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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6/09/29
    누구를 위한 조기영어교육인가
    야단법석
  2. 200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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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6/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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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06/09/06
    영성(2)
    야단법석

누구를 위한 조기영어교육인가

누구를 위한 조기영어교육인가


조 진 희(서울영일초등학교 교사)


영어 공화국에서 초등교사로 살아가기


“The tiger is stronger than the rabbit.” 영어 수업이 끝날 무렵 6학년 33명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이런 비교급 문장이 5개 더 있는 책을 들고서) 나는 이 시간이 가장 공포스럽다. 호랑이는 tiger이라고 써라, 비교급이니 strong 뒤에 er을 붙여라, ‘~보다’라는 뜻의 영어는 then이 아니라 than이다, rabbit 앞의 the는 소문자로 써야 한다….

비교급 4번째이자 마지막인 쓰기 시간인데도 아이들에게 비교급 개념은 잡혀 있지 않다. 고칠 점 하나 없이 통과되는 아이가 거의 드물어 화장실 갈 시간도, 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어 아이들에게 물 한잔을 ‘요청’해야 한다. “Can I have some water?” 이미 6학년 다른 학급 아이들이 영어실에 들어와 떠들며 수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 영어 10년 효과는 있었는가


한국에서는 영어가 ‘왜’ 필요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원어민처럼’ 능통하게 만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1997년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과가 처음 들어온 지 올해로 10년째다. 하지만 정부(영어조기교육 확대 방안은 10개 이상의 부처가 연합해 범정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와 영어교육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초등영어정책 평가서를 내놓지도 않은 채, 지난 1월 「초등영어교육 확대 시범 실시 방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9월 1일부터 전국 50개 초등학교에서 1~2학년 영어교육이 시범 실시되고 있다. 이 연구학교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부는 2008년부터 확대 여부를 검토한다고 한다.

초등 영어 10년 효과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도 없이 불도저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초등 1~2학년 영어교육 시범 실시의 배경은 ▲학부모 및 전문가들 조기영어교육 찬성 ▲도시와 지방의 영어교육 격차 해소 ▲사교육 및 해외 연수로 인한 국고 낭비 축소 등이다. 현재 3학년 이상부터 실시되고 있는 영어교육도 정상화되지 못했는데 모국어교육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학년부터 영어를 배우는 데 반대하는 많은 초등교사들과 국어학자들의 지적을 정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EFL 환경에서 영어 시작 시기는 무의미


서울대 영어교육학과장 이병민 교수는 『녹색평론』(2006년 7~8월호)에서 “5~6천 시간 이상 영어시간을 제공해주지 못할 바에는 우리와 같은 외국어 교육환경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는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면서 “외국어 교육환경에서 언어학습의 절대적 시기가 있다고 믿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어교육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단언하였다.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그렇듯이 한국은 대표적인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즉 외국어 교육환경 나라이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환경과 달리 EFL 환경에서는 언어습득장치(LAD)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언어입력과 언어필요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영어를 언제 배우냐는 중요하지 않다. 주당 1~2시간 이루어지는 영어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영어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과학적ㆍ실증적 근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어떤 영어교육과 교수는 3~4학년 1시간씩 배우는 것보다 4학년부터 2시간씩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FL에서는 일찍 배우는 것보다 영어 노출시간과 학습강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어 학업성취도, 사회계층과 정비례


영어는 모든 사회적 관문 통과하는데 수문장 역할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권력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지표가 되고 있다. 학부모들은 문화자본이 되어 버린 영어에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빚을 내서라도 미국이나 캐나다는 못 가도 필리핀 어학연수 아니 영어캠프 정도는 보내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학부모들의 바람을 타고 정치인들은 영어마을 조성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학부모의 사회계층과 영어 학업성취도와의 관계는 놀랍도록 정비례한다. 사회계층이 위로 갈수록 영어 사교육은 개별화ㆍ고급화ㆍ장기화되고 있다. 최상층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성취도가 높았으나 중산층ㆍ저소득층ㆍ극빈층 아이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국에서 사교육이 100% 차단되는 ‘순수한 공교육에 의한’ 영어 학업성취도 향상 정도를 실험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교육 방법 또한 널뛰기를 하고 있다. 잘하는 아이에게는 심화과정을, 못하는 아이에게는 보충과정을 해주라더니, 이제는 심화과정의 상당 부분을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처음 영어가 들어올 때에는 듣기ㆍ말하기 의사소통 위주의 교육이 돼야 한다더니 읽기ㆍ쓰기도 같이 해야 효과가 있단다. 지난 8월 교육부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초등 영어 7차 교육과정을 수정고시했다. 2009년부터 아이들은 읽기를 3학년부터, 쓰기를 4학년부터 1년 빨리 배운다(공교롭게도 2009년은 1~2학년 영어가 처음 시작될지도 모르는 해이다).


영어 문화자본 그리고 영어 양극화


어린이집에 다니는 4살짜리 딸이 올해부터 영어 특별활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장 선생님 왈, 얘들은 1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란다. 영어 공화국에서 학부모로 살아가는 것은 교사보다 더 힘들다. 도대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갸우뚱하면서도, 내 아이가 이 공화국에서 생존해야 하므로, 괜찮다는 사교육을 좇지 않을 수 없다(이병민 교수는 아이를 원어민처럼 만들고 싶다면 가급적 빨리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가라고 충고한다. 단 한국 국적은 버리고.....).

단언컨대, 초등 1~2학년에서 영어를 배워도 외국인 만나서 의사소통 하기는 쉽지 않다. 영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며, 유아 및 초등학생의 영어 사교육은 10배는 심화될 것이다. 모국어 습득에 미칠 부정적 영향, 창의성ㆍ흥미ㆍ자신감 등 정의적인 발달에 미칠 악영향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영어 문화자본은 최상위 계층에게 부와 권력을 재생산 해줄 뿐 서민층 자녀들의 장밋빛 미래는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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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셋이상 모이면 그릇이 깨진다는...

속담을 지어 만든 놈은 분명 남자이겠지(물론 나도 남자다. 이럴 때 걍 나도 남자인 것이 곤혹스럽다ㅠㅠ). 나도 남자지만 남자들끼리(만) 모이면 정말 재미없거든. 남자들은 필수적으로 매개물(술?!)이 있어야 대화가 되니까(그게 남자의 속성이라고?... 어째 영 말빨이 떨어지지?!. 글고 그게 어디 남자만의 문제이겠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역사 속에서 그런 구조를 만들고, 온갖 권력에 호사를 누려온 지난 날의 특혜를 생각하면 책임한계는 분명해진다.)

 

뭐 남자 여자 잘 잘못을 따지자는 것도 아니고, 그럴 능력도 안되니 이쯤에서 넘어가자.

