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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가지 제안

첫번째는 <월트컵을 넘어서는 직접문화행동>입니다.

 

이미 hrnet으로도 많이 뿌려져있기도 하고

포털의 1면을 장식하기도 해서 다들 아실텐데.

김완이 전쟁없는세상 홈페이지에 쓴 글을 보면 쉬울 듯.

 

 

 

다들 아시겠지만, 올해 6월에는 월드컵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월드컵은 4년을 기다린 열정의 시간이겠지만, 또 다른 이들에게는 중요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재앙일수도 있는 것이 바로 월드컵입니다.

2002년 월드컵은 미증유의 경험을 제공하였고, 이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의 거리응원을 어떻게 읽고 2006년 거리응원이 어떤 맥락을 만들어낼 것인가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사회는 지금 월드컵 이외의 것들에 관심을 보이지 않고, 축구 이외의 것들에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고 있지 않고 있습니다. 자본의 적극적인 개입, 미디어의 광기, 월드컵을 활용하려는 정부의 의도 등 2006년 월드컵을 10여일여 앞둔 지금 월드컵은 한국 사회에 거대한 재앙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심각한 마취와 망각 뒤로 많은 문제들이 은폐되고 있습니다. 평택의 처절한 투쟁은 뉴스에서 사라진지 오래이고, 우리의 일상 전부를 팔아먹으려는 FTA협상도 주변 뉴스로 처리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월드컵이 우리 사회를 마취시킬 한달여 동안 이 마취와 망각의 시간은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입니다. FTA 협상은 차질없이 진행될 것이며, 평택은 잊혀질 것입니다.

이에 작지만 의미있는 문화행동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월드컵에 의한 본격적인 마취와 망각에 앞서 작은 파장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시내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월드컵 조형물에 스티커를 부착하고, 인터넷(참세상)을 통해 월드컵의 다층적 의미를 읽어내고, 월드컵에 대한 열광 이면에 존재하는 진실들을 알려가는 릴레이 기고를 조직하려 합니다. 월드컵보다 더 아름다운 투쟁의 의미들을 전하고 월드컵을 둘러싼 천박한 국가/자본의 논리에 도전하는 직접행동을 전개하고자 합니다.

활동가 여러분들의 작은 성금과 후원을 모아 스티커를 제작하여 서울 시내 곳곳에 설치되어있는 월드컵 조형물들을 공격(!)하려 합니다.

‘공차기’를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공차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분명 있다고 믿는 많은 활동가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부탁드립니다.
< 함께하는 방법 >

1. 재정 후원
- 스티커 제작 비용 후원계좌 : 하나은행) 159-910088-29707 (김완)
* 모든 비용은 투명하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현재 예상되는 스티커 제작 비용은 100만원 정도입니다.
* 스티커 시안을 첨부합니다.

2. 게릴라 문화행동 참여하기
- 스티커를 부착하는 게릴라 문화행동에 함께하실 분은 ssamwan@jinbo.net으로 연락을 주세요^^ 조만간, 모월 모일 늦은 밤에 행동 개시할 예정입니다.

3. 원고 후원
- 문화연대와 민중언론<참세상>이 함께 “(가칭)월드컵보다 아름다운 진실”이라는 특별페이지를 운영할 예정입니다. 월드컵에 할 말 있는 모든 분. 특히, 공차기보다 중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자 하는 분들은 A4 기준 2페이지 내외의 원고를  ssamwan@jinbo.net으로 보내주시면 소중히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모월모일이 날짜가 잡혔습니다. 함께 하실분은 저에게 연락주세요.

 

 

 

 

두번째 제안은 FTA 광화문 농성장에 참가하기 입니다.

 

이것도 역시 김완이 촛불문화제에서 덜컥 제안을 했습니다.

역시 아시다시피 FTA범국본에서 광화문 열린시민공원에 농성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랫집이 6월7일 오전 9시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 24시간동안

농성장에 참여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입니다. 뭐 모두가 꼭 그 자리에 붙어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어쨋든 그날 아랫집이 책임지면 된다고 합니다. 문화연대랑 또 어디(기억은 안나지만)도 7일날 같이 한다고 하네요.

 

다들 의견을 제시해주세요. 진보블로그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야기도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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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거부운동 7년

“병역거부운동 7년, 갈길 멀어요”
[인터뷰] 제2회 이우정평화상 수상 최정민씨
2006/5/29
최문주 기자 cmjoo@ngotimes.net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이경규의 양심냉장고’ 할 때 그 양심인가? ‘양심적으로 살다’ 할 때 그 양심? 아니 누군 '양심' 없어 군대가나?”

용어조차 낯설던 때가 있었다. ‘병역거부’라는 우리사회 '주홍글씨' 같은 글자 앞에 ‘양심’이라는 단어가 붙다니. 도대체 이게 어디서 떨어진 말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제 누구라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들으면 “아, 그거”라고 대충 아는 척 할 만큼 됐다.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최정민씨(36)다. 그의 또 다른 직함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권 실현과 대체복무제도 개선을 위한 연대회의’ 공동위원장.
 

