세인이 다른 전쟁을 위해 이라크 군의 전력을 더 키우는 휴지기였을 뿐임이 곧 드러났다. 세계 4위의 군사 강국으로 성장한 이라크 군이 1990년 8월에 쿠웨이트를 무력으로 점령해서 이라크의 한 주(州)로 합병했던 것이다. 영국의 보호령이었다가 1961년에 독립한 쿠웨이트를 상대로 이라크는 예전부터 여러 차례 영유권을 주장해온 바가 있다. 쿠웨이트에서 떠나라는 UN의 최후통첩을 이라크가 받아들이지 않자,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이 1991년 1월에 이라크에 공습을 개시했다. 2월 24일에 개시된 전면 지상전에서 다국적군은 이라크 남부와 쿠웨이트에 있는 이라크 군을 공격했다. 100시간 만에 이라크 군이 궤멸한 뒤 걸프전은 다국적군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10만 명에 가까운 이라크 군이 전사한 데 비해, 다국적군의 사망자 수는 500명 안팎이었다.
이라크의 부침은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지에 흩어져 살며 독립 국가를 염원하는 쿠르드(Kurd) 족의 운명과도 연결되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연합국과 투르크는 쿠르드 족에게 독립 국가를 세울 권리를 인정하는 조항을 강화 조약안에 끼워 넣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비준은 받지 못했으며, 어느 나라도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1975년 이후로 쿠르디스탄 민족 해방군이 쿠르드 족의 독립 국가를 요구하며 게릴라전을 수행했다. 이 게릴라 활동으로 여러 나라가 괴로움을 겪었고, 특히 이라크가 유난히 큰 피해를 입었다. 이라크는 쿠르드 족 민간인에게까지 화학 무기를 사용해서 쿠르드 족 게릴라와 싸웠다.


아프리카

20세기에 접어들 무렵 대부분 유럽 열강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대륙 도처에서 원주민과 백인들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다. 영국은 나이지리아와 우간다에서, 프랑스는 코트지부아르와 마다가스카르에서, 독일은 나미비아와 탄자니아에서 흑인들의 봉기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백인 군대와 흑인 간의 무력 충돌은 때로 흑인 부족이 절멸당하는 대량 학살로 끝이 났다. 일례로, 헤레로(Herero) 족의 저항에 부딪힌 독일 군대는 1910년대 중반에 나미비아에서 인종 말살을 자행해서 6만 명이 넘는 헤레로 족이 목숨을 빼앗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이 수행한 ‘유태인 절멸’(Holocaust)을 유럽인이 아프리카에서 자행한 인종 말살의 연장선상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김남섭 옮김, 「야만의 역사」, 한겨레 신문사, 2003.
1930년대 중반에 일어난 에티오피아-이탈리아 전쟁은 제국주의의 침탈 과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19세기 말에 에티오피아에서 이권을 차지하려다 에티오피아 군에게 참패를 당한 바 있는 이탈리아는 1935년 10월에 다시 침략에 나섰다.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이탈리아 군 80만 명이 침공해 들어오자 에티오피아 정부는 국제 연맹에 이탈리아의 침략 행위를 응징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식민지 보유국이 대부분이었던 유럽 국가들은 이를 외면했다. 예상 밖으로 완강한 에티오피아의 저항에 화가 치민 이탈리아 군은 항공기로 독가스를 살포해서 많은 민간인을 살상했다. 1936년 5월에 이탈리아 군이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를 점령한 뒤로 조직적 저항은 사라졌지만, 산악 지대에서는 저항군이 계속 활동했다. 1937년에 이탈리아인 총독에게 가해진 테러의 앙갚음으로 이탈리아 군이 민간인에게 무차별 총격을 가해서 수천 명을 죽였고, 끝내는 3만 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자행했다. 이 전쟁에서 이탈리아 군은 12,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60만 명이 넘는 에티오피아 인이 목숨을 잃었다.
1950년대부터 아프리카 대륙은 독립 열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독립으로 가는 길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케냐의 최대 부족인 키쿠유(Kikuyu) 족은 백인에게 빼앗긴 토지를 되찾는다는 대의를 내걸고 마우마우(Mau Mau)단이라는 비밀결사체를 만들어 백인에게 테러를 가했다. 백인 1백여 명이 죽음을 당하자, 케냐의 영국 행정부가 철저한 탄압에 나서서 키쿠유 족 1만 명의 목숨을 빼앗고 2만 명을 수용소에 가두었다. 그러나 저항은 끊이지 않았고, 1963년에 마침내 독립 국가 케냐가 태어났다. 키쿠유 족 출신으로 케냐의 초대 대통령이 된 케냐타(Kenyatta)는 마우마우단의 일원이었다.
1960년대는 ‘아프리카 독립의 시대’로 17개 독립 국가가 태어났다. 그러나 독립의 환희는 잠시뿐이었고, 아프리카의 신생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 피비린내 나는 내전에 휘말려 들었다. 수단, 차드, 우간다, 나이지리아, 콩고, 앙골라에서 내전이 일어났고, 소말리아는 1988년 이래 지금까지도 내전에 시달리고 있다.
내전이 발생하는 까닭은 첫째, 종족 간의 갈등, 둘째, 이 갈등을 부채질하는 외세의 개입, 셋째, 백인 식민 통치의 부정적 유산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형식으로만 갖추어진 국민 국가의 틀 속에 말과 문화가 다른 부족들이 합쳐진 상태에서 어느 부족이 우위를 점하는가를 놓고 무력 충돌이 빚어졌다. 전형적인 사례가 나이지리아 내전이다. 영국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한 나이지리아에는 250개 부족이 섞여 살고 있는데, 전체 인구의 17%를 차지하면서 기독교를 믿고 교육 수준이 높은 이보(Ibo) 족이 경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최대 종족으로 이슬람교를 믿는 하우사(Hausa) 족이 이보 족 위주의 정책에 반발하는 가운데, 정권이 쿠데타로 하우사 족에게로 넘어가고 이보 족 수천 명이 하우사 족에게 학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위기감을 느낀 이보 족은 1967년에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비아프라(Biafra) 공화국을 세웠다. 하우사 족을 중심으로 구성된 나이지리아 연방 정부가 선전포고를 하고 비아프라로 진격함으로써 내전이 벌어졌다. 1970년에 비아프라 공화국이 패배함으로써 전쟁은 끝났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와 1백만 명이 넘는 아사자가 생기는 비극이 일어난 뒤였다.
부족 간 갈등이 무력 충돌로까지 비화되어 내전이 격화되는 데에는 외세의 개입이 큰 몫을 했다. 모잠비크, 앙골라, 콩고의 내전을 그 사례로 들 수 있다.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모잠비크에서는 모잠비크 해방 전선(FRELIMO)이 포르투갈과 10년 동안 무장 투쟁을 벌인 끝에 1975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정부가 사회주의 노선을 선택했으나 경제 발전이 더뎌 국민들의 불만이 고조되자, 1982년에 우파 게릴라 조직인 모잠비크 민족 저항 운동(RENAMO)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반군의 배후에는 로디지아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권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다. 1975년에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앙골라의 경우에는 소련과 쿠바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해방 인민 운동(MPLA), 미국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해방 민족 전선(FNLA), 남아프리카 공화국 백인 정권의 지원을 받는 앙골라 전면 독립 민족 동맹(UNITA) 3개정치 단체가 3파전을 벌이면서 나라가 내전의 나락에 빠져들어갔다. 벨기에의 식민지였다가 1960년에 독립한 콩고에서도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루뭄바(Lumumba), 부족주의적 지방분권제를 주장하는 카사부부(Kasavubu), 카탕가(Katanga) 지역의 분리 독립을 노리는 촘베(Tshombe)가 각각 소련, UN과 미국, 벨기에의 지원을 받으며 대립하다가 내전이 일어났다.
르완다 내전은 백인 통치의 유산이 결국은 끔찍한 비극을 불러일으킨 대표 사례이다. 르완다의 양대 종족인 후투(Hutu) 족과 투치(Tutsi) 족은 오랜 세월 동안 별다른 갈등 없이 평화롭게 공존해왔다. 1916년부터 르완다를 다스리게 된 벨기에의 백인 통치자들이 외관이 백인에 더 가까운 투치 족을 우대해서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10% 남짓한 투치 족이 관직을 독차지한 반면, 90%가 넘는 후투 족은 심한 차별 대우에 시달렸다. 그 결과 생겨난 종족 갈등은 무력 충돌과 대량 학살로까지 이어져서, 두 종족 간의 적대감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1962년에 르완다가 독립 국가가 된 뒤에 후투 족 중심의 정부가 세워지고 산발적인 내전이 벌어졌다. 1994년에 후투 족 출신 대통령이 탄 비행기가 반군이 쏜 지대공 미사일에 격추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후투 족의 군대와 민병대가 석 달 동안에 투치 족 50만 명 이상을 학살했다. 반격에 나선 투치 족 군대가 수도 키갈리(Kigali)를 장악했고, 4백만 명이 넘는 후투 족이 보복을 피해 달아나서 난민이 되었다. 극심한 식량 부족과 전염병으로 난민 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라틴 아메리카

