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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글들

** 기록이 기억을 지배하는데 그 기록들이 없어지면.....?

1999년 09월 03일 08시 51분 32초

요즘 내게 낙이 있다면 푸른영상 게시판의 글들을 보는 것.

가끔 PD들이 사주는 술을 마시기도 하지만

푸른영상 자유 게시판에 주저리는 맛에 비할 바가 아니지. ^^

갑자기 먹통이 되어버린 게시판.

말들은 정착할 곳을 잃고 떠돌았다. 

새로이 자유게시판이 열렸는데도......

낯가림. 몇번을 들락거리다 이런 거 주저린다. 

 

나는 변해간다

옛날에 방송국 밖에선 왜 방송국 사람들은 그렇게 불친절하게

전화를 받을까 그런 생각을 했는데

시한부로 방송국사람이 된 지금, 

그리고 방금 나도 그래버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꼭 우리 자리에 걸려오는 전화들은

우리 전화보다 다른 팀 전화가 많은데

우린 같은 팀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을 해도

나를 붙잡고 뭐라뭐라 그런다.

얘기를 들어주다보면 끝이 없게 되고

그래서 이리저리 끊을 방법만 생각하게 되는데...

 

얼마 전에는 MBC스페셜의 '신창원은 있다'에 인터뷰한 사람인 것 같은데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 안하면 어떻게 하냐고 막 항의를 했다.

나는 같은 팀이 아니라고 30분 쯤 있다가 전화하라고 하는데

나를 붙잡고 막 화를 냈다.

그리고 또 얼마 전에는 '고려장'이라는 프로그램을 본 어떤 사람이

또 전화를 해서 왜 프로그램이 잘못되었나에 대해서

아주 긴 강의를 하는데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내가 같은 팀이 아니기 때문에

좀있다 전화하라고 했는데도 같은 MBC사람으로서 들어야 한다고

그런 친절(?)어린 배려 속에서 막 강의를 했다.

 

방금 또 그런 전화가 왔다.

오늘 방영될 '임수경' 프로그램과 관련해서

자료를 줄 게 있다는 전화.

난 담당자 전화번호를 가르쳐줬는데

전화가 안된다고 나한테 또 전화를 했다.

나보고 어쩌란 말인지.

계속 통화중이란다.

계속 전화해보시라는 내 말에

그 사람은 "이게 얼마나 중요한 자료인데 필요없나보죠?" 하며

화를 내며 끊었다. 그래서 나도 막 화나려고 한다.

 

이틀 전에 택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비디오방보다 더 조그만 편집실방에

PD랑 같이 있었는데 

헤어지면서 PD는

"너 어디로 새지 말고 집에 가. 내일 일찍 와서 일해"라며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마도 택진이와 나의 통화내용을 들었나보다.

못 듣기가 어렵지. 그 조그만 방안에서...)

 

하루종일 편집실에만 있다.

가끔은 같이, 주로 나 혼자.

열심히 붙여놓은 걸 보며

우리 PD는 가끔 칭찬. 그리고 주로는 불평을 한다.

 

그래서 살아가는 일이 별로 재미없다.

 

조금 기쁜 일 하나.

며칠 전에 돈 천원을 주웠다.

설날 세뱃돈으로 받은 6만 5천원이라는 돈을

지갑째 홀라당 잃어버린 후로

항상 집에갈 때면 땅만 보고 다녔는데

거의 7개월만의 노력이 성과를 본 것이다.

앞으로 6만 4천원만 더 주우면 된다.

 

즐거운 하루가 되시길 ^.^


1999년 09월 07일 13시 37분 24초

2주일간의 편집이 끝났다. 

편집이라고 말하기가 힘든,

구성안에 따라 OK컷을 느슨하게 붙이는 식의

OK컷 모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나는 편집실에서 계속 붙어있었으므로

편집이 끝났다고 말하고 싶다.

 

토요일 5시. 메인언니가 와서 나와 우리PD가 붙인 그림을 보았다.

정확히 말하면 5시 30분 정도부터 10시까지

나는 깨질대로 깨져가며 그 시간을 버텼다.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했다.

 

마지막엔 " 넌 편집도 안해봤냐?" 그래서

"그림을 모은 것 뿐이다"는 내 말에

"그럼 그동안 뭐했냐?"며 짜증을 냈다.

뭘 했냐고? 그림을 모았다.

100개의 촬영본 속에서

잘 찍힌 그림과, 쓸 말을 고르고

같은 질문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말을

한 모둠에 붙이고

가능한한 연출이 편집을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다.

그리고..

한번도 제대로 그림을 본 적이 없다고 생각되는 메인 작가를 위해

자료를 본 후에 작성한 가구성안과

촬영본을 본 후에 작성한 본구성안이 다를 바 없는

현재의 상황이 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림을 모았다.

메인작가와 연출이, 상상하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여지를

카메라의 눈으로 전개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나에게 편집의 기본을 말하는 작가의 태도나

생각을 같이 모으며 그림을 붙였던, 우리 연출의 침묵이

나를 슬프게 했다. 아니 슬프다기 보다는 나는... 원망스러웠다.

비가 올 듯이 젖은 공기 속에서,

MBC 앞 아파트 뒷편의 텅빈 공터에서

나는 후배 정남이에게 전화를 걸며 하소연을 했다.

나를 위로해주기에 그는 너무 멀리 있었고

전화기 상태는 너무 나빴다.

 

푸른영상의 전화는 대답이 없었고

나는 텅빈 거리에서

텅빈 집처럼 멍하게 서있었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집에 들어갈 수는 없었다.

엄마는 분명히 걱정을 할 것이고, 그리고 묻겠지.

대답을 하지 않으면 엄마는 쓸쓸해하실 것이고,

그리고 대답을 하면... 엄마는 화를 내실 것이다.

내 딸이 그런 일을 당하다니... 나보다 더 억울해하시며.

 

버스는 오지 않았고... 아니 버스를 보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갈 곳이 없었다. 푸른영상 열쇠를 잃어버린지는 오래 전 일이니까.

옛날엔 갈 곳이 없으면 푸른영상 옆방, 내가 침실이라고 부르는 그 곳에서

나는 잠을 잤다. 땀을 흘리면서.

다시 한 번 전화를 하니... 강길이형이 받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어제까지

꼬박 2박3일을 나는 푸른영상에서 보냈다.

 

애써 밝은 목소리로 엄마에게 일이 많아서 못 들어간다는 전화를 드리고

나는 푸른영상에 있었다. 

내 몸엔... 물기가 너무 많다.

끊임없이 주저리고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강길이형이 사주는 맥주를 마시고

상엽이가 싸온 도시락을 먹고

그리고...택진이가 만들어주는 호박고추범벅을 먹었다.

 

그리고 나는 지금 행복하다.

 

내가 선 자리엔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푸른영상이 같이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렇게 원했던

영상을 통해 세상을 말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다.

 

강물같은 잔잔함을 항상 꿈꾸는 나이지만

나는 스스로가 얕은 시내임을 잘 안다.

살아가는 일이 절대 평탄하지 않다는 것도,

그리고 내가 변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넘어질 일은 없겠지.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그렇게 문제가 없을 나.

그것이 내가 선 자리이다.

 

나는 이 곳 MBC에서

씩씩하게 <조봉암>과 <코리아게이트>를 만들 것이다.

그것이 가장 일차적인 목표이다.

내가 이 곳에 머무는 이유.

그것을 수정하지 않겠다.

내가 설 자리는 내가 선택한다.

그 곳이 불합리하고 관료적이라 하더라도

거칠다 하더라도

나는 스스로를 낮춰가며,

그래 때로 모멸감을 느껴서 끝없이 눈물을 흘릴지라도

나는 프로그램을 완성할 것이다.

 

그것이 내가 선 자리이다.

 

주저림을 들어준 감독님과, 강길형과, 상엽이와, 경화와, 택진이와

그 모든 시간에 함께 해준

주홍색 낡은 쇼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안녕. 

내 자리야, 그리고 내 사람들아.

안녕. 씩씩하게 잘 지낼께요.

 

 

1999년 09월 07일 14시 26분 46초

<행당동사람들 2- 또 하나의 세상>을 보았다

마지막 장면, 아이 둘이 앉아 조개를 먹는 그 장면을

나는 정확히 15번을 보았다.

죠그셔틀을 돌려 찾아가며 보고,또 보았다. 

'우리들의 소풍에 당신들을 초대합니다'라는

그 멘트를 나는 그렇게 15번을 들었다.

 

영화를 보는데 눈물이 났다.

나는 그 시간들로부터 얼마나 멀어져있는가.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던, 아니 없다고 생각했던

20대 초반의 그 시절.

청량리 철거촌의 무너져가는 집들

그 곳 한 구석의 대책위원회.

그 곳에서 라면을 끓여먹으며 우린,

새벽이면 규찰을 돌았다. 쇠파이프 소리를 내면서.

가끔씩 경찰이 쳐들어올 거라는 소식을 듣는 날이면

우리는 밤을 새웠고

아침이면 꽃병 던지는 연습을 했다. 꽃병...

 

그리고 나는 그 곳을 잊었다.

 

아니, 가끔 생각이 난다.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에 서면 맞은편에 13단지가 보이니까.

13단지.

내가 미래를 두려워할 때 그 곳은 그 두려움을 더 크게 만들었던...

그런 곳이다. 

 

어느날 내가 살던 하안동, 장미덩굴이 유일한 경계였던

평화롭던 그 마을이, 우리 8단지가

공사로 분주해졌다. 

장미덩굴 대신에 붉은색 벽돌담을 만들기 시작했다.

 

왜??

궁금한 내 질문에 새언니는

맞은편 13단지 애들의 불량스러움 때문이라고.

밤이면 놀이터에 와서 술을 마시고

본드를 분다는 것이다.

교육상, 8단지 주민들은 붉은 담을 치고

경비원 수를 늘렸다.

중산층의 안락하고 고운 생활을 위해서.

 

13단지는 말하자면 임대주택이다.

임대주택은...당시 청량리 철거투쟁의 목표였다.

내가 살고 있던 광명 하안동에도

철거투쟁은 벌어졌었고

(언젠가 본 도시빈민의 역사라는 책에서 언급할 정도로

광명은... 철거투쟁이 힘있게 전개된 곳이었다)

그렇게 13단지는 우리 집 앞에 자리잡았다.

 

나는 그 때 학교를 졸업하고 새로운 생활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로운 생활이란, 말하자면... 후후

직업을 갖는 것이었다. 취직공부해서 갖는 직업이 아니라

학교 다닐 때 많이 말하고 말해지던

우리가 말하기를 역사의 주인이라고 부르는

노동자가 되려는 그런 준비였다.

몇 번의 시도 끝에 현실화를 앞두고 있었던

바로 그 때.

하지만 나는...너무 많이 지쳐있었고

미래에 대한 극심한 불안에 빠져있었다.

말하자면... '맛이 간' 상태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눈맑은 우리 류승찬이나 우리 류승은을 보면

나는 욕심이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집에 살다가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스러운 아이는

장미꽃같은 고운 입술로 내게

"엄마"라고 그렇게 부르는 것이지.

그 꿈을 나는 한 번도 잊지 않았다.

 

내가 두려웠던 것.

그것은 내가 선택할 미래가 전혀 안락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 귀여운 아이들은

가난에 찌든 엄마의 보살핌도 받지 못한 채

그렇게 본드를 불거나 술을 마시지 않을까.

난 그 때 왜 그렇게 미래에 대해서 주눅이 들어있었을까.

 

그렇게 난 청량리를, 철거투쟁을 잊었다.

그것이 정리하지 못한 나의 과거이다.

노동자집회에 가거나, 봉천동에 가면

노동자뉴스제작단이나 푸른영상의 영화들을 보면

나는 항상 가슴 한 구석이 쓰라렸다.

 

그리고 생각을 했었다.

나는 지금 그 시간들로부터 너무 멀리

너무나 멀리 떠나와 버린 것은 아닌지.

내가 선 자리는 너무나도 많이 변해있는 것은 아닌지.

 

그런데...

그런데 말이죠

지금은 약간의 자신이 생깁니다.

<또 하나의 세상>에 나오는 그런 사람들처럼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살 자신이 조금씩 생겨요.

 

난 돈만 벌어본 적도 있고

돈 많은 남자와 사귀어본적도 있고 (히히)

아무 생각없이 방탕하게 놀아본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단풍이 곱게 물든 아파트 광장에서

결고운 햇살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는 조카를 돌보다가

난 이 생활을 절대 포기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몇 번의 방황 속에서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일을 하게 된 나는

지금이 어느 때보다도 행복합니다.

동강에서 고추를 따거나 

태일형과 함께 양심수 선생님들을 뵐 때

그리고 시사회 뒷풀이를 할 때,

가끔씩 푸른영상 사람들과 술을 마실 때

나는 이렇게 살아가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태일형네나 은정언니네, 감독님네 살아가는 방식을

많이 알고 싶어합니다.

알고보면 나라는 사람도 가난을 그렇게 모르지만은 않는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은 엄마의 품안에서

오빠의 보살핌을 받으며

언니들이나 형부들이 주시는 용돈에 기뻐하는 미숙아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좀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욕구를 조절하고 생활을 계획하며

그렇게 미래를 준비한다면

그리고 그런 사람들 속에 함께 있다면

적어도 힘들어서 포기하는 일은 없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또 하나의 세상>에 나오는

그렇게 조개를 나눠먹을 줄 아는

그렇게 해맑은 웃음을 지을 줄 아는

그런 아이의 엄마가 되어서요. ^^

 

1999년 09월 14일 18시 52분 13초

전 잘 지냅니다.

이번 일요일에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첫번째 프로그램, 제주 4.3이 방영되었습니다.

다들 보셨는지 모르겠군요.

전 모처럼 쉬는 휴일이라 집에서 낮잠, 밤잠 다 자고

11시 쯤에 일어나 밤참 먹고 그러고서 보았습니다.

프로그램이 시작이 되어서

무척 바빠졌습니다.

 

보통 예고는 AD들이 만드는데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언제 그런 걸 해봤겠어요?

오늘 CG를 맡기고서

하루 종일 생각을 해봐도

별로 좋은 생각이 나지는 않는군요.

 

몇가지 안을 내놨지만

우리 PD는 맘에 안든다고 하고...

그래서 고민입니다.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해도 안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요즘은 글 올리기가 힘이 듭니다.

그냥 안부 인사나 올리지... 하다가도

멍해집니다.

마음을 들여다보는 짓을 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그냥 미끄러지듯이 살아가고 싶어요.

코리아게이트가 11월 첫째주에 방영된대요.

11월 첫째주까지 이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어제는 팔찌를 잃어버렸어요.

저는 팔찌를 좋아하거든요.

저희 새언니가 스승의 날 선물 받았다고

아줌마 하기엔 좀 그렇다고 제게 주신 건데요.

그거 받고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그동안 두 번을 그렇게 잃어버렸는데

이번에도 역시 팔찌는 내 몸처럼 그렇게 있다가

갑자기 허전해져서 정신을 차리면 없어져있는...

항상 팔찌는 그런 식으로 사라지더군요.

사람에 마음을 담는 것이 애정이라면

물건에 마음을 담는 것은 애착이라고 한다더군요.

저는 그 팔찌에 애착이 있었어요.

 

작은 구슬처럼 알알이 늘어져있는

금빛의 가는 끈을

우울할때면

염주를 돌리듯 돌리면서

시름을 잊곤 했으니까요.

어제 메인언니가 와서 회의를 했는데

회의를 하기 위해 갔던 로비, 화장실, 그리고 편집실

그 세 곳을 몇번을 돌며 팔찌를 찾았지만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울해졌어요.

 

작은 일에 기뻐하지는 않으면서

작은 일에 슬퍼하게 되는군요.

 

잘들 지내세요.

안녕.

 

 

1999년 09월 19일 16시 09분 38초

차가운 물에 샤워를 하고 싶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기에는

너무 쳐져있어서.