평화인권연대 최정민 활동가
최문주기자 
제2회 이우정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된 최정민씨.

최씨는 7년 전 국내 시민사회에 ‘양심적 병역거부 운동’을 끌어들인(?) 장본인이다. 그리고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뒷바라지며 대내외적 연대 조직 일까지 도맡아해 오고 있는 살림꾼이다.

최씨가 여성으로서 통일운동, 평화운동을 펼친 고 이우정 선생을 기려 만든 '이우정평화상'에 제2회 수상자로 선정됐다는 소식에 어쩌면 조금 의외인 것 같았다.

전통적으로 여성운동 분야도 아닐 뿐더러 그의 앳돼 보이는 외모 탓에 상을 받기에 좀 젊은 것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 것이다. 하지만 곧 고개가 끄덕여졌다. 운동의 무게를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만하다 싶은 것이다. 그리고 후자는 '아차', 편견일 뿐였다.

2001년 말 오태양씨의 병역거부 선언으로 국내에 공론화되기 시작한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운동'. 사회적 논쟁거리로 불거지면서 용어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실제 변한 건 별로 없어 보인다.

현재 감옥에 있는 병역거부자의 수는 900여명. 일제시대 이후로 총을 들 수 없다는 이유로 감옥을 거친 이들은 총 1만 여명으로 추정된다. 오태양씨 이후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선언자도 30여명가까이 되는데, 이들 중 형을 마치고 출소한 이만 10여명. 현재도 10여명이 감옥에 있는 상태다.

노회찬, 임종인 의원의 대표발의로 재작년 대체복무 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으나 여전히 논의는 지지부진이다. 지난해 말 인권위원회의 권고가 있고서 국방부는 최근 대체복무제 연구회를 발족시켰으나 위원회 구성 기준, 선정 절차 등에서 요식행위라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젊은 병역거부자들의 '대모'라 불린다는 최정민씨를 서울 서대문에 위치한 평화인권연대 사무실에서 만났다.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서 군대와 관련한 '무얼'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겠다고 물으니 최씨는 병역거부 운동이 단순히 군대와 관련된 운동만은 아니라고 답했다. 병역거부 운동은 우리 사회 시스템을 바꾸는 사회운동이라는 것이다. 운동을 하며 몇년 전부터 채식도 하게됐다는 최정민씨는 또 병역거부 운동을 하는 것과 채식을 선택하는 것이 방법론으로는 같은데 뿌리를 두고 있다는 얘기도 들려주었다.

- 병역거부 운동을 시작한 계기는 무엇인가.

2000년 가을 한국에서 아셈회의가 열렸는데 그때 외국 활동가들을 만나 군대를 거부하는 운동에 대해 처음 들었다. 당시 대만이 대체복무제를 막 도입했을 때여서 국제적으로도 이슈가 됐을 때였다.

우선 세미나부터 시작했는데 한국에선 마땅한 용어도 없었고 논문 하나 없을 정도로 막막했다. 외국 자료들을 참조하고 외국 단체들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서구에선 이미 1, 2차 세계대전 당시 병역거부의 큰 흐름이 있었고 대체복무제가 도입되고 정착되는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병역거부 운동에 대해 알게 되면서 마치 뒷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 왜 병역거부 운동에 관심을 갖게 된 건가.

당시 우리나라에는 ‘병역거부’처럼 국가 시스템이나 법제도에 불복해 저항하는 사회운동의 흐름이 없었다. 국가주의 폭력에 대항하는 운동의 방법론으로 ‘참여하지 않는’ 시민 개인의 활동, 그러니까 평화를 애호하는 착한 마음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활동으로 이어지는 흐름 같은 걸 만들어내고 싶었다.
자각한 개인들이 동의할 수 없는 법제도가 있을 때 협조하지 않는 것도 운동의 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 군대 내 폭력이나 징병제 자체에 대한 문제보다 병역거부 운동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 같다.

- 초창기 병역거부 운동을 받아들이는 시민사회의 태도는 어땠나.

세미나 하고 여호와의 증인 분들을 만나기 시작하면서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고 2001년 초부터 공론화해야겠다는 생각에 시민단체들에게 제안하고 다녔다. 근데 그게 1년 동안이나 되지 못했다. 사실 시민운동, 인권운동 진영에서도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거고, 선뜻 나서게 되지가 않았던 거다. 결국 그해 12월 여호와의증인이 아닌 사람으로 오태양씨가 처음 나오고 나서야 공대위가 구성됐다. 이 또한 우리의 한계라는 생각도 들었다.

- 병역거부 운동을 시작한 지 7년 정도 지났다. 어느 정도 공론화는 된 것 같다. 그 동안의 성과가 있다면.

