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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1)

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1)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3-1) - 노동자 선동하는 송경동 시인

송경동(시인)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 편집자 주


세계적 시야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시 부문 수상자인 노동자 시인 백무산(35) 씨는 “이 상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로 받아들인다” 기운찬 발언으로 수상 연설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조국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보호받을 재산도, 보장받을 자유도, 꿈꾸는 미래도 없습니다. 천만 노동자계급을 외면하는 조국은 누구의 조국입니까?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싸움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보다 인간답게 살겠다는 집단적 분노,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사상은 바로 그런 현장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자, 반민중적인 6공에 대해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연설 도중 오른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선창하기도 했다. “출판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기성 문학계가 마련한 상을 노동자가 받는 그런 시상식은 우리 문학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에 걸맞는 그런 수상 연설은 ‘정신적 귀족주의’로 잘 다듬어진 시상식장 분위기를 일거에 교란시켜 버렸다.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식을 다룬 한 언론의 신문기사 내용이다. 신문기사의 내용도 가히 혁명적이다. 분단 이후 맥이 끊겼던 사회주의 문학, 노동문학의 재현이 마침내 이루어지던 시기. 모든 좋은 문학은 ‘노동문학’이라는, ‘노동문학’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가 자연스레 통용되던 시기의 사회 분위기를 위 시기는 함축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리곤 다시 15년여가 흘러갔다. 그 시절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 초반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었다.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혁명적 당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자체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세계사적인 전향’을 시도한 물결은 이제 막 혁명‘적’ 진출의 발을 떼고 있는 한국사회 ‘계급’에게는 대홍수와 같은 것이었다.

근대 시민혁명을 넘어 선 시대의 꿈의 키워드로 불리던 민족해방운동, 그리고 노동자계급혁명의 결과는 보이는 현상으로만 따지자면 비참하고 참담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나왔던 비판의 요지들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도식화 위험을 감수하고 일별해 보면 이렇다.

무오류의 당은 오류투성을 넘어 부패했고,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서구의 합리적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인간적이지 못했다. 노동자 직접민주주의로 이야기되는 권력의 해체와 분산, 평등은 요원해지고 사회주의 1당 독재는 오히려 관료주의와 권력의 집중을 가져왔다. 그 아래에서 민중권력은 점점 요식화 되고 새로운 선민들이 키워졌다.

사회주의적 생산(중앙계획경제)은 오히려 무능을 낳았고, 퇴보를 낳았다.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자율적 공동체는 꾸려지지 않았다. 민중들의 창의력은 배제당하고 수동적 인간형들이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전체 생산력이 떨어지고, 근로 의욕은 감퇴되면서, 창조적 노동의 힘은 키워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이후를 목표로 싸워왔던 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사적소유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자유경쟁(우리는 이를 기회의 균등이 배제된 불평등 경쟁이라고 불러 왔다. 사악한.)을 인정하고, 사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했다. 독점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과다 축적을 인정했다. 자본주의는 계급해방 무력투쟁을 통해서, 통해서만 물리쳐질 수 있고, 절멸시켜야 되는 사회의 악에서 더불어 공존해 나가야 할 필요악 정도로 복권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어떤 이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이후는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갖게 했다. 자본주의의 꽃인 사적소유, 자유시장, 자유경쟁, 부르주아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선 더 이상의 꿈의 체제, 꿈의 제도, 꿈의 주체들은 없다는 역사의 죽음을 선포케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반동의 물결이 득세하자 우리들의 삶의 가치들도 바뀌어 갔다. 자본주의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 설 수 있다는 구체적 꿈을 유보 상태로 두는 순간 자본주의 넘어서려는 모든 인간적 고뇌와 실천, 희생 역시 더 이상 덕목이 아닌 무의미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런 낭만적 포즈처럼 되어 버렸다.

자연스레 백무산 시인의 낙관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국사회 내의 ‘혁명적’ 분위기는 사그러들었다. 혁명적 분위기가 사그러들었다는 것은 혁명적 주체들 역시 사그러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확고하고 명징하게 모두를 설득할 수 있고 스스로도 최면에 빠질 수 있는 혁명적 이론이 없으니 혁명적 주체들이 없고, 혁명적 주체들이 없으니 혁명적 대중들과 혁명적 상황들이 없고, 혁명적 대중들과 혁명적 상황들이 없으니 혁명적 꿈들조차 더 이상 꾸어지지가 않았다. 이제 막 역사의 무대로 화려하게 등장한 ‘노동계급 문학’이 퇴조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꿈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리얼리즘에서 꿈이 빠질 때 자연주의만이 남듯 쳇바퀴도는 일상만이 남은 현실이다. 현실은 철저히 자본주의의 대지 위에 뿌리박을 때만이 최소 생존이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과거와는 다른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들과 자리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예는 정말 부지기수로 많았지만 일정한 패턴을 따랐다. 노동자 곁에서 시민 곁으로 자본가 곁으로, 거리에서 공간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희생에서 사적이익으로, 실천에서 지식으로, 단체에서 기업으로, 당파성에서 관용으로, 민중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실천에서 이론으로, 이름없음에서 이름있음으로 등등.

물론 이러한 현상을 노동자계급문학이라는 확고한 자기 당파성 속에 서 있는 무리들만의 상처로 바라볼 까닭은 없다. 전체 사회의 변화였고, 시대 담론의 변화였고, 전체 사회 대중들이 이런 변화로 인한 결과 속에 있다. 전체 민족민중문학이 퇴조기를 맞았고, 더 나아가 ‘문학’이 위기를 맞았고, 더 나아가 삶의 문화 전체가 위기에 몰렸다.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많은 문화상품들 속에서도 민중들은 문화생활을 찾지 못한다.

인터넷 게임이, 문화상품의 소비가 문화적 삶을 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상품들 자체가 문화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삶이 문화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을 부추긴다는 기제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의 문화상품들은 노동으로부터의 자기 소외와 더불어 2차 소외를 경험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가치와 부로부터 더욱 더 고립되는 현대인들의 삶 그 자체가 포괄적인 노동의 문화이다. 운동의 부문화를 넘어 총체적이고자 했던 노동자계급문학의 본령을 생각한다면 사실 주체 스스로가 주체 이외의 모든 사회계층과 상황으로부터 소외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이런 반동적 흐름, 패배적 관점으로부터 빨리 탈피해 나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동문학이, 노동자계급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소외당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전도 현상을 일컬을 때 쓰여질 것이다.

이런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 노동자문학운동 역시 수세기를 면치 못했다. 유능한 활동인자들이 활동을 접고, 남아 있던 유능했던 활동인자들도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난망해 했다.

창작은 당당한 개진에서 회고로 넘어가고 다른 모색으로 넘어가고 절필로 넘어갔다. 있던 재산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물에 젖은 소금이 빠져나가듯 술술 빠져 나가는 모습을 대책없이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새로운 꿈과 활동의 상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해왔던 사업들은 모두 관성화되거나 정신이 빠진 채 형식화되었다. 유대감은 점점 경계없이 허물어지고 도대체 어느 경계에서 계급이 나뉘어지는 것인지, 세계관이 나뉘어지는 것인지 모호해 졌다. (기사 이어집니다)
송경동 시인은 얼마 전 포항건설노동자 집회에서 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포항경찰서에서 출두요구서를 받았다. 책상에서 쓰는 시보다 공사판에서 투쟁현장에서 쓰는 시가 많다고 한다. 2006년에 첫시집 <꿀잠>을 삶이보이는창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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