 

이들 동안 밤을 새우고

잠깐 쉬는 틈을 타서

목욕탕에 갔지만 문이 닫혀있었다.

우산도 없는데 굵은 빗줄기는

옷을 적시고...

 

돌아와 발을 닦고

로비 구석의 빈 의자에 몸을 누였지만

나무가 자꾸 몸에 배겼다.

모기에 물리며 

끈끈한 잠을 잠깐 잤더니 몸이 으슬으슬 춥다.

씻고서 침대에 눕지 못한다면

뽀송뽀송한 양말이라도 신고 싶다.

 

푸른영상 사람들은 지금도 강촌에 있을까.

강촌은 너무 멀리 있는 것같다.

푸른영상이 있는 신대방동 사무실도 지금은

너무 멀리 있는 것같다.

 

사람들 속에 있고 싶다.

이런 거 말고 내가 살아왔던 그런 방식으로

편안하게 사람들을 만나고 싶다.

뭔가를 말하는 것은 변명이 되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미련한 것이 되는

이런 비정상적인, 신경질적인 관계가 아니라

편안하게 대화를 하고 싶다. 

 

엄마랑 나란히 누워 조근조근 이야기를 하고 싶다.

엄마랑 얘기해본지가 한 달이 넘어간다.

집에 가면 자기에 바쁘니까.

일주일 전쯤에 집에서 나올 때

엄마는 튀긴 옥수수를 한봉지 싸주시면서

틈틈히 먹으라고...

아마 그런 것이 유일한 대화인 것같다.

엄마가 내게 다가올 시간이 없다. 나 또한..

 

그리고 무엇보다...

동강에 가고 싶다.

가서 할머니랑 마늘을 까서 반찬도 만들고

고추를 따고, 밤에 투망 던져 작은 물고기를 잡고

그리고 마당에 숯불을 펴고 

경월소주를 마시고 싶다.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맑은 별빛 아래서.

 

정말

동강에...너무 가고 싶다.

1999년 10월 07일 01시 38분 30초

문득 훔쳐본 경화의 말엔 "삶의 이유, 그것은 외롭지 않는 것"

딱 그 말은 아니지만 그런 비슷한 말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그 말이 참 좋다.

 

한동안 정호승시인의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을 끼고 살았다.

편집실에서 밤을 새우다 일이 잘 안될 때

버스에 자리가 났을 때, 그리고 가끔 쉬는 휴일에 멍해졌을 때

자꾸 자꾸 그 시집을 읽었다.

MBC에 있는 동안 가장 많이 되뇌었던 말도 바로 그 말이었다.

외롭다고 느꼈던 것같다.

너무 지쳤을 땐 푸른영상을 찾긴 했지만

그런 반복은 피해야할 일이었으니까.

 

푸른영상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하고 나서,

그리고 완성까지의 7일은 아마 내 생애 가장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PD의 냉담함,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막바지 작업,막막함...

그리고... 금요일 7시에 완성하고 대본을 심의실에 넘기고 부슬부슬 

비오는 거리를 걸어 MBC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또 외롭다고 느꼈다.

그리고 혼잣말을 했지. "외로우니까... 그러니까 사람이야..."

 

그런데 그 뒤로 참 기분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다.

선배 AD들이 내게 술을 사준다고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PD가 또 저녁을 같이 먹자고 기다리고 있었다.

영상1부의 선배도,

그리고 한 번의 촬영을 같이 나갔을 뿐이지만 따뜻함을 느꼈던 어떤 사람도.

 

결국 나는 PD랑 저녁을 먹으러 갔고

기다리던 선배 AD들과 영상1부의 선배는 집으로, 당구장으로 흩어져갔다.

비는 계속 부슬부슬 내렸지만

그 사람들의 마음이 고마워 나는 외로운 줄 몰랐다.

일요일, 푸른영상 사람들과 함께 했던 밤샘파티도 신이 났고

친구들의 안부 전화,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사람들의 배려들.

 

'정산'이라는 게 있다.

푸른영상 총무를 역임했다는 과거에 자신감을 가졌고

그동안 두 번 정도 해봐서 만만하게 보았었는데

프로그램 끝나고 하는 정산은 장난이 아니었다.

10월 4일 자로 확실히 MBC를 떠나서

푸른영상으로 출근할 수 있을 거라는 내 자신감은

갑자기 날아가버리고, 나는 수요일 10시까지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나의 후임이면서 선배AD인 하선호라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

오늘 밤에나마 끝냈다.

 

처음 그 선배가 내게 그랬었다. "류미례, 여기는 학교가 아니다..."

막판 후반 작업을 할 때 나는 CG, 슈퍼(자막을 이렇게 부르더군요), 핸리(이건 특수영상이라고...), 더빙, 종합편집실....그런 수많은 방들을 들락거리며 정말 심하게 좌절했었다. 그 모든 고개에 선배들은 하나하나 가르쳐

주지는 않았지만(왜냐하면 그들도 심하게 바쁘니까)

"처음이니까 그래"라며 다독거리기도 하고(너무 심한 좌절은 피하도록)

"여긴 학교가 아냐"라며 내 무능을 꼬집기도 했다.(안주하지 않도록)

나는 외롭지는 않았던 것같다.

 

정산을 하고 테이프를 넘기고, 그리고 이 새벽 나는 마지막으로 

출연자들에게 줄 테이프를 복사하고 있다. 

내일이면 확실하게 MBC를 떠날 것이고

아마 나는 한동안 이 곳을 생각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내게 말을 주었던 선배들, 그 사람들의 마음을 기억하고 싶다. 

추석 다음날 나를 위해 출근을 했던 CG실의 어떤 차장님,

같은 CG를 세 번 만들며 "저 때문에 댁에 못 들어가시네요" 하며

미안해 하는 내게 "집이 중요한가? 일이 중요하지"라며 쌀쌀맞게 말하던 종합편집실 선배의 기분좋은 장인정신.

10권이 넘는 방대한 양의 자료를 한숨을 쉬면서도 찍어주었던 카메라맨들의 끈기. 

무능에 절망하지 않게, 타성에 길들여지지 않게 말들을 주었던 선배AD들.

셀 수 없이 많은 그들의 말과 마음들이 가슴에 남았다.

 

어디에 가도 외롭지만은 않은 것같다.

그것은 외로움에 대해서 자신의 몫으로 인정할 때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나, 조금 배운 것같다.

사람에게 기대고, 마음 약하고, 눈물많았던 내게

그들은 세상 속에서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아주 다른 말로,

그렇지만 진지하게 말해주고 싶어했다.

그 사람들의 고마움이 가슴에 남는다.

 

오늘 몇 사람의 선배를 만나서 말했다.

(생각해보면 나는 낯간지러운 말을 참 잘하는 것같다)

열심히 잘 살겠습니다.

외롭지 않았던 4개월이었습니다.

다시 힘있는 모습으로 만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떤 선배는 쑥스러워하며

또 어떤 선배는 "오바치지 마" 하며 퉁명스러움으로

내 말들을 받았다. 하하

 

이제 나는 푸른영상으로 돌아간다.

6개의 서랍이 있는 커다란 책상을 나 혼자 쓰며

배가 고프면 밥을 해먹고, 라면을 끓여먹기도 하고,

설겆이하기 가위바위보도 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지내겠지.

은미언니 말처럼 좋은 사람과, 믿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큼

행복한 것도 없더라.

지치지않고 끈질기게...

들뜨지않고 치열하게...

그렇게 남은 20대를 보내겠다.

(나, 내년이면 서른인데... )

 

좋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할 수 있어서 기쁘다. 


1999년 10월 11일 03시 28분 02초

요즘에 못난이 프로젝트라는 걸 하고 있는데요

저랑 감독님이랑 둘이서

도시빈민의 역사에 대한 15분짜리 영상물 만드는 겁니다.

부마항쟁 기념관에서 상영되는 건데요

원래 두 개.

감독님 혼자 다 하시는 건 

바닥에 깔리는 영상물이래요.

부마항쟁을 주제로 하는 거라는데

5분인가 10분짜리 뮤직 비디오구요

 

못난이 프로젝트는

거기 오는 관람객들에게 상영되는 거랍니다.

처음에 감독님은 제게 못난이 편집 구성안을 열심히 짜라고 하시고

(아마 저를 믿었던 것같아요. 믿는 도끼가 된 미례...)

그래서 저는 막 했는데

어제 결혼식에 갔다가 또 국사봉 영상제에 갔다가

늦게 오시는 감독님을 막 기다리다가

보여드렸는데 감독님 말씀이

 

1. 드라이하게

2. 객관적으로

3. 멋을 빼고

4. 전문용어도 좀 쓰고

그렇게 요청을 하셨습니다.

 

거기에 첨가하시는 부탁이

1. 감독님 냄새도 좀 나고

2. 멋도 좀 있고

3. 대한뉴스처럼

이었는데요

 

이해가 되는 건 '전문용어도 좀 쓰고'라는 부분이라서

<도시와 빈곤>이라는 잡지를 거의 베끼다시피 하며

다시 썼습니다. 

음 어찌어찌하여 완성을 하고

지금 감독님은 뮤직비디오 만들고 계셔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기다리고 있다가

잠깐 글을 씁니다.

 

음..그런데 할말이 별로 없군요.

그냥 기분이 좋네요.

후배 정남이가 며칠전에 왔었는데

그래서 술잔치 벌였는데

저는 거기에도 안가고 일을 했습니다.

(놀라운 일이지요)

 

14일에 부산에 갖고 내려가신다는데

편집 구성안을 제대로 못짜서

감독님 뮤직 비디오 끝나면

나레이션만 가지고 편집을 하셔야 할 거 같아서

조금 미안해요.

 

참 그렇더라구요.

MBC에서 물쓰듯 자료를 쓰다가

편집하시는 등너머로 보다보면

꼭 필요한 CUT 없어서 안타까워하시는 걸 보면

MBC를 습격해서 자료를 가져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뭐 제가 이런 시간에 자료실에 가면

자료실 아저씨가 항상 그렇듯이

츄리닝을 입고 졸리운 눈을 부비며

"이 아줌마가 또 새벽에 왔네!"라며

호통을 치시겠지요.

그래서 그림의 떡 보듯이

MBC에서 봤던 자료그림들을 그리워합니다.

 

그렇지만~!!

좋은 영상물이 나오겠지요.

나중에 부마항쟁기념관에 가시면

바닥에서 흐르는 영상물

열심히 봐주세요.

그리고 상영관에서 하는 것도요.

 

건강한 날들 되시길.

 

 


1999년 10월 14일 21시 21분 35초

나는 말이 빠르다.

내가 말이 빠른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머리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이 깜박깜박 한다.

그래서 그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을

글이나, 말로 일단 뱉어놓고,

그렇게 나 외에 누군가, 혹은 무언가(종이나 게시판 같은 것)에

자국을 남기면 나중에 두고 볼 수 있으니까.

사실 이렇게 생각해서 말이 빠른 건 아니고

나는 왜 말이 빠를까를 생각하다가 생각해낸 말이다(말이 꼬이는군...)

 

또 있다.

나는 비염이 있어서 코로 숨을 잘 못쉰다. 

냄새도 잘 못맡는다.

가끔씩 이비인후과에 가서 치료를 받은 다음의 한 시간은

정말 행복하다.

"코로 숨쉬니까 좋다"라는 약 광고를 나는 200% 공감한다.

숨을 잘 못쉬기 때문에 한 숨에 가능한한 말을 많이 하는 것같다.

 

또 있다.

나는 말을 하는 게 좋다.

왜냐하면 항상, 모든 장소에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곳에서는 한 마디 말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입을 닫는 것은 마음을 닫는 것과 비슷하다.

물론 입을 열었다고 마음을 항상 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낯을 가리기도 하고

그리고 말을 많이 하지 않는 것이

중간은 간다는 것은 알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이 있거나

어느 자리에서 소통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내가 말을 할 때에는

그 자리를 내가 좋아한다는 것이고

혹은 그 사람과 있는 게 편하다는 뜻이다.

 

어쨌든 나는 말이 빠르다.

대학시절 친구는 내게

"류미례, 말이 빠르면 그 사람이 신의가 없어 보인다"

라며 내가 말을 하면 "천천히, 천천히..."라고 

주문을 외우듯 타일렀다.

그 친구 이름은 미정이었는데

우리 언니 이름이랑 같았다.

그 아이는 언니처럼 나를 돌봤었다. (갑자기 그리워지는군)

 

말이 빨라서 좋지 않은 경우는 많이 있는데

오늘 못난이 프로젝트 더빙 날인데

나레이션을 너무 많이 써버린 것 같다.

음... 천천히 읽으면서 시간을 맞췄는데

나레이터 언니 말이

일반 사람이 하는 말이랑

나레이션 하면서하는 말이랑은

시간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였다.

그리고...어쨌든 평소 말이 빠른 나의 습성이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인 것같다.

 

즉석에서 나레이션을 고치는 감독님의 순발력을 당할 수도 없고

자꾸 미안해져서 지금 이렇게 땡땡이 치고 있다.

이제 들어가봐야지.
1999년 10월 21일 09시 38분 37초

나는 다큐 0.7 워크숍 1기 수강생이다.

2기가 있는지 그 뒤로 진행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

아마 우리로서 끝난 것으로 알고있다.

그 뒤로 강좌가 진행되었다는 얘기를 들은 바가 없으니까.

어쨌든 나는 다큐 0.7 워크숍 1기수강생이다.

어제... 그 때 같이 있었던 사람들을 만났다.

2년 만이었다.

 

96년이었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람에게는 자기방어기제가 있어서

상처는, 감당하기 힘든 상처는 잊는다고 하더라.

내게는 24살부터 26살까지, 그 2년 동안의 기억은 없다.

친구가 가끔 그때 얘기를 하면 나는 묻는다. "내가 그때 그랬단 말이야?"

...기억이 없다. 내가 아끼고 사랑했던 286컴퓨터에...

bak화일에 남아있는 낙서 몇 개로 나는 그때를 기억할 뿐이다.

 

대학을 5년 반을 다니고

94년에 졸업을 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살아갈 길을 잃었다.

어느 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나 이제 하고 싶은 일이 없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24살, 좋은 나이였는데

나는 그 때 생각했다.

앞으로 내게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없을 것 같다...

나는 말없는 사람이 되어서 세상으로부터 격리된 채 살아갈 것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난 스스로를 격리시켰다.

그 2년 동안 나는 안암동엔 절대 가지 않았다.

친구? 선배? 나는 과거로부터 나를 차단시켰다.

그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냥 사는 거야...아무 생각없이.

 

 

우리 엄마는 처음에 말을 못하다가... 울었다.

학교에 다닐 때 나는 엄마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살았다.

엄마는 내게 그런 말도 했었다.

"너, 나 죽으면 울지 마라. 

이렇게 내 가슴을 찢어놓고, 나중에 나 죽은 다음에 너 와서 울면

내가 죽어서라도 일어나서 니 머리를 칠거다... "

학교를 그만 두겠다고 난리를 치고

엄마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았던 그 5년 반 동안

엄마는 나때문에 많이 속상해했었다.

 

그런데... 그 때 알았다.

엄마가 정말 힘들어했던 건

엄마가 바라는 대로 살지 않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근거를 잃고 헤매는... 그런 나의 모습이었다.

 

그 때, 식탁에 앉아있었던 엄마, 오빠, 동생...

애써 내게 말했다.

아니야, 뭔가 있을거야. 잘 생각해봐. 너는 그런 애가 아니었잖아...

누군가는 결혼을 얘기하고, 또 누군가는 대학원을 얘기하고...

그리고 그 때 울던 엄마가 말했다.

유학을 가라.

다시... 새로 시작을 해라. 새로운 공간에서...다시 시작을 해라.

뭔가 하고 싶은 일이 있을 거다...