보통 3년형 선고가 내려지던 게 최소형량인 1년 6개월로 줄었다. 여호와의증인 신도들의 경우 교도소 내 종교행위도 일부 허용됐다. 사실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내 양심을 지킨다는 자존감 하나로 버티는 이들에게 사회적으로 지지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당사자들에겐 큰 힘이 된다. 사회 전반적으로 이제 병역거부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 근본적으로 바뀐 건 없다. 2년 전 노회찬, 임종인 의원 대표발의로 대체복무제 입법안이 국회에 상정됐지만 논의는 아직 지지부진이다.   

- 병역거부자들을 지원하는 과정은 어떠한가.

병역거부를 결정하는 과정, 또 수감 기간 중 이것저것 도울 수있는 것들을 돕는다. 최근엔 출소 후 이들이 평화주의자로 떳떳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영역이 됐다. 개인이 감수해야 할 고통이 크기에 운동으로서 병역거부를 하려고 한다면 말리는 편이다. 감옥에서의 1년 6개월이란 겪지 않으면 더 좋은 일이니까.  

-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인가.  

재작년 8월, 9월이었을 거다. 8월에 헌재 결정이 나면서 그 동안 미뤄두던 병역거부자들에 대한 재판이 한꺼번에 잡혀있었다. 그때 줄줄이 판결이 나는 걸 보면서 마음이 너무 안좋았다. 특히 병역거부자들이 가족관계 속에서 힘들어할 때는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너무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 병역거부 운동 과정에서 기억에 나는 이들이 있다면.

병역을 거부한 초등학교 교사만도 2명이나 되는데, 그 중에서 지금 청송 교도소에 수감 중인 최진씨는 가슴 아프게 기억이 난다. 병역거부 선언하고 결혼하셨는데 수감 중에 아이가 하늘나라로 가게 됐다. 옆에서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아팠다. 당사자는 어떤 심정이겠는가.
한 여호와의 증인 신자 분은 60년대 병역거부로 감옥에 계시면서 바로 옆에서 친구가 맞아 죽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자신도 충분히 죽을 수 있겠다 싶으면서도 도저히 마음이 바꿔지지가 않더라고 했다. 인간의 신념이 극한의 상황에서도 그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 아저씨도 너무 감동적이었다.

- 현역병으로 군 휴가를 나와 병역을 거부했던 강철민씨도 인상적이었다.

당시 KNCC에서 일주일 동안 같이 생활 하면서 참 인간적인 친구구나 느꼈다. 말 수도 별로 없고 어리숙했지만 군인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이라크전에 파병하는 부대에 있을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게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현재 현역 전투경찰로 병역을 거부한 친구도 재판 중이다. 누구더라도 개인이 병역을 거부하는 것 자체가 감동스러운 과정이다.

-운동으로서 의미 있지만 병역거부자 당사자에겐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렇다. 누구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하고 너무 이상적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실제 옆에서 보면 그들은 너무나 소박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뿐이다. 20대 초 중반의 너무나 착한 친구들이다.

- 한국에 병역거부로 감옥에 간 사람은 총 얼마나 되나.

정확한 기록은 없다. 여호와의 증인에서 각 개인들로부터 증언 기록을 받은 것만 7천장 정도 된다고 하더라. 일제시대 일본 군대를 거부한 이들에 대한 얘기가 독립운동사에 기록돼 있는 걸 최초로 치고 추정컨대 1만명 가량 되리라 보고 있다.

최정민
최문주기자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최정민씨

- 병역거부 운동이 평화운동으로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그 동안 평화운동이 통일운동의 확장의 의미에서 진행됐다면 90년대 후반부터 평화와 인권이라는 개념이 묶여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 같다. 제도나 구조의 변화로만이 아니라 미시적이고 보다 개인적인, 문화적인 평화운동에 관심에 높아진 거다. 평화운동은 구조를 바꾸는 운동임과 동시에 작은 곳에서부터 출발해야하고 대안을 만들어나가는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의미를 따지자면 병역거부운동이 그런 메시지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 채식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이도 평화운동의 한 방법인가.

병역거부 운동을 하게 되면서 그 방법론에서 온 것이다. 병역거부 운동을 하기 위해선 내 위치에서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채식을 하게 됐다. 주위에 채식을 해 온 친구들도 있었고 마침 내가 먹는 욕심이나 식탐도 별로 없다보니 남들보다 쉽게 하게 된 것 같다.

- 정작 본인은 군 징집 대상이 아닌 ‘여성’이다. 운동을 하면서 편견도 많았을 것 같은데.

