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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Too’, 법 너머의 변화를 위하여

 

텍스트:  [특집] 어떤 미투 # 안팎 / 배경이미지: 시멘트 벽 위에 "#METOO"라는 문구가 여러 글에서 오려 붙인 듯한 낱자들로 적혀 있다.

 

 

나영  / 웹진 <글로컬포인트> 기획편집팀

 

‘#MeToo’(이하 미투)는 2018년 한국 사회를 뒤흔든 핵심 키워드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성폭력 사건에 대한 사회적 고발은 꾸준히 있었고 ‘00계 내 성폭력’ 해시태그를 통한 공론화도 이어져 왔다는 점에서, 한국에서의 미투 운동은 이미 오래전부터 시작되었으며 그 힘으로 2018년에는 본격적으로 정치적 발화의 궤도에 오른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박근혜 탄핵 이후에 들어선 새 정부가 장식 삼아 페미니즘을 자신의 깃털 사이에 대충 꽂아두고 있을 때, 서지현 검사는 국정농단을 보도했던 바로 그 JTBC에 출연해 자신을 드러내고 검찰 내부의 성폭력 문화를 고발했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연이어 김지은 씨가 안희정을, 최영미 시인은 고은을 고발했다. 즉, 이들의 미투는 개인적인 피해 호소나 폭로의 차원을 넘어 정치사회적 패러다임 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디어는 그 의미를 “나도 고발한다”가 아닌 “나도 당했다”로 해석하며 사건을 개별화, 개인화해 나갔다. 고발이 스캔들이 되고, 사건이 법정으로 집중되어 오직 ‘무죄냐 유죄냐’만이 사건의 의미로 남게 될수록 그 속에서 정치적 발화의 의미는 조금씩 탈각되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주지해야 한다.

 

한편 문학계, 연극계, 영화계, 대학, 군대, 체육계 등 사회 각계의 영역에서도 고발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뿐만 아니라 이주여성들도 국회에서 별도의 기자회견을 열었고, 운동사회 내 성폭력이나 성소수자 간 성폭력에 대한 고발도 이어졌다. 미투로 고발된 모든 사례들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위치한 각 사회 영역의 특수한 조건과 맥락들 속에서 발생한 일이었다. 개인과 극단의 생존 자체가 연출가 한 명에게 달려있는 특수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연극계의 미투를 이해할 수 없고, 해군이라는 조직의 특수성과 함정 내 구조, 군에서의 여성 성소수자라는 위치가 어떠한 조건을 만드는 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해군 내 성폭력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이주여성이나 성소수자는 더 복합적인 지형들이 얽혀있다. 그런데 이 이야기들은 지금 어디로 흩어졌을까. 누군가는 “가해자가 유명하지 않아서 우리의 이야기는 미투가 되지 못한다”고 아이러니한 심정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미투로 고발된 각 현장의 조건과 맥락은 사라지고 가해자 개인에게 모든 시선이 집중되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어떤 지점에서 도돌이표처럼 이 미투 운동의 정치사회적 효과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한계가 여전히 강하게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 한계는 그 동안 반성폭력 운동이 계속해서 넘어서고자 했던 지점의 연장선상에 있다.

구조를 건드리지 않으면 광장은 다시 좁아질 수밖에 없다. 개인의 용기에 기대는 미투가 아니라 구조를 흔드는 미투가 되기 위해, 2018년의 미투는 이제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이어져야 할까. 이 글에서는 2018년의 미투를 돌아보며 그 방향을 찾아보고자 한다.

 

죽일 놈, 재수없는 놈, 억울한 놈

 

서지현 검사의 고발 이후 2018년 국회에서는 1월부터 3월까지만 90여 건에 달하는 성폭력 관련 법안이 발의되었다. 이 중 39건이 가해자 처벌 방지에 관한 법안, 38건이 피해자에 대한 불이익을 방지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그러나 처벌 강화가 실질적으로 성폭력을 줄이는 데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미 이전 5년의 통계 추이만 보아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2013년 조두순 사건을 계기로 성범죄 처벌이 강화되었지만 이후 성범죄 발생률은 오히려 증가하고, 기소율은 감소해왔기 때문이다. 2016년 3월 한겨레신문이 대검찰청 범죄분석 자료를 바탕으로 보도한 바에 따르면 2014년 성폭력 범죄 인구는 10만명 당 58.2건으로 10년 전 23.7건에 비해 145.5%나 증가했다. 뿐만 아니라, 살인, 강도, 방화 등 다른 강력범죄는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성폭력 범죄는 약 2.5배나 증가하였으며, 특히 몰래카메라를 이용한 범죄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보도하고 있다.1 한편, 2017년 이재정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통해 공개한 바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17년 7월까지 13만 건의 성범죄가 발생하였고 기소율은 2013년 76.9%에서 2014년 80.5%로 잠시 높아졌다가 이후 계속 감소하여 2017년엔 76,5%로 2013년보다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2 반면,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검사의 성추행 사실을 고발하면서 “명예훼손으로 고소된다면 ‘사실 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에 대해 위헌법률심판 소송을 하겠다”고 굳이 언급할 정도로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무고죄 고소는 증가했다.

