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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내용과 형식을 가르지 않는다...김정환론

시는 내용과 형식을 가르지 않는다

 
                                                                            김정환(시인)

  먼저 여러분이 시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은 채 시인 지망생으로서 습작을 해 나가면서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7년 동안 등단을 목표로 글을 써 나가는 이들을 대상으로 한 '문학학교'를 맡아 꾸려오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시인 지망생들로부터 문의 전화를 받는 일이 많습니다. 전화를 하시는 분 중에는 자신의 습작시를 읽어주며 "내가 뭘 썼는데 이게 시인지 아닌지 궁금해서 전화를 걸었다"고 말하는 순진무구하고 궁금증이 많은 분에서부터, "이게 시가 아니라면 우리 나라 시단은 전부 자폭해야 된다"는 과격한 테러리스트까지 다양합니다. 그만큼 시의 비밀은 숱한 시들이 창작되었고, 또 정의가 시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껏 속시원하게 풀리지 않은 모양입니다. 따라서 '시는 무엇인가?' 하는 폭력적인 질문보다는, '도대체 왜 다른 글은 시가 아니라고 하면서 이건 시라고 하는가' 라는 생각의 언저리를 왔다갔다하면서 정말로 궁금했던 것이 있으시면 물어주시기 바랍니다.

 

청중 : 저는 그 동안 시의 정체성을 모르기 때문에 여러 군데를 쫓아다니곤 했습니다. 어쩔 때는 제 자신한테 화가 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 앞에서 내가 쓴 시에 대해 평론가들이 얘기하듯이 멋진 수사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나의 가치관이나 사상을 매개로 하여, 내 시는 이렇게 해서 형성이 되었고 이렇게 썼다고 하면 좋을 텐데 현실은 그렇지 못해서 내 시가 난도질당할 때마다 항상 꿀 먹은 벙어리처럼 고개를 숙이곤 했습니다. 나는 가슴 뜨겁게 시 앞에 앉고, 내면에 있는 것들을 충분히 운율을 살려서 글로 옮겼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사람들 앞에 작품을 내보일 때에는 항상 작아지고 비참해짐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은 삼류라고까지 매도해서 제 시작(詩作) 의욕을 꺾음은 물론 인간적인 비애까지 맛보게 하고 있습니다.

 

김정환 : 자신으로서는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남들에게 난도질을 당하다 보면, 본인의 가슴이 뜨거워져 있는데다 남은 여지없이 난도질을 해대니까 덩달아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고 말 겁니다. 동료들로부터 분석적 읽기를 통한 비판을 들으면서, '도대체 무슨 얘기인지 모르겠다, 무슨 소리인지 수긍이 가지 않는다'라고 생각되는 대목은 없었습니까?

 

청중 : "넋두리다. 왜 이 넋두리에서 너는 헤어나지 못하느냐"고 비판이 다반사지요. 저는 때에 따라서는 시단에서 자연 친화적인 시들이 주목을 받는 걸 보면 그 쪽으로 달려가고, 또 다른 경향의 시들이 쏟아지면 친구 따라 가듯이 덩달아 '나도 이런 풍으로 써보면 어떨까' 하고 쏠리곤 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런 풍으로도 써보지만 결국 내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손을 들고 만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황지우의 시들처럼 제 습작의 분위기가 황폐한 면이 강하다 보니까, "너무 추상적이다"는 비판 앞에서 제 스스로 '아, 이것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내 시다'라고 자신감을 가졌다가도, 사람들 앞에서 난도질을 당할 때면 '아, 나는 과연 안 돼' 하면서 주저앉곤 합니다.


"왜 이 시가 나에게 와 닿는 것일까?"