너 음악 좋아하지, 소설이나 시 읽는 거 좋아하지,

그리고...영화 좋아하잖아.

그 중에 뭔가를 하나 하면 될거다...

 

러시아. 모스크바 국립영화학교 던가...

러시아에 있는 언니는 9월에 개강하는 그 학교의 커리큘럼을 보내왔고

나는 러시아어를 배운다며 학원을 알아보았었다.

그리고... 다큐 0.7 강좌를 들었다.

단지 4명 뿐이니까... 잘 배울 수 있을거다...

유학을 준비하는 그 몇 개월 동안. 잘 배워야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박기복 감독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안만희 선생님에게 감사한다.

그 두사람은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두사람을 만나...

지금 이렇게 이 땅에서 살고 있다.

'가난한 영화 다큐 0.7'

지금도 가지고 있는 그들의 명함에는 이름 앞에 그렇게 써있다.

 

나는 그 두사람을 만나

다큐멘터리를 알았다.

다큐멘터리는 내게 구원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때 그 동창생들을 만나

옛날을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부럽다고 했다. 너만 남았네, 쓸쓸해 하며.

나는 그게 이해가 된다고 말했다.

왜냐하면...나는 푸른영상에 있으니까.

 

이제는 은행 전산실에 근무하는, 그 때 동창이었던 언니에게

나는 물었다. 

다큐는....이제 접었나요?

언니가 말했다.

"지금 하는 일, 50%만 좋아한다.

내가 100% 좋아하고, 하고 싶어했던 다큐...

그 짝사랑이 너무 힘들었어.

포기하고 나니 이제...마음이 편해"

12월이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언니.

96년 그 때, 곧 떠날 나를 생각해 주며

소풍을 가고 MT를 가고

그렇게 광명에서, 양수리에서

미래를 얘기하고 영화를 말하던 그 사람들.

이제 나는, 우리는 떠나는 언니를 생각하며 

또 소풍을 가고, MT를 가려고 한다.

 

가장 그리운 것?

그건...0.7옥상에서 술을 마시던 기억이다.

브로드웨이 극장 근처, 그 옥상에서

우리는 고기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다.

술병을 쭉 늘어세우며

우리 이 옥상이 꽉 차도록 술을 먹자, 웃으면서

그렇게 지냈다.

 

그때 선생님들은

'삶의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의 다큐멘터리 작가를 말했었고

우리가 진지한 사람이 되기를 바랬다.

카메라 워크에 관심이 많았던

나의 파트너였던 경현형과

박감독은 항상 언쟁을 했다.

카메라 워크에 대해 묻는 경현형에게

항상 박감독은

그런 거 신경 쓸 동안에 대상과의 관계나 고민해.

냉소적으로 내뱉었고

경현형은 발끈하며... 그렇게 언쟁을 했었다.

지금 박감독은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안만희 선생님은 뭘 하고 있나. 그 사람들이 그립다.

 

푸른영상에 돌아온 지 2주일째다.

수익사업으로 바쁘다.

그리고...항상 들어왔던 얘기를 듣는다.

너, 이제 작품 해야지..

얼마전까지는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나도 해야하는데...그런 조바심.

지금? 지금은 편안하다.

나는 처음부터 3년간 조연출만 하겠다고...

그런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는 다큐멘터리를 너무나 사랑하는 것같다.

 

숨을 쉬듯이

밥을 먹듯이

그렇게 편안하게 다큐멘터리를 받아들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길을 잃고 헤매는 내게

구원처럼 다가왔던 다큐멘터리.

여전히 나는 경외감을 가지고 다큐를 생각한다.

그리고...좀더 편안해졌을 때,

그 때 내 작업을 하고 싶다.

 

100%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있는 것은 숨막히다.

그 사람을 너무 좋아해서

나는 나를 잃고, 그 사람만을 본다.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할까, 바보같은 이런 나를 사랑할까,

그런 조바심을 가지며...

 

100% 좋아하는 다큐를 대하는 것도 역시 숨막히다.

좋은 옷감을 망치는 서툰 재단사가 될까봐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내가 말하고 싶어하는 그 얘기들을

애써 꼭꼭 가슴에 묻는다.

아직은 때가...아니지 않는가.

대상과의 약속이 있는데

내가 그 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수 있을까

두려워하며.

 

편안하게 다큐를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아무에게도 말을 못하고

가슴 속에 꼭꼭 접어둔 나의 얘기를

조심스럽게 펼쳐보이겠지.

그 때가 언제쯤일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저 처음에 약속했던 3년, 그 시간을 바라본다.

그랬다. 나 처음에 푸른영상 들어올 때 그런 생각했었다.

선배들...열심히 작업할 수 있도록

총무든 회원관리든

단체로서의 푸른영상이 굴러가는

그런 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당신들이 마음 놓고 일할 수 있도록

그리고 MBC에 갔다 온 다음에

그런 생각, 더 많아졌다.

 

PD들은 정말 편하더라.

촬영, 서치, 그 모든일에서 해방되어

머리로만 생각하고 생각만 할 수 있도록

작가, AD 그런 존재들이 모든 잡일을 다 해주더라.

돌아와서 선배들을 생각했다.

방송국 PD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들이 좀더 좋은 조건에서 작업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런 생각을 했다.

수익사업, 서치, 그런 일들 작업때만이라도 잊고서

그냥 작업에 몰두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할 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만큼인지...

잘 모르지만.

그리고

그렇게 다큐랑 친해질거다.


1999년 10월 25일 05시 08분 27초

요즘 <나눔의 집> 홍보 비디오 작업을 하고 있다.

말이 홍보 비디오지, 내가 생각하기에는...

아니, 내 생각이 아니라 나한테 느껴지는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큰 것 같다.

그냥... 잘 하고 싶다.

봉천동 나눔의 집 후원인들에게 보여지는 것이고

또 그 후원금의 많은 부분은 정신지체인들이 주로 모여있는

재활센터에 쓰여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정말 잘하고 싶다.

 

나는 장애인들을 잘 안다고 생각했다. 후.. 오만이지.

94년, 내가 세상으로 스스로를 격리시켰을 때,

나는 통신만 하고 지냈고,

그 시간에 알았던 동호회 중에 두리하나라고...

하이텔 장애인 동호회가 있었다.

나는 94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그 곳을 지켜봤었고

가끔씩 일일찻집이 있거나 전체모임이 있으면

내가 아는 사람들과 같이 회계를 보거나

차량지원 자원봉사를 하곤 했었다.

 

나는 그렇게 구화를 알았고(수화 말고, 입 모양 보고서 뜻을 아는...)

시각 장애인의 팔을 잡는 것이 금지라는 것도 알았다.

계단이 많은 세상의 길들에 대해서 문제라는 것도,

그리고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아파했었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서 좀더 넓게, 그리고 세심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고민이 얼마나 사치스러운가,

그렇게 주눅이 들어가며 깨우쳤던 시간이었다.

 

그리고 이번에 나눔의 집 작업을 맡으며

내가 안다는 것이 얼마나 좁았던가..그런 생각 했다.

정신지체의 의미는 잘은 모르지만 지능 70(75?) 이하의 사람들이라고한다.

재활, 그것도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며 적응하게 하는 것.

말하자면...통신을 할 수 있는 장애인들은

최소한 지능 75이상이었던 거 같고

이 사람들은 내가 알던 어떤 사람들과도 다른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도 모르며 내가 안다고 생각했다. 부끄러웠다.

 

어제, 옛날 하이텔 한국사 동호회에서 내가 헤맬 때

비슷하게 헤매던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은 갑자기 서울에 직장을 옮겨서 할 일도 없고 그래서 

내게 전화했다고 했다. 전라도 살던 그 사람, 5년 전 수첩 뒤적거리다

내 전화 번호 있어서 전화해봤는데 연락이 되었다고 하며... 

휴일에 할 일 없어서 심심해서 전화한다고..

 

나 촬영 있다고 했더니 그 사람이 따라가도 되냐고 했다. 

그래서 뭐..오라고 했다. 신경 못 쓰니까 알아서 오라고.

여해문화공간에서 하는 <청소년 꿈의 광장>을 열심히 보던 그 형은

나중에 밥을 먹으며 "우리 애들도 데려올걸.."자꾸 그랬다.

일요일도 한다고..애 데려오라고 하니까(그 형은 애가 3살인데..)

그게 아니라 자기가 가르치는 애들..이라고.

 

알고 보니 그 형은 내가 모르는 동안에 

특수교사 자격증을 따고

그리고 33살? 아마 그 나이인 것 같은데

초임으로 서울에 온것이었다.

 

나는 비염 때문에...특히나 환절기라 공기적응이 안되어서

자꾸 훌쩍거리며 '정신지체'에 대해 물었다. 

제약회사에 다니다 이번 9월에 특수교사가 된 그 형은

내게 비염에 잘 듣는 약을 소개해주다...말했다.

"비염이 완치가 안되는 거 알아?

정신지체도 완치가 안된다.

너는 완치가 안되는 그 비염때문에 약을 쓰기도 하고...

그리고 익숙해져있잖아. 불편하게.

정신지체 재활이라는 거..바로 그런 거란다.

부족한 한 사람이 잘 할 수 있는 거 찾는거.

그렇게 세상에 익숙해지며... 한 역할을 하는거."

 

감독님이 옛날에 그런 말 했던 거 기억난다.

"장애인에게 병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관계,

내가 추구하는 관계"라고.

 

그 형은 막 애들 얘기를 했다.

1,2,3,4를 잘 못 세서 

롯데월드로 소풍 갔을 때 일일히 계산해줬던 얘기,

땡땡이 치면 오락실 뒤지면 있다는.....

지금 고등학교 애들은 다들 PC방 가는 그런 상황에서..

그리고 얼마나 예쁘고 착한가,

그리고 자기가 얼마나 애들을 때리는가....

 

많은 부분 공감할 수 없었지만 그저 그런 생각했다.

최소한 당신은 나처럼 주눅이 들어있지는 않구나..

 

난 그렇다.

이번 3월에, 하이텔 동호회 두리하나에 가서

비디오 촬영 할 때에도

내가 두 발로 걷고 카메라를 들었다는 것이

너무 죄스러웠다.

이해할 수도 없었던 그 죄스러움.

시간이 지나고 조금씩 익숙해졌긴 했지만...

같이 갔던 김성환이 내게 "넌, 촬영 안되는 애야"라고 말해서

난 나중에 걔랑 대판 싸웠었다. 서러워서.

내가 왜 그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지 못하는가에 대해서

내가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그 죄스러움, 그 주눅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지만....글쎄, 그게 나의 선 자리겠지.

나, 항상... 감정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일 뿐이니까.

그런 얘기 변명일 뿐이었겠지, 지금 생각해보니.

 

그냥 이런 생각한다.

세상에 대해서, 장애인 재활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하는

나눔의 집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영상물을 만들고 싶다.

 

또 이런 생각도 한다.

세상에 할 일이 정말 많았구나.

그리고... 내가 좀 더 유능한 사람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더 많이, 더 잘할 수 있었으면...

 

그리고 그게 잘 안되어

괴롭고...좀 쓸쓸해진다.

난, 참...안되는구나 생각하며.


1999년 11월 06일 04시 15분 45초

매일 촬영을 간다.

봉천동 나눔의 집 후원의 밤 행사에 상영될 12분 정도의

영상물을 맡았기 때문이다.

내가 주로 가는 곳은 은천고개에 있는 장애인 재활센터이다.

 

그 곳에 가면 다섯 명의 비장애인과 14명의 정신지체인들이 있다.

2주일 전에 카메라없이 자료 받으러 간 것까지 합하면 총 4번을 갔다.

그 사람들 앞에서 나는 또 여지없이 주눅이 들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웃기만 했다. 뭐 그 분들도 마찬가지였다. 

웃는 나를 보고 그 분들도 웃고, 그 분들이 웃으니 또 나도 따라 웃고

그러다보니 하루종일 웃기만 했다.

무엇보다 그 분들이 하는 말을 잘 못 알아 듣겠고

또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잘 이해를 못하겠다.

 

오늘은 양재 시민의 숲으로 소풍을 갔다.

가서 처음으로 말을 해봤다.

그 분들이 와서 말을 시켰기 때문.

예를 들면 "이거 사진기예요?", "몇살이예요?",

처음엔 어떻게 말을 해야 할 지 몰라서 "네", "스물 아홉이오"라고

대답만 하고 그 다음에 할 말을 못 찾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할까 생각하다가

내가 찍는 것은 비디오이고 움직이는 모습이 그대로 담긴다는 얘기를 했다.

다행히 내가 가진 카메라는 액정이 있고, 또 액정이 180도 돌아가기 때문에

찍히는 사람이 찍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자기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했다.

처음엔 카메라가 오면 얼른 바른 자세로 앉던 그분들도

이제는 브이자를 그리거나 미소를 보내주었다.

 

소풍이 끝나고 다들 돌아간 센터에서

전도사님, 선생님 2분, 그리고 자원봉사자 2분과 함께

저녁을 먹었다.

사람들이 내게 "우리 회원들 보고 싶어질 거 같죠?"라고 물었을 때

말을 못하고 또 웃었다.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정말 보고 싶을 것 같다.

한 사람, 한 사람 특성을 조금씩 알게 되고

그 사람들이 서로 하는 말들이 재미있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특히 자꾸 따라다니며 

"선생님 재미있나요?", "선생님, 잘 찍으셨나요?"하다가 

"선생님을 찍고 싶어요" 라고 말하는 경수라는 아이가 

참 사랑스러웠다.(21살인가...아이도 아닌데. ^^)

 

그 아이는 장애가 좀 덜해서

모둠산방이라는 곳에 파견이 되어있는 아이이다.

어제 공장에 촬영 갔을 때에는

말도 없고 미소만 보이더니

오늘은 무척이나 신이 나 했다.

그 곳 선생님들은 경수가 살도 빠지고 말수가 많이 줄었다고 했다.

단지 사흘 뿐이었지만 나는 그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얘기들을

보고 들었다. 그런데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이 자꾸 망설여진다.

 

왜 그럴까? 곰곰히 생각해봤다.

4년 전엔가, 은광원이라고 장애인들만 모인 고아원에 갔었다. 

그 때 머리를 다 밀고 기저귀를 차고 누워있던 어떤 아이를 옮기다가

아이로만 알았던 그가 나랑 동갑이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오늘도... 다운증후군임이 분명한 은숙씨라는 사람에게

아주 아이인 줄 알고 "그네 타니까 재미있나요?" 라고 물으며

"몇살이예요?"하고 물었더니 스물 아홉이라고...

그런 식의 충격이 새로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꾸 나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것 같다.

 

그리고...

운동을 '했던' 시간보다 운동을 했다고 '말하는' 시간이 더 길다는

어떤 시인의 한탄처럼

단지 며칠을 갔다 오고 나서

이러저러한 것을 느꼈다고 말을 하거나

뭐 그리고 거기 선생님들에게

"너무 너무 좋았구요, 또 오고 싶어요"라는 오늘의 감정을

말하는 것이 그냥 뻔뻔하게 느껴졌다.

 

가로지르고 싶다.

내 감정이나 스스로가 그어놓은 금들, 설정한 단계들을

가로지르고 싶다. 좀 솔직해지고 당당해지고 싶다.

지능이 낮아 말이 통하지 않아 생기는 문제들을

웃으면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그 선생님들처럼

주눅들지 않고

할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그 때는

내겐 언제쯤 올려나.

 

가로지르기.

영역과 단계를 가로지르며

스스로의 느낌대로, 생각대로 살아가기.

 

최근 나는 스스로가 너무 자유분방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말이 틀리진 않는 것같다.

생각의 영역이 엄청나게 넓다.(이건 폭과 깊이가 절대 아님)

중심없이,가닥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같아

신중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매일매일 하고 있는데

그것이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하는 식이 아니라

일상의 말문을 닫게 만들고 있는 것같다.