20세기에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국제전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1907년에 온두라스와 니카라과 사이에 국경 분쟁이 한 차례 있었으며, 1981년에 페루와 에쿠아도르의 국경 분쟁으로 2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지만 외국의 중재를 거쳐 곧바로 종식되었다. 희비극이라고 밖에는 달리 말할 수 없는 온두라스와 엘살바도르의 이른바 ‘축구 전쟁’ 1970년 멕시코 월드컵 축구 진출권을 놓고 1969년에 치러진 축구 국가 대표팀 경기에서 격앙된 두 나라 국민감정이 전쟁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엘살바도르가 9월 14일에 온두라스에 폭격을 가하면서 시작된 축구 전쟁은 외국의 중재로 100시간 만에 종식되었다.
을 빼고 특기할 만한 국제전으로는 그란 챠코(Gran Chaco) 대평원의 영유권을 둘러싸고 볼리비아와 파라과이 사이에 벌어진 챠코 전쟁이다. 1928년부터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빚어지다가 1932년 4월에 볼리비아 군의 선제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두 나라 군대는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외국의 중재로 1935년 7월에 휴전 조약을 맺었다. 10만 명에 이르는 전사자가 나온 이 전쟁은 20세기에 라틴 아메리카 국가 사이에 벌어진 유일한 대규모 전쟁이다.
그러나 라틴 아메리카가 20세기에 평화를 누렸다고 볼 수는 없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국제전이 드물었던 것은 이 지역의 나라들이 거의 예외 없이 내전에 시달려 다른 나라와 전쟁을 벌일 겨를이 없었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20세기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는 내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온두라스,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과테말라, 우르과이, 도미니카, 엘살바도르, 페루, 볼리비아 등지에서 내전이 벌어졌다. 라틴 아메리카의 내전은 주로 미국의 후원 아래 정권을 유지하며 국민을 혹독하게 탄압하는 독재 정부와 이에 맞서는 좌익 게릴라 사이에 벌어지는 무력 충돌이었다. 볼리비아에서 게릴라전을 벌이다 미국이 양성한 정부군 부대에게 1967년에 잡혀 처형당한 체 게바라(Che Guevara)의 비극적 최후가 말해주듯, 라틴 아메리카의 반정부 게릴라의 투쟁은 험난했다. 멕시코에서는 최근까지도 내전이 계속되고 있다. 차별과 빈곤에 시달리는 인디오를 중심으로 결성된 사파티스타 민족 해방군(EZLN)이 1994년 1월에 치아파스 주에서 봉기했고, 정부군은 대지주와 대목장주에게 시달리는 농민의 지지를 받는 반군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정치에 내재한 모순은 중미의 작은 나라 니카라과의 독재, 내전, 혁명, 반혁명에서 잘 드러난다. 1910년부터 1933년 사이에 니카라과는 여러 정치 파벌이 얽힌 내전에 시달렸으며, 미국이 군대를 파견해 개입했다. 1927-34년에 산디노(Sandino) 장군이 이끄는 게릴라 부대가 정부와 미국에 맞서 싸웠지만 패배했다. 20세기 중반에 니카라과는 소모사(Somoza) 가문의 철권통치에 신음했고, 1960년대부터 반 소모사 운동이 거세지면서 내전에 들어갔다. 1970년대 후반부터 성장한 산디니스타 국민해방전선(FSLN)의 공세에 밀려 1979년에 결국 소모사정권이 무너졌다. 니카라과에서 좌익 정부가 들어서자, 미국은 반혁명 세력 후원에 나서 온두라스에서 양성한 게릴라를 니카라과에 침투시키는 등 저강도 전쟁에 나섰다. 이로써 니카라과에 다시 내전이 벌어져 수만 명에 이르는 희생자가 생겼다.
이처럼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자국의 ‘뒷마당’으로 간주하면서 각 나라 정치를 배후 조종했지만, 때로는 노골적인 무력 개입도 서슴지 않았다. 카리브 해에 있는 인구 9만의 소국 그레나다(Grenada)에서 1983년 10월 18일에 급진 좌파 세력이 쿠데타로 정부를 전복하자, 미국은 일주일 뒤 군대를 투입했다. 미군은 고전을 했지만 보름 만에 쿠데타 세력을 제압했다. 노골적인 무력 개입의 또다른 사례는 파나마 분쟁이다. 1914년에 완공된 파나마 운하의 운영권을 지키기 위해 미국이 인위적으로 세운 국가인 파나마는 미국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원래는 친미 군인이었던 파나마의 실권자 노리에가(Noriega)는 1980년대 후반부터 미국과 갈등을 빚으면서 미국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고 의회에서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국가 원수가 되었다. 1989년 12월에 미군은 5,000명이 채 안 되는 군대를 가진 파나마를 스텔스(Stealth)기까지 동원해서 맹공을 퍼부었으며, 이 때문에 파나마 시티에서 수백 명에 이르는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다고 알려져 있다. 미국은 한 나라의 국가수반인 노리에가를 마약 밀매 등의 죄목으로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지방 재판소 법정에 세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러나 미국의 조종과 무력 개입이 늘 성공했던 것만은 아니다. 1956년에 카스트로(Castro)가 체 게바라를 비롯한 동지 86명과 함께 쿠바로 숨어들어가 바티스타(Battista) 독재 정권과 게릴라전을 벌여서 3년 뒤 정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놀란 미국 정보기관은 혁명 정부를 뒤엎기 위해 쿠바 망명자 1,700명을 모아 훈련한 뒤, 케네디(Kennedy) 대통령의 인가를 받아 이들을 1962년 4월에 쿠바 남부 해안 만에 침투시켰다. 그러나 침공군은 쿠바 정부군과 민병들의 신속한 반격을 받아 히론(Giro’n)만에서 궤멸 당했다. 그 뒤로 미국은 경제 봉쇄를 통해서 카스트로 정권의 목을 조르고 있다.
남아메리카에서 벌어진 특기할 만한 국제전으로 1982년 4월에 일어난 포클랜드(Falklnad) 전쟁을 빼놓을 수 없다. 철권을 휘두르며 국가를 통치해오다가 1980년대에 접어들어 극심한 물가 상승, 외채, 실업 사태에 봉착한 아르헨티나 군사 독재 정권은 위기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영토 회복이라는 대의를 내걸고 영국 시민 23,000명이 사는 영국령 포클랜드 제도를 점령했다. 영국 보수당 정부는 자국의 해외 영토를 둘러싼 분쟁이 무력을 통해 해결되는 전례를 남기지 않기 위해 기동 함대를 파견해서 아르헨티나 육해군과 일전을 치렀다. 영국군은 열 척이 넘는 군함이 침몰되는 피해를 입으면서도 끝내 포클랜드 제도를 재점령해서 6월 15일에 아르헨티나 군의 항복을 받아냈다. 양 측에서 1,000명이 넘는 전사자가 나왔다. 패전의 여파로 아르헨티나에서 군부 독재 종식 요구가 높아지는 가운데 대통령이 퇴진했다.