군대도 안가는 여자가 ‘병역거부’ 어쩌고 하고 다닌다고 이상하게 보는 시선도 많았다. 하지만 병역거부가 단지 군대에 관한 얘기만은 아니다. 한 개인이 군대를 거부하길 선택한다는 것은, 군사주의에 길들여진 우리 사회의 ‘시스템’을 흔드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 징병이나 군대 관련 활동에서 여성으로서 주어진 경계가 있더라. 여성인 내가 군대에 대해 말하지 못하게 하는 것도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일 거다. 병역거부 운동이 일면서 최근 군대 내 여성 참여나 유연화 등 ‘군대의 여성화’ 방향으로 가는 것 같기도 한데, 이 자체가 탈군사화되는 과정은 아니라고 본다. 근본적으로 한국사회의 탈군사화에 관심을 가져야한다.

-여성이기 때문에 평화운동에 더 적합하다라는 생각을 하나.

여성이기 때문에 유리한 점은 많은 것 같다. 소수자로서의 소외감 때문에 기존 세계에 진입하고자 하는 욕구도 클 수 있지만 뒤집어 보면 소수자로서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도 쉽다.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남에게 폭력적인 위치에 있지도 않고 소수자 감수성에 연대하기도 쉽다. 나도 한때는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감사하다.(^^) 병역거부 운동도 어떻게 보면 여성운동이지 않나 싶다.


인터뷰가 끝난 뒤 최정민씨는 현역 전투경찰로 얼마 전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유정민석씨의 재판이 열리는 곳으로 총총 발걸음을 향했다. 제2회 이우정평화상 시상식은 오는 30일 오후 4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1층 강당에서 열린다.

최문주 기자 cmjoo@ngotimes.net

2006년 5월 26일 오후 18시 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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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 이우정평화상 수상!!

제2회 이우정평화상에 최정민씨 수상
“양심적 병역거부자 인권 성찰 평화운동 새 지평”
2006/5/24
최문주 기자 cmjoo@ngotimes.net
제2회 이우정평화상에 평화운동가 최정민씨(평화인권연대 활동가)가 선정됐다.

이우정 평화상 위원회는 최정민씨를 선정한데 대해 “군사주의 문화의 대안으로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인권문제를 깊이 성찰하고 병역제도의 개선을 위해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위한 활동을 해 평화운동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수상 이유를 밝혔다.

최정민 씨.
<시민의신문DB자료사진> 최문주기자
최정민 씨.

최정민씨는 지난 2001년부터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종교인들의 문제에 국한될 수 있던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문제를 사회 이슈화하고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해왔다.
또 현 병역제도의 개선과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도 도입을 주장하며 국제연대 및 법개정 운동 등을 펼쳐오고 있다.

시상식은 오는 30일 오후 4시 한국교회 100주년 기념관 1층 강당에서 열릴 예정이다.

지난해 제 1회 이우정평화상에는 기지촌 여성들의 인권을 위해 일해 온 유영님 두레방 대표가 선정된 바 있다.

이우정평화상은 여성의 시각으로 민주화운동, 노동· 인권운동, 통일운동 등을 펼쳐 온 고 이우정 선생의 발자취를 기려 지난해 제정됐다.

* 문의: 이우정평화상위원회 02-929-4846

최문주 기자 cmjoo@ngotimes.net
2006년 5월 23일 오후 19시 3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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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즉심 받고 왔어요.

아랫집 식구들 중에서 즉심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죠?

 

저는(참고로 오리) 오늘 즉심을 받고 왔어여.

연행 때 48시간 유치장에서 지낸거 깐다 하더라도 약간을 벌금을 내야 한다는 둥, 벌금 대신 구류형이 나왔다는 둥 얘기를 많이 듣고 갔었는데여...

 

그래서 벌금형이 나오면 대신 구류 살면 안되겠니? 말해볼까, 정식재판을 청구해볼까 생각했었는데여 결과적으로 12만원 벌금, 유치장에서 산 거 하루 4만원씩 쳐서 5월 4일부터 6일까지 3일 해서 걍 털었어요. 긍께 전 완전 다 털고 쫑 난 거예요.

 

약간 허무...

 

9시까지 서부지법으로 출두해서 10시경 즉심 받고... 즉심은 매우 간단. 판사(여성이었음)도 별반 권위적이지 않았고 형사도 잘해줘서 괜찮았어요.

 

암튼 즉심 받을 사람들 참고하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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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선전전 시작~!

매일 같이 서대문에 나오지만 서대문에서 뭔가를 해보긴 처음.

원래 어제부터 시작하려 했으나 뎅의 선고공판 때문에 오늘로 미뤄짐.

 

범대위에서 제작한 10쪽짜리 피켓을 하나은행 앞에 걸어놓고 이뻐서 거져 주기 아까운 유인물들을 나눠주기 시작함. 조은, 오리, 매닉, 오공이 함께 함. 후에 지나가던 구로구가 격려차 방문.

 

점심 때라서 그런지, 주변에 관공서 등 회사가 많아서 그런지 유동인구는 상당히 많음.

그러나 점심먹으러 가기 바쁜 사람들이라 마음의 여유는 없어보임. 유인물이 예뻐서 다들 잘 받아가기는 했으나 과연 읽어볼 것인가 의구심이 듬.