 

전도사님이 "장애인 인권에 대해 관심없나요?" 라며

그런 것에 대해 만들어보고 싶지 않냐고 물었을 때

나는 또 그냥 웃었다.

관심이 있다. 그런데...또 그런 생각 든다.

내가 혹시 저널리즘적 태도로....

아이템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며칠을 다니고

몇 날을 공부를 하면서

함께 사는 세상을 꿈꾸고

정말 이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선의 차원이 아니라

베푸는 차원이 아니라

당당하게 이 세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바로 그 얘기를

내가...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지만

나는 여전히..

나의 처지와

나의 감정과

내가 설정한 내 인생의 계획과

그리고 주위에서 많이 보았던

꼴불견 언론처럼

소재주의에 빠지진 않았나에 대한 물음에

자신을 잃어서...

자꾸 말을 잃는다.

 

가로지르고 싶다.

나의 상황과 나의 생각과 나의 욕구의 그 간극들을.

 

 

1999년 11월 18일 02시 48분 37초

<인간이 가진 무수하고 수많은 마음갈래 중에서...

설마, 설마, 희망을 가지지 말아야 했다. 

그가 그럴 것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혹시나 하는 그 희망의 독...>

--- 그냥 <봉순이언니> 중에서 한 구절 옮겨적어봤습니다--

 

'제5열'이라는 재미나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습니다.

내가 그 곳을 알게 된 데에는 몇가지 과정이 있었습니다.

별다른 건 아닙니다.

아는 사람이 촬영을 하고, 아는 사람이 AD를 해서

꼭 한 번 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동티모르 관련된 MBC스페셜이

지난 주에 방송되었었습니다.

 

저는 방송시간이 당연히 11시 30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가 그러하거든요)

11시쯤에 사무실을 나서는데 아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뭐하냐고 그래서 MBC스페셜 보러 집에 간다니까

벌써 끝났다고... 스페셜 방송시간은 10시랍니다.

 

갑자기 계획했던 일에 차질이 생겨 멍하니 있다가

택진이 조계사 작업 하는 거 거들다가

그냥저냥 밤을 새우게 되었습니다.

상엽이가 지나가는 말로 

"그 프로그램은 인터넷을 통해서 볼 수 있대"라고 해서

인터넷 검색어에 '동티모르'라고 쳤더니

MBC스페셜은 안나오고 여러 사이트가 나왔는데

그 중에 관심을 끈 게 '제5열'입니다

 

제5열은 스파이랑 비슷한 말인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트는 정말 재미있습니다.

희망을 말하고 싶다는....그런 발언들이 많습니다.

희망에 반하여 희망하라...던가, 뭐 그런 말이 있던 것같습니다.

관심있으시면 찾아보시기를.

(제가 인터넷 주소를 적을 줄 알거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으시겠지요?

제가 찾은 절차대로 1. 검색어에 동티모르를 치면 

2. 조명신이라는 사람이 나오는데 

3. 그 항목을 클릭하면 됩니다. 

 

요즘엔 '희망'이라는 말을 많이 생각합니다.

그리고...'희망의 독'에 대해서 절실히 느끼는 날들입니다.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나타나고

그 현실을 얼른 인정못하고 자꾸 '아니었으면...'하고 바라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희망의 독, 희망에의 중독인 것같습니다.

 

실현가능하고 바람직한 그런 일들에 대해서 희망을 갖는 것은

건강한 세상에 한 치 정도는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이겠으나

전혀 가능성이 없고, 그리고 바람직한 일도 아닌 듯 하지만

단지 감정이 시키는 것에 따라서...

마치 어린 날, 가질 수 없는 장난감을 앞에 두고 떼를 쓰듯이...

가질 수 없는 어떤 것을 가지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이제 부질없는 희망은 버려야하는 것은 아닌가

그런 생각 하고 있습니다.

 

 

MBC스페셜 보려고 집에 가려 했던 날,

<이웃의 토토로>를 보았습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었는데

세상에 그렇게나 사랑스럽고 귀여운 영화도 있더군요.

그리고... 거기 나오는 '사스키'가 '메이'를 챙기는 것 보면서

저희 세째언니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제 바로 위 언니인데, 사스키처럼 착하진 않지만

절 그렇게 챙겨줬었거든요.

 

러시아에서 10년 가까이 살고 있는데

이번 봄에 이가 아프다고 갑자기 왔습니다.

저희 식구들은 너무나 황당해했지요.

어쨌든 치과에 다니면서 열흘 정도 있다가 갔는데

푸른영상에도 왔었습니다.

엄마가 언니에게 "푸른영상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고 오너라"

그러셨다더군요. 엄마는 세째언니를 제일 좋아했거든요.

 

푸른영상에 와서 딸기도 먹고 이런 저런 얘기 했었는데

아마 그 때 화제가 의료보험료 문제였었습니다.

길을 몰라 나중에 집에 데려다주는데

학생회에 다시 돌아온 기분이라고 그러더군요.

그리고.... 다 큰 사람들이 앉아서

의료보험비 걱정을 하는 것 보면서

이런 세상도 있나... 그런 생각 했답니다.

 

집에 돌아가서는 엄마께

아주 좋은 사람들하고 같이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고 그러더군요. 많이 착해진 것같았습니다. 

 

토토로 보고 언니 생각이 나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있군요.

언니는 제게 '카메라를 믿어라'라는 말을 했었습니다.

카메라가 있으니, 카메라를 믿고 살아가라.

사람한테 기대지 말고, 카메라를 믿으라고.

 

작업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주간반, 야간반으로 나눠서 작업하고 있답니다.

그래서인지 아주 한 밤중에도 가끔 깨면 금방 잠에 빠져들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 했어요.

카메라를 믿어야지. 

부질없는 희망의 독에 빠져들지 말고

카메라를...희망인양 바라보고 살자고.

 

참, 그 얘기 했던가요?

개인 카메라를 샀습니다.

TRV-900을 샀는데

이름도 있습니다. 쫄쫄이라고...

항상 저를 따라다니니까요.

쫄쫄이를 믿고서

행복하게 살아가야겠습니다.

 

편집 하다가 너무 속이 쓰려서 잠자리에 들었다가

몇 자 주저렸습니다.

아무 얘기도 안 한 거죠 뭐.. ^^

 

 

1999년 11월 19일 03시 35분 29초

술을 많이 마신 오늘은 이런 저런 얘기를 주저리고 싶다.

하기사 내가 언제는 가리고 말을 했나.

누군가는 나의 글을 읽는 것이 힘들다고...

그 감정의 과잉을 받아안는 게 힘드니

제발 좀 그러지말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난 어쩔 수 없는 류미례니까.

 

<먼지의 집> 미영이와 세정이가 왔다.

'나눔의 집' 작업 때문에 바빠서 그 누구도 만나지 못하고 지냈다.

사실 실시간으로 바쁜 건 아니다.

잘하고 싶다는 그 마음과

잘할 수 없는 나의 능력의 괴리를

고등학교 때 책상에 앉아서 하루하루를 보냈던 것처럼

마음 한 구석이라도 다른 생각 안하려고 하니까.

 

그런데 <먼지의 집> 아이들이 왔는데

잠을 줄여서라도 그 아이들을 봐야지.

그래서 술 마시고 얘기하다가 지금 왔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50분.

엄마한테 미안하다. ^^

하지만 엄마는 인터넷을 안하니 내가 지금도 일하는 줄 아시겠지. 

정말 미안~~~

 

나는 항상 후배가 무서웠다.

미영이나 세정이가 후배일 이유는 없다.

단지 대학이 같다는 것 말고는 어떤 연관도 찾을 수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 나는 언니가 되고 그 아이들은 후배가 되어서 찾아왔다.

선배 후배가 단지 나이나 학번이 아닌데도

나는 지금 선배가 되어있네. 그냥 언니이고 말지 뭐.

 

단지 말할 수 있는 건

난 좀더 심하게 헤맸고, 아주 다양하게 많은 생각을 해봤기 때문에

그래서 누군가가 힘든 상황을 말했을 때

나도 그런 상황을 겪어봤다는 것.

그 동질감을 잘 말해줄 수 있는 그런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다...

그것이라도 위로가 된다면

힘은 될 수 없겠지만 위안이 된다면 좋겠다..그런 생각했다.

 

아주 오래 전에 미영이한테 편지를 받았더랬다.

난 참 신기했다. 나한테도 편지가 오는구나...

MBC에서 일할 때 후배 정남이가

자꾸 자마이카인가...아무튼 좀 특이한 나라에 편지를 막 보내길래

그 나라에도 하이텔이 있나...궁금했었는데

이메일주소라는 것이 있다고.

돈드는 게 아니라고 내게 아이디를 만들어줬었다.

그 아이디로 편지가 온 것이다.

 

편지가 올 데는 없겠지만

'읽지 않은 편지 0통입니다'라는 말이 보기 싫어

어느 날은 내가 rmlist에게로 편지를 보냈다.

"rmlist 심심하겠다. 편지 안와서. 그래서 내가 보낸다" 그런 짤막한 메모.

그래서 편지함을 뒤지면 항상 메시지는

"읽지 않은 편지 1통입니다' 였다. 

재미있어 하며 나는 읽지 않았다.

왜냐하면 내용을 다 아니까. 내가 쓴건데 뭐.

 

어느 날 "읽지 않은 편지 2통입니다"라는 메시지가 있길래

흠... 기억 못 할정도로 내가 술을 마신 적이 있었나, 궁금해하며

읽지 않은 편지 2통을 열어봤는데

그 중 한 통은 류미례가 보낸 거였고...

그리고 또 한 통이 바로 미영이가 보낸 거였다.

 

나는 미영이에게 편지를 세 번이나 썼다.

편지는 썼지만 그 편지는 한 번도 안갔다.

나는 왜 안갔는지 아직도 모른다.

'편지쓰기'에 열심히 하고싶은 말들을 쓰지만

편지는 가지 않는다.

그래서 포기하고 지낸다.

다행히 미영이를 만나서

나는 말로 다 했다.

 

'먼지의 집'을 생각하면 또 떠오르는 게 있다.

한강이라는 소설가가 있다.

나는 그의 소설을 좋아한다.

작년에 <검은 사슴>이라고... 첫 장편을 냈다.

탄광촌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 소설을 셀 수 없이 많이 읽었다.

거기에는 '견디는 법'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나는 힘든 일이 있을 때,

그 소설을 읽으며 그 소설의 주인공에 매혹되었었다.

거기에는 함안, 어둔리와 같은

언젠가 가봤던 것같은 지명이 나온다.

 

<동강은 흐른다> 작업을 하면서 내가 가보거나 이정표에서 봤던 곳은

함백이나 어달리였다.

나는 <검은 사슴>의 지명들이 지어낸 곳인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날 지도를 보다가

소설에 나오는 지명들을 보았다.

아주 옛날에 안도현의 시집을 읽다가

'모항'이라는 곳을 동경했었다.

나는 '모항'또한 지어낸 곳인 줄 알았다.

'모항가는 길'이라는 시를 보면서

모항이란 그냥 우리가 바라는 그런 곳이겠지,그런 생각 했었는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다음

그곳이 지도에는 '곰소항'이라고 표기되는 곳

바로 그 곳의 다른 이름인 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함안은 지명에 있었고...

어둔리라는 곳은 아직 찾지 못했지만, 

사실 '리' 단위까지 지도에 나오는 경우는 없으니까.

책을 따라가듯 여행을 가볼까.

사실 휴일의 하루는 늦은 잠을 자거나

조카들이랑 컴퓨터게임을 하거나

'낙엽받기' 놀이를 하면서 지내는데

그 시간 좀 내면 갈수도 있을 것이다.

교통비가 좀 들겠지만

도시락을 싸서 가면 소설 속의 지명을 하나라도 찾지 않을까.

아니 '지명'보다도 실종된 여자를 찾는 그 소설의 내용처럼

잡히지 않을 것같은, 정해지지 않은 미지의 뭔가를 찾는 

그런 여행을 한 번은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한다.

 

강원도를 생각하면 힘이 든다.

<강원도의 힘>이라는 영화에 깃든 안좋은 기억과

'강원도'에 관련된 싫어하는 사람의 기억, 뭐 그런 것 때문.

그럼에도 나는 강원도, 탄광 그 얘기들이 나온

<검은 사슴>을 보며 내가 싫어하게 된 사람의 기억과

안좋은 기억들을 버텨내고 지웠다. 아이러니이다.

 

...기억이란, 인간의 기억이란 생명력을 가지고있다.

기억은 늘 아름답고 순한 양처럼 보고싶고 만지고 싶은 것만을

고분고분하게 품에서 내어주지 않는다.

기억을 잘못 부렸다가는 한마리 커다란 괴물을 키우는 꼴이 된다.

그렇게 되면 기억은 주로 밤에 활동하는 까닭에

양과 같이 온순한 동물들이 잠들 때를 기다렸다가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앞니로 목에 상처를 내고

두 눈마저 파먹으려 달려드는 흡혈박쥐로 변신하기 십상이다...

 

어쨌든 강원도와 관련된 사람들의 안좋은 기억,

흡혈박쥐처럼 나를 괴롭혔던 "태백"에 대한 피해의식을

나는 지웠다.

이제 강원도를 편안하게 느끼고 싶다.

'나눔의 집'작업이 끝나면

단 하루만이라도 강원도에 가고싶다.

함안이라는 곳엘 가고 싶다.

그건 아주 옛날 모항을 동경했던 것처럼

가보고 싶은 것이다. 이유없는 꿈.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느낌이 들었을 때, 한 번 그렇게 해보는 것.

내가...한 번이라도 해보고 싶은 그런 것이다.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1999년 12월 15일 23시 04분 10초

26번 버스를 타고서 매일 출근을 한다.

오늘은 아마 처음 시작하는 아저씨였나보다.

타는 문 바로앞에 '교통자율봉사대' 옷을 입은 아저씨(지도?)가 같이 서서

길마다, 정류장마다 주의할 점을 알려주고 계셨다.

나는 운전하는 아저씨 바로 뒤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지도아저씨의 말대로 길을 보고

문 닫는 것을 보고, 또 문 여는 것을 보면서

지시대로 같이 여기저기 둘러보면서 푸른영상까지 왔다.

 

그러면서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내리는 문 같은 경우 문 여는 것은 통제가 되는데

문 닫는 것은 통제가 안된다고 한다.

그래서 그것을 무시하고 내렸다가는 다칠 수도 있다고한다.

그리고 노란 불이 켜지는 것에

버스는 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급정거하면 승객들이 다칠 수 있어서

그냥 간단다. 딱지 뗄 각오를 하면서.

 

지도아저씨 말대로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같이 보면서

그리고 백미러와 경찰차를 같이 보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그리고...

참 따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도하는 아저씨는

아주 세심하게 지도의 말을 하다가

혹시나 운전아저씨가 기분나빠 할까봐

자기고민도 얘기하면서

참 따뜻하게...그렇게 노력을 하는 것같았다.

참 보기좋았다.

 

서울이라는 도시는

처음 내가 느꼈을 때에는

아주 무서운 곳이었다.

내가 처음 서울에 온 것은 중학교 2학년, 아마 14살 때였다.

14살 크리스마스때 나는 폭설 때문에 14시간을 버스를 타고 오면서

그 먼 해남에서 목포로, 그리고 다시 서울에 오면서

나는 세 번은 까무러쳤을 것이다.

 

우리 살던 해남 황산면 옥연리는 차가 별로 없었고

나는 30분을 넘게 차를 타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멀미약을 먹고서도

멀미를 하고 나중엔 더 게울 거 없을 때까지

헛구역질을 하며

득달같이 달려드는 그 눈발을 보며

중간중간 쉬는 차안에서

깜박깜박 잠을 깨며

혹시나 서울일까 그러면서 3시에 차를 탔다가

아마 새벽 4시에 도착했던 것같다.

큰언니는 그 때까지 기다렸고.

버스가 폭설때문에 연착을 한 것이었다.