맺음말

20세기를 조망해 볼 때 두드러지는 점 하나는 무력 분쟁이나 전쟁이 주로 주변부나 반주변부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이다. 앵글로색슨계 국가들은 자국 영토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크나큰 피해를 입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은 핵심 국가였던 영국과 프랑스가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서 이탈해 있던 소련이었다. 더욱이, 유럽인은 러시아, 에스파냐, 유고슬라비아에서만 내전의 고통을 겪었다. 반면 지난 세기에 주로 전쟁터가 되었던 지역은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였다. 뒤늦게 20세기에 국민 국가 형성 과정을 밟은 비유럽 지역은 국제전과 더불어 수많은 내전을 겪어야만 했다. 주변부와 반주변부에서 일어난 국제전도 대개는 중국, 한국, 베트남에서 일어난 전쟁이 그러하듯이 내전을 배경으로 해서 일어났다. 또한 아프리카나 라틴 아메리카의 내전과 중근동의 국제전도 핵심 국가들의 지원이나 개입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었다.
20세기 전쟁의 또한가지 특징은 전투원보다 비전투원이 훨씬 더 큰 피해를 입었다는 점이다. 20세기에 지구 곳곳에서 일어난 전쟁으로 줄잡아 1억5천만 명이 사망했다고 추산된다. 물론 현대전에서 전투원의 사상 비율은 극도로 높았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에서 주 징집 대상이 된 남성 19-22세 연령 집단의 규모는 무려 35%가 넘게 감소되었으며, 4년간의 독소 전쟁에서 동원된 소련군인 3천4백5십만 명 중 놀랍게도 84%가 사상자나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비전투원 인명 피해의 규모는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다. 제1차 세계대전의 민간인 사망자 1천만 명은 전장에서 죽은 군인의 수 8백만 명을 훨씬 웃도는 수치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정도가 더 심해져서, 사망자 7-8천만 명중 군사 작전에 연루되어 죽은 이는 1/3이 채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는 민간인이거나 전쟁 포로였다. 양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는 1억 명인데, 놀랍게도 이 중 3/4이 비전투원이었던 것이다. 20세기 후반기에도 상황은 크게 바뀌지 않아서, 1945년 이후에 전란으로 인한 사상자의 4/5가 민간인이었다. 2천4백만 명의 난민이 생겼으며, 전화를 피해 외국으로 탈출해서 삶의 근거지를 송두리째 잃은 사람도 1천8백만 명에 이른다.
무기를 들고 싸우는 전투원보다 후방의 민간인들이 더 큰 피해를 입는 현상은 20세기에 벌어진 전쟁의 상당수가 내전이었다는 사실의 한 결과였다. 내전에서 무수한 민간인들이 테러와 기근과 질병에 노출되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전쟁에서 민간인에게 닥친 비극은 주로 현대전의 특성에서 비롯된다. 그 이전의 국제전에서 군인들이 민간인을 공격하는 경우는 대개 약탈이나 극도의 흥분, 공포심에서 나오는 일시적이고 돌출적인 현상이었지만, 현대의 총력전에서는 적국의 민간인 공격이 정당한 전쟁 방식이 되었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해 국가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는 현대전에서 민간인은 ‘무기를 들지 않은 군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후방의 민간인들도 20세기 들어서 의도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다. 더군다나 장거리포와 장거리 폭격기는 전쟁에서 후방과 전선의 구분을 없애버렸다.
과학 기술의 발전과 총력전이 결합되면서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으로 전무후무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20세기에 기술의 산물인 항공기를 전쟁에 이용해서 적국 민간인을 체계적으로 대량 살상하는 전략 폭격을 구사한 미국과 영국의 전쟁 방식은 이 같은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함부르크(Hamburg)와 드레스덴(Dresden)에서 하룻밤새 5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도쿄(東京)에서는 민간인 10만 명이 1945년 3월 9-10일 이틀 동안 B-29기 300대가 쏟아 부은 폭탄 비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미군의 전략 폭격으로 독일 민간인 60만 명, 일본 민간인 9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미군은 독일 본토에 끊임없이 폭격을 가했지만 독일의 군수 생산은 꾸준히 상승했고, 독일 국민의 적개심이 고조되어 오히려 전쟁 수행 노력이 강화되는 역효과까지 발생했다. 이는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군인은 물론 민간인까지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전략 폭격의 비극적 귀결점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피어 오른 거대한 버섯구름이었다.
대량 파괴 무기의 무시무시한 살상 효과만이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다. 화약 냄새를 맡을 수 없고 포성이 들리지 않는 상황실에서 계기판을 보면서 무감각하게 대량 파괴 무기 발사 버튼을 누르는 군인이 나오는 최첨단 전쟁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해 적군의 가슴에 필사적으로 총검을 꽂고는 부들부들 떠는 군인이 나오는 재래전보다 더 훨씬 잔인한 전쟁일지도 모른다. 이성에 토대를 둔 과학의 발전이 극대화된 20세기에 오히려 인류는 같은 종 사이의 폭력을 통제하는 지혜 면에서 자연계의 동물보다 뒤떨어지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류는 전쟁을 금기(taboo)로 만들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의 주장 Umberto Eco, “Reflections on War” in Five Moral Pieces (London: Vintage, 2002).
이 인류가 세 번째로 맞이한 새천년에 의미 있는 반향을 불러일으키기를 기대해본다.


<참고 문헌>


김행복, 황원식, 강창구(엮음), <20세기 지구촌 전쟁> (서울: 병학사, 1996)
리처드 오버리(류한수 옮김),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서울: 지식의 풍경, 203)
에릭 홉스봄(이용우 옮김), <극단의 시대: 20세기 역사> 총 2권 (서울: 까치, 1997)
George Forty, Land Warfare: The Encyclopedia of Twentieth Century Conflict (London: Arms and Armour, 1997)
Martin Gilbert, Challenge to Civilization: A History of the Twentieth Century, 1952-1999 (London: HarperCollins, 1999)
J. A. S. Grenville, The Collins History of the World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HarperCollins, 1994)
John Keegan, The First World War (London: Hutchinson, 1998)
Daivd Mitchell, The Spanish Civil War (London: Granada Publishing, 1982)
Clive Ponting, Progress and Barbarism: The World in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Chatto & Windus,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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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노동조합운동

“우리 사회는 크게 세 가지 분열의 요인을 안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역사로부터 물려받은 분열의 상처이고, 그 둘은 정치 과정에서 생긴 분열의 구조이며, 그 셋은 경제적 사회적 불균형과 격차로부터 생길지도 모르는 분열의 우려입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노무현이 지난 8월 15일 해방 60년을 맞이하여 오늘 한국사회가 어떤 위기(분열)에 처해있는지를 제시한 경축사 중 일부다. 이어 그는 각각의 원인으로 미완의 과거 청산, 지역구도/대결적 정치구도, 인재 육성과 생산설비투자를 소홀히 하는 기업과 고용의 유연성을 가로막고 있는 기존 노동운동(대기업노조)을 지목했다. 이것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노동조합운동이 노무현도 분석해보려 하는 한국사회 위기를 외면하거나 피상적으로 인식한다면, 그리하여 자신이 누려왔던 혹은 과거 누리고 싶었던 권리를 방어/쟁취하는데 급급하다면, 개혁을 선도하는 이 같은 이데올로기 앞에서는 완전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누구나 한국사회의 위기를 체험하고 있고, 어떤 식으로든 이에 대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것쯤은 누구든 짐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운동이라 할지라도 대중의 지지 없이는 임금 한 푼 올릴 수 없다는 것이 상식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위기인식에 뒤처진 노동조합운동은 이를 따라잡으려는 노선을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제기된 사회적 의제를 급진화 한다는 미명아래 자신의 운동의 일부로 삼으려는 발상이 바로 그것이다. ‘x-file공대위’나 ‘사회양극화해소국민연대’ 같은 시도들 말이다.
이 같은 노선의 가장 큰 비극은 그 성공가능성을 철저하게 지배세력들의 성공가능성에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몇몇 지역, 공장 노동자들이 이를 통해 약간의 권리를 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대중에 대한 지배세력들의 통치체제의 확립이 노동자계급의 전반적인 지위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것쯤은 최근 몇 년의 경험만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IMF를 매개로 신자유주의자들이 확립한 지배체제 - DJ정권으로 통칭되는 지배체제가 확립된 이후 노동자계급이 어떤 처지로 내몰리게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라. 지배세력들의 이 같은 통치술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 지는 차치하더라도 설사 성공한다 한들 노동자계급 전체의 이해에 반하는 결과로 수렴될 일에 노동조합운동이 솔선수범하여 나서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상황은 오늘 노동조합운동의 노선 자체에 대한 전면적인 토론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조합운동의 현 상태에 대한 진단에서건 노동조합운동이 처한 현실(신자유주의 금융세계화시대)에 대한 분석에서건 어떤 이유에서라도 말이다. 수많은 노동자운동 활동가들이 이 문제를 둘러싸고 집단적으로 토론을 벌여야 한다. 왜 오늘 노동조합운동이 전체 인민의 지지는커녕 노동자들 사이의 지지도 못 얻는, 노동자계급의 정치적 단결(노동자의 계급적 단결)을 어렵게 하고, 노동자계급내부의 위계(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중심국가의 노동자/주변국가의 노동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노동조합 내의 민주주의를 요원하게 하는지를 분석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이 어떤 것을 목표로 어떻게 해야 전체 노동자의 요구와 조화를 이루는지, 내부의 차별과 갈등을 넘어 조직 내 민주주의를 이룩할 수 있는지, 나아가 어떻게 해야 노동조합운동이 노동자, 농민, 여성들 사이의 동맹을 가능케 하고, 착취질서를 폐절하여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데 산파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노동자의 시신을 놓고 ‘열사다’ ‘아니다’ 식의 논란을 노동자들 사이에서 벌여야 하는 비통한 현실 앞에서는 더더욱 말이다.

 

 

질라라비 9월호 발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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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 실황 중에서

1993년 새벽의 마지막 공연이었던 "러시아에 관한 명상"에 실린 노래다. 후손들에게...

 

작곡자 이름이 기억이 안난다. 전화 한통화면 알아낼 수 있겠지만 모른 채로 놔두려한다. 그게 좋을 것 같아서다. 작사는 김정환 시, 노래는 윤선애다.