 

2018년의 #미투 운동이 이러한 현실 속에서 터져 나왔다는 사실은 정작 중요한 문제가 법적 처벌 수위에 있기 보다는 법으로 다룰 수 없는 부분, 즉 점점 심각해져 온 차별적 구조의 모순이 폭발한 데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는 성폭력 사건이 매번 조두순 사건과 같은 심각한 강력범죄의 문제로 상징화되고 그 때마다 ‘강력한 법적 처벌’만을 대책으로 제시한 결과, 그보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며 일상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구조적 문제로서 제대로 다뤄지지 않고 개인 간의 문제로만 방치되어 왔다. 가해자가 괴물로 그려질수록 일상의 성폭력은 관심에서 멀어져 온 것이다.

또한 구조적 맥락보다는 가해자, 피해자의 개인적인 특성과 가해 행위의 수위, 피해자의 당시 반응 등에만 주목하다 보니 성폭력 사건에 대한 대중의 인식 또한 가해자와 피해자 개인에 대한 평가를 중심으로 구분되곤 한다. 이를테면, 가해자가 어떠한 의심도 없이 ‘죽일 놈’으로 명백히 인식되기 위해서는 가해자가 심각한 상해나 사망에 이를 정도의 폭력을 행했거나, 피해자가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고, 미성년자이거나, 판단과 저항을 전혀 할 수 없었음을 강조하여 입증해야 한다. 그 밖의 경우에는, 일례로 안희정 전 도지사의 경우 기껏해야 ‘재수없는 놈’ 정도로 취급되고, 양예원 씨가 고발한 스튜디오 실장처럼 심지어 ‘억울한 놈’이 되기도 한다. 어느덧 가해자의 행위가 아니라 피해자의 반응을 중심으로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러한 판단은 법정에서도 여전히 그대로 반복되고 있다.

 

법이 없어서 문제인가

 

서울서부지법 조병구 판사는 안희정 사건 1심에서 위력에 의한 간음과 추행을 인정하지 않고 무죄 판결을 내리면서 ‘비동의 간음죄’가 없어 현행법으로는 그를 처벌할 수 없다고 했다. 성소수자 여군에 대한 해군 간부들의 성폭력 사건 항소심을 담당한 고등군사법원은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내지는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의 성립 여부는 별론으로 하고” 증거가 불충분하여 강제추행과 강간치상은 인정되지 않는다면서 가해자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안희정 1심 판결 이후 한동안 ‘비동의 간음죄’의 도입 필요성에 대해 논의가 있었으나 두 판결에서 보다시피 문제는 법이 없어서 이런 판결이 나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법원은 이미 1998년에 업무상 위력에 의한 추행죄에 대해 “피해자의 의사, 성별,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그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 구체적 행위태양, 주위의 객관적 상황과 그 시대의 성적 도덕관념 등을 고려하여” 판단해야 한다고 명시(대법원 1998.1.23. 선고 97도2506 판결)함으로써 폭행이나 협박 없이도 유무형의 위력 행사를 판단할 수 있음을 밝혔다. 위력을 이러한 전제 하에 판단한다면 피해자가 당시 적극적인 거절의사를 밝히지 못했던 상황이라 해도 이를 기준으로 충분히 가해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대법원은 2018년 10월 판결(대법원 2018.10.25. 선고 2018도7709 판결)에서도 “법원이 성폭행이나 성희롱 사건의 심리를 할 때에는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한다”면서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가해자와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고 판시했다. 결국 적용할 수 있는 법이 없어서가 아니라 미리 가해사실을 기각하는 결론을 내려놓고 법리 해석을 끼워 맞추는 재판부 때문에 오히려 피해자의 입증 부담이 가중되고 가해자에게는 무죄판결이 내려지는 결과가 반복되는 것이다. 3

 

성폭력 판단, 동의,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잘못된 전제들

 

위력에 의한 성폭력 사건에서마저 여전히 폭행과 협박의 여부가 판단의 기준이 되는 최협의설이 작동하고 있는 것은 피해자에 의해 고발된 가해행위를 가해사실로 판단하기에 앞서 개인 간의 성적 관계로 전제하고 구성요건을 맞춰나가는 식의 재판 관행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성인 남녀 간에 성적 관계가 있었다면 모종의 성적 욕구나 이를 유발하는 행위가 상호간에 존재했을 것이라는 전제를 두고 사건을 판단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전제는 합의된 성관계와 성폭력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중요한 원인일 뿐만 아니라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내포하고 있다. 