사실 하고 싶은 얘긴 따로 있으니까^^

 

오늘 분회 저녁모임(회식)을 했다. 걍, 단골인 산채정식(전모 샘이 우겼다지요, 아마)에서, 호명하면 강,김,박(박샘은 끝물에 딸래미 데불고),전,정,정,조샘이 참석(신샘은 친구따라 강남?가느라 미참ㅠㅠ)했다.

 

오늘모임은 그동안 바쁘단 핑게로 분회모임을 알차게 진행하지 못한 분회장 덕택에?, 언제나 우리 모임의 시작부터~ 끝까지랄 수 있는 수다로 푸는 모임이었다.

 

성과급 반납(전국 8만, 자료찾아보니 759억, 지부 1만 300에 79억, 물론 조합원수에는 약간 못미치고, 도대체 정부와 협상이 진행되는거냐, 교육부쪽은 협상대표도 없는 상황에서, 기약이 있는 거냐, 게다가 중알일보는 전교조, 반납 시늉만 한다, 차라리 그돈 사회에 기부해라로 얼르고 뺨치는 상황에서 2차 반납 힘들거다. 게다가 경기도는 전국 최고 만만디라 2차성과급도 전국최초로 추석 직전에 전격 지급할 예정이고, 걱정이다걱정이다)

 

오늘의 단연 탑은 영어인증제_스텝엔점프(분회장이 지부대의원대회 거론. 경기지부에서 적극 대응하지 못해 전국에서 유일하게 초등교사들에게 강제잡무를 부과(부교재 지도_아침시간 등)했고, 법에서 정하지도 않은 걸 교육감이 지시한 것이므로 벌률적으로 고발사항이다. 아마 2학기엔 지부에서 보다 강력히 대응할 걸로 보여 파행이 불가피할 것으로 봄. 고양시의 경우 절반이상의 초등학교에서 희망자 위주로 시험보게 되어 과반이 훨 넘는 아이들이 인증시험 안보았다고.

다음으로 영어 인증시험. 과정에 울 학교에서 진행된 사항의 문제점들 거품물고 지적. 담당자의 치밀하지 못한 일처리와 안내 부족에 해당부장의 방관자적 태도가 더해져 학년별로 일관되게 추진되지 못하고 잦은 변동. 효율적으로 진행되지 못한 점. 학교재량의 잇점을 살리지 못한 점들 또한 거품물고 지적. 혹 옆테이블에 있는 선샘들이 엿들어도 되나, 하면서도 신나게 성토하고 공감하는 수다모임.

 

수다를 생산적(이 말부터 지배적이고 권력자의 구린 냄새가 밴 말같은데)이지 못한 한담으로 폄하하는 것이 오랜 버릇인데, 실은 뒤집어 놓고 보면 가장 현실감있고, 생생한 지금, 여기의 이야기 아닌가?! 나도 남자이기에 그리 생각해왔던 게 사실이고 보면, 지금, 여기(한국사회, 교육계, 초등학교) 참 문제 많은 곳임을 느끼게 된다. 전략적 유연성은 제국인 미국에 지금, 필요한 것일지 몰라도,  우리에겐 지금, 여기서 헤쳐나갈 소통의 시간이 더욱 필요한 것이리라. 물론 전략적 유연성을 뛰어넘는 전략의 올바름과 함께 말이다.

 

다음 모임에서도 여지없는 수다를 기대해요^^

 

*다음 정기 모임은 10월 10일(화)인데요, 분회 창립행사 관련으로 담주 중에 번개모임을 가질까 해요. 말 그대로 번개치면 모여주세요.

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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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임 후기

오랜 만에 문학교육 모임에 참석했다.

U샘과 K샘, 나 달랑 셋이다.

텍스트는 '아이들과 함께하는 갈래별 글쓰기(우리교육)'다.

U샘은 1학년, K샘은 3학년 난 5학년을 맡고 있는데, 학년이 올라갈 수록 전자매체에 빠지고, 지리한 학원생활에 치여 문학 수업하기가 힘들다.

그래도 U샘이 갖고온 1학년 아이들 시를 보니 한결 낫다. 1학년 아이들의 느낌이 콕콕 묻어난다. 살아 있다.

K샘이 뭔가를 꺼낸다. A4반절로 된 종이다. 아이들과 시공부 하려니, 마땅한 텍스트가 없단다. 교과서 시들은 대개 어른들이 썼는데, 몇몇을 빼곤, 아이들의 생활, 정서와 거리가 있어 이곳저곳 뒤져 괜찮은 시들을 모아 A4반절로 편집한 뒤 학교 인쇄실에서 다량 인쇄하여, 아이들 한 명 한명에게 다 나눠줬단다. 썩 괜찮아 보인다. 시들도 좋고.

 

이슬

 

풀잎이 모여서

간들간들 웃고 있네.

말강말강한 기 앉아 있네.

(인천 대곡분교 3 박귀봉)

 

형식으로 배우는 게 아니라 가슴의 울림에 귀를 기울여 가슴속에서 흘러 나오는 자기 노래를 글로 담아내는 시...쓰기 지도

흉내내기 같은 시가 아니라, 자기만의 느낌, 생각, 그리고 보고, 들은 것을 쓰게 하는 것이 필요... 노미화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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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망가와 활동가

명망가...자신의 이름 석자를 위해 친구와 동지, 심지어 가족까지 이용하고 팔아먹으며 끝내 역사속으로 명멸할 자.

 

활동가...가난한 이웃을 위해, 노동하는자가 주인될 세상을 위해, 동지를 위해, 그 과정과 결과로서 마침내 가족을 위해 자신 마저도 팔 자이며 끝내 역사 속에서 아름답게 부활할 자. 

 

아, 나는 한 때 저 고결한? 명망가들에게 내 신념을 팔고, 심지어 영혼까지 넘겨줬었지. 

-나의 대학 초반은 DJ에게 빠져있었고, 처절하게도 배신을 당했다.. 유난히 춥고 암울했던 80년대 말의 그 겨울을 잊지 못한다.

-20대 후반, 천리타향 임지에서 순진하게 교직생활 시작했을 때, 나에게 전교조와 참실활동의 진수를 보여줬던, 보기만 해도 그저 아뜩하고, 존경이 저절로 묻어나던, 교사로서 내 삶의 구심같았던  그 잘나신 L선생은 지금 어디 가 계신가?!....놈현 정권의 교육 참모부에서 뭘 하시는지.

-30대 초반, 하다본께 맡게된 전교조 지회 말딴 간부를 시작할 때, 전교조 활동의 최고 정점으로 여겨졌던 역시 L선생은 여전하신가? ...교육노동자, 이땅의 노동자로서, 노동자의 자긍심으로 살아계신가?!...부디 노욕일랑 버리시고 잘 사시길!

 

이제는 조금 보인다. 누가 진짜 내 친구이고 동지인지.

아직도 철이 덜 들었는지 교장교감과 침튀기며 싸우다가도 필요이상으로 설득하려 들지 않는다.