 

난 이 곡을 급격히 몰락하고 있는 민중운동, 이제가지 새벽이 해왔던 모든 시도들에 대한 새벽의 '애도'로 꼽는다. 물론 브레이트 시에 붙인 노래 '후손들에게'와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해산했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았고 그래서 그들에게는 후손들이 없다.

 

 

nuovo라는 분이 bob.jinbo.net에 "윤선애씨 어디 계세요"라는 타이틀의 비라이센스(?) 음반을 올려 준 덕에 딱 10년만에 이 노래를 듣게 되었다. 그 분에게 정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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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에 관한 명상" 중 '사랑'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둘이 되어
고단한 우리들의 앞날을 본다는 것

사랑 그것은
다만 우리가 마침내
미래를 두 눈으로 바라볼 뿐
주인은 너희들(후손들)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

더 나아가
눈물 흐린 시야를 보탤 줄 안다는 것
살아 있는 동안 영원 불멸한 생애를 불태우고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그래 생애는
흔적으로 남는 것이 아닌 것
그것은 눈물 혹은 기쁨일 뿐
일어서는 것은 오로지 세상 뿐




무엇이 또 일어서는가
그러나 일어서는 것은
이미 살아있는 수천의 미래일 뿐


이룩된 것이 보다 찬란히 일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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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의의 혹은 취중결론 | 최원

비극의 의의는 어떤 혁명적 시도들의 실패의 장렬함을 보여줌으로써 이후 세대들이 유사한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데 있지 않다. 또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전 실패의 원인들을 과학적으로 분석함으로써 성공에의 보증을 이후 시도들 속에서 조금이라도 증가시킬 것을 촉구하는 데 있지도 않다.

내가 이해하기에, 비극의 의의는 혁명을 원하는 그 모든 동일자의 법칙(혹은 확신)은 예기치 못한 타자의 법칙(혹은 확신)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실패할 것이며, 따라서 그 모든 혁명적 시도들은 항상-아직 '유한한 것'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만드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비극의 의의는 혁명적 시도 속에서 필연적으로 자신이 빠져들 그 모든 '확신'에도 불구하고, 왜 동일자가, 혁명의 주체가, 여전히 타자를 향해, 심지어 자신의 적을 향해, 스스로를 열어내는 운동을 행할 필요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있다.

비극을 실패에 대한 찬양으로 이해하거나 혹은 (결국은 마찬가지 이야기겠지만) 끝내 도래하여 그 모든 실패들을 '보상(redeem)'해줄 성공에의 촉구로 이해하는 것은 모두 종말론적이고 결단론적인 비극 이해일 뿐이다. 하이데거와 벤야민이 공유했던 이 위험한 코드를 반복하지 말 것.

혁명은 '목표'가 아니라 '정세'일 뿐이라는 점, 우리는 혁명을 목표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정세로서의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수행할 수 없는 다수의 곤란한 목표들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는 점을 볼 것. 그리고 혁명 속에서 수행하거나 할 수 없는 다수의 목표들이 문제인만큼, 혁명은 여전히 어떤 '정치'가 가능해야할 공간으로 남아있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할 것. 만일 혁명이라는 정세가 정치가 불가능해지는 정세로 둔갑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혁명이 아니며 가장 끔찍한 결과를 야기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할 것. 혁명 속에서 무엇이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가, 혁명 속에서 정치를 가능하게 만드는 또 다른 정치는 어떤 것인가를 사고할 것.

"우리에겐 반역해야할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인식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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룰라, 좌파 집권 프로젝트 안정화 미명 하에 국회의원 매수 | 조세 꼬레아 레이치