첫째, 남녀 사이에는 당연히 성애적 감정이 유발된다고 전제하며, 성적 행위와 성적 욕구를 당연한 인과로 전제한다. 성적행위가 있었다고 해도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도 아무런 성애적 감정이 없었을 수 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성애적 감정을 느껴서 성폭력을 저지르는 것이 아니며, 성폭력으로서의 성적 행위는 단순히 성적 욕구 때문이 아니라 피해자에 대한 지배 욕구, 자신의 권력과 위치를 확인하고자 하는 욕구, 다른 욕구 불만이나 불안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 등 다양한 욕구와 의도에 의해 벌어진다. 그러나 명시적인 폭행과 협박이 확인되지 않는 경우 이러한 다양한 지점들이 적극적으로 검토되지 않음으로써 ‘성적 욕구를 유발했을만한 정황’만을 전제로 사건을 판단하게 된다. 

 

이러한 판단은 동성 간 성폭력을 다룰 때에도 문제가 된다. ‘남녀 사이가 아님에도’ 성행위가 이루어졌다면 이는 가해자의 동성애적 욕망 때문이거나, 피해자도 이에 동의했기 때문이라는 전제 하에 사건에 대한 판단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현주 감독 사건에서 판사가 “혹시라도 무죄를 선고하게 되면 피해자를 동성애자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오히려 피해자에게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은 이러한 문제를 명확히 보여준다. 결국 피해자는 동성애자여도 동성애자임을 말할 수 없고, 동성애자가 아니어도 동성애자라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입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둘째, 가해자를 성적 행위의 주체로 판단하는 반면, 피해자는 그에 대한 의사표현의 주체로만 판단한다. 해당 사건이 성폭력인지 여부를 판단할 때 상호 간의 합의 사실을 확인하는 질문들이 피해자에게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어느 덧 가해자의 행위는 마치 배경처럼 나열되고 심문의 방향은 피해자를 향하게 되어 있다. 더구나 이와 같은 관행은 피해자의 의사표현을 판단 능력의 문제와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미성년자, 장애인 등의 경우 판단과 의사표현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존재로 치부하는 한편, 다른 피해자의 경우에는 판단 능력이 있음에도 이를 행사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전형적인 피해자상을 강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위에서 언급한 문제들로 인해 피해자의 동의 여부나 성적 자기결정권이 어려운 딜레마가 된다. “YES MEANS YES, NO MEANS NO”가 마치 명확한 대안인 것처럼 이야기 되지만, 결국 무엇이 동의를 강제하는가의 문제를 떼어놓고는 ‘동의’와 ‘자기결정’을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하더라도 위와 같은 관행이 이어지는 한 피해자 입장에서의 판단을 기대하기가 어려운 이유이다. 


가해자가 일방적으로 위력을 행사할 수 있는 관계가 분명한 안희정 사건이나 해군 성폭력 사건에서조차 피해가 반복되었다는 사실을 도리어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하는데 과연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된다고 해서 “동의하지 않았는데 왜 가만히 있었느냐”는 질문이 멈춰지게 될까? 결국 법적으로 범죄의 구성요건만을 두고 이루어지는 논의는 한계가 분명할 수밖에 없다. 

 

잘 해내야 했던 피해자들과 변하지 않은 구조, 
더 이상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루지 말자

 

이제 성폭력을 정치사회적 맥락으로부터 탈각시키는 층위를 다각도로 살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루는 구도를 깨야 한다. 성폭력을 ‘성의 문제’로만 다룰 때, 성폭력은 폭력이 아닌 욕망의 문제가 되거나, 다른 폭력의 구조와 분리되어 상상되고, 동시에 다른 폭력보다 과도하게 상상된다. 그 결과, 조직 내 위계 구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일상적 폭력을 견디는 것은 공감하고 이해하지만 성폭력을 견딘다는 것은 이해하지 못할 일로 여겨진다. 고발의 언어를 피해의 언어, 공포의 현실로만 형상화 할수록 정치사회적 주체로서 고발에 나선 이들은 욕망의 대상, 피해자로만 재현되고 가해자는 사이코, 변태, 괴물이거나 억울한 욕망의 주체로 남는다. 섹슈얼리티를 자원으로 이용한 이들과 무고하게 성을 침해당한 이들로 피해자의 유형이 구분된다. 