그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가끔, 내가 원칙과 아량을 혼동하지 않는지 놀랄 때도 아직 있지만.

 

난, 언제 가난한 이웃과 노동하는 자가 주인되는 세상은 고사하고,

이 가볍고, 석자나 빠진 내 이름 석자(노,동,자) 제대로 건사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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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2)

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2)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3-2) - 노동자 선동하는 송경동 시인
송경동(시인) 
착시 현상을 벗어나서

그렇다면 정말 노동자문학은 이제 끝난 것인가? 노동자계급운동은 이제 그만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야 할 퇴물인가? 혁명에 대한 꿈을 더 꿀 필요없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하고 만족하는가? 하지만 우리의 답은 아직 아니다이다. 이 모든 건 착시 현상이거나 역사 파고에도 늘 있는 고점과 저점에서 저점, 흔히 반동이라는 시기에 있음으로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세계 진보운동의, 계급운동의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음을 본다. 자본주의 역사는 채 100여년 밖에 안 되었고,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실험 역시 길어야 80여년 밖에 되지 않았다.

현세를 사는 우리는 늘 내가 사는 육체적 나이에 근거해 역사를 살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사회역사적 상상력 속에서 100여년의 세월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다. 우린 그 시간동안 중세봉건적 사회질서를 넘어서는 새로운 사회를 경험해 보고 있다. 크게 보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새로운 역사 체재들이 그것이었다.

이 둘의 역사 체재는 아예 만날 수 없는 수평선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기실 알고 보면 비슷한 사회운영 원리 속에 있기도 하다. 둘 모두가 뿌리박고 선 대지의 가장 큰 규정성은 노동세계라는 시대적 원리다. 농노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에 의존해야 하는 시대. 노예가 아니기에 최소한의 시민권을 인정해야 하고 천년만년 이어지는 왕조의 역사가 아니기에 최소한 사회 구성원들이 인정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택해야 한다.

노예가 아니기에 근로계약이 일을 시키고자 하는 자와 일을 하고자 하는 이 사이에 체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현상적으로 보면 근대 자본가들을 당시의 혁명가들에 비유하기도 한다. 중세봉건영주들로부터 노예들을 해방시킨 사람들로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착시 현상이거나 사실의 오도다. 노예해방은 노예이기를 이제 더 이상은 거부하는 인간들의 피나는 희망으로부터 노력으로부터, 세계정신으로부터 이루어졌다.

자본주의가 어떤 혁명적 조치들을 취하기 이전에 이미 있어 왔던 그 수많은 노예들의 반란, 농노들의 반란을 생각해보라. 근대 자본가들은 이런 시대 변화상의 본류를 느끼고 자연스럽게 그곳에 무임승차 몸을 실은 사람들이다. 파도와 바람이라는 큰 흐름을 느끼고 돛을 어느 쪽으로 올려야 하는지를 안 약삭빠른 사람들이다. 자본주의는 그래서 최소한 인권의 보편성, 기회의 균등을 이야기한다.

우린 누구나 ‘자유’롭고, ‘민주’적이라는 게 자유민주주의로 이어져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보통선거권을 도입하고, 사적소유의 자유를 얘기한다. 사회적으로 합의된 법에 의한 통치, 법치주의를 이야기한다. 자본은 이제 누구나 성실하면 가질 수 있는 사회공공적 부고, 자본만 있으면 누구던 생산수단을 소유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진정으로 민주적이지 못했다. 그런 사실은 자본주의 초기 과정부터 금세 밝혀졌다. 자본주의는 부패할 수밖에 없는 기생의 체재였다. 현대 노동자들은 정치적 시민권을 획득했으되 중세의 농노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처지였다. 때에 따라서는 중세의 농노보다 더 끔찍한 인간성의 소외와 착취, 폭력에 시달려야 했다.

토지와 다르게 공장은 24시간 풀가동이 가능했다. 임금(생존권)을 미끼로 자본가들은 언제든지 노동자들을 노예화 시킬 수 있었다. 정작 자본가들이 한 역할은 사회공공적 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가치(자본화폐화된)의 과도한 선점을 통해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일이었다. 사용가치가 아닌 교환가치의 절대화를 통해 화폐를 신격화했다.

노동자들은 이중 삼중의 착취에 시달려야 했다. 가끔 자본주의가 고도화되면서 자본가들이 만들어 낸 각종 제도와 시스템들을 들어 자본가들 역시 생산적 노동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오해를 갖게 하지먄 그 대부분은 사실 생산과 분배의 민주적 시스템들과는 무관하다. 그 들의 일은 노동에 대한 착취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기생의 시스템들이 대부분이다.

한국사회 그 많은 ‘생산적 활동’들이 하고 있는 실내용을 보라. 교육에 종사하는 자본의 하수인들이 하는 것은 산교육이 아닌 죽은 교육의 재생산에 있다. 법조계에 종사하는 그 많은 자본의 하수인들은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노동행정에 종사하고 있는 하수인들은 또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수많은 군인들은 도대체 왜 모두 무엇을 하고 있는가.

진정으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사고한다면, 진정으로 인류들의 창조성과 의식성을 믿는다면 자본가들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는 이 사회 시스템 중 대부분은 폐기되고 난 후에도 영영 웃음거리가 될 고물들에 다름 아닐 것이다.

물론 그 중 생산적 활동들도 있지만 본 바대로 그것은 그만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될 인류 진보의 유산들이다. 그것은 꼭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자본가들의 존재가 아니더라도 유지 존속 더 진보 발전될 사회적 가치와 일들이다.

자본가들은 이러한 역사의 진보를 두려워하기에 교육과 언론과 정치와 이를 강제하는 물리적 힘인 법과 군대와 경찰력을 놓지 않는다. 이런 물리력과 이데올로기적 공작이 없으면 기생충인 자신들의 설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자본가들은 바보가 아니다. 참 똑똑하고 영리한 놈들이다. 다만 그 좋은 머리가 타인의 불행을 획책하는 쪽으로만 쓰여지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의 소금이 아닌 종양이 된다.