룰라, 좌파 집권 프로젝트 안정화 미명 하에 국회의원 매수 조세 꼬레아 레이치 출처 : 참세상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inter_column&id=10&page=1 브라질노동당(PTB) 대표 로베르투 제퍼슨Alberto Jefferson의 [룰라 정부 및 노동자당 부정부패에 대한] 폭로는 1992년 예산에 대한 의회 국정감사 이래 가장 큰 스캔들을 일으키고 있다. (브라질 대통령 페르난두 콜로르 데 멜루는 여러 번의 부정 스캔들로 1992년에 탄핵됐다. 노동자당(PT)은 이 때 대통령 탄핵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었다.) 이번 사태는 룰라 정부가 직면한 최대 위기이며, 룰라 정부의 전 민간 국무총리이자 오른팔이었던 조세 디르세우Jose Dirceu는 첫 희생자로서 6월 16일 사퇴를 해야만 했다. 우정사업 관련 부정부패 혐의를 받은 제퍼슨은 몇몇이 제기하길 ‘디르세우가 제퍼슨을 범죄화하기 위한 음모’에 맞대응했다. 그는 6월 6일 폴하데상파울루 Folha de Sao Paulo [브라질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그리고 6월 14일 브라질 하원 윤리위원회에서의 진술에서 또 다시 한 번 노동자당 총무 데루비우 소아레스 Delubio Soares가 매달 3만 헤알(12,500달러)을 당대표들을 통해 자유당 및 민중당 의원들에게 줬다고 폭로했다.(자유당 및 민중당 의원은 하원 총 564석 중 100석 넘게 차지한다.) 또한 총무가 야당 지지에서 여당 지지로 입장을 바꾸는 모든 국회의원에게 백만 헤알(40만 달러)의 ‘상금’을 지급했다고 제퍼슨은 밝혔다. (매수를 쉽게 당하는 몇몇 우익정당들은 실제로 정부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다.) 브라질노동당 대표는 또한 노동자당이 2천만 헤알 상당의 ‘정치 계약’의 일환으로 4백만 헤알을 자신을 통해 브라질노동당에 줬으며, 이런 계약에는 노동자당 대표 조세 제노이누 Jose Genoino가 직접 개입되어 있다고 말했다. 기자인 도라 크레이머 Dora Kramer는 6월 15일자 오에스타두데상파울루 O Estado de Sao Paulo에 ‘비밀은 없다’는 칼럼을 통해 로베르투 제퍼슨의 윤리위원회 진술이 “국무총리 조세 디르세우에게 치명타를 가했으며, 노동자당 지도부를 심각히 훼손시켰고 국회 전체를 진흙탕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들은 모두 같은 손에 의해 상처를 입었다. … 그는 국회의원들을 지목하면서 이들이 모두 불법 선거 자금 체계의 공범이었다는 혐의를 씌웠다. … 그는 이런 수평적 선거 자금 체계[여러 정당에 선거 자금 지급]가 얼마나 확산되어 있는지를, 이것이 얼마나 당연시 여겨지는 지를 폭로했다. 그는 의회 감사위원회가 특정 감사 대상자를 책망하거나 사면해주기 위해 거래를 한다고 밝혔다. 대통령궁과 의회 내 여당지지자들 간 관계를 노출시켰고, 이 모든 것이 권력을 사고 파는 행위의 일환이라고 말했다.” 부정부패 혐의로 이미 고통스러워하고 있으며 지난 몇 달 사이에 지지율 하락을 직면하고 있는 룰라 정부는 사상 최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는 또한 노동자당 역사상 최대 위기로 이어지고 있으며, 노동자당에 대한 정치적 신뢰는 추락하고 있다. 디르세우의 사퇴는 노동자당 내 균형을 망가뜨렸다. 그의 사퇴가 한편으로는 룰라가 정부 내 “썩은 일부”를 제거함으로써 (디르세우는 이미 일년 전 그의 핵심 자문 중 한 명인 왈도미루 디니즈 Waldomiro Diniz가 개입된 스캔들로 심각한 상처를 입은 바 있다.) 협소한 자기이해에만 복무하는 부패한 부분을 도려내는 것이라면, 다른 한편으로는 팔로치 Palocci와 구시켄 Gushiken과 같이 大금융자본과 연계가 가장 깊고 브라질사회민주당(PSDB)과 거래하는 데 가장 유리한 자들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정부와 노동자당이 약화되다 정부와 노동자당의 위기는 룰라 행정부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지지, 이로부터 촉발된 논란과 노동자당의 방어적 태도와 맞물려 있다. 이런 복합적인 위기는 우익에게 유리한 지형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 이번 사태는 새로운 정치를 향한 매개로서의 노동자당의 도덕적 유산, 신뢰와 정당성을 완전히 붕괴시키고 있다. 여태까지는 [노동자당에 대한 비판이] 기존의 낡은 경제 정책을 지속한다는 데 국한됐었다. 이제 비판은 모든 일반 시민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기되고 있다 - 즉, 국회의원의 매수와 부정부패. 모든 사람이 룰라 정부의 성격과 한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이런 위기 때문에 정부는 재정장관 팔로치의 ‘연임’에 더욱 강력히 집착하고 있다. 팔로치는 룰라 행정부의 ‘안정’을 위한 ‘돛’으로 간주되며, 룰라의 약화를 가장 잘 이용할 수 있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은 팔로치가 정부에 남아있길 기대하고 있다. 브라질사회민주당은 2006년 10월 선거까지 정부를 최대한 약화시켜 놓으려 하고 있다. 즉, 제도와 ‘체제’ 자체의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룰라 정부의 지지율이 하락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자유전선당(PFL)과 연계가 있는 전통 우익만이 룰라 대통령을 탄핵해야 한다고 위협(그러나 명확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하고 있다. 그리고 제퍼슨과 기타 혐의 제기자들은 자신들의 혐의로부터 룰라를 조심스럽게 면제해주고 있다. 이 사태는 룰라 정부와 노동자당을 향하고 있는 장기적 갈등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무엇이 어떻게 되든 룰라 정부는 약화될 것이며 우편향할 것이며, 팔로치의 입지와 그의 신자유주의 노선은 강화될 것이다. 디르세우가 제거된 상태에서 팔로치는 대통령 중심의 정치지도부 내 경쟁자가 더 이상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룰라는 자신의 임기 막판에 이르러 브라질사회민주당의 인질이 될 가능성도 있다. ‘정치적 흥정’에서 ‘뇌물’로 많은 분석가들이 강조했듯이,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수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의회 내 연정과 부패한 우익 정부기관에 기반한 기존의 통치방법 또한 유지해야 한다. 룰라는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반민중적 경제 정책과 단절을 꾀해야 하는데, 만약 대중으로부터 지지가 없다면 그는 그 300여명의 정치장사꾼들 - 가능한 최고 가격으로 집권자들에게 자신을 팔아넘길 준비가 상항 되어 있는 상당수의 국회의원들, 브라질 정치의 풍토병적 부정부패에 책임이 있는 바로 그 자들 - 과 손을 잡지 않을 수 없다. ‘투까노 tucano’[브라질민주사회당의 별칭]들이 카르도수가 집권한 8년 동안 여당을 이루면서 사유화와 거시경제적 규제를 통해 금융자본의 이해관계에 노골적으로 복무하는 ‘도매’ 식의 합법적 부정부패에 기반 했다면, 룰라 정부는 좌파의 집권 프로젝트를 안정화한다는 미명 하에 개별 국회의원을 매수하는 ‘소매’ 식 전통으로 되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정부 내에서 벌어진 이와 같은 정치적 흥정 또는 ‘주고받기’는 조세 디르세우가 조정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대통령궁에 종속된 노동자당 일부도 개입했다. 노동자당 사무총장 실비우 페레이라 Silvio Pereira가 정부 및 국가기관 25,000개 직위를 팔아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만천하가 아는 바이다. 바로 그래서 대중여론은 정부 및 노동자당의 입장을 지지할 수 없다. 왜냐하면 제퍼슨의 혐의가 사실이든 그렇지 않든, 정부와 노동자당이 그 동안 매우 노골적으로 국회의원들을 매수해왔기 때문에 이런 사태가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이다. 정부 및 국가기관에의 채용을 대가로 지지를 확보하려는 거래들, 정당을 바꿔치기하는 ‘유연한’ 국회의원들, 내지는 팔로치가 룰라 정부에게 전략적 중요성을 가진 투표 바로 전날 국회 내 특별히 협조적인 의원들이 제출한 법개정안을 지원하기 위해 뿌린 자금 - 이 모든 것은 노동자당이 부정부패한 엘리트들의 행각이라 강력히 비난한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그리고 신문들은 이 모든 것을 보도했다. 실용주의의 쓴맛 “월별 뇌물”은 - 실제로 존재한다면 (존재했다는 말이 국회 내에서 많이 돌고 있긴 하다) - 정부로 하여금 이런 과정[매수와 지지자 확보 등]을 더욱 쉽고 저렴하게 밟아나갈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정치적 전환을 추진하는 방법으로는 매우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러나 친정부적인 노동자당이 완전한 실용주의 노선으로 자신을 전락시킨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이런 실용주의는 2002년 이전부터 브라질 좌파 일부의 정치적 문화를 형성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당 상당부분이 룰라에 대한 아무런 저항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여러 지방자치단체에서 노동자당 주류 지도부가 애초 원칙을 점차 상실해가고 있고, 원칙을 상실해가는 자는 공수표를 돌릴 이유가 없으리라. 그래서 제퍼슨이 제기한 혐의로부터, 또는 의회 감사(우체국을 통한 ‘월별 뇌물’에 대해 이미 감사가 진행 중이다)로부터 어떠한 결과가 나오든, 상처는 가해질 대로 가해졌다. 정부(그리고 정부에 대한 노동자당의 종속)에 실망하고 있는 브라질 피선거권 대중에게 [부정부패에 대한] 혐의는 룰라 식 통치방법이 어떠한 대가를 요구하는지, 그리고 노동자당의 행동이 어떻게 다른 정당 수준으로 떨어졌는지에 조명을 비쳐줬다. 지금 노동자당과 정부의 목표는 당의 이미지가 양호했던 이전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상처가 더욱 확대되지 않도록 하고 그 상처가 룰라 정부를 영원히 무덤 속에서 밀어넣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는 정부와 어색하기 짝이 없는 정부 지지자들, 또는 노동자당에 대한 새로운 혐의가 제기되면 혐의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십상이다. 연방경찰은 노동자당 당원들이 개입된 아마존 밀림 벌채 계획을 밝혔다. 마르타 수플리시 Marta Suplicy가 시장으로 있을 당시 상파울루 야당 당원들을 흡수시키려 했다는 혐의도 드러나고 있다. 시의회에서도 ‘월별 뇌물’ 체계가 있었던 것이다. 로베르투 제퍼슨은 정부에게 영향을 끼칠 또 다른 혐의를 들고 나왔다. 예를 들어, 실비우 페레이라가 야간 항공우편 서비스 수수료 과잉청구로 이득을 얻고 있다는 혐의 등이다. 진실이든 아니든 모든 새로운 혐의는 이전의 것에 더해져 노동자당의 좌파적 정체성을 파괴하는 데 일조하고 있으며, 이에 노동자당은 다른 이기주의적 정당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웅덩이에 내던지고 있다. 룰라와 노동자당 지도부는 자신들이 심은 씨앗의 열매를 맛보고 있는 것이다. 위기를 관리하기 위기에 대처하는 데 있어 정부 일각에서는 모든 책임을 노동자당에 지우려 하고 있다. 당 지도부는 여전히 조세 디르세우의 통제 하에 있다. 제노이누를 제외하고, 노동자당 내 혐의를 받고 있는 사람은 모두 디르세우와 연계가 있다. 그러나 지난 6월 8일 노동자당 전국집행위원회는 혐의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델루비우에게 나름대로 타당한 직위해제 처분을 가했다. 무능력한 지도부 관료들은 피혐의자들을 비호하면서 델루비우가 단지 당의 결정 사항을 이행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항변했다. 그 이후 기자회견에서 처참하게도 델루비우는 제노이누가 지시한대로 자신은 단지 심부름꾼이었을 뿐이라는 인상을 심으려 노력했다. 압력을 받고 있는 대통령은 개입된 모든 이들에게 신호를 보내고 있다 - 즉, 룰라가 너무 약화되면 재선을 노릴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2006년에 팔로치가 그를 승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자당이 책임을 져야 하며 사람들의 비난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친정부 좌파 - ‘민주적 사회주의 Socialist Democracy(DS)’와 ‘좌파연합 Left Articulation' 주류 지도부 - 는 델루비우를 비호하기 위해 당 관료들과 디르세우의 계략 뒤에 줄을 서고 있으며, 동시에 정부의 경제 정책에 대해 약한 목소리로 비판하고 있다. 이들은 현재의 위기가 가져오고 있는 파장을 간파하고 있지 못하다. 타르시시우 짐머만 Tarcisio Zimmerman, 올란두 데스콘시 Orlando Desconsi, 호아웅 그랑다웅 Joao Grandao 등 의회 내 민주적 사회주의 의원들, 그리고 몇몇 좌파연합 의원들은 애초에 우정사업 관련 혐의에 대한 감사를 실시하라는 요구를 지지하지도 않았다. 감사가 로베르투 제퍼슨이 혐의를 제기하기도 전에 이미 승인이 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좌파들이 정부에 참여하면서 거기에 순응하고 있다는 사실은 점점 더 명백해지고 있으며, 그렇게 됨으로써 이들 좌파는 상당한 정치적 전략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서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게 되었다. 좌파 블록 : “숨길 것도 없고, 잃을 것도 없다” 보다 진지한 좌파는 위기가 폭발하기 전부터 이미 혐의에 대한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질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들의 구호 중 하나는 “숨길 것이 없는 자는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였다. 노동자당 좌파블럭 소속 의원 12명은 우정사업 관련 부정부패 혐의에 대한 감사를 애초부터 요구했고, 이들은 이제 노동자당 상원의원 일부와 연계를 맺기 시작했다. 감사에 반대를 했던 노동자당 의원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비판을 받자 바로 그 다음 주에 입장을 바꿨다. ‘월별 뇌물’ 혐의에 대해서도 좌파블럭 -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온 노동자당 좌파 일부로 형성된 - 은 같은 입장을 취했다. 정부와 노동자당에 악영향을 미치더라도 제기된 혐의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져야 하며, 책임자는 처벌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시민사회의 민주세력들이 개입해야 하기 때문에 이 의원들은 전국주교회의와 브라질변호사모임의 지원을 호소하고 있다. 좌파블럭은 또한 정부 및 노동자당의 부패한 행동, 룰라 및 팔로치의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 그리고 이에 대한 여당의 지원이 갖는 연관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시장을 통치하는 자는 거리[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노릇이다. 경제정책 방향선회에 대한 요구는 부정부패에 대한 효과적인 투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이룬다. 광범위한 재편 이번 위기는 디르세우 식 정치 그리고 고수하기도 어려운 실용주의 노선을 따르는 친정부 노동자당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있다. 이는 여전히 좌파적 노선을 유지하고 있는 층위, 정부의 연정과 낡은 정책이 미친 영향을 간파하고 있는 층위 내에서 비판적인 노동자당 좌파가 보다 넓은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준다. 최근 에두아르두 수플리시 Eduardo Suplicy와 크리스토반 부아르케 Cristovam Buarque, 프레이 베투 Frei Betto와 같은 상원의원들은 정부와 노동자당이 취하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불만족을 표명했다. 그러나 좌파를 다른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싸움은 심지어 좌파블럭 중 민중사회주의행동 Popular Socialist Action (APS)파도 제안하듯 노동자당 내에 예의바르게 개입하거나, 새로운 지도부 선거에 개입하는 것으로는 불가능하다. 실제로 노동자당 내부 지도부 선거는 의회 내 분쟁 때문에 완전히 무시되고 있다. 다른 한편, 친정부 좌파가 엘로이사 엘레나 Heloisa Helena의 사회주의와자유당(P-Sol) 주위에 구축한 ‘정치적 완충지대’는 더 이상 지속하기 힘든 상태에 처해있다. 이 정당은 2006년 선거를 대비해 법적 등록 절차를 거칠 참이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등록될 가능성이 크다.) 사회주의와 자유당은 소속 의원들의 최근 선언에서 볼 수 있듯이 비종파적 태도로 노동자당 좌파와 연대를 하는 등 현재 위기에 긍정적으로 대응했다. 무엇이 어떻게 되던 간에, 엘로이사 엘리나는 2006년 선거에서 핵심 인물이며, 대통령 후보로 출마할 가능성이 있다. 마지막으로 노동자당 좌파는 정부나 당이 방향선회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 그리고 노동자당의 이미지에 가해진 손상을 회복할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서 중장기적 계획을 세울 필요가 있다. 룰라는 브라질사회민주당의 중앙정부 복귀를 준비하고 있는 듯하다. 이제 ‘2안’의 가능성을 타진해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좌파블럭은 현재 놓여 있는 선택 중 가장 이득이 될 만한 방안을 찾고 공동행동을 해야 한다. 향후 몇 주 동안 브라질 좌파 지형에 대한 포괄적인 재편을 향한 거대한 움직임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상파울루, 2005년 6월 16일) [번역] 전소희 - wto반대국민행동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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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 임경구 기자의 고언(苦言)