김정환 : 제가 듣기에는 "황지우 시처럼 황폐하고…"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황지우 시를 가리켜 황폐하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시 소재나 제목 따위를 그것이 담고 있는 매혹만으로 보는 것이지요. 어떤 글이 황폐할 수 있고 기름질 수 있고, 환경을 노래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개인의 사랑을 얘기할 수도 있고 아니면 공동체적인 사랑을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소재일 뿐입니다. 소설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시는 분량이 짧기 때문에 더욱 분간이 안 되는 어떤 경지를 강조하게 마련입니다. 우리가 황지우 시를 읽었을 때 좋다고 하면, 내용인지 형식인지… 여러 가지 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를 대했을 때, 시의 내용이 내가 원하는 것이어서 좋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글을 처음 시작하는 사람들끼리의 만남밖에는 되지 못합니다. 오히려 거꾸로 어떤 시의 내용 자체는 내 삶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고 내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일지도 모르는데, '왜 이 시가 나한테 와 닿는 것일까? 그 메커니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황폐한 시를 좋아하지는 않지요.
어떤 시를 볼 때는 기본적으로 감동이라는 것과 충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시를 읽고서 감동을 받았을 때, 그것을 정말로 좋은 시를 쓰는 밑거름으로 쓰려면, 이 감동이라는 것이 정말로 나한테 제대로 된 것인지 생각해 봐야 됩니다. 왜냐하면 감동이라는 것과 만만한 것이라는 것이 구분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나도 대충 쓰는데 이 친구도 대충 쓰네. 나는 아직 나가지도 않았지만 이 친구는 벌써 유명해졌네. 하지만 만만하고 얘 수준도도 나랑 비슷하네.'
이러한 생각들을 우리가 감동으로 생각하고 착각한다면, 이 사람은 미망(未忘)에서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그걸 감동이라고 할 수가 없고 '나랑 비슷하기는 한데, 이건 나로부터 출발된 것이지만 나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단 한 줄이 보여주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할 때 우리는 비로소 '감동(感動)'이라는 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게 진짜 감동입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80년대, 90년대 들어 문학이 대중화되면서 가장 손해본 말이 감동이라는 말인 것 같습니다. 독자들이 베스트셀러를 보고 감동 받았다고 하는 걸 보면, 제가 느끼기에는 '만만하다, 내가 바쁘니까 그렇지, 나도 바쁘지 않으면 이 정도는 쓰겠다' 즉 자기 수준과 비슷하다는 말을 감동이라는 말로 치환시키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듭니다. 이런 일들이 체질화되면 정말로 좋은 시인이나 좋은 소설가가 되는 길 중의 하나가 막힙니다. 즉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좋은 글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끝까지 가지고 있다면 좋은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자기의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어정쩡한 감동이라는 말로 자기 비슷한 것, 자기와 비슷한 소재를 발견한 것 정도를 가지고 감동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가령 학창 시절에 데모를 해서 징역을 산 경험이 있는 사람이 어떤 시를 읽고서 '아, 이 사람은 데모하고 징역을 살아서 이렇게 쓰네.'라고 생각하면서 동질의 경험을 단순히 감동이라고 생각하는 순간에 중요한 배움의 길이 막혀 버립니다.
충격이라는 것은 자기와 다른 것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그냥 충격으로만 친다면 정말 엽기적인 사건처럼 충격적인 것이 없지요. 누구한테 배반당하거나 혹은 신문에서 뭘 보는데 엄마가 자기 아들을 시켜서 아버지를 죽인다거나 하는 것들이 문학으로 엽기적(獵奇的)이다라고 했을 때는 어느 정도 제련을 거쳐서 나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것을 생략한 채 새로운 것이나 충격적인 것만을 찾는다면, 그것은 문학인지 사건인지, 문학사에 들어가야 할 작품인지 사회사에 들어가야 할 작품인지를 모르게 됩니다. 제가 충격과 감동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어떻게 보면 감동 안에 충격적인 부분이 있고, 충격 안에 감동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즉 감동이 없는 충격이라는 것은 신문에서나 만날 수 있는 일이고, 충격이 없는 감동이라는 것은 내 주변과 다를 것 없이 그저 밋밋하고 만만한 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자기한테 좋은 시라고 읽혔을 때 '아, 이 사람도 나랑 비슷한 부류의 시를 쓰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건 위험합니다. 또 '아, 이 사람도 나와 비슷한 고통을 갖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위험합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구분이 안 될 때 큰 감동을 일으킵니다. 어떤 작품을 읽고서 감동을 받았을 때, 형식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인지, 혹은 형식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내용 때문에 감동을 받은 것인지, 혹은 내용 때문에 충격을 받은 것인지 구분이 안 될 때, 그 작품이야말로 진짜 좋은 작품입니다. 또 그 감동은 신선하고 좋은 배움이 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어떤 시를 봤을 때,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충격과 감동이 구분되지 않을 때,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충격이 감동이고 감동이 충격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한 구절을 만났다면, 우리는 그 시인의 작품 세계 전체를 연구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을 선생으로 만들 길이 마련되었다는 뜻입니다.