그런 까닭으로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정치적 자유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 이미 그들은 교육을 통해 언론을 통해 법을 통해 군대를 통해 일상적으로 선거운동들을 펼치고 있다. 이 모든 선거수단들을 가지지 못한 정치적반대파(진보주의자들)들은 단지 부르조아 선거법이 명시하고 있는 선거운동기간을 통해서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가끔 진보주의자들이 대중(민중이라 부르던 노동계급이라 부르던 노농계급이라 부르던, 전선이라 부르던, 시민이라 부르던 다중이라 부르던)들의 무지에 좌절해 대중을 한탄하거나 무시하거나 대중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믿지 못하고 반대파에 전향하거나 반대파와 타협하거나 개량으로 돌아서기도 하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들도 멍청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적으로 예지가 아닌 무지를, 이성이 아닌 야만을 교육받고 교육받아 온 절대다수의 대중들이 어떻게 진보적일 수 있겠는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현재 우리 사회가 개진하고 있는 진보적인 정치활동이 단지 전술인지, 전략인지, 타협인지, 개량인지를 주도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진정으로 전술적인 활동들을 타협이나 개량으로만 치부해서도 안 되고, 전술을 전략으로 격상하여 꿈꾸기의 중단을 가져오는 폐해는 없는지를 살펴야 한다. 현실운동은 현실 대중들과 함께 해나가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현실의 구체적 대중과 함께 할 생각이 없는 진보주의자들은 가끔 극좌와 극우가 통한다는 사실을 재미없게 되풀이해 보여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본주의의 본질을 파악한 이들은 다른 세계, 다른 체제 구성을 꿈꾸었다. 그것이 자본주의 태내에서 자라나(이 말도 어패가 있다.) 자본주의를 전복하고자 한 사회주의적 이상들이었다. 사회주의는 기생하는 자본주의와 다르게 노동자들이 자신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받지 않는 사회 체제를 꿈꾸었다. 노동을 소외시키지 않는 교육과 문화 정치를 꿈꾸었다.

자본가들의 대의기구에 불과한 부르조아 정치 집단과 그 이데올로기 형식인 다당제를 넘어 노동자계급혁명일꾼들로 구성된 혁명적 당일꾼들을 상정했고, 노동자계급 집단지도체제로서 1당 독재체제를 선호했다. 그것을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선 직접민주주의의 형식으로 보았다. 보이지 않는 손(철저히 자본의 이익에 따르는)에 의해 작동되는 자유시장의 폐해를 넘어 노동과정과 생활과정에서 일어나는 2차적 소외를 없애기 위해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에 우선 주안점을 두는 국가계획경제를 주창했다.

어떤 이도 삶으로부터 소외당하면 안 된다는 기본 취지하에 무상교육, 무상의료, 무상주택을 실험했다. 이를 위해 대부분의 기간산업과 사회적 부는 개별 자본가들이 아닌 국가, 즉 노동자당이 집단적으로 소유하는 것으로 기획되었다. 이것을 국유화 프로젝트라고 한다. 자본가들의 국가가 아닌 사회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국가. 이 얼마나 이상적이고 아름다운 기획인가.

노동과정에서의 착취와 생활 속에서의 착취 분을 메우기 위해 또 착취의 연속인 노동의 쳇바퀴 속을 굴러야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 조금만 일하고도 생활이 지속될 수 있다는 꿈. 그 나머지 시간들은 온전히 나를 위한 창조적 문화노동에 할여할 수 있다는 꿈. 통치의 대상이 사라지고 모두가 평등하게 이 사회의 운영에 진정한 주인으로 참여할 수 있다는 꿈. 누구도 누구를 착취하거나 폭력으로 위압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에게 존엄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꿈. 동료를 밟고 올라서지 않으면 나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정신병적 상태를 벗어나 위계와 차별이 아닌 아름다운 차이로 서로가 공존할 수 있다는 꿈 등등.

하지만 이런 세계를 자본주의가 호락호락 용인할 리가 없기에 이들은 민중무력혁명(전민항쟁)이라는 방식을 택했다.(아 얼마나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십수년 밖에 안되었는데도 이런 말들은 이미 사어 취급을 받고 있다.) 각 민족이 처한 환경에 따라 이는 우선적으로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인 제국주의에 맞선 민족해방전쟁으로 표출되기도 했고, 사회주의 혁명 방식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주력군은 노동자부대였고, 연대군은 농민부대였고, 진보적 학생과 지식인들, 양심적 종교인들, 중소영세상인들과 룸펜프롤레타리아, 입장들에 따라 평가가 다른 중소자본가 민족자본가 층들이 엄호군이라는 그림이었다. 파업은 그 유효한 수단 중 하나였다. 파업은 혁명의 교육장이자 계기였다.

노동문학 작품들에서 숱하게 노동자들의 파업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큰 목적하에서 이루어졌다. 한때 노동문학에서 전형성을 이야기할 때 결국 목적했던 것은 이런 전위적 활동, 대중적 활동의 형상화였다.

이 지난한 투쟁 과정에서 수많은 출혈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착취가 본성인 자본의 성격 그대로 자본은 자신의 체재를 위협하는 세력들에 대해 절대 관대하지 않다. 짐승이 자신의 먹이를 빼앗으려는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무자비하듯이 자본 역시 그렇다. 자본 자체의 성격이 태생적으로 인간에 가깝기보다는 짐승에 가깝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근래에만도 미국자본이 저지른 그 수많은 테러와 전쟁을 돌아보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그 수많은 양민학살을 기억해 보라.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이 저질렀던 그 수많은 야만을 생각해 보라. 이 정도의 표현도 사실은 너무도 인간적인 것이다. 그 수많은 산재와 비관자살, 정신파탄은 어디에서 생겨나는가 이 정도의 표현은 정말 정말 인간적인 것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는데 여기까지 이야기를 끌고 온 까닭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는 결코 배 다른 자식들이 아니라는 것이다.(여기서 누구는 재빨리 그래서 노동과 자본 간의 화통의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겠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그 둘은 모두 노동이라는 인간의 대지 위에 서 있다. 하나는 기생의 형태로, 하나는 공감의 형태로. 그래서 우리는 늘 어떤 역사적 체재, 역사적 이데올로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보다 이 노동의 대지에 기반 해 생각과 꿈과 전망을 개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노동의 대지는 때로 가혹하여 자신의 뜻에서 너무 가버린 체제에 대해서는 가차없는 메스를 덴다. 그래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패퇴는 자본주의의 승리가 아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 국가들을 전복시킨 것도 아니다. 노동의 대지, 그 본성에 가깝지 않은 체재 하나가 그 토양으로부터 배제당해 그 수명을 다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현실 사회주의의 패배를 자본주의의 승리로 생각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 사회주의는 그렇게 노동의 대지로부터 ‘숙청’ 당했는데, 왜 그보다 못하다는 현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영원불사할 것처럼 오히려 창궐하는가라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물음은 너무나 이분법적이다. 우회적으로 답한다면 사회주의 체재는 그렇게 자신을 돌이키고 자신들이 모자란 부분들을 향해 두 손 두 발 들고 문을 여는데 자본주의 체재는 왜 그러질 못하는가를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이제 우리의 할 일은 역사적으로 그 한계가 증명된 사회주의의 똑같은 재반복 재구성이 아니라 다시 자본주의 이후이기 때문이다.

난 사실 현존 사회주의의 패배는 현존 사회주의의 후기 시절을 구성했던 전위들의 패배이지 사회주의 대중들의 패배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패배했다면 그 다음엔 무엇이 남는가. 역사에 대한 허무감 밖에 남을 것이 없다. 자본주의 사회들의 대중들이 ‘아직’ 패배하지 않았듯이 사회주의 사회의 대중들 역시 ‘아직’ 패배하지 않았다.