 <기자의 눈> X파일-연정 '음모론'의 고리, 정부여당이 끊어야
 
  2005-08-11 오후 3:04:41      
  
 
  대개의 경우 '음모론'의 등장은 파행의 전주곡이었다. 음모론의 공통된 뼈대는 여권이 야당을 죽이기 위해 무언가 일을 꾸몄다는 의심에서 출발한다. 물론 정부여당은 '진정성'을 강조하며 부인한다. 꼬인 실타래처럼 얽혀가다가 푸닥거리인 양 한번쯤 대충돌이 발생한다. 그 뒤엔 죽도 밥도 안되고 앙금만 남긴 채 다음 장으로 넘어간다.
 
  그 고질적인 수순을 우리는 지난해 '4대입법' 논란에서 봤다. 청와대와 여당은 '진정성'을 무기로 밀어붙였다. 한나라당은 국가보안법과 과거사법 등이 보수세력을 죽이기 위한 기획의 산물이라며 '결사항전' 했다. 형식적 결과는 국회 파행이었고, 내용 상의 결과는 '누더기' 과거사법 탄생과 국보법 표류이었다.
 
  다시 등장한 불안한 징후 '음모론'
 
  지금의 정국도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양대 쟁점인 안기부 X파일과 연정론 뒤에 음모론이 등장한 게 어쩐지 불안하다.
 
  X파일 '음모론'은 최초 한나라당에서 제기됐다. 왜 유독 특정 재벌과 특정 정치세력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내용만 나오느냐는 의심이었다. 국가정보원의 '국민의 정부시절 불법도청' 공개 이후엔 민주당발(發) 음모론이 가세했다. 'DJ 죽이기'를 위한 모종의 기획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급기야 사안의 성격상 전혀 관련이 없을 듯한 연정론과도 맥이 얽혔다. 노 대통령이 X파일-불법도청 파문을 등에 업고 DJ와 결별해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추진하려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가뜩이나 노 대통령의 연정 제안이 정계 개편을 위한 포석이라는 의구심을 받아온 터라 이런 시나리오는 그럴싸해 보이는 측면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DJ를 버려서 우리가 얻을 게 뭐냐"는 여권의 정치공학적 반박 또한 일리가 있어 보인다.
 
  호사가들의 술안주용으로 제격인 이런 논쟁은 꼬인 정국의 실마리를 푸는 데는 하등 도움이 안된다. X파일 문제가 불법 도청 문제로, 음모론으로 계속 초점을 이동해가면서 거대권력 간의 유착이라는 본령에서는 한참 멀어졌다. 여기에 여권 내부에서조차 조율되지 않은 연정론은 가뜩이나 어수선한 정국에 '논쟁을 위한 논쟁거리'만 양산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선 9월 정기국회가 갈등 해소의 장이 아닌, 확산의 장이 될 공산이 크다. 특검법-특별법 줄다리기를 둘러싼 미시적 논쟁이 화두가 될 것이 뻔하고, 각 당의 '저격수'들은 장끼를 뽐내듯 근거 모를 폭로전을 수행할 것이다. 언론은 따라 가고 국민은 현혹되는 쳇바퀴도 예정된 수순이다.
 
  연정론, 이제는 접을 때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우선은 X파일과 연정론이라는 양대 현안을 독립된 사안으로 제자리에 위치시켜 놓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게 하고 나서 두 사안을 얽어매고 있는 '음모론'을 야당이 거두면 일은 쉽다. 청와대와 열린우리당의 요구도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는 혹여 있을지 모를 '정치적 의도'를 모른 척 하라는 주문에 불과해 야당에겐 설득력이 미치지 못한다. 더욱이 상대가 믿어주지 않는데도 결백만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더 큰 음모론으로 비화될 수도 있다.
 
  하기에 해결의 주체는 청와대와 여당이 맡는 게 옳다. 음모론이 배양되는 토양 자체를 없애는 것이다. 결자해지의 의미에서 이미 수명을 다한 듯한 연정론을 여권이 스스로 폐기처분하는 결단이 하나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연정이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청와대와 여당이 인식하고 있다면 비생산적인 논란을 매듭 지을 시점으로는 지금이 적기라는 얘기다. 더 큰 목적이라는 선거제도 개편은 자연스런 논의 절차를 따라가면 된다. 야당이 당장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다고 삿대질을 해선 될 일도 안 된다.
 
  그럼에도 여권은 연정론을 포기할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인다. 노 대통령은 8일 기자간담회에서 "도청 정국과 연정 문제는 무관하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무관하다"는 말보다는 향후에도 연정론을 지속적으로 거론하겠다는 뜻에 무게가 실렸다.
 
  아니나 다를까 바로 다음날 국무위원들 앞에서 노 대통령은 "그동안 우리가 만든 사고의 틀과 가치관 등 너무 경직된 틀 내에서만 사고하고 행동하는 것에서 크게 한번 뛰어넘어 새로운 정치를 창조적으로 해보자는 진실한 의미에서 제안한 것"이라고 연정 제안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이같은 수석 당원의 '메시지'는 열린우리당에도 여파를 미쳤다. 문희상 의장은 9일 "(한나라당과의) 연정 가능성이 지금 당장은 없다"고 대연정 포기를 암시하면서도 이번에는 물꼬를 돌려 "대연정이 안되면 소연정은 가능하다. 이는 민주당, 민주노동당과는 가능하다는 얘기"라고 말했다. 어떤 식으로건 연정론을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으로까지 비쳐졌다.
 