 

<개선을 요하는 점>

1. 10쪽짜리 피켓은 여전히 주변의 관심을 끌었으나 그것만 달랑 있어 너무 썰렁했음.

2. 유동인구는 많았으나 과연 홍보물을 꼼꼼히 볼 것인지는 계속 의심스러움. 안 볼 사람들은 안받아가믄 좋겠구만...

 

<그래서 개선 하기로 한 것>

1. '평화를 택하라' 이미지 배너를 두어개 만들어 10쪽 피켓 근처에 붙여서 주위 시선을 끌기로 함.

2. 지하철 타고 가는 사람들을 공략하기로 함. 출근 시간은 여건 상 힘들고 퇴근 시간에 맞춰 퇴근하러 지하철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유인물을 집중적으로 나눠주기로. 그래서 내일은 일단 동네 선전전을 6시부터 7시까지 진행하고 촛불문화제로 가는 것으로.

3. 내일 한 번 이렇게 시도해보고 다시 평가하기로.

 

다들 낼 보자구요~ 그리고 낼 동네 선전전 하러 가기 전에 '평화를 택하라' 배너 만들기로 했으니 시간 되시는 분들은 먼저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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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저항하는 사람들

“평화의 바람으로 노래여 날아가라”
생명평화 사랑하는 이들 대학로에서 ‘평화난장’ 열어
2006/5/15
김고종호 기자 kkjh@ngotimes.net
전쟁에 저항하고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대학로에 모였다.

13일 오후 1시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앞에서는 '평화난장' 문화제가 열렸다. 이 행사에는 전쟁없는세상, 평화인권연대, 길바닥평화행동, 경계를넘어,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평화바닥, 이라크평화네트워크 등 국내 평화운동단체들과 개인참여자들이 함께 했다.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죽음' 퍼포먼스의 나레이션


평화난장 행사의 첫 도입부는 '죽음' 퍼포먼스였다. 이게 뭘까 궁금했다. 그런데 스피커에서 갑자기 총소리와 폭격소리가 요란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행사 참가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지기 시작했다. 폭격소리는 32초간 계속 됐다.

이윽고 적막이 찾아왔다.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새벽이 밝는 소리 같기도 했고, 생명이 조금씩 꿈틀거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쓰러진 사람들은 일어나지 못했다. 이때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인 '진흙' 씨가 나레이션을 시작했다. 

ㅇㅇㅇㅇ
김고종호기자 

평화난장 참가자들이 '죽음' 퍼포먼스를 펼치고 있다. 총과 폭격소리가 난무한 가운데, 죽어가는 이라크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나레이션이 낭독되었다.


사람들은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린다고 하면, 군복을 입은 사담 후세인의 얼굴이나, 총을 들고 있는 검은 콧수염의 군인들이 떠오른다고 해요.

하지만 이걸 아세요? 이라크에 살고 있는 2천4백만 명 중에서 절반 이상이 15세 미만의 어린이들이라는 것을요. 바로 저와 같은 아이들이요. 저는 열 세 살이니까, 어떤 아이들은 저보다 나이가 좀 많을 수도 있고, 저보다 훨씬 어릴 수도 있고, 남자아이일 수도 있고, 저처럼 붉은 머리가 아니라 갈색 머리일 수도 있을 거에요. 하지만 그 아이들은 바로 저와 너무나 비슷한 모습의 아이들이에요. 저를 한번 보세요. 찬찬히 오랫동안 봐주세요. 여러분이 이라크에 폭탄을 떨어뜨리는 걸 생각했을 때, 여러분 머리 속에 바로 제 모습을 떠올려주세요. 저는 여러분이 죽이려는 바로 그 아이입니다.

제가 운이 좋다면, 1991년 2월 16일 바그다드의 공습 대피소에 숨어 있다가 여러분이 떨어뜨린 스마트 폭탄에 살해당한 3백 명의 아이들처럼 그 자리에서 죽을 거에요. 그날 공습으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고, 벽에 몰려있던 아이들과 어머니들은 형체도 없이 타버렸지요.

하지만 제가 운이 없다면, 바로 이순간 바그다드의 어린이 병원의 '죽음의 병실'에 있는 열 네 살의 알리 파이잘처럼 천천히 죽게 될 거에요. 알리는 걸프전에서 사용한 열화 우라늄탄 때문에 악성 림프종이라는 암에 걸렸대요. 어쩌면 저는 18개월 된 무스타파처럼 '모래파리'라는 기생충이 장기를 갉아먹는 병에 걸려서 손을 써볼 수도 없이, 그저 고통스럽게 죽어갈지도 몰라요.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무스타파는 단돈 25달러밖에 안되는 약만 있으면 완전히 나을 수도 있다고 해요. 하지만 여러분이 이라크에 취한 경제봉쇄 때문에 이라크에는 지금 약이 없어요.