남이 어떻게 썼나보다 자기 안의 치열성 있어야

넋두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이 어떻게 쓰는가라기 보다는 자신의 작품 앞에서 내 자신에게 만족이 되는가, 어떤 시상이 떠올랐을 때 '이거 안 쓰면 정말 미치겠어'라는 생각이 드는가, 습관적으로 쓰는 것이 아니고 자기 안에 뭐가 나와서 이걸 글로 표현하지 않으면 계속 불편하고 신경질이 나는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자기 머리속에서는 정말 근사하게 될 줄 알았지만, 아무리 초일류 시인이라 하더라도 자기 머리 속에 '아, 이건 정말 잘될 것 같애'라고 하는 만큼 쓰여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것이 곧 이상과 형상화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계속 글을 쓰는 이유는 자기가 쓰고 싶었던 글을 써놓고 보니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또 쓰는 겁니다. 자신의 작품이 더할 나위 없이 마음에 든다면 더 이상 쓸 필요가 없겠지요. 그런 불편함이 아니면 글을 계속 쓰는 이유가 없습니다. 늘 자기가 쓰고 싶었던 것보다 글로 되어 나타난 것이 못마땅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서 그 다음 글을 쓰는데, 그 글이 처음에 못 메웠던 간극보다 더 많은 것을 메우고 동시에 더 큰 간극을 만드는 게 글쟁이들이 글을 써 나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형상화와 이상의 관계라는 것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꿈이 있었는데 그걸 이루지 못했다던가, 평생을 살아도 나는 부자가 되고 싶었는데 못했다던가, 훌륭한 지도자가 되고 싶었는데 못했다던가… 이런 이상과 실제로 한 일의 간극(間隙)보다도 훨씬 더 매력적이기 때문에 글을 계속 쓰는 거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일 큰 문제는 한편의 글을 쓰고 난 다음 제대로 남의 평가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글을 쓸 때에 어떤 불꽃이 내 안에서 터져서 이 글을 시작했는가, 불꽃으로 글은 시작되지만 끝날 때는 생애가 걸리는 겁니다. 짧은 시건 긴 소설이건 한 작품은 탄생과 함께 작품의 생애를 겪게 마련입니다. 나로 하여금 글 앞에 앉혔던 섬광 혹은 불꽃이 제대로 살아 있는가, 그것이 제대로 형상화되었는가,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긴 했지만, 그것을 몸체 즉 세계로 만드는 과정에 더 늘어난 것이 무엇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글을 단련시키는 것 못지 않게 글이 사람을 단련시키는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들여다보고 보다 더 자기 자신에게 더 누추해지는 경험을 갖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평론가들은 좋은 작품이 왜 좋은지를 설명해줄 수는 있어도,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학자, 글쟁이와 연결된 존재라서, 글의 비어 있는 데를 찾아주지는 않습니다. 외국의 경우에는 창작 교육 능력을 가진 교수사 등의 제도를 두고 있습니다만 우리나라에는 그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평론가에게는 그런 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청중 : 작년부터 시 공부를 해가면서 습작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시는 소설과는 달리 짧은 글 속에 많은 내용을 표현하는 장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거기서 생기는 문제점으로,  그 함축된 내용을 필자 혼자만 알아야 되는가 아니면 필자 아닌 다른 사람한테도 필자가 쓰고자 하는 내용이 전달이 되도록 써야 되는가 하는 점입니다.
어떤 시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고, 좀 쉽게 풀이한 것은 대강 어떤 뜻인가 추상을 해볼 수 있는데, 필자 외에 다른 사람이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지 혼자 내 마음에 들도록 썼을 때 이것을 시로 볼 수 있을까요? 아니면 꼭 타인에게 잘 전달되도록 써야 될까요?