  하지만 이는 최근 유시민 상임중앙위원이 "소연정은 국회운영에는 다소 힘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선거제도 개선을 통한 한국의 정치 발전에는 합당한 대안이 아니다"고 말한 것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노 대통령의 의중을 잘 읽기로 소문난 두 지도급 인사들의 말조차 엇갈릴 정도로 연정론이 종잡을 수 없이 표류하고 있다는 증거다. 청와대든 우리당이든 이쯤에서 논란의 악순환을 종결시켜야 할 필요성은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정부여당, 집권의 책임을 잊지 말아야
 
  또 한가지. 불법도청 문제와 관련한 야당의 음모론에 꼬박꼬박 정면 대응하는 청와대와 여당의 자세는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지가 전혀 없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한나라당을 향해 "석고대죄해도 부족한 정당이 국정원 개혁을 가열차게 추진한 대통령을 향해서 음모를 제기하는 것이 정치적 도리인가 생각할 때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가 없다"고 말한 조기숙 청와대 홍보수석의 울분 토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입원을 두고 "민주당이 왜 그렇게 흥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김만수 대변인의 냉소는 어떤 결과를 초래했나.
 
  한나라당에선 국회 정보위 소집 문제를 두고 "청와대가 여당과 국정원에 대한 완벽한 통제 권한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청와대 대변인이 언급할 성질이 아니었다"는 반발을 낳았고, 민주당에선 "민주당을 쪼개고 파괴하려는 기조에 대해서는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차원의 저항을 한 것"이라는 불만이 즉각 튀어나왔다.
 
  물론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이기에 야당의 정략적 접근법도 혼란을 가중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하지만 국정을 책임진 정부여당과 야당의 책임을 동일한 잣대로 재단할 수는 없는 일이다.
 
  노무현 정부 출범 초기, '아름다운 재단' 박원순 상임이사는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정부여당은 접시를 깨고 야당은 독을 깼다고 하더라도 정부여당이 더 큰 비판을 받아야 한다. 권력을 잡고 있는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시민단체가 형식적 균형주의에 맞춰 독을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접시 깬 사람도 꿀밤 한 대 식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한 데 대한 충고였다.
 
  최근 메가톤급 두 가지 사안을 마주하며 야당과 핑퐁게임 하듯 독설을 주고받는 청와대와 여당의 인식은 여전히 "왜 우리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2년 전 그 언저리를 맴돌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먼저 결단할 것 결단하고 정리할 것 정리해 정국의 가닥이 좀 선명하게 드러나게 만들어주었으면 한다. 그게 여권이 할 일이다.
 
  노파심에서 하는 얘기지만, 청와대와 여당이 애당초 음모론이 계속 생산되는 지금과 같은 모호한 상황을 즐기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면 그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런 것이었다면 필자로선 "지금까지 잘못 말씀드렸다"고 사과하며 지금까지의 얘기를 다 취소하는 수밖에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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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절한 금자씨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 장진범

어제 장농이랑 냉장고를 함께 옮긴 사람들과 이 영화를 봤다. 예고편을 보고서 이 영화 정말 봐야겠다 생각한 건 처음이었다. 오동진의 극찬도 한몫 했다. 게다가 정성일 팬카페 사람들의 논쟁도 나를 자극했다. 어쨌든 영화를 봤다(이건 얼마만이더라?).

 

흔히 그의 영화를 '복수 3부작'의 맥락에 위치짓곤 한다. 이런 호칭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복수'가 중요한 소재인 건 분명하다. 어디선가 박찬욱은 그렇게 말했다(혹은 그렇게 말한 것 같다). 복수는 사회적으로 금기시된 것이므로 흥미로운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다고. 그의 예술관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고 나 역시 이런 관점에 점점 더 이끌리고 있다.

 

복수가 언제부터 금기가 되었는지 잘 모른다. 다만 결정적 일보를 내딛은 것은 헤겔이라 들었다. 이른바 '인정투쟁'(특히 예나시기의 헤겔이라고 한다) 이란 복수라는 사적 정념을 정치라는 공적 실천으로 '지양'해 낸 것이다. 복수 대신 '재판'이란 개념이 들어오는데 이때 재판의 목적은 공동체의 복구다. 물론 '범죄자'를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식이 아니라 그에게 '시민권' 핵심적으로 ('변호'라는 형태로) '발언권'을 줘 재판이 기존 공동체를 '반성'하는 정치적 계기가 되도록 재판 자체가 전환되어야 한다. 이로부터 나오는 헤겔의 놀라운 명제:

'범죄자는 자기 자신의 처벌을 의지해야 한다.' 이는 재판의 反-복수적, 민주적 개조와 같은 말이다.

 

하지만 재판 더 넓게 말해 국가를 통한 공적 '인정'이 오작동하면, 적대나 갈등이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않으면, 복수는 항상-다시 되돌아온다. 좀더 냉소적으로 말하면 많은(아마 지금까지 모든) 국가들은 복수를 은밀히 조장해 왔다. 적대와 갈등을 중재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한 정당성의 침식을 이들의 사적 해결인 복수, 거기에 동반되는 잔혹한 폭력에 대한 '예방적 대항폭력'이라는 경찰적 정당성으로 보충해 왔기 때문이다. 국가의 타락은 개인의 타락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국가의 더한 타락으로 이어진다. 폭력의 악순환.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술의 윤리적 역할이 있을 것이다. 금기시되지만 어떤 식으로든 실재하는 상황/행위를 극(특히 비극)의 형태로 체험케 함으로써 갈등과 '책임'(respons(e)iblity)을 숙고하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고대부터 현대까지 예술이 이른바 '(재)주체화'의 특권적 계기

로 인정받는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또한 반민주적 결국 경찰적 국가(시민을 준-범죄자로 취급하는) 의 토대를 아주 근원적인 지점에서 해체할 수 있는 행위가 예술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복수 3부작' 역시 이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듯 하다. '복수는 나의 것'은 계급적대가 정치적으로 해결되지 못하고 모든 사람이 상대방을 원수로, 자신을 보복자로 상상할 때 이 세상 위에서 벌어지는 지옥의 실천을 그린다. 그런 의미에서 '복수는 나의 것'은 복수를 하려는 모든 사람들 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노동자들에게, '나 너 착한 거 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된다... 부르주아들에게, 복수의 수레바퀴가 돌기 전에 뭔가를 해라...

 

'올드보이'에서 그려지는 것은 다른 식의 지옥이다. 그것은 푸코적인 의미에서 '지배'의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행하려고 시도하고 있는 분석들은 본질적으로 권력관계들을 대상으로 한다. 나는 이를 지배(domination)의 상태와는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한다 (…) 한 개인 혹은 한 사회적 그룹이 권력관계들의 장을 가로막고 그것들을 유동성 없고 고정된 것으로 만들며 운동의 모든 가역성(reversibility)을 피하는 데에 이를 때 (…) 우리는 지배의 상태라고 부를 수 있는 것과 대면한다. 이러한 상태 안에서 자유의 실천들은 존재하지 않거나 일방적으로만 존재하거나 극단적으로 한정되고 제한된다는 것이 분명하다..."
- 푸코, '자유의 실천으로서 자아에의 배려' 中

알다시피 이우진은 오대수의 운명을 완전히 장악하여 어떠한 저항도 할 수 없게 만들고

저 끔찍한 바퀴로부터 빠져나오는 대가로 스스로의 파괴를 치르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그런 '지배'를 실행한다. '私刑'을 집행하는 감옥에서부터 정신을 장악하는 최면술, (최면술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차라리 지배의 어떤 극단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 모두를 감당할 수 있는 경제력에 이르는 저 까마득한 권력의 비대칭성의 지옥. 홉스가 말한 '베헤모스'(내전/자연상태)와 '리바이어던'(극단적 사회상태)은 둘다 지옥이다.

