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속도와 시간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려니 그동안 참 일들이 많았었다는 생각이 든다.

 

1. 하늘의 속도

공부방을 너무 좋아하는 하늘은 방과후 교실은 절대 안 듣겠다고 했다.

오직 피아노, 피아노...

그러다 둘째언니가 준 바이올린 덕분에 바이올린까지..

피아노는 일주일에 5번 배우고 9만원인데 바이올린은 일주일에 2번 배우고 10만원이다.

돈도 돈이지만 너무 하는 게 많지 않나 싶었는데 하늘은 꼭 하고 싶다고... ㅜ.ㅜ

나중에 방과후교실에서 바이올린 할 때 해도 되지 않겠냐고 하는데도 꼭 하고 싶다고 재차 강조.

공부방 선생님께 여쭤보니 애가 그렇게 하고 싶어하면 하게 해주라고 하신다.

하늘은 집에 돌아오며 그 날 배운 것들을 뻐기며 가르쳐준다. 재밌게 배우면 좋겠지

 

그런데 2학기 방과후교실에서 원어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이제사 말인데 그건 너무 성급한 결정이었던 것같다.

학교에서 통신문이 오고 남편이 들어야할 것같다고 말하고

공부방 선생님께 여쭤보니 사실 하늘이네 학년 애들 다 영어학원 다니고있으니 해보라 하셨다.

하늘은 여전히 별로 하고 싶어하지 않았으나 이런 저런 설득 끝에 듣게 되었다.

그런데 듣고 싶다고 들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레벨테스트를 해서 빈 자리가 있는 반에 배정되는 거였다.

하늘은 시험이 있던 날 하늘이 전화를 했다.

 

하늘-엄마. 나 시험 안 봤어.

나-왜?

하늘-가니까 하나도 모르겠어서 선생님한테 저는 하나도 모르는데요 했어.

나-그러니까 그냥 가라고 하셨어?

하늘-아니. 그냥 a,b,c 뭐 그런 거 쓰는 거니까 해보라고 했어

나-그래서?

하늘-내가 그런 것도 전혀 모르잖아.

         그래서 내가 저는 그런 것 하나도 모르는데요 했더니 그냥 가래

 

기분 괜찮냐고 물었더니 괜찮다고 그러면서 그냥 공부방으로 갔다.

그냥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 다음주부터 수업 들으라는 문자가 왔다.

우리는 그냥 그 상태라도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수업이 시작되었다.

하늘은 피아노학원의 1학년 애가 같은 반에 있어서 끝나면 같이 올 수 있다고 좋아했다.

또 어떤 날 우연히 "영어수업 같이 듣는 애 중에서 너희 반은 없어?" 하고 물었더니

"2학년은 나 혼자야. 다 1학년이야" 하길래

괜찮냐고 물으니 괜찮다고 했다.

하늘의 새로운 면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참 애가 쿨하구나....뭐 그런.

 

하늘이 숙제 어렵다고 해서 도와주는데 단어를 몇 번씩 써가는 거였다.

아니 에이 비 씨도 모르는 애가...

아주 예전에 뻐꾸기 님이 늦게 시작하게 되면 엄마가 진도를 맞춰줘야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이런 건가 싶기도 하고. 

처음 선생님 말씀으로는 자기가 보충 다 해준다고 괜찮다고해서 걱정 안하고 있었는데...

남편하고 빨래를 개면서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얘기를 주고 받았는데..

그말을 들은 하늘이 말한다.

 

"애들은 다 영어로 말하는데 나는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앉아있기만 해. 나 그만 하고 싶어" 

나는 좀 놀랬다. 아니 그렇게 힘들었는데 왜 그동안 말을 안했어? 내가 무서웠어?

하늘이 말했다.

꼭 해야 되는 건 줄 알아서 참았지.

 

결국 어제 남편이 선생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계속 잘 해보겠다고 하셨다는데..

한 학기라는 시간을 보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같아서

열심히 잘 배워서 내년에 다시 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고 한다.

저녁에 공부방에 가보니 하늘은 홀가분한 얼굴로 안하게 되어서 좋다고했다.

우리가 많이 잘못한 것같다.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지난 일주일동안 하늘은 입도 뻥긋 못한 채 앉아있으면서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꼭 해야만 한다고해서 참았다는 아이한테 정말 미안하다..

 

 

2. 5초의 시간

아는 분이 암에 걸리셨다. 병원에서는 남은 시간을 말할 정도로 위중하시다. 

나는 작년에 그분과 함께 글쓰기 모임도 했고 참 좋아했던 분이었는데..

작년에 병원에서는 완치를 말했었는데...그리고 병원도 잘 다니셨는데 어떻게 재발이 되었는지

또 어떻게 시한부를 말하는지 정말 무섭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하다. 

 

어쨌든 가까운 이의 무거운 소식은 나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분도 무거웠고 또 걱정도 되었다.

나는 딸린 식구들이 많아서 건강해야 한다. 

앵두가 성인이 될 때까지는 건강하게 살아야한다.

그래서 건강검진을 하러 갔다. 

아침에 피를 뽑고 점심을 먹은 후 근처 병원에 암 검사를 하러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해보는 검사였다. 

진짜 이상한 검사였다.

 

가슴 한 쪽을 철판같은 걸로 꽉 누르고, 또다른 한쪽도 그렇게 누르고....

그리고 의사선생님이 초음파검사를 하셨다.

나한테 왜 병원에 왔냐고 해서 물같은 게 나와서 그렇다고 했다.