사회주의 대중들은 그들의 무능하고 부패한 당을 역사의 뒤로 퇴출시켰다. 그들의 당은 그들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보장해 주지 못했다. 나중엔 정치적 자유마저 현저히 후퇴시켰다. 불가피한 체재 경쟁과 냉전은 더더욱 그런 폐해들을 부추겼다.

자본주의의 개인들에 비해 사회주의의 집단은 너무나 몸이 비대해졌고 무거웠다. 정치는 권력화했고, 창조적 열정은 꺾였다. 그렇게 ‘현존 사회주의’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 우리는 다시 우군을 잃은 상태에서 자본주의의 일상을 뛰어넘기 위한 다른 기획들을 준비해야 한다. <기사 이어집니다>
송경동 시인은 얼마 전 포항건설노동자 집회에서 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포항경찰서에서 출두요구서를 받았다. 책상에서 쓰는 시보다 공사판에서 투쟁현장에서 쓰는 시가 많다고 한다. 2006년에 첫시집 <꿀잠>을 삶이보이는창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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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1)

노동자문학운동 어디로 갈 것인가, 생각 몇 닢 (1)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3-1) - 노동자 선동하는 송경동 시인

송경동(시인)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이번 기획은 민족문학작가회의 자유실천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진행합니다. - 편집자 주


세계적 시야를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시 부문 수상자인 노동자 시인 백무산(35) 씨는 “이 상을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로 받아들인다” 기운찬 발언으로 수상 연설을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조국으로부터 소외되고 있습니다. 보호받을 재산도, 보장받을 자유도, 꿈꾸는 미래도 없습니다. 천만 노동자계급을 외면하는 조국은 누구의 조국입니까? 노동자계급의 진출과 싸움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입니다. 보다 인간답게 살겠다는 집단적 분노, 노동해방과 인간해방의 사상은 바로 그런 현장에서 싹트고 있습니다. 역사를 뒤로 돌리려는 자, 반민중적인 6공에 대해 노동자계급과 함께 투쟁할 것을 제안합니다.” 그는 연설 도중 오른팔을 치켜들고 구호를 선창하기도 했다. “출판자유 억압하는 국가보안법 철폐하라.”

기성 문학계가 마련한 상을 노동자가 받는 그런 시상식은 우리 문학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고, ‘노동자계급의 혁명적 진출’에 걸맞는 그런 수상 연설은 ‘정신적 귀족주의’로 잘 다듬어진 시상식장 분위기를 일거에 교란시켜 버렸다.

1989년 제1회 이산문학상 수상식을 다룬 한 언론의 신문기사 내용이다. 신문기사의 내용도 가히 혁명적이다. 분단 이후 맥이 끊겼던 사회주의 문학, 노동문학의 재현이 마침내 이루어지던 시기. 모든 좋은 문학은 ‘노동문학’이라는, ‘노동문학’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가 자연스레 통용되던 시기의 사회 분위기를 위 시기는 함축적으로 드러내 준다.


그리곤 다시 15년여가 흘러갔다. 그 시절동안 어떤 변화가 일어났나. 가장 큰 변화는 1990년대 초반 구 사회주의권의 몰락이었다. 노동자들의 소비에트가, 혁명적 당을 중심으로 한 현실 사회주의의 실험이 자체 모순을 이기지 못하고 ‘세계사적인 전향’을 시도한 물결은 이제 막 혁명‘적’ 진출의 발을 떼고 있는 한국사회 ‘계급’에게는 대홍수와 같은 것이었다.

근대 시민혁명을 넘어 선 시대의 꿈의 키워드로 불리던 민족해방운동, 그리고 노동자계급혁명의 결과는 보이는 현상으로만 따지자면 비참하고 참담했다. 당시부터 지금까지 나왔던 비판의 요지들만 해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도식화 위험을 감수하고 일별해 보면 이렇다.

무오류의 당은 오류투성을 넘어 부패했고, 그토록 비판해 마지않던 서구의 합리적 이성보다도 더 이성적이고 과학적이어서 인간적이지 못했다. 노동자 직접민주주의로 이야기되는 권력의 해체와 분산, 평등은 요원해지고 사회주의 1당 독재는 오히려 관료주의와 권력의 집중을 가져왔다. 그 아래에서 민중권력은 점점 요식화 되고 새로운 선민들이 키워졌다.

사회주의적 생산(중앙계획경제)은 오히려 무능을 낳았고, 퇴보를 낳았다.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자율적 공동체는 꾸려지지 않았다. 민중들의 창의력은 배제당하고 수동적 인간형들이 늘어났다. 결과적으로 사회의 전체 생산력이 떨어지고, 근로 의욕은 감퇴되면서, 창조적 노동의 힘은 키워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자본주의 이후를 목표로 싸워왔던 구 사회주의 국가들은 이상을 버리고 자본주의의 사적소유를 부분적으로 인정하고, 자유경쟁(우리는 이를 기회의 균등이 배제된 불평등 경쟁이라고 불러 왔다. 사악한.)을 인정하고, 사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인정했다. 독점자본의 자유로운 이동과 과다 축적을 인정했다. 자본주의는 계급해방 무력투쟁을 통해서, 통해서만 물리쳐질 수 있고, 절멸시켜야 되는 사회의 악에서 더불어 공존해 나가야 할 필요악 정도로 복권되었다.

이런 현상들은 어떤 이에 따라서는 자본주의 이후는 없다는 확고한 믿음들을 갖게 했다. 자본주의의 꽃인 사적소유, 자유시장, 자유경쟁, 부르주아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선 더 이상의 꿈의 체제, 꿈의 제도, 꿈의 주체들은 없다는 역사의 죽음을 선포케하기도 했다.

이렇게 전 사회적으로 반동의 물결이 득세하자 우리들의 삶의 가치들도 바뀌어 갔다. 자본주의를 인정하거나, 아니면 자본주의를 넘어 설 수 있다는 구체적 꿈을 유보 상태로 두는 순간 자본주의 넘어서려는 모든 인간적 고뇌와 실천, 희생 역시 더 이상 덕목이 아닌 무의미하고 시대착오적이며 우스꽝스런 낭만적 포즈처럼 되어 버렸다.

자연스레 백무산 시인의 낙관적인 의지와는 무관하게 한국사회 내의 ‘혁명적’ 분위기는 사그러들었다. 혁명적 분위기가 사그러들었다는 것은 혁명적 주체들 역시 사그러들었다는 이야기이다. 확고하고 명징하게 모두를 설득할 수 있고 스스로도 최면에 빠질 수 있는 혁명적 이론이 없으니 혁명적 주체들이 없고, 혁명적 주체들이 없으니 혁명적 대중들과 혁명적 상황들이 없고, 혁명적 대중들과 혁명적 상황들이 없으니 혁명적 꿈들조차 더 이상 꾸어지지가 않았다. 이제 막 역사의 무대로 화려하게 등장한 ‘노동계급 문학’이 퇴조한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꿈이 사라진 곳에 남는 것은 리얼리즘에서 꿈이 빠질 때 자연주의만이 남듯 쳇바퀴도는 일상만이 남은 현실이다. 현실은 철저히 자본주의의 대지 위에 뿌리박을 때만이 최소 생존이 가능하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과거와는 다른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들과 자리들을 찾기 시작했다.