 

'친절한 금자씨'가 그리는 지옥은 어떤 것인가? 내가 인상적이었던 점은 행위자들('보복자들')의 위치가 극히 자의적이고 유동적이라는 사실이다. 전편에서 서로를 죽이고자 했던 류와 동진은 이제 사이좋게 유괴를 기도한다. 오대수의 최면술사는 그에게 식탁에서 개처럼 강간당한다. 이우진은 유괴/살해당한 원모의 자리에 가 있고 이금자는 백선생처럼 입이 틀어막힌다. 그녀의 방은 오대수가 갇혔던 감옥이 되고 그녀의 딸과 양부모는 독가스에 취한다. 한편 '통일의 꽃' 임수경은 장기수를 가둔 감옥의 간수가 되어 있고 '혁명운동'에 사용하려 했을 '법-구경' 총은 사적 복수의 도구가 되고, 그리고 또...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물론 폐교의 '私刑'이 있다. 그것은 백선생에게 가장 잔혹한 복수이자

(자신에 대한 死刑/私刑 논의를 무력히 듣고 있을 수 밖에 없다니!) 이 순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박찬욱이 설치한 장면이기도 하다. 그는 스스로 이렇게 말한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그의 복수연작 안에서 일종의 '사라지는 매개자'(vanishing mediator) 역할을 논다. 가장 잔혹한 폭력이자 절대악의 확실한 '폐제'이면서 보복자 자체의 해체의 시작이다. 적어도 의도는 그랬을 것이다. 문제는 원하는 효과를 거뒀느냐다. 여기서 박찬욱은 블랙코미디 기법을 전면화하면서 그의 말대로 하자면 '우습다라는 기조로 가다가도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식으로 주저하게 되고, 또 나중에는 웃은 게 조금 미안하게도 되는 그런 상태' 를 도모한다. 내가 볼 때 이는 통찰력있는 선택이다. 왜냐하면 그는 잔혹이 反-희극이 아니라 희극이라는 점, 또한 거기에 모종의 '향락'이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희극 자체를 분할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런 장면을 보면서 웃는 자신 안의 잔혹과 관객을 대면시키면서 어떤 섬뜩함과 불편함을 끌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박찬욱은 세간의 평가보다 훨씬 순진하거나 아니면 희대의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것은, 관객들이, 금자씨와 달리, 정말로 즐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희대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은, 위의 사실 곧 이 변증법적 전환의 실패를 뻔히 알고 있고 스스로 이 실패를 즐기면서도 정반대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알 수 있는 도리는 없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상상보다 훨씬 더 잔혹할지 모른다는 것, 잔혹한 '부정의 부정'을 경유해 구원으로 가는 숭고한 '부정신학'이 극히 도착적일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난 '복수는 나의 것'이 더 윤리적인 것 같다. 자신은 없지만 이 점에선 정성일 선생과 좀 의견이 다르다)

 

마지막 장면에서  난 두 가지 점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금자와 제니라는 '모녀' 관계가 성립됐다는 점. 이는 '복수는 나의 것'에서는 실패했고 '올드보이'에서는 양자 간의 책임의 비대칭성을 전제로 구성된 '부녀' 관계와는 사뭇 다르다. 어떻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의 결론이 다르게 난 것은 그녀의 딸이 딸로서 살아있었고 엄마의 얘기를 (미도와 달리) 다 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또 하나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받아먹으려는 사람들의 '혀'였다. 우리에게 혀와 입은 무엇일까. 낭시 식으로 말하자면 '노출'(ex-posure)이란 무엇일까.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다.

 

 

친절한 금자씨 2 : 박찬욱의 의도는 성공했는가? 아니 그의 의도란 무엇이었는가?

 

 

앞서의 글에서 인용했듯 박찬욱은, 특히 '사형' 장면에 관한 자신의 의도를 이렇게 밝혔다:

"모범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끔찍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효과가 있다. 그걸 통해서 원론적인 교훈을 절실하고 뼈저리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다. 관객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백 선생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의 문제에서 점점 더 우스꽝스럽게 갔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유족이 더 잔인하게 느껴지도록 했다. 무방비상태의 인물을 놓고 벌이는 그들의 행동을 보는 금자는 구경꾼이 된다. 복수를 막 수행하려는 사람, 오랜 세월 준비해서 이제 막 잡아놓고 죽일 수 있는 그 단계에서 금자는 이 모든 복수극의 구경꾼, 관객이 되는 거다. 그제야 금자는 어떤 깨달음을 얻는 거다. 금자가 직접 복수를 수행했다면 좀 달랐을 거다. 내가 했을 법한 걸 남이 하는 걸 지켜볼 때 이 모든 것이 다 그릇되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고지식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금자씨가 그 과정을 거쳐서 뭔가 자책하고 괴로워하는 제스처가 바로 두부 모양의 케이크를 먹으려고 할 때다. 금자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자기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이다. 전도사가 제시한 두부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만든 두부 케이크를 먹는다는 거다."

 

구조주의 이후 우리가 배운 것은 저자의 의도를 곧이곧대로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 혹은 같은 말이지만 저자조차 어찌할 수 없는 장면의 물질성에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저번에는 박찬욱 스스로의 진술 인용으로 대체한 이 장면에 대한 분석이야말로 이 영화를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이 될 것이다.

 

우선 제기할 수 있는 것은 박찬욱이 의도한 것과는 달리 (적어도 나에게는) 이 장면의 시작이 전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스포일러를 접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영화가 얼마 진행된 이후부터 난 백선생이 틀림없이 연쇄살인범일 거라고 믿게 됐기 때문이다.

 

이는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진 사정과 관련될 것이다. 아마 백선생이 금자의 아이를 데리고 살인현장에 나타난 그 끔찍한 장면에서부터 이는 거의 목적론적인 귀결이었다. 어쨌거나 백선생이 절대악으로 그려졌기 때문에 사형 장면은 전환으로 느껴지지 않았을 뿐더러 프로이트적 의미에서 '원-장면'(primal scene)이 된다. (박찬욱이 이 영화가 '동화'라고 말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모든 동화는 '옛날옛적에'('Once upon a time')으로 시작하고 현존 사회의 '기원'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아무런 금기 없이 향락을 즐기는 난폭한 아버지를 '폐제'하고 아들 간의 공모를 통해 금기/법, 따라서 '사회'를 정초하는 바로 그 장면 말이다. 박찬욱은 이 장면을 본 관객들이 유족들의 잔혹(또한 우스꽝스러움)을, 혹은 그 장면을 보고 웃는 스스로의 잔혹을 느끼길 바랬다고 말했다. 물론 그런 효과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잔혹이 향락(과 그것의 전염)을 동반한다는 점을 박찬욱이 정말 몰랐을까? 더구나 절대악을 폐제하는 게 문제라면, 그 잔혹에는 모종의 정당화가 부여되지 않는가?

 

모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라고 '복수는 나의 것'에서 말했을 때 그는 적어도 이렇지 않았다. 물론 이 점은 바뀌지 않았다고, 잔혹은 잔혹을 부를 뿐이며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순환에서 한발 벗어나 있는 '관찰자' 금자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금자는 어떤 의미에서 외부자/관찰자인가? 가장 모범적인 '리바이어던'으로서가 아닐까? 백선생을 죽인 후 누설을 걱정하는 유족들 앞에서 금자가 던진 협박을 생각해 보라. 감독의 의도야 어땠던 간에 바로 그 말 때문에 금자의 '유령성'은 '초-자아'의 그것으로 사후결정된다.

그녀는 '악/향락의 민주화'를 행했고 거기서 나오는 죄책감에 기반해 사회상태를 만들었으며 너무나 친절하게도 이 사회상태의 보증자가 되기를 자청했다. 그녀가 이미 죽은 백선생에게 쏘아대는 총알은 실제로는 유족들에게 던지는 경고일 것이다.

 

이렇게 보면 '친절한 금자씨'는 '올드보이' 와 놀라울 정도로 대칭적이다. 이우진은 오대수에게, 이금자는 유족에게 '금기'를 범하게 했고 양편 모두에서 그/녀들의 상대방은 '혀'가 잘린다. 하지만 오대수는 무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자기 스스로 혀를 잘라낸다. '오이디푸스' 왕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때문에 오대수는 영웅이 되고 이우진은 파멸한다. 하지만 유족은 (금자의 유혹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의식적으로 금기를 범했고 혀를 자르는 것은 금자(禁者!)다. 유족은 가련하고 추한 존재가 되며(계좌번호는 압권이다!) 금자는 '이드'의 사악함과 '자아'의 나약함 모두에 절망하는 '초-자아적' 영웅이 된다. 여기서 '칼의 노래'에서 김훈이 그리는 이순신이 떠오르는 것은 나 뿐일까...?

 

그러므로 이금자는 성공한 이우진이다. 이때 자식의 존재 여부는 중요한 차이점이다. 지난 번 글에서는 금자와 제니의 관계에 관해 다소 긍정적인 뉘앙스를 남겼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전혀 아니다. 금자는 오대수가 아니라 이우진이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오대수와 미도의 관계는 여전히 문제적이다. 오대수는 오이디푸스지만 미도는 안티고네가 아니기 때문이다) 제니는 초-자아적 영웅을 정당화해 주는 존재다. 먼 옛날 '조상'께서 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 대대손손 전해주는 동화적이고 신화적인 '나레이터'다. (따라서 이는 '낯설게 하기'하고는 거의 관계가 없을 것 같다) 이렇게 보면 마지막 장면의 '혀'는 아주 의미심장하다. 유족들의 혀는 잘리었고 이 히/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혀는 금자의 딸만이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금자가 처음부터 '친절한 금자씨'였던 것은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극단적 폭력과 잔혹을 단순히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문제가 될 때 특히 오대수처럼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단적으로 그렇게 해야 할 때 박찬욱의 대답은 실망스럽게도 홉스적인 것이었다. '공각기동대' 같은, 외양적으로는 '포스트모던'한 영화가 결국 로크적인 해결책('의식')으로 회귀했던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이번 영화에서 박찬욱의 실패는 그가 너무 친절하려 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역시 나는 '복수는 나의 것'의 박찬욱이 제일 맘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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