 

엄마는 내가 어디 갈 일 있으면

눈에 힘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눈에 힘이 없어서 멍청해보여서

사람들이 잡아가서 식모를 시킬 것이라고.

딱 식모라고 말을 했었다.

사람들이 식모가 모자라서

길 다니는 애들을 잡아가는 곳이 서울이라고.

나는 내가 사는 중화동에서 태능중학교,

그 네정거장 말고는 다른 데 가지 못했다.

너무나 무서워서.

낯선 사람들은 다 무서웠다.

 

그리고 대학에 가고

새로 세상을 알고

그렇게 넓혀지는 내 생활의 영역들을 보면서도

한번도 그곳을 서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내 사람, 그렇게만 생각을 했었다.

 

오늘 아마도 내가 생각하기로는 처음으로 서울을 느꼈던 것같다.

버스에 타고 내리는 애 업고 내리는 아줌마,

버벅거리며 묻는 아저씨,

그저 길에서 쉽게 볼 수 있고

그건 해남에서 보던 우리 아저씨들, 아줌마들하고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얼굴 처음 보고 그냥 그랬었는데

참 그 사람들 모습들, 그리고 지도하는 아저씨,

운전하면서 학자금 걱정 하는 운전하는 아저씨,

그렇게 그렇게

애정가는 사람들이 어디나 있는 곳,

사실 나도 서울 사람이니까. 

 

오늘 처음 서울을 느꼈다.

서울에서 10년을 살고

그리고 광명에서 5년을 살면서도

난 한번도 서울을 못 느꼈는데

오늘 처음 서울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서울은 그래도 참 따뜻한 곳이구나.

그런 생각했다, 오늘. ^^


1999년 12월 31일 20시 33분 33초

지금 편집실에서는 봉천동 송년의 밤 행사에 

쓰일 비디오를 열심히 만들고있습니다.

강길형이랑 내영씨랑 소연씨랑 

마지막 음악을 넣고 있습니다.

 

저는 저녁식사를 잘 먹기위해

6시부터 고픈 배를 안고

빵도 안먹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서 잘 먹을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리고 이 밤에 송년회 하지않고

푸른영상 자유게시판에 글을 쓸 누군가가 있을 지 

참 궁금하군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2000년대엔 좀 더 힘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서로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

 

2000년 01월 06일 19시 04분 34초

안도현을 좋아한다.

안도현의 <외롭고 높고 쓸쓸한>은 시에 대한 내 생각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시보다는 소설을, 산보다는 바다를 더 좋아하는 내게 그의 시들은 나를 깨뜨리며 다가왔다.

 

시를 쓰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의 시는 참 좋았지만 그 사람의 생활은 싫었다. 생활과 일치되지 않은 시가 감동이 되는 것이 난 싫었다. 그 상황은 시 마저도 불신하게 만들었다. 그것이 내가 느낀 시였다.

 

그러다 안도현의 시를 보았다. 생활에 천착한 그의 솔직하고도 애절한 울림은 내가 힘들 때마다 안도현의 시들을 찾게 만들었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 이 시집을 접하고 많은 시간이 지난 올해, 난 하얀 여백으로 남겨진 시집의 첫 장에 이렇게 썼다. '항상, 나의, 새로운, 시작과 함께 하는 이 책에 감사한다'라고.

 

94년 2월에 나와 2천년이 된 지금까지 항상 내 가방 속에 들어있는 안도현의 시들은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드는 싸움에 나섰다가 지친" 나에게, 패배감에 빠져 세상이나 사람으로부터 격리되기를 바라는 내게 "너는 비록 지쳤으나, 승리하지 못했으나 그러나, 지지는 않았다"라고, 애써 위로하려 했다. 그가 건네는 말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다. 내가 그렇게 받아들인다는 것, 그것은 자기애에 빠져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어쨌든 길고 긴 시간이 지난 다음, 내가 찾아낸 다짐은 "절대로, 어떤 일이 있어도, 세상에 대해서 냉소적이지만 말자"는 그것 하나였다.

 

^^; 냉소의 반대편으로 너무 치달았나? 97년 어느날, 시인이 문예아카데미의 시창작반에 초대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뒷풀이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열명 정도의 수강생들 틈에 낀 나에게 사람들이 소개를 청했을 때, 난 시가 좋아서, 그 시를 쓴 사람이 보고 싶어서 왔다고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다. 시인은 무척 당황해하였고, 나는 무척 미안해졌다. 그 뒤로 그를 볼 기회는 없었다. 

 

안도현이 새로 책을 냈다. 좋아하는 시들을 모아 낸 책 이름이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이라니. 시인은 시인이다. 난 백석의 시가 당연히 들어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렇진 않았다. '외롭고 높고 쓸쓸한'이라는 말을 백석의 시에서 인용했다는 말을 듣고 한참을 찾아보았지만 딱 그에 맞는 말을 찾진 못했다. 대신 나한테 와닿은 백석의 시를 적는다. 

 

** 참고로 <그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애착>은 '나무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나왔고, 5천원이군요. 백석의 다음 시는 그 책엔 없답니다. 여러분들도 좋아하셨으면 좋겠군요.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

白石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 밖에 나가지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 베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새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에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장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2000년 01월 21일 20시 21분 15초

송작가입니다.

사실은 류미례라고도 하지요.

디자이너님께선 아직도 절 송미례라고 알고 계시는지. ^^

 

중국에서 재미있었구요

돌아와서 디자이너님이 일을 그만 두셨다고 해서

안타까워하던 것이 어언 한달

중국작업이 순탄하지 않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고전에 고전입니다.

 

그래도 즐거웠던 중국의 기억이

위로가 됩니다.

 

모쪼록 하시는 일 잘 되시고

푸른영상 게시판도 자주 들러주시고

자주 자주 글도 얼굴도 볼 수 있었으면

참 좋겠네요

바이~~!


2000년 01월 29일 02시 23분 13초

글?

그냥 낙서라고 하죠 뭘.

오늘 옛날 민족예술 편집실에서 일하던 식구들을 만났습니다.

제 나이 25살부터 27살때까지 일하던 곳이었습니다.

 

오늘 한겨레신문에 이효인씨 글 보니

할머니 얘기 하다가 갑자기 말하더군요.

갑작스런 노출증?

그 한 문장을 노려보다가 생각했습니다.

그래, 나 그동안 노출증처럼 내 얘길 주저렸구나.

 

많이 많이 날 생각하고

내 마음을 생각하고

내 생활을 생각하는 날들입니다.

그리고 전 그동안 한 자도 글자를 쓰지 않고 지냅니다.

집에 일이 있어서 

푸른영상에 출근하지 않고 집에서 써치를 하고

그래요, 해야할 일들 아주 많은데 

아무 생각없이 할 수 있는 일이... 써치말고는 없어서

써치만이라도 열심히 하려고 그렇게 지내는 시간들입니다.

 

민족예술 편집실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전...그 잡지의 기자였습니다.

아주 많이 탈출을 꿈꾸면서도

그렇게 2년을 보냈었습니다.

펑크내는 일 없이 그만 두고 싶어서요.

빨리 후배를 구하고 싶어했고

그 후배가 제가 하는 일을, 아니 그 이상을 하는 날을 기다리고

그러고 나서 그만두고 싶어했던....

정말 그만두고 싶어했던 그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느날 우린, 후배랑 같이 짤렸었죠.

말 그대로 짤렸습니다.

전 자유를 느끼며 떠나왔고

후배는 교직원을 지금 하고 있습니다.

선배 중의 누군가는 장미농장을 하고

또 누군가는 시간강사를 하고 있더군요.

 

2년 가까운 시간동안 만나지 못해서

사람들은 아주 예전의 관계들을 떠올리며 

저의 그 사람은 잘 있는지, 지금은 어떻게 지내는지 그런 얘기들을 물었고

전 갑자기 우울해지다가 그리고 애써 명랑해지다가 그렇게

이런 저런 얘기들을 주저리며 몇 시간을 앉아있다가 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참...

쓸쓸했습니다.

 

아무도 없는 푸른영상을 꿈꾸며 왔고

또 누군가가 있어서 어색한 그런 시간이네요.

생각해보면 나란 사람은 참 많은 굽이를 지나왔고

지금도 또 한 굽이를 지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 합니다.

 

기자라는 일을 하며 글을 쓰고 지냈을 때,

과연 보는 사람이 있을까를 의심하는 잡지를 만들고

글을 쓰고 그렇게 지내면서 저는 영상으로 세상에 말할 수 있는

나를 꿈꿨습니다.

유학을 꿈꾸고, 다른 단체로의 탈출을 꿈꾸는 제게

편집장인 선배는 말을 했습니다.

짝사랑을 할 수도 있는 거라고.

 

한 분야에서 과연 스스로 잘할 수 있을까, 정말 내가 좋아하는 일일까,

그런 생각을 추스릴 수 있는 시간은

최소한 3년은 걸린다고.

전 글작업 하는 것, 2년을 꽉 채우고 이 쪽으로 건너왔습니다.

영상이라는 거, 배우는 거말고 일로써 보낸 시간이

꽉 찬 2년을 지나 이제 3년째로 치달아 갑니다.

 

의식하지 못하면서 지금 고비를 느끼는 건지,

아니면 그냥 보통 사람들도 저처럼 이맘때면 느끼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이래저래 생각이 많은 날들입니다.

 

난 정말 이 일을 좋아하는건지. 그 물음엔 자신있게 말을 할 수 있죠.

그런데..난 정말 이 일을 하려고 하는 건지

그 물음은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집니다.

동강 작업할 때부터 느껴지는 건

난 다큐보다는 그냥 돕는 이로써 남기를 바라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

그런 생각 많이 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저의 자리를 느끼며 새로운 뭔가를 시작하는 게

아주 많이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이 그저 고비이기를 바라는 마음, 

그것이 저의 자리입니다.

 

마음을 꺼내는 게 어려워지는군요.

제 마음을 감당할 수가 없어서요.

그냥 이렇습니다.

 

술을 많이 마셔서

손이 잘 안 움직여지네요. ^^

 

푸른영상이 참 좋아서

전 행복해요.

얼마나 다행인가...

후배한테 미안한 그런 날이었습니다


2000년 02월 24일 03시 21분 06초

맘 먹은 일을 한 오늘 참 홀가분하다. 

100%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홀가분하다고 생각을 해야만 할 것같다.

자주 구경만 하는 모교의 게시판에 

이래저래 언급되는 말들에 대해서

나도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말을 올렸다.

다들 그런지 잘 모르겠지만

옛날, 세상을 알아가던 시간에 만난 동기나, 선배나 후배는

참, 정말 부담스럽다.

 

누군가는 상사의 직원이 되어 있고

많은 누군가들은 유학을 가서 이래저래 이국의 풍광을 전하고

또 누군가들은 회사원이 되어서 살아가는 말들을 읊조릴 때

그 시간으로부터 한 걸음도 나아가지 않은 것같은 나는

내 말들을 하는 게 참 낯설다.

 

마치 아무도 듣고싶어하지 않은 말을

스스로의 만족 때문에

막 읊조린 다음에 혼자 뛰쳐나오는 것같은

그런 기분을 많이 느낀다.

 

그래도 그동안 찜찜해했던 그 곳에

안부의 말을 쓰고 돌아왔다.

 

^^

돌아왔다고 하니

마치 집을 떠났다가 다시 온 것같은 기분이다.

 

세상엔

하기 전엔 엄청날 것같은 일들이

하고 나면 그저 그런 거였던

단지 그런 거였던 

그런 일들이 참 많다.

 

오늘 처음으로 장애인센터에 작업자의 위치로 갔다.

그전엔 일을 돕는 사람이었고

정체를 모르는

그저 웃기만 하는 사람이었는데

난 오늘 카메라를 들고

그리고 카메라로 직접 센터의 회원들을 찍으면서

카메라를 든 사람으로서 대화를 했다.

 

카메라를 든 가방을 어깨에 메고 있으면서도

그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기까지

정말 많은 생각을 했다.

 

첨엔 촬영을 하고 싶은 그 마음을 다스리면서

'그래, 배웠던 것처럼 상황을 장악해야 하는 거야.

지금 이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으니까

난 이 일을 그냥 겪고

나중에 좀더 준비해서 찍는거야'

이러저러한 생각을 막 하려고 했지만

난 끝까지 참아내지 못했다. (히히)

 

그리고 카메라를 꺼냈을 때

회원들은 환호를 하며 내게 말을 건넸고

(뭐...신기한 물건이었으니까)

난 그때부터

내가 해야할 말인지,아닌지도 모르면서

막 지껄였다.

그러고 나니 좀 편안해졌다.

나중에 이 결정을 후회할지 잘 모르겠다.

 

난 어쨌든 장애인센터의 회원들에게

내가 가진 카메라에 대해서 말을 했고

그리고 그 카메라가 앞으로 매일매일 

여러분들의 생활을 찍을 거라고

그렇게 말을 했다.

 

그런 다큐멘터리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냥 그러고 말았다.

사실 내일부터 어찌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지금

내가 오늘 한 행동도 잘 정리가 안되지만

이렇게 쓰는 이 글도 잘 정리가 안된다.

 

To be continued......

^^

 

2000년 05월 10일 21시 46분 05초

그 작고 힘없는 생명들을 생각하며

 

1.문주란

어느 때부터인가 엄마는 화분에 깃든 파란 풀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시골에 갔다 오셔도 우리보다는 화분을 먼저 찾았다. 화분에 심어진 풀들도 그랬다. 내가 열심히 물을 줘도 엄마가 장기간 집을 비우면 시들시들한 것같았다. 그리고 엄마가 오시면 파릇파릇 생기를 띠는 것같았다.

 

얼마 전에 축하할 일이 생겨서

집에 화분들이 많이 들어왔다.

넓지 못한 집이라서 엄마는 화분 한 개를 내놓으셨다. 나는 그러면 안된다고 했지만 엄마는 바깥이 좋을 수도 있다고 그러셨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사무실 후배가 집에 화분같은 거 있으면 작업실에 놓자고 해서 엄마한테 그 화분의 행방을 물었다. 나는 그 풀의 이름이 문주란인 것은 처음 알았다. 그 전엔 다 그게 그거 같아서 잘 몰랐는데 엄만 그러셨다.

"문주란? 아 그거 죽을 거 같아"

 

난 그 때부터 엄마한테 뭐라 뭐라 했다.

엄마가 없으면 시들시들했던 그 풀들을

엄마가 오면 반가워서 바짝 일어서던 그 풀들을

그렇게 내놓다니 엄마도 참 독한 거 같아.

문주란이 너무 불쌍하다.

 

엄마는 애써 말씀하셨다.

아니다 원래 시들시들했었다. 

바깥 바람 쐬라고 햇볕이 좋아서 내놓은 거다

엄마도 자주 살폈다....

뭐 그런 그런 말씀을 하셨다.

어쨌든 며칠이 지나고 뒤꼍 베란다에는

텅빈 화분이 놓여있다.

 

2. 올챙이

꼬마 조카가 벌써 3학년이 되었다.

숙제가 개구리알을 채집해오는 거였다.

내가 사는 광명은, 특히 우리 집은

개발지 끄트머리라서 바로 앞에 밭과 논이 있다.

오빠와 새언니, 나, 동생, 그리고 조카들 둘은

일요일날 들판을 헤매며 개구리알을 찾았다.

 

가뭄이라는 게 느껴질만큼

논바닥은 갈라져있었고

논개울엔 물이 거의 없었다.

어렵게 어렵게 개구리알을 발견했고

우린 그것을 집으로 가져왔다.

 

영양분 속의 까만 알들은 

벌써 형체를 갖춘 것들도 있었고

조금만 더 있으면 나올 것같았다.

 

늦은 밤, 돌아와 대야를 보니

까만 점들이 헤엄을 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까만 점은 바닥에 떨어져있었다.

통을 툭툭 건드려도 바닥에 떨어진 까만 점들은

움직이지않았다.