왼쪽을 검사할 때엔 말씀도 하시고 별 이상없네요 뭐 그러시더니  

오른쪽을 검사하실 땐 갑자기 입을 꽉 다무시고 사진만 찍으시는 거다.

그 순간, 돌이켜보면 5초 정도의 짧은 시간이었을 그 순간

머리 속으로 백만가지 생각은 지나간 것같다.

 

정감독 작업 돕기로했는데 그거 못하는 건가?

부산영화제에는 뭐라고 말해야 하지? 

하돌이랑 앵두 학교 들어가면 1년은 같이 다녀야 하는데....

남편은 재혼을 할 건가?

 

어쨌든 짧고도 긴 시간이 지나고 선생님이 별 이상은 없는 것같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원래 병원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여드렸다.

오랜 기침 때문에 먹던 약을 갖고 갔었는데 선생님은 약 이름들을 보시고서는

아무래도 그거때문인것 같다고 일단 약을 끊어보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한테 천식소인이 있으니 조심하라고... 특히 이번 독감에 주의하라고 말씀해주셨다.

 

긴 하루가 지나고 집에 돌아오면서 정말이지...

건강해야지, 건강해야 할텐데...하는 생각을 했다.

한강대교 앞에 서있는 전광판에는 어제 교통사고 사망자 0명, 부상자 00명이라는 글씨가 깜박였다. 

 

숫자로만, 신문기사 한 줄로만 처리되고 말지만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만큼 크고 복잡하다.

숫자 하나에 얼마나 많은 사연과 인연들이 얽혀있는건가.

 

신종플루로 돌아가신 분들도 그렇고

임진강 사고로 돌아가신 분들도 그렇고

그리고 용산....

여전히 영면하지 못한 채 그 곳에 계시는 분들과 가족들.

나처럼 이렇게 건강검진을 받으며 오늘을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하며 그렇게 차곡차곡 사셨을텐데.

임진강 사고의 아내인 듯한 분의 인터뷰를 보았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여기 제가 왜 이러고 있고 저 사람들은 왜 와서 인사를 하는지 정말 모르겠어요"

 

 

재택근무를 했다던 수자원공사 직원이 알고보니 서울에서 친구랑 당구를 쳤다라든지

새로이 바뀐 기계에 숫자 몇 개만 입력하면 작동했을텐데....라든지

황강댐에서 방류해도 2시간 반 정도 걸리니 경보만 울렸어도 모두 살 수 있었다라든지

그런 이야기를 듣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마지막 사진을 보면 자꾸 울컥해진다.

내 또래 어른들, 하늘 또래 아이....

수많은 인연과 시간들을 뒤로하고 떠나버린 사람들.

아직도 그 부재를 실감하지 못하는 유족들.

 

용산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무겁다.

회의 시간에 "우리가 지금 영화작업을 한다는 게 맞는 거냐?"한숨 쉬던 선배.

영화작업이 모두 끝난 한 사람의 동료만 매일 용산에 간다.

우리는 사무실에서 각자의 영화를 만들어야 하니까.

하지만 마음을 완전히 작업에 집중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몸을 그 곳으로 옮기지도 못하면서

밥을 먹고 농담을 하고 웃기도 하면서 그렇게 살아간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했었다.

학생 시절엔 이런 일이 생기면 민주광장에 모여서 항의집회를 하고

학교 한 바퀴를 돈 다음에 유인물을 챙겨 지하철을 타거나 버스를 탔었다.

종로나 남대문 시장에 가서 거기 있는 분들에게 유인물을 나눠 드렸다.

그럼 이제 나는 유인물을 나눠 드리는 기분으로

이 사이버 공간에서 열심히 글도 올리고 그래야겠다, 뭐 그런.

 

하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많은 것들을 안다.

<그것이 알고 싶다>나 <피디수첩>에서는 용산의 원인에 대해서 조목조목 잘 정리해서

나또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모르지 않는다는 거다.

그런데 왜 이리 세상은 조용할까?

이제 추석이 코 앞인데....겨울에서 봄, 봄에서 여름, 그리고 이제 가을까지 되어버렸는데

경찰은 용역들 말 잘 들으며 차근차근 몽땅 다 부숴버리고 뜯어버리고...

용역들은, 솜털 보송보송한 어린 얼굴의 용역들은,

노순택 사진가의 말처럼 재벌가 자식들은 전혀 하지 않을 용역일을 하면서

아주머니들을 끌어내고 때린다.

 

....................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무관심으로 변해가는 시간.

정말 무서운 것은 마음에 굳은 살이 박혀버리는 거다.

최초로 신종플루 사망자가 발생했을 때 깜짝 놀라며 오소소 돋았던 소름이

두 번째, 세 번째.... 그렇게 수를 더해갈수록 무뎌지는 것처럼

억울한 죽음들에 대해서 가슴아파하다 시간 속에 무뎌지며 그렇게 무관심해져버리는 것

그것은 지금 용산에도 가지 못하고 매일 저녁

따뜻한 밥상 앞에 앉는 내가 가장 피할 일인 것같다.

 

몇 가지 할 일을 찾아냈다.

1. 26일 전국 집중의 범국민 추모대회를 기억한다.

2. 10월 18일에 열릴 '용산 철거민 사망사건 국민법정'을 널리널리 알린다.

    기소인, 배심원 모집하는 일에 내가 힘을 실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알아본다.

 

막연한 분노가 스러지고 무뎌지기 전에

일상의 잔물결 안에 어떻 게 녹여낼 수 있을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