어쩌면 저는 걸프전이 벌어졌던 세 살 때 여러분의 손에 아버지를 잃은 알리처럼 고아가 될 지도 몰라요. 알리는 3년 동안 매일같이 아버지 무덤에 덮인 먼지를 쓸어내리며 아버지를 찾았대요. "아빠, 이제 괜찮아요. 이제 여기서 나오세요. 아빠를 여기에 가둔 사람들은 다 가버렸어요"라고요. 하지만 알리는 틀렸어요. 아버지를 가둔 그 사람들이 다시 돌아올 테니까요. (후략)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져있어 신기하게 쳐다보던 시민들은 나레이션을 들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세상에 평화와 사랑이 가득하기를 바란다는 이라크 아이들의 말에 쓰러져 있던 이들은 다시 일어섰다. 이라크의 아이들도, 그렇게 일어섰으면 좋겠다. /김고종호 기자
김덕진 천주교인권위원회 사무국장은 평택 대추리 상황을 보고하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내 땅에서 살고 싶다는 주민들에게 정부는 논바닥을 파헤치고 한밤중에 집에 들이닥쳐 협박을 일삼고 있다"고 주장하며 "일부 언론은 주민들이 반미세력에게 이용당하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곳 주민들은 당당히 자신들이 미군을 막겠다고 다짐하고 있다"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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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딸과 아들을 데리고 나들이 나온 한 아버지가 평택 대추리 폭력진압과 관련된 피켓을 보고 있다.

작년 10월에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고동주 씨가 발언에 나섰다. 고 씨는 "지난 1월 24일 영등포구치소에 수감되었다가 3월 14일에 보석으로 나왔고 1심에서 징역 1년6개월 받은 후 항소심을 진행 중"이라고 밝히며 "평화로운 삶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고 싶다"는 말로 심경을 전했다. 그는 '노래여 날아가라'라는 제목의 노래를 부르며 세상의 평화를 기원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고동주 씨.
김고종호기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고동주 씨.

 

 

 

 

 

 

 

 

 

 

 

 

 

 

 

 

노래여 날아가라 우리 생명의 힘을 실어 
깊은 겨울 잠을 깨어 노래여 날아가라
노래여 날아가라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땅
평화의 바람으로 노래여 날아가라

양심적 병역거부로 1년 반이라는 기간의 징역을 살고 출소한 임재성 씨는 "5월 15일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날"이라며 "흔히들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소수라고 하지만 외국인들은 한해 1천 명에 이르는 한국 젊은이가 이 이유로 감옥에 간다는 사실에 놀라워한다"고 말했다.

"구속되는 사람에게 촐소인사를 받았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임재성 씨의 출소 첫날
 


임재성 씨가 1년 반이라는 기간을 살고 충주구치소에서 가석방으로 출소한 날은 하필이면 평택에 폭력적인 행정대집행이 이루어지던 지난 4일이었다.

임재성 씨는 출소하던 날 자신의 후원모임 인터넷 클럽에 "덕분에 건강히 돌아왔다"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앞으로 "사람들을 만나 생각을 나누고, 평화운동의 동지들과 계획을 세우고, 황새울의 벼들이 다시 무사하게 자랄 수 있도록 미력을 보태는 일을 하겠다"고 밝혔다.

그가 남긴 글 말미에 달려있는 추신(ps.)은 그의 출소 첫날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드러내준다. 그의 허락을 받아 해당 부분을 올려본다.

양심적 병역거부자 임재성 씨.
김고종호기자 
양심적 병역거부자 임재성 씨.

ps. 어제(5월3일) 징역 안에서 윤 국방장관이 평택관련 성명을 발표한다는 이야기만 어찌어찌해서 들었는데. 5월 4일 새벽, 제가 출소를 준비하던 그 시간에 대대적인 군경합동 강제집행이 이루어졌더군요. 나와서 그 이야기를 듣고, 그리고 같이 활동했던 이들이 모두 대추리에 집결했기에 오늘 못 왔다는 이야기에 어쩌나. 마중 온 이의 전화로 같이 활동하는 이들의 출소 환영인사를 받았는데, 자기는 지금 닭장차 안이라고 하는 이야기에 이 무슨 미친 노릇인가 싶었어요. 지금 연행되어서 구속되는 사람에게 출소인사를 받는 이 상황. 방금 출소한 사람이 방금 연행된 사람에게 다치지는 않았는지 물어보고, 그는 나에게 건강하게 나왔는지 물어보고, 그리고 빨리 보자고. 아니 내가 널 접견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ps2. (고려대) 출교 7인의 이야기는 알았지만. 정식이 이야기는 듣지 못했었어요(여기서 '정식이'는 출교자 중 한명인 조정식 씨를 말함). 이 역시 나와서 듣고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 그 생각이 떠나지가 않아서 낮에 통화를 했지만, 집에서 짐 풀고 저녁 먹고 학교 본관 앞 농성장에 찾아갔지요. 출소자와 출교자의 만남. 정식이는 출소한 날 당일 찾아와 준 내가 반갑고 난 이렇게 본관 앞에서 삭발한 머리로 꿋꿋하게 농성을 책임이지는 정식이가 반갑고. 내일이 5월 5일. 개교기념일 행사로 농성장철거가능성의 분위기 속에서 바쁜 정식이를 붙잡고 이것저것을 꾸역꾸역 물어본 후에야 집에 돌아와서 보니 새벽 1시네요. 타이핑 한 글 정리하고, 이것저것 확인하다보니 3시반. 이것저것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여기까지입니다. /김고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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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이 세상에는 걷어내야 할 철조망들이 너무 많다.