언니한테 물어보니

올챙이들이 잠이 들어서라고 했다.

그런 걸로만 알았다.

 

나흘이 지났다.

이제 헤엄치는 점들은 2~3개 정도밖에 없었다.

자는 것이 아닌 것같았다.

우린 어항의 산소배출기를 대주거나

어항의 물로 갈아주려 했지만

생명이 남은 알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처음의 논으로 돌려보내는 것밖에 없었지만

그것이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뒤꼍 베란다엔

문주란을 담았던 화분과

개구리알이 담겨있던 대야가

텅 빈 채로 놓여있다.

주인을 잃은 텅 빈 집처럼.

그 작고 힘없는 생명들에게

미안하다.


2000년 05월 17일 23시 06분 08초

학교다닐 때 숙제를 하려다가

필통에 지우개 하나라도 없으면 그 날은 아무것도 못했다.

지우개는 숙제를 하려 있는 것이고

꼭 그 지우개가 아니어도, 그리고 지우개가 없어도

숙제는 할 수 있지만

내 물건이 내가 정한 자리에 없으면

그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 하루를 다 보내기도 했다.

 

편지나 일기를 써도 끝칸까지 채우기

건널목의 포장도로는 흰선을 밟기

밥을 남기지 않기(... 이건 성격보다는 식욕 문제겠지만)

 

숙제를 해야 하고 그렇게 지우개를 찾아야했던

그런 학교로부터 떠난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난 별로 못 변한 거 같다.

 

종이편집을 하는데

명함케이스 세 개에

탈락, 보류, OK.

그렇게 써붙이고

쓸 수 있을 거라 생각되는 촬영본 목록을

쪽지에 써서 분류한다.

분류를 하려다가 갑자기 쪽지 모양이 맘에 안들어서

가위로 똑같이 오린다.

그러다 하루가 다 갔다.

 

똑같은 규격의 노란 딱지를 보니 기분이 좋아

오늘 일을 다 한 것같다.

 

지우개를 찾았으니

이제 숙제를 해야 한다.

그런데...

숙제가 너무 어렵군요. ^^

 

--2차 구성안 짜다가...그냥 적어봅니다


2000년 07월 02일 20시 00분 19초

귀가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도종환, <부드러운 직선>(창작과 비평) 중

 

제목을 잘 지어보려고 이 시집 저 시집 뒤져보다가

이런 시 하나 보았다.

맘 먹은 바를 이루진 못했지만

마음에 와닿는 시 한 편을 보고 옮겨적는다.

 

항상 미뤄두는 이들이 있다.

편지로라도 이을 수 있는 그 인연을.

 

푸른영상에서 6개월 인턴생활을 했던 글라라 수녀님,

지금은 로마에 계신데

그 분을 보며 종교를 생각했다.

그리고 20살 이후에 가지 않은 교회를 생각했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먼지, 이미영.

 

편집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후엔 

한 번도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편지를 써보지 못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이...

그저 내일, 내일 그렇게 미루다보니 

한달이 쓱 지나가버렸다.

 

지금 내가 만날 수 있는 한 사람은

매일 해질녘에 전화를 하면

전화를 받는 이.

올해 초등학교 들어간 작은 조카 류승은인데

항상 하는 말이 정해져있다.

 

고모 어디야?

-푸른영상

오늘 언제 들어와?

-늦게

우린 언제 원카드 한판 해?

-내일이나...

 

원카드를 못해본지 한달이 넘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서

승찬,승은하고 원카드 해야겠다.


2000년 09월 14일 17시 33분 46초

8월 31일날을 마지막으로 결혼이며 신혼여행이며 추석이며...

많은 일들을 치르고 오늘에사 푸른영상에 출근했습니다.

사이판이며 시댁을 떠돌면서 가끔식 이 곳을 생각했습니다.

시사회는 어땠는지, 영화에 대한 여러 회원들의 생각은 어떤지...

그리고 결혼식.

아침부터 너무 떨려서...

가슴이 쿵쿵거려서 우황청심환을 먹었는데

먹었는데도 정신이 없어

그날의 사람들을 전혀 기억을 못하겠습니다.

 

그저 범수형이 오셔서 무척 고마웠다는 기억...

신혼여행가서 어떤 사람이 저보고 '아줌마'라고 해서

기분이 나쁠락 말락 했던 거..

그리고 공항에서 입국하는데

"두분은 부부인데 성이 같군요"하던

공항직원의 멘트..

그런 것에서 제가 결혼했다는 거 느껴요.

 

아직 집 정리가 끝나지 않아

엄마가 있는 집에 자주 가다보니

잘 실감이 안나네요.

둘째언니는 해질녘만 되면 눈물이 났다는데

전 별로 잘 모르겠군요.

 

그저 옛날엔 아침에 늦게 일어나도 항상 밥이 있었는데

이젠 밥을 하지 않으면 굶을 수밖에 없다는 냉정한 현실을

아침을 굶은 날이면 현기증을 느끼며 뼈저리게 실감한다는 정도...

 

시사회와 결혼식에 오셨던 분들,

오시지 않았더라도 기억해주시는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튼튼한 아줌마로

씩씩하게 살아가렵니다.


2000년 10월 10일 12시 52분 23초

장애인센터가 이사온지 2주일 정도 된다.

아침에 출근준비를 하다 보면 회원들의 목소리가 막 들린다.

회원들은 9시 출근이고 난 10시 출근이라서 자주 만나게 된다.

 

며칠 전 센터에서 일이 있었다.

근처의 교회 목사가 전화를 해서

"장애아이들을 재운다니 그게 말이 될 일이오?" 했다고 한다.

센터의 허영미 선생님은 떨리는 것을 참으며

"우리 회원들은 다들 성인이고, 또 출퇴근을 합니다"라고 

정중히 말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주민들의 동의를 얻어야지 어떻게 허락없이..."

 

그런그런 말을 듣자 허영미선생님은 센터의 책임자인

유찬호 부제에게 수화기를 넘겼다고 한다.

부제가 어떻게 말했는지 잘 모른다.

나는 이 상황을 허영미 선생님으로부터 들었기 때문이다.

허영미 선생님에 의하면 유부제는 유감을 표하며 전화를 끊었다한다.

허영미 선생님은 언제라도 그런 일이 있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온건가...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 목사님은 바로 우리 앞집에 산다.

이사오던 날, 차를 빼달라는 부탁을 하다가 그 사모님을 알았다.

 

전화 사건이 있은 이틀 후인 일요일 아침,

교회를 가려고 대문을 나섰는데

우리 집 쪽문 바로 앞에 서있는 빨간 세피아에

커다란 종이쪽지가 두 장이나 붙어있었다.

"공중도덕을 문란하게 하는 자, 당장 나가시오. 00교회 000목사"

 

밤에 유부제에게 그 일을 물었더니 남편은 무척 재밌어했다.

우린 차가 없는데, 아마도 그 목사님이 우리 차인줄 알고

그렇게 쪽지를 써붙여놓은 것같다는 설명이었다.

항상 자기가 차를 세우던 자리이기 때문이란다.

난 별로 재미도 없었고 약간 불쾌했다.

 

그리고 어제,집에 들어가려는데 

목사님의 차가 대문 앞에 세워져있었다.

우리 쪽문만이 아니라 옆집 쪽문까지도 가로막고 있는 모양새였다.

바로 전날 일도 있고 해서 싸워보자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라면 기꺼이 싸워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남편에게 말을 했지만, 남편은 그냥 두라고 했다.

 

허영미선생님은 회원들에게 출퇴근할 때 

조용조용히 다니라고 주의를 준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좀 속이 상했다.

길도 맘대로 못 다니나....

이사오던 날, 이사짐을 나르는데 주민들이 구경하며

소곤소곤 귓속말을 하는 걸 보며, 느끼며

허영미선생님은 앞으로 닥칠 일을 걱정했단다.

다행히 목사님 말고는 별 반응이 없다. 

 

난 봉천동이 참 좋았다.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해서 봉천동에 살게 된 것이 기쁘다.

아파트에 살면서 쇼핑몰에서 시장을 보는 것보다

손님을 불러세우는 길거리 난전이 재미있고...

<봉천동이야기>에 나오는 그 따뜻한 사람들이 이웃이라는 게 기뻤다.

뭐...사실 그런 것들이 환상이었다는 건

며칠 안되어서 알았지만.

 

어쨌거나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이고

사람 사는 곳에서는 항상 있을 수 있는 일들을

회원들은, 센터는 지금 겪고 있는 것같다.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궁금하다

 


2001년 09월 13일 23시 58분 52초

출산과 육아를 먼저 치른 선배들은 
임신한 날 보면 "배 속에 있을 때가 편하지"라는 말을 하며
가여운 듯 바라보았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가라고 묻자 우리 교회 아줌마는
항상 따라다니는 혹이 있어서 몸이 자유롭지 못한 점이라고 말해주었다.

이제 70일 되는 하은이는 말 그대로 혹처럼 항상 나와 같이 있다.
젖을 먹이기 때문에 우리 엄마가 집에 있더라도
2시간 이상을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
그래도 나는 우리 하은이가 있어서 너무 좋다.

며칠 전에 <여인천하>를 보고 잠을 자려다
미국의 백 몇 층짜리 빌딩이 무너지는 뉴스 특보를 보았다. 
다음 날 푸른영상에 갔다가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비추어
3차 대전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는 말을 또 들었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어깨동무>에서도 그런 비슷한 분석을 했던 것같다.
<어깨동무>가 씌어진 때는 미국과 소련이 대치하고 있는 냉전시대였는데
그 때의 시나리오는 "1. 아랍의 대 미국 테러 
2. 미국의 복수
3. 소련의 참전" 이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래서 3차 대전이 일어날까봐 겁이 난다.
내 동생이 내년 2월에 입대를 한다고 그러고
우리 하은이가 있어서 더 그렇다.
걱정하는 내게 남편은 내 걱정은 상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마음이나 편히 가지라고 하지만, 난 정말 걱정이 된다.
아기 엄마가 되면서 나는 걱정이 더 많아지고 있다.

낮에 놀다가 케이블에서 <서부전선 이상없다>를 잠깐 보았다.
큰 구덩이에 시체를 밀어넣는 장면이었다.
먼 거리에서 찍은 것이었음에도 섬뜩하고 가슴이 아팠다.
전쟁이란 생명의 소중함이나 인간의 존엄성과는 영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내가 이만큼 자란 데에 우리 엄마가 얼마만큼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70일째 절실히 느끼고 있다.
하물며 다 자라 간 군대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이번 사고처럼 일을 하다 세상을 떠나게 되면
그 부모들은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세상의 평화를 바란다.
그 어느 때보다 간절하게

2001년 09월 28일 15시 31분 17초

낯선 바다를 떠돌고 싶다.

예전에 범수형은 이 곳에 내가 쓴 것들을 보면
측은해 보이기도 했지만 사치스러워 보인다는 말을 했었다.
맞는 말이다.

아기와 하루 종일 같이 있어야 하고
잠깐 잘 때면 빨래를 하거나 청소를 해야 하기 땜에
뭔가를 쓴다는 건 어렵다.
시간도 없지만 몰두할 만한 여유가 없다.

청소를 하다가
오랜만에 동물원의 노래를 들었다.
'때로는 우울한 날에 너를 만나
술에 취해 말을 할 땐...'
노래를 듣다 보면 그노래를 듣던 과거의 어느 시간으로
돌아갈 때가 있다.

요즘의 난 별로 우울할 것이 없지만
갑자기 술을 마시며 이런 저런 얘기를 주저리던 옛날이 생각났다.
그리고 뒤이어....
앞으로 내 인생에 그런 날이 오기는 힘들 것같다는 생각이...

작년 가을부터
빠삭빠삭한 후라이드 치킨에
차가운 생맥주를 꼭 한 번 먹고 싶었는데
지금도 여전히 난 못먹고 있고
앞으로도 먹을 날은 멀기만 한 것같다.

정규언니가 부럽다

2001년 09월 29일 11시 57분 39초

창영아 안녕~!!

모레가 추석이라 오늘 대청소했단다.
빨래도 하고....
시댁에 우리 아기 처음 데려가는데
깨끗이 해서 갈려구
이불도 빨고 방수포도 빨고 그랬지.

잘 있다니 다행이다.
프랑스도 지금 가을이니?
프랑스도 가보고 넌 참 좋겠다.

그런데 궁금한 게 있는데
사람들하고 말은 하고 지내니?
저번에 사무실에 제이미 왔을 때
너 참 말 잘하던데
그렇게 말 잘해도
사람들이 술 먹자고는 안하든?

저번날 푸른영상에 놀러갔다가
위성방송 어쩌구 하는 곳에 니가 간다고 그러더라.
그 말을 듣는 순간
인적없는 벌판에 홀로 서있는 첨성대 같은 곳에서 
전파 보내고 또 받고 하는 니 모습을 상상했는데
그런 건 아닌가 봐?

2년 후에 온다고 그랬대지?
건강하게 잘 있고
프랑스말 잘 배워와.
안녕.

2001년 10월 04일 00시 15분 22초

다들 추석 잘 보내셨는지요?
한 가지 알려드릴 게 있어서요.

<희망풍경>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월, 화 아침 6시 10분 쯤에 방송되는 장애인 관련 프로그램인데
이번 추석 특집으로 영화 <친구>를 소개했습니다. 

10월 1일, 2일 연속 상영이었는데
첫날은 차례상을 차리느라고 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가봤더니 회원가입을 해야 볼 수 있군요.
이튿날 엄마가 깨워서 봤더니
편집을 무척 잘한 것같더군요.
제가 만든 것보다 더 깔끔하게 나온 것같아
많이 배웠습니다.

궁금하신 분은 한 번 가보세요.
주소는 
http://www.ebs.co.kr/ebs/tv_radio/tv0203.html
이구요, 10월 1일, 2일 방송분입니다.

제 인터뷰가 쪼끔 나오는데
저희 엄마는 제 얼굴이 그렇게 큰 지 몰랐다고 하시더군요.
저도 제가 그렇게 생겼다는 데에 약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어쨌든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엄마가 기분좋아하시는 듯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기뻤답니다. ^^

그럼 안녕히들...


2001년 10월 09일 12시 06분 37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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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하.
저는 자유게시판에는 사진을 못 올리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아래 엄청 많은 글 올리신 분 보니까
사진을 올릴 수 있군요.

오늘은 하은아빠 생일인데
또 피정을 갔어요.
아침 일찍 갔는데요 내일이나 온다네요.
작년에도 그냥 넘어갔고 그래서 뭘 할까 생각하다가
우리 하은이 사진을 오랫동안 찍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사진 찍고 캡쳐 받아서 생일축하편지에 끼워보냈답니다.
너무 잘했지요~?

올린 김에 여기에도 올립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오네요.
이 비가 그치고 나면 엄청 추워진다는데
다들 건강에 조심하세요.

얼마 전에 '천하무적 감기백과'란 책을 구했는데
거기 보니까 감기는 주로 호흡기를 통해서 전염되기때문에
사람 많은 곳에 가지 말구요
그리고 바깥에 나갔다오면 꼭 손을 닦아야 한대요.

감기들 조심하세요.
저랑 하은이는 감기 걸릴까봐 집에만 있답니다.
그럼 안녕히들~~!


2001년 10월 14일 22시 47분 51초

1. 허중
은하가 어제 또 집을 나갔다.미사 내내 허중은 자꾸 뒤를 돌아다보았다.
허중의 얼굴은 어두웠고, '집 나간 은하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란다'는
유부제의 기도가 끝난 다음 허중의 눈엔 약간의 물기가 어려 있었다.