이주여성들은 미투를 통해 생산직 남성 노동자 중심의 이주노동 구조, 한국인 부계 혈통을 중심으로 거주 여건이 귀속되게 만드는 한국의 비자제도가 이주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배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고발했다. 연극계 미투에서는 지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연출자 한 명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연극계의 열악한 구조가 연극계 성폭력의 구조적 원인임을 짚었다. 현재 진행 중인 스쿨미투에서는 교사, 또래 학생에 의한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사립학교의 구조적 문제, 나아가 교육 현실의 문제임을 드러내고 있다. 즉, 성-섹스, 젠더, 섹슈얼리티-만이 아니라 이에 연결된 다른 구조들을 건드려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동의도, 성적 자기결정권도 개인의 문제로만 돌아오게 된다. 어떻게 보면 새삼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다. 성폭력 사건은 개별 사건이 아니라 그에 연결된 수많은 구조적 연결고리들을 보아야만, ‘진짜 문제’가 보인다. 그럼에도 사건이 발생하면 늘 대증적 해결책으로 개별 사건에만 집중되거나 법적 논의로만 귀결되고 만다는 것이 반복되어 온 문제이다. 미투 운동이 지닌 중요한 의의는 바로 이런 지점들을 드러냈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2018년에는 이를 정치사회적 의제로서 제대로 살려내지 못했다. 우리가 미투 운동을 한 단계 진전시키고자 한다면 이제 이러한 변화를 위한 움직임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성폭력은 노동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는 점을 짚고 싶다. 여기서 ‘노동의 문제’라는 것은 1차적으로는 임금노동에서의 문제이고, 더 나아가서는 노동에 대한 개념과 전제까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금노동에서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성차별적 고용과 노동구조가 어떻게 성폭력의 구조를 유지시키는지 여러 차례 다루어져 왔기에 여기서 굳이 반복해 짚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글에서 강조하여 짚고 싶은 것은 임금노동 구조만을 다루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미투 운동에서 고발자로 목소리를 낸 많은 여성들이 “잘 해내야 했다”, “잘 해내야 했기에 쉽게 말할 수 없었다”고 이야기했다. 임금노동 구조 안에서는 주어진 위치가 좁고, 그 아슬아슬한 벼랑길에서 떨어지는 것은 곧 ‘여자라서’라는 이유로 돌아올 차별적 시선과 동시에, ‘여자라서’ 다시 기어오르기도 벅찬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는 걸 의미할 때, “NO”를 말할 수 없는 구조는 지속될 것이다. 그런데 이 구조의 원인은 임금노동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임금노동에서의 성차별을 유지시키는 구조는 여성들을 1차적으로 가사, 돌봄, 임신출산 영역에 묶어두려는 구조, 동시에, 바로 그 이유로 여성들에게 불안정, 계약직 노동을 요구하는 구조에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가정의 영역으로 돌아갈 것으로 전제되는 여성들, 직장에서도 가정에서의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여성들은 직장에서 늘 임시의 위치로 여겨진다. 성폭력은 이 취약한 위치를 이용하여 가해지는 폭력이다. 가사노동, 돌봄노동, 임신출산 노동이 한 사람의 일생에서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노동의 영역이자, 임금노동과의 연결선상에 있는 노동, 중요한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되어야 임금노동에서의 위치도 달라질 것이다. 먼 이야기인 것 같지만 이러한 사회적 인식을 만드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정부가 당장 시작할 수 있는 일이다. #MeToo에 대한 응답은 개인들의 #withyou에만 달려있지 않다는 사실을, 2019년엔 우리가 다른 행보로 확장해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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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겨레, “박대통령 “4대악 척결”에도 성범죄 급증 여성들 ‘범죄 피해 불안’ 더 커졌다“, 엄지원 기자, 2016.3.7.텍스트로 돌아가기
  2. 여성신문, “2013년 이후 성범죄 13만 5000건...피해자 90% 여성”, 이하나 기자, 2017.9.1.텍스트로 돌아가기
  3. 다행히 안희정 사건 2심 재판부는 "피고인은 피해자가 지방별정직 공무원이라는 신분상 특징과 비서라는 관계 때문에 피고인의 지시를 순종해야 하고 내부적 사정을 쉽게 드러낼 수 없는 취약한 처지를 이용해 범행을 저질러 피해자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현저히 침해했다"는 내용으로 가해자의 행위가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성적 자기결정권을 침해한 성폭력 행위임을 분명하게 확인했다. 텍스트로 돌아가기