김정환 ; 정말 꼭 알아듣고 오해가 없게 써야 되는 것은 공문서입니다. 우리가 문학을 한다는 것은 알아듣는 것을 바탕으로 하기는 하지만, 이 사람이 보는 것과 다른 사람이 보는 것이 다르게 해석되는 면 즉, 공적인 것에 대한 저항, 소극적으로 말하자면 저항, 적극적으로 말하자면 공적인 것의 한계가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서로 좋아하는지 아닌지 저울질하기 마련입니다. 보다가 용감했으면 상대방을 챙길 수 있었는데 비겁해서 평생 한탄한 사람도 있고, 또 아직 사랑에 대한 확신도 서지 않아 시간을 두고 다가가야 하는데 서둘렀다가 파경의 슬픔을 맛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공적인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첫째로 공적인 논리와는 다른 공적인 논리를 포괄하는 언어가 문학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 사람이 각기 나름대로 해석을 한다고 해서, 아무도 모른다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즉 여러 겹의 언어를 구사하는 겁니다. 여러 사람이 보면 자기의 느낌대로 자기가 살아온 대로 여러 개로 할 수 있는 겁니다. 흔히 고전(古典)이라는 말을 합니다만, 한 시대에 이미 정평이 난 작품이라 할지라도, 백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읽어보면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달리 보이기 마련입니다. 또 이 백년 뒤에 읽어보면 그 세대가 다르기 때문에 내용은 같지만 달리 보입니다. 누가 새롭게 달리 쓴 적이 없는데 해석이 달라지는 것은 여러 겹의 언어의 핵심을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좋은 문학 작품인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모르는 것을 발견해 내서 쓰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글을 써 나가면서 '나는 천재다. 남들은 저것도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하느님이 아무리 좋은 능력을 주셨다고 해도 그 사람은 발전을 못합니다. 발전해 나가기 위해서는 일반 사람들과 늘 만나면서 그 사람들과 싸우든 친하든 가르치든 배우든 관계 속에 존재해야 합니다. 언어는 그렇게 발전하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아이큐가 높은 사람일지라도 인생을 알기 전에는 제대로 문학을 하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은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핍박을 받고 어떤 때는 그것 때문에 살아남아 왔었던 것입니다.
 