2. 현진
같이 사는 할머니(내가 어머니라고 부르는 우리 교회 주임신부님의
장모님)가 갑자기 쓰러지셨다. 뇌졸중이라고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중하진 않지만 왼쪽 손이 자유롭지 못하시다. 물리 치료 중인데 언제
퇴원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3. 나
신용카드와 은행카드, 그리고 약간의 돈이 들어있는 지갑을 통째로 잃어버렸다. 항상 들고다니던 작은 가방에 넣어뒀는데 가방째 잃어버린 것이다.
정신없는 나는 언제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에 헌금을 하려고
가방을 찾는데 온 집안을 다 뒤져도 안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신용카드였다. 만약 거리에서 잃어버렸다면, 그리고 누군가 카드를
썼다면 우리집의 경제사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손실이 있을 것이다.
미사 직전까지 가방을 찾다가 정리되지 않은 마음으로 미사에 임했다.

4. 유부제
하은이의 백일이었던 10월 12일, 우리는 하은이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날부터 복통과 설사를 하던 유부제와 함께
난 아침 일찍 병원을 찾았다. 처음엔 장염이라고 했으나 너무나 복통이
심해 내시경을 해보기로 했다. 무통내시경이라서 유부제는 마취상태였고
보호자인 나는 끔찍한 화면을 보았다. 상처투성이인 위장을 보다가 난 비명을 질렀다. 의사는 도대체 이 상태가 될 때까지 어떻게 참고 있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유부제의 고통의 원인은 장염이 아니라 
병명도 긴 위장질환이었다. "천공직전이예요!"의사는 단호하게 외치며
나보고 나가있으라고 했다.
그 날 이후 유부제는 물만 마시고 있다. 나흘째의 단식이라 힘이 드는지
미사 집전 내내 그의 입술은 말라있었다.

5.황진이
그동안 배가 불러있던 센터의 귀염둥이 황진이가 새끼를 낳았다.
무려 여섯마리. 새끼를 낳아서 예민해진 황진이는 누가 오면 짖기부터 했다. 황진이는 미사를 드리는 예배실 앞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자신의 새끼들을 우리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신에게 새 생명을 위해 기도했을지도 모른다. 

지갑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은하 걱정을 하는 허중, 무슨 생각을 하는지 
예상이 안되는 현진, 이렇게 세 명의 신도를 앞에 두고 유부제는 열심히
설교를 했다. 센터의 미사는 항상 이렇게 조촐하다. 교회공동체를 꿈꾸는
장애인센터가 자체 미사를 드린 지 2개월째. 첫 미사날, 11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무도 오지 않아 나는 제대 앞에 앉은 유부제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봤었다. 다행히 센터 선생님들이 왔었고....

허중, 현진, 나는 매주 미사에 참석하고 있다. 더 많은 사람이 오면 더 좋을 수고 있겠지만 넷이서 드리는 미사도 평화롭다. 우린 미사가 끝나면 보라매공원에 놀러가기도 하고 노래방에 가기도 한다. 그런데 오늘은 참 힘들었다. 우리의 모든 상황을 알고 있는 유부제는 미사 도중 몇 번이나 모든 근심을 하느님 앞에 내놓으라고 얘기해주었다. 어쨌든 미사를 드리고 나니 조금 마음은 편해진 것같았다.

미사 후 먹을 국수를 삶고 있는 내 옆에서 허중은 "은하 집에 없겠지요?"하고 자꾸 물었다. 어제 둘은 만나기로 했었는데 허중은 새로 개업한 엄마의 
식당일을 도와야 했기 때문에 만나지 못했다. 허중은 자꾸 은하얘기를 
하다가 "어제 만났으면 안나갔을텐데..."하며 말을 흐렸다.
식사가 끝나기 무섭게 허중은 집에 간다며 센터를 나섰다. 

현진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으며 나는 집에 돌아와 또 방을 뒤지다가,
또 푸른영상에 전화도 했다가(혹시 그곳에 가방을 두고 왔을까봐)
그러다가 가방을 찾았다. 
유부제는 미지근하게 데운 이온음료를 마시고 곤한 잠을 잤다.
그리고 황진이는 새끼들에게 젖을 물렸다.

오늘 일기 끝.

2001년 10월 19일 22시 05분 3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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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떠밀고 싶은 걸~~! ^^ 

하은이가 뒤집기를 한다, 아니 못한다. 
그 조그만 몸으로 돌아누우려고 막 힘을 쓰는데 
몸뚱이는 돌아가지만 머리에서 걸린다. 
손가락 하나로 머리를 약간만 들어줘도 홱 뒤집는데... 
내겐 손가락 까딱하는 그 힘이 
아이에겐 제 힘에 넘치도록 큰가보다. 
낑낑대며 애쓰다가 나중엔 잉잉 운다. 
마음먹은대로 몸이 안 움직이니까 낑낑대는 걸 보면 
귀엽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하다. 

엄마 말씀이 애들이 뭐 하나를 하려면 
(예를 들어 뒤집기를 하거나 기거나 걸음마를 하는 등) 
많이 아프다고 한다. 
그땐 그러려니 했는데 하은이를 보니 왜 그런지 이해가 간다. 
이제 107일째, 새털같이 많은 살아갈 날을 생각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거겠지만 
이 자그마한 아이는 
어찌되었든 제 힘으로 땅을 딛고 서기 위해 
매일매일 꽁꽁 힘을 쓴다. 
누가 도와줄 수 없는 저만의 일이다.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공지영의 <수도원기행>을 읽는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다. 
문화상품권을 선물받았는데 어느날 난 마을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서점을 구경하다가 
새로나온 아기 잡지가 있어서 샀는데 
집에 돌아와 펼쳐보니 3~4세용이었다. 
(난 이런 정신없는 짓을 자주 한다) 

서점에서는 돈으로는 안바꿔준다기에 눈물을 머금고 
<수도원기행>을 샀다. 
공지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내가 남편을 만나고 10년만에 다시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기까지 
내 일상에서 깜짝깜짝 날 놀래키며 일어났던 일과 
비슷한 경험들이 이 책에는 나와있다. 
그래서 기분이 나빠졌다. 
그런 기분 있잖은가? 
나만의 것, 나만의 향기라고 생각했던 것이 
다들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때의 그 허탈함 같은 것. 

그래서인지 진도는 빨리 나가지 않고 
하루에 1~2페이지씩 밖에 못 읽는데 
읽다보니 맘에 드는 구절이 나와서 여기에 옮긴다 

-장 루슬로의 시이다 

다친 달팽이를 보게 되거든 
도우려 들지 말아라 
그 스스로 궁지에서 벗어날 것이다 
당신의 도움은 그를 화나게 만들거나 
상심하게 만들 것이다. 

하늘의 여러 시렁 가운데서 
제 자리를 떠난 별을 보게 되거든 
별에게 충고하고 싶더라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라. 

더 빨리 흐르라고 
강물의 등을 떠밀지 말아라 
강물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2001년 11월 19일 23시 50분 43초

황진이가 새끼를 낳은 지 1달이 넘었다.
이제 강아지들은 아장아장 걸어다니고
"깡깡" 짖으면서 개같은(개다운?) 행동을 하고 다닌다.
다녔다는 말이 옳겠다.

토요일날 보니 6마리에서 4마리로 줄어있더니
오늘은 2마리만 아장거리며 마당을 돌아다녔다.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는데 이렇게나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난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주려고 했는데
헤어짐은 너무나 갑자기 찾아왔다.

나는 하은이를 낳은 지 140일이 다 되어가고
자나 깨나 하은이를 끼고서 살아가는데
황진이는 그렇게 하나씩 새끼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게 안됐다.

사람은 60년을 살고 개는 길어야 15년을 산다니
앞으로 펼쳐질 하은이와 나와의 인연을
더 빨리 더 축약해서 겪고 있는 것이겠지만
황진이 보는 마음이 영 안쓰럽다.

난 그렇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헤어짐'이라는 걸 감당하지 못해왔다.
목포나 서울에서 학교 다니느라 떨어져 살던 언니, 오빠들이
명절 때 집에 왔다 도시로 돌아가고 나면
며칠을 텅빈 마당을 보며 울먹이곤 했었다.

20대가 힘들었던 것도
그 놈의 헤어짐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질질 끌려다니던 관계들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직 난 내 딸을 떠나보낼 시기가 아님에도
황진이와 새끼들의 '작별'이 마음 아프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오히려 잘된 일일 수도 있다.
황진이의 새끼들은 센터 선생님들의 심사숙고 끝에
뛰어다닐 수 있는 마당이 있고,
묶이지 않아도 되는 시골에 있는,
잡아먹지 않고 키우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있는 집으로 갔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이라서 안부를 물을 수도 있다.

잘 준비된 헤어짐은 어줍잖은 동거보다 훨씬 낫다.

이건 딴 얘긴데
내가 나름대로 살림의 지혜라고 생각했던 게 있다.
그건 잡동사니 서랍인데
우리 남편은 밖에서 들어오면 주머니의 것을 다 꺼내어
TV나 책상 위에 얹어놓는다.
그런 식으로 물건들은 제 자리를 잊은 채 여기 저기 돌아다니는데
처음 얼마동안은 잔소리도 하고 내가 치우기도 했지만
그 스트레스가 생각보다 컸다.

그러다가 내가 생각한 건
잡동사니 서랍을 만드는 거였다.
서랍 하나를 통째로 비워놓고서
손님이 오셔서 급하게 청소를 할 때
모든 물건들을 다 쓸어넣는 것이다.
그러면 겉보기에 깨끗해서 좋고
찾을 물건이 있으면 잡동사니 서랍을 뒤지면 되니까
참 좋은 생각이라 자부하며 살아왔는데...

문제는 잡동사니 서랍이 하나에서 둘로,
나중에는 세개까지 늘어나버렸다는 거다.
산후조리를 위해 집에 오셨던 엄마는
옷을 넣을 서랍이 없어서 여기 저기를 보시더니
잡동사니 서랍을 치우라고 하셨다.
물건을 절대 못 버리는 내가 치울 게 없다고 하자
엄마는 하나하나 물건들의 용도를 물어보시더니 
3개의 서랍을 순식간에 하나로 줄이셨다.
옷장은 그렇게 자신의 용도로 돌아왔다.

내가 많이 노력해야 하는 것,
그건 잘 버리는 것,
그리고 잘 헤어지는 것.
하은이가 태어날 때부터 같이 살던 엄마가
이제 고향으로 내려가신다.
거기서부터 연습해야겠다.
잘 헤어지기.

2001년 10월 25일 21시 56분 54초

가끔씩 푸른영상 사무실에 갈 때마다
모습을 뵐 수가 없어서 작업 막바지라 집에 계신 줄로만 알았는데.
건강이 나빠지셨다니 걱정되는군요.
형 빨리 건강해지길 빕니다.
형이 건강해지셔서 푸른영상 사무실에 오시면
제가 형에게 특별선물로 우리 하은이가 뒤집기 하는 모습을 보여드릴께요.

무엇보다 기순언니, 걱정 많이 되시지요?
저도 하은이 백일날 갑자기 남편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가
수면유발 내시경하는 걸 지켜보면서 별 생각을 다 했습니다.
형편없이 헐은 위벽을 보여주며
간호사가 "뭔가 잘못 되어도 크게 잘못 됐어요"하는 소리를 듣고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우리 하은이 이제 백일인데...'하는 거였어요.
조직검사까지 하고서 조마조마 기다리면서
별 일 아니라는 결과를 듣기까지 정말 별 생각을 다 했었답니다.

부부란 그런 거 같아요.
아무 일 없을 땐 별 생각 없이 지내다가
갑자기 아프니까 '저 사람이 정말 소중한 사람이구나...'하는 생각,
아파서 아무 것도 못 먹으니까 마음 아프고 그러더라구요.

뭐 이제 밥 먹으니까 또
옷 아무 데나 벗어놓는다고, 애기한테 뽀뽀해서 잠깨워놓는다고
이런 저런 잔소리를 하게 되지만요.

그래도 남편이 아파서 어디 안가고, 피정도 안가고 
집에서만 앓아누워있으니까 좋기도 하대요.
죽도 쒀주고 그러니까 내가 큰 일 하는 것같아 약간 으쓱해지기도 하고.

선호형 건강 빨리 되찾으시고
기순언니, 선호형한테 잘해주실 거지요? ^^
건강한 얼굴로 두 분 뵙고 싶어요.

2001년 11월 23일 17시 52분 52초

남편이 피정을 간 사이에 딸이 아팠다.
하은이 태어나서 처음 아픈 것이다.

화요일날, 큰언니가 엄마 선물로 옥장판을 사왔다.
남편이 피정을 갔기 때문에 난 엄마랑 같이 잤고
하은이는 항상 날 따라다니기 때문에 셋이서 함께 잤다.
문제는 그 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뜨끈뜨끈 지지는 게 너무 좋아서 엄마랑 나는 옥장판 위에서 자고
하은이는 바닥에다 이불을 깔고 재웠는데
우리가 더워 이불을 안 덮는 것처럼
하은이도 더울 거라고 생각, 이불을 안 덮어준 것이다.

수요일부터 하은이는 맑은 콧물을 질질 흘리고
또 눈물까지 흘렸다.
허영미 선생님 말로는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코가 막혔기 때문이고 감기 시초라고 했다.
병원에 빨리 데려가라는 허영미 선생님과 엄마의 성화를 견디며
<황금빛 똥을 싸는 아기>라는,
자연요법에 대한 책을 보고 또 보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생각 못한 바는 아니었지만
갑자기 찾아왔다.
병원엘 데려갈 것인지, 말 것인지를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하은이는 열이 오르고 자꾸 울었다.
엄마는 왜 엄마 방으로 왔냐부터 시작해서
청소를 안해서 그렇다, 내가 잘 안 씻어서 그렇다 그러면서
무지막지하게 욕을 하셨다.
하은이는 계속 울고....

나는 하은이를 업고 병원으로 향했다.
마음 속은 복잡했지만 겁이 더 났다.
자연요법에 의하면 아토피나 감기나 모든 것은
불순물을 없애기 위한 몸의 자정작용이다.
따라서 젖을 먹이는 대신 죽염과 생수를 먹이고
관장, 풍욕, 냉온욕 등으로 노폐물을 없애줘야한다.
자연요법의 기본은 몸의 자정작용을 믿는 것이다.
나는 내 딸은 안 아플 줄 알았다.
책을 봐도, TV를 봐도 젖을 먹고 자라는 아이들은
안 아프다고 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나는 내 딸이 자신의 병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며 지켜봐야 했다.
하지만 난 자신이 없었다.
그냥 중간만 가자...남들 하는 대로 하며 사는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병원엘 데려갔다.

병원 대기실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하은이는 눈물을 뚝뚝 흘려
간호사들과 아줌마들까지도 불쌍해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의사는 약을 쓰지 말자고 그랬다.
집에 가서 목욕이나 잘 시키라는 것이다.

그 밤에도 하은이는 잘 자지 못했다.
또 그 다음날 밤에도.
밤마다 열 때문에 뒤척이는 딸 옆에서
나는 차가운 물수건을 머리에 얹어주며
내일은 병원엘 가야지, 가야지 했다.

그렇게 이틀밤을 보낸 지금
하은이는 이제 괜찮은 것같다.
나는 내 딸이 대견스럽다.
그런데 앞으로 또 같은 일이 벌어지면
난 어떻게 해야할 지 모르겠다.

그저 드는 생각 하나.
우리 엄마한테 많이 고맙다는 것.

난 아들을 많이 기다리던 집의 막내딸이다.
내가 뱃속에 있을 때 동네사람들은
태몽도, 입덧도, 그리고 배 모양도 다 아들이라며
이제 저집 엄마 고생 끝났다고 축하해줬다 한다.

내가 태어나던 날,
외할머니는 기분좋게 오셔서 막 태어난 아기를 씻기다가
딸인 걸 발견하고는 하늘을 욕하며
울면서 집으로 돌아가 버리셨다고 한다.
난 그런 딸이다.