새만금사업 중단 운동을 벌였던 '갯살림' 활동가 이수진 씨는 "방조제로 가로막힌 새만금에 다녀왔는데 바람불면서 모래와 소금기가 날리는 모습이 사막 같더라"라는 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그는 "김제, 부안, 군산 일대 갯벌이 모두 말라서 폐사된 조개들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라며 "이 벌을 어떻게 받으려고 이런 짓을 저질렀는지 모르겠다"라는 말로 분노를 드러냈다. 그는 발언을 마치고 노래 '새만금을 만나면'을 불렀다.

새만금을 만나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있습니다
슬퍼서 아름답고 기뻐서 아름다운
땅과 사람들 함께 해서 더욱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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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대학로를 지나던 한 외국인 커플이 이라크 점령 중단을 요구하는 피켓을 보고 있다.

지은 '경계를넘어' 활동가는 "이라크 전쟁은 너무나 많은 생명을 죽였지만 우리는 지금 이라크에 너무 무관심하다"라며 "어떻게 하면 다시 그 반전의 목소리를 살릴 수 있을까 고민한다"고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는 이어 "미국이 지금 이란을 협박하며 전쟁 위기를 조장하고 있다"라며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란에 직접 가보고 싶다"고 연대의 의지를 분명히 했다.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활동가 미니 씨는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의 땅을 빼앗는 방식이 철조망을 쳐놓고 농사를 못 짓게 하는 것이었다"라며 "노무현 정부도 똑같은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성토했다. 그는 이어 "우리들을 외부세력, 폭도라고 몰고 있는데 진정한 외부세력은 미국 아닌가"라며 "미군은 미국을 지키고 주민은 마을을 지킬 때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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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한 소주업체 홍보요원이 이라크 평화를 기원하며 꽃모양 색지를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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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아이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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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인근 서울대병원에서 잠시 마실나온 아이와 어머니도 붙인다. 이렇게 해서 완성된 글자는 '평화'.

'대항 지구화 행동'에서 활동하고 있는 양군 씨는 오카리나 연주로 지나가는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다. 그가 첫 번째로 선택한 연주곡은 '클레멘타인'. 이는 사랑하는 딸을 잃은 어부의 슬픈 노래다. 사람들의 슬픔을 외면한 채 국익만 강조하는 현실의 슬픔이 느껴지는 듯 했다.

그의 두 번째 연주곡은 드라마 '서동요' OST 수록곡인 '해밀'이었다. '해밀'은 비온 뒤 맑게 갠 하늘을 뜻하는 말. "어려운 상황이 끝나고 맑게 갠 하늘을 보면서 평화롭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염원이 담긴 연주였다. 과연 그러한 평화가 올 수 있을까. 이들처럼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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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이 세상이 비누방울처럼 아름답고 오색찬란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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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고종호기자 
전쟁없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 그 꿈은 언제쯤 이루어질 수 있을까.
2006년 5월 13일 오후 23시 43분에 작성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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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집 입주 1주년 파티하자

아랫집에 3단체가 처음 들어온 지 벌써 1년이 지났다.
작년 5월 5일에 이주했으니까.
 
연행되고, 실려가느라 그리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들 바쁘긴 하지만 5월 13일에 평화난장이 끝나면 밤에 아랫집에 모여서 조촐하게라도 우리 아랫집 1주년 기념 파티라도 하자.
 
다들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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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ot;평택에 다시 갈 것&quot;

“시민저항은 법집행 정당성너머 생존권 문제”
[인터뷰]
4일 연행됐던 오영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ㆍ오리 평화인권연대 활동가

국방부 앞에서 열린 기자회견은 비바람이 몰아친 관계로 10여분 늦게 시작되었다. 우산을 들고 집회시작을 기다리고 있는 오영은 씨(전쟁없는 세상)와 ‘오리’ 평화인권연대 활동가를 즉석 인터뷰했다. 두 사람은 4일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 정문 앞에서 연행, 광명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뒤 나와, 다시 국방부 앞에서 열린 서울대책위 집회에 참석했다.<편집자주>


4일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 앞에서 연행됐던 오영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왼쪽)ㆍ오리 평화인권연대 활동가(오른쪽). 그들은 앞으로 즉심판결을 앞두고 있지만, "평택에 다시 갈 것"이라고 밝혔다.
정용인기자 
4일 평택 대추리 대추분교 앞에서 연행됐던 오영은 전쟁없는세상 활동가(왼쪽)ㆍ'오리' 평화인권연대 활동가(오른쪽). 그들은 앞으로 즉심판결을 앞두고 있지만, "평택에 다시 갈 것"이라고 밝혔다.