좋은 시는 천재성 아닌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안에 대중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관계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 언어인데, 늘 남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중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고 미리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대중이라는 존재를 제일 모릅니다. 여기 있는 나를 비롯해서 모두가 대중이면서 대중이란 말을 제일 오해하고 있습니다. 신문이나 언론에서 '이것이 대중이다'고 나오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 안에 있는 일원이 대중인데, 내 안에 있는 것이 대중인데, 대중이란 걸 남한테 듣습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 같은 것에는 시청률을 생각하기 때문에 대중은 뭐다라고 하는 것이 병적으로 들어 있습니다. 그 안에 대중이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되고, 내 안에 대중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 안의 대중과 대화를 할 수 있어야 자기 밖의 대중과도 대화를 할 수 있고, 대중의 좋은 점이 무엇인가도 보이면서 겸손해지고 배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처럼 늘 텔레비전 시청률을 가지고 대중을 따지는 것은 큰 오류를 범하는 일입니다. 일일이 마이크를 대고 '일일 연속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라고 물으면서 우리는 대중을 잘못 대접하고 있는 겁니다. '그걸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비판하면서도 시청률 70%,  80%라는 물신(物神)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복잡하게 얽힌 상업 논리 안에서 대중상(大衆像)이 이런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안의 대중, 자기 안에서 지향하는 대중에 끝간 데까지 가보는 것이 시이겠고, 가장 폭넓은 데로 가보는 것이 소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정환 : 시에서 비유라는 것은 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첫 욕망일 것입니다. 비유 때문에 시를 쓰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자기 마누라를 지지고 볶다가 갑자기 좋아져서 감동을 했을 때 그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뭐 같은 우리 마누라'라고들 하지 않습니까. 여자 쪽에서도 마찬가지로 남편이 맨날 술만 먹고 돈을 벌어오지도 않고 주정만 하다가, 어떤 때 오래 산 맛을 느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말이 '뭐 같은 우리 남편'일 것입니다. 그게 다 시를 쓰고 싶어하는 시심(詩心)입니다. 이 시심이라는 것은 백만 명이면 백만 명한테 다 있습니다. 백만 명이 다 시심을 갖고 있지만 그 중에 시인이 되는 것은 한 명도 될까말까 합니다. 우리나라의 시인이 4천 명이라고 하는데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많은 숫자입니다. 하지만 숫자의 많고 적음이 문제가 아니라, 정말로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좋은 시와 소설을 낳는 것은 시작은 비유(比喩)입니다. 어떤 비유가 제일 좋은 비유라고 생각하십니까? 비유의 수준은 곧 시의 수준을 대는 척도입니다. 흔히 변덕스러운 사람을 가리켜 카멜레온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시적인 비유가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변덕스럽다'는 쉽게 들리지만 이 말 속에는 인간사의 온갖 기기묘묘하고 복잡한 양상을 일개 동물인 카멜레온에 비유했을 때 이것은 폭력이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한꺼번에 이미지를 전달하는 광고라든가 선동 등에 어울리는 것이지요. 8,90년대 운동권에서 유행한 말 가운데 '개떼처럼 몰려가자'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런 말은 아주 타락한 비유에 해당할 것입니다. 이 말은 선동하는 효과는 있지만 문학적 효과는 없다고 보아집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복잡다단한 사람들이 몰려가는데, 이를 획일화해서 비유하는 건 그야말로 비유의 테러리즘이지 문학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사회주의 70년 역사를 보면 그런 비유 때문에 정치도 망했다고 봅니다. 스탈린은 역사의 수레바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이것은 문학적인 유혹이라고 볼 수 없는 정치적 유혹이거나 폭력적인 유혹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우리가 국회의원 선거 등에 즈음하여 후보자를 천박하다고 합니다만, 그들에게 '대중을 이런 식으로 선동하면 된다'는 의식이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를 한번 치를 때마다 폐해를 문학적으로 복구하려면 20년씩 걸립니다. 아무튼 이런 것들을 뿌리치면서 비유의 수준을 높여 가는 것이 문학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남들이 쓴 비유를 다시 쓸 필요는 없습니다. 자기 생애가 걸려져 있는 비유를 써야 합니다. 문학의 근대가 시작되면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비유 수준이 인간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초생달 같은 눈썹, 앵두 같은 입술, 요즘도 시를 처음 쓰는 사람은 씁니다만 이런 자연의 비유, 문학이 근대화되면서 비유가 인간사회 속으로 들어와 버립니다. 예를 들어 돈을 꿔간 친구가 갚기는커녕 갚는다고 약속한 날을 2, 3일이 넘겨 겨우 물어보니, 그제서야 "아, 그거 못 갚았어."라는 말을 들었다 합시다. 이럴 때 우리는 흔히 "열 받았다"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비유에 인간의 세계가 들어오는 거지요. 물론 아직도 탕진하지 않은 자연의 비유들이 남아 있습니다. '별처럼 아름다운'이나 '보름달처럼 밝은'이란 표현은 너무나 많이 써먹은 것이지만, 자연이라는 것이 워낙 넓은 것이기 때문에 자연의 비유를 아직 탕진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문학이 근대로 넘어오면서부터 특징적인 것은 비유 수준이 인간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속담도 수준이 갈수록 달라지는 겁니다. 문화 수준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지요. 우리나라가 옛날에는 속담 수준이 높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속담 수준이 낮아져 갑니다. 속담이 아니라 삼행시나 사행시로 바뀌어 갑니다. 문화 수준이나 정신구조의 수준이 낮아지는 것입니다.
문학의 역할이라는 것은 결국 이런 일들을 보면서 그대로 못 참는 것입니다. 저는 신문을 1년 동안 일체 안 보다가 다시 계속 보다가 하는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일체 안 보는 이유는 거기에 들어있는 비유나 언어의 수준이 갈수록 떨어지는 걸 보면서 때문에 열 받느니, 안 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또 그래도 1년을 참고 보는 것은 그걸 가지고 싸우면서 이걸 높이려고 해야지 나 혼자 잘났다고 외면해서는 문학의 언어에 대화의 통로가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문학이라는 것은 어려운 입장에 있는 것이고 문학이라는 것은 원래 어려운 것입니다. 자기만족만 가지고 사는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비유의 수준이 높아져야만 하는 게 첫 관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청중 : 시를 쓰면서 행갈이를 어쩔 때 합니까? 일반적으로 시는 어떻게 쓰고 언제 쓰는지 그리고 김정환 시인의 경우는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김정환 : 소설로 말하면 단락이고 시는 행을 가는 경우인데 어떤 때 그러고 싶을까요? 행갈이가 지망생들이 처음에 빠지는 가장 위험한 함정인 것 같습니다. 행갈이를 조심하고 비유 수준을 높일 생각을 하고 경어를 너무 쓰면 내용이 형식에 빠져 버립니다. 시인 지망생들에게 저는 우선 김수영 시집을 읽도록 권합니다. 거기에는 경어가 하나도 없고, 산문과 시가 구분이 안 되는데도 시입니다. 시와 산문 사이의 경계를 겹치면서 시로 끌어들이는지, 행갈이가 어디서 되는지 경어니 구투니 이런 부분이 완벽하게 없어지는 점에서 시를 지망하는 분들이 꼭 한번 읽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시의 길에 왕도는 없습니다. 각자 나름의 독특한 영역을 확보해 나가면서 내용과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온몸으로 감동을 낳는 시작을 꾸준히 해 나가기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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