이런 예는 정말 부지기수로 많았지만 일정한 패턴을 따랐다. 노동자 곁에서 시민 곁으로 자본가 곁으로, 거리에서 공간으로, 집단에서 개인으로, 희생에서 사적이익으로, 실천에서 지식으로, 단체에서 기업으로, 당파성에서 관용으로, 민중권력에서 자본권력으로, 실천에서 이론으로, 이름없음에서 이름있음으로 등등.

물론 이러한 현상을 노동자계급문학이라는 확고한 자기 당파성 속에 서 있는 무리들만의 상처로 바라볼 까닭은 없다. 전체 사회의 변화였고, 시대 담론의 변화였고, 전체 사회 대중들이 이런 변화로 인한 결과 속에 있다. 전체 민족민중문학이 퇴조기를 맞았고, 더 나아가 ‘문학’이 위기를 맞았고, 더 나아가 삶의 문화 전체가 위기에 몰렸다. 쏟아져 나오는 그 수많은 문화상품들 속에서도 민중들은 문화생활을 찾지 못한다.

인터넷 게임이, 문화상품의 소비가 문화적 삶을 예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상품들 자체가 문화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삶이 문화적으로 소외되는 현상을 부추긴다는 기제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나의 삶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내용의 문화상품들은 노동으로부터의 자기 소외와 더불어 2차 소외를 경험하게 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사회적 가치와 부로부터 더욱 더 고립되는 현대인들의 삶 그 자체가 포괄적인 노동의 문화이다. 운동의 부문화를 넘어 총체적이고자 했던 노동자계급문학의 본령을 생각한다면 사실 주체 스스로가 주체 이외의 모든 사회계층과 상황으로부터 소외감과 상실감을 느끼게 되는 이런 반동적 흐름, 패배적 관점으로부터 빨리 탈피해 나와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노동문학이, 노동자계급운동이 대중들로부터 소외당했다는 말의 의미는 바로 이런 전도 현상을 일컬을 때 쓰여질 것이다.

이런 세계사적 변화 속에서 한국사회 노동자문학운동 역시 수세기를 면치 못했다. 유능한 활동인자들이 활동을 접고, 남아 있던 유능했던 활동인자들도 무엇을 더 어떻게 해야 할지 난망해 했다.

창작은 당당한 개진에서 회고로 넘어가고 다른 모색으로 넘어가고 절필로 넘어갔다. 있던 재산마저도 지키지 못하고 물에 젖은 소금이 빠져나가듯 술술 빠져 나가는 모습을 대책없이 지켜보고만 있어야 했다.

새로운 꿈과 활동의 상은 만들어지지 않았고, 해왔던 사업들은 모두 관성화되거나 정신이 빠진 채 형식화되었다. 유대감은 점점 경계없이 허물어지고 도대체 어느 경계에서 계급이 나뉘어지는 것인지, 세계관이 나뉘어지는 것인지 모호해 졌다. (기사 이어집니다)
송경동 시인은 얼마 전 포항건설노동자 집회에서 시를 낭송했다는 이유로 포항경찰서에서 출두요구서를 받았다. 책상에서 쓰는 시보다 공사판에서 투쟁현장에서 쓰는 시가 많다고 한다. 2006년에 첫시집 <꿀잠>을 삶이보이는창에서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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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에 핀 나팔꽃(쓰는 중...

지금, 교실은 나팔꽃이 한창이다. 참 질긴 것이 생명이라지. 지난 여름 그 불볕 더위에도, 게다가 사방이 창과 문으로 꼭꽉 막혀있는 학교의 빈교실은 온실효과로 더욱 찜통이었는데, 질기디 질긴 생명의 힘이라고 표현할 수 밖에 없는데,  나팔꽃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꽃을 피워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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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싫어하게 된 소설가의 변명...안재성氏

* 아닌게 아니라 정말이지 요즘, 볼만한 소설 찾기 정말 힘들다. 서점 소설 코너에서 서성대다 결국 뒤돌아선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사정은 인터넷 서점에서도 마찬가지. 결국 고전인가, 조이스의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도 만만치가 않다. 소설의 시,공간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무한 탓이다. 이제 조이스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을 다시 보고있다. 내 바람은 우리 소설 속에 조이스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민중들의 언어와 삶을 사실적이되 풍부한 비유와 표현력으로 무장한 소설 말이다. 물론 안재성의 다큐같은 소설도 좋지만.

아래글은 민중언론 참세상에 소개된 소설가 안재성이 말하는 일종의 '소설론'이다. 참고할만하여 전문을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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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싫어하게 된 소설가의 변명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1) - 포크레인 운전하는 소설가 안재성
안재성(소설가) 

민중언론 참세상은 잊혀지거나 몰랐던, 하지만 아직도 살아있는 노동문학 작가들의 삶과 문학의 솔직한 고백을 '특별기획 : 노동문학? 있다 없다'의 제목으로 연재한다. 앞으로 연재될 글들은 지난 7월 8일 '인천남구 학산 문화원'의 주최로 스무 명의 노동문학 작가가 참여하여 진행된 '노동문학 작가대회-노동문학의 회고와 전망'의 자리에서 발표된 글이다. - 편집자 주



1. 나는 가끔, 공개하기 부끄럽도록 단순하고 유치한 주장을 하곤 한다. 정치문제, 여성문제, 문학의 문제까지 도무지 지성적이지 못한 해석과 냉소적인 처방으로 친구들의 핀잔을 듣는다. 친구들은 나의 이 단순무식이 십여 년 세월을 포클레인 기사로 막노동판을 누비고 다닌 탓이라 변호해주지만, 사실은 그것이 나의 본질적인 한계이자 때로는 장점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나 자신은 잘 알고 있다.

거짓말이란 게 훤히 들여다보이는 소설을 쓰느니 사실에 근거한 역사 다큐멘터리를 쓰겠다는 선언은 그 중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결정에 속한다.

소설가라는 사람이 소설을 우습게보게 된 사연에 별다른 논리나 철학이 있던 건 아니다. 알량한 소설 두어 편 펴낸 이후로는 욕심에 맞는 수준의 글이 써지지도 않고 억지로 쓴 책들마저 평단과 독자들의 냉대를 받을 때부터 소설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여기에 90년대 들어 한국문단을 주도한 새로운 경향의 소설들이 불만을 누적시켰다. 이들 소설들 속에서 80년대까지 때로는 교조주의 도식처럼 소설의 주제가 되었던 인간의 문제, 정의의 문제, 이타적인 희생의 가치 따위는 비웃음거리로 치부되었다.