- 평택 대추분교에서 연행되었는데 당시 상황은 어땠나.
△오영은: 학교 안이 아니라 정문 근처에서 연행됐기 때문에 유혈진압 당시의 상황은 목격 못했다.
- 전날(3일) 들어갔나.
△오영은, 오리: 그렇다. 대추분교에 대한 대집행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갔다.
- 연행돼선 어떤 조사를 받았나.
△오영은: 어떻게 가게 되었는지, 경위를 진술하라고 했다. 일단 나왔지만 즉심재판에 회부되었다. 공무집행을 방해하러 간 것이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 일부 국민들 사이에서도 그런 시각이 있다.
△오리: 공무집행을 계획적으로 방해했다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법이 국민의 생존권에 우선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일부 전경이 다친 것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생각한다. 하지만 1만 5천명이라는 인원을 동원하여 공권력에 의해 자행된 폭력과 시위대의 저항과정에서 벌어진 폭력이 같은 선상의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앞으로 평택에 또 가볼 생각인가.
△오영은, 오리: 물론이다. 당연히 갈 것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ngo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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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추리로 가자

 
5월 4일 대추리에서 평택의 평화,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맨몸으로 함께 싸우던 아랫집 친구들이 많이 다치고, 연행되었습니다.
오늘 면회와 위문을 갔습니다.
내일도 투쟁이 계속됩니다.
대추리로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대추리로 오기 힘든 분들은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 열릴 예정인 촛불집회에 꼭 참가해주시고, 정부와 보수언론이 '보상'과 '반미단체에 현혹된 주민' 운운하며 호도하고 있는 여론을 바로잡기 위해 노력해주세요.
 
+ 제2의 광주학살 평택 유혈 사태에 대한 규탄 범국민대회
일시: 2006년 5월 6일(토) 오후 2시
장소: 평택 대추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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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과 총은 친구가 될 수 없다

"마지막 싸움이라는 자세로 대추리.도두리 지켜야"
[현장]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다섯번째 서울촛불문화제
김도균 기자   김도균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평택 대추리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고 있는 동요 '노을'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저녁 7시 세종로 동아일보사 앞. 해가 지고 쌀쌀해진 날씨에도 서울지역 청년단체 회원, 대학생, 여성.인권단체 회원들과 시민들이 함께한 이날 문화제는 대추리 일대에 대한 강제집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가운데 나온 군병력 투입계획에 대한 규탄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촛불집회에 참석한 직장인 양승훈(33세. 서울)씨는 이날 '비무장의 군 병력이 투입될 것이고 군-민 충돌은 없을 것'이라는 국방부 입장과 관련해 "정부는 군사시설보호구역으로 설정하겠다는 입장이지만, 주민들이 살고 있는 땅을 빼앗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고, 농지를 군대를 동원해 빼앗는 것 자체가 문제"라며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했다.
  
  대학생 김다미(성신여대. 4학년)양은 "정부가 여론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고 있는 듯 하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들어올 수 있을 것"이라며 "군인들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몇십년을 피땀흘려 일군 땅을 동의도 받지 않고 빼앗겠다는 것이라 무장이든 비무장이든 군 투입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촛불문화제 참석자들 "비무장 병력은 군인 아닌가"
  
  촛불문화제 참석자들은 미리 준비한 나무 등을 재료로 평택 평화를 기원하는 솟대를 만들기도 했고, 평택 거리사진전, 동대문청년회 회원들의 수화공연, 대학생들의 율동공연 등을 통해 서울시민들에게 강제집행을 앞둔 평택의 상황을 알렸다.
  
  2년전 대추리를 처음 방문했다는 천주교인권위원회 김덕진 사무국장. 그는 당시 전략적유연성이 무엇인지 미군기지가 평택으로 옮겨오는 이유가 구체적으로 무엇때문인지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김 사무국장은 "연로한 노인분들이 땅을 지키겠다고 싸우시는 데 함께 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포크레인 밑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일 밖에 없었지만 이번이 마지막 싸움이라는 생각으로 대추리.도두리를 지켜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평택범대위와 함께 매주 촛불문화제를 준비해 오고 있는 평택미군기지확장반대 서울위원회는 대추리 일대에 군 병력이 투입될 경우 즉각 서울 용산 국방부 앞에서 규탄집회를 열고 매일 저녁 광화문에서 촛불집회를 열 계획이다.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27일 저녁 서울 광화문에서는 평택 미군기지확장에 반대하는 다섯번째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2006년04월28일 ⓒ민중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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