내 기억엔 아버지가 날 예뻐하셨던 기억밖에 없는데
얼마 전에 언니가 그 이유를 말해주었다.
내 동생은 온 동네가 기다리던 아들이었고
그것으로 우리 엄마는 출산을 더이상 안하게 되셨는데
아버지는 내가 내 남동생이 들어설 길을 닦아놓은
터닦이라고 예뻐하셨다는 것이다.

엄마에 대해 말하라면
난 어렸을 때부터 같이 살고 있는 내 생일상은 한 번도 안 차려주면서
서울에서 학교다니는 오빠 생일이 되면
방바닥에 깨끗한 짚을 깔고 그 위에 상을 차리던 엄마를 기억한다.
또 동생하고 싸울 때 내가 혼이 더 많이 났던 것같다.

하지만 이젠 조금씩 알 것같다.
내가 이렇게 살아있는 시간까지
엄마가 얼마나 많은 밤을 지새웠을까.
딸이 엄마와 친구가 될 수 있는 건
바로 이런 경험을 공유하기 때문인 것같다.
엄마한테 잘해야지. ^^


2001년 12월 14일 09시 52분 0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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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지난 인디포럼 2001때 객석에 앉아계셨지요?
영화가 끝나고 제게 출산을 하면 연락을 달라고 하셨는데...
아기 신발이라도 하나 보내고 싶다고 하시니
옆에 있던 경화가 
"혹시 신발 가게 하시나요?" 하고 물어서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때 처음 뵈었었는데
사람들은 다들 우리가 서로 아는 사이인 줄 알았다더군요.
그렇게 친근하게 말씀을 하시니
그렇게 오해할만 하지요.
그 때 주신 노란색 명함, 다이어리 표지에 끼워놓고서
연락 한 번 드리려고 했는데 벌써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습니다.

우리들은(저와 제 아기) 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구요
친지분 아기가 저희 애보다 18개월 정도 빨라서
옷이며 신발이며 다 얻어서 쓰고 있습니다.
다 제 복이지요. ^^

제주도는 따뜻한가요?
작은아버지가 제주도에서 감귤농장을 하시는데
귤이 남아돌아서 썩어난다며 엄마가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옛날엔 대학나무라 부를 정도로 귀했다는데.

그 때, 인디포럼 2001때...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좀 시무룩해 있었는데
동우님이 질문 있다고 손을 드신 다음에
"수고하셨고 순산하세요"라고 말씀하셔서
좀 웃고나니까 기분이 좋아졌더랬습니다.

<친구>-나는 행복하다 두번째 이야기는
EBS 다시 보기에 가시면 일부를 보실 수 있는데요

http://www.ebs.co.kr/ebs/main/main_body.htm
으로 가셔서 <희망풍경>이라는 프로그램의
10월 1일, 2일 방송분인 58, 59회에 일부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론 담당PD가 저보다 더 편집을 잘하신 것 같더군요.
그 작업이 좋았었는지 오한샘PD는 얼마 전 
76, 77회엔 <나는 행복하다>를 소개했습니다.)
<희망풍경>엔 에피소드 세 개 중 한 개만 소개되어 있답니다.
테잎을 구하시면 세 개를 다 보실 수 있으시죠. ^^

그럼 동우님 건강하셔요.
고마움을 전하며....

2001년 12월 13일 10시 14분 08초

지난 주부터 어제까지 동생 결혼식 때문에 바빴습니다.
토요일날 동생 결혼식 때문에 광명 집에 가 있었거든요.
해남에서 올라오는 친척들하고 우리 식구들 먹을 음식 장만에
이런 저런 준비로 바쁜 엄마를 따라다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혼식이 끝난 월, 화요일은 러시아에서 온 언니가 
러시아 조카들 줄 먹거리에 장난감 같은 걸 산다고
남대문이며 문방구 다니느라 바빴구요
(또 전 따라다니기만 했지만요)
어젠 떠나는 언니 배웅하느라 공항까지 다녀왔습니다.

딴 때보다 더 허전해서 엄마랑 둘이서 마음 달래고 있는 중입니다.
6남매의 마지막인 동생이 결혼을 해서인지,
아니면 날씨가 추워서인지
러시아 언니까지 떠나고 나니까 마음이 허전해서
엄마랑 둘이서 TV만 멍하니 보다가
또 밀린 빨래를 해야 해서 어정어정 다니고 있습니다.

빨간눈사람 경순언니네가 SBS에서 나온다고 해서
열심히 봤는데요,
전 언니네가 나와서 설명하는 줄 알았는데
설명은 딴 사람이 하고 언니네는 거의 안나오더군요.
엄마한테 내가 아는 사람이 TV에 나온다고 해 놓은 터라
엄마는 누구냐고 자꾸 물으시다가
번지점프한다고 잠깐 비친 경순언니를 가리켰더니
"아니 저거 보라고 이때껏 새엄마도 못 보게 했냐?"하시면서
가차없이 9번으로 돌리셨습니다.
왜 방송시간이 <새엄마>랑 겹치는지 안타깝군요.

축하의 말들, 정말 고맙습니다.
전혀 예상치 않았던 일이라 좀 황당하고 또 당황스러웠습니다.
(수상소감에서도 한 말이지만)
영화를 만들고 나면 항상 등장인물들에게 빚만 진 기분이 듭니다.
상을 받고 나니까 그 마음이 더 커지더군요.
99년 처음 작업을 한다고 기획안을 들고 갔을 때
지금은 그만 둔 센터 선생님이 제게 물었었지요.

"영화를 만들어서 류미례선생님은 유명해지겠지만
우리 회원들에겐 뭐가 돌아오지요?"

물론 영화를 만들고 나면 항상 회원들은 기뻐하고
요번 영화같은 경우엔 쉬는 시간이명 항상 영화를 트는 회원들 때문에
제가 몸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감사하고 있습니다만
그래도 빚진 기분은 여전하군요.

어제 삼동이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푸른영상에서 센터에 선물을 하기로 했다는군요.
좀있다 또 남편이 전화를 해서
푸른영상에서 선물을 준다고 했다며
무척 기뻐하더군요.
선생님들하고 회의를 해서
김치냉장고를 받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모았답니다.
우리 집 창문 바로 앞에 
김치항아리를 묻어두었었는데
이제 이갑순 선생님이 찬 겨울바람 맞으며 김치 꺼낼일이 없어져서
정말 다행입니다.
배려해주신 푸른영상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오늘 발견한 건데
한국독립단편영화제 데일리뉴스에
제가 푸른영상에 상금을 기탁하겠다고 한 것으로 인터뷰가 나왔더군요.
사실은 아닌데 말이지요. 꼭 제 걸 푸른영상에 드리는 것 같잖아요. ^^
인터뷰하면서 전 그냥
"푸른영상에서 제작했으니까 푸른영상이 받는 건데요"하고
간단히 말을 했을 뿐인데..

<나는 행복하다>에서부터 <친구>까지
어줍잖은 저의 작업들을 비디오로 만들어서 회원들께 보내고
영화제에 푸른영상 이름으로 출품을 할 때마다
좀 쑥스럽고 그리고 항상 고마웠습니다.
특히나 임신과 출산 때문에 불편한 저를 대신해서
촬영을 해준 강길형과
마무리를 해준 창영을 비롯한 푸른영상 식구들께 감사드립니다.

강길형은 떠나고 없어서 더 고맙습니다.
에필로그에 넣을 가족소풍 땐
숨쉬기도 힘들만큼 몸이 무거워서 도저히 촬영할 자신이 없었는데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종일을 함께해줬던 강길형에 대한 고마움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을 것입니다.
새만금 작업을 돕고 싶었는데 제대로 하지 못해 미안하구요...
이름을 밝히지 못할 만큼의 수많은 분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언제나 되면
영화를 만들고나서 부끄럽지 않게 될지 잘 모르겠군요.
^^
아무튼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1년 12월 21일 11시 35분 0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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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은이 백일이 지나고
이제 젖살이 서서히 빠져서인지
쌍꺼풀도 두개가 다 생기구요
무엇보다 기쁜 것은...
이제 목이 생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99년에 하은이아빠를 처음 만났을 때
전 깜짝 놀랬습니다.
세상에 저렇게 목이 짧은 사람도 있다니...하면서요.
하은이가 목이 거의 없어서
혹시 아빠를 닮은 건 아닐까, 내심 걱정이었는데
이제 서서히 목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같이 기뻐해주셔요.
호호호

2001년 12월 23일 23시 00분 28초
링크            첨부          1223.jpg(0 Byte)

1. 갑자기 하은이가 기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얄리의 모습을 보고 자극을 받은 게 분명합니다.

얄리언니, 혹시 얄리는 손가락 빨지 않던가요?

2. 오랜만에 푸른영상 사람들과의 술자리 참 좋았습니다.
몇년 전, 엠티에서 경화가 준비해간 프로그램 중에 그런 게 있었지요.
'나는 ( )할 때 행복하다'의 괄호 안에 10개를 써보는 거요.
그 때 전 '난 푸른영상 사람들과 술 마실 때 행복하다'고 썼었어요.
거의 2년만에 가져보는 편한 자리였습니다. 
원래도 그랬지만 푸른영상에 들어온 후로는 
친구들 만나기가 더 어려웠었습니다.
또 어렵사리 친구들 만난다 하더라도 살아가는 얘기들 하다보면
말문이 막히는 경우, 참 많았었거든요.

다큐멘터리를 만들며 살아가는 일도 그렇지만
푸른영상 사람들하고 술마시는 일은
징검다리를 딛는 것같은 기분을 느끼게 합니다.
살아가는 일은 물 흐르듯이 그저 흘러가는데
가끔씩 놓여있는 징검다리가 감동을 주기도 하고 힘을 주기도 하지요.
동생 이바지 음식 들어오는 것 때문에 
오래 머물지 못해서 정말 아쉬웠습니다.
언제쯤 또 그런 시간이 제게 올런지....

3. 이바지 음식이 들어온다고 광명 집에 갔는데
고기, 과일, 떡 같은 것과 더불어 정말 엿이 왔습니다.
6남매의 막둥이인 동생은 누나가 넷인지라
올케 또한 시누이가 넷이나 생겨버린 것이지요.
예로부터 이바지 음식에는 엿을 챙겨와서
시누이들은 엿 많이 먹고 입이 붙어버려서
제발 입바른 소리 하지 말라고 했다더니
정말로 엿이 많이 왔더군요.

전 의치가 여섯개에 때운 이빨도 하나 있어서
엿은 전혀 먹지 못했습니다만
동생네 댁한테 엿 안먹어도 별 얘기 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좋은 시누이가 되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2005년 02월 28일 20시 36분 02초

<엄마...>가 극장개봉되어 더많은 관객들과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변에 널리 알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래 그림을 클릭하시면 자세한 정보를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수정'을 클릭하시면 원문을 볼 수있는데
자주 가는 사이트에 옮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

2005년 09월 21일 22시 09분 50초

아마도 <송환>의 성공 덕분이었던 것같습니다.
매일매일 상업게시물들을 지웠는데
어느 날부터는 상업게시물 지우는 데에만 하루를 다 보내기도했습니다.
그러면서 홈피는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급기야는 홈피를 닫아걸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어쩔 줄 몰라하다가
진보넷 자원활동가 레니에게 부탁을 드렸고
이렇게 소박하게나마 다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레니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큰 변화가 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겠지만
저희들은 변화보다는 정상화에 촛점을 맞췄구요
상업게시물의 폭탄으로부터 살아남으면서도
소박하게 우리들의 놀이터나 사랑방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랬는데요 그렇게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편안하신가요?
편안한 곳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모두들 다시 돌아와주세용~~
저희들 모두가 설레며 기다립니다.
기/다/리/고/있/습/니/다


2006년 05월 05일 10시 57분 08초

**어제 쓴 글입니다.

혼자 사무실에 있습니다.
푸른영상의 모든 친구들은 지금 대추리에 있습니다.
어제 밤에 <대추리의 전쟁>을 만들고있는 일건과 준호가 
대추리로 떠났습니다.밤의 삼각지에는 동원형과 재영이 갔었고 
이제 정현과 재영 또한 대추리로 갔습니다.


방금 문방구에 다녀왔습니다.
길을 막고 선 사람들이(경찰이겠죠?) 신분증이 없으면 들여보내지 않는답니다.
정현과 재영은 신분증이 없어서 못 들어가고 있었고
결국 정현의 주민증을 복사해서 팩스로 보내면
팩스를 가진 어딘가에서 정현이 팩스를 받기로 했습니다.
이제 정현과 재영도 대추리에 들어가겠죠.

아침에 일어나서 TV부터 켜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피투성이가 되어서 끌려가고
신부님들은 옥상에서 플래카드를 들고 계셨습니다.
설마 설마....그래도 끝까지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정말 일어난 것입니다.
YTN뉴스를 계속 녹화하면서 사무실을 지킵니다.
준호에게 전화를 했는데 전화받는 저 너머에서 뭔가 쿵쿵 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스릴러영화에서 자주 보는 문 무수는 소리 같았습니다)
그리고 전화는 곧 끊겼습니다.
준호를 잠깐 걱정하다가....
준호만이 아닌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그리고 일건이 찍은 영화에서 보였던 선한 눈빛의 대추리사람들이 모두 걱정되었습니다.

결국 이렇게까지 하는군요.
다음 뉴스에는 보상금 어쩌고 하면서
'타워팰리스에 사실 농민들' 어쩌구 하는 댓글들이 달려있었습니다.
님비현상 어쩌고 하는 말들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정말 모르나봐요.
평택에 미군기지가 들어서는 이유를.
아시아에서 가장 큰 기지라던데요.
미군기지 문제가 평택 농민들의 문제라고만 생각하나봐요.
정말로 그분들은 이 싸움이 보상금 더 받으려는 걸로 아나봐요.

정말 그럴까요?
부모 대에 쫓겨났으면 자식대에는 편하게 살아야지.
한숨쉬던 할머니들.
실제로 이번 싸움이 일어나기전에
평택의 젊은 농부들은 50년대 부모들이 어떻게 쫓겨나왔는지를 몰랐대요.
밤에 조상들의 유골을 수습해나오셨다는 조선례할머니
아무 대책없이 쫓겨나서 노인들과 아이들은 죽어나갔던 53년의 그 겨울을...
그분들의 자식들은 몰랐대요.
먹고 살려고 바닷물을 막고 물을 퍼내고 돌아와보면
죽어있던 아이들.... 그렇게 만들어낸 땅을 미군은 다시 뺏으려고 하고
그리고....경제효과 운운하며 정부관계자들은 어떠한 동요없이 
그 곳에 미군기지 건설을 추진한답니다.

살고 싶은 곳에서 살겠다는 게 죄인가요?
평택의 흙이 얼마나 차지고 풍요로운지는 가서 보기만 해도 압니다.
그 풍요롭고 싱그러운 땅에 콘크리트를 붓고
수많은 생명들이 열심히 살아가는 그 땅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겠다는 발상에
왜 의문을 표하지 않을까요?

평화가 단지 우리의 꿈이 아니라
지금은 우리가 살아가기위한 최소 조건입니다.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미군기지가 건설된다는 말은
전쟁의 최전방기지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평택의 싸움이 우리 모두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미군의 세계화전략을 몰라도
경제효과는 몰라도
살고 싶은 곳에 살겠다는 백성의 소박한 그 의지 하나조차도 짓밟아버리는
이 정권의 존재의미에 대해서 의문을 표합니다.
정권타도투쟁을 시작해야할 때입니다.
그 투쟁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오늘(5/4) 갈 수 있는 사람들은 당장 대추리에 가서 연대합시다.
*오늘 대추리가 어렵다면 저녁 7시 광화문 집회에 참여합시다.
*5월 5일 대추리에서 2시에 만납시다. 
*평화선언을 이어나갑시다.
*계속 저 폭력을 주시하고, 무엇이 평화인지 생각합시다. 
*폭력과 억압에 저항하는 행동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선동입니다.먼저 행동하는 것이 선동입니다. 우리 선동합시다.
*말을 합시다. 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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