불륜을 토대로 한 온갖 뒤틀리고 비틀어진 연애담, 독자로부터 동정도 감동도 불러일으키지 않는, 소위 쿨한 사랑과 결혼, 이혼 이야기들, 정 쓸 게 없으면 소설가 이야기를 쓰다 못해 엽기적인 소재들을 들춰내는 소설들이 도무지 내 취향에 맞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에 몰래 읽었던 포르노보다도 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성행위 묘사가 필수처럼 되어, 한때 민중주의적인 문학을 했다는 후배들의 작품들 속에서도 없어도 되는 양념이 되어 참맛을 버리는 것도 우스웠다.

새로운 작가들의 섬세한 심리묘사와 감칠맛 나는 문장들은 글 못 쓰는 소설가의 질투를 불러일으킬 만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읽어본 책이 거의 없을 정도로 역겨운 작품이 더 많았다. 아무리 훌륭한 문장과 감성을 갖추었더라도 사적인 감정을 다루었을 뿐인 ‘사소설’에 재미를 느낄 수 없었다. 꼭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그것도 세련된 가식으로 포장된 가짜 일기를 훔쳐보는 기분이 들뿐이었다.


벗어나기 힘든 80년대 경험의 한계에 갇혀 고지식한 주의주장과 직설적인 문장의 한계에서 벗어날 능력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은 나는 도저히 그들의 풍부한 감수성과 현대적 감각을 따라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나아가 그런 글들에 매달리는 출판문화와 처녀독자들의 독서취향이 싫어졌다. 소설이 싫어졌고 소설가들이 싫어졌으며 독자들마저 경멸하게 되었다. 물론 아무것도 쓰지 않게 되었다.

포클레인 기사로, 복숭아 과수원과 소규모 한우 농장을 하면서 십년 가까이 문학을 멀리하던 끝에 내가 선택한 방식은 소설의 수법을 차용해 보다 읽기 좋게 만든 다큐멘터리였다. 2년 전 발간한 <경성트로이카>와 이번에 출판되는 <이관술 1902-1950>이 그것이다.

소설도, 논문도 아닌 애매한 형식이 되다보니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기 어려운 처지가 되어버렸지만 적어도 역사와 사회에 관심이 있는 이들을 숨겨졌던 진실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는 데 의미를 두었다.

물론, 나의 단순명쾌한 해법이 다른 작가들에게는 전혀 생경하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다. 며칠 전, 절친한 친구가 퍽이나 조심스럽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이런 말 한다고 서운해 하지 마라. 이런 말하기 미안하지만, 내가 보니까 너는 소설보다 다큐에 더 어울리는 것 같아. 너의 문장이나 관심이 그래. 이런 말 한다고 충격 받는 거 아니지?”

관념주의적인 작가도 아니고 노동문학으로 시작해서 지금도 전업 작가로서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 이야기만 쓰고 있는 녀석의 말이야말로 나를 무척 놀라게 했다. 소설보다 다큐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왜 서운하고 미안하고 충격이란 말인가?

인터넷 서점의 집계에 따르면 <경성트로이카>의 주된 독자는 신문방송기자요 다음이 역사학자, 노동운동가들이었다. 내가 쓴 책이 사실을 중시하는 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다는 데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설이 아니라서 가치가 떨어진다는 식의 평가를 듣다니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여기서 나의 그 무지막지한 말버릇이 또다시 발동하는 것을 어쩌랴? 소설가들이여 네 주제를 알라! 어설픈 거짓말로 너 자신을 포장하려 하지 말고 타인의 이야기와 역사적 사실을 각색해 보라, 안되면 차라리 있는 그대로 사실만을 써라. 그러면 모든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2. 누구로부터 배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언제부터인가 내 의식 속에는 소설가의 기원이 광대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지배자들의 유흥 장소에서, 아니면 시장바닥에서 행인들을 상대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잔돈을 챙기는 어릿광대들로부터 소설을 포함한 문학이 시작되었다고 생각해 왔다.

소설, 혹은 소설가가 대중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고 지도적인 위치를 갖게 된 것은 불과 1,2백 년 전 계몽주의 시대 들어서라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 톨스토이, 헤밍웨이 같은 대가들이 당대의 사회상을 그리고 인류가 나갈 길을 제시함으로서 존경을 받게 되었다고 말이다.

내가 소설을 좋아하게 된 것 역시 계몽주의 시대의 작품들 때문이었다. 세계문학전집을 통해 만난 작가들은 재담이나 들려주는 광대가 아니라 선생이요 학자요 지도자였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양의 소설가들은 계몽가의 직함을 버리고 새로운 지위를 추구하게 된다. 한국의 경우는 90년대 들어 변화가 시작되었다. 광대도 선생도 아닌 이 새로운 위치를 딱히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생각나지 않지만 본인들이 인식하든 말든 또 다른 특권층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문제는 오늘의 소설가들이 중세 이전의 광대들은 물론 계몽주의 시대 소설 선생님들보다도 더 인기가 없고, 존경도 받지 못한다는 점이다. 한국의 계몽주의 시절인 7,80년대는 소설가가 존경도 받고 책도 제법 잘 팔렸다. 웬만하면 수십만 권씩 팔렸으니까.

90년대 이후로는 그런 재미가 없어졌다. 유명하다는 작가들조차 1만부 팔기가 어렵다는 말이 나오니 말이다. 개봉 보름 만에 1천만 관객을 자랑하는 진짜 ‘괴물’같은 영화들이 등장하는 시대에 불과 수천 독자를 얻기가 힘드니 안쓰러운 정도가 아니다.

포클레인 기사의 무지막지한 시각으로 보건데 이는 명백히 자업자득이다. 누가 돈을 주고 남의 사생활 일기를 사보려 하겠는가? 안네프랑크의 절박한 일기도 아니고 한량한 소설가의 고충이니 연애담이나 늘어놓은 느끼한 문장의 일기를 돈 주고 사겠는가?

기름을 처바른 듯 감각적이고도 난해한 문장, 줄거리조차 불명확한 지루한 이야기들, 주인공의 이름도 외우기 힘든 외국 배경의 소설들을 읽어가기가 얼마나 힘든지, 작가 본인은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문학적으로는 새로운 시도라 칭송받겠지만 나 같은 단순무식한 독자들을 설득하기는 쉽지 않다.

