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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20

어제밤에 집에 도착해서 남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현재 진행하는 사업과 관련해서 4,700만원을 돌려줘야해서

계획을 대폭 수정해야한다는 말을 들었다.

아침에 엄마랑 거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어차피 돈은 잃는 거고 마음까지 상하면 우리만 손해" 비슷한 말로

걱정하는 엄마를 안심시켰다.

 

어차피 상황은 되돌릴 수 없는 거고  속상해하면 나만 손해.

이 말은 지금 나한테, 내가 백 번 넘게 하고 있는데도 도저히 마음이 진정이 안된다.

남의 일이라고 남편 일은 쉽게 말했는데

정작 나한테 비슷한 일이 벌어지니 속상하고 화나고 마음이 상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병원에 다녀오고  엄마를 일산에 모셔다드리고 점심을 먹고

눈이 저절로 감길만큼 피곤해서 한숨 자고 일어났는데

카메라가  고장난 것을 발견했다.

어제 집에 도착하자마 촬영본을 백업하고(요즘 카메라가 많이 불안하다)

걸리적거릴까봐 한쪽에 치워놓는다고 치워놓았는데

그게 하필 안마기 아래였고

남편이 안마기를 작동시키는 순간 카메라가 그 사이에 끼어서 부숴져버린 거다.

오늘은 정월대보름 대축제.

아이들의 연날리기, 풍등날리기, 쥐불놀이 등을 촬영해야 하는데

마을 사람들 다 모여서 노는 거기에서

도저히 표정관리가 안될 것같아서 못가고 혼자 집에 있다.

오늘 안 가면 두고두고 후회할 게 뻔한데

너무너무 속상해서 사람들 사이에 낄 엄두가 안나는 거다.

액수로만  따졌을 때  남편이 4,700만원을 잃은 거에 비하면 

내  카메라는 댈 것도  아니지.

카메라 본체는 80만원, 마이크가 239,000원.

카메라와 마이크가 결합된 부분이 망가졌다.

남편을 원망하다가 카메라를 거기에 둔 나를 원망하다가

카메라를 거기에 둘만큼 지쳐있던 나를 생각하다가

내가 왜 이렇게 지치도록 힘들게  살아야하는가를 또 생각하다가

마음이 온통 험해지고 있는 상태.

카메라가 한 세트 더 있지만 그 카메라도 상태가 좋지 못하다.

그러니까 남편은 그냥 안마기를 작동시켰을 뿐이지만

나는 오늘 중요한 촬영을 할 수가 없는 마음상태가 되어버렸고

카메라는 촬영이 가능한지도 모르는 상태가 되어버렸다.

하필 민감한 오디오 접합 부분이 카메라도, 마이크도 망가져버린 거다.

카메라와 마이크를 살펴보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이건 돈문제도 아니고  단순히  장비 문제도 아니고

그러니까 뭔가 내 중요한

중요한 뭔가가 부숴져버린 듯한 느낌이다.

 

나는 평소에 스스로에 대해서 물욕이 없다고 착각하곤 하지만

이럴 때 본색이 드러난다.

장비와 관련해서는 평정심이 와르르 무너진다.

몇년 전, 맥북프로를 사서 흠집이 안나게 조심조심 했었는데

맥북프로의 아랫면까지 조심하느라 천을 깔아두었다가 

미끄러져서  맥북프로  상단에 흠집이 난적이 있었다.

맥북프로가 미끄러지던 순간, 손을 내밀어 그걸 잡으려고 했는데

0.000001초 정도가 늦어서 맥북프로를 놓치던 그 순간.

그 순간이  무한반복되면서 나는 그냥 앓아누워버렸다.

물도, 밥도 안 먹고 누워있으려니까 학교에서 돌아온 애들이

엄마, 왜 그러고 있어?라고 물어서

내 맥북에 흠집이 생겨서 일어날 힘이 안나,

하니 한별이가 이렇게 저렇게 만져보더니

"켜지면 됐지. 괜찮아" 하고 위로해주었다.

