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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사랑을 여전히 믿으나, 여자는 더이상 사랑을 믿지 못 한다

란 범주의 영화가 꽤 많을 텐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를 남녀주인공으로해서, 이 범주의 영화가 또 나올 것이라는 소식을 보았다. 황정민과 전도연 주연의 <너는 내 운명>.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둘씩이나 나오니 꼭 보고 싶은데(그러고보니 <마지막늑대>와 <인어공주>를 여태 안보고 있구나), 포스터를 보니 이 둘은 결혼하나보다. 결국 사랑의 줄다리기 로맨틱 코메디인가, 사랑을 믿지 않았던 여자는 남자의 진심에 감동...어쩌구...흥미가 확 떨어진다. (그러나 볼 것이다,아마)

 

이 범주에 속하는 영화 중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봄날은 간다>이다. 말하지 않아도 남자의 가슴과 여자의 가슴이 절절하게 내 가슴을 쳤었다. 남자에겐 눈 앞의 사랑이 해발 구만리의 암벽이었고, 그런 남자를 전형적인 순간으로 바라보는 여자에겐 인생이 이미 해저 구만리의 심연이었다. 그들의 사랑과 인생, 나의 사랑과 인생을 감당 못 하고 나는 영화를 보며 무지하게 울었다.

그 둘이 끝까지 헤어져서 좋았다. 이영애가 우리 다시 만날까?라고 말을 할 수 있게되고, 유지태가 받은 화분을 돌려주고 뒤돌아 갈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인생에 대해 해피엔딩이어서. 

 

<비포 선셋>도 좋았음.

<비포 선라이즈>의 후속편 소식을 들었을땐 소재 하나 잘 뽑아서 9년만에 또 울궈먹는구나, 싶었으나, 막상 보니 후속편 만들기를 아주 잘 했단 생각이 들었다.

전작이 단지 잘 뽑은 '소재'에 대한 영화였다면, 후편은 비로소 관계와 사랑과 인생에 대한 영화다운 영화같다는 느낌. 할 일이라곤 9년만에 만나 서로에게 자기 이야기를 쏟아붓는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하겠지만.

 

그런데 왜 그러냔말이지. 왜 9년 후, 여자의 사랑관은 냉담해지고, 남자의 사랑관은 오히려 더 순애보에 가까워졌느냐고.

그러나 여자는 냉정한 자신의 사랑관은 자신의 아파트로 올라간 후부터 책상서랍에 꾸겨넣어버렸다는 양, 남자 앞에서 그를 처음 만났던 9년 전의 스물셋 소녀가 된다.

(남자야 9년 전의 스물---몇이더라-- 소년이 될 필요가 없다. 그는 지금도 너만을 사랑해, 일편단심 순정이니.)

 

그러니까 이 결말은 사실 논리적이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지만, 그런 게 뭔 상관이냐,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품게한다. 제이(에단 호크)가 비행기 타러 그냥 가버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9년을 기다린 사랑이 이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희망. 그러나 이건 냉정한 사랑관에 수혈을 해보자는 의미까지는 아닐테고, 단지 촉박한 비행기 출발시각 때문에 불안했던 심리가 비행기 따위는 아무렇게나 해버릴 수 있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일 것이다. 즉 사랑보다 상황.

 

9년 전 둘은 알고보니 섹스도 했었다. 그것도 두번이나 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남겠는가. 돌이켜 생각하면, 9년만에 만나는 그 순간 각각의 표정이 정말 전형적이었다. 남자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나, 여자는 태연하다. 나는 처음에 내숭이라고 생각했다. 영화상 셋팅된 내숭이 아니라 동서양 지구 전체를 지배하는 문화에 굴복해온 호흡과 같은 내숭. 남자는 6개월 후 약속된 장소에 가고, 여자는 못 가는 설정처럼. 왜 하필 여자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못 가는가 말이다. 남자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자는 약속장소에 갔다가 맴돌며 밤을 새며 기다리다 실망하는 설정은 왜 아닌가 말이다. 이런 설정은 정말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나 같으면 할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뭔 핑계(스스로에게, 가족에게)를 대서라도 뛰쳐나가 그곳으로 갔을텐데, 나 같은 여자는 어떻게 해석되어야하고 어떻게 인생을 설계해야하는지 어떤 텍스트에도 나오지 않아 가끔 난감하다.

 

하여간에 둘에게 무엇이 남겠는가. 9년 후의 둘의 모습은 그래서 전형적이라고 할 수 밖에. 그러나 그 전형적인 현상 심도깊게 파헤치기를 이 영화에서 기대하기엔 전작의 그림자가 너무도 뚜렷하다. 둘의 끊임없는 수다가 그 경계를 왔다갔다 하면서 이 쪽과 저 쪽의 기대치를 다 만족시키는 것 같았으나, 결국 마지막엔 저 쪽으로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다음 속편엔 그 전형적인 형상을 심도깊게 파헤치는 쪽으로..

 

 


 

에단 호크 얼굴이 뭉개졌으나, 거리 모습이 너무 멋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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