남을 즐겁게 하고 눈물과 웃음을 던져주는 전통적인 의미의 광대에서 타인을 가르치고 계몽하는 사상가의 반열까지 올랐던 소설가들의 변신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문학의 죽음은 이제 공공연한 화두가 되어 버렸다. 어떻게든 대중의 사랑을 받아보려고 이리 기웃, 저리 기웃해 보지만 존재마저 위태로운 처지가 되어 버렸다. 존경도 인기도 잃어버린 가난하고 외로운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3. 거름더미 속의 지렁이 떼를 들여다보듯 살아남으려 버둥대는 소설가들의 몸부림을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남의 일 같지만은 않다. 일시적으로 다큐작가로 변신하기는 했으나 언젠가는 다시 소설의 세계를 기웃거릴 처지를 생각해 냉소를 거두고 진지하게 몇 마디는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어차피 깡무식을 자처한 마당에 잘 팔리는 영화들과 고전문학의 공통점을 나열해 보고 싶다. 고귀하고 수준 높은 문학을 하고 싶은 이들에게는 다분히 폭력적인 진단으로 보이겠지만 나의 태생이 그런 걸 어찌 하겠는가?

내가 보건데 수백만의 관객이 몰리는 영화들과 수많은 경쟁을 뚫고 살아남은 고전문학의 첫 번째 공통점은 연애 혹은 사랑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다는 점이다. 혹은 ‘괴물’이나 ‘한반도’처럼 아예 없는 경우도 있다.

반면, 순수한 연애영화는 수십만 관객을 끌어들이기도 어렵다. 관객들이 진지하지 않아서만은 아니다. 우리를 몰입시키게 만든 대부분의 세계명작이나 한국의 7,80년대 소설들에서 연애이야기는 극히 부수적인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 소설이나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사회와 역사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투쟁과 희생, 이타적인 사랑과 정의 같은 것들이다.

두 번째 공통점은 매우 사실주의적이라는 점이다. 역사물은 물론 공상영화조차도, 눈만 뜨고 있으면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고 의문을 품을 여지도 없이 가공의 현실에 흡입되고 만다.

뒤틀리고 엽기적인 심리영화 내지 실험적인 영화들, 혹은 기본적인 사실주의 기술에 미치지 못하는 단편영화의 관객이 매우 제한적이라는 것과 비교가 된다. 인간의 말초적인 본능이나 분노 같은 것들을 엽기적인 줄거리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김모 감독은 한국영화 관객들의 저질성을 비난하며 다시는 한국에서 영화를 개봉하지 않겠다고 선언까지 했다는데, 본인이야말로 가장 저질적인 상업영화 제작자일 수 있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수많은 독자를 열광케 하던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서양문학과 80년대 이전의 한국문학이 극히 사실주의적인 줄거리와 표현방식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실험정신 따위는 학교에서나 배우고 나와서는 싹 잊어버렸으면 좋겠다.

셋째, 눈물이 있으되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이들에게 바쳐지는 감동이라는 점이다.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이 헤어지는 장면에 눈물을 흘릴 수 있지만,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등장인물에게 바치는 감동의 깊이와 같을 수는 없다.

그 타인이라는 것이 국가일 수도 있고 정의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지만, 이타적인 희생은 가슴속 깊은 곳으로부터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훌륭한 재료다. 이 역시 세계명작들의 공통점의 하나임은 물론이다. ‘쿨’이니 ‘세련’이니 하는 용어들은 본인이 연애할 때나 활용하기를 바란다.

그밖에도 이들 영화와 명작들의 공통점은 많은데 굳이 나열하지 않아도 될 만큼 상식적이다. 잘 된 영화는 감독의 시점이 아니라 관객의 시점에서 허점이 보이지 않도록 철저히 완성도를 높인다. 좋은 소설도 작가의 주관적인 시각을 배재하고 독자의 시각에 맞추어 쓰기 때문에 한 번 책을 들면 좀처럼 놓을 수 없을 만큼 흡인력이 높다.

여기서 문학성의 기본이 되는 문장력, 사건 전개의 합리성, 일관성 같은 것들은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어려울 정도의 필수사항이다. 만약 작가라는 사람이 이런 것들이 안 된다 토로한다면 앞으로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할 게 틀림없다.

소설을 영화처럼만 쓸 수는 없고, 영화가 지고의 가치인 것은 물론 아니다. 소설이든 영화든 많은 사람이 본다고 최고의 작품인 건 더더욱 아니다. 그러나 요즘 영화들이 과거 계몽시대 문학, 말 그대로 문학의 전성시대와 매우 유사한 공통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번쯤 참고할 만하지 않을까? 저 많은 대중이 좋아하는 방식을 유치하다는 한 마디로 평가절하하려는 특권의식부터 버리고 말이다.
 

4. 문학이 죽어간다는 아우성으로 숨이 넘어가는 판에 계몽주의니 사실주의 문학을 회고해 보라고 떠들다니 시대착오적이란 비웃음이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요즘 신세대들의 감정을 연구하고 이해해 보라느니, 감각적인 문장기법을 공부하라느니, 새로운 시대에 맞는 주제의식을 설정하라는 소리들도 뒤따라온다.

당신들이 틀렸다. 미안하게도 나는 복고주의자가 아니다. 나름대로 냉철한 현실주의자일 뿐이다. 나야말로 말하고 싶다. 문학으로 자신을 표현하지 말고, 소설을 실험대상으로 삼지 말고, 이 시대에 어떤 이야기가 필요한가를 좀 더 냉정히 생각해 보라고. 당신들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소설 좀 그만 쓰라고. 저 단순하고 계몽적이고 사실주의적인 영화에 왜 1천만 명이 몰려가는지 연구 좀 해보라고.

따지고 보면 오늘의 문학 위기는 작가란 사람들이 광대도 아니고 선생도 아닌, 새로운 특권층이 되려다가 빚어낸 현상 아니냐고. 그렇게 귀족이 되고 싶거든 논술선생으로 진출해 돈이나 왕창 벌어 강남에 집을 사라고 말이다.

여전히 희망은 있다는 식의 상투적인 결론으로 맺고 싶지는 않지만, 요즘 우송되어 오는 몇몇 작가들의 신간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짓곤 한다. 그래, 이거야. 이런 작가들이 나와야 해. 장래성이 있어. 좀 더 재미있게 쓰기만 한다면 한국소설의 미래를 담보할 거야. 혼자서 격려하고 기뻐한다.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또 다른 작가들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게 너무 좋다. 그들에게 힘을 합치자고 말하고 싶다. 서로 격려도 하고 현실에 격분도 하고 자료도 공유하며 살자고 제안하고 싶다. 그들의 이름은 비밀이다.
소설가 안재성은 소설 <파업>으로 노동소설의 큰 장을 열었다. <황금이삭>에 이어 <경성 트로이카>를 발표하면서, 그가 살아있음을 알렸다. 최근에 <이관술 1902-1950>을 '사회평론'에서 출간하였다. 노동문학이 '한 물 갔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안재성은 작품으로 이야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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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영성
 

정치적 변혁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영성을 소홀히 여기고 영성에 몰두하는 사람들은 정치적 변혁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예수는 둘은 하나라는 것, 진정한 인간은 정치적으로 급진적이면서도 영성이 충만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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