그 후 며칠동안 맥북프로를 보는 게 고통스러웠는데

신기하게도 그렇게 조심조심하던 마음이 사라져서

뭔가 자유로움을 느끼긴 했다.

그걸 자유로움이라고 해야 하나 포기라고 해야 하나.

내 손에서 미끄러지던 맥북의 감촉, 그 찰나의 안타까움 때문에

마음이 무척 상했던 그 순간을 지나고나니

맥북을 보는 게 무덤덤해지고 그냥 맥북은 맥북이 되어버렸다. 

나의 뭔가가 아니게 되어버린 거다.

 

1999년에 북경에 갔을 때, 나는 그 때 방송국 알바로 모은 돈 400만원 중에

300만원을 들여서 생애 최초의 내 카메라를 마련했다.

이름도 쫄쫄이라 붙이고 스티커도  붙이면서 정말 애지중지했었는데

사무실 선배 K가 북경에 갈 때 그 카메라를 가지고 가자고 했다.

나는 그 때 카메라가 너무 아깝고 소중해서 고이 모셔두고 신주단지 모시듯 하고 있던 터였다.

K선배는 현재까지 나의 유일한 촬영감독이고

그 때에도 그 카메라를 골라주고 사줬던 분이다.

형이 나한테 "카메라는 쓰라고 있는 거니까 갖고 가자. 이번에 제대로 촬영도 해보고"

라고 해서 가져갔었다.

(케이스도 비싼 하드 케이스를 샀으니 중국에  간다고 별 일 있겠어? 하며)

사실 우리 작업의 메인촬영은 K선배였는데

그 당시 중국에는 업무용카메라 반입이 안되어서

우리한테 작업을 의뢰한 오비스 사장은

CCTV의 샤PD를 거액을 들여 고용했고

그래서 외견상 메인촬영감독은 샤피디인 듯했다.

(그래야 촬영이 허가가 된다고 해서)

나의 첫 카메라 TRV-900은 그당시 최고의 카메라였기 때문에

외형은 홈비디오같이 작았지만 업무용 카메라로도 손색이 없었다.

그렇게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이 되었다.

촬영막바지에 중국정부에서 화재진압용 사다리를 빌려서

창평성 전체를 조망하는 촬영을 할 일이 있었다.

촬영을 다 끝내고 내려왔는데

내 카메라를 목에 걸고  있던 K선배가 넘어지면서

카메라에 1cm정도의 흠집이 났다.

그 후 한달동안 나는 K선배랑 말을 안했다.

내가 작가라서 대화가 많이 필요했는데

그 때 마음이 얼마나 꽁꽁 얼어붙었는지

어떠한 마음의 동요도 없이 

업무용 말만 하고 지내는 데에도 아무런 불편함이 없었다.

(K선배는 불편했겠지.)

그 후 사무실에서 장비에 대한 내 집착이 소문이 나서

아무도 내 카메라를 안빌렸다는.

 

남편은 내가 이런 사람인지 모르나?

암튼 부서져버린 카메라를 살펴보다가

그냥 누워버린 나를 보더니

남편은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피곤하면 좀더  자다 올래? 좀있다 와" 했다.

한별과 은별은 남편이 나간 후 다시 카메라를 살펴보는 내 옆에 와서

"엄마 괜찮아? 엄마 나중에 올거지?"라고 물었고

나는 아주 건조한 목소리로 "안가" 하고 누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애들도 마음이 불편할 거다.

내가 이러면 안되는데

지금 마음을 잡지 못하면

두고두고 후회할텐데.

지금 마음을 추스리지 못하면

아마 평생 후회할텐데.

 

남의 일이라고 남편 말은 쉽게 했는데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상황이 그렇게 되었는데 마음까지 상하면 우리 손해니까

마음 굳게 먹고 이 상황을 잘 돌파하자"라고

남편을 위로했던 게 오늘 새벽 2시였는데

15시간이 지난 지금 

나는 지금 나한테 그 말을 못하고 있는 거다.

나라는 인간은 정말 신기한 인간인 듯.

자기애가 지나치게 투철하다.

나도 이런 나를 좋아하기는 힘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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