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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조기영어교육인가

누구를 위한 조기영어교육인가


조 진 희(서울영일초등학교 교사)


영어 공화국에서 초등교사로 살아가기


“The tiger is stronger than the rabbit.” 영어 수업이 끝날 무렵 6학년 33명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온다.(이런 비교급 문장이 5개 더 있는 책을 들고서) 나는 이 시간이 가장 공포스럽다. 호랑이는 tiger이라고 써라, 비교급이니 strong 뒤에 er을 붙여라, ‘~보다’라는 뜻의 영어는 then이 아니라 than이다, rabbit 앞의 the는 소문자로 써야 한다….

비교급 4번째이자 마지막인 쓰기 시간인데도 아이들에게 비교급 개념은 잡혀 있지 않다. 고칠 점 하나 없이 통과되는 아이가 거의 드물어 화장실 갈 시간도, 물 한잔 마실 시간도 없어 아이들에게 물 한잔을 ‘요청’해야 한다. “Can I have some water?” 이미 6학년 다른 학급 아이들이 영어실에 들어와 떠들며 수업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초등 영어 10년 효과는 있었는가


한국에서는 영어가 ‘왜’ 필요하고 ‘얼마나’ 필요한가보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이를 ‘원어민처럼’ 능통하게 만들 것인가에만 관심이 있다. 1997년 초등학교 3학년에 영어과가 처음 들어온 지 올해로 10년째다. 하지만 정부(영어조기교육 확대 방안은 10개 이상의 부처가 연합해 범정부적으로 추진되고 있다)와 영어교육 전문가들은 제대로 된 초등영어정책 평가서를 내놓지도 않은 채, 지난 1월 「초등영어교육 확대 시범 실시 방안」을 발표했다. 이 계획에 따라 지난 9월 1일부터 전국 50개 초등학교에서 1~2학년 영어교육이 시범 실시되고 있다. 이 연구학교 운영 결과를 바탕으로 교육부는 2008년부터 확대 여부를 검토한다고 한다.

초등 영어 10년 효과에 대한 과학적인 평가도 없이 불도저식으로 진행되고 있는 초등 1~2학년 영어교육 시범 실시의 배경은 ▲학부모 및 전문가들 조기영어교육 찬성 ▲도시와 지방의 영어교육 격차 해소 ▲사교육 및 해외 연수로 인한 국고 낭비 축소 등이다. 현재 3학년 이상부터 실시되고 있는 영어교육도 정상화되지 못했는데 모국어교육이 공식적으로 시작되는 1학년부터 영어를 배우는 데 반대하는 많은 초등교사들과 국어학자들의 지적을 정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EFL 환경에서 영어 시작 시기는 무의미


서울대 영어교육학과장 이병민 교수는 『녹색평론』(2006년 7~8월호)에서 “5~6천 시간 이상 영어시간을 제공해주지 못할 바에는 우리와 같은 외국어 교육환경에서 영어를 처음 배우는 나이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면서 “외국어 교육환경에서 언어학습의 절대적 시기가 있다고 믿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어교육의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과학적 근거가 희박하다”고 단언하였다.

아시아 국가 대부분이 그렇듯이 한국은 대표적인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즉 외국어 교육환경 나라이다. ESL(English as a Second Language) 환경과 달리 EFL 환경에서는 언어습득장치(LAD)가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언어입력과 언어필요가 극히 제한되어 있어 영어를 언제 배우냐는 중요하지 않다. 주당 1~2시간 이루어지는 영어교육을 통해 아이들의 영어능력이 크게 향상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는 과학적ㆍ실증적 근거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어떤 영어교육과 교수는 3~4학년 1시간씩 배우는 것보다 4학년부터 2시간씩 배우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EFL에서는 일찍 배우는 것보다 영어 노출시간과 학습강도가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영어 학업성취도, 사회계층과 정비례


영어는 모든 사회적 관문 통과하는데 수문장 역할을 하면서, 보이지 않는 권력이 되고 한 사람의 인생을 결정짓는 지표가 되고 있다. 학부모들은 문화자본이 되어 버린 영어에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빚을 내서라도 미국이나 캐나다는 못 가도 필리핀 어학연수 아니 영어캠프 정도는 보내줘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더 나아가 이런 학부모들의 바람을 타고 정치인들은 영어마을 조성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다.

학부모의 사회계층과 영어 학업성취도와의 관계는 놀랍도록 정비례한다. 사회계층이 위로 갈수록 영어 사교육은 개별화ㆍ고급화ㆍ장기화되고 있다. 최상층 부모를 가진 아이들은 성취도가 높았으나 중산층ㆍ저소득층ㆍ극빈층 아이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한국에서 사교육이 100% 차단되는 ‘순수한 공교육에 의한’ 영어 학업성취도 향상 정도를 실험할 수 있는 조건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어교육 방법 또한 널뛰기를 하고 있다. 잘하는 아이에게는 심화과정을, 못하는 아이에게는 보충과정을 해주라더니, 이제는 심화과정의 상당 부분을 모든 아이들에게 가르치라고 한다. 처음 영어가 들어올 때에는 듣기ㆍ말하기 의사소통 위주의 교육이 돼야 한다더니 읽기ㆍ쓰기도 같이 해야 효과가 있단다. 지난 8월 교육부는 이러한 내용을 담아 초등 영어 7차 교육과정을 수정고시했다. 2009년부터 아이들은 읽기를 3학년부터, 쓰기를 4학년부터 1년 빨리 배운다(공교롭게도 2009년은 1~2학년 영어가 처음 시작될지도 모르는 해이다).


영어 문화자본 그리고 영어 양극화


어린이집에 다니는 4살짜리 딸이 올해부터 영어 특별활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원장 선생님 왈, 얘들은 1학년 때부터 영어를 배울 것이기 때문이란다. 영어 공화국에서 학부모로 살아가는 것은 교사보다 더 힘들다. 도대체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갸우뚱하면서도, 내 아이가 이 공화국에서 생존해야 하므로, 괜찮다는 사교육을 좇지 않을 수 없다(이병민 교수는 아이를 원어민처럼 만들고 싶다면 가급적 빨리 영어권 국가로 이민을 가라고 충고한다. 단 한국 국적은 버리고.....).

단언컨대, 초등 1~2학년에서 영어를 배워도 외국인 만나서 의사소통 하기는 쉽지 않다. 영어 양극화는 더욱 심해질 것이며, 유아 및 초등학생의 영어 사교육은 10배는 심화될 것이다. 모국어 습득에 미칠 부정적 영향, 창의성ㆍ흥미ㆍ자신감 등 정의적인 발달에 미칠 악영향은 불을 보듯 뻔하다. 영어 문화자본은 최상위 계층에게 부와 권력을 재생산 해줄 뿐 서민층 자녀들의 장밋빛 미래는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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